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순
S͏o͏s͏o͏p͏d͏r͏n͏t͏e͏4͏t͏2͏u͏t͏1͏m͏r͏0͏i͏c͏u͏a͏ ͏1͏t͏e͏m͏f͏a͏t͏4͏e͏0͏f͏a͏0͏5͏8͏y͏u͏4͏7͏g͏9͏7͏t͏2͏ ͏3͏5͏4͏:͏1͏s͏0͏d͏9͏8͏Y͏ ·
1905년 10월 13일 태어난 친일 작가로 할동하다 일본으로 귀화한 장혁주(張赫宙)
한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1905년 10월 13일 대구에서 지주와 기생 사이, 즉 첩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두운 출생 배경 탓인지 평생 조선의 가장자리를 맴돌거나, 조선과 등진 삶을 살았다.
대구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와 경북의 농촌을 소재로 해서 여러 편의 소설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고향을 벗어난 먼 곳에 있었다.
식민지 시기 동안 장혁주는 조선어보다는 일본어로 소설을 창작했다.
일본 여자와 결혼했고, 해방과 더불어 마침내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일본이름은 노구치 미노루(野口稔), 혹은 노구치 가쿠츄(野口赫宙)다.
한국은 장혁주라는 이름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일본 유명 종합잡지 '카이죠(改造)' 문예 현상모집에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2등으로 당선되는 등 놀라운 문학적 성과를 보였다.
식민지 시기 동안 조선과 일본 양측 문단에서 주목받았지만, 해방 후 한국에서는 그 누구도 장혁주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조선인에 대한 비하를 일삼고, 일본어로 소설을 창작했다.
철저한 친일의 길을 걸었던 장혁주의 삶을 식민지의 어두운 기억이 상존하는 한국이 수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혁주의 삶은 끊임없이 조선인임을 부정하면서 조선을 벗어나 있었지만 그의 문학은 언제나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일본어로 발표된 '아귀도'(餓鬼道)(1932)는 일본인 노구치 미노루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조선인 장혁주에게는 가능한 소설이었다.
경북의 한 농촌. 생계가 어려워 저수지 공사에 지원한 농민들이 십장들의 횡포에 참다못해 마침내 집단 항거에 들어가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하에 '아귀'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조선 농민들의 참혹한 현실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비록 일본어로 창작했지만 장혁주가 그려낸 것은 조선의 현실이었다.
장혁주가 왜 조선어로 창작하지 않았는가를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
일본어라는 표현 '수단'과 조선의 현실이라는 '내용'이 만들어내는 이율배반적 상황은 장혁주가 식민지 현실 속에서 평생 겪어온 혼란스런 내면 그 자체였다.
장혁주는 일본을 지향했지만 또 다른 내면은 언제나 조선을 향했던 것이다.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도 아니고 장혁주(張赫宙)도 아닌, 노구치 가쿠츄(野口赫宙), 즉 노구치(野口)혁주(赫宙)라는 일본 이름은 바로 그의 내면적 갈등과 정체성 혼란의 표현이이나 다름없다.
이 혼란이 비단 장혁주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일본에 대한 동경과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중심을 상실했던 다수의 식민지 작가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이었다.
장혁주는 출생에서 비롯된 신분적 한계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작가들에 비해 안타깝게도 그 상실의 정도가 훨씬 심각했다.
역사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등장한 친일문인 명단.
1. 김동인
2. 김동환
3. 김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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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소운
6. 김안서
7. 김용제
8. 김종한
9. 김팔봉
10. 노천명
11. 모윤숙
12. 박영희
13. 백철
14. 유진오
15. 이광수
16. 이무영
17. 이석훈
18. 이효석
19. 장혁주
20. 정비석
21. 정인섭
22. 정인택
23. 조용만
24. 주요한
25. 채만식
26. 최남선
27. 최재서
28. 최정희
29. 신인 작가와 기타.
