2024-08-27

제암리 학살 사건 - 위키백과, 提岩里教会事件

제암리 학살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암리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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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제암리감리교회 사건"으로 부르며, 줄여서 '제암리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사건 지역을 사적 제299호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으로 지정했다.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제암리 사건을 감리교회를 넘어선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저항운동이었고, 이에 대한 일제의 계획적 만행으로 본다.[1][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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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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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1일 정오 경, 발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발안 장날 시위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당시 일제 측 기록과 발안 장날에 대한 실증적 고찰에 따라 3월 31일로 봄.)

발안 장날은 5일과 10일에 여는 5일장으로 음력으로 개시되었으며 현재와 같이 양력장이 된 것은 1937년 이후이다. 이러한 학술적 진척에도 불구하고 당시 역사가 통일되고 정리되지 않고 있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와 권사 및 교인과 함께 준비하였다. 3월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이정근과 그의 동생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감리교회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때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업자 사사카(佐々坂) 등 43명이 3리 밖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 4월 2일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이와오(長谷部巖) 대장으로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었으며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 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주로 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감리교회에서는 문맹퇴치 및 신문화 운동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동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저변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이다.
  •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3]

  •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 군인들이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
  •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시위로 인해 수촌리 감리교회와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코필드 박사(석호필)가 현장을 찾아가던 중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리게 되었다.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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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문 못질설 : 한국에서는 한때 교회에 가둬둔 뒤 문에 못질하여 막았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창문조차 총으로 들이대고 있었음에도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못질은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았음도 사실이다.
  • 우발사건설 :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
  •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 : 1919년 4월 17일 수의사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과 자동차로 수촌리 학살 사건의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4월 18일 스코필드는 홀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여러 차례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4]
  • 아사히(朝日)신문 2007년 2월 28일자 보도 - 제암리 학살 사건 은폐 : 사건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대장의 일기 발견.[5][6]

일본에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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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에 일본인 기독교 신자 10여명이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방문하여 학살 사건에 사죄를 하였고, 일본 정치인들은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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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저,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년 8월 9일.

아래 두 논문은 위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위 책의 아래 글에 사건의 주범인 아리타 중위의 군사재판 판결문과 사건 처리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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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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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덕주, 김형석. "3.1운동과 제암리 사건". 《한국기독교와 역사》. (7). 1997, 39-73.
  2.  조소영. 문재인 "3.1운동 기념식, 제암리서 하면 좋겠다". 뉴스1. 2015년 8월 11일.
  3.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 역사적 배경 / 발단 및 역사성”. 2006년 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5월 7일에 확인함.
  4.  “독립만세” 3·1 운동의 조력자…푸른 눈의 이방인들, KBS 뉴스, 2018.03.01
  5.  한겨레신문 - 일제 ‘제암리 학살’ 은폐공작 드러나 : 그는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보다 간단하지만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의 입장은 더욱 불이익”하기 때문에 “간부와 협의해서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회의를 끝냈다.”라고 적었다.
  6.  중앙일보 - 일제 제암리학살 은폐 입증 조선군사령관 일기 발견
  7.  “일본 기독교 신자 10여 명, 제암교회 찾아 '사죄'. KBS. 2019년 2월 27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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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岩里教会事件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提岩里教会事件(ていがんりきょうかいじけん)[1]は、1919年4月15日日本統治下朝鮮京畿道水原郡郷南面提岩里(現在の華城市郷南邑提岩里)で、三・一独立運動の最中に生じた事件。暴動を指揮した29名の朝鮮人が殺害された。

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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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独立運動の余波を受けて、全羅道を除く朝鮮半島全土で朝鮮人による暴動(朝鮮騒乱)が発生した[2]。4月上旬には京畿道でも暴動が発生し、憲兵駐在所・警察署のみならず民家に対しても破壊や放火が行われ、日本人が避難する事態となっていた。4月3日、2千余名の棍棒を携えた群衆が長安、雨汀の事務所を襲撃して破壊活動が行われた。そのまま、群衆は花樹里駐在所を襲撃し、放火により全焼させた。駐在していた川端豊太郎巡査は取り囲まれて棍棒などで撲殺された後、死体を損壊(歯を抜き、鼻耳を切り、関節を折り[3]。)された[4]。その後、暴徒は發安里で日本人を殺戮して市場を壊滅させた。この事態に日本人・朝鮮人も共に戦慄し、朝鮮人の警察官が続々と職を辞したため無政府状態となり、日本人は男性9名が自警のために残留し、40名の老人・夫人は三渓里に避難させられた。

