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ham Chong - 오늘은 “한글날”이다. 삶과 학문의 발걸음이 이끄는 방향을 마다한 적 없이 걷다보니,... | Facebook
Daham Chong - 이영훈 정다함 세종 논쟁
20211009
Daham C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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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글날”이다. 삶과 학문의 발걸음이 이끄는 방향을 마다한 적 없이 걷다보니, 역사학자(歷史學者)로는 보기 드물게, 세종대(世宗代)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제정과 그로 인해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같은 텍스트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들을 쓴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거의 20년 동안 나는 많은 일들을 겪어 왔는데, 그렇게 아주 오랜 동안 혼자서 감내해오던 일들을, 아래 사진의 논문을 통해 얼마간이나마 털어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런 연구들을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지만, 일단 이렇게 숨 한 번 돌리고 이미 해야 했었는데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연구와 집필의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또 앞으로는 괴로움 없이 별 일 없는 “한글날” 보낼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담아, 오랜 동안 웬만해서는 하지 않던 “한글날” posting을, 이렇게 한 번 올려 본다. 오랜 동안 감내해왔던 일들에 대한 글이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널리 양해해주시길.
1. 한글날이 내게는 매번 버겁게 견딜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나는 존경하는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원문으로 똑바로 읽지 않으면 졸업 못 할 줄 알라는 엄명을 받고 대도관을 유배지 삼아 하루 종일 눈 빠지게 실록을 읽은 죄 밖에 없는데, 정말로 그렇게 2000년에서 2001년 사이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실록의 기사들을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세종이 한자가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말과 글을 중시했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해 온 기존 국어국문학계와 국사학계의 통설과, 조선왕조실록에 풍부하게 전하고 있는 많은 사료들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사이에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을 직접 발견하고부터는, 그 때의 충격과 깨달음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어 버렸다. 그 이후로 한글날은 내게 매년 감내해야하는 고통스러운 정기행사 같은 것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다행히 연구를 통해서 내가 감내하고 있던 것들을, 순전히 고통만은 아닌, 다른 의미 있는 무언가로 조금씩 바꾸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훈민정음이 제정되었던 15세기 초중반 세종대의 역사적 맥락을 횡단경계적(transnational) 관점으로 살핀 내 논문(「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朝鮮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이 2008년 완성되어 모교의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를 거쳐 그 이듬해에 한 학술지에 게재된 직후부터는, 이전부터 감내하던 고통과 비슷하지만 동시에 좀 다른 고통과 다시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논문에 대한 이영훈(李榮薰) 선생님의 관심으로부터 초래된 것이었다. 이 논문이 게재된 직후부터 나와 일면식도 없는 이영훈(李榮薰) 선생님이 내 이 논문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주변의 지인 분들을 통해 듣게 되었는데, 이영훈 선생님의 내 논문에 대한 이야기들은 내겐 매우 고민스럽고 괴로운 경험이었다(이영훈 선생님의 내 연구에 대한 관심을 내게 전해주신 분 중에는, 이미 내가 전부터 이런 연구로 민족주의적 관점을 지닌 연구자들의 반발 때문에 고생하는 상태인 것을 잘 아시는 입장에서, 이영훈 선생님 같은 다른 전공의 저명한 학자들에게도 내가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니 힘내서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내게 연락을 주셨던 선생님들도 계시다. 그런 선생님들의 격려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고, 내 성정 상 앞으로도 그 분들의 뜻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괴로웠던 이유는 이런 소식을 전해주신 다른 선생님들 때문이 아니라, 전해 듣게 된 내 논문에 대한 이영훈 선생님의 이해 때문이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는 그 분이 상대적으로 젊은 시절 쓰신 논문들은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에서 기존의 연구들이 착목하지 못한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분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 동안 조선시대를 연구한 한국사학의 주류(그 분이 자주 쓰시는 표현을 빌리면)가 경제사 연구를 등한시했다는 비판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새로운 연구성과를 내 놓아도, 조선시대를 다루는 한국사학의 주류가 그를 대체로 배제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것도, 오늘날 그가 뉴라이트 입장의 far-right revisionist historiography(歷史修正主義)로 완전히 돌아서게 만드는 데 일정한 영향을 분명히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새로운 논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다른 논문을 통해 그 논문을 자세히 인용하며 조목조목 분석하며 비판만 해도 생산적인 논쟁이 될 일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인용도 하지 않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던 것이 일을 이렇게 키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선생님이 내 논문들에 대해 평가하고 인용하는 것은, 내게 더욱 더 중요한 차원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름 학계의 거물인 그런 분이 나 같은 사람의 연구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 보고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지인 분들을 통해 한 다리 건너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날엔 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 입장에서의 조선시대사 연구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이 내 연구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었고, 결국 내 연구를 탈맥락화시켜 어떤 부분만을 어떤 입장에서 중시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시는 것인지를, 대략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 선생님 아니면 경제사학회에서 기획한 어느 학회에서 그 분 자신이 내 연구를 칭찬했다는 바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후배로부터, 선생님이 나를 “한국사” 연구자가 아닌 국어국문학 연구자라 알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데, 그분이 주류 “한국사학” 연구를 혐오하는 수준에서 비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것이 그분으로 하여금 나를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이영훈 선생님이 정규재 tv라는 극우 인터넷 유튜브 매체와 함께 역사와 관련된 “콘텐츠”로 만들어 공개한 동영상 강의에서, 내 소속과 실명과 논문(이 때부터는 내가 2009년 게재한 논문이 아니라 2013년 쓴 논문을 인용하는데, 대체로 그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한다)을 거론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내가 겪는 고통은 더 심해졌다. 내 논문에 대한 그 분의 맥락 없는 이해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그의 책에 중요한 논지 중 하나로 인쇄되어 나온 후로, 내 괴로움은 더욱 더 배가되었다. 