김흥순
Author가짜가 날뛰고 부정부패로 진실이 호도 되는 오늘은 어제 죽은 분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2026년 병오년(丙午年)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입니다. 올바른 집단 지성의 숲을 만들어 나가는 귀중한 친구 분들 행복한 날을 기원합니다
이형목
by author
일제강점기에 문인들은 거의다 망나 했네요 몇몇분만 제외 하고요,그분들이 더욱 돋보이네요,여기서 실명은 공개하지 않아도 아는분은 다 아실거라 생략하겠어요.
Joseph Wi
by author
강경애작가가 조선의 고리키가 되라고 서신을 보냈던 작가죠.만년에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걸로 압니다.그냥 일본인으로 살아간 직가로 생각합니다.
이양훈
by author
글쓰는 사람이 지하에 숨을 수가 없으니
친일이 됩니다. 필을 꺾고 엿장수로 숨으면 친일을 면하는데... 이관술 조봉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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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배경: 경계에 선 출발
본명과 출생: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며, 1905년 10월 13일 대구에서 지주와 기생 사이(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 사회적 소외: 당시 식민지 신분 질서 속에서 서자라는 출생의 그늘은 그로 하여금 조선 사회의 중심에 편입되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맴돌게 만든 근원적인 심리적 요인이 되었다
. 학력: 대구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
2. 문학적 성과와 일본어 창작
일본 중앙 문단 진출: 1932년 일본의 대표적 종합 잡지 <개조(改造)>의 문예 현상모집에 소설 <아귀도(餓鬼道)>가 2등(조선인 최초)으로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 언어와 내용의 괴리: 장혁주는 식민지 시기 대부분의 작품을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로 집필했다
. 그러나 그가 다룬 소재는 대구·경북 농촌의 가혹한 현실과 조선 농민들의 수탈이었다 . 대표작 <아귀도>(1932년)는 가뭄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저수지 공사에 동원된 조선 농민들이 십장의 횡포와 수탈에 맞서 집단 항거하는 비극을 생생하게 그렸다
. 표현 수단은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였으나, 그가 응시한 현실은 식민지 '조선의 아픔'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은 심한 내적 긴장과 이율배반을 품고 있었다
.
3. 친일 행적과 극단적 전향
적극적 친일 부역: 1930년대 후반 전시동원 체제에 접어들며 장혁주는 식민 권력의 이데올로기인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에 깊이 영합했다.
동족 비하와 전쟁 찬양: 조선인과 전통 사회를 비하하는 글을 쓰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며 지원을 선동하는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 이로 인해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비롯해 오늘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등 주요 친일 문인 명단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 내선일체의 사적 실천: 일본 여성과 결혼했으며, 겉으로나 속으로나 '완벽한 일본인'이 되고자 했다
.
4. 해방 이후: 일본 귀화와 한국에서의 망각
일본 귀화: 1945년 해방이 되자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마침내 일본으로 귀화했다
. 이름에 담긴 혼란: 일본 이름으로 '노구치 미노루(野口稔)' 또는 '노구치 가쿠츄(野口赫宙)'를 사용했다
. 원래 이름 '혁주(赫宙)'를 일본 성(노구치) 뒤에 그대로 붙여 '노구치 가쿠츄'로 불린 점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면서도 조선인이라는 굴레를 온전히 지우지 못했던 그의 찢겨진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전후 활동과 한국 문학사의 단절:
일본에서 <어두운 지대(黒い地帯)>, <부침(浮き沈み)>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소설가와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1998년 세상을 떠났다
. 분단과 식민지 청산의 상흔 속에서 한국 문단은 그를 '변절자이자 조국을 버리고 일본인이 된 작가'로 규정하여 오랫동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철저한 침묵과 배제로 일관했다
.
