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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 기적을이루는사람들 카테고리 글 전체글 보기
-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33회) (1) 2020. 8. 30.
- 동방의 예루살렘 회복을 꿈꾸며(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32회) 2020. 8. 29.
- 약전리에서의 작은 통일(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31회) 2020. 8. 28.
- 약전농장의 기적(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30회) 2020. 8. 28.
- 새 역사 창조를 위한 진통(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9회)
- 약전농장에서 본 통일의 가능성(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8회) (2) 2020. 8. 26.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라(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7회) 2020. 8. 24.
- 용천폭발사고로 다시 열린 '동토의 왕국'(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6회) 2020. 8. 23.
- '그럼에도 불구하고…'(기적을 이루는 이루는 사람들 25회) (3) 2020. 8. 21.
- 호랑이 굴로 들어간 사람들 -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4회) 2020. 8. 19.
- 평양에서 체험한 '오순절의 성령 강림'(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3회) 2020. 8. 17.
- 그들이 나를 속일지라도(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2회) 2020. 8. 15.
- 죽으면 죽으리라(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2회) 2020. 8. 14.
- 서해안 직항로가 열리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1회) 2020. 8. 13.
- 신의주의 한경직 기념사업과 용천역 폭발사고(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0회) (1)
- 평양에서 인술을 베풀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9회) (1) 2020. 8. 11.
- 북한 땅에 내리는 만나(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8회) 2020. 8. 10.
-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7회) (1) 2020. 8. 7.
- 나의 아버지(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6회) (2) 2020. 8. 5.
- 한반도를 기생충 청정지역으로(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5회) (1) 2020. 8. 4.
- 평양에서의 기도(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4회) (1) 2020. 8. 4.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3회) (1) 2020. 8. 3.
- 평양으로 가는 길(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2회) 2020. 8. 1.
-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1회) 2020. 7. 31.
- 환난과 핍박 중에도(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0회) 2020.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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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영국가에서의 심야 데이트(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9회) 2020. 7. 29.
- 북녘 땅에 심겨진 로뎀나무(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8회) 2020. 7. 28.
- 라진선봉 방문의 추억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7회) 2020. 7. 27.
- 두만강을 건너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6회) 2020. 7. 26.
- 한민족복지재단의 출범(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5회) 2020. 7. 25.
- 오병이어의 기적(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4회) 2020. 7. 24.
- 부르심(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3회) (1) 2020. 7. 23.
- 누군가 뛰어들어야 한다면(기적을이루는사람들 2회) 2020. 7. 22.
- 메마른 북녘 땅에 로뎀 나무를 심다(추천사) (2) 2020. 7. 21.
-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기적을이루는사람들 1회) 2020.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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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기적"(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서문)
경천애인300 ・ 2020. 7. 21. 20:40 URL 복사 이웃추가
2013년 필자의 북한 사역 경험담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이 중앙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수년 후 독자들로부터 책이 절판되어 서점에서 구입할 수가 없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판사에는 아직 재고가 남아 있는데, 서점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운 안타까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2017년 1월 국민일보에 「역경의 열매」 를 게재하면서, 책 내용의 일부가 소개되었지만 지면관계상 중도에 연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도 가끔 이 책을 찾는 독자들에게 보답하는 뜻으로 40여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김형석,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중앙북스, 2013)
지난 몇 년간 많이 회자된 말 가운데 소위 "잃어버린 10년"이란 용어가 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의 대북 포용정책(햇볕정책)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고, 국가의 성장 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자조 섞인 말이다. 최근에는 개성공단까지 폐쇄될 위기에 놓이자 이런 자탄의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사람들은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역사가 단절되는가?
우리가 망각하고 있을 뿐, 남북관계는 종전 이후 60년 간 항상 대립과 긴장의 연속이었고, 심지어는 남북화해와 협력을 갈망하던 김대중 정부도 두 차례나 연평해전을 치렀고, 노무현 정부 역시 대북송금 문제로 장기간 갈등을 빚다가 임기 말에야 겨우 정상회담이 열릴 만큼 평화로운 시절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북한 사람과 접촉하면서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남쪽 사람들이 보내는 평화의 마음과 사랑의 물질을 북쪽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받고 메신저역할을 감당했다. 이 과정에서 1997년부터 12년 동안 100여 회에 걸쳐 700여 명이 나와 함께 북한 땅을 밟으면서 북한주민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누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모니터링을 위해 방문하는 현장에는 주요 언론이 수시로 동행하였는데, 나는 객관성과 신뢰성을 보증 받기 위해 진보 언론보다 오히려 보수 언론의 취재를 요청했다. 결과 "조선․ 중앙․동아일보"와 보수적인 기독교 정서를 대변하는 국민일보가 현장을 보도했고, 특히 KBS TV는 방송사상 최초로 북한 농촌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추적 60분"에 소개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인정조차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믿기가 어렵더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기적 같은 사건은 분명한 사실(史實)이 다. 따라서 그간 밝혀지지 않은 남북교류의 현장 모습을 역사의 증거물로 남기는 것이 이 책을 출간하는 목적이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북한 관리들을 상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 심지어는 신변의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고, 국제적인 기준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식대로"라는 말이 판단의 기준이고 결정하는 원칙이다. 그런 그들을 상대하려면 엄청난 인내와 무한정의 이해심이 요구된
다. 종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십자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처럼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크리스천인 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날 때마다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그때마다 기적과 같은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비단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역하는 이들이 함께 나누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붙였다.
따라서 이 책은 남북관계의 이면사를 정리한 역사물인 동시에 그 과정에서 경험한 나의 신앙체험을 기술한 종교서적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진실에 기초한 사실을 기술한 일종의 회고담이지만, 저자의 신앙관과 신학적 입장에 기초한 해석을 덧붙였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2013년 5월 5일.
관악산 자락 그레이스교회에서. 김 형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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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북녘 땅에 로뎀 나무를 심다(추천사)
경천애인300 ・ 2020. 7. 21. 21:46 URL 복사 이웃추가
1. "메마른 북녘 땅에 로뎀 나무를 심다" - 김형오(제18대 국회의장, 신일교회 장로)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만들어나가는 것인가. '사랑과 평화의 메신저' 김형석 목사의 책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은 피와 땀과 눈물로 써내려간 북한 선교와 휴머니즘 실천의 기록이다. 한민족복지재단을 이끌면서 인도적인 지원과 남북 협력사업을 주도해온 ‘하나님의 종’이 좌충우돌하면서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기도로 돌파하며 일구어 낸 기적 같은 축복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공화국 창건 이후 최고 반동’이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몇 차례나 입국 금지를 당하면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자적 결단을 심장에 새긴 채 오직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온갖 역경과 난관을 헤쳐 나간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이념을 더 중시하는 북녘 땅에 김 목사는 ‘생명’의 상징인 로뎀 나무를 심는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체험을 하고, 평양 한복판에서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감격의 순간을 연출한다. 297명의 방북단을 전세기에 태우고 평양으로 날아가 대북 선교의 새 장을 연다.