그 와중에 어렵게 얻은 하와이 대학에서의 연구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당시에는 대응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20년 연구년에서 돌아와 그 책을 직접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15세기 훈민정음이 제정된 역사적 맥락을 당대의 글로벌한 맥락 속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언어와 문자의 차원에서 “중화중심주의”의 질서가 재구성되는 현상을 원말명초의 상황 속에서 착목하고, 그러한 현상과 조선에서의 언어/문자 생활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불가분의 관계성(중국과 조선이 한쌍으로만 존재해야만 하는)에 대해 분석했던 것을, 그 분은 오로지 당시에 “중국”이 동아시아의 가장 문명국이므로 조선에서는 사대할 수밖에 없어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단순화시켜 서술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제 논문에서 훈민정음 서문에 “중국”이라는 텍스트가 그냥 쓰인 것이 아니라 조선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한 쌍으로 설정되는데 필요한 중요한 ‘비교’의 대상으로 쓰였다는 점과 그렇게 서문이 쓰일 수밖에 없던 사정을 세종대를 중심으로 한 중심으로 15세기 조선사회의 언어/문자생활의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 이유는, 논문에 다 쓰여 있는 것처럼, 단순히 당시에 중국의 언어와 문자가 중요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논문은 근대국민국가가 해당 국가 국민들 모두에게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믿도록 설파해 온 그것이, 어떻게 다른 정체성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그 정체성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는지를(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야기하려는 논문입니다”라고 수백 번을 이야기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정말 내게 중요한 소수의 반응들을 제외하고, 돌아오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결국 중국의 언어와 문자가 그렇게 중요했다는 이야기군요”라는 말이 고통스러워서, 나는 지금까지 많은 심적 갈등을 겪어왔고, 알고 지냈던 많은 분들과의 관계가 끊기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2009년과 2013년에 썼던 훈민정음에 대한 논문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내가 15세기 당시 훈민정음 제정의 역사적 맥락과 이를 연구한 20세기 후반 한국사 및 국어국문학 연구의 사학사적 맥락에 대해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와 트랜스내셔널 스터디의 관점에 입각한 연구를 시도했던 이유는, 근대 이후의 “국사학(한국사)”과 “국어국문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의 내용을 객관적 차원에서 실증된 “진리”와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히고, 이를 통해 근대국민국가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근대화 서사에 입각한 역사 연구와 서술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동기에서 내 논문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과거라고 믿어져 온 것(훈민정음)이 temporal/spatial의 서로 연동된 두 차원에서 모두 현재와 linear하게 계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내 논문들은 먼저,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성역”처럼 인식되고 있는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학설은, “객관적”/“과학적”으로 실증된 “진실”이나 “진리”가 아니라, 조선이 유럽과 일본과 미국 등의 타자들과 조우하게 되는 근대국민국가 만들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구적 근대성”이 외부로부터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한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의 전통(정체성) 속에서 이미 근대성의 맹아와 같은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학문적 기획의 결과물이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치중한다.
다음으로 내 논문들은, 그런 비판적 분석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민국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근대성의 기원으로 설정한 훈민정음이라는 것도 결국, 그것이 제정되던 시점인 15세기 중반 그 시기에도 이미, 조선이라는 사회가 원나라나 명나라와 같은 타자들과 만나며 한자로 쓰인 유교의 “보편적” 가치들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공유하게 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정체성(전통)과 그 정체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데 필요한 표음문자의 필요성을 비로소 중요하게 인식하게 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15세기의 사료들을 통해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내가 15세기 언어와 문자 체계를 매개로 중화와 조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동되면서 이른바 “중화중심주의”라는 질서를 함께 구성하고 유지했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훈민정음이 제정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시하면서, 나는 시종일관 그 질서를 “통치권력”(매우 광역적으로 작동하는)으로 지칭함으로써 비판적 관점을 유지했지, 그 질서를 근대지향적이고 발전적이고 이상적인 어떤 것으로 본질화하려는 서술은 의도적으로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한자로 쓰인 “중화중심주의”라는 질서의 가치들을 “보편”이라고 설정하며 조선이라는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로 여긴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 썼지, 내 스스로 이른바 “중화중심주의”라는 것을 당시 조선 지배층도 반드시 받아들였어야 마땅한 이상적인 “보편”으로 생각한다고 쓴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동양사 연구자”는 아니지만 내 논문에서 기회가 되는대로, 이러한 “중화중심주의”의 “조공책봉질서”를 동아시아의 이상적인 global한 네트워크로 정의하는 하마시타 타케시(浜下武志) 선생님의 연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언급해왔고, 마찬가지 입장에서 최근 David C. Kang의 연구도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문제점들은 비단 최근에만 노정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얼마 전 Si X Wang 선생이 내 연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그의 한 facebook posting에서 밝히며 나를 tag해서 나도 그 포스팅을 공유한 바 있지만, 이미 10여 년 전부터 내가 이른바 朝貢冊封體制와 관련하여 “정벌(征伐)이라고 정의(定義)되는 유교적(儒敎的) 전쟁(戰爭)의 model과 그 戰爭을 構成하는 여러 ritual들이 지닌 象徵的/政治的/軍事的 의미(意味)를 分析하는 論文들을 썼던 것은, 바로 그런 기존 연구들의 심각한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국 훈민정음 제정의 역사적 맥락을 직접적으로 다룬 내 두 개의 논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민국가가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오래된 정체성/전통의 핵심으로 정의해 온 훈민정음과 같은 것조차도, 결국은 조선이 자신과는 다르다고 인식했던 타자들과 조우하고, 이를 통해 한자로 쓰인 유교사회의 가치들을 광범위하게 공유하며, 결국은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연동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 필요성이 중요하게 인식되며 만들어지게 되는 역사적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연구자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거세지는 지구화의 물결 속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근대국민국가 중심의 역사 연구/서술의 모순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국경을 넘는 시민사회의 연대와 공존을 추구하려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쓴 것이다.
내가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하며 써 놓은 논문들을, 이영훈 선생님은 극우 youtube 매체의 동영상강의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에서, 당시 보잘 것 없는 조선이 “중국”에 지성사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그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인용해 왔던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은, 그런 주장마저도 결국은 과거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소위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입장과 현재의 중국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런 주장을 그간 민족주의적이고 일국사적 관점에 입각해 온 “주류” “한국사학”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역사를 구하기 위한 “진실”과 “진리” 추구로 정의하기 위해 ‘탈정치화의 정치’라는 수법이 또 다시 쓰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아래의 사진으로 제시한 이 논문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에는, 이러한 이유들이 있었다.