5. 인물에 대한 평가와 의미: '철저한 친일파'이자 '식민지의 극단적 경계인'
장혁주는 다음과 같은 중층적인 질문을 남기는 인물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병리적 탈출: 봉건적 출신 성분(서자)의 차별과 식민지 조선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국의 언어를 택하고 제국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려 했던 극단적인 사례다
. 친일과 귀화의 결말: 이광수나 김동인 등은 해방 후 한국에 남아 변명이나 회한 속에 역사의 심판을 받았으나, 장혁주는 식민 종주국으로 아예 귀화해 버림으로써 조선과의 연을 물리적으로 끊어버렸다
. 경계인의 비극: 제국 일본을 열렬히 지향했으나 완전한 일본인으로 대우받지 못했고, 조선을 끊임없이 부정했으나 문학의 뿌리는 조선의 농촌에 묶여 있었던, 식민지 지배 구조가 낳은 가장 모순적이고 비극적인 경계인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
—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다 일본인이 된 작가
인물 소개
장혁주(張赫宙)
본명: 장은중(張恩重)
출생: 1905년 10월 13일, 대구
사망: 1997년
일본 이름: 노구치 미노루(野口稔), 필명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
대표작: (1932), (1939), (1944), (1952)
장혁주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는 작가다.
그는 식민지 조선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일본 문단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제국의 식민정책과 황민화에 협력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52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장혁주의 삶을 관통하는 문제는 세 가지다.
첫째, 왜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려 했던 작가가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를 선택했는가?
둘째, 식민지 조선인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작가가 왜 일본제국을 정당화하는 문학으로 옮겨갔는가?
셋째, 일본인이 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는가?
첨부하신 글은 장혁주를 조선에도 일본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으로 설명한다. 이 관점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다만 그의 친일행위를 경계인의 고뇌만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1. 어린 시절과 문학적 출발
장혁주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 이름은 장은중이었다.
가정환경은 복잡했다. 부모의 관계, 출생 신분에 대한 인식, 경제적 불안정 등은 그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학생 파업에 참여하여 징계를 받았다. 이후 교사로 일했고, 대구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진우동맹과도 관련을 맺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장혁주는 처음부터 일본제국에 충성한 작가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2. (餓鬼道, 1932): 일본 문단에서 인정받은 조선인 작가
아귀도(餓鬼道)
1932년 일본 잡지 의 현상소설 모집에서 2등에 입선한 작품이다. 식민지 조선 농민들의 극심한 빈곤과 생존의 고통을 다루었다.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 조선 농촌의 참담한 현실이다.
경제적 어려움에 몰린 농민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한다.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관념적인 민족주의의 언어보다 굶주림, 노동, 절망이라는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묘사한다.
일본의 세계대백과사전은 초기 장혁주의 문학이 억압받는 민족의 분노와 저항을 강렬하게 표현했다고 평가한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조선의 현실을 일본 독자들에게 알렸다는 사실이다.
둘째, 일본 문단 내부에 식민지 조선의 빈곤과 억압을 문학적 주제로 받아들이는 독자와 편집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서 논의한 전전 일본의 반제국주의 지식인들과 연결되는 문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었다.
장혁주는 일본 문단에서 인정받기 위해 일본어를 사용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문학적 성공은 제국의 중심부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가 왜 일본어로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어 독자의 규모와 국제적 번역 가능성을 고려했다는 자신의 설명도 전해진다.
물론 일본어로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은 아니다. 일본어를 이용해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언어로 무엇을 썼는가이다.
3. 1930년대 후반: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던 작가가 일본제국을 옹호하다
장혁주의 문학적 전향은 1936년 도쿄 이주 이후 뚜렷해진다.
그는 일본 문단에서 이미 일정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1938년에는 일본어 희곡 을 발표했고, 일본과 조선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되었다.
그런데 1939년부터는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을 긍정하는 활동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939년 2월 발표한 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장혁주는 일본의 농촌갱생운동과 내선일체를 긍정하면서 조선 지식인들의 협력을 촉구했다.