한나라당의 야당 시절 주요 직책을 맡고 있던 나는 김 목사의 인도주의적 취지에 공감해 당리당략을 떠나 그의 재단에 서 추진하던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또 직접 북한을 방문해 만성적인 식량난 해결을 위해 ‘복토직파’라는 새로운 영농법 전파에 힘쓰던 그의 열정과 집념을 현장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저들도 우리가 내미는 사랑의 손길을 뜨겁게 맞잡을 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2. "그는 피스메이커이다" - 주도홍(백석대학교 교수‧한국기독교통일학회 회장)
김형석 박사는 피스메이커이다. 이 책에서 그는 어려운 남북관계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는지를 전하고 있다. 그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 계속해서 읽게 되고 중단할 수가 없을 정도로 흥미진지하다. 북한을 돕는다는 일이 얼마나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일인지 다 아는데 그는 이 일을 달인처럼 해냈다. 어렵고도 어려운 가운데 그가 어떻게 이 일을 기적적으로 해냈는지를 이 책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사랑이었다. 68년간의 허리 잘린 분단은 오늘 한반도를 고질병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당한 남남갈등의 출발점이 남북의 분단에 있다는 점이다. 이 갈등의 근원을 망각한 채 21세기 한반도의 수많은 문제들을 풀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나이브하며 안이하다. 남북 분단은 한반도의 지난한 정신적 질곡의 현장이며 중심부이다.
그런데 김 박사는 남북의 불화와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사랑임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너희로서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는 성경 말씀 따라 크리스천은 모든 사람과의 평화에로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소명에 가장 충실히 순종하였던 김 박사가 오늘 2013년 암담한 남북 현실 속에서 뭔가를 분명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실 68년의 진절머리 나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일은 정치도 경제도 외교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전혀 달라진 게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고난 가운데 빠진 그들을 남한 형제의 위대한 사랑으로 감동시키는 일 외에 대안은 없다. 북한을 돕는 일에, 여러 부정적인 평가가 설령 틀리지 않다할지라도, 북한을 새로운 나라로 바꾸는 일에 그들을 사랑하는 일 외에 무엇이 가능하랴! 사실 미움에서 대안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다. 사랑에서 해결책을 찾을 때만이 수많은 가능성이 열림을 본 저서는 밝히 보여준다. 추천의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게 는 기쁨이며 영광이다. 독자들에게 거침없는 일독을 권한다.
김형석 목사, 그는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일 것입니다. 여기 김 목사의 기도가 적혀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온 몸으로, 온 시간으로 드려온 기도입니다. (통일로 향하는 여정에서)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곧 기적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다가 올 기적도 예견할 수 있습니다. - 연세대 명예교수 ‧ (사)1090평화와통일운동 이사장 이영선
“자네 기적을 보고 싶나? 스스로 기적이 되게나! (You want to see a miracle, son? Be the miracle!)” 항상 불만에 차 있는 짐 캐리에게 창조주로 분한 모건 프리먼이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한 말이다. 책의 초고를 읽고 읽으면서 딱히 고백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였다. ‘김 목사님을 기적이 되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려 한다면 이 책을 꼭 붙잡기를 바란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이란 말인가? 그리고 책을 손에서 놓는 순간, 나 자신도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가족생태학자 ‧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김형석의 이야기는 독보적이다. 그의 북한 경험은 오랜 축적과 탁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 덕분에 그의 이야기는 흥미가 넘친다. 돋보이는 정보도 갖고 있다. 그의 책은 강렬하면서도 은근하다. 때로는 긴박감을 주고 사명감을 주입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 잔잔하면서 깊숙하게 전파된다. " - 중앙일보 대기자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박보균
본서는 김형석 목사의 북한선교를 시기별로 기록한 역사물이다. 분단의 역사를 거슬러 통일한국을 그리며 몸소 뛰어 든 그의 증언은 많은 북한선교 사역자를 불러냈다. 본인도 김 목사의 북한선교 열정으로 북한선교 지도자가 되어, 여러 신학대학에 북한선교 과정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남·북한의 갈등과 대립의 시기에 본서를 살펴보는 것은 북한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 본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이런 감동이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에 흘러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서울신학대 교수 ․ 한국기독교통일연구소 소장 박영환
민족의 아픔을 끌어않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지사형 역사학자 김형석 박사! 하나님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수직도 포기한 사명의 사람 김형석 목사! 그의 대북사역에 대한 정통 보수 목회자로서의 생생한 신앙적 해석과 탁월한 현장 사역자로서의 행동과 제안들은 향후 남북관계 발전과 복음적 평화통일에 귀한 지침들이 될 것입니다. -
(사)평화한국 대표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 허문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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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인술을 베풀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19회)
경천애인300 ・ 2020. 8. 11. 7:25 URL 복사 이웃추가
평양의학대학병원 구내에 어린이심장병센터를 설립하는 일은 서울대학교병원이 앞장섰다. 처음에는 재단의 의료사업이 평양시 제1인민병원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어린이병원을 별도로 시설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제1인민병원은 개선문 바로 옆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낡고 설비가 노후화되어 수술조차 제대로 시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재단의 의료위원장이던 박상은 장로(안양 샘병원 원장)는 마취제도 없이 수술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제대로 된 수술장부터 하나 만들어주자고 제안했고, 이를 위해 길병원의 흉부외과 과장이던 박국양 교수가 새로이 합류하여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북한에 보내는 사랑의 의약품(2000.9.5)
이때 그들을 진심으로 도우려는 우리의 의지와 능력을 확신하게 된 북한은 1병원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평양의학대학병원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먼저 예정에 없던 김만유병원을 데려 가서 심장병수술 장면을 참관시킨 다음에, 박 교수에게 평의대병원도 심장병수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재일동포 의사인 김만유의 후원으로 건립된 김만유병원은 최신 시설을 갖춘 데다 동경여자의과대학과의 협력으로 몇 차례 심장병 수술을 성공했으나, 정작 평양의학대학병원은 북한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 교수는 흉부외과 학회 홈페이지에 이런 사실을 알렸는데, 이것을 본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노준량 교수가 자원하고 나섰다. 노 교수는 황해도 사리원 출신의 실향민으로 부친이 목사님이셨다. 이전부터 순천향의대 흉부 외과 교수직을 사임하고 연변대학교 복지병원에서 봉사하는 노중기 박사의 심장병수술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수행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노준량 교수의 가세로 평의대병원과의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고, 서울대병원과 평의대병원 간의 흉부외과 의료기술협약서가 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어린이심장병 수술에 관한 서울대병원의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면서 의료진은 물론 의공기사들의 방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직원들의 출장이 잦아지자 서울대병원에서는 특정 분야가 아닌 전 분야에서의 협력을 내용으로 두 병원장이 직접 서명하는 협약서를 체결해주도록 요청했다.
평양의학대학병원을 단체 방문한 재단 회원들(2006.11.30) - 2열 중앙에 박상은(안양샘병원 원장), 옆에 흰색 가운입은 사람이 류한수(평양의학대학병원 부원장, 공훈 의사), 그 옆의 검정 코트 입은 사람이 필자
이에 따라 서울대병원장의 서명이 담긴 협약서 초안을 가지고 방북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남북장관 회담차 평양을 방문한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연세대학교 김병수 총장의 편지를 전하면서, 연세대 의과대학과 평양의학대학이 학술교류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남측을 대표하는 두 대학병원의 요청을 동시에 받게 된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는 고심끝에 나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2001년 4월 2일 서울대병원 박용현 원장이 평양의대병원을 방문하여 문상민 원장과 <의료기술협약서>를 체결하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북한과 협력 사업을 전개하려면 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 사무총장을 찾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북한과 경협을 원하는 국내 기업은 물론 다국적 기업도 찾아왔다. 심장병 수술에 필요한 의료용품을 판매하는 메디트로닉과 같은 의료용품 제조회사들은 물론이고, 퀴네앤드나겔 같은 세계적 물류회사도 찾아왔는데, 이들은 재단을 후원하고 방북에 동행하여 시장 조사를 시도하였다.