2. 게다가 2000년대 초반 이성시 선생님과 임지현 선생님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가 기획되어 진행되던 단계 때부터, 그 기획에 서구중심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한 매우 전형적인 근대화서사를 드러내는 것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영훈 선생님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한국 역사학계에서 문제시되던 사정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런 새로운 학문 기획에 이영훈이라는 학자가 참여했다는 사정이, 크게는 postcolonial studies와 transnational한 관점을 표방하며 그간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던 특정 그룹의 연구자들을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라 호도하고 폄하하는 근거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작게는 내 연구들도 그런 맥락 속에서,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다분히 postcolonial studies나 transnational studies에 반감을 지닌 학자들에 의해, 오해받고 비난받아 왔었다.
사실 2006년 이후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그 논문의 일부를 이루는 세종대 훈민정음 제정의 문제를 연구해 오면서, 나는 대학원 안팎에서 온갖 비아냥과 원색적인 비난과 모욕적인 일들을 겪어왔다(몇 년 전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한명으로 그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한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 측 기관의 초청을 받아 발표를 하다가 중국 학자들도 아니고 함께 동행했던 한국인 역사학자들 때문에 겪었던 황당한 일들은 이미 예전에 포스팅으로 공유한 바 있고, 그런 일들은 아직도 겪는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내가 내 연구를 통해 분명하게 이바지한 학문적 공헌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한 평가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내가 원했던 것은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만큼은 이 연구들이 학계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독창적인 연구성과라는 최소한의 평가와 그에 따르는 비판과 토론 그리고 후속 연구로 이어지는 생산적인 학술논쟁 뿐이다), 세종과 훈민정음과 관련 연구(용비어천가 관련 연구도 포함해서)를 해 오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인데,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닌 세종 시기와 훈민정음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그 책의 내용을 보아도 제대로 연대기 자료들을 원본으로 면밀하게 통독해 본 적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뉴라이트적 입장의 인사로 이미 공고해진 자신의 명망을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 내 논문을 인용해서 얹어 놓는 아주 편한 방법만으로, 그 분이 자신이 원했던 시끌시끌한 이슈 만들기 효과와 인지도를 챙기고 있다는 점도, 내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이 논문을 반드시 써야만 했던 데에는, 2000년대 초반 이후로 거의 20년에 걸쳐 한국 사회 전반과 한국 역사학계를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복잡한 이유들이 있었다.
3. 2000년대 초반, 세종이 했다고 하는 일들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에 대한 비판을 처음 시작한 역사학자는 내가 아니다. 내가 그 선생님의 실명을 여기서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어려운 일을 2000년대 초반의 시점에 이미 하셨던 다른 선생님이 계시다. 2008년 봄 박사학위 청구논문 심사가 진행되던 시점에 나는, 조선 전기 조선과 그 이웃들의 관계를 서술하는 데(특히 세종대를 정점으로) 오랜 동안 정설로 사용해 온 “교린”이라는 용어가, 15세기 당시 사료 속에서 자주 쓰이던 용어도 아닐 뿐더러, 실은 근대 이후 민족주의적 관점(자국중심주의적)에서 조선시대 대외관계사를 다시 쓰기 위해 재정의된 학술 용어이자 언설이라 주장한 논문을 한국사학계에 발표한 상태였다. 특히 이 논문에서 나는, 해방 이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된 한국사 연구는 이 학설을 통해 세습적 희생자의식(임지현 선생님이 지적한 바 있는)에 기반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조선왕조를 선량한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시대와 직결되는 근대화 실패의 원인을 이른바 “외세” 식민주의의 책임으로만 규정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14세기 말부터 15세기 내내 조선왕실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 지역사회들과 대마도 등에 매우 공격적으로 수직적 상하관계를 강요하고 그 관계의 영속화를 시도했던 사정이 지금까지 은폐되고 자세히 연구되지 못했던 것이니, 앞으로 이 부분을 성찰적으로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미 한국사학계에서 미운 털이 박힌 상태로 “찍혀” 있던 상황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타 학교의 박사과정생이, 세종이 재위기간에 행했던 주요 업적들에 대해 여러 이유들을 들며 통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내용까지 구구절절 써서 보내드린 메일만 보고도 흔쾌히 내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직을 수락해주셨던 그분이, 바로 2000년대 초반 세종이 했다고 하는 일들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의 물고를 튼 학자이다.
