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과 이광수의 문학과 행적에 대해 질문해 주셨군요.
흔히 알려진 <감자>, <배따라기>, <무정>, <흙> 같은 초기 대표작만 읽어보면 "도대체 여기에 무슨 친일이 있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작가들의 초기 대표작에는 친일 요소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전시동원 체제가 극에 달했던 일제 말기, 두 작가는 일제의 침략 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직접적으로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소설과 산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의 작품들과 사회적 행적 때문에 <친일 문학인>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말하는 <친일>의 기준과, 그것이 두 작가의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정리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문학에서 무엇을 <친일>이라고 정의하는가?
문학 연구와 역사학에서 말하는 <친일 문학>은 단순히 일제강점기에 활동했거나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일제가 내세운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한 텍스트를 뜻한다. 주로 다음 세 가지 핵심 내용으로 집약된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며, 조선인은 일본 천황의 신민(황국신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선동하는 것.
전쟁 협력과 학병·징병 선동: 태평양전쟁 등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이나 '동양 평화를 위한 거사'로 미화하고, 청년들에게 일제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라고 부추기는 것.
민족 정체성 부정:
창씨개명을 독려하고, 한국어 대신 '국어'(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문학 속에서 권장하는 것.
2. 이광수의 소설에 나타난 친일의 양상
이광수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전향서를 쓰면서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걷게 된다. 그는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만큼, 그의 소설은 정교한 논리로 친일을 내면화시키는 특징을 띤다.
<그들의 사랑> (1941년)
내용과 친일성:
조선인 청년과 일본인 여성이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과정을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연애소설이지만, 본질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를 남녀 간의 결합과 가정 형성이라는 은유를 통해 이상화한 대표작이다. 두 민족이 섞여 온전한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는 것이 가장 숭고한 화합인 것처럼 묘사한다.
<어머니> (1940년)
내용과 친일성:
군대에 지원하려는 아들과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갈등과 결단을 그린다.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삼키며 아들을 천황의 군인으로 보낸다. 이를 '자식을 진정한 황국신민으로 바치는 숭고한 모성'으로 포장하여, 전시 동원 체제 아래 자식을 전쟁터로 내보내야 하는 당시 조선 어머니들의 반발심과 슬픔을 체제 순응으로 전환하려 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소설 집필: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한 후, 스스로 일본어로 소설과 수필을 기고하며 "조선인은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어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궤변을 작품 안팎에서 설파했다.
3. 김동인의 소설에 나타난 친일의 양상
자연주의와 유미주의(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며 순수 문학을 자처했던 김동인 역시 일제 말기 극심한 생활고와 시대적 압박 속에서 친일 문학으로 급선회했다.
<성암(聖庵)의 길> (1944년)
내용과 친일성:
승려들이 일제 총독부의 황민화 시책과 대동아전쟁 수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종교인마저도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물질적·정신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도리라는 논리를 정당화한다.
<아편전쟁(阿芙蓉)> (1942년)
내용과 친일성:
청나라와 영국의 아편전쟁을 소재로 삼은 역사소설이다. 서구 열강(영국, 미국)을 아시아를 침탈하는 잔혹한 악마로 부각하는 반면, 일본이 벌이는 태평양전쟁은 '아시아를 서양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제의 침략 명분을 지지하는 역사관을 소설 속에 투영했다.
소설과 르포의 경계에 선 산문들:
김동인은 순수 허구 소설 외에도 <일장기의 물결> 같은 기록문 형태의 글을 통해 학병으로 징집되어 떠나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해 게재했다.
4. 소설 밖의 친일 행적과의 결합
이들이 친일 문학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소설 속 내용뿐 아니라, 그 소설을 쓰던 시기에 저지른 직접적인 행위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조선문인보국회 등 관변단체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일제의 전쟁 동원을 앞장서 독려했다.
이광수는 전문학교와 대학을 돌아다니며 조선 청년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고 직접 강연을 다녔고, 김동인은 조선총독부를 직접 찾아가 "시국에 협력하는 소설을 쓰겠다"며 집필 지원금을 요청하고 '황군(일본군) 위문단'으로 전선을 방문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이 친일 문학인으로 규정되는 까닭은, 일제 말기 자신들의 문학적 재능과 서사적 영향력을 이용해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프로파간다(선전 선동) 소설을 실제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에 나타나는 — 무엇이 친일문학인가?
1. 친일 작가와 친일 작품은 구별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 가운데 일본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작품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두 작가의 모든 소설이 친일소설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김동인의 (1925), (1921), 이광수의 (1917)을 친일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반면 김동인의 (1941~1942), 이광수의 (1941)은 친일 이데올로기가 소설의 주제와 인물 형성에 직접 들어간 작품들이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적이 확인되는 작가.
: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전쟁, 황민화 정책을 지지하거나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
: 일본을 근대문명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거나 조선의 후진성을 강조하지만, 반드시 식민지 지배를 직접 찬양하지는 않는 작품.
특히 세 번째 유형은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 일본에서 교육받았거나 일본의 근대문화를 높이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한국의 친일문학 연구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발표된 문학을 중심으로 식민주의와 파시즘을 옹호했는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아왔다.
2. 소설에서 친일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친일문학이라고 해서 등장인물이 반드시 일본 천황을 찬양하거나 일본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어떤 세계관을 독자에게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가이다.
대표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표현 방식 |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내용 |
|---|---|
내선일체 | 조선인과 일본인은 본래 하나의 민족 또는 공동체라는 주장 |
황민화 | 조선인이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이 되는 것을 인격적 완성으로 표현 |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 | 일본의 지배를 침략이 아니라 조선의 발전과 구원으로 해석 |
역사적 정당화 | 고대 한일관계를 이용해 조선과 일본의 일체성을 주장 |
전쟁 동원 | 일본군 지원, 징병, 전쟁 희생을 명예롭고 도덕적인 행동으로 묘사 |
조선인의 자기부정 | 조선인의 언어·문화·역사적 자의식을 버리는 것을 성숙으로 표현 |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는 소설에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인물의 생각이 작품 전체에서 비판받는가, 아니면 옳은 것으로 승인되는가가 중요하다.
이 기준으로 두 작가의 구체적인 소설을 살펴볼 수 있다.