4月13日に朝鮮軍歩兵第40旅団から暴徒鎮圧の命令を受けた有田俊夫中尉が指揮する歩兵11人が発安(郷南面)に到着した。有田中尉は提岩里の住民から暴動を起こしているのはキリスト教徒、天道教徒であるとして、その殲滅を要請され[5]、朝鮮軍からの暴動鎮圧の指令を匪賊討伐と解して、首謀者たちの巣窟を滅ぼすことで禍根を断つことを決心し、暴動の首謀者である天道教キリスト教の信者の18歳以上50歳以下の男性20余名と妻女1名を集めて射殺または刺殺した。その後、日本人惨殺に対する報復心を持つ兵士が教会を焼き払った[6]。この時、民家に延焼したことにより、28戸が焼失し、民間人女性1名が焼死した[2][3]

2007年に岩波書店から刊行された、当時の朝鮮軍司令官だった宇都宮太郎の日記(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 陸軍大将宇都宮太郎日記)によれば、「事実を事実として処分すれば尤も単簡なれども、斯くては左らぬだに毒筆を揮いつつある外国人等に虐殺、放火を自認することと為り、帝国の立場は甚しく不利益と為り、一面には鮮内の暴民を増長せしめ、且つ鎮圧に従事しつつある将卒に疑惑の念を生じさせむるの不利を以て、抵抗したるを以て殺戮したるものとして虐殺放火等は認めざることに決し、夜十二時散会す。」[7]と虐殺は認めない方針を決めたが、翌日に朝鮮総督長谷川好道が虐殺を認めて過失として行政処分にするように指示したため、軍関係者は協議の末に有田中尉に30日間重謹慎処分を下した[8]が、その後の軍法会議による判決(1919年8月21日付)で殺人・放火に関して無罪が確定した。

長谷川朝鮮総督が「堤岩里付近ノ状況ハ、京城在住ノ外国人ニ宣伝セラレ、英国総領事代理、米国領事、及ビ外国宣教師、一部現状ヲ視察シタリ。御参考迄。」と原敬総理大臣に報告し[9]、宇都宮が「毒筆を揮いつつある外国人等に虐殺、放火を自認することと為り」と懸念していたとおり、在京城カナダ人宣教師フランク・ウィリアム・スコフィールドAP通信に特別採用されたアルバート・テイラーたちにより、事件は日本軍による虐殺事件として世界中に報道された[10][11][12]。米国領事や英国領事らも本国に事件を報告すると日本批判の世論が高まり、米英から朝鮮統治の改善が日本に要請され、日本の朝鮮統治が「武断政治」から「文化政治」に転換する遠因となった[13]

事件の詳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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堤岩里3・1運動殉国記念館が保管する証言資料を総合して事件の過程を再構成すると、次のようになる(ただし、時間と名前など細部において誤りがある可能性がある)。

  1. 有田中尉は、佐坂と朝鮮人巡査補趙熙彰に命じて、堤岩里住民のうち成人男性(15歳以上)を教会に集めた。
  2. 予め名簿を持っていたらしく、来ない人は探して呼んで来た。
  3. 有田中尉が、集まった人々に「キリスト教の教え」について問うたところ、安(安鍾厚と推定)という信者代表が答えた。
  4. 有田中尉は教会の外に出るやいなや射撃命令を下し、これに応じて教会堂を包囲していた軍人たちが窓から中を射撃した。
  5. 射撃が終わった後、教会にわらと石油をまいて火をつけた。
  6. 風が強く吹き、火は教会下手の家に燃え移り、上手の家は軍人たちが回って火を放った。
  7. 教会に火がつくと、洪(洪淳晋と推定)と「郷南面に通っていた人(安相鎔と推定)」及び「ノギョンテ」が脱出しようとしたが、洪は逃亡中に射殺され、「郷南面に通っていた人」は、家の中に避難したが発覚し殺害され、ノギョンテは山に逃げて生き残った。
  8. 脱出したところを射殺されたらしき死体が、二つ三つ教会の外にあった。
  9. 村で出火したのを見て駆けつけた姜泰成の妻(19歳)が、軍人に殺害された。
  10. 洪氏(洪元植)の妻も軍人の銃を受けて死んだ。
  11. 軍人たちは古洲里村に行き、天道教信者六人を銃殺した。

