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제국 일본의 교두보
오카베 마키오 (지은이),최혜주 (옮긴이)어문학사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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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이 어떻게 서구 열강들의 눈을 피해 동북(만주)을 조용히 잠식하기 시작하였고, 어떻게 만주의 자원, 농산물, 인력 등을 계획적으로 취탈하였는지를 철저한 사료의 고증을 통해 분석한 책이다.
귀납적 논리에 입각한 틀로 짜인 글을 읽다보면, 만주국을 일본의 전쟁물자, 식량공급선, 지하자원 등을 제공하기 위한 중간기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들이 동시에 만주국을 자멸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3
-현대사 속의 ‘만주’ 9
Ⅰ만주국의 탄생-괴뢰국가의 정치사 21
1. 만주사변이 의미하는 것 22
2. 파견군이 만든 나라 35
3. 성장하는 괴뢰제국 75
Ⅱ전쟁준비와 산업개발-5개년계획과 그 모순 105
1. 산업개발 5개년계획 106
2. 5개년계획의 자금과 물자 123
3. 관동군의 전쟁준비 145
4. 총동원과 민중에의 압박 168
배달되지 않는 편지-만주국의 농업정책 189
1. 동북의 농업과 농민 190
2. 만주국의 농업정책 204
3. 일본인 농업이민 224
만주국의 유산은 무엇인가 241
-참고문헌 254
-저자후기 263
-학술문고판 후기 264
-역자후기 271
-색인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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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차 대전 시기에 일본의 동북경영은 크게 진전되었다. 농업 발전과 탄광 확장으로 만철의 수송량은 현저하게 늘어나, 대두의 국제상품화, 만철의 배양선培養線 개통, 러시아혁명의 전란에 따른 중동철도의 수송력 저하 등이 이에 박차를 가했다. 안산鞍山에 철광산을 획득한 만철은 일본의 중공업 발흥에 맞추어 제철사업에도 나섰다.
금융면에서는 일찍부터 지반을 굳혀 요코하마쇼킨橫浜正金은행에 가담하여 조선은행과 동양척식 등의 반半국가적인 일본자본이 동북에 진출했다. 미쓰이三井, 오쿠라大倉 등의 재벌을 선두로 민간자본이 동북으로 유입되는 것도 성행했다. 동북에 있는 일본의 민간회사는 1911년에 30사, 불입자본금은 약 1억 1,200만 엔이었다. 10년 후인 1921년에는 797사, 약 5억 1,700만 엔을 셀 수 있게 되었다.
-p.25, 26 중에서
관동헌병대와 각지의 특무기관은 반만 항일운동을 하거나,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되는 인물 가운데, 사법기관에 “사건을 송치하는 것도, 불기소 내지 단기형의 판결을 받는 것이 예상되는 자”나, “죄상이 가볍다고 해도, 석방이 불가한 자”(고문의 희생자인가?)를 법의 수속을 무시하고 제731부대에 보냈다. 부녀자를 포함한 이들 ‘특이급特移扱’의 사람들은 부대의 감옥에 수용되어, 필요에 응해 각종 생체실험에 이용되었고,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균감염실험, 동상실험, 내압실험 등외에, 말의 혈청을 대량으로 주사하거나, 정맥에 공기를 주입하는 흥미본위의 실험까지 했다. 이들 생체실험의 희생자는 매년 500~600명을 내려가지 않았고, 1940~1945년에 제731부대 본부만으로 3,000명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p.167 중에서 접기
사이토 내각은 만주국에 특명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에 이 전권대사와 관동주 행정의 지도감독권을 겸임시킨다는 편법을 고안해냈다. 만주국에 대한 지도는 군사령관 겸 전권대사의 `내면적 통할 아래 주로 일본계 관리를 통해` 행하도록 되었다. 이것이 군사령관의 내면지도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50) - nana35
이 시기의 국제정세는 예상한 바와 달리 일본에 매우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주의국은 대공황 이래 내외에 많은 문제를 안고, 또 소련은 전력을 다해 5개년 계획에 따른 국내 건설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인 간섭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본에 대해 강하게 나오는 것은 도리어 군부를 자극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에 동정적이었지만 반면, 일본의 행동이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을 누르는 것이라고 기대했다. 72-3) 접기
태평양 전쟁 하의 만주국은 불충분하게 치우친 산업구조를 책임진 채, 증산과 대일수송의 증대만이 냉엄하게 추구된 셈이 된다. 그것은 경제통제와 민중동원의 끝없는 확대뿐이 없었다.
...
전쟁준비를 위해 시작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은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 모순을 깊게 하여, 전쟁 가운데 붕괴해 갔던 것이다. 122) 접기
대본영은 1944년 9월, 대소전략을 지구持久 수세로 180도 전환하여, 관동군의 작전계획을 전면적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
관동군의 약체화는 동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만주국의 지배 체제를 근본으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과거에는 정예의식이 강했던 만큼, 이 현실은 또한 관동군의 내외에 걸쳐 비합리성과 비인간성을 증대시켜, 만주국 지배에 폭력적 성격을 강하게 했다. 165) 접기
이 (동북 지방) 침략을 추진한 것은 군부, 특히 관동군인데 일본의 지배층과 정부는 때로 군부와 생각이 달랐음에도, 이러한 형태로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결국 모든 기정사실을 인정했다.
