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님, 요청하신 영상 <필리핀 최대의 금기: 왜 이 나라는 영원히 가난한가? 가톨릭 지배로 국민을 생각 정지 상태로 만드는 착취의 메커니즘>의 요약과 평론입니다.
영상 내용 요약
본 영상은 필리핀이 지속적인 경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을 재벌의 독점이나 정치 가문의 부패를 넘어, 450년간 이어진 가톨릭 교회의 지배 구조와 교리에서 찾고 있다
식민지 지배 도구로서의 가톨릭 스페인은 군사력 대신 수도사를 파견해 행정, 사법, 교육을 장악하는 프라이록라시(Frailocracy, 수도사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 민중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토지를 수탈했으며, 이를 고발한 호세 리살은 처형되었다 . 현대 정교유착과 사회 통제 피플파워 혁명(신 추기경의 주도) 이후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해져 주요 선거마다 결정적 표밭 역할을 한다
. 최고 엘리트 대학 경영 및 공립학교 정규 종교 수업을 통해 가톨릭 가치관을 주입하며 , 이혼 금지 및 피임 거부 교리로 인해 빈곤층의 다산과 급격한 청년층 HIV 감염 폭증(보건부의 콘돔 배포 계획 철회 등)을 초래했다 . 국민성을 마비시킨 4가지 교리의 덫
현세 고통의 미화: 가난과 고통을 천국에 가기 위한 시련으로 여겨 사회 변혁과 경제적 향상심을 포기하게 만든다
. 시혜에 대한 당연시와 의존심: 부자가 베푸는 것은 의무이며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 자립심이 결여되고, 후원자 대신 신에게만 감사하는 구조를 낳는다
. 고해성사의 남용: 일요일에 죄를 고백하면 모든 잘못이 초기화된다는 인식 탓에 거짓말이나 무책임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를 제공한다
. 계획성 부재와 축제(피에스타) 탕진: <바할라 나(신의 뜻대로 / 어떻게든 되겠지)> 사고방식과 성인을 기리는 축제 하루를 위해 고리대금(5-6)까지 써가며 전 재산을 탕진하여 자본 축적 기회를 스스로 파괴한다
.
결론적으로 저자는 필리핀이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정치·경제 개혁뿐 아니라 가톨릭적 세뇌와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탈각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평론
1. 통찰력 있는 문제 제기와 현장감 있는 문화 관찰
영상의 가장 큰 미덕은 필리핀 사회를 관통하는 만성적 무기력과 특유의 체념적 낙관주의를 단순한 <게으름>이나 <제도적 부패>로 치부하지 않고, 종교 사회학적 배경과 결합하여 파헤친 점이다
2. 교리 해석의 단순화와 사회구조적 책임의 전가 위험
반면, 영상의 주장은 문화결정론 및 종교결정론적 함정에 다소 깊게 빠져 있다.
