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은이),박유하 (옮긴이)웅진지식하우스2005-05-24
원제 : 人生の しんせき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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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구라키 마리에는 두 아들 중 정상인 둘째아이는 남편에게, 자신은 지체아를 맡아 이혼한다. 남편과 함께 사는 둘째아이마저 사고로 다리를 못쓰게 되자, 이들 부부의 재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두 아이들은 멀리 떨어진 바닷가 낭떠러지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갑자기 찾아든 이 극한의 슬픔은 마리에로 하여금 몇 번이고 자살에의 유혹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살이 자신의 기억 - 아이들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는 - 을 말살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생을 이어간다. 아이들의 죽음 이후의 마리에의 삶은 이 세계에서 약한자로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고통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전개된다.
등단 5년 후 탄생한 장남이 머리에 이상을 가지고 태어난 일은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전환점이 된다. 이 무렵부터 정신 지체아로서 살아가야 했던 장남과의 공생(共生)을 주제로 한 작품군이 그의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이룬다. <인생의 친척>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이 소설 역시 장애아를 주요한 테마로 사용했다.
목차
제1장 ~ 제11장
후기를 대신하여
작품 해설 - 구원의 문학
연보
책속에서
그런데 집 앞에서 만나 출발을 하고 보니,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하는 아사오도,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도, 각기 햇빛에 탄 얼굴에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이제부터 내게 해야 될 이야기에 대해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자가용 차라는 것이 쉽게 보기 힘든 소유물이었던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어, 남의 차를 타기만 하는, 말하자면 그리스에서 경멸을 섞어 추종자를 형용했다고 하는, '테이블에 앉아 손을 씻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하는 인간' 같은 구석이 있는 나는, 이런저런 말을 붙여 보다가, 그들의 무뚝뚝함에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 본문 33쪽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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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郞)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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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일본 에히메 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사르트르, 카뮈 등의 영향을 받아 대학 재학 중에 소설을 발표했고, 1958년 「사육(飼育)」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일본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당대 현실을 개인과 역사의 차원에서 깊이 성찰하며 일본의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반전 평화 운동에 힘썼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의 교육 과정을 배경으로 쓴 『나의 나무 아래서』는 자신의 유소년기를 추억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를 탐구하는 책으로, 지식인이자 아버지로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1964년 신초샤 문학상, 1967년 다니자키 상, 1984년 가와바타야스나리 문학상 등 유수한 상을 받고,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2012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을 받았다. 2023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접기
수상 : 1994년 노벨문학상, 1973년 노마문예상, 1958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 <읽는 인간>,<새로운 사람에게>,<나의 나무 아래서> … 총 231종 (모두보기)
박유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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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 1남3녀의 막내로 자랐다. 어렸을 때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언니들 영향으로, 10대 이후엔 고독했던 탓에, 책과 음악을 사랑했다. 당시로서는 남들보다 일찍 유학, 대학을 일본에서 나온 것이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일본인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일본인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전공으로 일본문학과를 택한 건 그 반대로 ‘일본인’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학부 때는 클래식 음악과 서양/고전 영화와 함께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른 대학과 달리 세계사 시험이 부과되던 게이오 대학을 선택해 공부했지만, 졸업 후엔 존경하던 교수님을 따라 도쿄 대학에서 잠시 보냈고, 마지막 유학 기간은 결국 근현대문학이 강했던 와세다 대학에서 보냈다. 대학원 때는 공부와 육아와 아르바이트의 트라이앵글 스케줄을 오가다 건강을 상하기도 했다. 귀국 후엔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일본현대문학 번역시리즈를 만들었다.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일본의 지성을 소개하는 작업을 하면서 이어진 오에 겐자부로, 가라타니 고진 등 일급 지식인들과의 교류는 이후 중요한 인적·지적 자산이 되었다.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관심에서 썼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 2000, 2004년에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로 개제)의 저변에는 근대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를 아시아/여성 시각에서 비판했던 학위논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단행본은 김석희 옮김, 문학동네, 2007)가 있었다.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뿌리와이파리, 2005/2015)는 한일 양국 민족주의 비판을 강하게, 권력화되는 중이던 ‘진보’ 비판을 소심하게 드러낸 책이었다.
『화해를 위해서』에서 시도한 말걸기는 한국에서는 실패, 8년 후 다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집필하게 된다. 언론의 호의적인 반응에 안도했으나 이후 일본어판 출간과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교류에 대한 지원단체의 경계로 인한 고소고발사태가 벌어지고, 이후 11년에 걸친 재판 기간 동안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맞게 되지만, 함께 화살을 맞고 막아준 이들이 있어 법정의 굴레를 벗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예정에 없었던 여러 권의 위안부 문제/법정 관련 책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뿌리와이파리, 2018),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뿌리와이파리, 2018),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뿌리와이파리, 2020), 『역사와 마주하기―한일 갈등, 대립에서 대화로』(뿌리와이파리, 2022)와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가 패전 후 돌아간 일본인들에 대한 일본어판 책 『귀환문학론 서설―새로운 탈식민지화로』(2016),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조선으로 돌아온 ‘일본인처’에 대한 일본어 논문을 썼다. 문학과 역사와 사상 ‘사이’를 배회하다 보이는 것들을 공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작업이 제국주의와 냉전이 동아시아에 남긴 상처의 치유와 우애 모색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2022년 정년퇴직 후엔 끝나지 않는 재판을 기다리며 가급적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냈다. 민사재판이 종료된 2025년부터는 미국 중부 도시와 시골에서 기거하며 방랑생활을 했다. 접기
최근작 : <11년>,<제국의 위안부>,<역사와 마주하기> … 총 51종 (모두보기)
오에 겐자부로(지은이)의 말
저의 소설은 픽션으로 구상된 이야기 속에 현실의 제 자신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제 자신 그 자체는 아닌 인물을 도입시키는 방식을 취합니다. 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몇 년 지나, 저희 가정에 지체 장애를 지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동시대에 실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장애아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제 문학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 소설의 세계가 좁아지고 이야기의 전재가 한정되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애아를 가진 아버지를,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아 소설에 도입함으로써 동시대의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근본적인 과제에 대해 모두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현실적인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저는 소설의 기법에 대해 독자적인 궁리를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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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죽음 뒤 부부의 태도가 확연히 다른 점이 흥미롭다. 남편은 자학/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데 비해 ‘마리에‘는 그 고통을 짊어지고 말 그대로 ‘성녀‘가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묘사 모두 불편하다. 모성의 신화는 이렇게 재생산되는가? 오에의 작품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잠자냥 2019-05-24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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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어떤 작품을 집어들어도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역자 때문에 별 한 개를 깐다..