...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과 만주국 성립을 발판으로 군부의 정치상 발언권이 강해져, 파시즘이 대두해온다. 242-3)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오카베 마키오 (岡部牧夫)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1941년 도쿄에서 출생
세이케이대학成蹊大學 정치경제학부 졸업
저술업
*주요 저서 및 자료집
<出處進退について-昭和史省察>(1989)
<15年 戰爭史論>(1999)
<帝國主義と植民地>(2001)
<海を渡った日本人>(2002)
<近代日本の戰爭をどう見るか>(2004, 공저)
<日本植民地硏究の現狀と課題>(2008)
<南滿洲鐵道會社の硏究>(2008)
<滿洲事變における憲兵隊の行動に關する資料>(1987)
<滿洲移民關係 資料集成>(1990)
<初期の滿洲國軍に關する資料>(1992)
<滿洲移民關係 資料集成 第2期>(1998)
<昭和天皇>(2002, 공역) 접기
최근작 :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총 2종 (모두보기)
최혜주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문학박사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인문과학대학 연구생 ㆍ 석사 ㆍ 박사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 외국인연구원(2003)
숙명여자대학교 학술연구교수(2002-2005)
한양대학교 학술연구교수 ㆍ 연구교수 ㆍ HK교수(2006-2021)
독립유공자 공적검증위원(2022-202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연구이사(2013- )
상명대 ㆍ 한양대 연구원(2022- )
저서 『滄江 金澤榮의 한국사론』(1996),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통치론』(2010, 한국간... 더보기
최근작 : <시찰·여행·침탈>,<언론·출판 관련 번역 자료집 2>,<언론·출판 관련 번역 자료집 1> … 총 3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파시즘 체제를 반성하는 일본의 작은 물결
일본 제국주의가 국제사회에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로 낳은,
14년 역사에 이름을 남긴 괴뢰국가 ‘만주국’의 탄생과 자멸
중국의 동북에 위치한 만주는 청일 .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 아래 침략전쟁을 수행하여 종당에는 대륙 진출이라는 거대한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조그마한 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본국과도 멀리 떨어진 중국 동북(만주)에서 그들이 실질적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 관동군이 중국 동북(만주)에 만주국을 건국할 당시 외형상으로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하게 하고, 구 군벌의 군인과 관료를 기용하는 등 독립국의 모습을 취하게 했지만, 동북(만주)은 일본 영토에 물자, 노동력, 자원을 공급하는 생명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은 오로지 자국의 국내 산업에 자원을 공급하고,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소련에 대응한 군사기지를 만들고,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적인 기반을 닦기 위해 만주국을 철저히 이용하고 침탈했던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의 다른 식민지 국가 지배형식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기형적인 형태를 가진 식민지 유형의 하나였다.
이 글은 일본이 어떻게 서구 열강들의 눈을 피해 동북(만주)을 조용히 잠식하기 시작하였고, 어떻게 만주의 자원, 농산물, 인력 등을 계획적으로 취탈하였는지를 철저한 사료의 고증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이 책의 원서는 이미 1978년 산세이도에서 나온 뒤 30년 만에 고단샤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다. 당시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이 만주국의 사회 . 경제 기반을 닦아주어 동북(만주)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등 일본 내에는 여전히 아시아 침략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보수파의 시각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역사의 과오를 스스로 밝히고, 인정하는 세력들도 존재한 것이다. 저자인 오카베 마키오 씨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과거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사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기구 가운데 어떠한 선의의 개인도, 객관적으로 보면 타 민족에의 침략과 억압의 역사적 책임을 어쩔 수 없이 분담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쓸데없이 미화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과 일본인이 해온 현실의 역사적 역할을 응시하여, 파시즘의 재기나 제국주의의 지배를 막는 것이다.”
1910년대 이후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였고,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또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문제나 ‘동북공정’ 문제는 현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만주를 조명하는 것은 곧 독도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 과거 식민지 국가의 상흔을 지우지 못하는 우리에게 큰 시사를 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역사가가 이른 시기에 낸, 초보적이면서 실증에 근거한 통사”
오카베 마키오 씨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제국주의 파시즘의 식민지 지배를 규탄, 또는 변호하는 연역적인 논리를 피해, 역사의 사실 과정을 분명히 한 위에 역사상을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귀납적 방법을 취했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 당시의 한정된 사료 상황 가운데 가능한 한 실증을 명시했다.
귀납적 논리에 입각한 틀로 짜인 글을 읽다보면, 만주국을 일본의 전쟁물자, 식량공급선, 지하자원 등을 제공하기 위한 중간기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들이 동시에 만주국을 자멸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5개년계획의 실패로, 태평양전쟁 하의 만주국은 불충분하게 치우친 산업구조를 책임진 채, 증산과 대일수송의 증대만이 냉엄하게 추구된 셈이 된다. 그것은 경제통제와 민중동원의 끝없는 확대뿐이 없었다. 1942년 임시자금통제법 개정, 중요산업통제법 폐지와 이것에 대신하는 산업통제법 제정 등은 어느 것이나 통제 범위와 방법을 한꺼번에 강화하는 것이었다. 전쟁준비를 위해 시작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은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 모순을 깊게 하여, 전쟁 가운데 붕괴해 갔던 것이다. (본문 97쪽)
이 책의 구성과 특징
이 책은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지닌 일본인의 관점에서 만주국의 실태와 모순을 노정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먼저Ⅰ장에서는 만주사변의 역사적 의미를 포함해, 세계사의 현실과 관련시키면서, 만주국 의 설립과 육성의 정치 과정을 좇는다.
