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그의 손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탈북했었다.[1] #[2] 28세 남(南) 항렬
[3] 1920년 도쿄고등상업학교에서 도쿄상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4] 남조선로동당 합류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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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의 실패, 대한민국 운명을 바꾸다!
[장석준의 '적록 서재'] <조선혁명론 연구>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 | 기사입력 2012.06.29. 18:26:00 최종수정 2014.06.10. 22:47:14
'적록 서재'의 지난 번 글(☞바로 가기 :
그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에 취한 이유는?)에서 나는 주체사상의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를 다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글의 요지는 남북한 국가의 등장 및 발전 과정에서 패배자의 깃발 정도로 치부되어버린 좌파 민족해방운동과 일제하 민중운동의 염원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들의 이상과 지금 우리의 과제를 잇는 역사의 물줄기를 확인하고 이 연결 고리를 중심으로 현대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짚어봐야 할 것이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만은 아니다. 이 탐색 작업은 반드시 해방 공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식민지 시대 운동의 성공과 실패가 중간 결산된 역사의 커다란 매듭이 바로 이 시기, 즉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5년간이었고, 현재 남북한 국가의 기원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해방 전후사를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 요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해방 전후사는 일제하 운동사보다 훨씬 더 긴장되는 작업 주제다. 남북한 국가의 시원이 해방 후 5년사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두 분단 국가는 이미 이 시기의 역사 평가를 둘러싼 '정통'과 '이단'의 분류를 분명히 해놓은 상태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 시기를 재검토하려는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물론 만주 항일 빨치산이라는 좌파 민족해방운동의 한 분파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한의 순혈주의적 계보에 비해서는, 좌우합작 정부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지는 남한 쪽이 좀 더 창조적인 역사 재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기는 하다. 뉴라이트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논리다.
문제는 국가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다. 분단 국가 내부에서 이를 비판하는 세력들도 해방 전후사에 대해서는 저마다 선과 악의 계보학적 기준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령 우리 시대에 중도파를 자처하는 이들은 해방 전후사 평가에서도 그 시대에 '중도'로 분류되던 이들의 손을 들어준다. 비슷하게, 좀 더 급진적인 좌파는 해방 공간에서 '혁명'을 부르짖던 이들을 자신의 정신적 뿌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중도파는 김규식, 여운형의 좌우합작에서 그 시원을 찾고 좌파는 박헌영의 비극적 실천에 동지애를 느낀다는 것이다. 주체사상파와의 관계에서 보자면, 김일성 편이냐 아니면 박헌영 편이냐가 주체사상파와 다른 좌파 경향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런 족보론은 이제 냉정한 역사적 평가에 길을 내주어야 한다. 적어도 좌파의 역사 재해석에서는 이것이 필수 전제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어느 시기에나 항상 가장 '좌'의 입장에 서는 것이 곧 좌파의 올바른 실천 방향이기나 한 것처럼 역사 (재)해석을 이러한 '좌'의 계보도를 그리는 일쯤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비역사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면,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조차 족보에서 삭제되고 오직 극소수의 초(ultra)좌익들만 남게 될 것이다.
어쩌면 해방 전후사 인식에서 이렇게 족보학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점이 주체사상파에 맞선 남한 좌파의 한계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박헌영과 남조선노동당의 계보는 결코 북한 국가의 계보에 맞선 역사 재해석의 대안적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은 사실 분단 정권의 수립과 한국전쟁을 정점으로 완전히 수렴된다. 따라서 전자를 토대로 후자와의 차이를 주장한다거나 이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불임의 노동이 되고 만다.
여운형 노선과 박헌영 노선 - 전자가 옳았다
이런 시각에서 나는 1946년~47년, 분단으로 이어지기 직전 2년간 좌파가 추구했어야 할 올바른 실천 방향은 좌우합작이라고 본다. 좌우합작으로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양군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했었다. 즉, 박헌영 노선이 아니라 여운형 노선이 옳았다.
'급진' 좌파보다는 '중도' 좌파가 바람직하다는 논리 때문이 아니다. 이 시기의 상황이 이러한 실천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 사회를 규정하고 있던 가장 큰 힘은 미국과 소련의 국제관계였다. 이미 1946년이 되면 이 두 나라가 자기네 군대 주둔 지역에 위성 분단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협상 창구인 미소공동위원회는 공전을 거듭했고, 나름 유능했던 두 정치가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분단 정권의 주역이 될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좌 혹은 우로 치우친 두 국가의 수립은 사회 내부의 계급 갈등이나 좌우 대립을 국가 대 국가의 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뜻했다. 국가 대 국가의 투쟁이란 곧 전쟁이었다. 즉 일단 한반도에 두 국가가 수립된다면, 전쟁은 필연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국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참혹했던 전쟁이 '휴전' 상태로 일단락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한반도는 준전시체제 아래 있다.