생쥐스뜨 2014-07-0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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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이와 사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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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히카리는 오에 겐자부로와 이타미 유카리 사이에서 1963년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날 때부터 두개골에 문제가 있어 그쪽으로 뇌수가 흐르는 뇌헤르니아 증상으로 인한 장애를 가져야 했다. 젊은 오에 겐자부로는 아기가 평생 정신과 신체 일부에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조건으로 수술을 해서 살려야 할지, 그냥 방치해 서로 불행한/불행할 것처럼 보이는 생을 일찌감치 포기할 지 선택해야 했다. 당시 진퇴양난의 번민과 방황은 1964년 작품 <개인적인 경험>에 그대로 실려 있다.
결국 히카리와 함께 사는 생을 결정한 겐자부로는 두 번에 걸친 수술과 계속된 치료로 거의 잃어버렸던 히카리의 시력을 회복하고, 간질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평생 복용하면서 특수학교를 졸업,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하기 위하여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겐자부로의 책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누이동생 나츠미코와 남동생 사쿠라마도 자신의 생활 일부를 양보하는 등의 영향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장애인이 집안에 있으면, 당연하겠지만 장애인도 사회적 약자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약자를 좀 더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장애인, 이 가운데 특히 히카리 같은 정신지체가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순수한 심정을 갖고 있으리라는 일종의 선입견이나 바램을 가지고 있기 십상이다. 물론 조금은 그렇다. 반면에 뇌의 성장과 발달이 늦어 이미 큰 몸집을 하고 있을지언정 여전히 양보나 포기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힘든 고집 같은 것을 부려 가족들을 화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즉 장애가 있음으로 해서 피할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추함과 뒤틀리고 비뚤어진 마음도 장애아만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선함과 마찬가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뒤틀리고 비뚤어진 것을 오에 겐자부로는 ‘독나무’라 부른다. 나무는 나무이되 독이 든 나무. 정신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건 독나무를 품고 사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인생의 친척>은 허구이다. 그런데 특히 오에 겐자부로가 쓰는 허구는 지극한 사소설적 경향을 띄고 있는 작품이 많아서 소설 안에 실제 자기 가족의 경험을 담기도 한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히카리와 같은 특수학교에 다니는 친구 어머니인 마리에 여사를 등장시키는데, 이 인물이 실제로 생존했으며 책에 나온 대로 살다가 간 실제 인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독자는 그렇게 믿어도 좋고, 나처럼 틀림없이 허구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아마도 허구일 터이지만.
일본에서 이름이 꽤나 난 ‘나’ K가 구라키 마리에 씨와 친해진 일은 K, Kenzaburo가 도쿄 스키야바시 공원에 제법 큰 텐트를 설치해놓고 단식투쟁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물론 3일을 기한으로 한 단식투쟁이라서 처음부터 죽음을 불사한다는 의미는 없었지만 한국의 젊은 시인을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 사형을 선고해버린 처사에 항의 의사를 이런 방식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정말 있었던 퍼포먼스. 당시 한국의 젊은 시인은 실제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시인 김지하였다. 당시 오에 겐자부로는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사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시를 쓰다 사형을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아마도 조금쯤 부러워했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때 구라키 마리에 씨는 재일한국인 청년 세 명과 함께 겐자부로의 텐트에 자원봉사자로 등장해 처음으로 친하게 된 것. 텐트에 들어와 슬그머니 식물성 영양 음료, 걸쭉한 상태로 보아 음료라기보다 죽에 가까운 물질이 오에의 목을 타 넘어가게 만들기도 했단다. 뭐 보통 단식투쟁은 이렇게 하는 거라나?
당시 K의 맏아들 아카리는 산겐자야 근처 파랑새 장애아 학교 고등부에 다니고 있었고, 마리에의 큰아들 무산은 중등부였는데, 장애 성격이 비슷하고 둘 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교사가 두 학생과 학부모를 특별히 소개하여 친하게 지냈다. 물론 일본의 경우도 학생과 학부모 할 때의 학부모는 엄마들을 말한다. 무산에게도 동생이 있다. 미치오. 귀엽게 생기고 머리도 총명해 거의 모든 이들로부터 쉽게 친해지고 좋은 인상을 받는 아이.
이제부터는 무산의 엄마 구라키 마리에에게 집중해야갰다. 소小부르주아의 딸이다. 아버지는 은퇴한 경영자였는데 일찍 죽으면서 마리에에게 상당한 현금성 자산과 이즈 고원에 있는 별장(그리고 다른 부동산 한 건)을 마리에에게 남겼다. 똑똑한 머리에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미국에서 근무하게 되어 뉴욕에 살며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건 아니라서 음악은 포기하고 그것만큼 사랑했던 학문인 영문학을 선택해 특히 <현명한 피>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를 공부한다. 하필이면 내가 무지하게 싫어하는 작가를.
마리에는 이혼 여성, 돌싱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 마리에의 이혼이 남편과의 불화나 가정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일종의 탈출의지로 행해진 의사결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평생 천주교에 천착했던 플레너리 오코너. 글쎄 나는 많고 많은 작가 가운데 오코너를 전공했다는 것도 겐자부로가 제시한 한 가지 팁으로 여겼다. 마리에는 무산을 출산한 일을 무엇(절대자?)이 자신에게 속죄를 요구한 일이라 생각했고, 이 속죄를 위한 생활에 애꿎게 남편과 정상아인 미치오까지 끌여들일 필요는 없다고 믿었던 거였다. 물론 이혼을 협의할 때 남편에게 이걸 노골적으로 내밀지는 않았겠지만, 한편으로 황당하게 이혼당하고 있는 남자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 결국 마리에가 무산과 함께 살고, 남편은 귀엽고 공부 잘하고 사교성 있는 미치오를 데리고 나가 집을 얻었다가, 한 여자를 만나 다시 가정을 이루었다.