먼저 이 장에서는 일본 관동군이 근대전 총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 경제적 기반을 어떻게 닦아나가는지 상술한다. 가지 않은 불모의 땅을 개척한 것인 만큼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을 처음부터 성공리에 진행시킨 것은 아니었다. 일본 관동군이 동북(만주)을 일본 경제권에 흡수시켜 군수산업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동북에 진출하는 일본의 민간 자본의 투자를 활성화시키고, 그 이윤배분에도 강한 통제를 가한다. 군수산업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경제 체제보다는 군의 완벽한 통제에 따른 균형적인 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안한 치안상황과 이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때문에 민간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게 된다. 관동군은 만주국의 중앙국가기관이나 다름없었던 만철을 분해해 업종별 독립 특수 회사로 만든 뒤 군의 직접적인 통제를 가한다. 또한 만주국을 구성하는 4성에 대한 치안정책, 일반행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분해하기 시작한다. 구 군벌의 지반으로 전통적인 독립성을 조금 유지하고 있던 4성을 14성으로 쪼갬으로써 군부에 대한 중앙집권화와 치안, 경제 통제를 원활하게 진행한 것이다.
이어서 Ⅱ장에서는 일본 파시즘이 만주국에 가장 기대한 점, 즉 총력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산업개발과, 소련에 대한 반혁명적인 전쟁준비를 축으로, 만주국의 지배 실태와 모순을 분석한다.
이 장에서는 전쟁준비를 위한 5개년계획에 따른 본격적인 산업개발이 어떻게 이뤄지고, 5개년계획과 북변진흥계획 등의 내부 모순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5개년계획의 목적은 대소전 준비의 경제적 기초를 위해 “유사시 필요한 자원의 현지개발에 중점을 두고,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국내의 자급자족과 일본의 부족자원 공급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광공·농축산·교통통신·이민의 각 부문에 걸치며, 특히 철광.석탄 부문에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각 부문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문제들이 맞물려 5계년계획과 북변진흥계획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만주국에 대한 일본투자가 한계에 달하고, 외자도입의 길이 막히자, 정부는 당장 국민저축운동을 시행한다. 하지만 심각한 인플레가 일어나, 물가가 폭등하고, 이것은 민중의 생활을 파괴해 결국 5계년계획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또 제철업의 경우, 만주국은 일본에 제강원료를 공급하지만, 동시에 일본산 강재를 소비하는 비합리적 일면을 보인다. 5개년계획은 생산력 확충이라는 본래의 성격을 잃고, 제한된 설비로 최대의 증산을 강행하는 것으로만 전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노무동원의 강화, 노동조건의 저하를 가져오고, 민중에의 직접 착취를 증대시켰다. 결국 반만 항일 감정을 더욱 자극시켜, 반만 항일운동에 가담하는 민중들이 점차 늘어나며 만주국의 괴멸을 가져왔다.
마지막 Ⅲ장에서는 동북 지방은 본래 농업지역이고,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므로 농업정책의 실태를 파악하여, 식민지 지배와 민중의 관계를 밝혀 그 모순을 그린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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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오카베 마키오
군대는 민간 정부의 관리 아래에서는 전쟁을 억제하는 조직이지만 자율권을 획득하는 순간 전쟁을 촉발하는 조직으로 변모한다. 군대가 국가의 주축이 되면 외교적 협상 전략을 군사적 점령 전략으로 치환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며, 국가의 전 역량을 전쟁 수행에 쏟아붓는 하나의 선택지에 올인하게 된다. 전쟁은 그야말로 생명을 불살라 승리를 쟁취하려는 한 판 도박이기 때문에 실패할수록 오히려 매몰 비용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킨다.
2•26 사건으로 일본 군부는 정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현실화한다. 동북 군벌 장쭤린을 폭사(1928)시키고, 유조호 사건(1931)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은 정부의 묵인과 방조를 넘어 미래를 창조하려 했던 관동군의 테러행위였다. 군사 기지를 방불케 하는 만주국의 체제는 태생부터 예견되어 있었으며, 전쟁만을 위한 총체적 착취로 달궈진 총구를 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파괴뿐이었다.
사이토 내각은 만주국에 특명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에 이 전권대사와 관동주 행정의 지도감독권을 겸임시킨다는 편법을 고안해냈다. 만주국에 대한 지도는 군사령관 겸 전권대사의 `내면적 통할 아래 주로 일본계 관리를 통해` 행하도록 되었다. 이것이 군사령관의 내면지도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50)
이 시기의 국제정세는 예상한 바와 달리 일본에 매우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주의국은 대공황 이래 내외에 많은 문제를 안고, 또 소련은 전력을 다해 5개년 계획에 따른 국내 건설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인 간섭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본에 대해 강하게 나오는 것은 도리어 군부를 자극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에 동정적이었지만 반면, 일본의 행동이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을 누르는 것이라고 기대했다. 72-3)
태평양 전쟁 하의 만주국은 불충분하게 치우친 산업구조를 책임진 채, 증산과 대일수송의 증대만이 냉엄하게 추구된 셈이 된다. 그것은 경제통제와 민중동원의 끝없는 확대뿐이 없었다.
...
전쟁준비를 위해 시작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은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 모순을 깊게 하여, 전쟁 가운데 붕괴해 갔던 것이다. 122)
대본영은 1944년 9월, 대소전략을 지구持久 수세로 180도 전환하여, 관동군의 작전계획을 전면적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
관동군의 약체화는 동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만주국의 지배 체제를 근본으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과거에는 정예의식이 강했던 만큼, 이 현실은 또한 관동군의 내외에 걸쳐 비합리성과 비인간성을 증대시켜, 만주국 지배에 폭력적 성격을 강하게 했다. 165)
이 (동북 지방) 침략을 추진한 것은 군부, 특히 관동군인데 일본의 지배층과 정부는 때로 군부와 생각이 달랐음에도, 이러한 형태로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결국 모든 기정사실을 인정했다.
