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3

식민지 조선과 일본 | 조경달 2015 요약 평론

식민지 조선과 일본 | 대학교양총서 2 | 조경달 | 알라딘


식민지 조선과 일본 | 대학교양총서 2
조경달 (지은이),최혜주 (옮긴이)한양대학교출판부2015-08-25

원제 : 植民地朝鮮と日本



책소개
대학교양총서 2권. 식민지 조선 통사로, 저자의 지난 저작 <近代朝鮮と日本>(2012)의 속편이기도 하다. 먼저 나온 책은 조선의 정치문화인 유교적 민본주의에 착목하면서 한국 병합까지의 조선 근대사를 일본과의 관계사를 기축으로 개관했다. 즉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가 빠르게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과의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며 조선의 근대국가 건설에 어떠한 규정성을 가져왔는가,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의 저항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지탱했는가 등을 밝혔다.

속편인 이 책도 역시 유교적 민본주의에 착목하고 있다.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모종의 갈등을 강요당했는데, 그럼에도 어떻게 자기를 관철하려고 했는지 그 양상을 지배 정책의 변천과 민족운동, 민중운동, 혹은 근대화와 함께 진행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갈등, 일본과의 상호인식 등과 결부해 밝히려 한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이 그러한 고투 속에서 만들어낸 사상, 혹은 그와 반대로 굴복해간 사람들의 정신적 고뇌와 그 논리 등도 파헤치면서 식민지의 본질인 폭력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목차


들어가며

제1장 일본의 군사 지배
1. 무단정치의 성립
2. 무단농정과 산업정책
3. 동화정책과 지방통치
4. 무단정치하의 민중

제2장 3·1 운동
1. 독립 기운의 도래
2. 3·1 운동의 전개
3. 3·1 운동과 일본

제3장 문화정치로의 전환
1. 문화정치의 성립
2. 실력양성운동
3. 경제정책과 해외이민

제4장 민족운동의 전개
1. 문화운동과 민중
2. 사회주의운동과 민중
3. 해외의 독립운동
4. 신간회 운동

제5장 식민지의 근대
1. 식민지의 사회와 문화
2. 근대화와 민중
3. 식민지의 내셔널리즘

제6장 문화정치의 종언과 일본인
1. 사회주의운동과 농촌진흥운동
2. 심전개발운동과 문화정치의 종언
3. 재조일본인의 세계

제7장 전시체제와 조선
1. ‘내선일체’와 총동원체제
2. 지식인의 전쟁 협력
3. 총동원과 민중

제8장 전쟁과 해방
1. 15년 전쟁기의 독립운동
2. 전쟁과 반항
3. 조선의 해방

나오며
저자 후기
연표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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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5년 9월 19일자 '책꽂이'



저자 및 역자소개
조경달 (지은이)

1954년 도쿄 출생. 일본 주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지바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조선 근대사ㆍ근대 한일비교사상사다. 저서로 『역사와 진실』(공저, 1997, 치쿠마쇼보), 『이단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1998, 이와나미쇼텐), 『조선 민중운동의 전개―士의 논리와 구제사상』(2002, 이와나미쇼텐), 『식민지기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2008, 유시샤), 『식민지 조선』(편저, 2011, 도쿄도출판), 『비교사적으로 본 근세 일본』(편저, 2011, 도쿄도출판), 『근대 조선과 일본』(2012, 이와나미쇼텐), 『근대 일조 관계사』(편저, 2012, 유시샤)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동아시아 근현대통사>,<식민지 조선과 일본>,<근대 조선과 일본> … 총 8종 (모두보기)

최혜주 (옮긴이)

문학박사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인문과학대학 연구생 ㆍ 석사 ㆍ 박사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 외국인연구원(2003)
숙명여자대학교 학술연구교수(2002-2005)
한양대학교 학술연구교수 ㆍ 연구교수 ㆍ HK교수(2006-2021)
독립유공자 공적검증위원(2022-202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연구이사(2013- )
상명대 ㆍ 한양대 연구원(2022- )

저서 『滄江 金澤榮의 한국사론』(1996),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통치론』(2010, 한국간... 더보기

최근작 : <시찰·여행·침탈>,<언론·출판 관련 번역 자료집 2>,<언론·출판 관련 번역 자료집 1> … 총 3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관점으로 들여다본 식민지 조선의 역사
‘조선의 탈식민지화’라는 역사적 결과는 수동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기만 한 것이 아니며
‘유교적 민본주의’ 등과 같은 조선 내부의 토착적 논리가 어느 정도 관여한 결과일 수 있어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의 통사다. 또한 저자의 지난 저작 『近代朝鮮と日本』(2012)의 속편이기도 하다. 먼저 나온 책은 조선의 정치문화인 유교적 민본주의에 착목하면서 한국 병합까지의 조선 근대사를 일본과의 관계사를 기축으로 개관했다. 즉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가 빠르게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과의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며 조선의 근대국가 건설에 어떠한 규정성을 가져왔는가,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의 저항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지탱했는가 등을 밝혔다. 속편인 이 책도 역시 유교적 민본주의에 착목하고 있다.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모종의 갈등을 강요당했는데, 그럼에도 어떻게 자기를 관철하려고 했는지 그 양상을 지배 정책의 변천과 민족운동, 민중운동, 혹은 근대화와 함께 진행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갈등, 일본과의 상호인식 등과 결부해 밝히려 한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이 그러한 고투 속에서 만들어낸 사상, 혹은 그와 반대로 굴복해간 사람들의 정신적 고뇌와 그 논리 등도 파헤치면서 식민지의 본질인 폭력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정치문화란 정치나 항쟁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그 내용이나 전개의 상태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 전통, 관념, 신앙, 미신, 원망(願望), 관행, 행동규범 등의 정치 과정에 관한 일체의 문화를 말한다. 정치문화는 일반적으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이에 공유된다. 이는 장기파동적으로 측정되는 것이며, 장기에 걸쳐 배양된 정치문화가 단기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근대적 폭력에도 대항하면서 정치사회의 밑바닥과 사람들의 심성을 규정해간다. 식민지 조선에서 어떻게 경제적인 근대화가 진행되었는지를 강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문화적인 근대성이 사회나 사람들의 심성을 어떻게 침윤시켰는지에 관심을 갖는 식민지근대성론에서는 근대가 지나치게 평가되어 전통은 용이하게 사라져가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우선 후자는 근대 비판이나 식민지주의 비판을 외치기는 하지만, 근대는 대항하기 어렵고 사람들은 굴절하면서도 용이하게 근대적 주체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탈식민지화의 과정을 식민지민의 주체적 영위 가운데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탈식민지화는 어디까지나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정치문화에 착목하는 이 책은 그러한 논의와는 자연히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탈식민지화의 과정에는 왕왕 토착적 논리가 깊이 관여한다고 하는 것이 이 책의 입론 중 하나다.