韓国の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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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年3月1日、文在寅大統領は、三・一運動記念式の演説で、事件について「京畿道・華城の提岩里でも教会に住民を閉じ込めて火を放ち、幼い子どもも含めて29人を虐殺するという蛮行が起きました。しかし、それとは対照的に朝鮮人の攻撃で死亡した日本の民間人はただの一人もいませんでした」と述べた[14]

関連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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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総督府資料「騒密770号,提岩里騒擾事件ニ関スル報告(通牒)」大正8年(1919年)4月24日
  • 英字新聞ジャパン・アドバタイザー」1919年4月27日号
  • 「福音時報」1919年5月, 1244〜1246号
  • 『三・一独立運動と堤岩里教会事件』韓国基督教歴史研究所編著 信長正義訳 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出版部, 1998年5月
  • 『三・一独立運動と堤岩里事件』小笠原亮一, 姜信範, 飯沼二郎, 李仁夏, 池明観, 土肥肥夫, 澤正彦, 飯島信 [著および述], 金明淑, 金性済 [訳] 日本基督教団出版, 1989年2月
  • 『三・一運動(現代史資料 25-26.朝鮮)』姜徳相編 1-2 みすず書房, 1966-1967, 2冊

脚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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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このタイトルについては(李徳周、常石希望「翻訳 李徳周「初期韓国教会の民族教会的性格」(2)(2/3)」『言語と文化 : 愛知大学語学教育研究室紀要』第44巻第17号、愛知大学語学教育研究室、2007年7月、121-144頁、CRID 1050564287671954048ISSN 13451642)をもとに選定した。
  2. a b 国立公文書館 レファレンスコード:A04017275800 「単行書・八年陸乙七一・朝鮮騒擾経過概要」其三 四月中ニ於ケル騒擾ノ概要
  3. a b 防衛省防衛研究所 有田中尉に係る裁判宣告の件 レファレンスコード:C03022465000 1143ページ
  4. ^ 神戸大学経済経営研究所 新聞記事文庫 政治(16-125) 大阪朝日新聞 1919.8.10 (大正8)[1] 「同里警察官駐在所附近に於て合して二千余の暴民一団となり勢猛に駐在所を殺倒し独立万歳を高叫しつつ投石し若くは棒を振って狂暴を逞しうし遂に火を放ちて同所建物を全焼ぜしめ且つ同所在勤巡査川端豊太郎が防止の術尽き逃走せるを追跡し駐在所を距る東北方約八十間の地点に包囲して棍棒及び石を以て乱打惨殺したるものなり」
  5. ^ 第096回国会 外務委員会 第24号 東中光雄議員の照会「京城発 大正八年四月廿二日後一、五〇 本局着 同後六、三一 長谷川総督から原総理大臣(拓殖局長官)宛の文書」を参照 [2] 「堤岩里ノ殺生及ビ放火ハ嚮ニ発安場ニ於テ同地小学校ヲ焼キ暴行ヲ為シタルモノハ堤岩里基督天道両教徒ナル旨同村内地民ヨリ訴ニ接シ且彼等ヲ掃滅セラレタシト部落民ノ懇請ヲ受ケ前述ノ処置ニ出デタルニ却テ反抗シタルタメ斯ノ如キ行為ニ出デタルモノノ如シ」
  6. ^ 第096回国会 外務委員会 第24号 東中光雄議員の照会「京城発 大正八年四月廿二日後一、五〇 本局着 同後六、三一 長谷川総督から原総理大臣(拓殖局長官)宛の文書」を参照 [3] 「前述検挙班コウナコウ地方ニ於テ火災ヲ生セシハ取調ノ結果一部ハ夜間混雑ノ結果失火シタルモノナルモ他ノ一部ハ暴民ノ獰悪ナル行為殊ニ巡査二名ノ惨殺ニ報復心ヲ起シ居タル検挙班員ノ放火ナル事ヲ確メタ」
  7. ^ 宇都宮太郎日記 3巻 岩波書店 (四月十八日)