3. 김동인의 : 고대사를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다
백마강김동인의 은 친일 이념이 소설의 구조 속에 들어간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작품은 1941년 7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총독부 기관지 에 연재되었다. 배경은 7세기 백제 멸망과 백제 부흥운동이다.
소설의 내용
소설에는 백제의 소녀 봉니수와 일본인 소녀 오리메가 등장한다. 봉니수는 일본 유학 경험이 있으며, 두 소녀의 친밀한 관계는 백제와 일본이 오래전부터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관념을 상징한다.
이후 소설은 백제 멸망과 부흥운동을 다룬다. 백제인과 일본인들은 나당연합군에 맞서 함께 싸우며, 일본에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대가 출병한다.
이러한 서사에서 백제와 일본은 단순한 외교적 동맹국을 넘어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로 그려진다.
무엇이 친일인가?
역사적으로 왜국이 백제 부흥운동에 군사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친일적이지 않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문제는 그 사건을 1940년대의 정치적 목적에 맞추어 해석했다는 점이다.
소설이 발표된 1941년은 일본이 내선일체 정책을 적극 추진하던 시기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본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주입하고 전쟁에 동원하려는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조선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운명공동체다.
조선과 일본의 협력은 특별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전통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한 외세인 동시에 과거 한반도의 국가를 구원하려 했던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다.
이것은 백제와 왜의 동맹 관계를 근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로 옮겨놓는 역사적 유추다.
더욱이 는 이 소설을 연재하기에 앞서 백제의 옛 수도 부여를 내선일체의 역사적 성지로 소개하고, 김동인의 작품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소설로 홍보했다.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는가?
2011년 서울고등법원은 김동인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둘러싼 소송에서 의 주제가 내선일체에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법원은 김동인의 일부 친일행위가 인정된다는 사실을 그의 모든 행동에 대한 일괄적 평가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도 밝혔다.
따라서 은 단순히 일본인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이 아니다. 고대의 실제 한일관계를 활용하여 근대의 식민지 지배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관계로 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4. 이광수의 : 인간적 우애를 내선일체로 연결하다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이광수의 친일소설은 김동인과 상당히 다르다.
김동인이 역사를 이용했다면 이광수는 인간의 감정, 우애, 사랑, 도덕적 성숙이라는 주제를 이용했다.
1940년 일본어 잡지 에 발표한 소설 가 좋은 사례다.
소설의 내용
일본인 남매 타케오와 후미에는 인수봉 등반 도중 조난을 당한다. 이들을 구조하는 사람들은 조선인 청년 충식과 그의 여동생 석란이다.
일본인 타케오는 처음에 조선인의 집에서 자신이 조선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조선인 남매의 친절과 인격에 감동하면서 생각을 바꾼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인간적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후 두 집안 사이의 우정과 애정은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로 발전한다.
2012년 발표된 관련 문학 연구는 이러한 의복과 신체의 상징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사소한 외면적 차이로 축소하는 장치라고 분석한다.
무엇이 친일인가?
여기에는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민족적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 자체는 친일이 아니다. 오히려 보편적 인도주의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광수의 소설에서는 개인적 우애가 제국 일본에 대한 헌신으로 확대된다.
논리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이해하면 민족적 차별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민족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 공동체는 일본제국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은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일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에서 네 번째로 넘어가는 순간 정치적 문제가 발생한다.
왜 민족 간의 우정과 이해가 반드시 일본의 지배체제에 대한 동의로 이어져야 하는가?
독립된 조선과 일본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도 가능하지 않은가?
이광수의 소설은 바로 이 대안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고, 인간적 화해를 제국의 통합으로 연결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식민지 지배를 노골적인 강제나 폭력보다 사랑과 도덕의 언어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5. 이광수의 : 독립운동의 기억을 부정하다
이 작품은 1941년 에 발표되었으며, 연재가 중단된 미완성 소설이다.
주요 인물인 조선 청년 이원구는 일본인 학자의 집에 머물면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새롭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의 생활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일본을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변한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조선 청년들에게 불행을 가져온 사건으로 해석하면서, 항일적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단순한 일본 문화의 찬양을 넘어선다.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저항을 잘못된 감정이나 미성숙한 판단으로 해석하고, 일본제국에 동화되는 것을 바람직한 변화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친일을 외부의 강제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주인공이 스스로 깨달아가는 정신적 성장처럼 나타낸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이광수의 소설은 단순한 전쟁 선전물보다 더욱 복잡한 식민주의적 논리를 보여준다.
6. 그렇다면 , , 에도 친일이 나타나는가?
여기서는 작품의 정치적 의미를 더욱 세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이광수의 (1917)
무정은 근대교육, 여성의 자율성, 자유연애, 민족의 계몽을 강조한다.
이 작품에서 서구 근대문명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지식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작품의 기본 방향은 조선인의 교육과 민족적 발전에 있다.
따라서 을 친일소설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비판적으로 검토할 문제는 있다. 이광수가 전통적인 조선사회를 후진적이라고 묘사하고 서구적 근대를 보편적인 발전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식민지 근대화 담론과 일부 접점을 갖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곧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승인했다는 뜻은 아니다.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식민주의에 대한 동의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1932~1933)
흙의 중심인물 허숭은 농촌에 들어가 조선인의 생활을 개선하려 한다.
이 작품은 교육, 근면, 절약, 위생,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식민지 당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부분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소설에서 농촌계몽과 근면을 강조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질문은 조선 농촌의 빈곤을 개인의 무지와 게으름에서 비롯된 문제로만 설명하는가, 아니면 식민지 지배 아래의 구조적 문제도 인식하는가이다.
이 점에서 은 친일문학이라기보다 식민지 시대 민족계몽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김동인의 (1925)
감자의 주인공 복녀는 빈곤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점차 파멸한다.
소설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사회환경과 연결하면서도 빈곤의 식민지적 원인을 직접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일문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작품에 항일의식이 없다는 것과 친일의식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7. 두 작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비교 | 김동인 | 이광수 |
|---|---|---|
대표적인 친일소설 | , | |
주요 소재 | 고대 백제와 일본 | 조선인과 일본인의 우애, 정신적 변화 |
친일의 논리 | 한일 양국의 역사적 일체성 | 민족적 차이를 넘어선 정신적 일체성 |
문학적 방법 |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으로 재해석 | 인물의 감정과 도덕적 성장을 이용 |
중심 메시지 | 일본과 조선은 오래된 운명공동체 |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동화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
두 작가 모두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했지만,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은 다르다.