서울대병원의 협약서가 학계 최초이었듯이 나를 통해 처음 이루어진 일도 많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김진복 교수가 평의대병원에서 실시한 위암수술이다. 동아일보에 이어 2001년 5월부터 재단과 공동으로 북한어린이돕기 캠페인을 추진하던 국민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 분단 후 남한 의사로는 북한에서 처음으로 수술을 집도하는 김진복 박사(2001.7.5)
"남한 의사 북한서 첫 암수술 북한어린이돕기 ‘또 다른 결실’ 북 위암환자 수술 성공 - 국민일보와 한민족복지재단이 추진하는 북한어린이돕기 사업 차 지난 3일부터 7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김진복 백병원 의료원장은 5일 평양의대병원에서 3기 위암환자인 54세 남자를 대상으로 2시간에 걸쳐 위아전절제수술(위의 5분의 4 가량을 절단하는 수술)을 시행했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지금까지 남한 의사가 북한에 들어간 것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직접 수술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김 원장은 환자 상태는 매우 양호해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수술은 북한측이 한민족복지재단에 요청해 성사됐다. 북한 측은 김 원장이 국제위암학회장인 점을 고려, 평양의대에서 의사를 상대로 강의하고 시범적으로 시술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으며, 김 원장이 이를 흔쾌히 승낙, 수술이 이뤄졌다. 당초 북한 정부 관계자는 김 원장에 게 수술을 집도하기보다 협력수술 형태로 참여할 것을 권했으나, 평양의대 의료진이 김 원장에게 직접 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원장은 김모 복부외과장 등 북한 의료진과 함께 수술에 들어갔으며 2시간여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남북 의사들은 서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며 격려했다고 전했다. 김 원장은 북한 의사들은 특히 자신에게 “동포가 이곳에 서 수술한 것에 대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한민족복지재단 관계자는 이번 방북단엔 김 원장을 비롯해서 박종철 한민족복지재단 부이사장, 원동혁 로타리 국제봉사위원장 등이 동행했으며, 4일 김 원장 일행이 평양의대를 방문하자 평양의대병원 유한수 부원장, 조선의학협회 정봉주 부회장 등 북한 의료계 관계자들이 문 앞까지 나와 맞는 정성을 보였다고 전했다."- <국민일보>(2001.7.18) 보도에는 빠졌지만 사연은 이러했다. 2000년 말 전국 국제로타리클럽 회원들이 북한에 의료시설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한 결과 평양의대병원에 현대식 수술장을 하나 꾸리게 되었다. 따라서 국제로타리 3640지구 총재이던 김진복 박사
가 이 수술장을 모니터링 하러 가는 길에 위암 수술과 세미나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이다. 나의 제의에 평양의대병원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석에서 그렇게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남북 의료 협력 후 나온 평양의대병원의 '갓난 아기 심장수술 성공' 보도(조선신보, 2013.2.2)
결과는 북한 당국자의 기대치를 훨씬 넘어섰다. 이를 계기로 평양의대병원에서는 남한 의료진의 수술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노준량 교수는 북한 의사들의 심장병 수술을 참관하면서 수술법을 지도하였고, 김용진 교수 팀은 어린이 심장병수술로 시범을 보였다. 이러한 교류가 진행된 후인 2013년 조선신보는 태어난 지 4개월 된 아이의 심장수술 성공 사례를 보도했다. "갓난아이는 폐고혈압을 합병해서 심장과 폐가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의료집단은 수술대책을 면밀히 세워 3시간여 동안에 걸쳐 5.8㎏밖에 안되는 갓난아이에 대한 심장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했다. 우리가 뿌린 남북 의료협력의 결실이었다.
이렇게 평양의대병원에서 활발한 의료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서울대병원과 평양의대병원 간의 <의료기술협약서>가 체결되고 이를 토대로 체계적인 교류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의 복지병원에서 심장병 수술의 경험을 쌓은 노준량 교수는 첫 방북 시에 서울대병원의 이건송 기사장을 대동하여 평양의대병원의 실태를 상세하게 파악한 후에 먼저 의공팀이 들어가서 의료장비를 설치 운영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서울대병원의 유휴 설비를 설치하여 활용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서울대병원 의공팀이 10여 차례 방북하여 의료장비를 개선하였고, 그 후에 국제로타리클럽에서 현대적인 수술방을 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단 설립 5주년을 맞아 서울대병원 박용현 원장에게 감사패를 전하는 최홍준 이사장
한편 심장내과 분야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김성순 교수 팀이 담당하였고 메디트로닉에서 의료용품을 후원하였다. 이밖에도 안과에서는 공안과의 공영태 박사 팀이, 신장내과는 안양 샘병원의 박상은 박사, 치과는 분당 형치과병원 유동환 박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크리스천 의사가 수술방에 들어갈 때는 작은 의식이 치러진다. 수술하기 전에 먼저 기도한 후에 집도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문제를 제기하던 북한 안내원들도 “수술은 내가 진행하지만 생명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수술 의사의 설명에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았다. 참된 사랑을 동반한 담대한 신앙의 용기로 어떤 위협 앞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의사들과 함께 동역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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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직항로가 열리다(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1회)
경천애인300 ・ 2020. 8. 13. 20:11 URL 복사 이웃추가
2002년 4월 중순, 아태 최승철 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베이징에 나왔는데 속히 만나고 싶다는 전화였다. 약속 장
소인 쿤룬호텔로 찾아가니 그의 방은 국내 S그룹이 마련해주었다는 스위트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남북관계의 실세
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거실에서 나를 맞이했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누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갑자기 일어서더니, “장군님께서 보내
신 편지를 읽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재단의 지원에 고맙다는 등의 내용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낭독되었다. 편지
를 다읽은 그는 말린 장뇌삼 한 뿌리를 '장군님 사은품'이라고 내놓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내용
물을 보니 고려호텔 매장에서 판매하는 50달러짜리 상품이었다.
이어 “특별한 애로사항은 없습니까?”라는 최 실장의 질문에 나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재단 부산 지부 후원자들이 남
포소아병원 현대화 사업을 위해 의료장비들을 보낸 지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모니터링이 속히 이뤄질 수 있도
록 도와주십시오.” “바로 조치할 터이니 5월 중순에 평양만 다녀가십시오. 남포는 곤란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은 노무현 대통령을 영접하는 최승철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2007.10.2)
남포는 두 달 전에도 다녀왔는데 곤란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아서 까닭을 물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
자리에서 부산에 연락하여 "남포에는 모니터링이 불가하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부산 지부장인 김철봉 목사가 남포소
아병원을 지원한다고 교회에 광고하고 헌금한 것인데, 남포가 아니면 안 간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동행하기 어렵겠습
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이 일로 인해 잔뜩 부담감을 떠안은 채 방북 길을 나서게 되었다. 동행하는 일행은 부산지부의 네 교회 목사님들이 아
닌, 서울대학교병원의 의공기술자들이었다. 당시 영락교회와 협력하여 신의주 평안북도 소아병원 현대화사업을 진행
하고 있던 나는 재단 부산지부 결성에 맞춰 남포시 소아병원 현대화사업을 소개했다.