이 책은 제국일본의 조선 침략과 민중의 저항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한 『植民地朝鮮と日本』(2013, 이와나미쇼텐)을 완역한 것이다. 저자 조경달 교수는 조선 근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지바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 저서로는 『역사와 진실』(공저, 1997, 치쿠마쇼보) 『이단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1998, 이와나미쇼텐) 『조선 민중운동의 전개-士의 논리와 구제사상』(2002, 이와나미쇼텐) 『식민지기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2008, 유시샤) 『근대 조선과 일본』(2012, 이와나미쇼텐) 등이 있고, 논문으로 「갑오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 연구」(1983) 「조선 근대의 내셔널리즘과 문명」(1991) 「동학에 있어서 정통과 이단」(1994) 「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1995) 「김옥균에서 신채호로-조선의 국가주의의 형성과 전회」(1996) 「조선의 근대와 그 정치문화」(2003) 「식민지근대성 비판」(2008)이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나온 조선 통사로는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의 『日韓倂合小史』(1966, 안병무 옮김, 『한일병합사』, 1982)와 『日本統治下の朝鮮』(1971, 최혜주 옮김,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2011)이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되어왔으나 통치자인 일본 측의 사료만을 주로 분석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은 성과로, 유교적 민본주의에 착목해 정치문화사적 관점에서 지배를 받던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통해 한일 관계사를 개관한 식민지 조선의 통사다.
저자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어떠한 갈등을 강요당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자기를 관철하려고 했는지 그 양상을 지배 정책의 변천과 민족운동, 민중운동, 혹은 근대화와 함께 진행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갈등, 일본과의 상호인식 등과 결부해 밝히고 싶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이 그러한 고투 속에서 만들어낸 사상, 혹은 그와 반대로 굴복해간 사람들의 정신적 고뇌와 그 논리 등도 파헤치면서 식민지의 본질인 폭력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라며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아울러 식민지의 폭력을 과거의 문제로만 말하는 것의 문제성을 지적하며 “이제부터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가 양호한 것이 될지는, 오로지 역사인식 문제로부터 눈길을 돌리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라고 강조한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5월 <동아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공동 여론 조사에 따르면, 양국 국민의 역사인식의 격차가 5년 전보다 크게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었으며, 식민지 지배 피해보상 문제에 대해서도 인식 격차가 그대로 드러났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한국인 응답자의 95퍼센트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지만 일본인은 49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 피해자 보상을 재검토해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한국인 89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일본인 69퍼센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또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관련해서도 일본인 사이에는 ‘지금까지의 사죄로 충분하다’는 인식이 더욱 확산되었음이 드러났다. ‘일본이 충분히 사죄했나’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1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일본인은 65퍼센트로 크게 늘어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큰 시각차를 보였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 개선에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한국인은 95퍼센트가 중요하다고 답한 반면 일본에서는 53퍼센트만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동안 한류 현상이 양국의 상호 이해에 큰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의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듯하다. 최근 도쿄 코리아타운에서 공격적인 혐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이를 제재하지 않고 있다. 35년간에 걸친 식민지배의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있는 지금,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식민주의의 청산과 극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양국의 관계에서 갈등의 시작을 파악하지 않으면 상호 이해가 막히는 것은 물론이고 성숙한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도 한일 관계는 여전히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군 위안부, 독도 영유권, 망언, 전후 배상 등 민감한 사안이 나오면 불편해지기 일쑤인 채 제자리걸음 상태다. 일본 보수 정치가들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적극적인 미화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두 나라가 가까워지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한일 관계는 언제부터 악화되었으며, 그것이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조선멸시관의 역사적 뿌리
8세기에 일본에서 편찬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집권적 통일국가를 수립해 천황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데 있었다. 여기에는 4세기경 진구(神功)황후가 남편을 대신해 ‘신라에 출병’하여 ‘삼한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삼한은 신라·백제·고구려를 말하는데, 이 전설은 이미 많은 연구자에 의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 시기는 통일국가의 존재조차 부정되어 있는 상태인데 대규모 해외파병이 가능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진구황후 전설은 ‘일본이 신국(神國)’이라는 신국관을 동반하여 후세에까지 이어지면서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전통적 조선관을 형성시켰으며, 그 후 일본인의 조선관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일본의 조선 인식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된 사건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이래 7년간 16만의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두 번 상륙해 조선을 침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문화적 존경과 함께 조선멸시관을 심어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조선의 성리학·도자기·금속활자 등이 전래되면서,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선 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자리 잡게 되었다. 1607년 조선에서 처음 파견된 통신사행에 대한 열렬한 반응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에도(江戶) 시대에는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는 중에도 일본과 조선의 평화적 국교가 계속되어 조선만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가졌다. 이 시기의 조선관도 양면적이었다. 당시의 지식층, 특히 유학자들의 조선 학문과 학자에 대한 존경으로 조선본의 복각이 활발했다. 조선인 혹은 그 자손이 번(藩)의 교수로 초빙되거나 승려로 존경받기도 했다. 당시의 일본인은 조선 문화의 일면, 특히 봉건적 질서의 형성에 이바지한 주자학을 존경했다. 일본 지식층 가운데 지배적 지위에 있었던 유학자 층이 조선의 학문과 학자에 경의를 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멸시관의 일면은 일본의 건국신화나 전설에 근거해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강력히 주장한 일본의 국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일본 고전의 우수성을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연구하며 신국 일본의 모습을 그려냈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한 국학자들의 조선관은 후대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막부 말기, 조선ㆍ아시아 침략론의 길을 열고 메이지(明治) 정권 성립 이후 조선 침략 정책을 용이하게 만든 사상적 토양이 된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조선에 대해 군사적 우월감을 가지게 되면서 조선 민족에 대한 멸시감이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다.

