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seung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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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잊은민족 #미래는없다 #제주43 #최초의계엄령 #진짜내란 #계엄령은언제필요한가 #처단은언제필요한가
(칼럼 링크는 댓글에)
지난 번 칼럼은 제주 4.3에 대해 썼었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언제가 한 번 꼭 써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습니다.
오사카에는 제주도 출신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노인 분들이 많은데요.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제주 4.3에 대한 여러 진실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것을 꼭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제주4.3에 대해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부분을 재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칼럼 쓰기 일주일 쯤 전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4.3에 대해서 “최초의 계엄령, 국가폭력 단죄가 안 돼서 반복된다” 등 발언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발언은 이재명 대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매년 4월만 되면 제주4.3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면서 ‘국가폭력’ 문제를 제기하곤 합니다. 이미 2003년에 제주4.3 진압과정에서의 국가 폭력에 대해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사과도 했지요.
제주4.3 진압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의 제주 4.3에 대한 발언이라든가 최근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다큐멘터리에서 거론되는 제주4.3은 맥락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국가 폭력’ 얘기만 하지요.
도대체 4.3이 뭔가요? 4.3은 날짜입니다. 1948년 4월 3일. 그 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날이 국가폭력이 자행된 날인가요?
그 날은 김달삼을 우두머리로 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새벽 야심한 시각에 제주 지역 경찰 관서 24개 중 무려 12개를 동시 공격한 날입니다. 그 날 하루에만 많은 경찰, 공무원, 그 가족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맥락이 있었습니다. 그 전 해인 1947년 3월 1일 시위 중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측면이 있죠.
하지만 이듬해 4월 3일에 벌어진 일은 단지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한 불만이나 항의 표시 정도의 수준을 뛰어 넘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습니다.
12개의 경찰 지서를 동시 습격하고, 경찰과 공무원, 그 가족을 단지 경찰, 공무원,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것입니다. 제 칼럼의 모두에 나오는 할머니들 이야기는 바로 이 날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4월3일은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였던 5.10 총선을 불과 한달여 앞두고 있던 시점입니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이 제헌의회 선거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남로당과 그에 동조하는 제주도 무장세력들은 4월 3일 이후에도 선거 방해를 광범위하게 집중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선거를 못하도록 주민들을 중산간 지대로 끌고 가거나 선거에 참여하러 가는 길목을 막고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해했습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인민대표대회 선거’라는 것을 실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코메디 같은 일인데, 제주도민들의 이름을 적거나 손도장을 받아가서 이들이 북한이 실시하는 선거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들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이 정통성있는 정부라 생각하고 북한이 실시하는 선거를 제주도에서 실행한다고 주장한 거죠.
실제로 김달삼과 그 동료들은 나중에 제주도를 탈출해 황해도 해주에 가서 북한이 주최한 인민대표자대회에 제주도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고, 주석단에 올라서 북한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김달삼이 떠나고 나서 북한 무장공비의 제2대 지휘관이 된 이덕구는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실시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북한이 ‘우리’이고 대한민국은 ‘적’인 것입니다.
이들 공산당의 선거 방해 공작과 치안 질서 파괴, 군인, 경찰,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 제주도민들에 대한 일방적인 무단 소개, 납치 등 행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댓글에 전봉관 교수님 칼럼을 달아 드릴 테니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재명 대표는
- 제주4.3 관련 계엄령이 ‘최초의 계엄령’이라고 하면서
- 이것이 국가폭력이었다고 주장하고,
- 당시 국가폭력에 대한 단죄가 안되어서
- 이번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또 다시 계엄을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재명 대표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무장세력들이 수십개의 경찰서를 동시 습격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경찰, 군인, 공무원을 단지 경찰, 군인,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대량 학살하고,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잔인하게 공개처형한다면 대통령으로서 당신은 계엄령을 선포할 겁니까? 아니면 그냥 말로만 살살 달래고 협상하자고 할 겁니까? 게다가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국민들을 겁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자기들 나름대로의 선거를 별도로 실시하겠다고 한다면요?
제가 오사카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이 공산당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실제로 봤습니다. 오빠들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네 집을 다 태워버리는 것도 봐야 했습니다. 친척 중에 경찰이 있다는 이유로 죽을까봐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이재명 대표에게 묻겠습니다. 이들도 ‘국가폭력’의 희생자입니까?