김동인은 역사소설의 형식을 통해 일본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광수는 인간의 사랑과 도덕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일본제국의 정치적 질서와 결합했다.
특히 이광수에게는 1919년 2·8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던 인물이 훗날 조선인의 일본화와 내선일체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모순이 있다. 그의 사상적 변화는 소설뿐 아니라 논설과 강연에서도 확인된다.
8. 친일문학을 판단할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
첫째, 작가의 행적을 작품에 소급하여 적용해서는 안 된다. 김동인이 1941년에 친일소설을 썼다고 해서 1925년의 가 친일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소설에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인식과 적극적인 전쟁 협력을 구별해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에 감탄하는 인물과 조선인에게 일본군 입대를 권장하는 인물은 같은 차원의 현상이 아니다.
셋째, 작가가 왜 협력했는가와 작품이 무엇을 정당화했는가를 구별해야 한다. 생계 문제, 검열, 정치적 압박은 작가의 선택을 설명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이 작품의 선전적 기능을 없애지는 않는다.
1940년대의 친일문학을 당시의 전시동원체제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 종합 평가: 친일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친일을 단순히 일본을 좋아하는 태도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것, 일본에서 공부하는 것, 일본의 산업화와 근대적 제도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다.
반면 식민지 조선인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도덕적 의무로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김동인의 과 이광수의 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들은 일본의 지배를 강제적인 정치적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당연한 관계, 또는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관계로 만들어 보인다.
특히 이광수의 소설은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왜 조선인의 독립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
보편적 인도주의와 제국주의적 동화 사이의 경계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두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가장 생산적인 태도는 친일이라는 낙인만으로 작품 전체를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친일 이념이 실제로 드러나는 장면과 서사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김동인과 이광수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하는 일과 그들의 식민주의적 협력을 비판하는 일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에서 멈추지 않는다. 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 문제를 더 깊이 살펴보려면 김동인의 과 이광수의 를 나란히 읽는 것이 특히 유익하다. 두 작품 모두 내선일체를 옹호하지만, 하나는 역사를 통해, 다른 하나는 사랑과 인간적 화해를 통해 그 이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세진님, 식민지 지식인의 궤적과 제국 본국의 작가들이 겪은 궤적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같은 시대에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국가주의를 찬양한 글을 쓴 일본인 작가들은 실제로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종군소설 <보리와 병대>의 작가),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전쟁 찬양 시를 쓴 시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같은 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전전(戰前)과 전후(戰後), 그리고 조선(한국)과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시기별·지역별로 나누어 짚어보겠다.
1. 전전(戰前)의 평가
일본 본국에서의 평가: 국민적 영웅이자 문학적 주류
전시 체제기 일본에서 전쟁을 긍정하고 병사들의 헌신을 그린 작가들은 국가와 대중 양쪽에서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
예를 들어 히노 아시헤이의 <보리와 병대>는 출간 즉시 수백만 부가 팔리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정부가 주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에 이어 국민적 애국 작가로 추앙받았다.
국가주의 선전에 앞장선 작가들은 제국의 공식적인 보호와 물적 지원을 받으며 문단의 확고한 주류를 형성했다.
전전 식민지 조선에서의 평가: 지배 권력의 모범이자 씁쓸한 동경의 대상
조선총독부와 관변 언론은 이들 일본 작가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번역·소개하며, 조선 문인들이 본받아야 할 <국민문학>의 전형으로 내세웠다.
조선인 독자층 내부에서는 두 갈래 반응이 존재했다. 일제의 내선일체 선동에 영향을 받던 친일 관변층은 이를 칭송했으나, 대다수 식민지 지식인과 민중에게는 '침략국의 패권주의를 미화하는 지배자의 문학'이자 체제 순응을 압박하는 불편한 도구로 인식되었다.
2. 전후(戰後) 일본에서의 평가: <전쟁책임>과 개인적 파멸, 그러나 <반역>은 아님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서 이들은 <전쟁책임 문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친일파' 처벌 담론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전범 추방(공직 추방)과 사회적 지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다수의 전쟁 협력 작가들이 '공직 적격 심사'에서 탈락하여 공직과 주요 언론·출판계에서 한동안 추방당했다.
진보적 문인들과 전후 민주주의 진영으로부터 "문학을 군국주의의 시녀로 전락시켰다"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배신(Treason)이 아닌 '시대적 맹종'으로 규정: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죄목의 성격이다. 한국에서 친일 문인은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지배자에게 부역한 반역자'로 규정되지만, 일본 작가들은 '조국을 사랑하는 방식이 파시즘에 경도되어 조국을 파멸로 이끈 죄', 즉 과오나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해석되었다.
개인적 파멸과 참회:
히노 아시헤이는 전후 극심한 죄책감과 문단의 손가락질, 생활고 속에서 방황하다가 1960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카무라 고타로는 도호쿠 지방의 산골 오두막에 은둔하며 자책의 시를 쓰는 참회의 세월을 보냈다.
현재의 일본 문학사적 위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문학은 '쇼와 군국주의 시기의 어두운 기록'으로 문학사 한구석에 객관화되어 수록되었다. 도덕적 비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문학적 기교나 당대 대중 심리를 반영한 자료로서 연구되고 출판도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3. 전후(戰後) 한국에서의 평가: 제국주의 전범의 연장선
철저한 배척과 전범 인식:
한국에서 이들은 개별 작가라기보다 '일제 침략 군국주의의 나팔수'라는 집단적 범주로 취급받았다.
식민지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미화한 일본 작가들의 텍스트는 전후 한국에서 번역이나 연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이광수·김동인과의 비교 관점:
한국 학계와 비평계는 일본인 군국주의 작가보다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동족 부역자'에게 훨씬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제국 본국의 작가는 '자기 나라의 국가주의'에 동조한 것이지만, 식민지 작가는 피지배 민족의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밀어 넣으며 식민 통치를 내면화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도덕적·역사적 파괴력이 훨씬 컸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일본 작가의 전쟁 협력 문학은 전전에는 <애국적 영웅 문학>으로 칭송받았으나, 전후 일본에서는 <파시즘에 부역해 국가를 망친 맹종의 과오>로 격하되었다.