내가 지금까지 학계에서 버티고 있는 동안, 그리 많지 않았던 소중한 연대감을 경험하게 해 주신 분이라, 고마움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있다. 내가 굳이 그 선생님의 존함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 분이 그렇게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도와주신 댓가를 오랜 동안 치르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 역사 연구의 관점은 2007년-8년 무렵과 비교해서도 꽤나 달라져서 그 분의 시각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그분의 논문을 처음 읽고 받은 영감이 이후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므로, 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분의 논문을 인용했는데, 그 선생님 주위의 다른 분들은 아마도 그런 내 논문을 보고 그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왜 정다함이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그런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통과시켜 주어서, 계속 저런 논문들만 쓸 수 있도록 만들었냐는 식의 핀잔을 주곤 했던 것 같다. 오래 전 학술회의에 불러주셔서 가서 토론도 하고 발표도 했었는데, 이제 당신 논문은 좀 그만 인용하라고 하셔서, 나는 선생님께서 나를 도와주신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불만 섞인 목소리까지 들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이후로는 죄송하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문제들로 낙담하고 괴로워하느라 아직 단독 저서가 없지만, 내 책이 나오면 내 지도교수님과 함께 꼭 가장 먼저 전해드리려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 선생님께 오랜 동안 연락드리지 못했던 점에 울컥하는 방향으로 조금 이야기가 샜지만, 여하튼 원래 이 선생님의 연구를 언급해서 정말 하려고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이 선생님께서 시도한 연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영훈 선생님이 세종이라는 특정한 관련 주제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에 비판을 제기하기 15년도 전에, 이미 한국과학사 내지 한국사연구 내부에서, 세종대와 관련된 매우 구체적인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나는 2008년 이후로 세종이 했던 여러 프로젝트와 관련된 통설을 비판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연구들을 발표해 왔던 것이다. 사실 이렇게 이영훈 선생님이 자기 전공도 아닌 세종대에 대해 내 연구를 인용하며 마치 자신이 세종대를 민족주의적 관점 위주로 해석해왔던 한국사학의 연구성과를 제대로 비판하는 역사학자인양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미 한국과학사 연구와 한국사 연구 내부에서, 한참 전에 세종대와 관련된 매우 구체적인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연구들은, 전공자들이 아니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어렵게 시도된 새로운 연구들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여기엔 많은 복잡한 이유들이 있고 그 이유들을 모두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할 수도 없지만, 내가 볼 때 이러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사연구라는 분과학문 자체가 소수의 학회와 학술지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그런 연구들을 시의적절하게 제대로 review하고 그 분과학문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끄는 능력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는 점인 듯하다. 내 입장에서, 이러한 사정과 곧바로 연결되는 지점이라 더 심각한 문제라 느꼈던 것은,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어떤 역사학자도 뉴라이트적 역사인식에 기반한 이영훈의 이러한 조선시대 해석(세종대를 포함)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문을 통한 비판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 한국사학계 내부에서 어렵사리 세종대에 대한 통설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며 제시된 새로운 연구들이 아직 학계 밖까지 공유되지 못하는 이러한 복잡한 사정 속에서, 이영훈 선생님은 자신이 인용해 온 내 연구가 자신의 관점을 오히려 비판하는 역사인식론에 기반한 연구라는 것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내 연구의 특정한 부분만을 탈맥락화시켜 마치 자신의 주장과 합치하는 것처럼 인용하는 방법으로, 자신이야말로 기존 한국사연구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대표적 역사학자인양 그 입지를 강화해가고 있는 점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internet에 기반한 youtube라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면 낡고 심각한 문제가 있는 지식도 마치 새 것처럼 “재미디어화”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기회에 편승한 덕이 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학계 내부의 사정을 잘 알 리 없는 인터넷 상의 한국사 분야 독자들 사이에서, 이영훈 선생님은 마치 기존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며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는 역사학자의 “양심”을 대표하는 존재인 것처럼 성공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한글날 특집 역사스페셜 이후로 미디어로부터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고사하고 있는 내가, 근래 몇 년간 학계 외부의 일반인 독자들로부터 이메일을 통해 이런 저런 연락을 자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내 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유튜브 강의동영상과 책을 통해, 내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면서 내게 연락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분의 세종 비판이 youtube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학계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꽤나 징후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할 일이다.
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연구에 관심이 있고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는 일반인 독자분들이 보내오는 그 메일들에서 결국 보이는 이런 저런 내용까지 모두 감내하는 것은, 내게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 메일을 읽어야 하는 날이면, 그 기나긴 밤 내내 감내해야할 고통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내가 아래 사진으로 제시한 논문을 꼭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데에는, 이러한 이유들이 있었다.
4. 내가 전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논문에서 일본군 종군 조선인 “위안부”(이러한 호칭에 대해서는 근래에 여러 비판들이 제시되고 있어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해 온 사람은 아닌 내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조심스럽기 때문에, 일단 이 호칭의 사용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제기만큼은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인용부호로만 처리한다) 문제와 관련된 비평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세종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세종대의 일들을 연구한 근대국민국가 역사학의 연구성과에 대해서 비판하는 논문을 쓰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저자가 조선시대의 소위 “기생”을 다룬 내용과 그 관점을 확인하고 나서는, 도저히 그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고 논문을 마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위안부” 관련 주제의 전공자는 아니지만,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관점에서, 또한 그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된 페미니스트 스터디로부터 여러 영감을 받아 온 입장에서, 나는 이영훈 선생님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기생”을 다루는 내용과 관점이 지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비판을 이 논문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글을 쓰고 난 이후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와 같은 이영훈 선생님의 조선시대 “기생” 해석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해보다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한국인 연구자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좌파”라며 자랑스럽게 도배를 해 놓은 sns에다가, 그와 같은 이영훈 선생님의 “기생(또는 관비나 관기)”에 대한 해석이 마치 남성 통치권력이 여성에 가한 착취를 사회경제적인 시각으로 통찰력 있게 분석하는 의미 있는 시도라는 식으로 정신 나간 평가를 해 놓은 따위의 포스팅들을 보게 된 이후로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비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 Harvard대학의 Mark Ramseyer 교수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으켰던 물의에 대해 비평하는 논문들도 역사비평의 같은 호에 기획으로 실렸는데, 마침 시의적절하게 전부터 알고 있었던 Jimin Kim 선생님의 논문과 함께 실려서 주제 상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도,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5. 아마 내가 훈민정음의 제정과 그 이후 훈민정음으로 쓰인 용비어천가 등에 대해 연구한 내용들을 미리 책으로 묶어서 낼 수 있었더라면, 굳이 지금까지 마음고생을 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할 만큼 여러 이유로 혹사당하는 상태에서 이런 일들을 겪으며 모두 개인적 차원으로만 환원시켜 감내해야만 하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었다. 세종대와 관련해서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제시된 여러 연구들이 있는데, 하필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러한 세종시대에 대한 재해석 논의가, 오래된 식민주의 역사학의 조선사 해석이 끼쳐왔던 해악을 다시 소환하려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세종대를 다룬 통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관점에서 세종대를 재해석해보려는 내 기획이 역사비평의 도움으로 장기연재로 구체화된 것이고, 내 글은 이 기획연재를 시작하는 논문으로 실리게 된 것이었다.