조선 침략에 대한 논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1868년에 천황을 정점으로 한 신정부가 탄생하며 근대 일본이 시작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구미의 근대 문명과 기계제 공업 도입에 적극적이었고,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추진했다. 그사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일본은 구미에 대해서는 추종적·타협적인 태도를, 주변국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신정부는 구 막부가 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추진하려 했다. 이를 위해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전권대사로 하는 구미사절단을 파견해 조약 개정을 타진했다. 그러나 개정은 성사되지 못했고,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 정책이 불가결함을 통감했다.
메이지 정부는 주변국과도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과의 관계는 1811년 이래 통교가 중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쓰시마(對馬) 번을 통해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해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고, 일본이 개국하여 서양과 국교를 연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무력으로 개국을 요구하자는 정한론자가 세력을 얻었다. 이들은 국내의 반정부 움직임을 조선 침략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한론은 징병령에 대한 사족(士族)의 불만과 농민소요의 빈발에 따른 내란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대외강경책이었고, 동시에 조선 침략을 통해 만국이 대치하는 국제상황에서 일본의 국권을 신장시키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구미 견문을 마치고 돌아온 사절단이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를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정한은 취소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정한파는 1873년 일제히 사임하고 정부를 떠났다. 그 후 1875년 조선 연안을 측량하고 있던 일본 군함 운요호를 조선 측이 포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사실 일본 정부가 승인한 계획적인 도발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을 압박해 이듬해에는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해 조선 침략의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의 조선 침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17세기 후반의 조선멸시관, 막부 말기의 조선침략론, 메이지 시대 초기의 정한론, 그리고 이후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일본의 전후 처리의 문제점
근대 일본에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이후 일본의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국가주의와 함께 대외팽창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타이완을 식민지로 확보하면서 국제사회에 후진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했다. 이어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이를 발판으로 강제병합을 감행하고 대륙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대외 침략전쟁을 확대해갔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반격으로 결국 패망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일본의 전후 처리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일본의 가해자 의식의 부재다. 일본은 아시아인이 일본의 침략주의로 인해 막대한 고통을 당한 사실은 외면한 채 오히려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점만을 강조했다. 둘째, 전쟁 책임의 부재다. 일본은 스스로 피해자 대열에 섬으로써 과거 침략 행위의 진상이나 피해 파악은 외면하고 과거 역사에 대해 특별히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변했다. 셋째, 대외적 배상 의무를 회피했다. 일본의 전후 보상은 군국주의 정책 수행 과정에 참여했다가 피해를 당한 자국민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과정에서 일본 침략주의에 희생당했던 각국 피해자의 고통은 외면당했다. 넷째,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가들도 일본 사회를 내면으로부터 반성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독일이 정치적으로나 지식인 및 학생운동으로 과거 극복을 위해 노력한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는 전후 문제 청산에 부정적이며 보상 청구에 대해서는 한일청구권과 경제협력 협정으로 이미 종결된 사안이므로 더 이상 고려할 것이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청구권 교섭 당시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를 청산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일본 정부는 우리가 요구하는 철저한 조사와 진상 규명에 소극적이며 책임을 축소하고자 사실을 은폐했다. 전후 일본의 가장 큰 잘못은 아시아에 대한 잔학 행위에 대해 솔직하고 효과적인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은 데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는 일본 사회가 극복해야 할 커다란 과제다. 일본은 침략과 지배로 잘못을 저지른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국제적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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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과 일본 / 조경달

1장 일본의 군사 지배

"조선은 무엇보다도 강대한 군사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병합과 함께 한국주차군은 조선주차군으로 바뀌고, 군사령관은 총독의 통솔하에 두었다. 의병전쟁은 대략 종식되었지만, 잔병활동은 여전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래서 주차군은 분산주의를 취해 각지에 소부대를 주둔시키고, 의병의 잔병을 뿌리째 '소탕'하려고 했다. 잔병은 평안남도나 강원도의 산간부에 숨어서 출몰하고 있었는데, 1915년경까지는 숨통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함경북도 나남에는 제19사단, 용산에는 제20사단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1921년까지 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사이 1918년에 주차군은 조선군이라고 개칭되었다. 또한 경상남도 진해에는 1916년에 해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병합 초기의 총독정치는 당시부터 무단정치로 불렸다. 그것을 가장 상징하는 것이 헌병경찰제도다." "헌병대는 군사경찰로 육·해군대신의 지휘를 받고, 그 사령관은 '내지'의 헌병대 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다."(16-7)

"식민지 조선 최대의 지주는 1908년 12월 28일에 설립된 동척(본점·경성)이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1만 7714정보의 토지를 지급받아 발족한 동척은 그 후 1913년까지 4만 7148정보의 토지를 매수했고, 1919년에는 7만 8520정보를 소유한 거대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사업에서 금융업은 중요한 부문이었지만, 토지의 집적은 토지를 저당으로 취하는 대금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병경찰은 사적인 토지매매에도 간섭해 토지의 매각을 용이하게 허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농민에게 매각 기회를 잃게 하고 도리어 농민의 곤궁화를 촉진해 대금업을 하는 동척에게 유리하게 움직였다. 국책회사 동척은 스스로가 지주경영을 실시하는 한편, 일본으로부터 농업이민을 유치하는 데도 노력을 경주했다." "당초에는 자작농·소작농·지주를 각각 모집했지만, 1914년 이후에는 자작농과 지주만 되었고, 1921년 이후에는 10정보 이상을 소유하는 지주의 육성만을 다루게 되었다."(28-9)

"총독부의 동화정책은 국적문제에서 기이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에는 마지막까지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준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일본국적법이 적용된 타이완이나 카라후토(사할린)와는 대조적이다.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국적이탈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조선인은 제3국에의 귀화가 영원히 금지되었다. 예를 들면 귀화하는 것이 가능한 조선인이라도 이중국적인 채로 '일본신민'으로 취급되었다. 위험분자를 방임하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본래 제국헌법이 시행되지 않은 이상 조선 반도에 있는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이 있었지만, 그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 등은 친일파 조선인의 명예직이었고, 무단정치기에는 회의가 개최된 일도 없었다." "참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인에게 연동해서 일본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재조일본인의 큰 불만이 되었다."(34-6)


2장 3·1운동

"당초 3·1운동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3대 원칙으로 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거사 단계가 되어 학생·민중에 대한 불신과 공포에서 일원적이고 대중적으로 운동을 추진해가는 것을 그만두고 비폭력만을 표방하였다. 결행일이 2일 빨라진 것도 장의 행렬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3일에 결행하면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학생을 쫓아낸 후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고 한용운의 인사와 만세삼창만을 거행하고 이어서 축배를 들려고 할 때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미리 당국에 자수를 신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대표가 결국 나타나지 않았던 파고다공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학생과 일반 민중만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오후 2시가 지나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가 고창되어 태극기를 선두로 시내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시내 곳곳에서 독립연설을 거행하면서 3대로 나뉘어 시위행진을 실시했다."(55-6)

"대부분의 경우 만세시위운동은 장날에 시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의 작법이다. 지도자의 독립선언이나 연설 뒤,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술기운으로 용기를 내어 참가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장시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위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받은 뒤에 무기를 빼앗아 항쟁으로 이행해갔다." "민중사적 시점에서 볼 때 민중은 민중대로 자율성을 발휘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점과 헌병의 숙사 등을 습격해도 물품은 거의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이었고, 절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한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보인 강제적 참가의 논리를 가지고 이루어져 만세를 환호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았다. 화톳불 행진과 산상 봉화가 왕성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민란의 작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방관을 욕하는 만세(山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60-1)