이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한 것은 당시 제주도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이며, 이들의 배후에는 소련 공산당과 그 지시를 받는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하던 조선노동당 세력이 있었습니다. 김달삼과 그 동료들이 소련이나 김일성, 노동당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저 개인 자격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리고 그게 그냥 개인적으로 경찰에 대한 원한에서 저지른 일이라면 그들은 왜 해주까지 가서 북한이 개최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고 북한에 충성을 맹세합니까?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본적 양대 기둥은 하나가 치안, 또 하나가 선거입니다. 치안과 질서가 사라진 나라는 그 순간 멸망합니다.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는 나라는 얼마 못 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간판을 내리게 됩니다.
1948년 4월 3일 그리고 그 이후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잔인한 폭력은 바로 근대 민주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양대 기둥을 겨냥하고 있던 것입니다. 경찰과 군인, 그 가족들에 대한 대규모 조직적 폭력, 선거 방해를 위한 살인, 방화, 일방적 납치, 소개 등은 근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생존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내란 행위이며, 국가폭력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폭력이자 국가 전복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 칼럼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산주의 내란 폭동 세력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서 이 공산주의 내란 폭동 세력은 사라졌나요?
소련의 지명을 받아 북한에서 집권한 김일성은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고 수령 체제라는 것을 만들어서 죽을 때까지 영구 집권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 손자까지 ‘백두 혈통’이라 이름 붙이고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과 그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세력과 그 후예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고, 사과는 커녕 모든 잘못이 오히려 남한과 일제, 미제에게 있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지 않나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과 폭력에 대해 김정은이 사과한 적 있습니까?
이재명 대표가 제주도민들의 아픔에 그렇게 공감을 하신다면 북한에 대해서 과거의 잔인한 폭력에 대해 사과하라고 말이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산당의 폭력에 희생당한 제주도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요? 이재명 대표는 왜 ‘국가폭력’만 이야기하고 공산주의 내란 폭동 세력의 폭력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합니까?
제주4.3 당시 공산당이 저지른 폭력이 사실인지 아닌지 못 믿겠다는 분들은 제주4.3 평화재단 홈페이지에 가서 자료들을 찾아 보십시오. 참고로 이 재단은 과거 좌파 정권 때 만들어진 재단입니다.
이 자료를 만든 사람들도 차마 있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제주4.3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제가 제주4.3에 대해 참고한 자료도 상당 부분이 이 제주 4.3평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얻은 것입니다.
물론 제주4.3의 진정한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것은 이재명 대표 뿐이 아닙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제주4.3은 우리 정부 수립 이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공산당의 폭동 행위에 대해 군대를 투입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저는 제 칼럼에서 당시 미 군정의 제주 도령 선포와 당시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 9연대의 진압 업무 투입이 ‘최초의 계엄령’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계엄이라고 하는 것은 제주 4.3 정도의 심각한 사태가 아니면 함부로 선포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주도 소재 경찰 지서의 절반이 한밤중에 동시 습격 당하고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그들의 집이 방화당하는 상황. 선거 방해를 위해 양민을 납치하고, 투표하겠다는 사람들, 투표 관리하는 공무원들마저 죽이는 상황. 이 정도가 되면 계엄령은 불가피합니다. 좌파 쪽에서 당선된 그 어떤 대통령, 김대중이든 노무현, 문재인, 아니 이재명이라 해도 자신이 대통령일 때 이런 정도의 폭동이나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면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 투입은 불가피했을 겁니다.
그런데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12월 계엄을 선포한 이유는 뭔가요? 제주4.3에 버금가는 수준의 질서 파괴나 선거 방해 공작이 있었습니까? 도저히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는 기존의 경찰이나 검찰의 힘만으로는 질서를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위기가 작년 12월 3일 전후하여 대한민국에 있었나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위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야당이 탄핵을 계속하고 예산을 삭감하고 하는 등의 투쟁이 지나치다고 할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것이 과연 1948년 4월 3일 그리고 그 이후에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과 그 심각성에 있어서 과연 비교라도 되나요?
‘처단’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단’이라는 표현은 선거방해와 경찰에 대한 대규모 습격을 조직하고 북한에 충성을 맹세한 김달삼, 김달삼을 이어 받아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양민 학살을 서슴지 않은 제주도 빨치산 2대 사령관 이덕구 같은 인간들에게나 써야 할 말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우리 군경에 의해 ‘처단’되었습니다. 정부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우리 국민인 의사를 향해서 ‘처단’ 운운하면서 국방장관이랑 같이 희희덕대고 앉아 있는 것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으로서 할 짓입니까?