말과 뜻은 혼자 무산을 키워보려 했겠지. 무엇을 속죄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요코하마에 있는 여자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마리에가 진짜로 혼자 힘만 갖고 무산의 뒷바라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친정엄마의 보조를 받아야 했는데, 친정엄마가 조금씩 치매 기운을 보이자 전남편과 미치오가 매주는 아니지만 주말에 들러 무산과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당연히 둘째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겠지. 이렇게 살다가 하루는 미치오가 학교에 가다가, 버스에 올랐는데 평소 미치오를 괴롭히던 중학생이 물론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불쑥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미치오가 기겁을 했고, 그래서 버스에서 뛰어내려 앞뒤 가리지 않고 길을 건너다가 정상속도로 운행하던 화물차에 치었다. 미치오의 두뇌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하반신은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됐고, 새엄마는 그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이제 무산에 이어 미치오, 그리고 혼자 남을 전남편까지 마리에 씨가 온전히 돌봐야 할 그래서 속죄에 대한 보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살았다. 날 때부터 지체가 있는 무산은 세상 자체가 그렇거니 살 수 있었지만 미치오는 그러지 못했다. 여기에 높은 지능까지 있어서 형인 무산을 세뇌, 혹은 가스라이팅을 했을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겠지. 그러던 어는 날. 아이들이 사라졌다. 힘이 좋은 무산이 미치오의 휠체어를 밀고, 미치오가 밝은 표정으로 행인들에게 기꺼운 친절을 유도하며,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물려준 이즈 고원의 별장으로 갔다. 이즈 고원은 전형적인 리아스 식 해안.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곧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원래는 무산이 미치오가 탄 휠체어를 전속력으로 밀어 함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어야 했으나, 마지막에 미치오가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무산은 휠체어에서 떨어져 양쪽 팔로 귀를 막은 상태로 그대로 돌진, 먼저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미치오가 자기 힘으로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가다가 바퀴가 돌인지 나무뿌리인지에 걸려 멈추자, 뉴턴의 2법칙에 의하여 몸을 앞으로 기울여 휠체어와 함께 역시 벼랑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마리에와 전남편 앞에 무엇이 남았을까? 슬픔과 고통이겠지. 자식이 죽으면 부부는 많이 이혼한단다. 슬픔과 고통을 서로에게 쏟아 부어 서로 견딜 수 없어 헤어지고 마는 거겠지. 그러나 이 커플은 그러지 않았다. 아빠는 직장을 때려 치우고 아들의 죽음의 순간을 연상하며 서서히 폐인이 되어갔고, 엄마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아들들의 빈 곳을 채우려 하지만 그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아 아들 둘을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잃어버린 엄마 마리에 여사의 뒤를 좇는다. 겐자부로 부부와 장애아 부모라는 공통점이 이 모색에 더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지식인. 먹물 오에 겐자부로. 이이는 자식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이츠의 시와 발자크의 소설과 플래너리 오코너의 신앙과, 마리에 여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멕시코 시골농장을 거론하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 종말 전쟁>까지 인용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지 않는 말이지만 naïve한…”
이 묘사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번째 나오는 구절이다. 잘난 척하는 방면에서는 한 치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악마처럼 거만한 오에 겐자부로.” 이건 내가 아마 네번인가 다섯번째로 이 작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연히 좋은 의미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별점 4개는 아깝다. 그렇다고 5개까지는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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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8-19 공감(19)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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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첫째 아이.. 그리고 정상으로 태어난 둘째 아이를 가진 여인..
여인은 자신이 첫째 아이를 맡고,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이혼을 했다.. <장애아>의 탄생이 자신에게 어떤 <속죄>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그 <속죄>를 위한 생활에 남편과 정상아인 둘째 아이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만의 오붓한 생활을 꾸려나가던 도중, 둘째 아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그 여인은 (둘째 아이의 사고로 다시 이혼을 하게 된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다지 없음에도) 다시 남편과 장애아가 된 둘째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두 아이가 실종되어 주검으로 발견된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첫째 아이가 바다 위 절벽 낭떠러지에서 자진하여 떨어지자, 둘째 아이 역시 휠체어를 스스로 밀고 첫째 아이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지인이었던 소설가이자 역시 장애아의 아빠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것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오에 겐자부로는 그녀가 혼란을 겪어나가면서도 말 그대로 <완전한 인간>으로 회복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요며칠새 동네 도서관에서 세월호 관련 지난 기사들을 리뷰하면서, 새삼 <망각>의 힘에 놀라워한 적이 있다.. 지난 4, 5월 연일 티비나 인터넷에서 세월호 뉴스를 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또 아이들을 버린 선원들과 아무리 봐도 비상식적인 구조로 일관했던 해경과 언딘의 유착, 그리고 책임 회피에 급급한 관료들과,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 듯 관련자들을 경질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VIP에 이르기까지 무책임의 체계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얼마나 분노했는가..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 꽃다운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보며 몇 번이나 <미안해.. 절대 잊지 않을께..>하며 한숨을 쉬었는가..
하지만 정상적인 애도/상의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 사건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교묘한 미디어의 프레임의 정치에 우리는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무기력한 멜랑콜리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의 이야기들을 다시 보면서,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그리고 여전히 실종상태인 아이들의 가족들을 새삼 떠올렸던 것은 바로 이들이야말로 결코 이 사건을 잊지 않을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들의 아픔을 감싸안으며, 또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말인가.. 이 시스템의 동조자이자 방관자인 우리들이 과연 이들의 아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구조작업의 차질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으로, 또 현재 (너무도 부조리해 보이는) 재판과 국정조사로 2차, 3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에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있을지 실로 막막하기만 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책을 들여다보고, 또 애도에 대한 논의들을 떠올려봐도 입이 얼어붙는다.. 오에의 이 소설을 읽었던 건 어쩌면 일종의 도피였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감당해내기 어려운 그런 아픔을 겪고서도 치유가, 아니 회복이 가능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 메시지는 비록 문학이지만, 아니 문학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도록 하면 된다, 속죄받을 수 없는 후회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순간에 병행시켜, 다시 한 번 그 사건을 기억하는 훈련을 하면, 무산, 미치오와 행복하게 살던 현재도, 거기에 겹쳐져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마라! 그것에 의해 적어도 세 종류의 현재가 자신의 경험이 된다, 하고 조언해준 것입니다.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신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의 고통으로서, 고통스러운 채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마치, 정신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듯한 회복의 과정인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과 복구>의 과정을 그녀는 <집회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밟아나가고 있다.. 물론 그것으로 외상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정신분석의가 말하는 것처럼 외상의 완결에는 종착지가 없고, 따라서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 따라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인생의 친척Parientes de la vida>은 멕시코의 한 농민공동체에서 성녀와 같은 삶을 살며 주위의 칭송을 받던 그 여인이 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자신의 마지막 생을 담은 기록영화의 제목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피가 통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살아가며 고난을 함께 하는 동안, 인디오나 혼혈 여자들이 진짜 친척처럼 자신을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받아들여 주었던 것에 대한 기쁨이자 만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오에는 소설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어떤 처지의 인간에서도 따라다니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으로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플루타르코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섣부른 해석을 경계한다.
어쩌면 오에가 말한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로서 인간 세계를 표현하는 일, 그것을 intelligible한 것으로서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니 곧잘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아마 레비가 말한 <증언>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잔여remnants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가 말한 것처럼, 결국 작가의 글쓰기는 마리에의 아픔을 감지한, 즉 "나 자신의 이야기로서 납득한" 행위이자, 인간의 아픔을 감지하는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기도>와 같은 것이라는 해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런데, 바로 그 역자가 요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라니.. 도대체 그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감지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정말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씌어진 글이 결코 자신의 사상/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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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스뜨 2014-07-0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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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인생의 친척
알라딘 중고 서점을 돌다. 우연히 발견했다.
그냥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그를 난 이 책을 통하여 `오에 겐자부로`로 인식했다.
