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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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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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작가 정보
출생1900년 10월 2일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1951년 1월 5일(50세)
대한민국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국적대한제국→대한민국
직업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
학력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경력조선일보 학예부 부장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
필명아호(雅號)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
일본식 이름은 히가시 후미히토(東 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文仁)
활동기간1919년~1951년
장르소설, 시, 평론
부모김대윤(부)
배우자김경애(재혼), 김혜인(이혼)
자녀1남 3녀
형제김동원(이복 형)
주요 작품
〈배따라기〉
〈운현궁의 봄〉
웹사이트〈김동인〉.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주)두산.

김동인(金東仁, 1900년 10월 2일~1951년 1월 5일)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현재 어린이대공원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 유학 중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 활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고, 한때 1948년 9월에서부터 1949년 2월까지 한국민주당 당무위원 직위를 역임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에 폐렴으로 병사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 그의 작품은 이미 저작권이 소멸되었다.[1]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유년 시절

김동인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던 김대윤(金大閏)이다.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안창호의 측근 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청소년기

191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출국하여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도쿄 유학 중 그는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2]

문학, 사회 활동

독립운동 참여

2·8 독립 선언이 낭독된 도쿄 히비야 공원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1918년 12월부터 이광수, 최팔용, 신익희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만세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체포,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상주의에 깊이 공감하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 한국인 대표단이 내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소설가, 작가 활동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한편 신여성의 자유 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3]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3] 그는 소설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그는 풍자와 조롱을 잘 하였고, 동료 문인이나 언론인들, 취재 기자들과도 종종 시비를 붙기도 했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김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다.[4]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언론, 사회 활동

초반에 그는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23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5]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선일보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이후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그의 형 김동원은 안창호의 측근으로 흥사단의 측면지원조직이던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는데, 그 역시 흥사단에 가입하고 동우구락부에 가입했다. 그 뒤 이광수의 수양동맹회와 통합하자 수양동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전향 의혹을 받게 된다.

친일 행적

193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 중일전쟁 당시 중국전선을 방문해 일본군을 위문하러 갔다 왔다는 내용이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친일 성향으로 돌아섰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 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이후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연재를 하며 학병권유를 행했다. 이 밖에 김동인은 친일 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그는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에 거절했다.

생애 후반

광복 이후

8월 17일 임화와 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돼 있었다. 한편 해방 직후 이광수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나타나자 앞장서서 이광수를 변호하는 몇 안되는 문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9월에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어 그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6]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1945년 12월 이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 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내용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 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지책, '조선어와 조선 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미화했다.

말년

김동인은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7] 만년의 김동인은 약국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그 중 가장 값싸고 강력한 포수크로랄을 주로 먹었다. 그는 수면제에 의존해 살아 갔고, 수면제에 관한 한 박사가 됐다.[7]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중풍을 앓게 되면서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도 찾아왔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서울의 쪽방에서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수면제와 술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려 했으나, 몸이 불편하여 얼마 못 가 다시 되돌아왔다. 6월 28일에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조선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4 후퇴 무렵인 1951년 1월 5일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동네 이웃 사람들이 그가 죽고 며칠 후에 시신을 발견하여 수습해서 묻어 주었다.

사후

6.25 전쟁 직후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에 그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졌다. 이후 박종화, 염상섭, 장준하 등에 의해 그의 작품성에 대한 조명 및 추모 운동이 시작되었다.

1955년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학력

기타

일제강점기 말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변절하여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한국 전쟁 때 납북된 김동원이 소설가 김동인의 이복 형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소설 3편을 포함하여 총 9편이다.[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김동인의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응하여 그의 아들은 소설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친일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행위에는 적극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했었다.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는 판정 중에 친일 행위의 사실성을 인정하였다.[9]

주요 작품

같이 보기

각주

  1. 법률 제11110호, 2011.12.2, 일부개정 전의 저작권법 제39조 제1항 및 법률 제11110호, 2011.12.2, 일부개정 저작권법 부칙 제3조에 의함.
  2. 〈서울말의 변화〉. 《서울 六百年史》. 서울특별시. 2007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9월 16일에 확인함. 한국어에서 본래 …
  3. 서지영 저, 《역사에 사랑을 묻다》 (이숲, 2011) 229페이지
  4.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조선일보 2004.02.25
  5. 日帝치하 조선일보는 한국文壇의 산실이었다 조선일보 2004.12.22
  6. 현(現) 중구 약수동
  7.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보관됨 2014-01-09 - 웨이백 머신 조선일보 2004.02.25
  8. 김재용 (2002년 8월).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123~148쪽. 2007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9월 3일에 확인함.
  9. 법원 “소설가 김동인 친일행위 인정된다”, 경향신문, 2010-11-26
  10. “김동인 최선생”. 2023년 1월 30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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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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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
고조선 · 삼국 · 남북국
(BCE 4C~CE 936년)
시 · 가요
고조선

삼태극 서정시: 공무도하가(저자 미상)

신라

삼태극 가요: 해가(저자미상)
삼태극 향가: 월명사(제망매가 · 도솔가) · 충담사(찬기파랑가 · 안민가) · 처용(처용가) · 득오(모죽지랑가) · 풍요(저자 미상) · 헌화가(저자 미상) · 득오실(모죽지랑가) · 풍요(저자 미상) · 원가(저자 미상) · 원왕생가(저자 미상) · 혜성가(저자 미상) · 희명(도천수관음가)
삼태극 한시: 최치원(추야우중)
삼태극 불교시: 의상(화엄일승법계도)
삼태극 향가집: 김위홍(삼대목)


백제

삼태극 가요: 정읍사(저자미상)
삼태극 향가: 무왕(서동요)

가야

삼태극 가요: 구지가(저자미상)

발해

삼태극 한시: 양태사(야청도의성) · 왕효렴(제일봉 · 봉칙배내연)
신라

삼태극 단편 설화: 설총(화왕계)


백제

삼태극 역사학: 고흥(서기) · 백제본기(저자미상)
삼태극 불교: 혜균(대승사론현의기)
삼태극 금석문: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영기(저자미상) · 정지원(금동정지원명삼존여래입상 금석문) · 사택지적(사택지적비)

발해

삼태극 도교: 이광현(금액환단백문결)
삼태극 금석문: 정혜공주 묘지명 · 정효공주 묘지명
SF 문학사
History of Science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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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金東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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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콘토[1]/카네히가시 후미히토[2]
金東文仁
아호
금동(琴童), 춘사(春士)
필명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인
출생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하수구동
(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사망
1951년 1월 5일(추정) (향년 50세)
직업
소설가, 문학평론가, 언론인
본관
학력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배우자
김혜인 (?~?, 이혼)
김경애 (?~1951년) (1911~2008)[3]
자녀
1남 3녀
종교
경력
조선일보 학예부장
비고

1. 개요2. 생애
2.1. 소설가 데뷔 이전2.2. 소설가 활동2.3. 친일 행적2.4. 광복 이후2.5. 말년
3. 사후4. 비판 및 논란
4.1. 문인들과 라이벌 의식4.2. 김명순 음해와 여성혐오4.3. 인종 차별
5. 여담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이다.