첫째, 가톨릭 교리의 복합성을 지나치게 평면화했다. 해방신학처럼 불의한 권력에 맞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진보적 가톨릭 전통이나, 마르코스 독재 타도에 일조한 교회의 시민사회적 역할을 단순히 <대중 기만용 마약>이나 <기득권 수호 카르텔>로만 환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3. 주체적 신앙과 생존 전략에 대한 과소평가
필리핀 서민들이 <바할라 나>나 <축제>에 몰입하는 것은 교리에 세뇌당한 탓만은 아니다
종합하자면, 이 영상은 필리핀 사회의 성역이라 불리는 가톨릭 교회의 권력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을 용기 있게 공론화한 수작이다
<필리핀은 왜 가난한가 — 가톨릭 지배론의 설득력과 한계>
첨부하신 자료는 일본어 유튜브 영상 <【フィリピン最大のタブー】なぜこの国は永遠に貧しいのか?カトリック支配により国民を思考停止にする搾取のからくり>의 약 36분 분량 스크립트이다. 영상의 주장은 매우 선명하다. 필리핀의 장기적 빈곤을 단순히 부패한 정치인이나 재벌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며, 그보다 더 깊은 층에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진 가톨릭교회의 정신적·사회적 지배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영상은 이를 상당히 공격적인 언어로 <종교라는 마취>라고 규정한다. 【フィリピン最大のタブー】なぜこの国は永遠に貧しいのか
1. 영상의 핵심 주장
영상이 제시하는 인과관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스페인 식민지배 →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지배 → 복종·운명론·내세주의 → 교육과 정치에 대한 영향 → 가족계획 억제 → 인구과잉·빈곤 → 빈곤의 재생산
즉 가난을 경제적 현상이라기보다 <종교적으로 형성된 사고방식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스페인은 필리핀을 총과 군대만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수도사를 통해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마을의 행정, 세금, 치안, 교육, 혼인까지 성직자가 장악함으로써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곧 사회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심성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둘째, 영상은 미국 식민통치 이후에도 이 구조가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특히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가톨릭교회 지도부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며, 가톨릭교회가 필리핀 최대의 조직 가운데 하나로서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한다. 마르코스 독재에 맞선 1986년 <피플 파워>에서도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바로 그 힘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으로 존속했다고 설명한다. 【フィリピン最大のタブー】なぜこの国は永遠に貧しいのか
셋째,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는 교육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계 학교가 광범위하고, 엘리트 교육에도 교회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종교적 가치관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영상은 특히 <가난하더라도 모든 생명은 신의 은총>과 같은 신념이 계층을 막론하고 반복적으로 주입된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가족계획과 콘돔 문제다. 영상은 2016~17년경 보건당국의 학교 내 콘돔 배포 계획이 가톨릭교회의 반대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사례를 소개하며, 이것이 HIV 감염 증가와 원치 않는 임신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실제 연구에서도 필리핀 가톨릭교회의 반대가 콘돔 사용 및 가족계획 정책의 중요한 장애 가운데 하나였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PubMed Central (PMC)
2. 영상이 말하는 <네 가지 덫>
후반부에서 영상은 필리핀 사회를 묶어두는 정신구조를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현세의 고통은 천국에 가기 위한 시련>이라는 생각이다. 가난을 사회구조의 문제라기보다 신이 준 시험으로 받아들이면 정치적 저항이나 사회개혁의 동력이 약해진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施しは当然>, 즉 자선에 대한 의존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돈과 음식을 나누는 일이 미덕으로 강조되면서 구조적으로 가난을 없애기보다는 빈곤을 유지한 채 자선을 베푸는 체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영상은 식사 후 가난한 친척들이 돈을 내준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례까지 들며 이 문화가 빈곤을 재생산한다고 본다.
셋째는 <고해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고해성사의 악용이다. 영상은 이것이 책임감과 죄의식을 약화시키는 문화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Bahala na>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신에게 맡긴다>라는 태도가 저축·계획·투자를 방해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축제(fiesta)나 종교행사를 위해 가난한 가정이 빚을 지는 사례를 소개하며, 미래보다 현재의 종교적·공동체적 소비를 중시하는 문화가 빈곤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한다. 【フィリピン最大のタブー】なぜこの国は永遠に貧しいのか
따라서 영상이 말하는 <思考停止>는 단순히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제도를 바꾸려 하기보다 <신의 뜻>, <운명>, <자선>, <내세>로 해석하도록 만드는 사고방식이라는 의미이다.
3. 이 영상의 강점 —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제목은 선정적이지만 문제제기 자체를 전부 황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필리핀의 가족계획·피임·성교육 정책에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생식건강정책을 둘러싼 교회와 정부의 충돌은 학계에서도 널리 연구된 문제이다. PubMed
또한 스페인 식민지배가 토지소유 구조와 불평등을 만들어낸 역사적 영향도 중요하다. 세계은행 역시 필리핀 농촌의 불평등한 토지소유의 뿌리를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대농장 체제에서 찾는다. World Bank
따라서 <식민주의–교회–토지소유–엘리트 정치>를 하나의 역사적 구조로 보는 문제의식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더구나 교회가 언제나 지배자의 편에 서 있었다고만 할 수도 없다. 영상 자신도 1986년 에드사 혁명에서 마닐라 대주교와 가톨릭계 라디오 방송이 마르코스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한다. 바로 이 대목이 오히려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고 영상은 해석한다.