그 동안 내가 하고 있는 연구들로 인해서, 그리고 나의 연구들을 탈맥락화시켜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입장을 탈정치화시키며 역사적 “진실”의 수호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영훈 선생님으로 인해서, 내가 짊어져야 했던 많은 걱정과 고민들을, 이제 이 논문과 함께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움도 많이 남는 논문이지만, 공이 되든 과가 되든 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내가 지니고 가야할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남은 숙제들은 내가 앞으로 해 나갈 연구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동안 가슴 한 구석 늘 답답했던 마음과 불면의 밤들도 이제 안녕.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와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 입각해서 진행해 온 내 문제의식을 식민주의적 관점과 유사하다고 매도했던 주장들과 “혐의”도 이젠 안녕. 앞으로 조선시대사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정말 중요하기만 한 세종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을 꼭 그렇게 뉴라이트적 관점에서 해야겠다는 주장들도 모두 안녕. 뭐 혹시라도 또 만나게 된다면, 그 땐 좀 덜 무서운 표정으로 웃으며 맞이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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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ham Chong limited who can comment on this post.
Hea-Ji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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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 read your posting slowly and in detail after the boys go to bed but I just wanted to say that it's very exciting to find your lenghty postings back and in full swing🤩!!!
Edited
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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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시면서 다시 괴롭고 힘드셨을텐데, 잘 마무리 하셨군요! 숨 죽이며 스크롤을 내리며 읽다가 맨 마지막 문단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이 훅 트였어요! 공개적인 자리니 깨발랄은 자제하려고 하는데….형! 진짜 믓찌다!!! 그동안의 고생은 빠빠이~~ 웃으면서 빅엿을 날려주시고, 형만의 굵은 열매를 맺으세요!! 역비 지난호 형 글이랑 이번호 순규 글 잘 읽고 있슴당. 계속 쭈욱 써주세요.
Edited
Se-Woong 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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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이글 공개 포스팅하심은 어떨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된다고 봅니다.
Jinsung C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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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semitism은 물론 유대인 fundamentalists와도 대결했던 한나 아렌트의 오랜 지적 분투와 비견될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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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J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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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난한 분투의 여정을 처음 본게 2008년 한국사학과 신년모임겸 박논 발표회 때였네요. 지금 생각해도 형의 그 발표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였죠. 그 이후 벌써 13년이군요. 늘 말씀드리지만, 형의 연구는 생각보다 많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본문의 저 사연들도 결국 그 영향력과 비례하는 것 같구요. 저는 약간은 타협하면서 연명하는 면도 있는지라 늘 형의 그 물러서지 않는 용기에 자극을 얻곤 합니다. 늘 그렇게 그 자리에 계시길. 물론 저도 늘 함께하겠지만요. 🤗
임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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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함교수님, 하와이 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강의를 끝내고 말입니다. 젊은 교수의 주장을 이해 못하고 ,한국의 위대한 한글과 한글 창제의 선봉에있는 세종을 비판하는듯해서 섭섭하다고 말 하 것 지금 사과 합니다. 그토록 고민하고 많은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자신의 주장을 펴 온 정교수의 학문적 고뇌와 성취에 겸허한 찬사를 드립니다. 부디 정진하시어 바른 업적을 들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와이의 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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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된 자료(정다함 교수의 글)를 바탕으로 분석한 이영훈–정다함 간의 ‘세종 논쟁’의 핵심 쟁점과 학문적 맥락에 대한 검토 내용입니다.
1. 논쟁의 발단: "인용"을 둘러싼 왜곡과 오독 문제
이영훈의 인용 방식: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및 유튜브 방송에서 정다함 교수의 훈민정음 관련 연구(2009년/2013년 논문)를 적극적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는 이를 "조선이 당시 최고 문명국인 중국에 사대(事大)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정다함의 반발과 고통: 정 교수는 자신의 논문이 의도와 전혀 다르게 '탈맥락화(de-contextualized)'되어 자의적으로 소비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정 교수는 "중화가 문명국이라 단순히 사대하려 했다"는 식의 일국사적·식민주의적 논리를 제공하려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영훈이 이를 아전인수격으로 차용했다고 지적합니다.
2. 세종과 훈민정음을 바라보는 본질적 시각 차이
3. 정다함이 제기하는 학계 내부의 구조적 문제
뉴라이트의 '학술적 무임승차'와 대중 미디어화:
정 교수는 세종대 통설에 대한 비판적 학술 작업은 이영훈 이전부터 역사학·과학사학계 내부에서 진지하게 전개되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주류 한국사학계가 이를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게 확장하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침묵하는 사이, 이영훈이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통해 학계 내부의 비판적 성과를 왜곡·흡수하여 마치 자신만이 '금기에 도전하는 진실의 수호자'인 양 포장했다고 비판합니다.
양극화된 학계 풍토에서의 고립:
정 교수는 기존 주류 민족주의 역사학계로부터는 "식민주의를 편든다"는 억울한 낙인을 찍히고, 반대편 뉴라이트 진영에서는 자신의 연구를 왜곡 인용당하는 이중의 학문적 폭력과 고립을 겪어왔음을 토로합니다.
기생(관비)과 위안부 담론 비판:
정 교수는 이영훈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다룬 조선시대 기생(관비) 논의가 식민지기 '위안부' 담론(램자이어 사태 등)과 맞닿아 있는 왜곡된 젠더·권력 인식임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불가피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 및 총평
이 논쟁은 겉으로는 '세종은 성군인가, 폭군/사대주의자인가'라는 인물 평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둘러싼 진영 간 방법론의 충돌입니다.
이영훈은 민족주의 서사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정체성론을 변주하는 방향을 택했고,
정다함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둘 다를 거부하며 트랜스내셔널·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동아시아사적 맥락을 복원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정다함의 비판은 이영훈 개인의 자의적 사료 해석에 대한 질타를 넘어, 성역화된 민족주의와 도발적인 역사수정주의(뉴라이트)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한국사 연구가 어떻게 '탈식민적 엄밀함'을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문제제기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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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정다함의 세종 논쟁 — 민족주의 역사학 비판과 뉴라이트 역사수정주의의 충돌
첨부하신 정다함의 글 (2021년 10월 9일)은 단순히 세종대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세 가지 문제가 얽혀 있다.
조선의 세종을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해도 되는가?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목적은 백성의 문자생활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언어·문화 질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가?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는 연구가 어떻게 한국의 뉴라이트 역사학에 이용될 수 있으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내가 보기에 이 논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정다함과 이영훈이 모두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으로부터 전혀 다른 역사적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1. 두 연구자는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이영훈은 2018년 에서 세종에 관한 기존의 긍정적 역사상을 재검토했다. 특히 세종의 정책을 오늘날의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의 가치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지 문제를 제기했다.