3장 문화정치로의 전환

"3·1운동의 결과 무단정치의 한계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3·1운동의 흥기는 총독부가 조선 민족과 공유의 정치문화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에서 최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조선 민족과 공유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새로이 모색된 통치책이 일시동인에 근거하는 내지연장주의를 슬로건으로 한 문화정치다. 이것은 조선 지배를 하는 데 조선인의 협력을 얻어서 간다는 정치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이른바 협력체제 구축이 필수가 되었지만 이러한 방향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내지연장주의는 머지않아 조선을 '내지'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조선인을 일본인과 완전히 같게 하여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동화주의는 점차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에 일정한 배려를 보였지만, 조선인을 서서히 일본에 심복시켜 일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동화하려는 것이었다."(77-8)


# 문화통치기의 주요 양상

1. 헌병경찰제도 폐지 : 보통경찰로 전환 및 증원, 조선인 순사보는 순사로 승격

2. 지방제도 개편 : 의결권 없는 각종 지방의회를 허용, 지방 유력층 가운데 협력자 물색

3. 공론사회 형성 : 언론·출판의 자유 완화로 조선어 신문·잡지 다수 간행, 각종 결사체 급증

4. 종교정책 전환 : 공인 종교(신도·불교·기독교) 외에 신흥 종교를 '종교 유사 단체'로 공인

5. 조선사 찬탈 : 총독부 주도로 〈조선사〉 편찬(민속학자 이능화와 역사학자 최남선 참여)

6. 청년회운동 : 실력양성운동 차원에서 청년회 활성화(사회주의 이념 확산의 주요 통로)

7. 민립대학 설립운동 : 총독부에서 관립대학을 추진하면서 경성제국대학관제 공포(1924.5)

8. 물산장려운동 : 알맞은 조선 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무산계급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여 쇠퇴

9. 회사령 철폐 : 회사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 총독부에 협조하는 합작기업 위주로 증대


"〈민족개조론〉은 지배계급에게는 '허위'와 '사욕', 일반 민중에게는 '게으름' '겁이 많고 나약함' '신의가 없음' 등의 도덕적 문제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선 민족 재생의 길은 그 도덕적 결함을 극복해서 민족성을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광수는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교화해 계속해야 할 영속적 과업이라고 했다." "이광수의 조선민족관은 총독부의 논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너무나 자학적이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의 자매단체로 1922년 10월에 수양동맹회를 결성해 진심으로 민족개조의 과업에 착수해갔다. 주자학에서는 학문과 덕행을 쌓은 뛰어난 인격자가 뛰어난 정치를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덕을 겸비한 인격자가 교화의 주체다. 안창호나 이광수가 의식하고 있거나 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그러한 주자학적 전통의 선상에서 민족 엘리트의 육성을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다."(95-6)

4장 민족운동의 전개

# 문화운동과 민중

1. 천도교와 기독교의 운동 : 천도교청년회에서 종합잡지 『개벽』 간행(1920.6), 기독교계는 교육 사업에 주력

2. 여성운동 :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조직(1919.3~4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6)와 조선여성동우회 창립(1924.5)

3. 형평운동 : 백정의 인권 향상과 차별 철폐를 목표로 형평사 설립(1923.4)

4. 농촌계몽운동 : 천도교 주도로 조선농민사 창립(1925.10)

5. 생활개선운동 : 구관비판과 생활근대화를 촉구하는 각종 모임 창립

6. 브나로드 운동 : 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향해서 벌인 문자보급운동(1931~1934)




# 사회주의운동과 민중

1. 사회주의 단체 결성 : 다양한 연구서클과 노농조직이 난립하다가 조선노동총동맹으로 합류(1924.4)

2. 두 개의 공산당 : 이루크츠크 공산당 한인지부(1918.1)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인사회당(상하이파, 1918.6)으로 분열

3. 조선공산당 탄생 : 코민테른의 통합 지시로 조선공산당 결성(1925.4)

4. 6·10만세운동 : 순종 장례식(1926.6.10)을 기해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력 상실

5. 조선공산당 해체 : 당국의 끈질긴 탄압과 내부 분열로 조직이 와해되자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1928.11)




"조선의 사회주의는 3·1운동 이후 급속하게 청년과 지식인 사이에 퍼져갔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평등주의나 평균주의를 표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받침 접시가 되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 중에는 지주의 자제나 양반 가문 출신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부수하는 명사의식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덕망가로 혹은 교양인으로 자격이 있는 것을 경쟁하려고 했다.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사(士)', 즉 지식인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영웅주의가 있었고, 민중을 소리높이 부르짖으면서도 민중으로부터 유리하는 지식인의 관념적인 모습이 있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소재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소작쟁의의 전형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소작쟁의라고 불리며 획기적인 사건이 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岩泰島)의 농민운동이다."(126-7)




# 암태도 소작쟁의 : 1923년 8월 결성된 암태도소작인회가 소작료를 4할로 할 것을 요구하고 최대 지주 문재철이 이를 거부하면서 폭력충돌이 벌어졌으나 1924년 8월말 경찰의 중재 속에 소작인회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면서 화해 성립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의열단의 선언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문화정치하의 자치운동과 문화운동을 엄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안창호의 독립준비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혁명"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국가주의자였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무정부주의자로 변하여 사(士)는 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정치는 민을 위해서라도 그 실천주체는 어디까지나 사(士)가 아니면 안 되지만, 신채호는 유교적 민본주의가 가진 평균주의나 평등주의의 이면을 받침 접시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면서, 사(士)와 민(民)의 논리에서 그것을 역전시킨다. 그것은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가 참으로 민중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그들이 의거하려고 해도 의거할 조선 민중은 간도 지방 등에 한정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진화는 분하게도 실천의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133-4)

5장 식민지의 근대

"성곽 도시였던 경성은 그 중앙을 동서로 지나는 청계천에 의해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왕조 시대에는 각각 북촌·남촌이라 불렸다. 북촌은 상류 양반이, 남촌은 하급 양반이 사는 지역이었다. 남촌은 남산 기슭에 있었고, 일본인은 여기에 있는 진고개라고 하는 배수가 나쁜 장소에 살기 시작해 서서히 개발을 추진해갔다. 총독부는 1914년에 이제까지의 행정구획인 5부 8면제를 고쳐서 주로 조선인 거주지역의 북촌에는 동제,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에는 정제(町制)를 펼쳤다. 거리의 발전 방법도 양극적으로 진행되어 상업시설과 극장·영화관 등의 오락시설도 일본인용과 조선인용이 각각의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본인 거리는 남의 본정통이나 황금통이 중심이고, 조선인 거리는 북의 종로통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프라 정비나 경관의 근대화 등은 압도적으로 남촌이 우선적으로 추진되고, 북촌에서는 상하수도 및 전기·가스 등의 보급이 늦어져 진행되지 않았다." "1925년 10월 15일에는 남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창건되었다."(148-150)