4.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단일 원인론>이다
이 영상의 결정적인 약점은 필리핀의 빈곤을 지나치게 <가톨릭 문화> 하나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이 지적하는 현재 필리핀 빈곤과 불평등의 원인은 훨씬 복합적이다. 교육기회의 격차, 고등교육 접근성, 노동시장 구조, 지역 격차, 자산 소유의 불평등, 세대 간 이동성 부족 등이 함께 작용한다. World Bank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제목의 <永遠に貧しい>라는 표현 자체가 과장이라는 점이다. 필리핀의 빈곤은 심각하지만 장기간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85~2018년 사이 빈곤은 크게 감소했고, 2023년 공식 빈곤율은 약 15.5%였다. World Bank
즉 질문은
<왜 필리핀은 영원히 가난한가?>
보다는
<왜 상당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불평등이 끈질기게 남아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5. 종교를 원인으로 보느냐, 구조의 일부로 보느냐
이 영상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Bahala na>, 자선, 고해성사, 축제 등을 거의 곧바로 경제적 후진성과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이 논법은 오래된 <문화결정론>과 상당히 닮아 있다.
가령 막스 베버식 논리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프로테스탄트 = 근면·저축·투자 → 자본주의 발전>
<가톨릭 = 운명론·소비·의존 → 빈곤>
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스페인·이탈리아·아일랜드처럼 가톨릭이 강한 국가도 고소득 사회가 되었고, 남미에서도 가톨릭 사회이면서 경제적 궤적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가톨릭이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설명은 비교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더 적절한 질문은
<가톨릭 자체가 빈곤을 만들었는가?>
가 아니라
<특정한 식민지 역사 속에서 가톨릭교회가 토지소유·엘리트 정치·가족제도·교육제도와 결합하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다.
이렇게 질문해야 종교와 권력을 함께 볼 수 있다.
6. 더욱 중요한 것은 <엘리트 지배구조>
흥미롭게도 영상은 자신이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은 더 중요한 설명을 곳곳에서 제시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토지 집중, 지주층, 정치가문, 교육엘리트, 가톨릭학교 네트워크 등이 그것이다.
필리핀의 문제를 설명할 때에는
<교회가 국민을 세뇌했다>
라는 설명보다는
<식민지배에서 형성된 토지·정치·교육의 엘리트 네트워크 안에서 교회가 중요한 제도적 행위자로 기능했다>
고 보는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보면 국민 역시 단순한 <세뇌된 피해자>가 아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고 복지기관이며 학교이고 정치적 네트워크이며 때로는 독재에 저항하는 공간이었다. 교회와 민중의 관계는 지배와 복종만으로 환원하기 어렵다.
7. 가장 문제적인 표현 — <국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영상의 제목에 있는 <国民を思考停止にする>는 특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빈곤한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을 곧바로 <사고정지>라고 부르면, 빈곤층의 합리성과 생존전략을 지나치게 폄하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fiestas나 친족 간의 돈 나눔도 개인적 낭비라고만 보기 어렵다. 공식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사회에서는 친족·마을·교회 네트워크가 사실상 비공식 복지제도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즉 동일한 현상이
<비합리적 소비>
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안전망>
일 수 있다.
이 이중성을 영상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8. 종합 평가
이 영상은 좋은 문제를 던지지만 설명이 지나치게 과격하다.