1946년~47년에 인민당의 여운형은 우파의 김규식과 함께 이러한 숙명의 강요에 맞서 마지막 기회를 부여잡으려 했다. 이들은 신탁통치 찬반 문제로 등장한 좌우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좌우합작 찬성 세력과 반대 세력의 대립 구도로 바꾸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우합작 찬성 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 했다. 그래서 어렵사리 협상을 거듭하여 좌우합작 7원칙을 이끌어냈고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이러한 노선을 추구하는 새 정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으로 좌파 전체를 재편하려 시도했다.
물론 좌우합작 시도에도 많은 한계가 존재했다. 가령 1946년 초에 폭발한 우파 진영의 반탁운동에 상응하는 대중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한계였다. 좌우합작을 둘러싼 좌파 내부의 논쟁 때문에 1946년 말의 자생적 대중 봉기에 정치적 구심점을 제시하지 못한 것도 뼈아픈 오류였다. 또한 합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좌파를 분열시키려는 미 군정의 책략, 좌파 지도자들인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사이의 경쟁 등 '불순한'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46년 이후의 박헌영 노선에 비하면 분명 더 올바른 입장이었다. 사실은 1946년 벽두에 반탁운동이 폭발하고 5월에 미 군정의 조선공산당 탄압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의 노선 역시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박헌영 노선과 여운형 노선이 갈린 것은 전자가 도중에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1946년 하반기 이후 박헌영파의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조선노동당은 사실상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 지역의 무장 혁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것이 국민 국가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내부 사회 세력 간 투쟁의 한 형태로 등장한 무장 항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반도에는 아직 국민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 개의 분단국가를 수립하려는 국제적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조선노동당은 실질적 지도부를 북한 지역에 두면서 남한의 당원, 지지자들에게 비합법 투쟁을 지령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식민지' 상태의 남한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민주기지론'의 원형을 구축하는 정치 행위였다. 즉, 좌파의 다수파가 분단의 외부 동학에 호응하여 그 내부 동학을 형성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여운형 등의 좌우합작 추진파는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주요 모순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소 두 강대국의 세력권 논리와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 논리 사이의 대결 구도였다. 이들은 어떻게든 다수의 좌우합작 세력을 구축해 하루빨리 과도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반도로부터 두 강대국의 지배력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들의 실천은 이러한 올바른 정세 판단과 역사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여운형 노선의 실상을 파악하는 가장 생생한 방법은 1946년~47년 당시의 1차 자료들을 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좌우합작 노선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문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여운형 노선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라면 결국 여운형 자신이겠는데, 이 사람은 대중 정치가였지 학자나 논객, 저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1차 자료란 게 다 대담 기록이거나 연설문들이다. <몽양 여운형 전집>(함양여씨대종회 옮김, 한울 펴냄)에 이런 자료들이 망라돼 있다.
하지만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바에는 이런 번쇄한 자료 뭉치를 읽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해방 이후 여운형의 정치적 실천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한울 펴냄) 한 권을 읽는 게 더 낫다. 저자의 정치적 견해가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는 있지만 이정식의 <여운형>(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도 읽어볼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여운형 노선에 대한 당대의 이론적 논설이 아쉽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성격의 문서로 우리가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은 백남운의 논설 '조선민족 진로'(1946년 4월 발표)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1947년 5월 발표)뿐이다. 이 글들의 요지는 방기중의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역사비평사 펴냄)을 통해 접할 수 있다.
2차 자료에 만족 못한다면, 직접 원문을 읽어볼 수도 있다. 심지연이 엮은 <조선혁명론 연구>(실천문학사)에 이 두 글이 실려 있다.
백남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선혁명론 연구>는 마치 박현채와 조희연이 엮은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죽산 펴냄)이 1980년대~90년대 초 한국 좌파의 논쟁들을 총망라한 것처럼, 해방 정국의 좌파 논쟁 자료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박헌영의 그 유명한 '8월 테제'도 실려 있고, 근로인민당 강령도 수록돼 있다. 또한 책 앞부분에는 당시의 논쟁 구도를 정리한 논문들이 실려 있는데, 특히 '해방 후 좌익진영 내부의 노선투쟁 분석 ― 조선혁명단계론을 중심으로'가 도움이 된다.