현진건 또는 김동리조차 단편적으로만 본다면 그의 작품성에 필적하지 못할 만큼 한국 문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문호 중의 대문호이지만, 친일 행각과 본인의 성품 때문에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있다.[4]

소설로는 〈배따라기〉, 〈감자〉[5], 〈명문〉, 〈무지개〉,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6], 〈광염소나타〉[7]가 있다. 김동인 소설의 특징은 경향성이 무척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전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반된 특성이 한 사람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감자〉와 〈명문〉에서는 자연주의, 〈광염소나타〉와 〈광화사〉, 〈배따라기〉에서는 탐미주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인도주의 경향이 발견되고 〈수평선 너머로〉는 추리, 〈K박사의 연구〉[8]는 SF적 경향마저 보여주는데 서로 다른 경향성이 한 작품에 깃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있어 소설가 김동인의 미덕은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점이다. 그는 2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근대 문인 중에서도 윗세대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그의 작품들은 현대 한국어 표기법으로 바꾸지 않고 원문 그대로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이 사람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있다.

2. 생애[편집]

2.1. 소설가 데뷔 이전[편집]

1900년 10월 2일에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하수구동(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평양 하수구리 한 곳에서 8대를 내려온 토호 집안으로, 상당히 많은 논밭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계층의 부호 집안이었다. 아버지 김대윤(金大潤)은 평양의 대부호이자 장로교 장로였다.[9]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덕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역시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경제관념이 지독하게 없던 그는 사치벽으로 재산을 탕진해버린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옷과 구두를 맞춰 입고 백금 시계에 백금 시곗줄을 달아 차고 다녔으며, 갖은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 수집을 취미로 삼았다. 경마, 마작 등 도박에도 몰두했으며 낮에는 고급 요정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 명을 부리고, 밤에는 프린스 호텔에서 또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 일본도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 수시로 놀러다녔으며, 담배 1갑을 사려고 중국에서 신의주까지 인력거를 부르기도 했다.

1918년, 메이지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 해 9월 다시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 화숙(川端画学校)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문하생이 되었다.

2.2. 소설가 활동[편집]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인 그녀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이광수의 작품이다. 명사의 성별구분도 없고 3인칭 대명사를 잘 안 쓴 한국어에 없던 번역체 표현이라서 우리말 글쓰기를 강조한 이오덕은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라"고 강조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풀려났다.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이후 계속 선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까먹던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에 보통강 수리사업에 뭣도 모르고 투자했다가 쪽박차고, 그 많은 재산은 물론이요 선친이 남겨준 400평짜리 대저택도 모조리 날려먹었다. 가뜩이나 난잡한 김동인의 오입질에 생활고까지 겹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첫 번째 부인 김혜인이 결국 자식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출해 버려, 졸지에 이혼남이 되었는데, 이후 김혜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는 떠나버린 전처를 디스하기 위해 '무능자의 안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1930년에 광염소나타 발표.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돕는 젊은이들을 다룬 가상역사물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10] 참고로 이 작품은 순수창작물이 아니다. 일본 닌자소설을 번역한 다음 배경 바꾸고 살을 덧붙인 작품이라서, 기승전결이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 어떻게보면 습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여기서 키운 실력으로 최고작 《운현궁의 봄》을 집필한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1938년 쯤에는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견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재출간도 이루어지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었으나 위키문헌에서 구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쓰다가 중단한 소설들이 여러 개 있다. 전개가 잘 풀리지 않으면 그냥 연중하는 스타일이었던 듯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한국 최초의 SF 작가로 유력한 사람이다. 1929년에 발표한 《K박사의 연구》가 한국 최초의 창작 SF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SF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뜸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한국 SF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가이다. 빙의물도 쓴적이 있는데 《논개의 환생》이라는 제목으로 진주성에서 순절한 논개의 영혼이 패연이라는 막 사망한 기생의 몸에 들어가 1932년을 살아가는 소설이다. 패연의 인격과 논개의 인격이 다툼을 벌인 끝에 논개의 인격이 우위를 점하는 대목까지 흥미롭게 진행되었으나 열의가 식어버렸다며 3화만에 연재 중단.[11]

이래저래 문제 많은 성격 탓에 이광수, 염상섭을 비롯해 원수진 사람이 정말 많았지만, 제자 정비석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했다고 한다. 정서죽에게 비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김동인이었으며, 정비석이 쓴 소설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열심히 검토해 주었고, 예술이 아닌 통속소설을 쓰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12] 나중에 똑같이 친일하는 김억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염상섭과 앙숙이 된 데는 김억이 염상섭과 먼저 사이가 나빴던 탓도 컸다. 의외로 카프 작가들과는 사이가 괜찮았는데, 카프의 유사 소설가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문인이었던 이기영을 발굴하는 데 공헌했다.

2.3. 친일 행적[편집]

그는 일제에 아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재력이 있었으나 본인의 방탕한 사생활 탓에 가난해졌고,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을 시작했기에 모양새가 굉장히 추하다.

반면, 그와 동시대 문인이었던 현진건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대가로 가난에 찌들면서까지도 문학가로서의 지조를 지키기도 했다.[13] 아니면 황순원처럼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쓰느니 차라리 붓을 꺾고 말지' 라며 잠수를 타 버린 경우도 있다. 실제로 황순원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해 버린 후,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도 협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은 친일 행적이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 가난과 질병 속에 시달리면서[14]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그 자신도 지인들에게 친일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말을 했다.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이갑기(李甲基)로부터 "드디어, 네놈도 개가 다 되었구나?"라는 욕설을 듣고 당장 일자리를 때려친 사람이다고 알려졌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라는 주장이 많다.

채만식은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는 의미로 〈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역시 가난에 찌들어 6.25 전쟁을 2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평생 소원이 원고지를 넉넉하게 가져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최서해도 말년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았지만, 최서해의 가난한 형편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인들조차 욕하지 않았으며, 생계형 친일에 비해 더욱 엄격해진 지금조차도 그다지 뭐라 하는 사람은 드물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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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황군위문'을 조직해 일본군 위문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 중국전선으로 위문 갔을 때 모습.