특히
<식민지 가톨릭 체제의 유산이 오늘날의 정치·교육·가족계획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는 주장은 상당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가족계획과 콘돔 문제에서는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정책에 상당한 장애가 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필리핀이 가난한 이유 = 가톨릭교회가 국민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
이라는 결론까지 가면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필리핀의 장기적 빈곤을 설명하는 더 좋은 틀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복합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 식민지배와 토지집중>
→ <엘리트 가문과 정치적 후견주의>
→ <불평등한 교육과 자산 소유>
→ <취약한 국가·복지제도>
→ <지역 및 노동시장 격차>
→ <가톨릭교회의 정치·문화적 영향>
여기에서 가톨릭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전체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원인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상이 가장 흥미로운 이유는 <가톨릭이 필리핀을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결론 자체보다는, 종교가 단순한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교육·가족·출산·정치·경제행동을 연결하는 <사회제도>라는 점을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세진님이 최근 여러 차례 살펴보신 <식민주의와 종교>라는 문제의식에서 보면, 이 영상은 꽤 흥미로운 비교자료입니다. 조선의 개신교 선교나 일본의 국가신도와도 달리, 필리핀에서는 <식민지배와 가톨릭교회가 거의 300년 이상 하나의 사회질서로 결합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다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을 가난하게 했다>기보다 <종교·식민권력·토지소유·엘리트 형성이 어떻게 하나의 체제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훨씬 생산적입니다.
필리핀의 장기적 빈곤을 문화나 종교적 요인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 구조와 정치경제학적 제도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대표적인 고전 두 권을 소개해 드립니다.
<약탈 자본주의: 필리핀의 은행업과 정치>
(원제: Booty Capitalism: The Politics of Banking in the Philippines, 폴 허치크로프트 저)
1. 핵심 분석 틀 호주국립대(ANU)의 정치학자 폴 허치크로프트(Paul Hutchcroft)가 제시한 이 책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론(한국, 대만 등)과 대비하여 필리핀이 왜 경제 개발에 실패했는지를 규명하는 기념비적인 연구다.
저자는 막스 베버의 가산제(Patrimonialism) 개념을 바탕으로 필리핀의 체제를 <가산제적 과두 국가(Patrimonial Oligarchic State)>로 규정한다. 한국이나 대만의 경우 국가 관료제가 자율성을 쥐고 자본가를 훈육하거나 산업을 육성한 반면, 필리핀은 국가 기구 자체가 극소수 토착 과두세력(Oligarchy)에게 포획된 형태라는 점을 핵심 틀로 둔다.
2. 장기 빈곤을 설명하는 방식
약탈의 장으로서의 국가: 강력한 지주·금융 가문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뒤, 중앙은행과 국영 금융기관, 규제 권한을 동원해 국가 재정을 사적으로 약탈(Booty)해 왔다.
제조업 육성의 실패: 지배 엘리트들은 생산적 제조업에 장기 투자하기보다 국가로부터 독점 면허나 특혜 금융을 얻어 지대(Rent)를 챙기는 불로소득형 금융·서비스업에만 집중했다.
결과: 국가 기구가 공공재를 생산하거나 시장을 규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경제 성장의 과실이 소수 가문에만 축적되어 대다수 민중은 영구적인 빈곤과 불평등 속에 갇히게 되었다.
<가문들의 아나키: 필리핀의 국가와 가족>
(원제: An Anarchy of Families: State and Family in the Philippines, 알프레드 맥코이 편저)
1. 핵심 분석 틀 동남아 현대사 연구의 거두인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McCoy)가 엮은 이 책은 필리핀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기본 단위를 <근대적 정당이나 제도>가 아닌 <친족 네트워크(Kinship Dynasty)>로 규정한다.
스페인 식민지 말기와 미국 식민지 통치기를 거치며 형성된 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어떻게 중앙 정치를 분할 지배해 왔는지를 구체적인 가문들의 궤적(오스메냐, 로페즈, 마르코스 가문 등)을 통해 해부한다.
2. 장기 빈곤을 설명하는 방식
지방 군벌과 중앙의 야합: 미국 식민 통치는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하면서도 토지개혁은 회피한 채 지방 토호들에게 선거권을 주어 의회를 장악하게 했다. 그 결과 지방의 사병(Warlordism)과 경제적 독점을 쥔 가문들이 국가를 사유화했다.