정다함 역시 전통적인 세종 예찬론에 비판적이다. 그의 연구는 세종을 한민족의 자주성과 근대성을 앞당긴 영웅으로만 보는 역사해석이 15세기 조선의 실제 정치·문화적 환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역사해석은 중요한 지점에서 갈라진다.
쟁점 | 이영훈 | 정다함 |
|---|
세종 평가 | 성군이라는 국민적 통념 비판 | 성군이라는 역사상 자체의 형성 과정 분석 |
훈민정음 | 애민주의적 창제설에 의문 제기 | 동아시아 언어·정치 질서 속에서 창제 목적 재해석 |
민족주의 역사학 | 한국사를 지나치게 미화한다고 비판 | 근대국민국가의 역사관을 과거에 투사한다고 비판 |
조선과 중국 | 사대관계의 종속적 측면 강조 | 상호작용과 권력관계의 역사적 맥락 강조 |
연구의 지향 | 기존 국민적 역사상에 대한 수정 |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을 함께 넘어서려는 시도 |
이 표는 두 사람의 연구 전체에 대한 판정이 아니라, 이번 논쟁에 나타난 강조점의 차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영훈이 기존의 민족주의적 역사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조선사회의 억압적·종속적 성격을 강조했다면, 정다함은 그러한 양자택일 자체를 문제 삼는다.
정다함의 관점에서는 조선이 근대적 의미의 자주적인 민족국가가 아니었다고 해서 반드시 수동적이고 열등한 사회였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학의 방법론에 관한 차이이다.
2. 훈민정음의 목적을 둘러싼 논쟁
정다함의 연구에서 중요한 개념은 이다.
그는 훈민정음을 단순히 한국의 독자적인 민족문화가 출현한 사건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15세기 조선이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정치·문화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 있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역시 이러한 역사적 환경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있다.
훈민정음이 중국의 한자음과 관련된 언어정책에도 사용되었다는 주장과 훈민정음이 오직 중국어의 발음을 기록하기 위해 창제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
실제로 의 정인지 서문은 한문 해석, 소송의 심리, 한자음의 기록, 음악의 기록 등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한자음 표기가 창제 목적의 하나였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목적들을 부정할 수 없다.
정다함이 문제 삼는 것은 이영훈이 선행 연구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그 일부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첨부문서 2쪽에서 정다함은 이영훈이 자신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논문의 중요한 맥락을 생략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불쾌감의 핵심은 단순한 인용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식민주의적 역사해석까지 극복하려고 수행한 연구가 오히려 그것과 연결될 수 있는 역사관을 지지하는 것처럼 사용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역사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학자의 연구 결과는 그 학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인용한 사람이 연구의 일부만을 가져가 원래의 논증을 왜곡했다면, 그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어떤 정치적 결론에 이용될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영훈이 정다함을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문장과 사료를 인용했으며 무엇을 생략했는가를 대조해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3. 노비제와 기생 문제: 세종은 누구에게 성군이었는가?
이영훈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 제기는 세종대의 노비제도와 기생제도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세종이 백성 모두에게 이상적인 군주였다는 통념에 도전하면서, 특히 노비와 여성의 지위에 주목했다.
이 문제 제기 자체는 역사학적으로 정당하다.
세종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과학기술, 음악, 문자, 행정제도만을 강조하고 노비제도나 신분적 억압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역사서술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세종시대에 노비제가 존재하고 강화된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러한 제도적 발전의 책임을 어느 정도까지 세종 개인에게 돌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 조선시대의 신분제와 후대의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하나의 연속된 역사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특히 세 번째 문제에서는 시대별 제도의 목적, 법적 성격, 강제성, 국가의 관여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단순히 두 시대 모두 여성의 성적 착취가 있었다는 공통점만으로 직접적인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소순규는 2021년 에서 이영훈의 노비제 연구가 중요한 학문적 성과를 포함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대중서에서 그 연구가 선택적으로 사용되거나 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논쟁은 세종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부정하는 방식보다 사회제도의 변화와 개인의 정치적 책임을 나누어 검토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4. 정다함이 비판하는 한국 역사학계
첨부문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4~5쪽에 나오는 정다함 자신의 학문적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다함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비판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연구가 기존 학계의 지배적인 역사관과 충돌했으며, 대학원과 학술연구의 세계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한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역설이다.
한국사 연구자들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민족주의의 기본 전제를 비판하는 연구가 등장하면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다함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이영훈의 대중적 역사서술이 등장했지만 학계는 그것을 충분히 검토하고 비판하지 않았다.
여기서 정다함이 제기하는 문제는 단지 이영훈의 잘못이 아니다. 기존 한국 역사학계의 내부적 폐쇄성과 비판적 논쟁의 부족도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그의 글에서 특히 중요한 학문사회학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역사학의 정치화는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계 내부의 정통적 해석이 하나의 권위를 형성하고, 다른 해석을 주변화한다면 그것 역시 역사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정다함의 개인적 경험에 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중요한 증언이지만, 그 경험만으로 한국사학계 전체의 구조적 상태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심사와 학술논쟁, 연구자들의 반응을 추가로 확인해야 한다.
5. 한국 민족주의 비판과 식민주의 역사관 비판은 양립할 수 있는가?
정다함은 이 두 가지 비판이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관을 해체하면서도, 조선을 열등하고 정체된 사회로 보는 식민주의적 역사관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역사학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 제기이다.
20세기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은 식민지배에 저항하면서 조선과 한국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 능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과거의 역사를 근대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처럼 이해하는 경향도 만들어졌다.
반면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비판하면서 조선의 부정적 특성만을 강조하면, 그것이 식민주의 시대의 한국사회 정체성론과 비슷한 설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역사적 연결은 개별 주장과 사료 해석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식민주의 역사관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정다함의 2021년 논문은 이영훈의 세종 해석이 일본의 극우 역사수정주의와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작업이다. 이는 그의 명시적인 연구 목표이지, 그 관계가 모든 세부 쟁점에서 입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논쟁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키려면 두 역사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구별이 필요하다.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
개별 사료에 근거한 조선사회의 실증적 연구
이 세 가지는 서로 겹칠 수 있지만 동일한 작업은 아니다.