  8. ^ 宇都宮太郎日記 3巻 岩波書店 (四月十九日)「然るに午后に至り、総督より再び会ひ度しとのことに往訪せしに、今周知の事を全部否認するは却で不利なる無らん乎、其幾分は過失を認めて行政処分にても為し置くこと得策にはあらざる乎とのことに、此夜大野をして前決心を遂行し度内意にて明日往訪せんとするの意あることを内談せしめしに、総督は矢張行政処分丈は為し置を可とする旨復命せし故、来合せたる児島中将、大野、山本等と相談中、浄法寺、内野も来会し、虐殺放火は否認し、其鎮圧の方法手段に適当ならざる所ありとして三十日間の重謹慎を命ずることに略決心、散会せしは午前一時近かりし。」
  9. ^ 第096回国会 外務委員会 第24号 東中光雄議員の照会「京城発 大正八年四月廿二日後一、五〇 本局着 同後六、三一 長谷川総督から原総理大臣(拓殖局長官)宛の文書」を参照 [4]
  10. ^ 長田彰文『日本の朝鮮統治と国際関係―朝鮮独立運動とアメリカ 1910-1922』平凡社、2005年2月。
  11. ^ 2013年12月27日14時56分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12. ^ 中央日報 2016年02月27日 三・一独立運動を伝えたAP特派員の邸宅「ディルクシャ」復元へ[5]
  13. ^ 立命館法学 1999年3号(265号) 140頁 英米からみた日本の朝鮮支配(1)- 戦間期領事報告を中心に -梶居 佳広 [6]
  14. ^ <三・一運動記念式の文大統領演説全文>”. 聯合ニュース (2019年3月1日). 2019年4月19日閲覧。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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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公文書館 https://www.jacar.go.jp/
レファレンスコード:C03022465000
  • 朝鮮騒擾経過概要
国立公文書館 https://www.jacar.go.jp/
レファレンスコード:A0401727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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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교회 사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제암리 교회 사건 (테이간리 쿄카이지켄) [ 1 ] 은 1919년 4월 15일 일본 통치하의 조선 경기 수원 군 향남면 제암리(현재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에서 삼·일독립운동 중에 생긴 사건. 폭동 을 지휘한 29명의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개요

편집 ]

삼·일 독립운동 의 여파를 받아 전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조선인에 의한 폭동(조선소란)이 발생했다 [ 2 ] . 4월 상순에는 경기도 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헌병 주재소· 경찰서 뿐만 아니라 민가에 대해서도 파괴나 방화가 이루어져 일본인이 피난하는 사태가 되고 있었다. 4월 3일, 2천여명의 봉을 들고 있는 군중이 장안, 비방의 사무소를 습격해 파괴 활동을 했다. 그대로 군중은 하나키리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에 의해 전소시켰다. 주재하고 있던 가와바타 토요타로 순사는 둘러싸여 기봉 등으로 박살된 후, 시체를 손괴(치아를 뽑아, 코귀를 잘라, 관절을 접어 3 ] . ) 되었다 [ 4 ] . 그 후 폭도는 료안리에서 일본인을 살육해 시장을 괴멸시켰다. 이 사태에 일본인·조선인도 함께 전율하고, 조선인의 경찰관이 잇달아 직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무정부 상태가 되어, 일본인은 남성 9명이 자경을 위해 잔류해, 40명의 노인·부인은 삼계리로 피난당했다.