반면 한국(조선)의 친일 문학인들은 제국 본국의 작가들과 똑같은 논리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자로서 지배자의 논리를 대변하고 동족을 사지로 몰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이데올로기 맹종을 넘어선 <민족적 배신과 부역>이라는 훨씬 더 무거운 낙인을 안게 되었다.
일본인 작가가 친일소설을 썼다면? —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전전·전후 문학 평가 비교
1. 같은 작품이라도 작가가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질문은 친일문학이라는 개념의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1941년 일본인 작가가 김동인의 과 같은 소설을 썼다면, 당시 일본에서는 애국적이고 훌륭한 역사소설로 평가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인이 똑같은 작품을 썼다면 일본 당국은 이를 더욱 특별하게 환영했을 것이다. 식민지인이 자신의 지배를 스스로 정당화하는 작품을 쓴 셈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조선인 작가를 친일문학인이라고 비판하고, 일본인 작가를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 작가라고 비판한다. 반면 전후 일본에서는 두 작가 모두 전쟁협력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행적이 반드시 문학적 명성의 상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질문을 구별해야 한다.
작품이 무엇을 주장하는가?
작가는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그 작품을 평가하는 사회는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특히 이라는 말 자체가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형성된 평가 용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인이 일본제국을 지지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라고 하지 않는다. 전시에는 , 전후의 비판적 연구에서는 , , 이라고 부른다.
2. 네 가지 상황을 비교하면
시기와 장소 | 같은 내선일체 소설을 쓴 일본인 작가에 대한 평가 |
|---|---|
1937~1945년 식민지 조선 | 총독부와 관변 언론은 환영. 조선인 독자들은 입장에 따라 수용, 무관심, 반감 |
1937~1945년 일본 | 제국의 통합과 전쟁을 지지하는 국책문학으로 환영받을 가능성이 큼 |
1945년 이후 한국 | 일본 식민주의와 동화정책을 선전한 작가로 비판 |
1945년 이후 일본 | 전쟁협력 작가로 비판받을 수 있지만, 작품성과 전시 행적을 분리하여 평가하는 경향도 존재 |
다만 전쟁 전 조선과 일본의 여론이 단일했던 것도 아니고, 전후 평가 역시 시대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랐다.
이 차이를 실제 작가들의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3. 실제 사례 ① 유아사 가쓰에의 — 일본인이 쓴 내선일체 소설
유아사 가쓰에가장 직접적인 비교 대상은 일본인 작가 유아사 가쓰에(湯淺克衛, 1910~1982)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조선에서 성장한 일본인 작가였다. 1943년 2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일본어 잡지 에 을 연재했다.
작품은 수풍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에게 차별받지만, 만주에서는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일본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실제 조선에서는 양자를 차별했다. 소설은 그 모순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내선일체의 실현을 다음 세대로 미룬다.
2019년 우정덕의 연구는 이 작품에서 식민주의적 시선과 반식민주의적 시선이 해소되지 않은 채 공존한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같은 내용을 이광수가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에서는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정당화했다는 이유로 친일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본인이 쓴 실제 작품은 한국의 연구에서도 이라는 문제로 분석된다.
둘의 정치적 메시지가 유사하더라도 평가 언어가 다르다.
이 차이는 일본인 작가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인 작가는 지배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별도의 책임을 진다.
4. 실제 사례 ② 히노 아시헤이 — 일본의 전쟁협력 문학은 어떻게 평가받았는가?
보리와 병정(麦と兵隊)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1907~1960)는 일본군에 종군하면서 전쟁을 그린 작가다. 그의 (1938)은 큰 인기를 얻었고, , 을 합친 병정 3부작은 3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조선총독부가 의 조선어 번역과 출판을 직접 기획했다는 것이다. 일본인 검열관이 번역을 맡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단순히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전쟁문학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의 전쟁에 동원하는 문화정책에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1945년 패전 이후 작가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히노는 라는 비판을 받았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공직추방 조치를 당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전쟁협력 문학인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전후에도 작품을 썼으며,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의 전쟁협력과 전후의 반성 및 고뇌를 함께 연구한다.
2026년 7월에는 전후 단편을 모은 도 출판되었다.
이 사례는 일본의 전후 평가가 반드시 관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반례다.
5. 실제 사례 ③ 하야시 후미코 — 전쟁협력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명성을 유지하다
뜬구름(浮雲)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1951)는 전쟁 중 일본군 종군기자와 보도반원으로 활동한 작가다. 전후에는 대표작 을 통해 패전 후 일본인들의 상실감과 불안, 인간관계의 붕괴를 묘사했다.
그녀의 전쟁협력은 연구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전후 일본 문학사에서 그녀는 여전히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는 2021년 에 게재한 평론에서 하야시의 전쟁협력 책임을 지적하면서도 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하야시의 사례는 김동인과 이광수의 경우와 비교할 때 흥미롭다.
한국에서도 두 작가의 초기 작품은 문학사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따라서 한국은 친일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전면 부정하고 일본은 그것을 인정한다는 식의 단순한 대조는 옳지 않다.
다만 한국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조선인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이 작가의 전체적인 역사적 평가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에서는 전쟁협력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작가의 전후 문학을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양국의 전후 역사 경험이 달랐기 때문이다.
6. 가장 중요한 차이: 식민지인의 협력과 지배자의 협력
여기서 김동인, 이광수와 일본인 작가들 사이의 결정적인 비대칭성이 드러난다.
조선인 작가는 식민지 피지배집단의 구성원이었다. 일본인 작가는 제국의 지배집단에 속했다.
일본인이 내선일체를 찬양하면 자기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반면 조선인이 내선일체를 찬양하면 자기 민족이 독립된 정치적 공동체로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조선인 작가가 일본인 작가보다 더 큰 도덕적 책임을 진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오히려 책임은 세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
첫째, 일본인 작가는 식민지 지배로부터 더 직접적인 특권을 누렸을 수 있으며, 그 체제를 지지했다는 책임이 있다.