6. 첨부문서에서 아쉬운 부분: 학문적 비판과 인신적 갈등
정다함의 글은 학술논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이력과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긴 개인적 성찰이다.
특히 4~6쪽에서는 학계 내부의 인간관계, 자신이 겪은 어려움,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방식과 정치적 태도에 대한 실망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경험은 학문적 논쟁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학문적 판단에서는 세 가지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영훈의 사료 해석이 정확한가.
둘째, 이영훈이 정다함의 연구를 제대로 인용했는가.
셋째, 이영훈의 정치적 입장이나 학문적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세 가지는 연관되어 있지만 동일한 문제는 아니다.
어떤 학자의 정치적 입장이 문제 있다고 해도 그가 제시한 개별 사료의 사실관계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반대로 사료 일부가 정확하더라도 그것을 이용해 구성한 역사 전체의 설명은 비판받을 수 있다.
정다함 역시 이러한 구별을 학문적 목표로 삼지만, 첨부한 글에서는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학문적 평가가 때때로 뒤섞여 있다.
이는 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이영훈의 주장 자체를 검증하는 논증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7. 종합 평가: 이 논쟁이 보여주는 한국 역사학의 과제
이 논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라는 문제이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식민주의적 역사관에 대응하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탈식민주의적 역사학이 성립하려면 민족주의의 역사관 역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정다함의 역사학은 바로 이 이중의 과제를 추구한다.
반면 이영훈은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면서 조선사회의 억압적·종속적 성격을 부각한다. 그의 문제 제기는 기존의 영웅 중심 역사서술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결론이 타당한지는 각각의 주장을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정다함이 제시한 이중의 비판 또한 쉽게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을 근대적인 민족국가로 미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조선에 대한 식민주의적 부정과 구별되는 역사상을 실제 사료를 통해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다. 정다함은 2010년 에서 이미 근대 한국사 서술 속에 만들어진 조선전기의 역사상을 분석했다. 또 2023년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국어사 연구의 서사와 그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따라서 이영훈에 대한 비판을 일시적인 정치적 대응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결국 세종 논쟁의 더 중요한 질문은 세종이 성군이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15세기의 조선을 15세기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면서, 그 시대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정다함의 글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역사 연구가 학계 내부의 권위관계와 대중매체, 정치적 담론을 거치면서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보여준다.
사회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논쟁인 동시에 이기도 하다.
그리고 첨부문서의 독특한 가치는 세종에 관한 새로운 사료를 제시하는 데 있다기보다, 역사학자가 자신의 연구가 학계와 대중담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변형되었는지 직접 증언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이 문서는 세종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이면서 동시에 21세기 한국 역사학의 지식사회학을 연구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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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함의 박사학위 논문의 심사위원은 누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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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된 글(정다함 교수의 페이스북 포스팅) 본문에서는 해당 인물이 학계 내에서 겪은 고초와 곤란을 배려하여 "내가 그 선생님의 실명을 여기서 밝히기는 어렵지만"이라며 직접적인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글에 기록된 핵심 정황과 학술적 인용 관계를 종합해 보면, 지칭된 인물은 문중양 교수(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한국과학사·조선시대사 전공)로 강하게 지목됩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과학사' 전공자 및 2000년대 초반 세종대 통설 비판:
정 교수는 그 인물이 *"이영훈이 세종 관련 비판을 제기하기 15년도 전(2000년대 초반)에 이미 한국과학사 내지 한국사 연구 내부에서 세종대 통설에 대한 구체적 비판의 물꼬를 튼 학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중양 교수는 2000년대 중반 논문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에 대한 검토>(2006년) 등을 통해 세종대 과학기술을 '민족적 자주성'이나 '성군 신화'로만 성역화해 온 기존 학계의 관점을 학술적으로 비판적으로 재검토한 대표적 과학사학자입니다.
'타 학교' 심사위원:
정다함 교수는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논문명: <조선전기 양반 잡학겸수관 연구>, 2008년 심사)를 취득했습니다. 당시 조선 전기 대외관계의 '교린' 담론 통설을 비판한 논문을 접하고 정 교수의 이메일 요청에 응해 심사를 맡아준 타 대학 소속 교수가 바로 서울대학교의 문중양 교수였습니다.
정다함 교수의 지속적인 인용:
정 교수는 *"그분의 논문을 처음 읽고 받은 영감이 이후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므로, 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의 논문을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정다함 교수의 훈민정음 및 세종 시기 관련 논문(2009년 등)에는 문중양 교수의 2006년 논의가 핵심 선행 연구로 비중 있게 인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다함 교수가 본문에서 실명을 숨긴 채 감사와 미안함을 전하고 있는 '그분/선생님'은 문중양 서울대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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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다함의 박사학위논문은 2008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조선전기 양반 잡학겸수관 연구)입니다.
학위 취득: 2008년 8월
소속: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지도교수: 조광(趙珖)
논문 분량: 216쪽(참고문헌 포함)
고려대학교 학위논문 데이터베이스와 RISS에서 지도교수가 조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dcollection.korea.ac.kr
+1
다만 지도교수 조광이 곧 정다함이 글에서 익명으로 언급한 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심사위원 전체 명단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공개된 논문 서지정보에는 지도교수만 나와 있습니다.