4월 13일에 조선군 보병 제40 여단으로부터 폭도 진압의 명령을 받은 아리타 슌오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향남면)에 도착했다. 아리타 나카위는 제암리의 주민으로부터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기독교도 , 천도교도로서 그 섬멸을 요청받고 [ 5 ] 조선군으로부터의 폭동진압의 지령을 장적토벌 로 풀어 주모수 사람들의 굴을 멸망시켜 옥근을 끊기로 결심하고 폭동의 수모자인 천도교 , 기독교 신자의 18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성 20여명과 처녀 1명을 모아 사살 또는 자살했다. 그 후, 일본인 참살에 대한 보복심을 가진 병사가 교회를 불태웠다 [ 6 ] . 이때 민가로 연소함에 따라 28호가 소실되어 민간인 여성 1명이 소사했다 [ 2 [ 3 ] .

2007년에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된 당시 조선군 사령관 이었던 우쓰 노미야 타로의 일기 (일본 육군과 아시아 정책 , 이러고서는 왼쪽 못에 독필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 등에 학살 , 방화를 자인하는 것에 대해, 제국의 입장은 엄청 불이익이기 때문에, 일면에는 선내의 폭민 를 증대시키고, 또한 진압에 종사하고 있는 장졸에 의혹의 염려를 초래할 수 있는 불리를 해서 저항하는 것을 하여 살육하는 것으로서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코 밤 12시 산회한다 ' [ 7 ] 과 학살은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결정했지만, 다음날 조선총독 의 하세가와 호도가 학살을 인정하고 과실로 행정처분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군 관계자는 협의 끝에 아리타 나카위 에 30일간 중근신처분을 내렸다 [ 8 ] 가, 그 후의 군법회의에 의한 판결(1919년 8월 21일자)에서 살인·방화에 관하여 무죄가 확정되었다.

하세가와 조선 총독이 “제방 이리 부근 노 상황 하, 경성 거주 노 외국인 니 선전 세라레, 영국 총 영사 대리, 미국 영사, 미비 외국 선교사, 일부 현상 ヲ 시찰 시타 리 . 장관 에게보고 [ 9 ] 우츠노미야가 "독필을 휘두르고있는 외국인 등에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듯이, 재경성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 필드 나 AP통신 에 특별 채용된 앨버트 테일러 들에 의해 사건은 일본군 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서 전세계에 보도되었다 [ 10 [ 11 [ 12 ] . 미국 영사나 영국 영사들도 본국에 사건을 보고하면 일본 비판의 여론이 높아지고, 미영으로부터 조선통치의 개선이 일본에 요청되어, 일본의 조선통치가 「무단 정치」로부터 「문화 정치」로 전환한다 원인이 되었다 [ 13 ] .

사건 상세

편집 ]

제방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보관하는 증언자료를 종합하여 사건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단, 시간과 이름 등 세부사항에서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1. 아리타 나카위는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 보조희창에 명령해 제방리 주민 중 성인 남성(15세 이상)을 교회에 모았다.
  2. 미리 명부를 가지고 있던 것 같아, 오지 않는 사람은 찾아 부르고 왔다.
  3. 아리타 나카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더니, 안(安鍾厚이라고 추정)이라는 신자 대표가 대답했다.
  4. 아리타 나카위는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라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에서 안을 사격했다.
  5. 사격이 끝난 후 교회에 짚으로 석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6. 바람이 강하게 불고, 불은 교회 하수의 집으로 타오르고, 능숙한 집은 군인들이 돌고 불을 쏟았다.
  7. 교회에 불이 붙으면 홍(홍준진과 추정)과 '향남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진과 추정)'과 '노경태'가 탈출하려고 했지만 홍은 도망 중에 사살되어 '향남면에 다녔던 사람'은 집안으로 피난했으나 발각되어 살해당해 노경태는 산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8. 탈출한 곳을 사살당한 듯한 시체가 두 세 세 교회 밖에 있었다.
  9. 마을에서 출화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10. 홍씨(홍원식)의 아내도 군인의 총을 받고 죽었다.
  11. 군인들은 고주리촌에 가서 천도교신자 6명을 총살했다.