김동인은 일제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하였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 교육과를 찾아가 '문단 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 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 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16]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 황군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겨 "자랑스러웠다"고 글을 썼다.

이 시기를 즈음해서 이 항목 최상단에 언급된 것처럼 히가시 후미히토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다. 이후 히가시는 조선총독부의 외곽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 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 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일제로 완전히 넘어간 1942년의 후미히토도 일제에 의해서 체포된 적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독립운동 흔적이라도 보여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천황이 헌법상의 기관일 뿐이라는 내용[17]을 언급하면서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정설은 "천황은 그냥 신이다"였기 때문에 후미히토는 천황 불경죄로 체포되어서 8개월간 구금된다. 이 사건 이후로 후미히토는 더더욱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후미히토는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 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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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후미히토의 가장 대표적 친일소설 백마강
이 밖에 후미히토는 친일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메이지유신을 지지했다고 하는 일본인 야나가와 세이간을 다룬 소설 〈세이간의 길〉은 연재가 중단되었으나, 임종국이 평가한 "조선의 역사소설은 마침내 김동인에 의해서 조선 역사를 버리고 일본 역사에서 취재한다는 난센스"라는 표현으로 충분할 것 같다. 실제로 완결된 대표적인 소설이 바로 〈백마강〉이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에 일본군이 백제부흥군을 보냈다가 박살이 난 백촌강 전투를 다룬 소설로, 이 소설을 쓴 이유를 후미히토 스스로 "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즉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서 부여신사(夫餘神社)를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 당시, 후미히토는 세월이 오고가는지도, 세상이 바뀌는지도 모르고 일제가 패망했다는 것조차 모른 채[18]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을 거절했다.

2.4. 광복 이후[편집]

8월 17일 임화와 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되어 있었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중구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래 반탁 운동에도 적극 활동하여 '반공투사 애국자'로 둔갑했는데, 여기서 박헌영과 여운형, 김규식 등 신탁통치안에 찬성이나 신중론을 주장했던 세력들을 '매국노'라고 대차게 비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를,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를 연재했다.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저질렀던 수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 내용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자기 스스로 미화한 것이다.(...) 이 짓은 이무영이나 서정주도 했다

이 사람이 '백담비'에 관한 이야기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백담비는 자신의 하얀 털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흙탕물은 길을 돌아가는 수가 있더라도 피하지만, 일단 한 번 더럽혀지면 자포자기하여 흙탕물에서 이리저리 뒹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김동인의 삶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19]
말년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이로 인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중국의 삼국지연의 못잖은 대작을 써보겠다"는 취지로 역사소설 〈을지문덕〉 집필에 들어갔으나,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30쪽 정도를 집필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1949년 연말까지는 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았으나 연말이 되면서 병이 악화되어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후에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떠나려 했지만 이미 중풍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그를 뱃사공이 태우길 거부하면서 왕십리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택에 돌아와 있던 그를 잡으러 북한군이 여러 차례 찾아왔으나, 이미 김동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폐렴까지 걸렸고, 혼자서는 식사도 못 하고, 용변도 볼 수 없는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말도 못하는 환자를 굳이 심문할 수도 없었고, 어차피 오래치 않아 죽을게 뻔하니 그들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1.4 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즈음에 하왕십리동 자택 인근에서 병으로 쓸쓸히 사망한 걸로 추정한다.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까닭은 당시 부인 김경애가 자녀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집을 비웠고 동네 사람들조차 전부 피난 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김동인도 방치되었고, 그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없다.[20] 적어도 1월 3일까지 살아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후 사망했다.

김동인의 차남이었던 김광명이 2015년 인터뷰에서 이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는데, 김광명의 회고에 의하면 김동인은 이미 이 즈음 임종 직전의 상황이어서 부인 김경애는 자녀들만 한강 이남의 흑석동으로 피신시키고 다시 돌아와 김동인의 임종을 지켜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져 흑석동으로 가는 것도, 한강 이북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해졌고, 아예 김동인을 제외한 일가가 온양까지 내려가서 피난생활을 해야 했고, 7개월이 지난 1951년 8월이 되어서야 겨우 도강증을 얻어 집에 겨우 잠깐 들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엉망이 된 채로 김동인 시신이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누군가에 의해 김동인은 시신으로 집 근처의 밭고랑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고, 부패가 너무 심해서 입고 있던 옷으로 겨우 김동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김경애가 방치되어 있었던 그의 시신을 밭에다 임시로 묻었고, 이후 다시 왕십리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당시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1951년 11월 무연고인 군인들과 함께 홍제동 화장터(현 서울시립승화원의 전신이다.)에서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3. 사후[편집]

1955년에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사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사상계의 발행인인 장준하는 과거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이력도 있어서 친일파에 호의적인 매체는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말에 따르면, 장준하가 김동인과 마찬가지로 서북 지역 출신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상계는 최남선의 복권을 위해 애쓴 매체이기도 해서, 동인문학상의 제정이 단순히 작가의 연고 문제 때문만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서북 출신 문인이 김동인만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21]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0년에 사상계가 망한 후 중단되었다가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사상이 정 반대인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이 인연으로 조선일보는 1987년 총 17권으로 구성된 김동인 전집을 출간했다.[22]

1977년에 그의 흉상과 문학비가 서울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에 제막됐다가 1988년부터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근처 빈 터로 이전됐다. 2020년에 광복회 측이 해당 비석의 철거 혹은 안내판 설치를 요구하자 2021년 2월 서울시설공단 측은 QR코드 형식으로 안내판을 세웠고, 9월 들어서 이전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제헌 국회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의 이복 동생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산하 기구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수록되었을 때, 그의 아들이 이의제기를 걸었다. 이의제기를 건 근거가 '1942년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던 것'[23]을 제기한 것인데,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1944년 1월16~28일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작가 사후 70년이 경과하여 대부분의 작품은 공유마당, 위키문헌 등에서 볼 수 있다.

4. 비판 및 논란[편집]

친일 행적을 제외하더라도 다른 문인들에 대한 잦은 인격적 모독 등으로 애초에 많은 논란을 빚은 인물이다. 그가 높이 산 인간상이라고는 〈광염소나타〉에 등장하는 예술을 위해 세상 도덕 윤리조차 무시하고 한 몸 불사르는 예술지상주의자나, 〈대수양〉에 등장하는 초인적 지도자뿐이었다. 이외의 인간들은 그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경멸하고 비웃는 데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4.1. 문인들과 라이벌 의식[편집]

염상섭과는 염상섭이 데뷔하기 전부터 견해 차이로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염상섭의 행실을 비꼰 소설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널리 퍼졌다. 염상섭이 발끈하자 김동인은 "염상섭을 모델로 한 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사과하긴 했지만, 사과하면서도 소설의 내용은 실화라는 뉘앙스를 은근히 풍겼을 정도다.