...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과 만주국 성립을 발판으로 군부의 정치상 발언권이 강해져, 파시즘이 대두해온다.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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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5-05-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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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심과 일본의 망상
며칠 앓다가 회복기 환자 모드로 서재에 들어오니 짧은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낯익은 것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니까. 원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해외여행 대체로 며칠 감기몸살과 함께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병원비야 좀 들겠지만 해외여행 경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암이 아니라 감기몸살이잖은가!). 여행의 재미에는 물론 견줄 수 없지만 고생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면이 있고(무더위속에서 몇 시간씩 걷는 것과 고열로 방안에 널브러져 있는 것), 막상 끝나는 시점에는 상황이 역전된다. 여행은 일상의 단조로움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지만 감기몸살은 일상의 안락과 고마움을 재발견하게 한다. 그 정도면 비교거리는 되지 않을까.
이상이 회복기 환자의 넋두리였고, 며칠 놀았던 서재일도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일단 '이주의 발견'부터. 내일이 광복절인 만큼 일본 관련서 두 권을 골랐다. 일본의 양심과 일본의 망상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이다. 먼저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 양심의 탄생>(동아시아, 2015). 저자는 게이오대 역사사회학자로 국내에 이미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건 " 저자가 아버지의 일생을 인터뷰하면서 민중사, 개인사적 서술을 통해 일본의 지난 20세기를 그려낸 책"이다. 원제는 '살아서 돌아온 남자 - 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이고 번역본 부제는 '한 일본인의 삶에 드러난 일본 근현대 영욕의 민중사'다.
이 책은 ‘전쟁 체험’의 범위를 본격적으로 넓힌다.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전쟁 전의 삶과, 전쟁 후의 삶을 샅샅이 추적한다. 오구마 겐지의 일생을 통해 전쟁이 인간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전후 평화의식’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아버지의 인생사를 각 시대의 사회적 맥락에 위치시킨다. 한 사람의 일생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 서술이 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해낸 것이다. 한 인물의 인상과 성격이 아닌, 매 시대 그가 행했던 선택, 일, 그에 대한 결과를 그저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입체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역사서술의 방식으로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일본 양심의 탄생>이 평범한 일본 민중의 양심을 엿보게 해준다면 그와는 정반대되는 게 이시와라 간지의 <세계최종전쟁론>(이미지프렘임, 2015)이다. 어떤 인물인가 생소해서 저자 프로필을 봤다.
1889년생, 1945년 사망. 일본육군 중장,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 종교인.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한 만주사변의 주범으로 만주국 건국을 주도했다. 이후 자신의 망상인 최종전쟁에 돌입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확전을 주장한 도조 히데키에 반대하다 예편당했다. 이후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국방과학을 가르치다 평론가가 되었으며, 전후 도쿄 전범재판에서 증인으로 활동하고 죽었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에 반대했다고 하니까 좋게 봐줄 수 있나 싶지만 둘다 나쁜 놈이다. 스탈린식 표현을 빌리자면 둘다 '더 나쁜 놈'이다. <세계최종전쟁론>은 그의 전쟁론.
만주국을 세운 이시와라 간지의 전쟁론. 러일전쟁 이후 승승장구한 덕에 자신들을 과대평가하며 미쳐가던 일본 육군, 그 와중에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미친 한 명의 전략가가 있었다. 곧 닥쳐올 양 대국이 맞붙는 최후의 대전쟁과 그 전쟁의 승리자가 영원한 평화를 일구는 새로운 질서의 주인이 되리라는 그의 망상이었다. 일본을 최종전쟁에서 맞붙을 양 대국 중 하나로 만들겠다던 이시와라 간지는 망상 끝에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렇게 세워진 만주국, 이시와라는 이 만주국을 최종전쟁에서 일본의 가장 든든한 우방으로 키우려 했다.
찾아보니 이시와라 간지에 대해서는 위톈런의 <대본영의 참모들>(나남, 2014)과 호사카 마사야스의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 2012)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사실 만주국은 우리 현대사와 무관할 수 없다. 박정희가 바로 만주국 장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출신으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국의 제도, 정책, 신념 등이 내면화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다(<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함께, 2012)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만주국 관련서들을 드문드문 모아놓고 있는데, 읽을 여유가 없다. 모아놓고 읽을 만한 테마독서 거리다...
15. 08. 14.
- 접기
로쟈 2015-08-14 공감 (5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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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화재단 독서챌린지 1기] 29주차 : 만주사변과 만주국... 메이지에서 쇼와로.


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북평(北平)의 국민군을 내몰고 대원수가 되었으나 결국 북벌군 장개석(蔣介石)에게 패하여 봉천(奉天)으로 가던 열차에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관동군(關東軍)에 의해 폭사했는데, 패전한 장작림을 뒤쫓아 국민군이 만주로 진격해올 경우 일본은 매우 불리한 입장이므로 관동군의 고급 참모 가와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의 공작에 의해 장작림을 폭살하고 동북 삼성(三省)을 혼란에 빠뜨려 단숨에 그들은 만주를 장악한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1927년의 일이거니와 역시 만보산 사건을 이용하여 던진 미끼를 중국은 물지 않아 일본의 희망은 또 한 번 무너졌다(p207)... 그것이 바로 만주로 향한 진격,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군부의 관동군 스스로 봉천역 북방 팔 킬로 지점에 있는 유조구의 철도를 폭하한 뒤 장학량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공격을 개시한 각본은 관동군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작품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208/594
인실과 오가타, 오가타와 찬하가 서로 이해와 갈등을 나누는 사이 <토지 15> 속의 시간은 1930년대를 지나간다. 이 시기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행보가 극단으로 치닫기에, 그 시점이 된 1928년 장쭤린 폭살사건(황고둔 사건 皇姑屯事件)과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을 통한 만주국(滿州國) 수립(1932)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를 살펴보려 한다. <쇼와 육군>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1939 ~ ) 역시 이후 일본 관동군 중심의 육군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에 대한 시발점과 압축점으로 장쭤린 폭살 사건을 해석한다.