오에겐자부로는 독특한 이력이 있는 작가이다. 바로 장애아의 아버지라는 것... 가끔씩 그에게 장애아가 있는 것이 그와 그 가정에는 커다란 불행이었을지 모르지만 인류에게 커다란 행운인듯 하다는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을 하곤한다.
바로 그가 그보다 더 불행한 인생을 경험한 한 여인을 소설로 쓰고 있다. (과연 어떤 더 큰 불행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 여인의 집약된 불행이 소설 초반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절정을 향해 가는 과정이 일단 한번 충격을 받고 소설에 빨려 들어가게 했다.
그리곤 책을 손에 넣기 힘들었다.
유려한 미문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장르소설처럼 스토리의 전개가 긴박한 소설도 아니었지만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인생의 친척이란 제목은 정말 형편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상업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책을 완독하고 나서 과연 다른 어떤 제목을 나 책에 부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저자는 책에서 이 제목이 불행등을 뜻하는 제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행이 인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라면,
이 책을 읽을 수 밖에는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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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kkary 2014-12-0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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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인생의 친척
슬픔도 ‘인생의 친척’처럼 <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웅진출판사 / 1997
눈이란 정말, 무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기억 저편에 있는, 지금은 잊혀진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한 대목.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에 얼어 죽어갈 때, 유일하게 소녀를 지켜주며 위로했던 것은, 다름아닌 소담스레 내리는 눈이었다. 고 생각된다. 눈은 녹고 난 후의 지저분함과는 상관없이, 그 포근함과 순백의 깨끗함에서 정갈하다 못해 성스러운 마음까지도 갖게 한다. 그 성스러움은 현실과 괴리된 저 하늘 위의 무엇이 아니, 우리 곁에서 발 딛고 서 있는, 친근한 성스러움이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 어린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보살펴주며 치유해주는 것이다. 마치, 추운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성냥팔이 소녀를 어루만져주었던 눈처럼,
나에게 있어, ‘치유’, 또는‘성스러움’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는 아마도 일본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이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문학성은 익히 정평이 나 있긴 하지만, 그가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평생을 ‘장애아 문제, 핵, 공동체, 실존’등을 소재로 다루면서 인간의 구원을 희구하는 작품을 주로 썼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 대다수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문학이며, 어찌 보면 손쉬워 보이는‘죽음’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처절하고 힘들지만, 우리가 의무적으로도 살아내야 할 ‘생(生)’을 지향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마치 생(生)에 대한 간절한 기도문 같다.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애아는, 정상(이라고 말해지는)인에게는 상실된 근원적 영혼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지성의 비판자로, 동시에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강하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고통을 감지하고 또 그 고통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로서 오히려 보통 사람 이상의 존재로 설정된다. 이러한 점은 특히 <인생의 친척>에서 잘 드러나 있다.
“마리에는 갑자기 찾아온 슬픔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받아들인다. 언제까지고 감정에 얽매이기에는 생활이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나 괴로워서, 어느새 고통도 기쁨도 잊는 일에 더 많이 익숙해져 있는 우리와는 달리…. ”
이 작품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슬픔을 감당한 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설명에 걸맞게, 생(生)의 최대치의 불행을 경험한 한 여인의 고통과 그 극복의 과정을 깊고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우리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바닷가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 장애를 가진 두 아이의 유해 앞에서, 그 고통의 늪에서 몸부림치며 결국에는 구원을 얻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이들이 과연 왜 자살을 했는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으며 신을 원망하던 마리에가 “결국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구원을 얻게 되는 험난한 인생 여정이 펼쳐져 있다.
두 아들의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고통에 직면하여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살아가면서 죽은 아이들을 기억하는 ‘삶’을 선택한 어머니. 자식들이 죽고 난 뒤, 그녀는 평생을 살아온, 삶의 근원이다시피 한 일본을 벗어나 먼 타국인 멕시코의 농장에서 원주민들과 친구가 되면서 그들을 보살피며 봉사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멕시코의 농장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성녀(聖女)’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슬픔이나 고통은 평생 혼자서 껴안고 갈 수 없으며, 타인과 더불어 위로하고 위로 받으면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광활한 멕시코 농장의 들판에서 펼쳐진 영화 상영막을 통해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나오는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각인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그녀지만, 그녀 또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원하는 것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기억되기를…
그것은 “고통과 슬픔이 가득찬 인생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해낸 강인한 자들만이 누리는 축복”이며, 그로 인한 자기 승화이자 치유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슬픔(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삶에서 도피적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종교의 순례나 자기를 방기하다시피 발생하는 육체적인 쾌락을 통한 편력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절제와 희생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만 고통이 치유됨을 깨닫게 한다.
소설 속에서 마리에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스페인어‘Parientes de la vida’ 즉 ‘인생의 친척’은, 살아가는 데 있어 고난을 함께 하는 사이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중 화자가 발견한 플루타르코스의 저서의 문구처럼 어떤 처지의 인간에게도 쫒아다니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으로서의 슬픔”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는데… 어쩌면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아주 큰 슬픔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까? 보통의 경우는 갑자기 닥친 슬픔과 고난에서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리거나,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만큼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에 감사하며, 잊은 듯, 잊으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마다 각자 슬픔에서 헤쳐 나오는 모습들이 다르겠지만……. <인생의 친척>에 나오는 마리에의 모습은 정말, 너무 치열하고 숙연하며 성스러워서 감동적이다 못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
우리는, 우리의 생(生)에서, 결코 원하지도 않았고, 달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인 슬픔”을 만났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할까…. *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 1935년 일본 에히메 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지 편집을 하며, 시와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1954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57년 교내 신문 소설 현상공모에 <기묘한 일>로 입상한 후, 문예지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전후 가장 촉망받는 청년작가로 인정받는다.
등단 후 역동적 상상력을 토대로 일상의 경험을 통해 실존과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표현하되 이를 사회문제와 결합하는 특징을 지닌 작품들을 줄곧 발표해 온 그는, 아쿠타가와상(1958),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1985) 등 일본의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전후세대의 대표적 작가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1994년 <만연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개인적 체험>, <핀치러너 조서>, <'나의 나무' 아래서>, <인생의 친척>, <2백년의 아이들>, <체인지링>, <동시대게임>, <치료탑>, <레인 트리를 듣는 여자들> 등이 있다.