이에 부산지부는 사직동교회, 신흥교회, 부산북교회, 남천교회 네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앰블란스와 치과 유니체어 등
을 남포소아병원으로 보낸 것이다. 이 사업은 4월에 현장을 모니터링하기로 합의되었으나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약속
이 자꾸 미루어지고 있었다.
남포시 소아병원
그래서 나는 평양에 도착한 날부터 왜 남포소아병원 모니터링이 불가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추궁한 끝에 그 이유를 들
을 수가 있었다. “금년 4월 15일이 태양절 90돌인데, 보건성에서는 기념사업으로 만경대구역병원 현대화를 추진하기
로 했지만 예산이 없어서 애를 먹던 중, 때마침 남포항에 들어온 신형 의료설비가 있기에 만경대구역병원으로 옮겨 놓
았습니다.” 태양절은 북한에서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하여 그가 태어난 4월 15일(1912년생)
을 가 리키는 말이다.
한편 2000년부터는 김정일에게도 21세기의 태양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북한 실상을 잘 아는 나로서는 충분히 수긍 가
는 사연이었지만, 처음부터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계속 유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원
자의 신뢰를 잃으면 재단을 운영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시정 조치와 재발 방지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
를 두고 며칠간 언쟁이 계속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책임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항의의 표시로 방문 일정
을 중단하고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방북은 서울대병원이 제공한 심혈관조영촬영기를 평양의학대학병원에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당초 열흘간의 일
정이었으나 북한이 공식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책임 있는 간부들은 만남
을 회피했고, “철수하면 우리는 어떡합니까?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실무자만 찾아와서 사정할 뿐이었다.
이번 방북은 서울대병원이 제공한 심혈관조영촬영기를 평양의학대학병원에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당초 열흘간의 일
정이었으나 북한이 공식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책임 있는 간부들은 만남
을 회피했고, “철수하면 우리는 어떡합니까?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실무자만 찾아와서 사정할 뿐이었다.
평양의대병원에 설치된 심혈관조영촬영기
나는 “서울에 돌아가지 않고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을 터이니 다시금 초청하시오. 이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책임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 말을 남긴 후 우리 일행은 베이징으로 철수했다. 베이징에 머무른 지 4일째 되던 날 저녁에 재단 베이징 사무소의 신동성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려항공에서 연
락이 왔는데 평양을 단체 방문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 보네요.”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북측에서 이런 방법
으로 연락을 취하는가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일단 우리가 만날 대상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다음날 오후 신 소장은 나를 리도호텔에 있는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이하 범태)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
곳에서 범태 이도경 회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초면이었지만 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당시 범태
이도경 회장은 아태를 제치고 태양절 90돌을 기념하는 아리랑축전의 관광객 유치 책임을 맡아 대북 사업가들 사이에
는 새롭게 떠오르는 실세로 주목받고 있었다.
고려항공 여객기 - 범태와 고려항공은 아리랑축전 관광객 유치 공동 사업자였다.
이 회장은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양에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지난 금요일
저녁에 고려호텔 2층 찻집에서 아태 김영철 참사를 만나서 항의하던 장면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생
각나지 않아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그가 말을 이었다.
“그냥 서울로 돌아가면 너무 속이 상하실 것 같아서 내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재단에서 북한선교단을 조직해서
평양을 단체 방문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는 내 입장과 형편을 너무나 소상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람이 나를 시험하는구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의 두 귀는 이미 닫힌 상태였다.
따라서 그가 하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워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왜 북한선교 방문단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느냐?” “아니, 제가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것이 네가 감당할 일이냐?” 2년 전 구충제 사업을 제안 받고나서 주저했던 나에게 들려왔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나는 이전처럼 또다시 내 생각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확
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6·15 남북공동선언 2주년이 다가오는 것을 감안해서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 예
배드린다면 나름대로 의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태 측에 남북연합예배를 드리자는 제안하기로 다짐하며 잠
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범태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나는 지난 밤 생각해 두었던 남북연합예배를 제안하면서
"160석짜리 고려항공으로 뭘하느냐. 이왕 방북 초청하려면 300석짜리 대한항공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해라."고 수
정안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즉석에서 나의 제안에 대해 동의하였다.
이로써 대한항공을 이용하여 인천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으로 직행하는 대규모 단체방북을 추진하기로 합의가 된 것
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때와 동일한 서해안 직항로를 이용한 하늘길이 민간차원에서도 열린 것이다. 나는 이도
경 회장과의 면담을 마치자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우두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남포소아병원 의료설비 모니터링 문제로 평양을 떠난 지 꼭 20여일만의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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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나를 속일지라도(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2회)
경천애인300 ・ 2020. 8. 15. 0:29 URL 복사 이웃추가
저녁식사를 마치자 이내 범태의 평양 책임자인 이범진 부회장이 나타났다. 먼저 아리랑공연영접위원회 관계자들이 결
례를 범한 것에 대한 사과부터 했다. 그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아리랑공연만 관람해주면 남북연합예배는 물론
합의서에 명시된 모든 일정을 보장하겠다면서, 제발 오늘 저녁에 아리랑공연을 관람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내일부터 일정을 정상화하면 아리랑공연은 월요일에 희망자에 한해 반드시 관
람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남북 연합예배를 드린 후 아리랑공연 관람 희망자를 파악해 숫자를 알려 드리
겠습니다.” 이미 수 십 차례 그들을 상대해 본 경험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재단의 입장대로 희망자만 관람하되, 일자
는 토요일로 변경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재단 임원들이 상의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양측이 한 걸음씩 양보하여 상황이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에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의 김인철 상
무위원이 고려호텔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어제 범태와 상의한 것은 인정할 수 없으니 오늘 저녁 방북단 전원이 공연
을 관람하시오!” 이어 김 위원은 협박조로 말을 덧붙였다. “만약 전원이 관람하지 않으면 관람자는 입국시키고 관람하
지 않은 사람은 불법 입국자로 간주해 추방할 것이니 오후 3시까지 화답하시오.”
방북단이 무비자로 북한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연을 관람하지 않은 사람은 ‘불법 입국자’로 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에 재단 임원들은 곧바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대다수의 의견은 “북측에서 합의한 일정을 이행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
을 바에는 그냥 서울로 돌아가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나는 이런 입장을 북측에 전달하고 베이징을 통해 통일부와 대
한항공에 소식을 전했다.