쇼와 육군을 검증할 때는 장쭤린 폭살 사건을 다각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이 무렵 중견 막료들이 육군 내부를 어떤 식으로 농단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장쭤린이나 장쉐량 張學良과 같은 중국 군벌에 대해 얼마나 모멸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등이 명확해진다. 게다가 이 사건에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보인 억지스러운 태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착오 등 훗날 쇼와 육군이 저지르는 잘못이 응축되어 있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69/974
장쭤린 폭살 사건 직전의 중국 상황은 청조(淸朝) 멸망 이후 납립했던 여러 군벌(軍閥)세력들을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북벌을 통해 제압하고, 최종적으로 동북부의 강자 장쭤린(張作霖, 1875 ~ 1928)과 결전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이 지점에서 장쭤린과 일본의 이해관계는 충돌한다. 장쭤린이 베이징(北京)에서 결전을 피하고 랴오허강(療河) 동쪽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일본은 장쭤린의 효용가치가 없음을 파악하게 된다. 어쩌면 일본 군부는 과거 후한(後漢)의 원소(袁紹, ? ~ 202)가 관도 대전(官渡大戰, 200)에서 패한 이후의 멸망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장작림은 일본을 의지하면서 북경정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일본은 만주와 몽고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장작림에 대한 지지와 지원은 계속되었다. 1928년 봉계군벌이 북벌군에게 참패하는 순간 장작림은 만주와 몽고의 특수이익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본에게 이미 장애물로 전락되었다. 일본은 장작림이 동3성에서 참패하여 물러날 경우 북벌군이 관외로 군대를 내보내는 것을 가장 염려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은 장작림을 폭사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동3성을 점령한다는 정책으로 급선회하였다. _ 이건일, <군벌 1>, p88/515
다만, 분명한 것은 장쭤린의 패전으로 전장이 동북3성이 위치한 만주로 확대되는 것을 일본은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 내전에 개입하여 만주지역에서의 자신들의 우위를 놓지 않으려 했지만, 이러한 요구는 국제 조약에 위배된 것이었고 장쭤린, 장제스 모두에게서 거부되기에 이른다. 위기에 몰린 일본의 선택. 그것은 장쭤린 폭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산둥 출병에도 불구하고 북벌군의 황허 도하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일본은 다음 책략으로 장쭤린과 장제스 양쪽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제국 정부로서는 전란이 만주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적당하고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남군(북벌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에 평톈군이 산하이관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남군의 만주 진입은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남국과 펑톈군이 베이징-텐진 지구에서 교전하거나 양군이 함께 만주로 진입할 경우 양쪽을 모두 무장해제하겠다. _ 권성욱, <중국 군벌 전쟁> , p778/1080
왜 일본은 장쭤린의 패배에 그토록 초조해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인과 군부, 군부 내에서 해군과 육군, 육군 내에서 관동군과 관동군이 아닌 비육군계의 갈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시대의 주역들이었던 사츠마, 조슈번의 출신 인물들이 실무에서 점차 손을 떼면서 새롭게 쇼와(昭和) 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때마침 1920년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 ~ 1925)라 불리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경제 호황으로 일본경제 역시 이 시기에 크게 부흥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획득한 원재료를 가공하여 일본 본토에서 가공하여 수출하는 기존의 방식에 더해 만주 지역의 면화, 콩 등 자원을 활용하려는 일본의 계획은 물류정책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지역에서의 철도를 만주철도에 위탁경영함으로써 대륙과 연결을 원활하게 하려는 1927년의 <조선철도 12년 계획>는 이러한 일본의 야심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만주철도가 바로 관동군의 배후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만주지역에 대한 장제스의 북벌군 진입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으며, 일본은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국내사정 역시 심각했다. 금융공황은 경제계를 휩쓸었고 급속한 공업화에 과도한 군비확장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물결은 드세게 일렁였다. 불경기는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으며 노동쟁의는 격화일로, 사회풍조는 퇴폐와 환란에 흠씬 젖어가고 있었다. 정계 또한 혼란의 연속이었다_ 박경리, <토지 15> , p208/594
관동군은 만주사변 이전만 해도 고정 사단이 없고 본국의 여러 부대가 2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파견 근무했다. 인원과 장비는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했다.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시 출동하기 위한 실전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힘은 조선군보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발언권이 막강했다. 관동군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 滿鐵이 있었다. _ 권성욱, <중국 군벌 전쟁> , p783/1080




1927년도 이후 도문선 건설 및 개량공사를 실시하였고, 1933년 9월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북선 침 동북만주지역의 교통망 정비와 나진항 이용 개발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청진 이북의 북선선(北鮮線)을 만주철도에 위탁경영하게 되었다. (p118)... (만주철도는) 1936년 6월 동북 만주 일대의 화물을 일본으로 반출될 수 있도록 북선 3항을 병합하는 의미에서 조선총독부로부터 청진~옹기 두 항을 임대받아 나진과 함께 관리, 경영하게 되었다. 북선의 위탁 철도는 일본과 북선, 만주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확충을 의미하며, 조선과 만주 지역의 각 철도 및 동해 항로를 통하여 일본의 철도와 연계 협조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계약 내용에 특히 조선 내외의 교통 편리를 증진하고 조선의 지방 개발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었다. _ 센코가이, <조선교통사 1> , p119