"경성 거리는 백화점 외에도 다방과 카페·빠·영화관 등으로 북적거렸다. 그 주요 소비자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시민공원인 창경원(구 창경궁)과 남산공원 등에서 자유연애를 즐겼다. '그/그녀'들은 일본 문화나 서구 문화의 주요 소비자였고, 일본 가요나 서양 음악에 친숙했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기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들은 다방의 마담이나 가수·여우 등이 되었고, 자산가·지식인·예술가 등과 교제하며 근대 문화 전파의 중개자 노릇을 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부르주아'의 아이들이었고, 이기주의자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지식인도 역시 모던보이·모던걸처럼 근대문화를 강하게 동경했다." "고등보통학교만 나와도 인텔리를 자처했고, 전문학교나 대학을 나오면 아주 으스대는 풍토가 일반적이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도 강했는데, 일본에 유학하는 자 대부분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154-5)

"빈곤한 민중 사이에서는 무속이나 신흥종교는 근대의학에 대체할 기능을 일관해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총독부가 근대성의 침투를 폭력적으로 도모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하나의 응답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흥종교는 치병에 그치지 않고 구제를 말했기 때문에 민중세계에 큰 힘을 가졌다. 종말종교는 민중의 안타까운 구제원망의 반영으로 있었지만 신흥종교의 대부분은 표면적으로는 통속적인 도덕을 부르짖는 한편, 이면에서는 종말의 도래와 교조에 의한 신 왕국의 탄생을 말한다." "신도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가난한 밑바닥 민중이었지만, 그중에서는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그 한편에서 친일행위도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의 배격을 주장하는 각파 유지연맹에 자금을 원조하고 함께 할동한 적도 있었다. 종말종교는 민족주의적임과 동시에 그 구제사상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상태도 양의적, 다의적이었다."(162-3)


6장 문화정치의 종언과 일본인

"1931년 6월 17일 취임한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농공병진' 정책을 취했다. 농업에서는 미작·전작(畑作) 중시의 농업을 유지하면서, '남면북양(南棉北羊)' 정책과 '북선개척' 정책이 수행되었다. 작부 면적 50만 보, 실면 생산 6억 근을 목표로 한 '남면' 정책에서는 이전부터 있는 공동판매제를 강화하여, 염가 매상으로 농민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북양' 정책에서는 면양 10만 두를 목표로 농가에 면양 사육을 강제했다. 이들 정책은 일본의 섬유산업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지만, 면양의 경우는 군사양모에 이바지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북선개척' 정책에서는 백두산 지역의 삼림 80만 정보의 벌채가 계획되어 이민장려의 미명 아래 화전민을 구축했다. 공업에 대해서는 슬로건만큼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공업화는 군수공업의 필요성과도 어울려 서서히 중공업에 비중을 옮겨가고 있지만, 그 전제조건은 192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182)

"(1935년 1월부터 시작된) 심전개발운동은 그 목표로 ①국체관념의 명징, ②경신숭조사상의 함양, ③보은·감사·자립정신의 양성을 내걸었다. 거기에는 유교와 함께 신도·불교·기독교의 공인종교의 부흥을 호소하면서, 실은 국가신도 체제에 그것들을 짜넣어 국체관념을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공인종교의 부흥을 내거는 한편으로, 종말을 부르짖는 신흥종교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로 임했다." "문화정치의 특징은 총독부 비판에는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도 마음의 자유는 묵인하려고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 탓도 있어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종교 유사의 단체'로 공인되었다. 따라서 그 공인은 문화정치 도래의 중요한 표지였다." "문화정치가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심전개발운동의 개시야말로 문화정치 종언의 표시로 보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문화정치의 시기는 말할거리가 많지만 불과 15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193-4)


7장 전시체제와 조선

"(중일전쟁 발발 후 가속화된) 대륙병참기지화란 '내선일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일만지(日滿支, 일본·만주·중국) 블록의 전제조건이었으며, 조선은 '제2의 내지' '내지의 분신'이 되었다. (1936년 8월 5일, 조선총독에 취임한) 미나미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기치와 더불어 이제까지의 '내선융화' 표어를 진척시켜 '내선일체'로 하고, 차별 없는 조선을 맹렬하게 선전했다. 여기에 조선의 상층사회와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본제국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한 기대의 고조에는 일본제국의 강대성에 새삼스럽게 압도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기대를 팽창시킨 사람들에게는 기묘한 자존의식이 싹터간다. '내지'가 제일선의 지위에 있는 데 대해서 조선은 제이선의 지위에 있다고 하는 아(亞)제국의식이다. 이 의식은 식민지인이라는 것을 망각해 자기를 일본제국의 정식 일원으로 규정하고, '이등신민'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끝없이 '내지신민'에 근접해가려고 한다."(210-1)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벌써 그 반달 후인 7월 22일에 정보통제와 국가 관념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활동을 기초로 해서 중일전쟁부터 1년 후인 1938년 7월 1일, 총력전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개시된다." "이 운동은 연맹조직의 정비를 통해서 황국신민화를 추진하고, 근로보국의 정신을 앙양시켜 거국일치해서 시국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발족에 호응해서 1940년 10월에는 국민총력운동으로 개편되어 조직명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직역연맹하의 애국반에서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하여 국기게양, 궁성요배, 신사참배, '국어'장려, 근로봉사,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214-5)

#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결정한 기본국책요강에 기초해 신체제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에 창립된 일본의 관제 국민조직

"(1939년 11월 10일, 개정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의 의도는 혈통지상주의의 조선적인 가(家)제도를 파괴해 일본적인 이에(家) 제도를 이입하고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의해 조선인을 포섭하려는 것에 있었다. 이미 시작되고 있던 지원병제나 시행예정의 징병제에 의해 조선인은 황군의 일원이 되지만, 황군은 문자 그대로 천황의 적자다. 일본어를 말하는 것은 물론 성명도 일본풍이 아니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가제도를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적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미나미 지로는 '내선결혼'도 이제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선전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통해서 표창도 거행하고 있다." "결국 (신고를 마친) '설정 창씨'를 한 조선인은 80퍼센트 이상이 되었다. 창씨 소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폭풍과 같은 떠들썩함이었지만 20퍼센트의 조선인은 압력을 뿌리쳤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고 해도 조선 호적을 폐지해 일본 호적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220-1)