이후 방북단은 고려호텔 밖으로 출입이 통제된 채 호텔 안에서만 지내게되었다. 우리가 무비자로 입국했기 때문에 호
텔 밖 출입이 통제된 것이지만, 북측은 호텔 내에서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방북단은 삼
삼오오 그룹별로 모여서 대화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QT선교회의 김양재 집사(현, 우리들교회
목사)가 즉석에서 진행하는 신앙강좌가 인기를 끌었다. 일행 중에는 매점이나 책방, 사우나 등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외부로의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되었지만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5년에 건립되어 북한을 대표하는 고려호텔 전경
재단의 강경한 대응에 북측은 당황한 듯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범태의 이범진 부회장을 내세웠다. 이른바 타
협을 시도해 온 것이었다. “그간의 일은 저희가 사과하겠습니다. 대신에 어제 합의한 대로 희망자에 한해 아리랑축전
을 관람해주십시오. 그러면 이후 일정은 꼭 보장하겠습니다. 기상 예보에 월요일은 비가 온다고 하니, 대신 오늘 저녁
에 아리랑축전을 보도록 협조해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북측에서 예상 외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이 부회장의 간청도 있어서 재단 임원들과 협의한 결과, 북한의 사과를 수용하
고 희망자에 한해 아리랑축전을 관람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 그날 저녁식사를 시작하기 직전, 방북단을 대상으로 아리
랑공연 관람 희망자를 신청 받았다. 모두 103명이 희망했는데 그중에는 서울대학교 미학과의 김문환 교수처럼 아리랑
공연 관람이 방북의 제일 큰 관심사였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에서 구경을 하고 싶어 했다.
나는 방북단을 대표하여 1호 차에 탑승하였고, 김인철 상무위원이 선도차를 타고 공연장인 능라도 5.1경기장까지 에
스코트했다. 공연료는 A석 300달러, B석 150달러, C석 80달러여서 단체로 C석을 예약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대표
단의 좌석을 전원 로열박스에 위치한 A석으로 배치했다. 그뿐 아니라 아예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10분 정도
늦게 입장하자 그때서야 개막 팡파르를 울리는 것이, 그날 공연이 남한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능라도 5.1경기장 전경
그로부터 5년 후 노무현 대통령까지 관람한 아리랑공연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나는 그때까지 북한을 수
시로 방문했지만 통일부로부터 아리랑공연을 관람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아리
랑공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 공연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관람한
자리에서 본 것을 시작으로 그 전달인 5월 방북 때까지 거의 매번 공연을 관람했다.
구경거리가 없는 북한 실정상 그들이 안내하는 곳이라고는 교예(서커스) 극장,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묘향산의 국제친
선전람관 등 늘 뻔한 코스였다. 그런데 5월 말쯤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 아리랑공연의 이적성을 지적하기 시작한 후
통일부도 “방북 시 아리랑공연 관람을 금지한다.”는 지침을 보내왔다. 북한이 범태를 내세워 베이징에서 아리랑축전
에 참가할 관광객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 북한의 체제 선전과 외화벌이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통일부는 재단의 방북을 승인하면서 처음에는 “절대 관람 불가” 방침을 밝혔다가, 나중에는 “부득이한 경우 일
부만 관람할 것”으로 조건이 변경되었고, 출국 직전에는 통일부 담당 국장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북한이 공연
관람을 강요할 경우 희망자만 관람을 허용하되, 1회에 관람객이 30명을 넘지 않게 협조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렇듯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중적인 잣대로 오락가락했다. 현대아산을 통한 대북 송
금에서 보듯이 정부가 직접 나서기가 곤란한 것은 민간에게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간에 선 기업이나
NGO의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경우도 그러했다. 현장에 정부 관계자도 여럿 있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
았고, 서로 책임소재만 따질 뿐이었다. 북한 측에서는 “아리랑공연을 안 보려는 이유가 통일부 때문이냐?”고 거듭 물
었지만 “그렇다.”고 답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통일부와의 약속을 지키고 실정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년 후 노무현 대통령까지 관람한 아리랑공연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나는 그때까지 북한을 수
시로 방문했지만 통일부로부터 아리랑공연을 관람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아리
랑공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 공연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관람한
자리에서 본 것을 시작으로 그 전달인 5월 방북 때까지 거의 매번 공연을 관람했다.
구경거리가 없는 북한 실정상 그들이 안내하는 곳이라고는 교예(서커스) 극장,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묘향산의 국제친
선전람관 등 늘 뻔한 코스였다. 그런데 5월 말쯤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 아리랑공연의 이적성을 지적하기 시작한 후
통일부도 “방북 시 아리랑공연 관람을 금지한다.”는 지침을 보내왔다. 북한이 범태를 내세워 베이징에서 아리랑축전
에 참가할 관광객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 북한의 체제 선전과 외화벌이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통일부는 재단의 방북을 승인하면서 처음에는 “절대 관람 불가” 방침을 밝혔다가, 나중에는 “부득이한 경우 일
부만 관람할 것”으로 조건이 변경되었고, 출국 직전에는 통일부 담당 국장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북한이 공연
관람을 강요할 경우 희망자만 관람을 허용하되, 1회에 관람객이 30명을 넘지 않게 협조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렇듯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중적인 잣대로 오락가락했다. 현대아산을 통한 대북 송
금에서 보듯이 정부가 직접 나서기가 곤란한 것은 민간에게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간에 선 기업이나
NGO의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경우도 그러했다. 현장에 정부 관계자도 여럿 있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
았고, 서로 책임소재만 따질 뿐이었다. 북한 측에서는 “아리랑공연을 안 보려는 이유가 통일부 때문이냐?”고 거듭 물
었지만 “그렇다.”고 답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통일부와의 약속을 지키고 실정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리랑축전의 어린이 공연
이날 일부 방북단원들의 아리랑공연 관람을 계기로 호텔 밖 출입이 자유로워졌고, 그중에는호텔 앞 포장마차에서 북
한 안내원들과 밤을 새우며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아리랑영접위원회는 또다
시 입장을 번복했다.