이 시기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와 (1939)
이 작품들은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그 가족,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작품에는 민족 간 차별과 정체성의 갈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장혁주는 그러한 문제를 식민지 지배체제 자체의 부당성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문학연구자 김학동에 따르면 두 작품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묘사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기존의 식민지 통합체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앞서 살펴본 이광수의 와 유사한 구조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결론이 반드시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이어야 하는가?
장혁주의 소설에서도 인간적인 화해와 정치적인 동화가 구별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난다.
(1939)
이 작품은 더욱 직접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장수였다.
그런데 장혁주는 그를 일본의 영웅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한국인이 일본에 침략당한 역사를 일본의 영웅담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장혁주의 친일문학을 대표하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역시 이 작품을 장혁주의 친일적 전향을 설명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한다.
이 작품을 김동인의 과 비교하면 흥미롭다.
김동인은 고대 백제와 일본의 협력관계를 이용해 내선일체를 정당화했다.
장혁주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역사적 사건을 일본의 국가적 영웅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두 작가 모두 역사를 통해 현재의 정치질서를 정당화하려 했지만, 사용하는 역사적 소재는 달랐다.
(1944)
이 작품은 조선인에게 일본군 지원과 징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전시동원 문학에 속한다.
장혁주는 단순히 일본의 근대문화를 찬양하는 수준을 넘어 조선인을 일본제국의 전쟁에 동원하는 정책에 협력했다.
그는 황도조선연구회 위원, 녹기연맹 회원으로 활동했고, 만주 개척촌을 시찰하는 등 국가정책과 연결된 문화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므로 장혁주의 친일문학을 단순히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는 작품을 발표했다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다.
4. 해방 이후: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1945년 일본의 패전은 장혁주의 작가적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는 일본 문단에서 인정받은 조선 출신 작가였지만, 이제 일본제국은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그의 친일행위가 문제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과거와 같은 정치적 기반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렀으며, 조총련이나 민단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952년 10월 일본으로 귀화하여 노구치 미노루라는 법적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본인으로서의 확고한 민족적 선택이었는가?
김학동의 2009년 연구는 장혁주가 일본 패전 직후 자신의 친일행위를 정당화하거나 과거의 일본제국을 비판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작가적 생존을 모색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그의 귀화에는 일본인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뿐 아니라 정치적 고립, 문학적 생계, 가족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동기는 개인의 내면에 관한 해석이므로 하나의 원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5. 일본인이 된 후에도 조선을 떠나지 못한 문학
장혁주는 귀화 이후에도 조선과 한국을 소재로 글을 썼다.
대표적으로 (1952), (1954)가 있다.
이 작품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다.
김학동의 연구는 장혁주가 이 작품들을 통해 한국 민족의 고난을 형상화하면서도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복잡한 태도를 드러냈다고 분석한다.
1961년 발표한 에서는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 후손들의 정체성 갈등을 다루었다.
이는 일본에 귀화한 장혁주가 여전히 조선계 출신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장혁주는 일본인이 되기 위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문학적 소재와 작가적 개성은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의존했다.
그의 일본어 문학이 일본 독자들에게 특별했던 이유 자체가 조선 출신 작가의 시선에 있었던 것이다.
6. 장혁주와 이광수·김동인의 차이
비교 | 장혁주 | 이광수 | 김동인 |
|---|---|---|---|
주요 활동 문단 | 일본어 문단 | 조선어 문단 중심 | 조선어 문단 중심 |
초기 관심 | 식민지 농민의 빈곤과 사회적 모순 | 민족계몽과 근대화 | 개인과 사회의 갈등 |
전시 협력 | 황민화·내선일체·전쟁동원 문학 | 황민화·내선일체·전쟁동원 문학 | 역사소설 등을 통한 내선일체 정당화 |
해방 이후 | 일본 잔류, 1952년 귀화 | 한국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 중 납북 | 한국에서 작가 활동 지속 |
문학사적 특징 | 두 언어·두 국가 사이의 정체성 갈등 | 민족계몽주의에서 제국적 동화로 변화 | 예술지상주의와 전시협력의 공존 |
장혁주는 특히 일본 문학사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일본어로 글을 쓰는 조선 출신 작가라는 존재가 식민지 시대 일본 문학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사례는 일본문학을 일본 민족 출신 작가들의 문학으로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제기한다.