"당시 '내선일체'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몸도 마음도 피도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철저 일체론'이고, 현영섭과 이광수가 대표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황도'를 생활원리로 하면서도 이체동심에 의해 단결하면 좋다는 입장에 선 '협화적 내선일체론'인데, 조선지식인 대부분이 이 입장에 서 있었다. 전자는 단순한 황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 일본어만을 이야기하고, 문화적으로도 일본 문화를 완전 수용해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은 일본인과 혈통을 같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한 놀랄 만한 조선민족말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후자는 황민화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은 조선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 같은 다문화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공체제론적이었고, 중화가 일본으로 대체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논의였다."(225-6)

8장 전쟁과 해방

"1941년 11월 28일에 한국독립당 주도의 임시정부에 의해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구체화되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보지를 균등'하게 할 것을 지향했다. 토지의 전면 국유화와 평등분배, 즉 토지혁명과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가 확인됨과 동시에 보통선거권, 남녀의 권리평등, 고등교육까지의 면비(免費) 수학 등이 선언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정책이 '선민(先民)의 명명(明命)'에 그 연원이 구해져, '성조(聖祖)의 지공분수(至公分授)의 법을 따르는' 것에 의해 선언되고 있는 점이다. 거기에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계승이 강하게 의식되어 그것을 진정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적 갈등을 한 18세기 이래의 실학의 전통이 생겨나고 있다. 본래 '대한민국'이라는 명칭도 왕조 시대부터 표방되고 있던 '민국' 이념을 계승한 것이었다. 중흥의 조라고 불린 정조는 '민국' 이념을 명확히 했고, 그 이념은 고종의 정치에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중화민국'의 단순한 차용이 아니다."(250-1)

"1945년 8월 14일 밤 여운형에게 정무총감 엔도 류우사쿠로부터의 회담 요청이 있었다. 다음 아침 6시 반경, 양자 사이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 무조건 항복을 내용으로 하는 포츠담선언을 수탁했기 때문에 치안유지에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이다. 여운형은 ①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3개월분의 식량 확보, ③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불간섭, ④학생·청년조직에의 불간섭, ⑤노무자의 국가 신건설에 대한 동원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을 붙였고, 엔도는 이를 무조건 승낙했다. 여운형은 좌파인 동시에 민중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치안유지를 부탁할 인물로 가장 알맞은 인선이었다."(261) "한편 총독부는 모든 기관에 명해 대량의 서류를 소각했다. 그리고 9월 8일 엔도 정무총감이 인천에서 하지 중장을 마중했고, 다음 9일에 항복문서의 서명이 총독부에서 제9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와의 사이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의 35년에 이르는 지배가 정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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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6-1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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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도 안보여서 도저히 구하지 못한 책입니다..읽고싶습니다. 알료샤ㅣ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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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이승한-조경달



'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경제학자 1인과 역사학자 2인이다. 먼저 칼럼니스트와 방송진행자로도 활동했던 고 정운영 선집이 10주기를 맞아 출간됐다. <시선>(생각의힘, 2015).







되짚어보니 내가 처음 접한 저자의 책도 칼럼집 <광대의 경제학>(까치, 1989),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까치, 1990)과 <시지프의 언어>(까치, 1993)이었다. '경제학 칼럼집'이란 말도 생소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밖에 <신세기 랩소디>(산처럼, 2002), 유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웅진지식하우스, 2006)까지 아홉 권의 칼럼집을 펴냈는데, 이번 <시선>은 그 중에서 고른 글들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경제평론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좌우를 막론한 최고의 논객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호명되었던 정운영을 오늘 다시 만난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펴내는 선집이다. 첫 번째 칼럼집 <광대의 경제학>(1989)에서부터 마지막 칼럼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2006)까지 모두 아홉 권의 칼럼집에서 저자의 사상을 잘 반영하면서도 여전히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글들을 가려 뽑은 것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포괄하는 르네상스적 비판정신과 곡조 있는 글쓰기의 정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재회의 감회가 없지 않다.







고려사 연구자 이승한 교수의 새책도 출간됐다. <고려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푸른역사, 2015). <고려무인이야기>(전4권) 이후에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에 매진하고 있는데, 이번 책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푸른역사, 2009), <혼혈 왕, 충선왕>(푸른역사, 2012)에 뒤이은 것이다. 제목의 '세계화 시대'는 물론 몽골 제국 시대를 가리킨다.


이 책에서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원 간섭기에 고려의 정치 사회를 주도한 부원배附元輩라는 세력이다. 몽골 제국에 체류하면서 무종과 인종 두 형제 황제를 옹립한 충선왕은 두 황제의 재위 동안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특히 인종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충선왕은 몽골 제국의 2인자에 가까웠다. 개인적으로 충선왕은 그렇게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양국 사이의 경계나 고려 사회의 정체성은 오히려 희미해져갔다. 달리 표현하자면 고려 사회가 몽골 세계 제국에 동화되어갔거나 세계화 시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해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놀라운 사실들을 꽤 발견하게 되는데, 달리 말하면 고려사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확인하게 된다.







재알 조선사학자로 특히 조선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조경달 교수의 책도 연이어 나오고 있다. 개론서에 해당하는 <근대 조선과 일본>(열린책들, 2015), <식민지 조선과 일본>(한양대출판부, 2015)가 최근에 나온 책들이고, <식민지기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선인문화사, 2012)가 근년에 나왔던 책.







근대 민중운동사가 주 전공분야였던 것으로 아는데,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을 다룬 <이단의 민중반란>(역사비평사, 2008)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책이었다. 이후에 나온 <민중과 유토피아>(역사비평사, 2009)는 절판돼 아쉬운데, 대체가능한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다시 출간되길 기대한다. 공저로는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열린책들, 2011)까지가 현재 소개된 저자의 책이다. 가장 편하게는 입문서격의 <근대 조선과 일본>부터 손에 들어도 좋겠다.


갑오농민전쟁 등 조선 민중사 연구로 유명한 재일 사학자 조경달 교수가 그간의 연구 결과를 집약해 서술한 통한의 한국 근대 통사. 19세기 중반 대원군 집권기부터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날까지 반세기에 걸친 역사를 정치 문화를 중심으로 통사적으로 기술하는 한편으로, 비교사적 차원에서 근대 한일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 근대 조선은 어떤 연유로 일본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근대 서구와 접촉하면서 비교적 원만하게 국민 국가로 전환한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국민 국가로의 전환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러했는가? 조경달은 한일 양국의 정치 문화의 차이에서 그 답을 찾는다.

15.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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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5-09-19 공감 (3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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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달 교수의 저작 <식민지 조선과 일본>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요약 및 평론

<식민지 조선과 일본>은 재일조선인 사학자 조경달이 1910년 한일병합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는 35년간의 식민지배 역사를 통사적 관점에서 고찰한 저작이다. 전작인 <근대 조선과 일본>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단순한 제도사나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식민 권력의 작동 양식과 조선 사회 내부의 사상적·정치문화적 충돌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1. 내용 요약

저자는 35년의 지배기를 크게 세 국면—1910년대 무단통치, 1920년대 문화통치, 1930~40년대 전시 총동원 체제—으로 나누어 살핀다.