일요일 오전 0시 43분, 모두가 곤하게 잠든 시각이었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려서 받아보니 아리랑영접위원회 김
인철 상무위원이었다. 지금 당장 만나자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급히 3층의 면담장으로 내려가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과연 김 위원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당혹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오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의 연합예배는 없습니다. 대신 묘향산에 관광이나 가십시오.” 순간 나는 뒤통수를 호
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그들의 간계에 내가 당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약속 위반이니 앞으로 발생
하는 모든 문제는 당신이 책임지시요!” “선생들 일정은 범태와 약속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
오.” 아무리 입씨름을 해도 타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북한이다.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약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2002년 6월 16일 평양에서 맞이하는 주일 아침이다. 7시부터 시작되는 아침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삼삼오오 3층 대
식당으로 모여 들었다. 임원들은 모두다 남북 연합예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는 눈치였다. 그리하여 내린 차선
책은 아침 금식을 선포하고 그 자리에서 방북단이 자체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그들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자는 순수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한민족복지재단 #고려호텔 #아리랑축전 #큐티선교회 #능라도51경기장 #통일부 #범태
==
==
약전농장에서 본 통일의 가능성(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8회)
경천애인300 ・ 2020. 8. 26. 6:36 URL 복사 이웃추가
남한에서도 아직 보급단계인 복토직파농사를 북한에서 시행하려니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방북을 마
치고 돌아와 곧장 통일부에 결과 보고서를 보내 복토직파농사에 대한 입장을 구했다. 특별한 의견 개진이 없이 “통일
부 입장은 평양보다는 지방에서 시행하는 사업에 더 비중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 농업 전문가로서 통일부
자문을 담당하던 농촌경제연구원의 김운근 박사에게 전화했더니 “통일부에서는 그동안 평양보다는 내지를 우선하고
가급적 규모가 큰 사업을 우선 선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단체에서는 농사를 크게 짓고 싶어도 북한에서 잘 호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단에서는 어떻게 800㏊나 맡게 되었습니까?” 그는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약전농장의 복토직파농사야말로 통일부 방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원안대로 추진하기로 했는데 시기
가 문제였다. 남북협력 사업은 매년 6월에 선정하는 것에 비해 농업협력 사업은 4월 이전에 시행해야 되기 때문에 기
금사업 선정에 차질이 생기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감내해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농수산사업단’처럼 정부의 특
별 배려로 연간 20~30억 원의 기금을 지원받는 단체나, 경기도와 공동으로 농사짓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경우
는 예외이지만 순수 민간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은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고 만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남북협력기금 사업은 개별사업과 합동사업으로 구별되었는데, 개별사업은 지원규모가 적지만 각 분과위원회에서 선
정하는 합동사업은 전체 사업비의 50% 범위 안에서 최대 10억 원까지 지원 받을 수 있다. 그때까지 합동사업은 분과
별로 1개씩 선정하여 북민협 상임운영위원회에 보고하면, 통일부 민관정책협의회에서 추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분과위원회에서 선정된 사업이 탈락한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NGO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받아
농림축산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복토직파농사는 농림축산분과 합동사업으로 선정되었다. 각 분과위원장
은 북민협 상임운영위원을 겸하면서, 민관정책협의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했다.
복토직파농사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연간계획서를 합의할 때, 4월부터 10월까지는 월 2회씩 14 회의 정기 방문을 합의했는데 거의 착오 없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남한 NGO가 북한을 2주마다 정기 방문한다는 자체
가 이제까지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일정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자 그동안 부정확한 스케줄로 인해 방북에
참여하지 못하던 임원들이 동행할 수 있게 되었고, 박은조 이사장, 이영일 공동대표, 문병호・김형오 이사도 현장을
방문했다. 이영일 공동대표와 김형오 이사는 방북을 마친 후 각각 신동아와 월간조선에 방북기도 게재했다.
약전농장을 찾은 재단 임원들 - 좌로부터 이영일(전 국회의원), 필자, 박은조 목사
방북단은 8명으로, 나와 박광호 교수가 고정멤버였고, 재단 직원 1명, 농업 전문가 1~2명, 후원자 대표 3~4명으로 구
성되었다. 당시에는 연간 방북 인원이 70만을 헤아리고, 개성과 금강산을 제외한 내지 방문자만 10만에 달했지만 북
한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교제하며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 대표단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금상
첨화錦上添花 격으로 약전농장의 음식 맛은 일품이었다. 한번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약전리농장의 토장국 맛을 잊
지 못할 정도였다.
약전농장에서 농장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재단 방문단
그때 농장원들과는 물론 인근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회장 선생. 왜 뜨락또르에 조선말은 안
적혀 있고, 영어만 적혀 있습니까?” “미국 수출용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니, 미국으로 수출도 합니까?” “미국 뿐 아
니라 전 세계로 나가지요.”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끝이 없었다.
약전농장 주민이 뜨락또르라고 부르던 트랙터를 사용하는 모습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개성에서 면담할 때 트랙터는 협동농장에 있기 때문에 복
토직파기만 필요한 것으로 얘기가 되었는데, 막상 들어가서 실물을 살펴보니 1960년대 생산한 천리마뿐이었다. 엔진
은 28마력이었으나 너무 낡아서 15마력 정도의 성능으로 복토직파기를 들어 사용하려면 최소 45마력 이상이 필요하
기 때문에 용도에 맞는 트랙터는 없었다. 결국 우리가 트랙터도 가져가야만 했다. 그런데 통일부는 트랙터를 전략물자
로 분류해서 40마력 이상의 반출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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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개성에서 면담할 때 트랙터는 협동농장에 있기 때문에 복
토직파기만 필요한 것으로 얘기가 되었는데, 막상 들어가서 실물을 살펴보니 1960년대 생산한 천리마뿐이었다. 엔진
은 28마력이었으나 너무 낡아서 15마력 정도의 성능으로 복토직파기를 들어 사용하려면 최소 45마력 이상이 필요하
기 때문에 용도에 맞는 트랙터는 없었다. 결국 우리가 트랙터도 가져가야만 했다. 그런데 통일부는 트랙터를 전략물자
로 분류해서 40마력 이상의 반출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개성에서 회담하는 모습(2005.12.9)
이에 국회 농수산위원회 위원인 김형오 의원이 적극 나서 불합리성을 지적해 주었다. 현장을 가 본 경험이 불합리한
규제를 푸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김형오 의원도 보람을 느꼈는지 그의 방북기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 글이 홈피
에 오르는 시간 한민족복지재단에서 마련한 트랙터 5대와 복토직파기 2대가 북한 측에 전달될 것이다. 기쁘다. 4월 15 일에 배로 실어 나갔다고 한다.”
복토직파기를 끌어주는 트랙터
나중에 18대 국회의장을 지낸 김형오 의원은 매우 합리적인 성품이었다. 나와 이름이 비슷한데다가 고향도 이웃해 있
어서 친척관계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민족의 장래와 국가 비전에 관한 생각이 통하는 바가 있어 서로 교제하는 사
이였을 뿐 혈연관계는 전혀 없다. 김 의원과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단에서는 라진에 세울 제약공장 설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화의 천사’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여의도침
례교회에 다니던 김 의원 딸이 중등부 교사이던 정영숙 홍보대사로부터 얘기를 듣고 가입을 권유한것이 계기가 되었
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김 의원은 변함없이 회원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을 보고 이사회에 김 의원을 법인이사
로 추천했는데, 그때까지 현역 정치인은 임원으로 영입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었다. 나는 김 의원이 크리스
천이며, 회원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한다는 이유로 추천하였고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약전농장을 방문한 김형오 의원(앞줄 좌3)과 한국농업대학 임승달 학장(뒷줄 좌 3)
나는 복토직파농사를 진행하면서 “만약 김형오 의원이 없었더라면…”하고 가정해 본 적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
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심한 반대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통일부와 농수
산부 공무원을 불러 설득해주었다. 당리당략을 떠나 ‘어떤 것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 되는가?’ 하는 입장에서 북한의
상황을 설명하고, 정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수고해 준 덕분에 여러 차례 힘든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다.
재단의 운영이사로 봉사하는 열린우리당 이광철 의원도 약전농장을 방문했다. 전주 출신인그는 선친이 목사님으로 일
찍부터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문익환 목사의 수행 비서를 지내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한 번도 북
한에 다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약전농장을 다녀온 후부터 그동안 자신이 꿈꾸던 통일운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며 열심
히 재단의 농업협력 사업을 대변해주는 자원 홍보대사가 되었다.