사회 재분배의 원천적 차단: 국가 정책이 공공의 복지나 국토 균형 발전이 아니라 특정 가문의 사익과 연합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토지개혁이 수십 년간 좌절된 이유도 의회 의원 대다수가 대지주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과: 국민은 국가나 법 제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므로, 살아남기 위해 특정 후원자(Patron) 가문에 의존하는 종속적 온정주의 체제에 묶이게 되며, 이는 구조적 빈곤의 세습으로 이어진다.
두 책 모두 종교적 체념이나 국민성 같은 문화적 현상이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사유화한 과두 가문들의 착취 구조와 제도적 실패가 오랜 세월 동안 대중의 무기력과 종속적 생존 방식을 강제해 온 결과임을 논증한다는 점에서 필리핀의 장기적 정체를 이해하는 데 훨씬 설득력 있는 제도적 틀을 제공합니다.
혹시 두 책의 분석 모델 중 발전국가와의 비교 분석이나 지방 가문들의 구체적인 지배 사례 등 더 관심이 가는 방향이 있으신가요?
앞서 본 유튜브 영상의 <가톨릭이 필리핀을 가난하게 했다>는 단선적 설명을 넘어서려면, <식민지배–토지소유–정치가문–약한 국가–후견주의–불평등한 성장>을 함께 보는 책들이 좋습니다. 특히 아래 6권이 핵심입니다.
- Alfred W. McCoy, ed., <An Anarchy of Families: State and Family in the Philippines>
한국어로 옮기면 <가문들의 무정부 상태: 필리핀의 국가와 가족> 정도입니다. 제가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필리핀의 주요 정치가문들이 자본·정치·언론·지역 권력을 결합하여 어떻게 국가를 사적 자원처럼 이용해 왔는지를 여러 사례로 보여줍니다. 책의 핵심은 <강한 가문 + 약한 국가>라는 구조입니다. 필리핀의 빈곤을 종교적 운명론보다 훨씬 구체적인 권력구조로 설명할 수 있게 해줍니다.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특히 앞의 영상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영상>
가톨릭 → 순종·운명론 → 빈곤
필리핀 사회를 이해하는 고전 중 하나입니다.
- Paul D. Hutchcroft, <Booty Capitalism: The Politics of Banking in the Philippines>
<약탈적 자본주의: 필리핀 은행정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한 단계 더 구조적입니다. Hutchcroft는 필리핀을 단순한 <부패한 나라>라고 하지 않고, 기업엘리트가 취약하고 분절된 관료국가에 접근하여 국가의 금융·허가·신용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체제를 <booty capitalism>이라고 부릅니다. JSTOR
이 책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교육수준도 높고 영어도 널리 쓰며 천연자원도 풍부하고 미국의 원조도 많이 받은 필리핀이 한국·대만처럼 발전하지 못했는가?
답은 <가톨릭 문화>보다는 국가와 자본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한국·대만에서는 국가가 재벌이나 기업을 어느 정도 통제하면서 산업정책을 추진한 반면, 필리핀에서는 사적 경제세력이 국가기구를 포획하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는 것입니다.
- James Putzel, <A Captive Land: The Politics of Agrarian Reform in the Philippines>
<포획된 땅: 필리핀 농지개혁의 정치>입니다.
필리핀 빈곤의 뿌리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책입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형성된 대토지소유제가 미국 식민통치와 독립 이후에도 어떻게 유지되었으며, 수많은 농지개혁이 왜 실질적인 토지재분배에 실패했는지를 분석합니다. Google Books
이 책은 특히 한국과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한국·대만:
<전후 토지개혁 → 지주계급 약화 → 농민 자산 형성 → 교육·산업화>
필리핀:
<대토지소유 존속 → 지주가 정치인이 됨 → 농지개혁을 정치엘리트가 통제 → 농촌 불평등 존속>
즉 필리핀에서 농지문제와 정치가문 문제는 사실 같은 문제의 두 측면입니다.