첫째, 1910년대 무단통치기다.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 제도를 통해 한반도를 병영국가화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원천 봉쇄했다.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 식민지적 경제 재편이 강행되었고, 전통적인 정치 참여의 통로를 잃어버린 민중의 불만은 응축되었다. 이 억압 구조의 균열을 폭발시킨 것이 1919년 3·1 운동이다. 저자는 3·1 운동을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표출된 전통적 민본주의와 근대적 민족자결주의의 결합으로 파악한다.

둘째, 1920년대 문화통치와 사회운동의 분화다. 3·1 운동에 충격을 받은 총독부는 유화책을 취하며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하는 분열책을 구사했다. 조선 내부에서는 물산장려운동 등 실력양성론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유입되었다. 이 두 갈래는 1927년 신간회 결성이라는 민족협동전선으로 이어졌으나, 내적 이념 갈등과 일제의 탄압으로 해소에 이르렀다. 한편, 산미증식계획 등 수탈적 농정으로 농촌 공동체는 붕괴하고 대규모 해외 이주 및 도시 유민화가 가속화되었다.

셋째, 1930년대 이후 전시 총동원과 <내선일체>의 광기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 속에서 총독부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신사참배,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며 조선인을 천황의 군대로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리 부여 없는 완전한 동화는 모순이었으며, 극단적인 차별과 강제연행, 징병·징용 속에서 조선 민중은 유린당했다. 지식인층 상당수가 체제에 협력하고 굴복해 간 과정과, 국내외에서 지속된 무장투쟁 및 지하운동의 긴장 속에서 1945년 8월 종전을 맞이한다.

2. 비판적 평론

조경달의 통사가 지닌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정치문화>라는 렌즈를 통한 심층적 접근이다. 저자는 조선 민중의 행동 양식 바닥에 흐르는 <유교적 민본주의>와 일제가 이식하려 한 근대적 규율권력 사이의 본질적 괴리를 짚어낸다. 조선 민중에게 총독부의 법치주의는 도덕적 정당성이 거세된 자의적 폭력에 불과했으며, 민중의 저항은 단순한 민족의식뿐 아니라 부당한 통치자에 항거하는 유교적 도덕경제의 발로였다는 설명이다. 이는 식민지 시기 민중운동을 교조적인 계급론이나 단순 민족주의 서사에서 구출해 낸 성과다.

또한 피해-가해의 평면적 구도를 넘어, 식민 권력의 폭력이 지식인과 대중의 내면에 남긴 상흔과 굴절을 응시한다. 친일 협력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지식인들의 고뇌와 논리를 파헤치며 식민지 지배의 본질인 <구조적 폭력>을 규명하려 한 점은 역사적 엄밀성을 더한다.

다만 한계 역시 존재한다. 첫째, 저자가 설정한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틀이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식민지기 복잡다단한 근대적 주체 형성 과정을 과도하게 단일한 전통 범주로 환원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당시 민중이 받아들인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근대 대중문화의 수용 양상을 전통적 심성의 연장선으로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둘째,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서 산업화나 제도적 인프라 형성 등 경제적 구조 변동의 세부 지표를 다루기보다는 지배-피지배의 이념적 마찰에 방점을 둠으로써 물질적 조건의 변화를 다소 앙상하게 다룬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가 주입한 근대성이 왜 한반도에서 뿌리 깊은 상처와 왜곡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편협한 민족주의적 감상주의와 제국주의적 미화론 모두를 경계하며, 지배와 복종의 심연을 냉철하게 직시한 균형 잡힌 통사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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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달 (2015) — 요약과 평론

조경달(趙景達) 지음 · 최혜주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5년 · 316쪽

1. 저자와 책의 문제의식

조경달은 195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역사학자로, 지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 근대사와 한일 비교사상사를 연구하였다. 특히 조선의 정치문화, 유교적 민본주의, 민중운동, 식민지 지배와 저항의 관계를 연구해 왔다.

은 2013년 일본 이와나미서점에서 출판된 의 한국어 번역서이다. 앞서 출판한 의 후속편으로, 1910년 한국병합에서 1945년 해방까지 35년의 식민지 역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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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심 문제는 단순히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지배했으며 조선인이 어떻게 저항했는가에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정치문화와 민중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조선인은 식민지 근대라는 새로운 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조경달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과 억압을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조선인을 수동적인 희생자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조선인들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종교운동, 농민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응하였다.

그의 역사 서술을 관통하는 특징은 국가와 지식인만이 아니라 민중을 역사적 행위자로 본다는 점이다.

2. 무단통치: 식민지 국가의 폭력적 출발

1910년 병합 이후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제도를 중심으로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총독은 군사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며, 조선인에게는 일본 본토 주민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토지조사사업과 산업정책은 근대적인 행정제도와 경제적 기반을 정비했지만, 동시에 식민지 국가의 재정 확보와 일본인 자본의 진출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조경달의 중요한 관점은 근대적 제도의 도입이 곧 조선인의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대적 행정, 경찰, 교육, 경제제도가 등장했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권력은 일본 제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민중은 근대국가의 행정적 통제를 경험하면서도 그 국가의 주권자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의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3. 3·1운동: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1919년 3·1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정치문화가 변화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운동의 출발에는 종교 지도자와 민족대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실제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것은 학생, 농민, 상인, 노동자 등 광범위한 민중이었다.

조경달의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운동의 주체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의 민본주의가 백성을 정치의 근본으로 여기는 사상이었다면, 3·1운동에서는 민중이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집단적 주체로 등장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근대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볼 수는 없다. 민족, 계급, 종교, 지역에 따라 운동의 목적과 정치의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일본의 지배체제를 즉각 무너뜨리지 못했지만, 통치방식의 변화를 강제하였다.

동시에 일본 사회에도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4. 문화통치: 유화정책인가, 지배기술의 발전인가

3·1운동 이후 일본은 종래의 무단통치를 수정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하였다.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개편하고, 언론과 교육에 제한된 공간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문화통치는 식민지 지배의 포기가 아니었다.

정치적 저항을 보다 유연하게 관리하고, 조선 사회의 일부 지도층을 식민지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실력양성운동, 교육운동, 경제적 자립운동이 확대되었다.

조경달은 이런 운동을 단순히 독립운동과 친일협력이라는 두 범주로만 구분하기보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대응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실력양성론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경제적·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더라도 일본이 정치적 주권을 허용하지 않는 한 식민지의 기본 구조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민중운동의 분화

1920년대 조선 사회에서는 민족운동이 다양하게 분화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교육, 산업, 문화운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려 했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해방을 강조하였다.