장쭤린 폭살 사건은 단순한 폭살 사건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정책 전반이 관동군에게 넘어갔음을 잘 보여준다. 만주철도의 이익을 위해 벌인 관동군의 무모한 행동이 견제받지 못하면서 이는 일본 패전에 좋은 선례를 남긴다. 이후 중일전쟁(1937) 등으로 폭주하는 일본 육군의 움직임에 자극되어 일본 해군 또한 진주만 공격(1941)으로 막나가면서 일본제국이 종말을 맞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쭤린 폭살 사건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일본 제국 멸망의 전조라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나카 수상은 철도대신 오가와 헤이키치의 보고와 외무성의 보고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이 보내온 보고서와 의문을 가졌을 법하지만 상세하게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이 키운 육군에 대한 신뢰를 중시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중견 장교가 조슈벌에 속하는 다나카와 시리카와(에히메 현 출신이지만 다나카의 직계)를 몰아 내는, 또는 메이지 유신 전후에 태어나 러일전쟁 때의 낡은 전쟁관을 갖고 있었으며 만주에 대해서도 군사에 의한 제압에 나서지 않는 세력을 내쫓는 교묘한 싸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나카는 이러한 계략을 충분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p87)...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만주사변에서는 제1막에 포함되어 있던 '실패의 교훈'이 교묘하게 되살아난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90/974
만몽 지방에서는 원래 러시아가 동청 철도의 신징 이남 노선(만철)과 랴오둥 반도(관동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이 그 권익을 양도받았다. 더욱이 일본은 펑톈과 푸순 등 만철 연선 沿線의 주요 지역 행정권과 그곳에 관동군을 주둔시킬 권리(주병권) 등도 함께 획득했다. 결국 러시아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장악하고 있던 식민지의 권익을 더 크게, 비대화하여 이어받았던 셈이다(p112)... 위기감을 느낀 관동군 참모는 점과 선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몽 지구(동삼성)를 일본의 뜻대로 움직이는 국가, 즉 점과 선이 아니라 면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런 의사를 관동군 내부만이 아니라 일본의 국내 정치에도 끌어들였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112/974
만주국 건설은 만주철도의 경제적 이해와 함께 '만몽 영유론'이라는 정치적인 구상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愛新覺羅溥儀,1906 ~ 1967)는 자신을 여진 히틀러와 같은 제3제국 - 금(金), 후금(後金, 淸)을 잇는 - 의 황제로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이시와라 간지( 石原 莞爾, 1889 ~ 1949)의 관념의 실현에 필요한 꼭두각시에 불과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을까.


1928년 10월의 이동으로 이시하라는 관동군 참모(작전 주임)가 되었다. 도쿄에서 육군대학 강의와 목요회에서의 '연구'를 현지에서 실행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1929년 7월, 15일간의 예정으로 이뤄진 북만주 참모 여행 기간 중 이시하라는 관동군 막료와 북만주 주재 무관에 대해 만몽 영유계획의 전모를 설명하였다. 또한 1930년 3월 단계에서 만철조사과원에게도 '만몽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만몽을 우리가 갖는 것이다'라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만몽의 진가, 만몽 점령이 우리의 정의라는 점, 미국에 대한 지구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121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만들어진 기틀 위에 아시아 여러 민족의 힘을 모아 서양 문명과의 충돌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시하라의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만주(滿州)와 몽골(蒙古)지역에 대한 점유가 필요했고, 이러한 바탕위에 만주국이 세워지게 된다. 만주국의 성립은 만주 지역의 일본 제국 내 편입을 의미하기에 이전 체제를 느슨하게 유지해온 시데하라 외교와 장작림은 폐기되거나 제거될 필요가 있었으며, 만주지역의 풍부한 자원은 경제공황 상황에서 경제 블록화의 밑바탕이 될 예정이었다.
관동군 막료들은 어떠한 경위로 만몽 영유론을 꿈꾸게 되었을까?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그때까지의 체제를 안정시켜온 몇 가지 전제조건이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전제조건이란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며, 신 4국 차관단 등에 의한 보증도 있으므로 누가 동삼성을 지배하든 누가 중국 정부의 중심이 되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취하고 있던 시데하라 외교이다... 두 번째로, 장작림(張作霖)을 통한 만몽 지배의 안정성이다.... 세 번째로 총력전 시대에 일본이 직명해야 할 전쟁 준비의 어려움이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83

나는 제1차 유럽대전을 통해 전개된 자유주의로부터 통제주의로의 혁신, 즉 쇼와유신이 급진전된 것으로 본다. 쇼와유신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동아시아 각 민족의 힘을 종합적으로 발휘하여 서양 문명의 대표자와 싸울 결승전 준비를 완료하기 위함이다. 메이지유신의 주안점이 왕정복고, 혹은 폐번치현(廢藩置縣)이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쇼와유신의 정치적 주안점은 동아연맹(東亞連盟)의 결성이다. 만주사변을 통해 그 원칙이 발견되었고 오늘애야 비로소 국가의 방침이 되려하고 있다. _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 p77/300
마치 우리가 메이지유신을 통해 번후(藩候)에 대한 충성을 덴노(天皇)에 대한 충성으로 되돌렸듯이, 동아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투쟁이나 동아시아 각국의 대립보다 민족의 협력과 화합(協和)을 통해 동아시아 각 국가의 진정한 결합이란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민족협화의 실현이다. _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 p78/300




이런 구상에 대해 아버지를 잃은 군벌 장쉐량의 배일(排日)행보로 초조해진 관동군은 결국 만주사변(滿洲事變)을 통해 '만몽영유'를 현실화시키게 된다. 경제적 이권을 위해 세워진 괴뢰국가 만주국. 만주점령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상된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관념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만주국에서 '민족'을 기본으로 한 근대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울러, 만주국에서의 경제발전 모델을 이식한 조선에서의 근대산업화 모델 역시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역할에 다름아니기에 우리는 만주국의 관념적 공허성과 제국 내 의존성을 통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할 다른 하나의 자료를 추가하게 된다. 조선에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만주국에서의 오족협화, 태평양 전쟁 시기 동남아 제국에서 주장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은 이러한 관념과 같은 선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자.