박유하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게이오 대학 국문과(일본문학)을 졸업하고, 이후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전공했다. 연구활동 이외에도 통역사로서 노태우 전 대통령, 다케시타 전 일본 수상 등이 참석한 정재계의 주요 회의 통역을 맡았고, 일본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한국어 강사, NHK 국제국 아나운서 등 일본 사회를 폭넓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1993년 귀국한 뒤 일본을 소개하는 작업의 하나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전 12권)>을 기획, 번역했다. 2007년 현재 세종대 일문과 교수이며 타자론, 탈식민지주의, 페미니즘,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 등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음>, <만엔원년의 풋볼>, <인생의 친척>, <풍장의 교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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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정 2008-07-0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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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구라키 마리에는 두 아들 중 정상인 둘째아이는 남편에게, 자신은 지체아를 맡아 이혼한다. 남편과 함께 사는 둘째아이마저 사고로 다리를 못쓰게 되자, 이들 부부의 재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두 아이들은 멀리 떨어진 바닷가 낭떠러지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갑자기 찾아든 이 극한의 슬픔은 마리에로 하여금 몇 번이고 자살에의 유혹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살이 자신의 기억 - 아이들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는 - 을 말살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생을 이어간다. 아이들의 죽음 이후의 마리에의 삶은 이 세계에서 약한자로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고통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전개된다.
등단 5년 후 탄생한 장남이 머리에 이상을 가지고 태어난 일은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전환점이 된다. 이 무렵부터 정신 지체아로서 살아가야 했던 장남과의 공생(共生)을 주제로 한 작품군이 그의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이룬다. <인생의 친척>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이 소설 역시 장애아를 주요한 테마로 사용했다.
목차
제1장 ~ 제11장
후기를 대신하여
작품 해설 - 구원의 문학
연보
책속에서
그런데 집 앞에서 만나 출발을 하고 보니,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하는 아사오도,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도, 각기 햇빛에 탄 얼굴에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이제부터 내게 해야 될 이야기에 대해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자가용 차라는 것이 쉽게 보기 힘든 소유물이었던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어, 남의 차를 타기만 하는, 말하자면 그리스에서 경멸을 섞어 추종자를 형용했다고 하는, '테이블에 앉아 손을 씻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하는 인간' 같은 구석이 있는 나는, 이런저런 말을 붙여 보다가, 그들의 무뚝뚝함에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 본문 33쪽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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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郞)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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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일본 에히메 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사르트르, 카뮈 등의 영향을 받아 대학 재학 중에 소설을 발표했고, 1958년 「사육(飼育)」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일본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당대 현실을 개인과 역사의 차원에서 깊이 성찰하며 일본의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반전 평화 운동에 힘썼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의 교육 과정을 배경으로 쓴 『나의 나무 아래서』는 자신의 유소년기를 추억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를 탐구하는 책으로, 지식인이자 아버지로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1964년 신초샤 문학상, 1967년 다니자키 상, 1984년 가와바타야스나리 문학상 등 유수한 상을 받고,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2012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을 받았다. 2023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접기
수상 : 1994년 노벨문학상, 1973년 노마문예상, 1958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 <읽는 인간>,<새로운 사람에게>,<나의 나무 아래서> … 총 231종 (모두보기)
박유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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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 1남3녀의 막내로 자랐다. 어렸을 때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언니들 영향으로, 10대 이후엔 고독했던 탓에, 책과 음악을 사랑했다. 당시로서는 남들보다 일찍 유학, 대학을 일본에서 나온 것이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일본인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일본인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전공으로 일본문학과를 택한 건 그 반대로 ‘일본인’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학부 때는 클래식 음악과 서양/고전 영화와 함께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른 대학과 달리 세계사 시험이 부과되던 게이오 대학을 선택해 공부했지만, 졸업 후엔 존경하던 교수님을 따라 도쿄 대학에서 잠시 보냈고, 마지막 유학 기간은 결국 근현대문학이 강했던 와세다 대학에서 보냈다. 대학원 때는 공부와 육아와 아르바이트의 트라이앵글 스케줄을 오가다 건강을 상하기도 했다. 귀국 후엔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일본현대문학 번역시리즈를 만들었다.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일본의 지성을 소개하는 작업을 하면서 이어진 오에 겐자부로, 가라타니 고진 등 일급 지식인들과의 교류는 이후 중요한 인적·지적 자산이 되었다.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관심에서 썼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 2000, 2004년에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로 개제)의 저변에는 근대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를 아시아/여성 시각에서 비판했던 학위논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단행본은 김석희 옮김, 문학동네, 2007)가 있었다.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뿌리와이파리, 2005/2015)는 한일 양국 민족주의 비판을 강하게, 권력화되는 중이던 ‘진보’ 비판을 소심하게 드러낸 책이었다.
『화해를 위해서』에서 시도한 말걸기는 한국에서는 실패, 8년 후 다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집필하게 된다. 언론의 호의적인 반응에 안도했으나 이후 일본어판 출간과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교류에 대한 지원단체의 경계로 인한 고소고발사태가 벌어지고, 이후 11년에 걸친 재판 기간 동안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맞게 되지만, 함께 화살을 맞고 막아준 이들이 있어 법정의 굴레를 벗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예정에 없었던 여러 권의 위안부 문제/법정 관련 책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뿌리와이파리, 2018),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뿌리와이파리, 2018),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뿌리와이파리, 2020), 『역사와 마주하기―한일 갈등, 대립에서 대화로』(뿌리와이파리, 2022)와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가 패전 후 돌아간 일본인들에 대한 일본어판 책 『귀환문학론 서설―새로운 탈식민지화로』(2016),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조선으로 돌아온 ‘일본인처’에 대한 일본어 논문을 썼다. 문학과 역사와 사상 ‘사이’를 배회하다 보이는 것들을 공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작업이 제국주의와 냉전이 동아시아에 남긴 상처의 치유와 우애 모색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2022년 정년퇴직 후엔 끝나지 않는 재판을 기다리며 가급적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냈다. 민사재판이 종료된 2025년부터는 미국 중부 도시와 시골에서 기거하며 방랑생활을 했다. 접기
최근작 : <11년>,<제국의 위안부>,<역사와 마주하기> … 총 51종 (모두보기)
오에 겐자부로(지은이)의 말
저의 소설은 픽션으로 구상된 이야기 속에 현실의 제 자신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제 자신 그 자체는 아닌 인물을 도입시키는 방식을 취합니다. 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몇 년 지나, 저희 가정에 지체 장애를 지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동시대에 실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장애아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제 문학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 소설의 세계가 좁아지고 이야기의 전재가 한정되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애아를 가진 아버지를,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아 소설에 도입함으로써 동시대의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근본적인 과제에 대해 모두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현실적인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저는 소설의 기법에 대해 독자적인 궁리를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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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죽음 뒤 부부의 태도가 확연히 다른 점이 흥미롭다. 남편은 자학/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데 비해 ‘마리에‘는 그 고통을 짊어지고 말 그대로 ‘성녀‘가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묘사 모두 불편하다. 모성의 신화는 이렇게 재생산되는가? 오에의 작품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잠자냥 2019-05-24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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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어떤 작품을 집어들어도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역자 때문에 별 한 개를 깐다..