두 운동의 관계는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였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공동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조경달이 강조하는 중요한 문제는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의 관계이다.

식민지 조선의 농민과 노동자에게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중요한 목표였지만, 독립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억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민족적 독립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화와 사회적 권리의 확대도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식민지 역사를 민족지도자들의 정치활동 중심으로 설명하는 서술을 보완한다.

6. 식민지 근대화: 발전과 지배의 모순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제5장 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는 철도, 공장, 도시, 학교, 근대적 행정제도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근거로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되었다.

조경달의 접근에서는 근대화라는 현상 자체와 그 성과가 누구에게 돌아갔는가를 구분해야 한다.

산업이 성장하더라도 조선인에게 정치적 권리가 없다면 그것을 자율적인 국민경제의 발전과 동일시하기 어렵다.

또한 농민의 생활, 계급 간 불평등,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제적 격차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조경달의 관점은 식민지기에 근대적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식민지 권력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화는 반드시 민주화나 해방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적 기술과 제도가 억압적 국가권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경험은 근대화와 인간의 자유가 서로 다른 역사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7. 재조 일본인과 식민지 사회의 불평등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 즉 재조 일본인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이다.

식민지 사회에는 일본인 관리와 군인뿐 아니라 상인, 교사, 기업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사회적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과 비교하면 제국의 국민이라는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도시에서 생활하더라도 주거, 교육, 취업, 사회적 대우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식민지 지배가 국가 간의 지배관계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재생산되는 사회적 위계질서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식민지주의를 이해하려면 총독부의 정책뿐 아니라 일반 일본인이 조선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했는지도 연구해야 한다.

이는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군부나 일부 정치지도자에게만 돌리는 일본의 역사인식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8. 전시동원과 내선일체: 동화정책의 모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전시동원체제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인에게 일본 제국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강요하였다.

황국신민화 교육,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노동력과 병력 동원 등이 이 시기에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충성과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일본인과 동등한 정치적·사회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즉 조선인은 제국을 위해 희생할 의무는 있었지만 제국의 운영에 참여할 권리는 없었다.

조경달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지식인들의 전쟁협력과 일반 민중의 대응을 함께 다룬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협력과 저항을 지나치게 단순한 도덕적 범주로 구분하지 않는 일이다.

일부 지식인은 일본 제국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생존과 강제동원의 압력 속에서 타협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협력행위를 강제된 생존전략으로 정당화할 수도 없다. 특히 자발적으로 제국주의 이념을 선전한 지식인들의 책임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9. 해방: 식민지의 종말과 미완의 민족해방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은 조선인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통일된 독립국가의 즉각적인 수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진주, 분단과 냉전질서의 형성은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만들어냈다.

조경달의 식민지사 서술을 더 넓게 읽으면, 여기에는 중요한 역설이 존재한다.

조선 민중은 35년 동안 민족의 자결과 독립을 추구했지만, 해방 이후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다시 국제정치의 강력한 제약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가 끝났다고 해서 민중의 정치적 자기결정권이 자동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10. 평론: 조경달 역사학의 공헌과 한계

첫째, 민중을 역사적 주체로 복원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공헌은 식민지 역사를 일본의 통치정책과 한국 민족지도자의 독립운동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민, 노동자, 여성, 종교집단 등 다양한 사회집단의 움직임에 주목함으로써 식민지 사회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특히 조경달의 오랜 연구주제인 유교적 민본주의와 근대 민중운동의 관계는 주목할 만하다.

조선의 근대적 정치의식은 단순히 서양이나 일본에서 수입된 사상의 결과가 아니라, 조선 내부의 정치문화와 만나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근대화를 외부의 충격에 대한 수동적 반응으로 이해하는 역사관에 대한 중요한 비판이다.

둘째, 식민지 근대화론에 구조적 문제를 제기한다

조경달은 근대적 산업과 제도의 발전이라는 현상을 정치적 자유 및 민족적 자기결정의 문제와 구분한다.

이러한 관점의 강점은 경제성장 지표만으로 식민지 지배를 평가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데 있다.

다만 경제적 성과의 구체적인 규모, 조선인 내부의 계층별 수혜와 손실, 해방 이후 경제발전과의 연속성을 엄밀하게 평가하려면 계량경제사 연구와의 대화도 필요하다.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인정하는 일과 식민지기의 경제적 변화를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셋째, 유교적 민본주의의 해석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조경달의 사상사적 접근에는 독창성이 있지만, 민본주의에서 근대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위험도 있다.

전통적인 민본주의에서 백성은 정치의 근본이었지만, 반드시 주권자였던 것은 아니다.

반면 근대 민주주의는 국민이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며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는 원칙에 기초한다.

두 사상 사이에는 연결 가능성과 함께 중요한 단절도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의 전통적인 민중의식이 근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전통의 지속뿐 아니라 새로운 사상의 유입, 사회경제적 변화, 식민지 경험 자체가 만들어낸 변화도 함께 분석해야 한다.

넷째, 일본인과 조선인을 단일한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식민지 사회 내부의 다양한 행위자를 보여준다.

이는 모든 일본인을 동일한 가해자로, 모든 조선인을 동일한 피해자로 이해하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설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회적 다양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식민지 권력의 비대칭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 사이의 관계가 복잡했다는 사실과 제국주의 지배가 구조적으로 불평등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한다.

11. 종합 평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누구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

조경달의 은 식민지 역사를 정치적 지배, 사회경제적 변화, 민중운동, 사상사의 네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통사이다.

이 책이 제기하는 핵심적인 역사학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근대화가 이루어진 정치적 지배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조경달의 역사학은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하는 방향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책을 보다 생산적으로 읽는 방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평가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조선 민중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고, 어떤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었으며,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근대적 변화를 만들어낸 유일한 주체였다는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조선인들은 식민지 지배 이전부터 자신의 사회를 개혁하려 했으며,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근대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결국 이 책의 중요한 가치는 식민지 조선을 일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변화된 사회가 아니라, 제국의 억압과 조선인의 대응이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형성된 역사적 공간으로 이해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히 조경달의 전작 과 연결해서 읽으면, 조선의 근대적 정치문화가 1910년 이전에 어떻게 형성되었고 식민지 시기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연속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는 일본이 조선에 무엇을 남겼는가의 역사만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조건 아래에서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했으며, 그 시도가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냈는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조경달의 연구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 논쟁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평가한다.

자료 확인: 일본어 원서의 출판사 소개와 8개 장의 상세 목차, 한국어 번역서 서지 및 소개를 토대로 재구성하였다. 책의 논지에 대한 해석과 비판은 별도의 평론이며, 원문 전체를 대조한 장별 정밀 요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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