위에 소개한 두 논설의 저자 백남운은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 일제 시대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었고, 역사유물론에 바탕을 둔 첫 번째 한국 경제사 <조선사회경제사>(심우성 옮김, 동문선)를 집필했다.
그런 그가 해방 직후 정계에 직접 뛰어들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조선공산당에 합류하지 않고 남조선신민당 결성에 함께 했다. 남조선신민당은 일제 말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독립동맹 세력(일명 연안파)이 1946년에 만든 좌파 정당이다. 독립동맹의 주력은 북한 지역으로 들어와 북조선신민당을 만들었는데, 그 일부가 남한 지역의 정치 사업을 위해 남조선신민당을 따로 창당한 것이다.
백남운이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남조선신민당을 선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당시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박헌영 파에게 거리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이 일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조선공산당의 입장 자체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당시 여운형의 인민당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박헌영 파는 남한 군중의 정서에 대해 너무 무감각했다. 좌파에 우호적이었던 여론이 하루아침에 반탁과 찬탁으로 양분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반면 신탁통치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백남운이 취한 입장은 좀 독특했다.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서울에 알려진 직후인 1945년 12월 30일 명동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백남운은 탁치 문제에 대한 연설을 했다. 조선공산당의 반 박헌영 파 활동가였던 고준석은 자신의 회고록 <해방 정국의 증언 : 어느 혁명가의 수기>(사계절 펴냄)에서 이 날 백남운의 연설이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요지는 이렇다.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미국 사람이 먹다 남은 비프스테이크가 아무리 영양 많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걸 먹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소련 사람이 먹다 남은 보드카가 아무리 맛있다 하더라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신탁통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미국이나 소련의 감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해방 정국의 증언>, 94쪽)
백남운이 보기에는 8·15 이후에도 일본 제국주의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외세와 한반도 민중 사이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1946년의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대한 모순이었다. 명동의 연설이 있고 나서 4개월 뒤에 쓴 '조선민족 진로'에서 백남운은 연설의 어조를 반복한다. "조선 민족이 요청하는 정치, 경제, 문화는 연합국의 원수들보다도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조선의 평민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연합군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혁명이 대행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아직 정치 자유를 갖지 못한 이상 완전한 민족해방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그만큼 국제 정치의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민족적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술적 방면으로 보아서 자주 독립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현 단계에 있어서는 군사적인 민족혁명의 대상[일본 제국주의 - 인용자]이 해소되어 버린 대신에 정치적인 민족해방의 과제[통일 독립 정부 수립 - 인용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가할 듯하다." (<조선혁명론 연구>, 165쪽)
이러한 정세 판단에 따라 백남운이 제출하는 대안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다. '신민주주의'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 이론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제시한 신민주주의 혁명론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기반은 어디까지나 당시 한반도의 현실이었다. 백남운은 민족해방을 지지하는 일부 유산계급까지 포함하는 좌우익 합작을 통해('연합성') 진보적인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미소 양국군을 철수시키는 것('신민주주의')이 당면 과제라고 제시했다.
이러한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은 곧바로 좌우합작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현실정치가 여운형이 추진한 좌우합작에 백남운이 이론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좌우합작에 반대한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과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조선혁명론 연구>에는 당시 남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 사이에 오간 날선 논쟁이 그대로 실려 있다.
1946년 하반기에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남한 좌파는 두 개의 구심으로 양분됐다. 한쪽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파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인민당의 여운형과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이 있었다. 여운형과 백남운은 좌우합작 노선, 그러니까 백남운 편에서 보면 연합성 신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좌파를 재편하기 위해 공산당 내 반 박헌영 파와 함께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 이 시도가 박헌영 파를 중심으로 한 남조선노동당 창당을 통해 무력화되자 이들은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근로인민당을 출범시켰다.
1947년이라면 이미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단정 수립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이 퍼져가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발표된 백남운의 '조선민족 진로의 재론'은 1년 전의 글보다 훨씬 더 다급한 어조를 띤다.