자기 사생활도 깨끗한 편이 아니었던 김동인이 별다른 원한 관계도 없는 염상섭을 저격한 데는 좀 더 복잡한 내막이 있는데, 염상섭이 먼저 김억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를 비꼬는 소설을 쓰자 시인인 김억이 친구인 김동인을 찾아와서 "시인인 나는 소설을 못 쓰니, 자네가 대신 좀 써달라"고 부탁해서 나온 소설이었다고 한다. 소설의 모티브가 염상섭이라는 소문이 난 것도, 다름 아닌 김억이 술자리에서 실언을 해버려서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 소설 제목 자체가 염상섭의 작품 세계나 작가관을 비판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평가되는데, 김동인은 그 소설이 에밀 졸라 등 서구 자연주의 소설에 비하면 영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소설에 나오는 실패자의 모델이 김동인 자신이었다는 것은 덤. 그래서 "서구 작가들 자연주의 소설이랑 비교하니 발가락 정도는 닮았던데?"라고 비꼬기 위한 의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이광수와도 사이가 나빴다. 이는 심한 라이벌 의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김동인의 문학 활동 자체가 이광수의 성공을 지켜보고 "내가 이광수보다 못할 게 없다"는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를 꼽으라면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이광수고 그 다음을 김동인을 꼽는데, 김동인은 이에 대해 심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이광수를 적대했다. 이광수가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로 돌아서자 김동인은 춘원을 찾아가 은근히 자살을 권유하기도 했을 정도. 이광수가 소설 〈단종애사〉를 쓰면서 수양대군을 비판하자, 그에 반론하듯이 〈대수양〉이란 소설을 써 수양대군을 찬양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내가 쓰면 반대로 생각하길 좋아하나?' 하며 그의 행동을 비꼬았다고 한다. 친일은 똑같이 사이좋게 했지만.
김동인은 신식 교육을 받고 봉건적 관습을 타파한 '신여성'을 혐오했으며, 특히 엘리트 문인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1939년부터 연재한 〈김연실전〉, 〈선구녀〉, 〈집주름〉 3부작이다.

첫작품인 〈김연실전〉은 기생 출신의 어머니를 둔 김연실이라는 주인공이 어머니의 '나쁜 피'가 끓은 나머지, 어릴 때부터 일본어 개인교사와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어른이 돼서도 수많은 남성들과 육체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자유연애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다음 작품 〈선구녀〉는 신여성, 여성 문인으로서 과분한 명성은 얻었으나 제대로 된 작품은 못 쓰고 실속없이 지내며 후배 문인들과 자유연애나 하는 내용이고, 마지막 〈집주름〉은 연애나 하며 허송세월하다 끝끝내 작품 하나 제대로 못 남겼는데 후배 여문인들이 치고 올라와 대중의 주목도, 경제적으로 기댈 남자문인들도 다 잃어버린 연실이 자신의 처녀를 가져간 측량기사와 우연히 마주치고 혼자 집주름으로 먹고 사는 그의 아내가 것으로 완결된다. 일본에 유학하여 당대의 이른바 "신여성"이 되는 것을 바라지만, 종래는 겉멋만 들려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영락하고 남자에게 의존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대놓고 다룬 연작 소설이다.

작품 자체는 평범한 상업 연재 소설이고 김동인이 먹고 살려고 자극적인 소설 쓴 게 한두 편이 아니지만, 문제는 이 <김연실전>이 타깃으로 한 사람이 당대의 저명한 여성 소설가 김명순이었다는 것이다. 김명순의 아명이자 필명이 탄실(彈實)이었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 첩이었다. 노골적으로 노린 설정이다. 김명순은 실로 어마어마한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며칠 후에 그 남자와 연애를 했니 깊은 사이니 소문이 부풀려졌을 정도였다. 김동인은 이런 김명순에 대한 악성 루머를 마치 사실인 양 그대로 소설화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김연실전〉을 읽어 보면, 이게 소설인지 연예 찌라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실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일[24]을 묘하게 비틀어 풀어 놓는 서술방식을 줄곧 사용하고 있어, 누구라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누구를 가리켜 창작했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작품 발표 이후 김동인은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이 김명순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으나, 염상섭에게 수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인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오늘날에도 악성 루머는 명예훼손으로 법적대응을 해도 피해자에게 꼬리표가 남는 마당에 그 당시 이러한 악성 루머는 사회적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김명순은 한국땅을 떠나 일본으로 간 뒤 어렵게 살다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간접적인 살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김동인은 평소에도 "여자에겐 영혼이 없다."라면서 여성 비하를 서슴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 김동인이었으니, '연애 대장'이니 뭐니 하면서 오만 악성 루머에 시달리던 김명순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 김일엽도 일방적으로 무척 증오했다.

이외에도 단편 〈정희〉에서 '여자는 그저 결혼해서 남편 수발이나 들어야 한다'는 노골적인 결론과 함께 의식 있고 자유롭게 사는 신여성들을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다.

4.3. 인종 차별[편집]

당대 식민지 조선에 만연했던 중국인 차별 의식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다. 김동인의 대표작인 소설 감자, 붉은 산은 명백히 혐중적인 시각이 나온다.

김동인이 혼자 중국인을 차별한 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저 중국인들보단 낫다'는 우월 의식으로 자위하는 게 당대 조선인들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중일전쟁 시기 일제의 기조를 반영한 것인 동시에 19세기 말 임오군란 시 위안스카이 및 청나라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동순태호 등 화교 상인들의 부가 조선인 평균수준을 능가하게 된 상황에 대한 반감 등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 역시 엄연히 조선을 호시탐탐 근대적 식민지로 전환하려고 노리던 국가고 화교 자본의 조선 상권 장악 또한 심했기에 일제강점기가 열리기 전에는 조선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일본 못지않게 나빴었다.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당시 방어책으로 맞서던 화교들을 비난하고 이 분위기를 타고 쓴 작품이 〈붉은 산〉이다. '삵' 정익호가 중국인 지주에게 대들다가 죽은 것을 민족주의로 미화한 내용인데, 요즘 기준으로는 레이시즘 문학이지만 과거에는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5. 여담[편집]

  • 의외로 구인회 멤버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있다. 이상이 사회를 봤던 소설가 정인택과 권순옥의 결혼 때이다. 참고로 그 유명한 수염을 기른 채 웃고 있는 이상 사진 또한 여기서 나왔다.