둘째, 조선인 작가는 정치적 강제와 생존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조건은 그의 행동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 한다.
셋째, 조선인 유명 작가의 협력은 동족 독자들에게 특별한 설득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이광수처럼 과거 민족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이 일본제국을 옹호하는 것은 식민당국에 매우 유용했다.
따라서 누가 더 큰 책임을 지는가는 국적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각자의 선택 가능성, 권력, 영향력, 협력의 구체적인 행위를 비교해야 한다.
7. 전후 한국과 일본은 왜 다르게 기억하는가?
한국에서 1945년은 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조선인 지식인의 행적은 새로운 민족국가의 정통성과 직결되었다.
일본에서 1945년은 이었다. 일본인의 전쟁협력은 국가와 국민 전체의 전쟁책임이라는 문제 속에서 다루어졌다.
한국에서는 라는 질문이 중요해졌다면, 일본에서는 라는 질문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거의 모든 주요 문화기관이 전시체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협력만을 기준으로 작가들을 평가하면 일본 근대문학사의 상당 부분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 결과 작가의 전쟁협력과 문학적 성취를 분리하여 읽으려는 태도가 나타났다.
반면 한국에서는 친일행위가 해방 후의 권력구조와 연결되었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협력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 때문에 친일문제는 단순한 문학사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정의와 역사적 책임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회 내부에도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한국의 문학연구자들 역시 작품과 작가의 행적을 구별하며, 일본의 비판적 연구자들도 제국주의 문학을 엄격히 분석한다.
8. 종합 평가: 같은 작품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원칙적으로는 그래야 한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똑같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소설을 썼다면, 그 작품의 식민주의적 성격은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작가의 책임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위치, 실제로 가졌던 선택의 자유, 정치적 압력, 작품의 사회적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나타난다.
일본 제국주의를 기획하고 지지했던 일본인 작가보다, 그 정책에 동조했던 조선인 작가가 한국에서 더 강한 도덕적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외부 지배자의 책임보다 내부 협력자의 책임을 더 예민하게 기억해 온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책임의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 정책을 만든 사람과 그것에 협력한 사람의 책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협력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지배자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김동인과 이광수의 친일문학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일본인 작가들의 제국주의 문학과 동일한 연구 틀에서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라는 질문을 넘어 라는 더 넓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친일문학을 민족적 배신의 문제로만 보는 접근을 넘어, 제국주의의 문화적 작동방식으로 분석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세진님, 1930년대 전시체제로 급격히 치닫기 전인 메이지 후기와 다이쇼 시대에 이미 제국주의적 <애국주의>와 팽창주의를 비판하고 해체하려 했던 지식인과 문인들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 기독교 평화주의자 등 소수였으며, 권력의 탄압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과 사회 전체로부터 철저하게 <비국민(非國民)>이자 '역적'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들이 어떻게 국가주의 문학을 비판대에 올렸고, 어떤 사회적 낙인을 겪었는지 구체적인 흐름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러일전쟁 시기(1904~1905): 개인의 생명과 반제국주의 문학의 등장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1894~1895) 때만 해도 일본 문단은 거의 전원 일치로 '아시아의 개화와 문명 대 야만'의 구도를 그리며 전쟁을 칭송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 이르러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의 <그대여 죽지 마오(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 (1904년):
여류 시인 요사노 아키코는 여순항 포위전에 징집된 남동생을 걱정하며 잡지 <명성(明星)>에 이 시를 발표했다.
시 속에서 그녀는 *"천황은 스스로 싸움터에 나가지 않으면서, 왜 남의 피를 흘리게 하고 죽음을 영광이라 하는가"*라는 취지의 직설적인 의문을 던졌다.
군신(軍神)이나 옥쇄를 강요하던 '애국' 담론에 정면으로 맞서 가족애와 개인의 존엄을 우위에 둔 것이다. 사회의 반응: 당대 문단과 우익 지식인들은 이를 두고 "황실을 모독한 난신적자", "국가의 대의를 모르는 비국민"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요사노의 집으로 협박장이 쇄도하고 돌이 날아들 정도로 대중적 적의가 쏟아졌다.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와 <헤이민신문(平民新聞)> 그룹: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 등은 메이지 사회주의자이자 초기 아나키스트로서 평민사를 조직하고 반전·반제국주의 시와 산문을 쏟아냈다.
이들은 러일전쟁을 '민중의 삶을 착취해 자본가와 군벌의 배를 불리는 제국주의 도살극'으로 규정했다.
사회의 처벌: 정부는 신문을 거듭 정간시켰고, 1910년 일왕 암살 모의를 조작한 대역사건(大逆事件)을 일으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12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나 제국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법적·물리적으로 완전히 봉쇄되었다.
2.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 자유주의 문학의 '애국' 회의론
1910년대 대역사건의 공포로 침묵했던 비판 의식은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선동보다는 '회의와 불안'이라는 심리적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문학이 나타났다.
시라카바파(白樺派)의 인도주의와 개인주의: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시가 나오야 등 귀족·엘리트 출신 문인들은 국가에 개인을 종속시키는 전체주의적 애국심을 천박한 것으로 보았다. 국가나 천황보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인류애'를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체제를 직접 전복하려 하지 않고 낙향하여 이상촌을 건설하는 식의 탈정치적 태도를 취했기에, 정권과 정면 충돌하지는 않는 타협적 한계를 지녔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환멸:
아쿠타가와는 <장군>(1922년) 같은 단편에서 청일·러일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맹목적이고 무능한 학살자로 풍자했다.
군국주의적 영웅주의가 사실은 얼마나 공허하고 조작된 신화인지를 폭로했으나, 그 역시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국가주의의 거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막연한 불안"을 남긴 채 1927년 자살했다.
3. 1920년대 후반 프로레탈리아 문학: 식민화와 침략에 대한 직접적 고발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농민의 시각에서 제국의 침략성과 식민 지배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세력을 키웠다.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게 가공선>(1929년)과 <부재지주>(1929년):
<게 가공선>에서 그는 오호츠크해의 가혹한 노동 착취를 다루며, 가공선을 호위하는 제국 해군의 군함이 '국민을 지키는 배'가 아니라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 도구'임을 폭로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인과 중국인을 침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연대해야 할 피억압 계급으로 묘사하며, 일제가 주입하던 "대동아의 맹주", "아시아 침략의 당위"를 계급적 착취 논리로 해체했다.