군대를 민간 지역에 투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제주4.3 진압과정에서 많은 양민이 희생된 것을 보십시오. 물론 공산당의 내란 폭동이라는 맥락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 지역에 군대를 투입하고자 할 때는 고도의 신중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작년에 선포했던 계엄령에는 국가 존망의 위기라는 계엄의 조건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민간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도시 한복판에 무장한 전투부대를 투입하는 행위의 무게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신중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경고성’이라니요? ‘아무 일 없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구요? 군대가 장난입니까? 의사를 ‘처단’하겠다고요? 국정이 농담입니까?
저는 제주4.3의 아픈 역사에서 여야, 좌우가 모두 올바른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공산주의 내란 폭동이라는 맥락을 제거한 채 ‘국가폭력’만 강조하는 좌파는 오히려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25한국전쟁 발발시 수많은 제주도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군대에 입대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계엄령은 대통령 권한이니 대통령 마음대로 선포 좀 하면 어떠냐는 ‘똥보수’들은 이제 그 소아병적 광기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이만 먹었다고 저절로 철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똥보수’들은 철 좀 드십시오. 제발.
대한민국 군대는 대통령이 아무 때나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꺼내쓰는 대통령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아무리 군통수권자라 해도 중무장한 군사력이 갖는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함부로 군대를 동원한다면 결국 그 칼은 대통령 본인을 찌르게 될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들 하지요. 제주4.3의 교훈도 우리가 잊어선 안됩니다.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담담한 어조로 저에게 풀어 주었던 할머니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항상 올바른 교훈을 되새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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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계엄령’에는 공산당의 선거방해 내란이 있었다
‘최초의 계엄령’에는 공산당의 선거방해 내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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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 봉화가 올랐다… 밤마다 남로당의 우익 ‘숙청’이 벌어졌다
한라산에 봉화가 올랐다… 밤마다 남로당의 우익 ‘숙청’이 벌어졌다
Younghwa Hyun
교수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다만 윤통의 계엄이 무리였지만, 그만큼 자유대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광장에 나섰다는 점도 이해하여 주시기바랍니다! ^^
한용섭
취지에 찬성합니다
김선열
교수님이 하신 말씀에 덧붙이면
1. 3.1절을 전 남로당이 내린 지령에는 경찰을 자극하여 발포토록 하였음(이는 제주출신 향토학자의 분석 글이 있음)
2. 제주의 3개 선거구 중 2개소는 당시 제헌국회의원을 뽑지 못했으며, 대한민국의 수립에 참여하지 못한 제주도민은 4.3의 희생이 아니라 "부끄럽게 여기고 반성을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Booseung Chang
김선열 너무도 많은 인명이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1946년초 경에 북한은이미 사실상 정부를 수립했고, 김일성은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전쟁은 이미 1948년에 시작됐다 봐야죠. 1950-53년간 3년간의 6.25한국전잰으로 남북한 통틀어 한국인 사망, 실종자만 220만명입니다. 북한과 김일성의 책임을 보지 못하고 맥락을 제거한 채 역사를 읽으면 이 모든 것이 미국, 일본, 이승만의 잘못 때문이라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Ki Sung Kang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 ...
남다른 정신세계와
분별없는 주둥이로
역사의 아픔인 4.3을
친북적 가위질로 재단하지 마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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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계엄령’에는 공산당의 선거방해 내란이 있었다
입력2025.04.12
[아무튼, 주말] [장부승의 海外事情]
1930년대생이 기억하는 제주 4·3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무장 폭동을 주도한 김달삼은 현재 북한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묘비에는 ‘남조선 혁명가’라 적혀 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됐고, 6·25전쟁 발발 후 북한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전쟁 전 남파돼 유격대 활동 중 죽었다는 설도 있다. /우남위키나는 나이 많으신 분들과 옛날 얘기 나누기를 즐겨 한다. 책으로 보는 역사와 달리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현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오사카에서 제주도 출신 할머니들과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세 분이었는데 각각 1930년생(김모), 1935년생(김모), 1939년생(한모)이었고, 그 중 35년생과 39년생, 두 분은 같은 마을 출신이었다. 제주 4·3에 대해 이렇게 생생한 증언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9년생: 4·3이라고 아세요?
나: 언론에서 듣기는 했죠. 그때 제주도 주민이 많이 희생됐다죠.
39년생: 많이 죽은 정도가 아니에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도 죽었어.
나: 누가 죽인 거죠?
35년생: (끼어들며) 이북 사람들이 죽였지.
나: 이북이라고요? 북한에서 사람이 왔다는 건가요?