전체 심사위원을 확인하려면 고려대학교 학위논문 원문의 앞부분에 있는 논문 인준서(심사위원 서명 페이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특히 우리가 찾는 인물은 정다함이 2021년 글에서 말한, 자신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에도 박사논문 심사위원을 맡아준 선배 역사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조광일 수도, 다른 심사위원일 수도 있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단정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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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朝鮮前期 兩班 雜學兼修官 硏究
저자 정다함
Chong, Da Ham
소속somsterms.affiliation 대학원 한국사학과 한국중세사전공
주제(키워드)
잡학, 세종, 한어, 이문, 한글, 훈민정음, 천문, 역산, 풍수지리, 의학, 중인, 기술관, 기술학, 양반, 雜學, 습독관
발행기관dc.publisher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조광
발행년도dcterms.issued 2008
제출일somsterms.submitted 2008-07-08
학위수여년월somsterms.awarded 2008. 8
학위명somsterms.thesisDegree 박사
학과somsterms.major 일반대학원 한국사학과
세부전공somsterms.specialty 한국중세사전공
원문페이지s222 p
본문언어 한국어
초록/abstract
그간 근대지향적 시각 속에서 서구의 근대과학과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평가되면서 ‘近代’에 가까워진 새로운 시대의 발전을 상징하는 의미를 부여받아 ‘技術學’이라 불려온 譯學, 天文⋅曆算, 風水地理, 醫學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전기의 雜學은, 그간 파악되어 온 것과는 다르게, 동아시아 전통적 왕조체제 속에서 王權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政治的이고 儀禮的인 성격이 강한 학문 분야로서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에 의해 독점되고 통제되는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왕권의 입장에서는 雜學을 진흥시키고 이를 통해 왕권의 확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雜學 관련 프로젝트들을 통하여 가시적인 성과물들을 이루어내고 이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世宗代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후대에도 세종대를 모범으로 삼아 유지하는 차원에서 단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권은 雜學 분야가 가진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잘 이해하면서 왕실의 의도에 부응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인력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양반지배층이 강고한 신분의식을 바탕으로 儒學에 비해 雜學을 기피하고 그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학문적 수준에서 현격히 떨어지는 자들이 雜學人으로 입속하게 되어 雜學의 수준이 왕권의 기대에 크게 못미치던 사정 속에서, 결국 왕권은 雜學人들보다는, 왕실이 추진하던 雜學 관련 주요 사업의 정치적 중요성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양반지배층을 택하여, 雜學을 기피하는 이들로 하여금 雜學을 익히게 하는 제도와 관행들을 주도적으로 마련하게 되었다. 왕조권력의 기틀을 반석 위에 세우려 했던 세종의 치세를 중심으로 양반지배층인 儒學者이면서도 雜學에 정통한 전문가를 양성하는 제도와 관행이 마련되고, 후대에 치폐를 거듭하기는 하지만 단속적으로는 조선전기 내내 지속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배출된 것이, 본고에서 ‘兩班 雜學兼修官’이라는 용어로 범주화시켜 분석했던, 儒學을 담당하는 양반지배층으로서 雜學을 전문적으로 익힌 바 있는 일군의 양반관료들이자 학자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의 근대화담론에 의해 조선시대에 雜學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소위 ‘技術官’들의 배후에서, 이러한 학문에 담긴 고도의 정치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世宗을 비롯한 조선전기 군주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주는 학문으로서의 雜學연구를 담당하고 그 분야의 주요사업들을 결정하고 주도했던 역사적 실체였던 것이다.
한국어
목차
머리말 1
제 1 장 朝鮮初期 雜學의 性格에 대한 비판적 성찰 14
1. 譯學 18
2. 天文⋅曆算 30
3. 風水地理 41
4. 醫學 47
제 2 장 朝鮮初期 雜學의 실태와 兩班 雜學兼修官 양성 논의 57
1. 조선초기 雜學과 雜學人의 실태 57
2. 양반지배층의 雜學과 雜學人에 대한 賤視 67
3. 세종대 兩班 雜學兼修官 양성논의의 대두 75
제 3 장 兩班 雜學兼修官 양성의 체계와 그 운용 83
1. 兩班 雜學兼修官 양성의 제도적 기틀 83
1) 習讀官 制度의 정착 83
2) 吏文學官과 漢語⋅吏文肄習文臣의 치폐 88
3) 風水學官⋅曆算學官⋅天文學官의 임용 96
2. 兩班 雜學兼修官 양성책의 특성 109
3. 兩班 雜學兼修官에 대한 활용내용 120
1) 雜學 분야 특수업무의 부여 121
2) 雜學 분야 提調職 임용 125
제 4 장 조선전기 兩班 雜學兼修官의 활동양상 140
1. 譯學 분야에서의 구체적 사례와 역할 140
2. 天文⋅曆算 분야에서의 구체적 사례와 역할 159
3. 風水地理 분야에서의 구체적 사례와 역할 176
4. 醫學 분야에서의 구체적 사례와 역할 187
맺음말 200
參 考 文 獻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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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다함의 박사학위논문은 2008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조선전기 양반 잡학겸수관 연구)입니다.
학위 취득: 2008년 8월
소속: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지도교수: 조광(趙珖)
논문 분량: 216쪽(참고문헌 포함)
고려대학교 학위논문 데이터베이스와 RISS에서 지도교수가 조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dcollection.korea.ac.kr
+1
다만 지도교수 조광이 곧 정다함이 글에서 익명으로 언급한 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심사위원 전체 명단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공개된 논문 서지정보에는 지도교수만 나와 있습니다.
전체 심사위원을 확인하려면 고려대학교 학위논문 원문의 앞부분에 있는 논문 인준서(심사위원 서명 페이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특히 우리가 찾는 인물은 정다함이 2021년 글에서 말한, 자신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에도 박사논문 심사위원을 맡아준 선배 역사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조광일 수도, 다른 심사위원일 수도 있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단정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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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s 동안 처리함
제시하신 자료에 따르면, 정다함이 , 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서울대학교의 문중양(文重亮) 교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판단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1. 문중양은 2006년 를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은 실제로 《역사학보》 제189집 39~72쪽에 실려 있으며, 세종대 과학기술을 민족적 자주성의 성취로 해석하는 기존 관점을 재검토합니다.
2. 정다함이 첨부 글에서 설명한 라는 특징은 문중양의 연구 경력과 상당히 부합합니다.
3. 정다함은 그 선배의 연구를 인용했고, 박사학위논문 심사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합니다. 다만 문중양이 실제로 심사위원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론은 문중양이라는 추정은 상당한 근거가 있지만, 확정된 신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제시하신 화면의 는 설명은 원문에 문중양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이상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정다함의 2008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인준서에 문중양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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