정부와 사회의 대응: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은 국체(천황제) 변혁을 꾀하거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자를 가혹하게 처단했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1933년 쓰키지 경찰서 특고경찰에게 체포되어 당일 잔혹한 고문 끝에 29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4. <비국민(非國民)>이라는 사회적 낙인 매커니즘
질문하신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배척당했는가?"라는 점입니다. 답은 "그렇다"이다. 오히려 국가 권력의 법적 처벌보다 일반 대중과 지역사회의 린치와 배척이 훨씬 더 집요했다.
관제 내셔널리즘과 대중의 결합: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획득한 배상금, 대만·조선이라는 식민지 영토는 일본 일반 민중에게도 '일등국이 되었다'는 제국주의적 자긍심과 경제적 보상을 체감하게 했다.
대다수 대중은 제국의 팽창과 전쟁을 자기 일처럼 지지했다. 러일전쟁 직후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배상금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며 도쿄 시내를 불태운 1905년 히비야 방화사건이 보여주듯, 당시 대중은 정부보다 더 호전적인 팽창주의 성향을 띠기도 했다.
마을과 이웃이 가하는 '무라하치부(村八分, 집단 따돌림)':
반전이나 반천황제 의사를 표현한 문인과 사상가는 즉시 '비국민(국민 자격이 없는 역적)'이라는 멸칭이 붙었다.
이들의 가족은 이웃으로부터 물과 불을 나누지 않는 철저한 배척(무라하치부)을 당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폭행을 당했으며, 문인들은 집필지를 구할 수 없어 생계가 파탄 났다.
자발적 감시자로서의 사회:
특고경찰이 직접 손을 대기 전에 우익 청년단, 재향군인회, 이웃 주민들이 먼저 고발하고 위협하는 일상적 파시즘이 메이지 후기부터 이미 사회 밑바닥에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전전 일본에서 천황제와 식민 침략의 <애국>을 비판대에 올렸던 소수의 문인과 사상가들은, 국가의 철권통치(치안유지법과 특고경찰)와 민중의 맹목적인 애국 광기(비국민 낙인과 집단 배척)라는 두 겹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침묵하거나, 투옥되거나, 죽음으로 내몰렸다.
제국일본의 과 그 비판자들, 1894~1931년
청일전쟁·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러일전쟁·천황제를 둘러싼 일본 지식인들의 논쟁
1. 전전 일본에도 을 의심한 지식인들이 있었는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히 전쟁의 비극을 슬퍼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부는 이라는 가치 자체를 정치적·도덕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표적으로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는 1901년 에서 애국심과 군국주의가 결합해 제국주의를 만들어낸다고 논증했다. 이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사회에 제국주의적 열광이 확산되던 시기에 나온 비판이었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모두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 우치무라 간조, 시인 요사노 아키코, 소설가 기노시타 나오에, 인도주의 작가 도쿠토미 로카,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이 서로 다른 근거로 전쟁과 국가권력을 비판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전전 일본의 반제국주의 지식인들은 반드시 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부의 전쟁정책을 비판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제는 일본사회가 이러한 구별을 얼마나 인정했는가였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전쟁을 비판하는 시인에게 국가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공격이 가해졌다. 정부의 검열뿐 아니라 문인과 언론인 사이에서도 이러한 비난이 발생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국문학의 구조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2. 메이지 일본의 은 무엇을 긍정했는가?
1894년부터 1931년까지의 일본문학을 살펴보면, 애국의 대상이 점차 확대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에는 독립국가 일본의 생존과 근대화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영토 확장, 군사적 승리, 천황에 대한 충성,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도적 지위가 애국의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처럼 구별할 수 있다.
애국의 유형 | 핵심 가치 | 비판의 쟁점 |
|---|---|---|
국가적 독립 | 서구 열강에 맞서 일본의 독립을 지킨다 | 국가의 독립과 대외 침략을 구별할 수 있는가 |
문명적 애국 | 일본이 아시아의 근대화를 선도한다 | 타국의 근대화를 강제할 권리가 있는가 |
제국적 애국 | 대만·조선·만주의 확보가 국가 발전에 필요하다 | 국가이익이 식민지인의 권리보다 우선하는가 |
군사적 애국 |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희생한다 | 군인의 죽음을 국가가 미화해도 되는가 |
천황제적 애국 |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국가에 대한 충성과 결합한다 | 천황 비판이 곧 국가에 대한 배신인가 |
물론 이 다섯 가지가 모든 작가에게 동시에 존재한 것은 아니다. 또한 1930년대 이전의 애국문학을 후대의 전쟁선전문학과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의 문학과 평론에서 중요한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다. 개인의 생명이나 다른 민족의 자유보다 일본 국가의 영광을 우선하는 사고가 정치적 미덕으로 정착해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향을 비판한 작가들이 실제로 있었다.
3. 요사노 아키코: (1904)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시 를 발표했다. 전쟁에 출정한 동생을 향한 시였지만, 군인의 희생과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의 정당성까지 문제 삼았다.
이 시는 전전 일본사회에서 애국과 비애국의 경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다.
아키코는 출정한 동생에게 조국을 위해 영광스럽게 죽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살아서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또한 여순항이 함락되든 함락되지 않든 그것이 평범한 가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시에는 천황 자신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키코가 반드시 천황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천황이 자비로운 존재라면 백성에게 죽음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방식으로 논증했다.
그런데 문학평론가 오마치 게이게쓰(大町桂月)는 이 시를 강하게 공격했다. 천황의 전쟁 수행을 비판하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주장이라는 것이었다.
아키코는 라는 반론에서 시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당시 논쟁의 경과는 2026년 9월 이와나미서점의 재검토에서도 자세히 다루어졌다.
이 사건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시인의 반전 주장이 정부에 의해서만 공격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료 문인과 평론가가 애국적 규범을 내세워 다른 시인의 표현을 비난했다. 국가주의가 사회적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키코는 단순한 반국가주의자가 아니었다. 이후 그의 국가관과 전쟁관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따라서 1904년의 이 시 한 편으로 평생 일관된 절대평화주의자였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4. 고토쿠 슈스이: 애국심 자체를 비판한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대표작: (二十世紀之怪物 帝国主義, 1901)
반전운동가 가운데 그 자체가 어떻게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되는가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인물이다.