7. 첨부하신 글에 대한 평가
첨부문서는 장혁주의 삶을 일관된 민족적 배신보다 정체성의 혼란과 소속의 문제로 설명한다.
특히 조선 출신 작가가 조선사회와 일본사회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관점은 장혁주의 전후 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두 가지 구별이 필요하다.
첫째, 그의 출생환경과 개인적 소외감이 일본으로의 귀화를 설명하는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개인사가 곧바로 친일문학의 정치적 성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일본인이 된 뒤에도 조선에 관한 글을 계속 썼다는 사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전시 협력행위를 재평가할 수는 없다.
장혁주는 친일문학인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농민의 현실을 탁월하게 묘사한 소설가였다. 이 두 사실을 모두 인정해야 그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8. 종합 평가: 장혁주는 누구였는가?
장혁주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모순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가 낳은 조선인의 비참한 현실을 문학적 성공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면서도, 이후 바로 그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문학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의 초기 소설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외부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그 현실을 낳은 정치적 구조를 비판하기보다 제국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해방 이후 그가 일본에 남아 일본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개인의 국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일본 국적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반민족행위의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1939~1944년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그는 일본제국의 동화정책과 전쟁동원에 직접 협력했다.
장혁주의 사례가 앞서 논의한 일본의 문제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인 작가에게 제국의 영광을 찬양하는 행위는 자신의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반면 장혁주는 일본제국의 피지배민족 출신이었다. 그가 같은 논리를 수용했을 때, 일본의 국가적 애국과 조선의 민족적 자기부정 사이에 긴장이 발생했다.
장혁주의 문학은 그 긴장을 개인의 생애 속에서 드러낸다.
다만 그 긴장의 존재가 모든 선택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같은 시대 일본어로 문학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정치적·문학적 길을 택한 조선인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장혁주를 이해하는 데 특히 유익한 비교 대상은 이광수나 김동인만이 아니라 김사량(金史良)이다. 두 사람 모두 일본어로 조선인의 현실을 그렸지만, 일본제국에 대한 태도와 작가적 선택은 달랐다.
연구에 유용한 문헌
김학동, (2010).
KISS김학동, (2009).
journal.kci.go.kr김학동, (2008).
journal.kci.go.kr시라카와 유타카(白川豊), (2009).
마지막으로 서지상 한 가지를 바로잡으면, 장혁주의 사망연도는 자료에 따라 1997년과 1998년으로 혼재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98년 2월 1일로 기록한다. 이 답변의 첫 인물 소개에는 1997년으로 적었으나 해당 국내 백과사전의 기록을 우선할 경우 1998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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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赫宙(読み)ちょうかくちゅう(その他表記)Chang Hyǒk-chu
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張赫宙」の意味・わかりやすい解説
張赫宙 (ちょうかくちゅう)
Chang Hyǒk-chu
生没年:1905-98
朝鮮の小説家。慶尚北道大邱生れ。大邱高等普通学校卒業。
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張赫宙」の意味・わかりやすい解説