생쥐스뜨 2014-07-0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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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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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이와 사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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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히카리는 오에 겐자부로와 이타미 유카리 사이에서 1963년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날 때부터 두개골에 문제가 있어 그쪽으로 뇌수가 흐르는 뇌헤르니아 증상으로 인한 장애를 가져야 했다. 젊은 오에 겐자부로는 아기가 평생 정신과 신체 일부에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조건으로 수술을 해서 살려야 할지, 그냥 방치해 서로 불행한/불행할 것처럼 보이는 생을 일찌감치 포기할 지 선택해야 했다. 당시 진퇴양난의 번민과 방황은 1964년 작품 <개인적인 경험>에 그대로 실려 있다.
결국 히카리와 함께 사는 생을 결정한 겐자부로는 두 번에 걸친 수술과 계속된 치료로 거의 잃어버렸던 히카리의 시력을 회복하고, 간질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평생 복용하면서 특수학교를 졸업,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하기 위하여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겐자부로의 책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누이동생 나츠미코와 남동생 사쿠라마도 자신의 생활 일부를 양보하는 등의 영향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장애인이 집안에 있으면, 당연하겠지만 장애인도 사회적 약자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약자를 좀 더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장애인, 이 가운데 특히 히카리 같은 정신지체가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순수한 심정을 갖고 있으리라는 일종의 선입견이나 바램을 가지고 있기 십상이다. 물론 조금은 그렇다. 반면에 뇌의 성장과 발달이 늦어 이미 큰 몸집을 하고 있을지언정 여전히 양보나 포기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 힘든 고집 같은 것을 부려 가족들을 화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즉 장애가 있음으로 해서 피할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추함과 뒤틀리고 비뚤어진 마음도 장애아만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선함과 마찬가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뒤틀리고 비뚤어진 것을 오에 겐자부로는 ‘독나무’라 부른다. 나무는 나무이되 독이 든 나무. 정신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건 독나무를 품고 사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인생의 친척>은 허구이다. 그런데 특히 오에 겐자부로가 쓰는 허구는 지극한 사소설적 경향을 띄고 있는 작품이 많아서 소설 안에 실제 자기 가족의 경험을 담기도 한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히카리와 같은 특수학교에 다니는 친구 어머니인 마리에 여사를 등장시키는데, 이 인물이 실제로 생존했으며 책에 나온 대로 살다가 간 실제 인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독자는 그렇게 믿어도 좋고, 나처럼 틀림없이 허구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아마도 허구일 터이지만.
일본에서 이름이 꽤나 난 ‘나’ K가 구라키 마리에 씨와 친해진 일은 K, Kenzaburo가 도쿄 스키야바시 공원에 제법 큰 텐트를 설치해놓고 단식투쟁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물론 3일을 기한으로 한 단식투쟁이라서 처음부터 죽음을 불사한다는 의미는 없었지만 한국의 젊은 시인을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 사형을 선고해버린 처사에 항의 의사를 이런 방식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정말 있었던 퍼포먼스. 당시 한국의 젊은 시인은 실제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시인 김지하였다. 당시 오에 겐자부로는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사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시를 쓰다 사형을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아마도 조금쯤 부러워했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때 구라키 마리에 씨는 재일한국인 청년 세 명과 함께 겐자부로의 텐트에 자원봉사자로 등장해 처음으로 친하게 된 것. 텐트에 들어와 슬그머니 식물성 영양 음료, 걸쭉한 상태로 보아 음료라기보다 죽에 가까운 물질이 오에의 목을 타 넘어가게 만들기도 했단다. 뭐 보통 단식투쟁은 이렇게 하는 거라나?
당시 K의 맏아들 아카리는 산겐자야 근처 파랑새 장애아 학교 고등부에 다니고 있었고, 마리에의 큰아들 무산은 중등부였는데, 장애 성격이 비슷하고 둘 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교사가 두 학생과 학부모를 특별히 소개하여 친하게 지냈다. 물론 일본의 경우도 학생과 학부모 할 때의 학부모는 엄마들을 말한다. 무산에게도 동생이 있다. 미치오. 귀엽게 생기고 머리도 총명해 거의 모든 이들로부터 쉽게 친해지고 좋은 인상을 받는 아이.
이제부터는 무산의 엄마 구라키 마리에에게 집중해야갰다. 소小부르주아의 딸이다. 아버지는 은퇴한 경영자였는데 일찍 죽으면서 마리에에게 상당한 현금성 자산과 이즈 고원에 있는 별장(그리고 다른 부동산 한 건)을 마리에에게 남겼다. 똑똑한 머리에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미국에서 근무하게 되어 뉴욕에 살며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건 아니라서 음악은 포기하고 그것만큼 사랑했던 학문인 영문학을 선택해 특히 <현명한 피>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를 공부한다. 하필이면 내가 무지하게 싫어하는 작가를.
마리에는 이혼 여성, 돌싱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 마리에의 이혼이 남편과의 불화나 가정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일종의 탈출의지로 행해진 의사결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평생 천주교에 천착했던 플레너리 오코너. 글쎄 나는 많고 많은 작가 가운데 오코너를 전공했다는 것도 겐자부로가 제시한 한 가지 팁으로 여겼다. 마리에는 무산을 출산한 일을 무엇(절대자?)이 자신에게 속죄를 요구한 일이라 생각했고, 이 속죄를 위한 생활에 애꿎게 남편과 정상아인 미치오까지 끌여들일 필요는 없다고 믿었던 거였다. 물론 이혼을 협의할 때 남편에게 이걸 노골적으로 내밀지는 않았겠지만, 한편으로 황당하게 이혼당하고 있는 남자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 결국 마리에가 무산과 함께 살고, 남편은 귀엽고 공부 잘하고 사교성 있는 미치오를 데리고 나가 집을 얻었다가, 한 여자를 만나 다시 가정을 이루었다.