1930년대 초 만주에서는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張學良)이 국권회복과 배일운동을 적극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권익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에게는 관동군 철수, 남만주철도 회수 등을, 소련에게는 북만주철도 회수 등을 주장했다.(그 뒤에 소련군이 만주리에 침입). 게다가 간도(間島)에서 '만보산사건'(1931.7.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벌인 유혈 충돌 사태) 등 '만몽의 위기'가 거론되자 다시 일본 내에서 강경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은 중국 측이 조선인을 만주에서 추방하기 시작하자 '조선계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 지역에 파병했다. _ 서승원, <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 p87
천진(天津)폭동을 유도하면서 교묘히 끌어낸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簿儀)를 내걸고 1932년 3월 1일 드디어 일본은 대망의 만주국 괴뢰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세계이 여론을 두려워하여 사변의 불확대를 성명했으나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신속하기가 질풍과도 같은 관동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일본 국민은 열렬히 만주침략을 지지하고 나섰다. _ 박경리, <토지 15> , p209/594
평소대로라면 이시와라가 가장 열심히 다섯 민족(일본인,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이 조화를 이루는 만주국 건국을 주장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p93)... 만주국은 관동군 참모들의 정치 공작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였다. 그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괴뢰 국가로 일컬어지는데, 당시 일본의 국내 정세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새로운 국가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오족협화'의 이상향으로 고취되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원이 풍부한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개발에 공헌할 것을 강조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112/974

국가 형식과 파시스트 체제의 특별한 조합은 만주국의 통치성을 특징지었다. 그것과 다른 근대국가들과의 차이는 그것이 한 민족의 정통성을 결여했다는 점이다. 통치성은 주권의 요구를 배제하지 않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에 주권은 점차 민족의 담론 속에 배태되었다. 국가 권리의 기초에서 국제연맹으로부터의 인정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만주국은 더욱 중국 내셔널리즘이 내거는 심오한 (역사적) 주장들과 맞붙어야 했다. 만주국의 스토리는 - 적어도 초기의 양상에서는 - 민족을 추구하는 국가의 스토리이다. _ 프래신짓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p157
만주사변은 공황의 늪에서 헤매던 일본인들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다. 전쟁은 유효수요를 만들어냈으며, 원재료를 공급해 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일본인이라는 자부심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격렬한 투쟁에 지친 중도층에게 심어주었다. 전쟁이라는 더 큰 파괴와 혼란이 작은 혼란을 잠재우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 심지어 이러한 논리가 매우 유효하다는 비극을 유효함을 우리는 2021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도 확인한다.


만주사변은 일본 사회 내부의 대립을 첨예화시키면서도 대립과 대항의 존재를 해소하고 소거시켜 버리는 논조를 만들어 냈다. '끓는 조국애의 피, 일본에 넘쳐 흐른다!' 는 <도쿄아사히신문>(1931년 11월 18일)의 표제어였다. 또 신문에서는 '눈 내리는 광야, 포탄 속의 참호에서 모국의 생명선을 사수하는 우리 파견군 장병에 대한 국민의 감격은 날로 커져 가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위문금이 1일 평균 1,500~1,600엔, 위문 보따리는 평균 3만 개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다. 그동안의 비판적인 발언은 보이지 않고 세 조류가 정립한 상황은 급격히 유동화되었다. _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 p215
에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 뉴욕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전반으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 유흥가, 연예계는 구미(歐美)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인 남녀 혼욕(混浴)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p113)... 도시 뒤켠에는 그 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은 현실, 정쟁(政爭)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데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자 열 명의 이십 년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데 쓰는 나리킨이 있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일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 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113/594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_ 박경리, <토지 15> , p221/720
<토지 15> 중반부의 배경이 된 장쭤린 폭살사건과 만주사변을 통해 우리는 제국의 정점에서 이제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일본제국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공황이라는 경제위기를 손해없이 돌파하려는 자본의 모습과 성장을 위한 고통을 피하려는 대중의 심리, 이를 덮으려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만들어낸 거대한 움직임은 다시 전쟁이라는 이정표로 흐르고 있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동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 루한스크주에서의 갈등과 NATO가입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위협을 바라보고 있는 현시점에서 과거 역사는 또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을 느끼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121/594
미술을 좋아하는 환국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 ~ 1944)의 색채에 빠져있다. 아마도 환국은 칸딘스키의 색에 담긴 영혼을 움직이는 힘에 경도되었을 것이다. 칸딘스키의 말처럼 예술이 내부와 외부에서의 변화를 점(點), 선(線), 면(面)로 표현하여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일본제국은 1930년대 세계 공황의 위기를 중국에서 점과 선으로 연결된 자신의 영향력을 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벌인 것이 칸딘스키와의 차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파멸로 이른 것도 내적 필연성일지 모르겠다...