張赫宙【ちょうかくちゅう】朝鮮の作家。本名は張恩重,帰化して野口稔となる。教員時代に見た農村の状況をもとにした《餓鬼道》(1932年)が雑誌《改造》の第5回懸賞入選,日本文壇に登場。初期の作品《白楊木》《追はれる人々》は民族性の強い作品だったが,次第に純文学に転じ,親日文学も多数書いた。戦後の作品に朝鮮戦争を扱った《嗚呼朝鮮》や自伝的な《嵐の詩》がある。
出典 株式会社平凡社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について 情報
世界大百科事典(旧版)内の張赫宙の言及
【在日朝鮮人】より
…日本のプロレタリア文学運動の中で活動した作家に鄭然圭,韓植,金熙明,詩人に金竜済,白鉄,姜文錫(きようぶんしやく)らがいる。その運動が解体しはじめたころに張赫宙(ちようかくちゆう)は〈餓鬼道〉(1932)で日本文壇に登場,植民地下朝鮮農民の現実を骨太な筆致で描いて好評を得(のちに皇民化運動に荷担する),
※「張赫宙」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用語解説の一部を掲載しています。
出典|株式会社平凡社「世界大百科事典(旧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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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로 쓴 「아귀도(餓鬼道)」가 1932년 4월 일본 잡지 『개조(改造)』의 현상 공모에 2등으로 입선해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인 이외의 작가가 처음으로 일본 잡지에서 실시한 현상문예에 입상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어로 쓴 소설로는 1933년부터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 「무지개」와 1934년부터 1935년 「삼곡선(三曲線)」, 1936년 「여명기(黎明期)」 등이 있다. 1936년 여름 도쿄로 이주했고, 1938년 희곡 「춘향전」을 썼다. 이 작품은 3월부터 11월까지 일본과 조선의 7개 도시에서 순회 공연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내선반도문화좌담회(內鮮半島文化座談會)에 참석했다.
1938년 10월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좌담회 ‘조선 문화의 장래’에 참석했고, 1939년 2월 농촌갱생운동과 ‘내선일체’를 긍정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朝鮮の知識人に訴ふ]」을 발표했다. 같은 달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藝懇話會) 발족에 참가하고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훈련소(滿蒙開拓靑少年義勇軍訓練所)를 방문했다. 1940년 1월 『매일신보』 도쿄지국이 주최한 동경재주반도명사좌담회(東京在住半島名士座談會)에 참석했다. 1941년에는 장편 3부작 「인간의 유대[人間の絆]」를 발표했다. 1942년 2월 황도조선연구회(皇道朝鮮硏究會)의 위원이 되었고, 녹기연맹에 연맹원으로 참여했고, 5∼6월 조선총독부 척무과(拓務課)의 위촉으로 만주 개척촌(開拓村)을 시찰했으며, 8월 도쿄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大東亞文學者大會)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징병제 실시를 지지한 창작집 「이와모토지원병[岩本志願兵]」을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같은 해 일본문학보국회의 황도조선연구회 위원으로 일본 내 탄광을 위문했고, 1945년 5월 만선문화사 초청으로 중국과 만주를 순회한 후 8월 도쿄에 돌아가 나가노현에 거주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귀국하지 못했다. 조총련과 민단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좌·우익 양 진영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취재한 「아, 조선[嗚呼朝鮮]」을 1952년 5월 출간하고, 10월 일본에 영구 귀화했다. 1954년 자전적 장편인 「편력의 조서[遍歷の調書]」를 출간하고 9월 일본농민문학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다룬 1977년 「한과 왜-천손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韓と倭ー天孫民族はどこから來たか]」, 1980년 「도자기와 검-히데요시의 조선출병과 도공의 대거도래[陶と儉-秀吉の朝鮮出兵と陶工大渡來]」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으며, 1998년 2월 1일 사이타마현[琦玉縣]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은중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19∼55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 『친일문학론』(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 2013)
- 『장혁주연구』(시라카와 유타카, 동국대학교출판부,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 『장혁주소설선집』(시라카와 유타카, 태학사, 2002)