한국인식

편집 ]

2019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 은 3·1운동 기념식 연설에서 사건에 대해 “경기도·화성 제암리에서도 교회에 주민을 갇혀 불을 내고 어린아이도 포함 29명을 학살하겠다는 만행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조선인의 공격으로 사망한 일본의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14 ] .

관련 문헌

편집 ]
  • 조선총독부 자료 “소밀 770호, 제암리 소련 사건 니세키스루 보고(통패)” 다이쇼 8년(1919년) 4월 24일
  • 영자신문 “ 재팬·어드버타이저 ” 1919년 4월 27일호
  • 「복음시보」1919년 5월, 1244~1246호
  • 『삼・일독립운동과 제방리교회 사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편 저 노부나가 정의역 고베학생청년센터 출판부, 1998년 5월
  • 『삼・일독립운동과 제암리 사건』 오가사와라 료이치, 강신범, 이누마지로, 이인여름, 이케아키관, 도이히오, 사와 마사히코, 이이지마 노부 [저 및 술], 김명숙, 김성제 [역] 일본 기독교단 출판, 1989년 2월
  • 『삼·일운동(현대사 자료 25-26. 조선)』 강덕상편 1-2 미스즈 서방, 1966-1967, 2권

각주

편집 ]
  1.  이 타이틀에 대해서는( 이덕주, 상석희망 ' 번역 이덕주 '초기한국교회의 민족교회적 성격'(2)(2/3) '언어와 문화 : 아이치대학 어학교육연구실 기요' 제44권 제17 호, 아이치 대학 어학교육연구실, 2007년 7월, 121-144페이지, CRID  1050564287671954048 , ISSN 13451642  )를 기초로 선정했다.
  2. ↑ b 국립 공문서관 레퍼런스 코드:A04017275800 “단행서·8년 육을 칠일·조선 소요 경과 개요”
  3. ↑ b 방위성 방위 연구소 아리타 나카위에 관한 재판 선고의 건 레퍼런스 코드:C03022465000 1143페이지
  4.  고베 대학 경제 경영 연구소 신문 기사 문고 정치 (16-125)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19.8.10 (다이쇼 8)  [ 1] 맹세에 주재소를 죽이고 독립 만세를 고함치면서 투석하거나 혹은 막대기를 흔들며 광폭을 일으키며 마침내 불을 쏘고 이곳 건물을 완전히 태우고 동시에 재소근 순사 카와바타 토요타로가 방지의 수술 다 도망칠 수 있는 것을 추적해 주재소를 가로지르는 동북방 약 80간의 지점에 포위해 동봉 및 돌로 난타 참살한 것 같아」
  5.  제096회 국회 외무위원회 제24호 ) 받는 문서 '참조 요리 소 니 접시 그리고 그 등 ヲ 소멸 세라레타시토 부락민 노 간청 ヲ 수케 전술 노 처치
  6.  제096회 국회 외무위원회 제24호 ) 목적지 문서를 참조 [3] "상기 검거반 코우나 코우 지방 니 태 화재 ヲ생 세시하 취조 노 결과 일부 하 야간 혼잡 노 결과 실화 시탈 모노 나루모 타 노 일부 하 2명 노 참살 니 보복심
  7. ^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 3권 이와나미 서점 (4월 18일)
  8. ^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 3권 미나리야, 그 정도는 과실을 인정하고 행정 처분에도 맡기는 것 전혀 의의가 있는 것을 내담하게 해, 총독은 야바리 행정 처분장은 위치를 가능하게 하는 취지 복명시켜, 와 맞이하는 코지마 중장, 오노, 야마모토 등과 상담중, 정법사, 우치노도 내회해, 학살 방화는 부인해, 진진압의 방법 수단에 적당하지 않을 곳 있어 30일간의 중근신을 명하는 것에 약결심, 산회하게 하는 것은 오전 한때 가까워.
  9.  제096회 국회 외무위원회 제24호 ) 목적지 문서 참조 [4]
  10. 나가타 아키라『일본의 조선통치와 국제관계-조선독립운동과 미국 1910-1922』 평범사, 2005년 2월.
  11. ↑ 2013년 12월 27일 14시 56분 중앙일보/중앙일보 일본어판
  12.  중앙일보 2016년 02월 27일 삼·일독립운동을 전한 AP 특파원의 저택 「딜크샤」 복원에 [5]
  13. ^ 립명관법학 1999년 3호( 265 호) 140쪽 영미에서 본 일본의 조선 지배(1)- 전간기 영사 보고를 중심으로
  14. “ <삼·일 운동 기념식의 문 대통령 연설 전문> ”. 연합 뉴스 (2019년 3월 1일). 2019년 4월 19일 열람.