39년생: 이북 사람이 왔다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았다는 거지. 그때는 낮밤이 바뀌는 세상이었어. 낮에는 남쪽 세상이고 밤에는 이북 지령 받는 사람들 세상.
나: 왜 죽인 거죠?
39년생: 그때 우리 아버지가 면사무소 계장이었어. (35년생이 끼어들며) 아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멋쟁이였어. 난 아직도 기억 나.
나: 무슨 인민재판 같은 걸 한 건가요?
39년생: 그런 거 없어. 그냥 죽였어.
39년생: 그냥 막 찔러 죽였어.
나: 죽창으로요?
39년생: 죽창이 아니고.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쇠꼬챙이인데, 그걸 날카롭게 갈아서. 그걸로 그냥 막 찔러. 그때 내가 아홉 살이었는데 아직도 기억 나.
나: 살아남은 가족은?
39년생: 우리 엄마는 살았지. 그런데 나중에 엄마도 병으로 죽었어. 그때 참 힘들었다. 형제들이 도와줘서 살았지.
나: (35년생에게) 할머니네 가족들은요?
35년생: 우린 죽은 사람은 없어. 놈들이 온다는 걸 알고 미리 도망갔거든. 대신 그 놈들이 우리 집을 홀랑 태웠지.
나: 왜 그런 짓을?
35년생: 내가 오빠가 셋인데, 다들 군대 가 있었거든. 군인 가족이라고 그런 거지.
나: (30년생에게) 할머니네는 괜찮으셨어요?
30년생: 그때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정유소를 했어요. 대신에 우리 사촌집에서 우리를 지켜 줬어. 사촌집이 경찰서장이었거든.
나: 일본에는 왜 오신 건가요?
30년생: 나중에 엄마가 아빠 따라 일본으로 가고 나서 나한테도 계속 오라고 하더라고. 그때 나는 졸업하고 제주 세관에 근무했는데 (제주도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더라고. 무서워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뉴스1매년 4월 초만 되면 제주4·3 사건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거기서 4·3은 ‘국가 폭력’이라고 회자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4·3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될 우리 역사의 슬픈 대목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 할머니들도 ‘국가 폭력’의 희생자인가?
단지 아버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고, 오빠들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살던 집이 방화당하고, 단지 세관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할까 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것도 ‘국가 폭력’인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도 내 경찰 지서 12개를 습격했고 경찰, 공무원,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 후로도 ‘선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이거나 공무원과 그 가족에 대한 학살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폭동의 목적은 선거 방해였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인하며 정부 자체를 상대로 항쟁한 것이다. 4·3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폭동의 목적 자체는 ‘내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당시 미 군정은 군사력으로 대응했다.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4월 17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했다. 적과의 교전 내지 극도의 사회질서 교란으로 경찰력만으로 질서 회복이 어려울 때 군대를 투입하는 것. 이것이 계엄의 정의라고 한다면 당시 미 군정은 남로당의 내란 시도에 대해 계엄령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후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1948년 10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했을 때, 우리 정부 역사상 최초의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계엄의 원래 뜻을 새긴다면, 남로당의 폭동에 대응해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기 위해 미 군정이 공포한 제주도 도령(道令)이야말로 이 땅에 선포된 ‘최초의 계엄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담담한 어조로 끔찍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할머니들 앞에서 난 속으로 ‘미안합니다’를 수십 번 되뇌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봐야 했던 그 ‘아홉 살 소녀’를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제주 4·3의 ‘국가 폭력’에 대해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 사과한 바 있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눴던 이 할머니들이 겪은 ‘공산 내란 세력의 잔인한 폭력’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할까? 공산당의 무자비한 폭력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엄존하는데, 이들을 위해서는 누구 하나 사과 요구조차 꺼내는 사람이 없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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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의 출발은 사회주의 공산당 세력들이 경찰서와 공무원들 공격하고 심지어는 경찰들 시신도 입에 언급하기 거북할 정도로 훼손했다는 것!! 선거에 참여했던 주민들을 학살한 공산당 세력들이 야기시킨 비극이 제주 4.3 사건!! 사회 전복을 목표로 사회갈등을 야기시키고 그 갈등에 기생하는 기생충 좌파 쓸어버리자!! 현대판 음서제 선관위의 황제 세습 채용 비리 부터 특검!! 직접선거 비밀선거 보통선거 평등선거 말아먹은 선관위 좌파 쓸어버리자! "선거는 투표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투표를 세는 사람이 결정한다!" <스탈린>
2025.04.1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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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 북괴에서 지령받은 간첩이 일으킨 폭동이 되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죽었다. 그런데 지금도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간첩이 있다는 것이다. 왜 간첩법 개벙을 반대하겠는가? 자기들이 바로 북한의 사주받은 간첩이기 떄문이다. 반국가 세력들을 싹 다 쓸어버려야 나라가 나라다와질 것이다. 멸공 !!