- 『한국근대문인대사전』(권영민, 아세아문화사, 1991)
- 「혈통주의적 ‘내선일체’를 통해서 본 만주와 만주국」(김재용, 『한민족문화연구』45, 2014)
- 「귀화의 에스닉 정치와 알리바이로서의 미국」(장세진, 『현대문학의 연구』45, 2011)
- 「도쿄 이주(1936년) 후의 장혁주 문학에 나타난 정체성의 모색」(신승모, 『한국문학연구』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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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귀화한 장혁주(張赫宙)의 삶과 문학
김학동
한국일본어문학회 2010.12
일본어문학 47권 201-220(20pages)
本稿では、日帝植民時期の親日的執筆活動により、祖国に帰国できず日本に帰化した張赫宙(野口赫宙)の生活と文学を考察し、その意義と問題点を論じた。特に、日帝の敗戦以後発表された作品の分析と整理に重点を置き、その内容と作家的行跡の比較․検討を通じて、張赫宙の文学と生活に対する巨視的な評価基準の確保に努めた。 日本に帰化した後の張赫宙は、朝鮮出身作家としての希少性を生かした作品の執筆に力を入れたが、作家自身の女性遍歴にかかわる家族史を描いた自伝的作品を量産したり、韓日間の親密な歴史的交流と民族的同質性を強調することで、日帝の朝鮮支配の正当化を試みた。 このような日本敗戦後の張赫宙の文学は、帰化した作家としての苦労を吐露したり、生活のための執筆に終始しただけに、人間の存在に対する真剣な探究という作家的理想とは隔たりがあり、むしろ彼の家族及びて彼の属していた祖国と民族は深く傷つけられ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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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전과 친일작가 張赫宙의 작가적 모색
Journal of Japanese Culture
2009, (40), pp.237~253
DOI : 10.21481/jbunka..40.200903.237
Publisher : The Japanese Culture Association Of Korea (Jcak)
Hakdong Kim 1
1충남대학교number of Cited : 1
Accredited
ABSTRACT
本稿では親日作家張赫宙の文学的活動のなかで、日本帝国の敗戦直後から日本に帰化する1952年頃までを考察の対象にして、不安定な民族的アイデンティティのなかで執筆を試みた作家的行跡と、それを反映した新聞·雑誌の記事及び作品の特徴を考察してみた。 その結果、敗戦に直面した張赫宙は過去の親日的執筆に対する美化を試みたり、日本帝国を批判するなどの迅速な態度の変化を模索したほか、読者の好感を得るために敗戦による日本人の苦しみをヒューマニズム的立場から描く努力を傾けていたことが確認できた。そして、祖国に捨ててきた家族と民族に対する葛藤を描くかたわら、韓国戦争を扱った多くの著作の執筆を最後に日本に帰化し、作家的人生の新しい出発を図っていたことが分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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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赫宙 문학에 나타난 조선식민 일본인 -『痴人浄土』와 『美しき結婚(아름다운 결혼)』에 엿보이는 식민통치의 정당화
Journal of Humanities
2008, (42), pp.7~26
Publisher : Institute for Humanities
Hakdong Kim 1
1충남대학교number of Cited : 1
Candidate
ABSTRACT
본고에서는 장혁주가 친일적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무렵인 1930년대 후반에 집필한 『痴人浄土』와 『아름다운 결혼』에 형상화된 조선식민 일본인과 그 후손들이 겪는 민족적 갈등을 분석하여 일제의 조선통합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痴人浄土』에서는 조선인과의 우호협력적인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사타로(佐太郎)의 모습을 통해 민족적 차별의 부당성을 제고하고, 조선에 정착한 숙부 의 외동딸로서 장차 사타로의 아내가 될 노부코(信子)가 겪는 내지(일본)인에 대한 동경과 열등의식, 그리고 이들에 대한 내지인의 차별적 시선을 중심 테마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결혼』은 1930년대의 대구를 배경으로 한·일 혼혈로 태어났거나 조선에서 성장한 일본인 여성의 지난한 삶을 통해 일제의 조선통합으로 발생된 사회적 갈등 양상을 형상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는 이상과 같은 갈등 양상의 형상화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비판하려는 의식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식민지인들의 내지인에 대한 굴종을 당연한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기왕에 하나 된 국가의 체재유지에 기여하려는 집필태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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