정인택결혼식
  • 그의 일부 작품에서 실제 평양 등지에서 쓰인 평안도 사투리를 확인할 수 있다. 분단 후 북한이 표준어를 언어학적으로는 서울 방언에 기반한 것을 '평양문화어'로 부르며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으나, 사실주의에 기반한 작품을 쓴 만큼 진짜 평안도 사투리를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인도 평양 사투리와 언론에서 나오는 북한 방송의 공적 말투가 꽤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6. 둘러보기[편집]

연대
상징주의 시 (김억) · 현대적 자유시 (주요한)
신소설 (이인직 · 이해조 · 최찬식)
시문학파[3] (모더니즘 시) · 생명파 · 전원파
모더니즘 소설[4] · 장편소설[5] · 농촌소설[6] · 역사소설[7]
국문학의 암흑기[8]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귀향 소설 · 분단 문학
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민중시 · 노동시
민중 소설 · 농민·어민 소설 · 노동 소설 ·
순수 소설 · 중간소설 · 대중소설
민중시 · 서정시 · 해체시
노동 소설 · 연작소설 · 역사 장편 대하소설
생태시 · 해체시 (도시시 · 일상시) · 메타시 · 디카시
일상 소설 · 다문화 문학 · 소수자 문학(퀴어, 페미니즘)
[1] 많은 한국 자료에서 '곤도'로 표기되는데, '金(kon)'은 어두 환경인지라 표기법에 따라 예사소리로 시작하는 '곤'으로 쓸지 몰라도, '도쿄(Tōkyō)'를 '도교'로 쓰지 않듯이 어말의 '東(tō)'는 '토'로 쓰기에 합치면 '곤토'가 되어야 옳다. 과거 한국어 화자들은 '私(watashi)'를 '와다시'로 읽는 등 일본어 비어두의 파열음 역시 예사소리로 받아들인 바 있는데, 이와 유관한 듯싶다. 한편 '金東'의 독음 자체도 다소 생소한데, 이 성씨는 기존의 일본 성씨에는 없었으며 창씨로 인해 새로이 탄생한 성씨이므로 비교적 적은 수의 식민지 조선인만 사용했음을 고려하면 독법이 그리 파편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인명한자사전에 따르면 '카네토(かねとう), 카네히가시(かねひがし), 킨토(きんとう)'로만 쓰였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곤토'는 극도로 예외적인 독음이었거나 한자로만 적힌 문헌 자료를 오독한 독법일 수 있다. 근거자료#1, 근거자료#2, 근거자료#3[2] 창씨가 '金東'으로 나와 있는 이름의 경우는 다소 생소해도 '곤토'로 읽을 수 있겠지만, '東(Higashi)'라고만 쓰인 경우도 있으며 이를 '金東'에 적용하면 '가네히가시'라고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양쪽 모두를 기재한다. 나루히토 덴노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과 이름이 같다(한자까지).[3] [부고]소설가 김동인 부인 김경애 여사 별세[4] 이러한 면에서 서정주와도 유사하다.[5] 1935년에 동명의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감자〉, 〈태형〉, 〈명화 리디아〉, 〈눈을 겨우 뜰 때〉, 〈어지러움〉, 〈피고〉, 〈딸의 업을 이으려〉, 〈명문〉 등의 8편이 수록되어 있다.[6] 194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7] 사후에 전집 단편선에 수록되었다.[8] 그 연구라는 게 똥으로 먹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9]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한편에 보면 김동인은 어렸을 때 상당히 땡깡이 심해서 걸핏하면 드러누워 울고 불고 했는데 그 부모들은 그가 바닥에 드러누워 땡깡 부리고 울 때마다 바닥에 이불 깔아 주고 그 위에서 땡깡 부리게 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울면서 발 구르다가 발에 가시라도 박힐까 봐. 어쩌면 그의 교만한 성격은 이런 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배태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10] 그는 스스로 역사물을 고증성에 따라 역사소설, 역사담, 야담 등으로 분류했고, 《운현궁의 봄》은 역사소설, 《젊은 그들》은 역사담으로 구분된다. 80년대에 KBS-2에서 드라마로도 만든 바 있다.[11] 김동인 스스로 밝힌 입장은 당초 계획했던 논개의 눈에 비친 1932년의 경성 묘사를 활자화하는 게 불가능해져(원안조차 밝힐 수 없다고 밝혔다.) 열의가 다 식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일본이 거슬릴 내용들이 잔뜩 들어있었을 것이다. 논개는 일본에 항거해서 목숨을 버린 기생이니까. 김동인이 친일로 변절하기 전인 1932년 5~8월에 연재된 작품이다.[12] 다만 소설이라는 양식의 특성상 소위 '예술소설'(=순수문학)과 '통속소설'의 경계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리 명확하고 공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라는 양식은 원래 대중성, 즉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핵심적인 특징이자 목적으로 하여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근대문학의 시대'에 소설이 교양이나 사회 참여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다른 문학 양식에 비해) 대중에게 널리 읽힌다(=널리 소비된다)'는 특징 때문에 이런 대중적 목적에 적절한 매체였기 때문에 근대문학을 상징하는 문학 양식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결국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든, 순수하게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든,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을 널리 알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든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읽을만한 소설(=대중적인 재미를 가진 소설)을 쓰는 것이 소설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는 것이고, 이를 벗어나 사람들에게 이해와 공감을 받기 힘든 이야기를 자신만의 만족(예컨대 예술적 만족감)을 위해 쓰는 것은 '소설은 원래 그런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일기를 써라' 식의 비아냥을 듣는의 사도(邪道)로 취급받기 쉬운 것이다. 이 점에서는 '순문학'이 '통속문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이해(+그래서 순문학을 하는 이들이 통속문학을 하는 이들을 무시할 것이라는 생각)가 오히려 순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가지는 컴플랙스의 일종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김동인과 정비석의 관계에서도 '정비석이 통속소설을 쓰는 것을 김동인이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했다'는 사실이 별다르게 특이하다고 할만한 것도 아니다. 당장 김동인의 작품중에서도 가상역사물이나 SF와 같은 현대 서브컬쳐의 주요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 튀어나온다. 그나마 정비석을 '한국의 대표적인 통속소설가'로 자리잡게 해 준 계기는 노골적인 선정성으로 50년대 남한 사회에 컬쳐쇼크를 불러온 자유부인인데, 선정성으로 따지면 김동인에게도 《김연실전》이 있으니 제자한테 뭐라고 할 이유가 없는 셈이며, 그놈의 문학성을 따지자면 차라리 당대 한국 사회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고,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사회규범이 급속히 해체되리라는 것을 한발 먼저 예측해 보여준 《자유부인》의 문학성이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여류 문인 하나 조지기 위해 흑색선전하겠다'는 악의의 실현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김연실전》만 못하다고 평가받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러니까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본질적인 차이는 사실 판매량'(=안 팔리는 걸 꾸역꾸역 쓰면 순수문학, 그게 잘 팔리게 되면 통속문학으로 전락한다.)느니, '원래 순문학의 하위분야에 소설은 없다는 걸 문학 공부 안 한 사람들은 모른다' 는 이야기가 나온다.[13] 그전에 현진건은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된 일이 있다.[14] 이것 때문에 아내와 차남을 잃고 말았고, 심지어 이들의 후손들도 정말 가난하게 살고 있다.[15]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당시 문단은 유학을 다녀오거나, 최소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도시민들이 주류였다. 하지만 최서해는 식민지 소작농 가정의 보통학교 중퇴자라는 바닥 중에 바닥의 배경에서 독학으로 문단에 등단한 인물이며 한국 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 가운데 가장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생활고로 간도에서 막노동과 두부 장수 등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으며 결국 병마로 1932년에 31세로 짦은 삶을 마쳤다.[16] 당시 조선 최고의 영문 번역가. 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나오는 영어 선전물을 썼다.[17] 이를 천황 기관설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김동인의 독자적 학설은 아니고 일본 내에서 천황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던 내용이다. 천황 기관설은 "주권은 국가에게 있고(국가 주권설), 천황은 대통령이나 수상과 같이 헌법에 의해서 인정되는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다른 기관들과 협력해서 다스린다"는 학설이다. 그에 반대되는 것이 천황 주권설(군주 주권설)로, "주권은 천황에게 있고, 더 나아가서는 천황의 조상인 신의 혈통에게 주권이 있다(왕권신수설)"는 신칙 주권설로 나갔다. 그나마 온건 소수파였던 천황 기관설은 2차 대전 이전에 깔끔하게 박살나고, "천황=신=국가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 확립된다. 이 부분만 고려하면 2차 대전까지 일본은 명목상 전제군주정이다. 그리고 "천황은 신"이라는 주장이 승리하면서, 2차 대전 시기에 "천황은 신"이라고 홍보를 하게 된다. 2차 대전 패전 선언서 '신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이 부분에서 주권의 주체이기를 포기한다는 이야기가 된다.[18] 사실 일반 대중들은 이미 늦어도 1945년 초에 낌새를 느꼈지만(애초에 도쿄가 불바다 되어서 도쿄 토박이들도 시골로 내려가고, 조종사들에게 자폭공격이나 시키고 있었고, 이것이 전보와 전화로 알음알음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다수의 일반인들은 일제가 조만간 패망하거나 불리한 상황이라고 예측했었다.), 엘리트 친일파라는 사람이 오히려 국제정세를 잘 못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초반 상황만 보고 친일로 전향한 것인데 이제 와서 재전향하기에는 뭐하니 애써 현실부정을 했던 것이었다.[19] 흥미롭게도 제자백가에 속하는 사상가인 순자는 "소인은 뜻대로 일이 풀리면 교만하면서 편벽되고, 곤경에 처하면 자포자기해 못난 짓을 한다"고 《불구편》에 쓴 바 있다. 이 역시 김동인의 생애와 절묘하게 맞물린다.[20] 냉돌방에서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부인이 이불 밑에다 3만 원을 넣어 두고 갔는데 그 3만 원도 이불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고 한다. #[21] 이는 그냥 극단적으로 이념에 미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자신과 반대되는 이념적 행동을 했다는 자체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모종의 이유로 장준하가 김동인에게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도 이념 하나만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평가해버리면 이념에 미쳐버린 광인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인데 상류층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22] 국문학 작가 전집, 문학전집 발간은 80~~90년대에 활발하다가 2000년대부터 사그라들았다. 조선일보사 17권 전집은 백마강 같은 친일작품과 비문학까지 포함시켜 2022년까지 출간된 김동인 전집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1~13권까지는 문학작품, 14~16은 산문, 17권은 연구서로 구성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전집은 아닌데 출간 이후 추가로 발굴된 글(주로 해방후에 우익 활동하며 쓴 산문이다.) 혹은 연재되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발견되지 않은 소설이 있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호구를 위해 굉장히 다작했고, 이때 알려진 것 외에도 여러 필명을 사용했으며, 후대 연구자들이 확보하기 힘든 잡다한 신문, 잡지 기고문도 많아서 엄밀한 의미의 전집은 불가능하다.[23] 이것은 상단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천황을 일개 인간으로 언급했다가 정보원의 밀고로 처벌된 사건이다.[24]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다. 디스패치 등의 연예지나 증권가 찌라시에서 연예인들의 루머를 퍼뜨릴 때 사용하는 묘사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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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의 성채와 역사의 늪: 김동인의 문학적 천재성과 변절의 초상