그는 남한만의 단정 수립이 남한 사회를 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지, 즉 신식민지로 내모는 길이 될 것이라 내다봤다. 이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노력은 한반도 민중의 운명을 놓고 신식민지화의 거대한 힘과 막판 경주를 벌이는 형국이었다. 좀 길지만, 백남운 자신의 인식을 그대로 옮겨본다.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 소 양국의 동양 정국에 대한 정치적 지도권의 제약성과 연결된 점으로 보아서 3상 결정에 의거한 남북통일의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민주독립의 길인 것이고, 남조선 단독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은 '민주독립'의 길이 아니라 특권층이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하는 '경제적 지배제' 유도의 확립에 불과한 자본 지배의 독립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의 '자본 독립'은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함으로써 신형 제국주의 형태인 '경제적 지배제'를 법률화하는 정치 태세임으로 민주사회의 건설에 충용할 '경제 원조'를 특권적으로 영입 악용함으로써 전기한 일련의 반동분자가 신흥 부르조아지로 육성됨을 따라 민족 분열과 내란 유발을 감행하는 팟쇼 정권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남북통일의 민주 독립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조선혁명론 연구>, 245쪽)
이 글이 발표되고 2개월 뒤인 7월에 여운형이 암살당한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끝났고, 분단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근로인민당의 다른 지도자들, 가령 장건상은 이후 남한의 제도 정치에 뛰어들어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지만, 백남운은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한다.
결과적으로 박헌영, 백남운 모두 월북한 셈이다. 다만 박헌영이 1946년 '신전술'의 논리적 결론에 따라 분단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면, 백남운은 연합성 신민주주의 변혁론이 최종적으로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분단국가 중 한 쪽을 선택했다고 하겠다.
백남운은 박헌영 계와는 달리 북한에서 숙청되지 않았고, 학계 원로 대접을 받다가 1979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여한 백남운. (맨 왼쪽) 그 옆으로는 차례로 허헌,박헌영,홍명희다. ⓒko.wikipedia.org
잃어버린 역사적 가능성의 기억
백남운의 글을 통해 우리는 1946년~47년의 좌우합작운동이 흔히 이야기되는 실용적 '중도' 정치의 한 사례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 정세의 구체적 분석에 기반한 구체적인 정치 실천이었다. 비록 이 시도도 박헌영 노선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에게 좌파 정치에 필요한 덕목들에 대해 여전히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풍부한 참고 사례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분단 체제의 이후 전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여운형-백남운 노선이 대변했던 역사적 가능성이 더욱 부각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컸고, 지금까지 우리를 내리누르는 그 역사적 짐이 너무나 무겁다. 연합성 신민주주의의 구상은 노동자-민중 세력이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하는 그람시적 전망을 얼핏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반세기 넘게 지난 지금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정치 주체로 등장하기에도 힘에 벅차 하는 형편이다.
너무나 큰 지체다. 너무나 아픈 역사적 가능성의 유실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역사의 틈이 다시 열리고 있다. 미국 주도 자본주의 질서가 70여 년 만에 그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또 다른 전환 시대의 도래다. 이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 항해법을 익히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선 지난번 잃어버린 역사적 가능성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 거기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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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東岩 백남운 활동 경력 소개
기자명 연합뉴스
입력 2004.04.0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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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북한은 7일 월북자로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동암(東岩) 백남운(白南雲:1897~1979)의 월북과정과 이후 활동 경력을 소개했다.
북한의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www.uriminzokkiri.com)에 따르면 1897년 3월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동암은 독학으로 17세 때 수원농림학교에 들어갔으며 2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도쿄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경제연구회'와 '적색연구회'라는 연구단체를 조직해 일제에 맞섰고, 그 과정에서 역사 논문 '조선사회경제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193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돼 4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으나 일제는 그에게 '대동아전쟁의 필승'을 역설하고 학도병 출정을 부추기는 연설을 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그는 옥중에서 얻은 병을 내세워 은둔하면서 '리조실록' 초록을 집필했다는 것이다.
1948년 3월 김일성 주석은 친필로 쓴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동암에게 보냈고,회의 참가를 위해 평양에 갔던 그는 처음으로 김일성을 만났다고 '우리민족끼리'는 설명했다.
그해 9월 9일 북한정권이 창건되면서 동암은 초대 교육상을, 6.25전쟁 후에는 과학원 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우리민족끼리'는 "김일성훈장 수훈자인 백남운선생은 우리 나라(북)에서 첫 원사(권위있는 학자에게 주는 명예칭호)의 학직을 받았다"면서 "온 겨레가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조국통일의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든 두 살을 일기로 떠났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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