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중’이란 병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국의 속칭 ‘혐중’ 역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근대에 접어들어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대상이 되면서, 조선의 근대주의자들에게 과거의 지역적 종주국이었던 중국은 빨리 벗어나야 할 ‘전근대’, 신속히 거리를 두어야 할 ‘타자’를 대표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립문의 ‘독립’이란 중국(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 것이었다.
수정 2025-04-30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2025년 4월17일, 나는 몇개월 만에 그리운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됐다. 세미나 참석 건이 있어서 부활절 휴가를 이용해 서울에 간 것이다. 한국에 다시 온 것은 매우 기뻤지만, 바로 그날 저녁에 너무나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됐다. ‘윤 어게인’(Yoon again·윤석열을 다시) 집회를 연 윤석열 전 대통령의 일부 광적 지지자들은, 그날 저녁 집회가 해산된 뒤에 건국대학교 근처의 속칭 ‘양꼬치 골목’으로 갔다. 이들은 주로 중국 동포들이 운영하는 점포와 식당이 밀집한 거리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폭언을 퍼붓고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충돌 끝에 한 가게의 중국인 직원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이송됐다. 일제강점기에나 종종 있었던 중국인을 향한 물리적인 폭력의 그림자를, 해방 이후로는 최초로 이제 그야말로 ‘다시’ 보게 됐다.
일본에서 자행되고 있는 극우 ‘재특회’의 망동을 그대로 닮은 이와 같은 폭거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적 폭력의 피해자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저질러지게 된 것일까? ‘재특회’의 폭력은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한국의 속칭 ‘혐중’(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 역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근대에 접어들어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대상이 되면서, 조선의 근대주의자들에게 과거의 지역적 종주국이었던 중국은 빨리 벗어나야 할 ‘전근대’, 신속히 거리를 두어야 할 ‘타자’를 대표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립문의 ‘독립’이란 중국(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 것이었다. 또한 1882년의 임오군란 이후부터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자, 개화파들은 당시에 중국 노동자들의 유입을 막았던 새로운 ‘문명의 중심’, 즉 미국 못지않게 그들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을 ‘근대인의 미덕’으로 여겼다.
“청인(중국인)들이 개화한 나라에 가서도 저들의 야만의 풍속을 고치지 않은즉 그 나라 사람과 당초에 섞이지 못하고 대접받기로 그 나라 안에서 제일 천한 인종이 되니 어찌 교제가 되리오? 근년에 청인들이 조선으로 오기 시작하여 조선 사람들이 할 일과 할 장사를 빼앗아 가며, 가뜩이나 더러운 길을 더 더럽게 하며 아편을 조선 사람 보는 데에 피우니 청인들이 조선에 오는 것은 조금도 이로운 일이 없고 (……) 조선 사람들이 할 만한 일을 외국 사람들이 와서 하고, 돈을 모은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니 어찌 거머리와 다름이 있으리오?”
옛날 말투만 아니었다면 요즘의 ‘혐중’ 전단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였을 만한 글이지만, 이는 서재필이 쓴 것으로 추측되는 ‘독립신문’ 1896년 5월21일자 논설의 일부다. 그 당시 강자였던 미국인을 선망하여 스스로 그들과 닮아가길 원했던 개화파 인사들의 중국인 멸시관 역시 그 당시 미국인의 인종주의적 중국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교 사업가들을 경쟁자로 인식했던 일제강점기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역시 화교들을 종종 ‘아편 밀매’, ‘인신매매’, ‘부정행위’ 등과 엮어서 ‘위험하고 더러운 사람’으로 묘사했다. 중국인 주인공을 “우리 여인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죽인” 악한으로 그린 김동인의 ‘감자’(1925년)와 같은 그 시대의 문학 작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이런 인식의 틀은, 언론을 통해 일반인에게 ‘상식’으로 전달돼 ‘만보산 사건’(1931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화교 학살의 하나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배제와 동시에 조·중 연대 역시 꽃피웠다. 같은 조선의 일간지들은 중국 혁명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 1905~1938)이나 중국 혁명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인 정율성(1914~1976)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조선의 지사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중국 혁명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현장에서는 함께 싸우고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 예사였다. 나중에 북한이라는 국가의 ‘핵’이 된 김일성 부대(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 역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섞인 연합 부대였다. 혁명적 연대 이외에도 조선의 화교들과의 사업상의 협력 등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그만큼 상당히 국제화된 다민족 사회였다.
배제와 연대, 그리고 협력의 ‘삼중주’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90년대까지는 아무래도 중국에 대한 반공주의 선전과 박정희 등에 의한 화교 상업 활동 억제책 등으로 상징되는 배제가 더 우세했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광활한 중국 시장이 열리고 중국 동포를 비롯한 수십만명의 중국 공민들이 한국 국내로 이주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무엇보다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협력의 코드가 주도적이었다. 하지만, 미-중 대립이 본격화되고 사드(종말단계 고고도 지역방어) 체계의 배치가 문제로 떠오른 2017년부터 중국의 반발에 직면한 한국의 보수는 다시 1945년 이전의 중국 혐오를 연상케 하는 배제 모드로 퇴보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언론에 의해서 그 정서가 보편화됐다는 것이다.
중국인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1945년 이전에도 백해무익했다. 함께 손잡고 항일에 나서야 했던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를 희망했던 것은, 오히려 일제였다. 지금도 분절화돼가는 미국 패권 이후의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중국이란 협력의 대상이지, 배제의 대상은 절대 아니다. 국내에 와서 없어서는 안 될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된 중국 동포를 포함한 중국 공민들은, 마땅히 연대의 대상이 돼야 한다. 이런 협력과 연대가 가능하자면 한국 지식인 사회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여태까지의 중국과 중국인 인식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다. 미국의 인종주의적 중국관을 따라가고, 일제의 조-중 이간질 정책과 보조를 맞추어 중국인을 악마화했던 한국 언론의 과거도 반성의 대상이 돼야 하고, ‘만보산 사건’과 같은 중국인 학살에 대한 반성적 언급 역시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 혐오라는 사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약이란 바로 과거의 사실을 직시하고, 반인권적 행태들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연대와 협력 본위의 미래를 향해 함께 나가는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