1. 근대 문학의 개척자, 그 모순된 이름

한국 근대 문학사의 지평을 논함에 있어, 우리는 필연적으로 김동인(金東仁)이라는 거대하고도 일그러진 이름과 마주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의 열기가 채 식기 전, 식민지 조선의 문단에는 이른바 ‘문학 삼총사’라 일컬어지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이 등장하여 각기 다른 서사적 항로를 개척했다.

그중에서도 김동인은 당대 문학의 거두였던 이광수의 ‘계몽적 이상주의’가 지닌 작위성과 설교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오직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가치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예술적 이상주의’의 기수였다.

김동인이 제시한 핵심 담론인 ‘지각의 서사화’는 한국 서사론 연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이광수가 지향했던 ‘상상의 서사화(비루한 현실을 넘어선 소망의 구현)’나 염상섭이 구축한 ‘개념의 서사화(객관적 현실의 논리적 파악)’와는 궤를 달리하는 혁명적 시도였다.

김동인에게 소설이란 작가의 주관적 지각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인물이 움직이고 기능하는 폐쇄적이면서도 완벽한 소우주여야 했다.




그러나 이처럼 눈부신 심미적 성채의 이면에는 지독한 선민의식, 타자에 대한 병적인 멸시,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의 비극을 자신의 사치스러운 삶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추악한 변절의 기록이 암종(癌腫)처럼 자리하고 있다.