약전농장에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임원들과 외국 기업인도 방문했다. CBMC의 신용한 중앙회장과 동행한
NBI 이상숙 위원장은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행동이 반듯하고 말씀에는 조리가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평범한 할
머니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래서 붙여준 별명이 ‘젊
은 누님’이었다. 내게는 기도의 어머니인 이상숙 권사가 그들에겐 젊은 누나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CBMC NBI’에서 약전농장에 복토직파기를 지원하였고, 이듬 해에는 새로운 사업장으로 추가된 순안농장의 복토직파농사를
후원하게 되었다.
북한 사람들이 '젊은 누나'라고 부르던 이상숙 권사(주. 소예 회장)와 필자
독일계 다국적기업퀴네앤드나겔Kuehne&Nagel의 비트마이어 사장도 방문단의 일원이었다. 서양인이 바라보는 북
한 풍경도 신기했지만, 서양인을 바라보는 북한 사람들의 시선도 호기심으로 빛났다. 방문단에는 영국 유학 중 방학을
맞아 봉사활동에 참가하려는 국제정치학 지망생도 있었다. 이처럼 고등학생에서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국적을 초
월한 약전농장 방문단은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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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농장에서 본 통일의 가능성(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8회)
경천애인300 ・ 2020. 8. 26. 6:36 URL 복사 이웃추가
남한에서도 아직 보급단계인 복토직파농사를 북한에서 시행하려니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방북을 마치고 돌아와 곧장 통일부에 결과 보고서를 보내 복토직파농사에 대한 입장을 구했다. 특별한 의견 개진이 없이 “통일부 입장은 평양보다는 지방에서 시행하는 사업에 더 비중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 농업 전문가로서 통일부자문을 담당하던 농촌경제연구원의 김운근 박사에게 전화했더니 “통일부에서는 그동안 평양보다는 내지를 우선하고 가급적 규모가 큰 사업을 우선 선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단체에서는 농사를 크게 짓고 싶어도 북한에서 잘 호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단에서는 어떻게 800㏊나 맡게 되었습니까?” 그는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약전농장의 복토직파농사야말로 통일부 방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원안대로 추진하기로 했는데 시기가 문제였다. 남북협력 사업은 매년 6월에 선정하는 것에 비해 농업협력 사업은 4월 이전에 시행해야 되기 때문에 기금사업 선정에 차질이 생기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감내해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농수산사업단’처럼 정부의 특별 배려로 연간 20~30억 원의 기금을 지원받는 단체나, 경기도와 공동으로 농사짓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순수 민간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은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고 만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남북협력기금 사업은 개별사업과 합동사업으로 구별되었는데, 개별사업은 지원규모가 적지만 각 분과위원회에서 선정하는 합동사업은 전체 사업비의 50% 범위 안에서 최대 10억 원까지 지원 받을 수 있다. 그때까지 합동사업은 분과별로 1개씩 선정하여 북민협 상임운영위원회에 보고하면, 통일부 민관정책협의회에서 추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분과위원회에서 선정된 사업이 탈락한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NGO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받아
농림축산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복토직파농사는 농림축산분과 합동사업으로 선정되었다. 각 분과위원장은 북민협 상임운영위원을 겸하면서, 민관정책협의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했다.
복토직파농사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연간계획서를 합의할 때, 4월부터 10월까지는 월 2회씩 14 회의 정기 방문을 합의했는데 거의 착오 없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남한 NGO가 북한을 2주마다 정기 방문한다는 자체가 이제까지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일정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자 그동안 부정확한 스케줄로 인해 방북에 참여하지 못하던 임원들이 동행할 수 있게 되었고, 박은조 이사장, 이영일 공동대표, 문병호・김형오 이사도 현장을 방문했다. 이영일 공동대표와 김형오 이사는 방북을 마친 후 각각 신동아와 월간조선에 방북기도 게재했다.
약전농장을 찾은 재단 임원들 - 좌로부터 이영일(전 국회의원), 필자, 박은조 목사
방북단은 8명으로, 나와 박광호 교수가 고정멤버였고, 재단 직원 1명, 농업 전문가 1~2명, 후원자 대표 3~4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시에는 연간 방북 인원이 70만을 헤아리고, 개성과 금강산을 제외한 내지 방문자만 10만에 달했지만 북한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교제하며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 대표단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금상첨화錦上添花 격으로 약전농장의 음식 맛은 일품이었다. 한번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약전리농장의 토장국 맛을 잊
지 못할 정도였다.
약전농장에서 농장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재단 방문단
그때 농장원들과는 물론 인근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회장 선생. 왜 뜨락또르에 조선말은 안
적혀 있고, 영어만 적혀 있습니까?” “미국 수출용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니, 미국으로 수출도 합니까?”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로 나가지요.”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끝이 없었다.
약전농장 주민이 뜨락또르라고 부르던 트랙터를 사용하는 모습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개성에서 면담할 때 트랙터는 협동농장에 있기 때문에 복토직파기만 필요한 것으로 얘기가 되었는데, 막상 들어가서 실물을 살펴보니 1960년대 생산한 천리마뿐이었다. 엔진은 28마력이었으나 너무 낡아서 15마력 정도의 성능으로 복토직파기를 들어 사용하려면 최소 45마력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용도에 맞는 트랙터는 없었다. 결국 우리가 트랙터도 가져가야만 했다. 그런데 통일부는 트랙터를 전략물자로 분류해서 40마력 이상의 반출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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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 창조를 위한 진통(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29회)
경천애인300 ・ 2020. 8. 27. 0:48 URL 복사 이웃추가
4월 초 한국마사회가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공모하고 있었다. 나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상의하는 이영일 공동대표와 함께 이우재 마사회장을 찾아서 복토직파농사에 대해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학창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부탁에 이 회장은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예상되는 총 사업비는 16억 원 정도인데, 재단이 마련해야하는 8억 원 가운데 마사회 공모에서 1/4 또는 1/8을 후원받으면 후원자 발굴에도 그만큼 도움이 된다. 예상 밖으로 일이 쉽게 풀리는 듯했으나 바로 난관에 부딪쳤다.
북한에서는 매년 봄이 되면 모내기를 하기 위해 비닐박막을 요청해 온다. 그래서 통일부의 조용남 사회문화국장과 북민협 상임운영위원들이 함께 모여 지원 방안을 논의했는데 결론은 각 민간단체의 모금액만큼 정부에서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하는 1:1 매칭 펀드다. 전체 목표를 2천만㎡로 결정하고 각 단체가 얼마씩 분담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가 시작됐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모내기를 없애려고 복토직파농사를 시작하는 재단 입장에서 모내기용 비닐박막 구입비용을 모금하는 것은 명분에도 맞지가 않았고, 그렇다고 예비비로 지출할만한 예산도 없었다.
대북 지원단체들의 비닐 박막 지원(2005.3.9)
나는 “한민족복지재단은 이 사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복토직파농사를 하루 속히 정착시켜 앞으로는 비닐박막을 보낼 필요가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큰 몫을 부담할 것으로 생각한 단체가 빠지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복토직파농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NGO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NGO들 보다 각 단체와 연계하여 농업협력사업을 하는 기업들의 반대 입장이 강했다.
복토직파농사는 모내기가 없으니 모판을 만들 필요가 없고 따라서 비닐, 육묘상자, 상토, 이앙기 제조업체 등에서는 눈에 가시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 이앙기는 2006년 보급율이 25.6%로 전년대비 2% 증가에 그치며 시장성이 한계에 이르자 북한으로 눈을 돌려 몇 년째 노력을 기울였다. 2005년에 경기도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손잡고 30㏊의 벼농사를 시작하면서 이앙기 지원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평양시 강남군 당곡리에 100㏊로 확대했다.