- John T. Sidel, <Capital, Coercion, and Crime: Bossism in the Philippines>
<자본·강제·범죄: 필리핀의 보스 정치>입니다.
McCoy가 <가문>을 중심으로 본다면 Sidel은 <지역 보스>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방 정치인이
돈 + 경찰·무장세력 + 행정권 + 선거조직
을 결합하여 지역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bossism>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Cavite와 Cebu를 비교하면서 이런 정치구조가 단순히 필리핀인의 <후견주의 문화> 때문이 아니라 미국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조기 선거제도와 국가자원의 배분구조에서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Google Books
이 책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흔히
<필리핀 사람들은 원래 친족주의적이다>
라고 문화적으로 설명하던 것을,
<어떤 제도가 그러한 정치행동을 합리적으로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 Patricio N. Abinales & Donna J. Amoroso, <State and Society in the Philippines>
<필리핀의 국가와 사회>입니다.
처음 한 권을 읽는다면 사실 이것이 가장 좋은 입문서일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미국 식민통치, 독립, 마르코스 독재, 민주화까지 장기적으로 국가 형성과 사회세력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필리핀 국가가 오랫동안 기본서비스·치안·경제발전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으면서도 동시에 필리핀 사회에는 강한 국가에 대한 경계심도 존재했다는 역설입니다. Google Books
따라서 빈곤을
<국민의 사고방식>
에서 찾기보다
<왜 개발국가가 형성되지 못했는가>
라는 문제로 이동시킵니다.
- Arsenio M. Balisacan & Hal Hill, eds., <The Philippine Economy: Development, Policies, and Challenges>
<필리핀 경제: 발전·정책·과제>입니다.
앞의 네 권이 정치경제학적이라면 이것은 경제학적 종합서입니다. 정치경제, 거시경제, 농업, 산업, 서비스업, 인구, 고용, 빈곤과 불평등, 지역격차 등을 한 권에서 종합합니다. Oxford University Press의 학술서로, 필리핀을 <왜 동아시아의 경제기적에서 뒤처졌는가>라는 비교경제발전의 문제로 다룹니다. OUP Academic
앞의 유튜브 영상을 검증하는 데 특히 좋습니다. 가톨릭은 수많은 변수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빈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성, 산업화 실패, 인구, 고용, 지역격차, 재정정책 등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가 읽는 순서를 정한다면 다음처럼 권하겠습니다.
- Abinales & Amoroso, <State and Society in the Philippines> — 전체 역사적 구조를 먼저 잡음
- McCoy, <An Anarchy of Families> — 정치가문과 엘리트 지배
- Hutchcroft, <Booty Capitalism> — 국가와 자본의 관계
- Putzel, <A Captive Land> — 토지와 농촌 빈곤
- Sidel, <Capital, Coercion, and Crime> — 지방권력과 폭력
- Balisacan & Hill, <The Philippine Economy> — 경제학적 검증과 종합
이 여섯 권을 하나의 설명으로 묶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토지집중>
→ <지주·지역 엘리트의 정치가문화>
→ <미국식 선거민주주의의 조기 도입>
→ <지역 보스와 후견주의>
→ <민간 엘리트에 포획된 취약한 국가>
→ <산업정책·농지개혁의 실패>
→ <높은 불평등과 빈곤의 세대 간 재생산>
여기에 가톨릭교회는 별도의 <원인>이라기보다 이 구조와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중요한 제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세진님께 특히 한 권만 고르라면 저는 McCoy의 <An Anarchy of Families>를 권하겠습니다. 앞서 보신 영상과 정면으로 대비해서 읽기 좋기 때문입니다. 영상이 <가난한 사람들의 신앙과 사고방식>을 설명변수로 삼는 데 비해, McCoy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가문과 제도>를 설명변수로 삼습니다. 빈곤을 아래에서 설명하느냐 위에서 설명하느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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