평양의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오만과 방탕으로 점철된 그의 초기 생애는 그에게 독보적인 탐미주의적 시각을 선물했으나, 동시에 역사적 책무를 망각한 ‘망국인’의 싹을 틔웠다.

본 글은 김동인의 문학적 천재성이 한국 문학을 어떻게 현대화했는지 분석하는 동시에, 그 천재성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어떻게 권력에 부역하며 스스로를 파멸시켰는지를 냉철하게 해부하고자 한다.




김동인


2. 평양의 '댄디'와 《창조》의 탄생: 유미주의적 세계관의 기원

김동인의 문학적 자아는 평양의 막대한 부(富)와 일본 유학이라는 특권적 환경 속에서 배태되었다.

그의 부친 김대윤은 평양의 대부호이자 장로교 장로였으며, 김동인은 부친 사후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유산을 바탕으로 전형적인 ‘댄디(Dandy)’의 삶을 영위했다.

유홍준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시절 김동인은 투정을 부릴 때 가시가 박힐까 염려한 부모가 이불을 깔아줄 정도로 과보호 속에 자랐다.

이러한 유년의 기억은 그가 세상을 자신의 발밑에 둔 ‘전능한 작가’로서 군림하게 하는 성격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 최고급 백금 시계와 시곗줄을 차고, 요정 명월관에서 수십 명의 기생을 거느리며 사치와 방탕의 극치를 달렸다.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을 수집하는 취미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중국에서 신의주까지 인력거를 부르는 기행을 일삼기도 했다.

이러한 방탕은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수학했던 경험과 결합하여 문학을 ‘시각적 지각’의 연장선으로 보게 하는 독특한 유미주의로 진화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를 창간할 당시, 그는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며 조선어 서사의 현대화를 꾀했다.

특히 3인칭 대명사 ‘그녀’의 도입은 근대적 자아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19년 도쿄, 《창조》 창간 준비 중]

김동인: "이보게 요한(주요한), 조선어에도 이제 서구처럼 명확한 3인칭 대명사가 필요하지 않겠나? 매번 이름을 부르거나 모호하게 지칭하는 것은 근대적 자아의 내면을 포착하기에 너무나 원시적이네."

주요한: "그렇긴 하네만, 우리말에 없는 표현을 억지로 만드는 게 독자들에게 생경하게 들리지 않겠나?"


김동인: "예술가는 대중의 뒤를 쫓는 자가 아니라 길을 만드는 자일세. 나는 이번 소설 〈약한 자의 슬픔〉에서 ‘그녀’라는 표현을 과감히 도입할 것이네. 이것이야말로 조선어 문학이 지각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광수식 설교에서 탈피하는 첫걸음이 될 걸세."




이처럼 김동인은 문학을 민족적 현실과 분리된 순수한 미적 구축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 지상주의는 태생적으로 현실에 대한 차가운 방관과 역사적 책임의 결여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보여줄 궤변적 변절의 단초가 되었다.



3. 작품 세계의 다각도 분석: 탐미와 자연주의의 변주

김동인 문학의 가치는 상호 모순되는 경향성들이 한 작가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탐미주의, 자연주의, 인도주의, 그리고 심지어 과학적 상상력인 SF까지 자유자재로 변주하며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적 형식미를 완성했다.




그의 대표작 〈배따라기〉는 한국 문학 최초의 세련된 액자 소설로 평가받는다.

겉이야기의 ‘나’가 속이야기의 ‘표백자’를 만나 대동강 가에서 슬픈 가락을 듣는 이 구조는 김동인이 주장한 ‘지각의 서사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작가는 자신이 관찰하고 인지한 범위 내에서만 인물을 기동시키며 서사의 완결성을 확보한다.



또한, 김동인은 흔히 유미주의자로만 알려져 있으나 〈K박사의 연구〉(1929)와 같은 작품을 통해 한국 최초의 SF적 시도를 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인분을 식량으로 전환한다는 엽기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소재는 그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좇는 이가 아니라, ‘지각’의 영역을 과학적 상상력으로 확장하려 했던 실험가였음을 입증한다.


김동인 주요 작품의 서사적 및 서사학적 경향 비교

작품명
주요 경향
핵심 주제
서사학적 지향 (Source 분석)
문학사적 가치

〈배따라기〉
탐미주의
오해와 질투가 부른 유랑의 비극
지각(Perception)의 서사화
최초의 완성도 높은 액자소설

〈감자〉
자연주의
환경에 의한 인간의 도덕적 타락
지각(Perception)의 서사화
근대 자연주의 소설의 전형

〈광염 소나타〉
탐미주의
예술적 광기를 위한 도덕의 파괴
지각(Perception)의 서사화
극단적 예술 지상주의의 구현

〈광화사〉
탐미주의
추(醜)를 통한 미(美)의 완성
지각(Perception)의 서사화
유미주의적 광기의 절정

〈발가락이 닮았다〉
인도주의
불임 남성의 고뇌와 부성애의 투영
지각(Perception)의 서사화
김동인식 인도주의의 발현

〈무정〉 (비교용)
계몽주의
민족적 이상과 신교육의 지향
상상(Imagination)의 서사화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 (이광수)

〈삼대〉 (비교용)
사실주의
세대 갈등과 근대적 가치 대립
개념(Concept)의 서사화
리얼리즘의 전형 (염상섭)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김동인의 서사학적 지향은 철저히 작가의 ‘지각’에 머문다.

이광수가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독자를 선동하고, 염상섭이 사회적 ‘개념’으로 현실을 진단할 때, 김동인은 오직 자신의 눈에 비친 감각적 세계만을 문학적 진실로 믿었다.

이러한 고집은 그에게 정교한 문체와 구성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읽어내는 안목을 거세하는 결과를 낳았다.



4. 일그러진 초상: 성차별, 인종주의, 그리고 문단 내의 불화

김동인의 예술적 천재성은 타자에 대한 극심한 멸시와 공격성이라는 어두운 뒷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독선은 동료 문인들과의 병적인 라이벌 의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학적 폭력으로 표출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여성 작가 김명순에 대한 ‘간접적 살인’ 행위다.

김동인은 소위 ‘신여성’을 증오했다.

그는 기생 출신의 어머니를 둔 김명순의 불행한 가정사와 악성 루머를 노골적으로 비튼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이는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한 여성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린 명백한 ‘문학적 인격 살인’이었다.