고토쿠의 논의는 요사노 아키코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아키코는 가족의 사랑과 국가가 요구하는 희생 사이의 갈등을 묘사했지만, 고토쿠는 국가를 위한 희생이 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지는지 묻는다.
그가 1901년에 발표한 의 구성은 그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애국심을 논한다.
군국주의를 논한다.
제국주의를 논한다.
이러한 사상과 제도의 관계를 분석한다.
고토쿠가 비판한 것은 고향이나 동포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아니었다. 국가의 영토 확장, 군사력 증강, 타민족 지배를 도덕적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정치적 애국주의였다.
그는 특히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사회 전체에 제국주의 열기가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이 제국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러일전쟁에 대한 반대
1903년 고토쿠는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함께 을 창간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그는 일본과 러시아 노동자들이 서로 죽일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노동자와 러시아의 노동자는 적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형제라는 국제주의적 논리였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반전주의를 넘어선다.
일본의 국가이익과 일본 노동자의 이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고토쿠는 훗날 아나키즘으로 기울었고, 1911년 대역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반전운동을 했기 때문에 곧바로 처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처형은 이른바 대역사건이라는 별개의 형사사건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수사와 재판의 정당성은 이후 지속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다.
고토쿠의 사상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간의 최고 의무로 여기는 메이지 정치문화와 근본적으로 충돌했다.
5. 기노시타 나오에의 : 일본의 제국주의를 직접 비판한 소설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대표작: (1904)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반전운동가의 활동과 탄압을 소설화했다.
앞에서 논의한 김동인과 이광수의 친일소설에 가장 직접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작품이 이다.
이 소설은 1904년 1월부터 3월까지 에 연재되었다.
주인공 시노다 조지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고 전쟁에 반대한다. 그는 정경유착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다가 국가권력의 탄압을 받고 투옥된다.
이 작품의 핵심은 일본의 전쟁을 국가의 영광스러운 사업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5년 발표된 일본문학 연구에 따르면 은 러일전쟁이 자본의 독점, 타민족에 대한 폭력, 일본제국의 팽창정책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중소설의 형식으로 전달했다.
이 작품은 발매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기노시타의 종교적 배경이다.
그는 기독교의 보편적 사랑과 사회주의적 정의의 관점에서 일본제국의 폭력을 비판했다.
따라서 전전 일본의 반전문학을 사회주의 문학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기독교적 인도주의 역시 반제국주의의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6. 우치무라 간조: 에서 절대적 비전론으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일본 기독교사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청일전쟁을 찬성했던 지식인이 어떻게 러일전쟁 반대자로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우치무라의 변화는 특히 상세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전쟁을 지지했다.
그는 일본이 중국의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조선의 독립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단순한 영토 확장전쟁이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이후 일본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판단을 재검토했다.
1897년 그는 전쟁이 정의로운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믿었지만 결국 욕망의 전쟁으로 끝났다는 취지로 비판했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는 비전론의 입장을 취했다.
당시 일본사회의 반응
우치무라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의 도덕적 재생을 중요하게 여긴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일본사회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청일전쟁을 찬성한 사람이 러일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의 여론은 그의 사상적 변화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보다 앞선 1891년에는 교육칙어 봉독 행사에서 요구된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경사건에 휘말려 교직에서 물러났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공식 전기에도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천황제와 국가적 도덕이 결합한 구조다.
우치무라는 일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황 숭배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국가의 의례적 요구에 종속시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양심의 문제가 애국심과 충성심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것은 단순한 정부 검열보다 더 넓은 사회적 압력이었다.
7. 이시카와 다쿠보: 조선병합을 비판한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石川啄木)
대표적인 관련 작품: (1910)
조선병합과 일본의 정치적 억압을 개인의 불안, 분노, 절망과 연결한 시인이다.
1910년 조선병합은 일본에서 국가적 성취로 널리 선전되었다.
그러나 다쿠보는 이 사건을 다르게 보았다.
그의 시에는 지도 위의 조선에 검은 먹을 칠하면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 영토의 색깔로 칠해지는 장면이다.
이 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독해가 가능하지만, 다쿠보의 다른 글과 결합하여 보면 조선병합을 일본의 국가적 영광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는 대역사건 이후 일본의 국가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을 비판했고, 당시 일본사회를 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다쿠보에게 중요한 것은 제국의 외부 확장과 일본 내부의 자유 억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었다.
제국의 영토는 확장되고 있지만,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공간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전 일본의 반제국주의 문학에서 중요한 관점이다.
8. 도쿠토미 로카: 과 천황제 국가의 권위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는 1911년 대역사건 이후 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는 국가권력에 의해 처형된 사회주의자들을 단순한 국가의 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진보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천황제 국가가 제시하던 충성과 반역의 구분에 도전했다.
로카는 톨스토이, 에머슨, 졸라 등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기독교적 인도주의자였다. 2015년 김난희의 연구는 에 나타난 보편적 형제애와 인간주의를 강조한다.
이 사례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뒤집었다는 점이다.
국가가 반역자로 규정한 사람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인가?
국가에 순종하는 사람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인가?
이러한 질문은 애국과 도덕을 동일시하는 관념을 흔든다.
다만 로카가 천황제 자체의 폐지를 주장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주된 관심은 국가권력의 절대화에 대한 비판과 양심의 자유였다.
9.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직접 비판한 일본인들은?
이 부분에서는 문학작품과 사회과학적 비판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1900년대 초반에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있었지만, 대만이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식민지인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관점에서 일관되게 비판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특히 대만 지배가 시작된 1895년에는 일본사회에서 이를 식민주의의 문제로 논의하는 관점이 널리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로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다.
그는 (1926)을 출판했고, 이후 대만과 조선의 식민정책을 연구하면서 식민지인의 권리와 식민지 경제구조의 문제를 논의했다.
야나이하라는 주로 경제학자이며, 그의 식민정책 연구를 곧바로 반식민주의 문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적 애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지적 기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일본의 식민지 확장이 일본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식민지인에게 정당한가?