외부 링크

편집 ]
국립공문서관 https://www.jacar.go.jp/
참조 코드: C03022465000
  • 조선소요경과 개요
국립공문서관 https://www.jacar.go.jp/
참조 코드: A04017275800

좌표 : 북위 37도 07분 34.3초 동경 126도 53분 36.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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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mni massacr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eamni Massacre
LocationTeiganSuigenKeiki-dōKorea, Empire of Japan
(now HwaseongGyeonggi Province, South Korea)
Coordinates37°7′34″N 126°53′37″E
DateApril 15, 1919
TargetKorean residents of Jeamni
Attack type
Massacre
Deaths20 to 30
PerpetratorImperial Japanese Army
Jeamni massacre
Hangul
제암리 학살 사건
Hanja
提巖里虐殺事件
Revised RomanizationJeamni haksal sageon
McCune–ReischauerCheamni haksal sagŏn

The Jeamni Massacre (Korean제암리 학살 사건lit. Jeamni Massacre Incident) was a mass murder of 20 to 30 unarmed Korean civilians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 on April 15, 1919 in Jeamni, SuwonKorea, Empire of Jap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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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the event, Japanese soldiers brought 20 to 30[1] Koreans they suspected were linked to the March First Movement protests into a church for a meeting. They then opened fire on the civilians, and burned down the church to destroy the bodies and evidence of the incident.[1][2][3] They also set fire to nearby civilian homes.[3] Despite the cover-up efforts, Canadian doctor Frank Schofield heard news of the event and immediately visited the scene. Schofield then wrote a report titled "The Massacre of Chai-Amm-Ni" and published it in The Shanghai Gazette on May 27, 1919.[4][5]

Japanese cover-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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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panese lieutenant responsible was disciplined, but a group of senior officers decided to attribute the incident to resistance by local people.[6]

In his diary, Japanese commander Taro Utsunomiya wrote that the incident would hurt the reputation of the Japanese Empire and acknowledged that the Japanese soldiers committed murder and arson.[2] Utsunomiya's diary revealed that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met and decided to cover up the incident.[6]

Afterm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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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2019, a group of 17 Japanese Christians visited the site of the massacre and apologized for the incident on behalf of Japan.[7]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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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ump up to:a b 김, 진봉, "수원 제암리 참변 (水原 堤岩里 慘變)"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in Korean), Academy of Korean Studies, retrieved 2024-04-30
  2. Jump up to:a b "Diary entry reveals Japanese cover-up of massacre : International : News : The Hankyoreh"The Hankyoreh.
  3. Jump up to:a b Korean History Dictionary Compilation Society. "제암리 학살사건"terms.naver.com (in Korean). Garam Planning. Retrieved 2021-06-06.
  4. ^ "Frank W. Schofield: 'God-sent angel for Korean independence'"Korea.net.
  5. ^ Legault, B.; Prescott, J. F. (2009). ""The arch agitator:" Dr. Frank W. Schofield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The Canadian Veterinary Journal50 (8): 865–872. PMC 2711476PMID 19881928.
  6. Jump up to:a b "Japanese Army Massacre Diary Found"The Dong-A Ilbo. March 1, 2007. Retrieved 2021-06-12.
  7. ^ Shim, Sun-ah (2019-02-27). "Visiting Japanese Christians apologize for 1919 church massacre"Yonhap News Agency. Retrieved 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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