김명순은 이 잔혹한 음해를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한 그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감자〉와 〈붉은 산〉 등에서 중국인 지주나 화교를 지저분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로 묘사한 것은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에서 느끼던 열등감을 ‘우리보다 못한 중국인’을 멸시함으로써 해소하려 했던 비겁한 레이시즘(Racism)의 발현이었다.

문단 내에서의 불화 역시 그의 병적인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염상섭의 외모를 조롱하기 위해 〈발가락이 닮았다〉를 썼다는 의혹은 당대 문단에 널리 퍼진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며, 이광수가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을 때 그에게 '자살'을 권유한 일화는 그의 인간미 없는 결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 "춘원, 자네가 그토록 소리 높여 외치던 민족의 지조가 꺾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지 않겠나? 차라리 고결하게 자살함으로써 자네의 문학적 이름이라도 보전하는 것이 예술가다운 말로일세."


이러한 태도는 이광수를 향한 순수한 미적 조언이라기보다, 경쟁자에 대한 시기심과 자신만이 고고한 예술가라는 오만함이 뒤섞인 냉혈한의 일성(一聲)이었다.


5. 명백한 변절: '히가시 후미히토'의 길과 친일 행적

김동인의 친일은 생존을 위한 불가항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탕진한 부를 회복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대접받고자 했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역’이었다.

1939년, 그는 조선총독부를 직접 찾아가 ‘북지 황군 위문 문단 사절’을 제안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는 일제의 강요가 있기 전, 지식인이 먼저 권력에 굴종을 제안한 추악한 선례였다.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황군위문'을 조직해 일본군 위문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 중국전선으로 위문 갔을 때 모습


그는 ‘히가시 후미히토(혹은 곤토)’로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문인보국회 상담역을 지내며 일제의 병참기지화 전략에 적극 동참했다.

특히 친일 소설 〈백마강〉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일본 역사의 하위 범주로 편입시키는 미친짓을 저질렀다.

이는 조선의 역사를 일본에 헌납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친일소설 백마강


그의 변절이 얼마나 정세에 어두운 상태에서 행해졌는지는 1945년 8월 15일 당일의 행적이 증명한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총독부]

김동인: "아베 과장, 시국이 엄중한 만큼 우리 문인들이 황군을 위문하고 내선일체를 공고히 선전할 새로운 작가단을 조직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그 선봉에 서겠소."

아베 다쓰이치: "김 선생, 이제 그만 돌아가 보시오. 곧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을 것이오. 이제 그런 작가단은 의미가 없단 말이오."




일제가 패망하기 불과 두 시간 전까지도 총독부에 부역할 길을 찾던 김동인은 정오의 옥음방송을 듣고서야 세상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그가 주장한 ‘지각의 서사화’가 정작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읽어내는 데는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6. 해방 이후의 변명과 쓸쓸한 최후: '망국인'의 궤변

해방 후 김동인이 발표한 산문 〈망국인기〉와 〈속 망국인기〉는 지식인의 비겁함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궤변의 기록이다.

그는 자신의 친일을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이었다"고 미화했다.

그러나 이는 미군정으로부터 적산가옥(Sumitomo 경금속회사 사장 사택)을 불하받기 위한 생계형 변명에 불과했다.

나는 여기서 김동인이 생전에 즐겨 언급했다는 ‘백담비(白淡妃)의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백담비는 자신의 하얀 털을 너무나 사랑하여 진흙탕을 피하지만, 한 번이라도 털이 더러워지면 자포자기하여 진흙탕에서 이리저리 뒹군다고 한다.

김동인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한때 고결한 예술의 성채를 쌓던 자가, 한 번 역사의 오물을 묻히자 걷잡을 수 없이 친일과 궤변의 늪에서 뒹굴며 타락해버린 것이다.




그의 말년은 참혹했다.

사업 실패와 중풍, 폐렴이 겹친 그는 1.4 후퇴 당시 피난을 시도했으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뱃사공이 승선을 거부하며 왕십리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가족들이 피난을 떠난 사이, 그는 냉골방에서 혼자 배설물을 받아내며 고통 속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7개월이 지난 뒤에야 밭고랑에서 부패한 채 발견되었으며, 옷가지로 겨우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당대 최고의 문호라 자부하던 이의 종말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한 역사적 인과응보였다.


7. 김동인이라는 모순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동인은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적 형식을 완성한 천재였으나, 동시에 역사와 윤리를 배신한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그가 쌓아 올린 탐미의 성채는 눈부셨으나, 그 성채의 지반은 역사의 늪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예술 지상주의가 역사적 무책임과 결합했을 때, 그것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구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가두는 차가운 감옥이 됨을 김동인의 생애는 증명한다.

오늘날 ‘동인문학상’을 둘러싼 존치 논란은 우리에게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동인문학상 폐지 집회 전단


작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예술적 성취가 도덕적 과오를 면제해줄 수 있는가?

김동인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영원한 긴장을 촉구하는 역설적인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그의 문장들은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그 문장을 쓴 자의 삶은 우리에게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슬픈 경고문이다.





이 글은 김동인의 문학적 성취와 역사적 과오를 동시에 조명하기 위해, 신뢰 가능한 연구 성과와 기존 사료를 바탕으로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비평문입니다.

일부 장면과 대화는 당시의 기록, 회고, 정황을 참고한 서술적 재현이며, 사실의 핵심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본 글의 목적은 특정 인물을 미화하거나 단죄하는 데 있지 않으며, 예술의 자율성과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성찰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의 사실 관계에서 오류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석의 차이, 반론, 추가 자료 제시 또한 환영하며, 건설적인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비판과 논의는 이 글을 더욱 정확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기여가 될 것입니다.


Kim Dong-in was a central figure in modern Korean literature, celebrated for refining the aesthetic form of the short story while insisting on the autonomy of art.

Rejecting Yi Kwang-su’s didactic idealism and Yeom Sang-seop’s social realism, Kim advanced what can be described as a “narrativization of perception,” confining fiction to the author’s sensory and subjective awareness.



His works, ranging from aestheticism and naturalism to early science fiction, modernized Korean narrative technique and style.

Yet this artistic brilliance was inseparable from moral failure.

Kim’s elitism manifested in misogyny, racial prejudice, and destructive attacks on fellow writers.

Most critically, his later years were marked by voluntary collaboration with Japanese colonial power, motivated not by coercion but by personal ambition and material survival.

After liberation, he rationalized his actions through self-serving rhetoric, dying in isolation and disgrace.

Kim Dong-in thus remains a paradox: a literary innovator whose aesthetic absolutism collapsed into historical irresponsibility.

Korean Fig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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