2025.04.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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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_j****댓글모음팔로우옵션 열기
한쪽 눈 감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 진짜 많다. 지만 그렇게 보는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보게 하려고 무진장 애쓴다. 무고한 시민들 희생당한 것 맞다. 하지만 그 이전에 더 나쁜 무자비한 폭력이 있었고 그걸 그대로 뒀다면 더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갉아 먹었을 것이다.
2025.04.12.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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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cp****댓글모음팔로우옵션 열기
1950년 10월 충남 서천군 남로당 위원장 이었던 구재극 의 주도로 서천군 거주 양민 280명을 서천 등기소 건물에 가둬 놓고 불을 질러 방화 학살 천인 공노할 만행을 저지른적이 있음.그당시 서천 읍내 주민들은 이른 아침 새벽에 사람이 불에 타면 복부가 팽창하여 배가 터지는 소리인 "빵" "빵"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고 함. 참고로 구재극은 그당시 박헌영의 남로당 중앙위원 이었던서천군 시초면 출신의 구재수 의 친동생이었음.
2025.04.12.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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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7****댓글모음팔로우옵션 열기
제주 4.3은 폭동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제주 4.3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의 엄연한 폭동이다.....
2025.04.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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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 봉화가 올랐다… 밤마다 남로당의 우익 ‘숙청’이 벌어졌다
입력2025.03.29. 오전 12:40
수정2025.03.31. 오후 1:52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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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8년 제주 4·3 사건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

일러스트=한상엽
제주도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은 남제주 대정 출신으로 본명은 이승진이었다. ‘김달삼’이라는 가명은 장인 강문석에게 물려받았다. 강문석은 해방 이전부터 공산당 운동에 투신해 박헌영의 오른팔로 남로당 중앙위원, 선전부장 등으로 활약한 좌익의 거물이었다. 1925년에 태어난 김달삼은 4‧3 무장봉기 당시 23세였다. 어려서 대구로 이주해 소학교를 다녔고,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주오대에서 공부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 대구에 거주하던 김달삼은 1946년 ‘대구 10월 사건’에 가담했다. 검거망이 조여 오자 고향 제주로 잠입해 대정중학교 교사로 역사와 공민을 가르쳤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다. 식이 끝난 후 일부 청년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기마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8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3‧10 총파업’을 주도해 관공서를 포함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파업하는 유례 없는 성과를 얻었다. 이를 기획‧주도한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차세대 리더로 떠올랐다.
1948년 2월 남로당이 주도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서청) 등 극우 세력의 좌익 탄압이 거세졌다. 무장투쟁을 주장한 김달삼·이덕구 등 20대 강경파는 40대 온건파로부터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김달삼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4.3 진압에 동원된 미군정 기마 경관 /제주4.3평화재단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오름마다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이를 신호로 인민유격대 350여 명이 제주도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청 숙소, 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그날 밤에만 경찰 4명, 우익 인사 8명, 유격대 2명이 사망했다. 이후 한라산으로 들어간 유격대는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경찰 지서, 관공서 습격, 경찰‧우익 인사 테러‧살해, 협조를 거부하는 양민 납치‧살해, 전선‧통신선 절단, 도로 파괴 등을 자행하다가 날이 밝으면 아지트로 돌아갔다. 제주읍을 제외한 제주도 전역이 밤에는 유격대, 낮에는 미군정과 경찰이 지배하는 끔찍한 상황에 빠졌다.