당곡리 협동농장 모내기 행사를 하기위해 평양을 방문한 손학규 경기도 지사(2006.6.3)
그런데 한민족복지재단이 첫해부터 800㏊의 복토직파농사를 시작하자 남북농업협력사업의 주도권을 빼앗길까봐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복토직파농사를 반대하는 세력은 기업들에 이어 농학계 인사에다 농진청 공무원까지 가세했다. 그 중심에는 농촌진흥청의 K 과장이 있었다. 그는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박광호 교수보다 먼저 직파농사를 연구한 농학자였다.
그의 지론은 한국에는 직파농사가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노골적으로 말하면 박 교수의 복토직파농법은 엉터리라는 주장이다. 그런 그가 국제협력 업무를 맡고 있으니, 북한이나 해외에서 시행하려는 농업프로젝트 심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첫 번째로 마사회 공모사업에 불똥이 떨어졌다. 이유는 기술상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제20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기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박광호 교수(2011.10.25)
“복토직파농사는 파종 전후로 강우 시에는 파종 및 벼 포기 수 확보가 불안정하고, 도복이 발생하기 쉬우며, 잡초성 벼방제에 어려움이 있다.”는 세 가지의 논리는 바로 K 과장의 주장이었다. 이는 통일부와 지자체의 남북협력사업 선정에 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연이은 탈락 소식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심사 내용을 공개해달라는 요구에도, 재심사 요청에도 응할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래서 통일부에다가 정보공개청구를 요구하기로 하자, 그제야 나온 답변이 마사회 공모 때와 꼭 같았다.
학계에서 이앙과 직파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비율이 9: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그나마 현직 대학 교수 중에는 직파연구자가 전무했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이 이앙 전문가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심사위원을 K 과장이 추천하니 결과는 빤한 일이었다. 탈락 이유를 신뢰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하지만, 공무원 한명의 주관적 입장때문에 구조적으로 해결방안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일부는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심사위원을 추천 받아 공정하게 심사했기 때문에 아무 하자가 없다는 답변만 하다가, 계속하여 항의하자 올해는 시범적으로 10㏊만 경작하고 내년에 가서 다시 검토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미 800㏊의 농사가 시작되었고, 소요 예산의 80%가 집행된 마당에 담당 공무원이 바뀌었다고 선정 방법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작태였다.
4월부터 시작되는 농업협력사업을 6월에야 선정하는 것부터 매년 문제점으로 제기되었지만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관행이었다. 하는 수없이 현장을 보고 온 이광철 의원에게 상의한 후, 그의 주선으로 이종석 통일부장관을 만나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여당소속 이광철 의원
“복토직파농사는 파종 전후로 강우 시에는 파종 및 벼 포기 수 확보가 불안정하고, 도복이 발생하기 쉬우며, 잡초성 벼방제에 어려움이 있다.”는 세 가지의 논리는 바로 K 과장의 주장이었다. 이는 통일부와 지자체의 남북협력사업 선정에 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연이은 탈락 소식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심사 내용을 공개해달라는 요구에도, 재심사 요청에도 응할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래서 통일부에다가 정보공개청구를 요구하기로 하자, 그제야 나온 답변이 마사회 공모 때와 꼭 같았다.
학계에서 이앙과 직파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비율이 9: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그나마 현직 대학 교수 중에는 직파연구자가 전무했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이 이앙 전문가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심사위원을 K 과장이 추천하니 결과는 빤한 일이었다. 탈락 이유를 신뢰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하지만, 공무원 한명의 주관적 입장때문에 구조적으로 해결방안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일부는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심사위원을 추천 받아 공정하게 심사했기 때문에 아무 하자가 없다는 답변만 하다가, 계속하여 항의하자 올해는 시범적으로 10㏊만 경작하고 내년에 가서 다시 검토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미 800㏊의 농사가 시작되었고, 소요 예산의 80%가 집행된 마당에 담당 공무원이 바뀌었다고 선정 방법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작태였다.
4월부터 시작되는 농업협력사업을 6월에야 선정하는 것부터 매년 문제점으로 제기되었지만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관행이었다. 하는 수없이 현장을 보고 온 이광철 의원에게 상의한 후, 그의 주선으로 이종석 통일부장관을 만나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여당소속 이광철 의원 뿐 아니라, 야당의 원내대표로서 현장을 방문했던 김형오 의원도 이종석 장관에게 방북 당시의 소감을 전해주었다.
이광철 의원의 방북을 보도한 <전북일보>(2006.6.8)
이 장관은 담당 팀장을 불러 복토직파농사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합동사업의 원래 취지대로 3년간 지원방안을 강구하고 문제점은 통일부에서 농촌진흥청과 협조하여 보완하도록 지시했다. 북한문제에 정통한 학자 출신의 이 장관은 복토직파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 공무원과는 달랐다. 실제 5월 29일 언론에서 “남한정부가 북한에 지원해준 비료중에서 2만5천톤이 태국으로 수출되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통일부가 큰 홍역을 치룬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며칠 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태국에서 한국산을 북한산으로 잘못 기재한 오기라고 밝혀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국회에서는 “그것이 아니라면 북한 농민들이 한국에서 보낸 비료를 사용하는 자료를 공개하라”는 야당의원의 요구에 어쩔 줄 모르다가, 재단에서 약전리농장을 모니터링하는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자료를 제출해서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 장관은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미 국무성 힐 차관보에게도 사진을 보내고 오해가 없도록 설명했다고 알려주었다. 힐 차관보 역시 주한 대사 시절에 우리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나와 몇 차례 만나서 대활르 나눈 적이 있었다.
한국 정부가 대한적십자사 명의로 북한에 지원한 비료
이처럼 해마다 우리 정부가 많은 양의 식량과 비료를 지원하면서도 늘 모니터링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오해를 사고 있었으며, 이것은 민간이나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북한은 접근이 힘들고 투명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국가라 이런 점에서 한민족복지재단이 내지 깊숙한 농촌에 들어가 대규모의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통일부에서는 재심의 과정을 거친 후에 한민족복지재단이 주관하고 선한사람들과 CCC(한국대학생선교회)가 공동참여하는 ‘복토직파농법을 이용한 복합 영농사업’을 북민협 농림축산분과위원회의 합동사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타 분과 합동사업이 3년씩 장기 사업인데 비해, 복토직파농사는 기간이 1년으로 결정되었고, 첫해 성과를 확인한 후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는 조건이었다.
ccc 대북지원사업의 상징이던 고 이관우 목사(2017.6.29 사망)
그러나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복토직파농사가 남한 정부에서 큰 고비를 넘기자,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북측 민화협 관계자에게 복토직파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심지어 나와 박 교수에 대한 인신공격도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시절, 서경석 목사로부터 절대 남의 밥그릇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내가 멋모르고 남의 밥그릇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것도 그냥 밥그릇이 아니라 벌집이었다. 사태가 도를 넘자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북한 사람들이오히려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회장 선생 새 역사 창조에는 반드시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수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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