말과 뜻은 혼자 무산을 키워보려 했겠지. 무엇을 속죄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요코하마에 있는 여자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마리에가 진짜로 혼자 힘만 갖고 무산의 뒷바라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친정엄마의 보조를 받아야 했는데, 친정엄마가 조금씩 치매 기운을 보이자 전남편과 미치오가 매주는 아니지만 주말에 들러 무산과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당연히 둘째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겠지. 이렇게 살다가 하루는 미치오가 학교에 가다가, 버스에 올랐는데 평소 미치오를 괴롭히던 중학생이 물론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불쑥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미치오가 기겁을 했고, 그래서 버스에서 뛰어내려 앞뒤 가리지 않고 길을 건너다가 정상속도로 운행하던 화물차에 치었다. 미치오의 두뇌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하반신은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됐고, 새엄마는 그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이제 무산에 이어 미치오, 그리고 혼자 남을 전남편까지 마리에 씨가 온전히 돌봐야 할 그래서 속죄에 대한 보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살았다. 날 때부터 지체가 있는 무산은 세상 자체가 그렇거니 살 수 있었지만 미치오는 그러지 못했다. 여기에 높은 지능까지 있어서 형인 무산을 세뇌, 혹은 가스라이팅을 했을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겠지. 그러던 어는 날. 아이들이 사라졌다. 힘이 좋은 무산이 미치오의 휠체어를 밀고, 미치오가 밝은 표정으로 행인들에게 기꺼운 친절을 유도하며,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물려준 이즈 고원의 별장으로 갔다. 이즈 고원은 전형적인 리아스 식 해안.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곧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원래는 무산이 미치오가 탄 휠체어를 전속력으로 밀어 함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어야 했으나, 마지막에 미치오가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무산은 휠체어에서 떨어져 양쪽 팔로 귀를 막은 상태로 그대로 돌진, 먼저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미치오가 자기 힘으로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가다가 바퀴가 돌인지 나무뿌리인지에 걸려 멈추자, 뉴턴의 2법칙에 의하여 몸을 앞으로 기울여 휠체어와 함께 역시 벼랑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마리에와 전남편 앞에 무엇이 남았을까? 슬픔과 고통이겠지. 자식이 죽으면 부부는 많이 이혼한단다. 슬픔과 고통을 서로에게 쏟아 부어 서로 견딜 수 없어 헤어지고 마는 거겠지. 그러나 이 커플은 그러지 않았다. 아빠는 직장을 때려 치우고 아들의 죽음의 순간을 연상하며 서서히 폐인이 되어갔고, 엄마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아들들의 빈 곳을 채우려 하지만 그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아 아들 둘을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잃어버린 엄마 마리에 여사의 뒤를 좇는다. 겐자부로 부부와 장애아 부모라는 공통점이 이 모색에 더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지식인. 먹물 오에 겐자부로. 이이는 자식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이츠의 시와 발자크의 소설과 플래너리 오코너의 신앙과, 마리에 여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멕시코 시골농장을 거론하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 종말 전쟁>까지 인용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지 않는 말이지만 naïve한…”
이 묘사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번째 나오는 구절이다. 잘난 척하는 방면에서는 한 치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악마처럼 거만한 오에 겐자부로.” 이건 내가 아마 네번인가 다섯번째로 이 작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연히 좋은 의미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별점 4개는 아깝다. 그렇다고 5개까지는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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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8-19 공감(19)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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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첫째 아이.. 그리고 정상으로 태어난 둘째 아이를 가진 여인..
여인은 자신이 첫째 아이를 맡고,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이혼을 했다.. <장애아>의 탄생이 자신에게 어떤 <속죄>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그 <속죄>를 위한 생활에 남편과 정상아인 둘째 아이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만의 오붓한 생활을 꾸려나가던 도중, 둘째 아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그 여인은 (둘째 아이의 사고로 다시 이혼을 하게 된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다지 없음에도) 다시 남편과 장애아가 된 둘째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두 아이가 실종되어 주검으로 발견된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첫째 아이가 바다 위 절벽 낭떠러지에서 자진하여 떨어지자, 둘째 아이 역시 휠체어를 스스로 밀고 첫째 아이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지인이었던 소설가이자 역시 장애아의 아빠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것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오에 겐자부로는 그녀가 혼란을 겪어나가면서도 말 그대로 <완전한 인간>으로 회복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요며칠새 동네 도서관에서 세월호 관련 지난 기사들을 리뷰하면서, 새삼 <망각>의 힘에 놀라워한 적이 있다.. 지난 4, 5월 연일 티비나 인터넷에서 세월호 뉴스를 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또 아이들을 버린 선원들과 아무리 봐도 비상식적인 구조로 일관했던 해경과 언딘의 유착, 그리고 책임 회피에 급급한 관료들과,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 듯 관련자들을 경질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VIP에 이르기까지 무책임의 체계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얼마나 분노했는가..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 꽃다운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보며 몇 번이나 <미안해.. 절대 잊지 않을께..>하며 한숨을 쉬었는가..
하지만 정상적인 애도/상의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 사건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교묘한 미디어의 프레임의 정치에 우리는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무기력한 멜랑콜리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의 이야기들을 다시 보면서,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그리고 여전히 실종상태인 아이들의 가족들을 새삼 떠올렸던 것은 바로 이들이야말로 결코 이 사건을 잊지 않을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들의 아픔을 감싸안으며, 또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말인가.. 이 시스템의 동조자이자 방관자인 우리들이 과연 이들의 아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구조작업의 차질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으로, 또 현재 (너무도 부조리해 보이는) 재판과 국정조사로 2차, 3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에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있을지 실로 막막하기만 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책을 들여다보고, 또 애도에 대한 논의들을 떠올려봐도 입이 얼어붙는다.. 오에의 이 소설을 읽었던 건 어쩌면 일종의 도피였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감당해내기 어려운 그런 아픔을 겪고서도 치유가, 아니 회복이 가능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 메시지는 비록 문학이지만, 아니 문학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도록 하면 된다, 속죄받을 수 없는 후회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순간에 병행시켜, 다시 한 번 그 사건을 기억하는 훈련을 하면, 무산, 미치오와 행복하게 살던 현재도, 거기에 겹쳐져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마라! 그것에 의해 적어도 세 종류의 현재가 자신의 경험이 된다, 하고 조언해준 것입니다.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신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의 고통으로서, 고통스러운 채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마치, 정신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듯한 회복의 과정인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과 복구>의 과정을 그녀는 <집회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밟아나가고 있다.. 물론 그것으로 외상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정신분석의가 말하는 것처럼 외상의 완결에는 종착지가 없고, 따라서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 따라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인생의 친척Parientes de la vida>은 멕시코의 한 농민공동체에서 성녀와 같은 삶을 살며 주위의 칭송을 받던 그 여인이 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자신의 마지막 생을 담은 기록영화의 제목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피가 통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살아가며 고난을 함께 하는 동안, 인디오나 혼혈 여자들이 진짜 친척처럼 자신을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받아들여 주었던 것에 대한 기쁨이자 만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오에는 소설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어떤 처지의 인간에서도 따라다니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으로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플루타르코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섣부른 해석을 경계한다.
어쩌면 오에가 말한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로서 인간 세계를 표현하는 일, 그것을 intelligible한 것으로서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니 곧잘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아마 레비가 말한 <증언>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잔여remnants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가 말한 것처럼, 결국 작가의 글쓰기는 마리에의 아픔을 감지한, 즉 "나 자신의 이야기로서 납득한" 행위이자, 인간의 아픔을 감지하는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기도>와 같은 것이라는 해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런데, 바로 그 역자가 요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라니.. 도대체 그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감지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정말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씌어진 글이 결코 자신의 사상/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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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스뜨 2014-07-0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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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인생의 친척
알라딘 중고 서점을 돌다. 우연히 발견했다.
그냥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그를 난 이 책을 통하여 `오에 겐자부로`로 인식했다.
오에겐자부로는 독특한 이력이 있는 작가이다. 바로 장애아의 아버지라는 것... 가끔씩 그에게 장애아가 있는 것이 그와 그 가정에는 커다란 불행이었을지 모르지만 인류에게 커다란 행운인듯 하다는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을 하곤한다.