‘단독선거 반대’라는 남로당의 목표는 대성공이었다. 유격대는 양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산으로 끌고 가 격리했고, 총선 당일까지 투표소 습격‧방화, 폭발물 폭파, 경찰‧공무원 살해 등 방해 난동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제주도 지역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갑구(43%)와 을구(46.5%)가 투표율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당선자를 내지 못한 선거구는 북제주 갑‧을구뿐이었다.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의 아이들 /제주4.3평화재단이를 악물고 남한의 총선거를 막은 김달삼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지하선거에는 발 벗고 나섰다. 북한은 남한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할당하고 그 3배수인 1080명의 인민대표를 지하선거로 뽑게 했다. 말이 거창해 지하선거였지,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 가는 수준이었다.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대표 6인도 이런 식으로 ‘선출’되었다. 남한 전역에서 선출된 1080명은 1948년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이하 ‘대회’)를 열어 최종적으로 360명이 적힌 명부에 찬반 투표하는 방식으로 대의원을 선출했다. 김달삼 일행은 비밀리에 한라산을 내려와 배편으로 목포로 가서 38선을 넘어 해주로 향했다. 소련 잠수함을 타고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달삼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21일 대회 첫째 날 주석단 선거에서 김달삼은 박헌영·홍명희·김원봉·허헌·이승엽 등 내로라하는 좌익 인사 34명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대회 휴식 시간에 김달삼을 휴게실로 불러 “제주도 인민들의 피어린 항쟁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김달삼은 대회 마지막 날 대의원 투표에 앞서 연설했다.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해 인민군, 즉 ‘산(山)사람들’이 총궐기했습니다. 지금까지 지서 습격 31회, 경관 100명 이상 숙청(살해), 독촉, 서청 기타 반동 400명 이상 숙청, 지서 소각 5곳, 전선 절단 893건, 그 밖에 무기 다수를 노획했습니다. 북조선 민주 개혁이 남조선에서도 하루속히 실시되도록 용감히 싸웁시다.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1948년 5.10 총선거가 끝난 후 유격대에 풀려나 하산하는 제주 주민들 /제주4.3평화재단이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김달삼은 9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허헌 등 49명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달삼은 남한에서 활약할 혁명 간부 양성을 위해 평양 인근 강동군에 설립한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 교육을 받았다. 1949년 3월 태백산지구(제3병단)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돼 300여 명의 대원과 함께 남파되었다.
안동‧영덕 방면으로 침투한 김달삼 부대는 민간인과 국군 탈주병을 규합해 한때 600명이 넘는 대부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거듭된 국군의 소탕 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몰렸다. 김달삼은 북상해 월북을 도모하다가 1950년 3월 강원도 정선군 반론산에서 사살되었다. 빨치산 수괴의 처단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의 지명은 ‘김달삼모가지잘린골’로 변경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때 김달삼은 월북에 성공했고 전열을 정비해 6‧25 발발 직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전사했다고 기록한다. 사후 그에게는 국기훈장 1급이 서훈되었고,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설치되었다.
김달삼이 월북한 후 이덕구가 인민유격대 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았다.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0월 23일 이덕구는 50여 곳에 봉화를 올리고 인공기를 게양하고는 이튿날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4개월 동안 유격대와 진압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고,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 과정에 다수의 무고한 양민이 학살되었다.
4‧3사건으로 2만5000~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압군(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86%, 유격대(남로당)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4%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되었고,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아직 사죄하지 않은 다른 편 가해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청산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김달삼의 가묘 /우남위키<참고 문헌>
김학준, ‘북한의 역사 2’, 서울대출판부, 2008
신복룡, ‘해방정국의 풍경’, 중앙books, 2024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전후사 바로알기’, 대추나무, 2019
양정심, ‘4‧3항쟁과 남로당 제주도당’, 사림 제27호, 2007
이태, ‘남부군’, 두레, 2014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2003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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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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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역사인식과 윤석열의 ‘계엄‘을 동시비판하는 글. 전적으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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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내가 학교 다닐 땐 4.3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고, 그래서 일본유학때 처음 알았다. 작가 김석범의 작품을 통해 배운 측면이 크고, 개인적인 교류도 있어 더 공감하기도 했었다. 4.3에 대해 짧은 글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 제주출신 지인으로부터 좌우대립 저변에 오래된 마을내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친일’로 간주된 이들이 공격당했고, ‘친일‘의 선봉에는 일제의 구조를 답습했던 ’경찰’이 있었다.
또다른 공격대상에 ‘지주‘가 있다.
북한이 개인의 토지를 빼앗을 수 있었던 건,
지주=친일파라는 등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족해방을 내세운 탓에 좌파적 토지몰수도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
그 때 쫓겨 내려온 이들과 그 후예들이 오늘의 극렬 반공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실을 직시해야 상호이해와 평화가 가능하다.
우리는 오랜 심리적 내전이 열전(계엄)화하는 것을 겨우 막았다.
이재명이 정권을 잡는다는 건, 또다른 전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 당시 북한의 그런 몰수와 박해 분위기를 피해 내려온 사람중 하나가 화가 이중섭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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