이 질문은 제국주의를 국가의 이익으로 정당화하던 기존 애국 담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10. 전전 일본사회는 반전 지식인을 [ ]으로 취급했는가?
대답은 대체로 그렇지만, 시기에 따른 차이가 크다.
1900년대의 일본은 1930년대 후반과 같은 완성된 전시동원사회가 아니었다. 비판적 논설과 문학작품이 발표될 공간이 존재했고, 실제로 요사노 아키코의 반전시와 기노시타 나오에의 반전소설이 신문·잡지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이 환영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비판의 대상 | 국가권력의 대응 | 사회·문단의 대응 |
|---|---|---|
요사노 아키코 | 해당 시의 발표 자체가 전면 금지되지는 않음 | 문학평론가들이 천황 비판과 사회질서 파괴를 문제 삼음 |
기노시타 나오에 | 발매 금지 | 반전문학은 주류 애국 담론과 충돌 |
우치무라 간조 | 1891년 불경 논란 뒤 교직을 떠남 | 충성심을 의심받고, 비전론으로 여론의 공격을 받음 |
고토쿠 슈스이 | 언론 탄압과 투옥, 1911년 대역사건으로 처형 | 사회주의·아나키즘은 국가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됨 |
도쿠토미 로카 | 국가가 처형한 사회주의자들을 옹호 | 문단과 지식인사회에 정치적·도덕적 논쟁을 제기 |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제재를 구별하는 일이다.
첫 번째는 경찰, 검열, 재판 등 국가가 가하는 제재다.
두 번째는 신문, 문학평론가, 교육자, 독자 등 사회 구성원들이 가하는 제재다.
일본의 애국주의는 국가가 위에서 강요한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지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요구하는 규범이기도 했다.
1904년 아키코를 비판한 것은 경찰관이 아니라 같은 문학세계에 속한 평론가였다.
따라서 반전 지식인에게 가해진 압력을 정부 탄압으로만 설명하면 당시 일본사회의 실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반전적 표현이 모두 똑같이 [ ]이라는 낙인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다. 반대의 강도와 범위는 인물과 시기에 따라 달랐다.
11. 애국문학 내부의 모순: 구니키다 돗포의 사례
구니키다 돗포(国木田独歩)
대표 관련 작품:
1894년 청일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여하여 일본의 전쟁을 문명적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도 전쟁의 파괴성을 기록했다.
구니키다 돗포는 적극적인 반전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전쟁을 으로 받아들인 면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 전쟁을 관찰하면서 전쟁이 인간을 파괴하는 현실도 기록했다.
2020년의 한 연구는 돗포가 전쟁을 파괴적인 악으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국가가 개인보다 우월하다는 당시의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 사례는 문학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에 애국심과 전쟁에 대한 혐오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작가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실제 인간의 고통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그 논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전 일본문학을 애국문학과 반전문학이라는 두 개의 진영으로만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12. [ ]을 분석하기 위한 다섯 가지 질문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을 종합하면, 메이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의 일본문학을 검토할 때 다음 질문들이 유용하다.
작가는 일본의 국가적 독립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구별하고 있는가?
일본 군인의 죽음은 개인적 비극인가, 아니면 국가적 영광으로 묘사되는가?
중국인·대만인·조선인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등장하는가, 아니면 일본이 문명화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가?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양심과 인간적 사랑보다 우위에 놓이는가?
일본의 국가정책을 비판하는 인물이 작품에서 도덕적으로 존중받는가, 아니면 비겁하고 미성숙한 사람으로 묘사되는가?
이 질문은 일본인 작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시대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제국주의 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친일문학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기준을 사용할 수 있다.
13. 종합 평가: 일본의 근대적 애국주의와 그 내부의 비판자들
1894년부터 1931년까지 일본의 문학과 사상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갈등은 애국과 반일의 대립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 , 과 , 과 사이의 갈등이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국가의 영광을 위한 영토 확장이 왜 애국인가를 물었다.
요사노 아키코는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왜 개인의 의무인가를 물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이 왜 하나님의 정의와 일치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기노시타 나오에는 일본의 전쟁이 누구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고 누구를 희생시키는가를 물었다.
이시카와 다쿠보는 제국이 확대될수록 왜 일본인의 정신적 자유가 좁아지는가를 물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부정해야만 제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국가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애국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앞서 다루었던 김동인과 이광수의 친일문학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1940년대의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것을 애국적 행위로 서술했다면, 이미 1900년대의 일본인 작가들과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그와 같은 제국적 애국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상은 1945년 이후의 민주주의나 전후 평화주의가 새롭게 발견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제국의 팽창이 본격화되던 시기부터 일본사회 내부에 존재했던 사상적 전통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한 비판자들이 사회 전체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가, 그들의 논의가 전쟁과 식민화의 정책을 실제로 변화시켰는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확인된 사례들은 그들이 존재했고 사회적 저항에 직면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당시 일본 국민 전체의 태도를 통계적으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한 참고문헌
일본의 전전 애국문학을 분석하는 데에는 다케나가 요시마사의 (1976)가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베리아 출병, 산둥 출병을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비교하며, 구니키다 돗포, 기노시타 나오에, 요사노 아키코,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구로시마 덴지 등을 다룬다.
이와 함께 고토쿠 슈스이의 (1901), 기노시타 나오에의 (1904), 도쿠토미 로카의 (1911)을 나란히 읽으면 제국주의 비판이 사회주의, 기독교적 인도주의, 자유사상에서 어떻게 다르게 형성되었는지 비교할 수 있다.
이 연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때 특히 중요한 주제는 라는 문제다. 이 구별을 검토해야만 전전 일본의 와 사이에 존재했던 간극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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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近代戦争文学史 62 透谷・漱石・花袋・伝治を中心に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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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序にかえて
一 日清戦争と文学
(1) 『銀の匙』にあらわれた戦争
(2) 北村透谷の場合
(3) 従軍記者国木田独歩
(4) 日清戦争を題材にした作品その他
二 日露戦争と文学
(1) 日露戦争への道程
(2) 木下尚江と『火の柱』
(3) 江見水蔭の『決死隊』
(4) 晶子と楠緒子の新体詩
(5) 夏目漱石の場合
(6) 森鷗外と『うた日記』
(7) 田山花袋の場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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