바로 그가 그보다 더 불행한 인생을 경험한 한 여인을 소설로 쓰고 있다. (과연 어떤 더 큰 불행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 여인의 집약된 불행이 소설 초반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절정을 향해 가는 과정이 일단 한번 충격을 받고 소설에 빨려 들어가게 했다.
그리곤 책을 손에 넣기 힘들었다.
유려한 미문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장르소설처럼 스토리의 전개가 긴박한 소설도 아니었지만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인생의 친척이란 제목은 정말 형편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상업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책을 완독하고 나서 과연 다른 어떤 제목을 나 책에 부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저자는 책에서 이 제목이 불행등을 뜻하는 제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행이 인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라면,
이 책을 읽을 수 밖에는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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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kkary 2014-12-0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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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인생의 친척
슬픔도 ‘인생의 친척’처럼 <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웅진출판사 / 1997
눈이란 정말, 무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기억 저편에 있는, 지금은 잊혀진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한 대목.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에 얼어 죽어갈 때, 유일하게 소녀를 지켜주며 위로했던 것은, 다름아닌 소담스레 내리는 눈이었다. 고 생각된다. 눈은 녹고 난 후의 지저분함과는 상관없이, 그 포근함과 순백의 깨끗함에서 정갈하다 못해 성스러운 마음까지도 갖게 한다. 그 성스러움은 현실과 괴리된 저 하늘 위의 무엇이 아니, 우리 곁에서 발 딛고 서 있는, 친근한 성스러움이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 어린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보살펴주며 치유해주는 것이다. 마치, 추운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성냥팔이 소녀를 어루만져주었던 눈처럼,
나에게 있어, ‘치유’, 또는‘성스러움’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는 아마도 일본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이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문학성은 익히 정평이 나 있긴 하지만, 그가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평생을 ‘장애아 문제, 핵, 공동체, 실존’등을 소재로 다루면서 인간의 구원을 희구하는 작품을 주로 썼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 대다수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문학이며, 어찌 보면 손쉬워 보이는‘죽음’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처절하고 힘들지만, 우리가 의무적으로도 살아내야 할 ‘생(生)’을 지향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마치 생(生)에 대한 간절한 기도문 같다.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애아는, 정상(이라고 말해지는)인에게는 상실된 근원적 영혼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지성의 비판자로, 동시에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강하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고통을 감지하고 또 그 고통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로서 오히려 보통 사람 이상의 존재로 설정된다. 이러한 점은 특히 <인생의 친척>에서 잘 드러나 있다.
“마리에는 갑자기 찾아온 슬픔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받아들인다. 언제까지고 감정에 얽매이기에는 생활이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나 괴로워서, 어느새 고통도 기쁨도 잊는 일에 더 많이 익숙해져 있는 우리와는 달리…. ”
이 작품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슬픔을 감당한 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설명에 걸맞게, 생(生)의 최대치의 불행을 경험한 한 여인의 고통과 그 극복의 과정을 깊고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우리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바닷가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 장애를 가진 두 아이의 유해 앞에서, 그 고통의 늪에서 몸부림치며 결국에는 구원을 얻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이들이 과연 왜 자살을 했는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으며 신을 원망하던 마리에가 “결국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구원을 얻게 되는 험난한 인생 여정이 펼쳐져 있다.
두 아들의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고통에 직면하여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살아가면서 죽은 아이들을 기억하는 ‘삶’을 선택한 어머니. 자식들이 죽고 난 뒤, 그녀는 평생을 살아온, 삶의 근원이다시피 한 일본을 벗어나 먼 타국인 멕시코의 농장에서 원주민들과 친구가 되면서 그들을 보살피며 봉사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멕시코의 농장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성녀(聖女)’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슬픔이나 고통은 평생 혼자서 껴안고 갈 수 없으며, 타인과 더불어 위로하고 위로 받으면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광활한 멕시코 농장의 들판에서 펼쳐진 영화 상영막을 통해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나오는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각인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그녀지만, 그녀 또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원하는 것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기억되기를…
그것은 “고통과 슬픔이 가득찬 인생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해낸 강인한 자들만이 누리는 축복”이며, 그로 인한 자기 승화이자 치유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슬픔(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삶에서 도피적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종교의 순례나 자기를 방기하다시피 발생하는 육체적인 쾌락을 통한 편력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절제와 희생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만 고통이 치유됨을 깨닫게 한다.
소설 속에서 마리에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스페인어‘Parientes de la vida’ 즉 ‘인생의 친척’은, 살아가는 데 있어 고난을 함께 하는 사이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중 화자가 발견한 플루타르코스의 저서의 문구처럼 어떤 처지의 인간에게도 쫒아다니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으로서의 슬픔”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는데… 어쩌면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아주 큰 슬픔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까? 보통의 경우는 갑자기 닥친 슬픔과 고난에서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리거나,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만큼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에 감사하며, 잊은 듯, 잊으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마다 각자 슬픔에서 헤쳐 나오는 모습들이 다르겠지만……. <인생의 친척>에 나오는 마리에의 모습은 정말, 너무 치열하고 숙연하며 성스러워서 감동적이다 못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
우리는, 우리의 생(生)에서, 결코 원하지도 않았고, 달갑지 않은 “인생의 친척인 슬픔”을 만났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할까…. *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 1935년 일본 에히메 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지 편집을 하며, 시와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1954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57년 교내 신문 소설 현상공모에 <기묘한 일>로 입상한 후, 문예지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전후 가장 촉망받는 청년작가로 인정받는다.
등단 후 역동적 상상력을 토대로 일상의 경험을 통해 실존과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표현하되 이를 사회문제와 결합하는 특징을 지닌 작품들을 줄곧 발표해 온 그는, 아쿠타가와상(1958),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1985) 등 일본의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전후세대의 대표적 작가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1994년 <만연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개인적 체험>, <핀치러너 조서>, <'나의 나무' 아래서>, <인생의 친척>, <2백년의 아이들>, <체인지링>, <동시대게임>, <치료탑>, <레인 트리를 듣는 여자들> 등이 있다.
박유하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게이오 대학 국문과(일본문학)을 졸업하고, 이후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전공했다. 연구활동 이외에도 통역사로서 노태우 전 대통령, 다케시타 전 일본 수상 등이 참석한 정재계의 주요 회의 통역을 맡았고, 일본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한국어 강사, NHK 국제국 아나운서 등 일본 사회를 폭넓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1993년 귀국한 뒤 일본을 소개하는 작업의 하나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전 12권)>을 기획, 번역했다. 2007년 현재 세종대 일문과 교수이며 타자론, 탈식민지주의, 페미니즘,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 등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음>, <만엔원년의 풋볼>, <인생의 친척>, <풍장의 교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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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정 2008-07-0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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