[그림] Wassily kandinsky oben und links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ssily_kandinsky_oben_und_links.jpg)



우리는 색들로 덮인 팔레트를 주시할 경우에 두 가지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순수한 물리적 작용을 받아들이게 된다(p57)... 둘째, 그리하여 우리는 색을 응시했을 때에 생기는 제이의 결과, 즉 색들의 심리적인 효과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색의 심리적인 힘이 생겨나고, 이 힘은 영혼은 동요시킨다. 그리하여 첫번째의 기본적이며 물리적인 힘은 색이 영혼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p59)...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건반을 두드리는 손과 같다. 그러므로 색의 조화는 오직 인간의 영혼을 합목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칙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이것은 내적 필연성의 원칙을 나타내고 있다. _ W.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p62
점(點)의 크기가 변화하면 점은 상대적인 본질 내에서의 변화도 함께 일어난다. 이 경우 점은 그 스스로로부터, 즉 그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자라나는데, 이것은 점의 집중적인 긴장을 상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한편, 점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생겨나는 어떤 다른 힘이 있을 수 있다. 이 힘은 화면 속으로 박혀 들어가 있는 점에 의지하여 점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화면 위에서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인지 밀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점의 집중적인 긴장은 곧장 소멸되며, 동시에 점 자체는 생명을 잃게 되고, 따라서 이 점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자리적인 생명을 가진, 다시 말해 그 고유한 법칙에 따르는 하나의 새로운 본질이 생겨난다. 이것이 선(線)이다. _ W. 칸딘스키, <점, 선, 면> , p46
PS. 페이퍼가 산으로 가는 것을 보면, 가끔은 내가 <토지>독서챌린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페이퍼를 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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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2-02-13 공감 (49)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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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6월에 연경을 갔을 때도 궁금했었다. 박정희 평전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만주국의 수도 신경에 설치되었던 만주군의 육군사관학교. 중국 군벌 장학량의 동북군 6만 명을 강탈흡수하여 창설되 것이 만주군의 시최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만주군 육군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묘생 2024-07-3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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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베 마키오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제국 일본의 교두보>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제국 일본의 교두보> 요약 및 평론
1. 요약: 조작된 이상향과 총력전 실험실의 실체
오카베 마키오는 1932년 일본 관동군의 기획으로 중국 동북 지역에 세워진 괴뢰국가 <만주국>의 탄생 배경, 통치 메커니즘, 그리고 패망 이후 남겨진 역사적 유산을 실증적으로 규명한다. 저자는 만주국이 대외적으로 내세웠던 <오족협화(五族協和)>나 <왕도낙토(王道樂土)>라는 구호의 허구성을 해체하고, 제국 일본의 침략적 팽창과 전시 총력전 동원의 교두보로서 작동한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본서가 제시하는 만주국의 핵심 구조와 궤적은 크게 네 가지 국면으로 정리된다.
첫째, <괴뢰국가의 날조와 기만적 건국>이다.
둘째, <통제경제와 개발독재의 실험>이다. 만주국은 일본 본토의 재벌 중심 자본주의와 달리 군부와 관료, 신흥 재벌(닛산 등)이 주도하는 철저한 국가 통제경제 체제를 취했다. 중화학공업 육성, 만주철도 중심의 물류망 재편, 지하자원 수탈은 일본 본토의 군수산업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는 훗날 아시아 지역 개발독재 모델과 국가주도 경제기획의 초기 원형이 되었다.
셋째, <식민 침탈과 다층적 억압>이다. 관동군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식량 및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농민들을 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이주시켜 현지 중국인 농민의 토지를 헐값에 강탈했다. 아울러 만주에 거주하던 한인(조선인)을 간도와 만주 전역으로 이주시켜 벼농사 개간과 치안 보조에 활용하는 한편, 항일 무장투쟁 세력에 대해서는 <집단부락> 설치와 가혹한 군사적 탄압을 자행했다.
넷째, <제국의 붕괴와 지워지지 않은 유산>이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과 일본의 패망으로 만주국은 단 13년 만에 소멸했다. 관동군 수뇌부는 자국민 개척단을 버려둔 채 퇴각하여 막대한 피난민 비극을 초래했다. 그러나 만주국이 남긴 군사 관료적 통치 기술, 중화학공업 인프라, 국가주의적 동원 체제는 전후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경제 지형으로 흡수되어 길고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2. 평론: 신화를 걷어낸 냉철한 구조사적 성찰
오카베 마키오의 작업은 전후 일본 사회 일각에서 반복적으로 고개를 들던 만주국에 대한 기만적 향수, 즉 <이상주의적 신국가 건설>, <아시아 연대의 실험>이라는 왜곡된 판타지를 정밀 타격한다는 점에서 높은 사학적 가치를 지닌다.
첫째, <관념적 미화에 대한 실증적 해체>가 돋보인다. 저자는 만주국이 다민족 공존이나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철저히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과 반소·반공 교두보 확보를 위해 기획된 군사적 도구였음을 공문서와 경제 수치로 입증한다. 선전 구호 이면에 감춰진 강제 징용, 토지 수탈, 저항 세력 학살의 참상을 건조하고 객관적인 필치로 기술하여 지배 권력의 위선을 고발한다.
둘째, <만주국을 렌즈로 본 근대 동아시아의 연속성>을 포착한다. 저자는 만주국을 1945년에 끝난 일회적 일탈이나 실패한 과거로 가두지 않는다. 만주국에서 시험된 관료 주도형 계획경제, 관제 국민동원 조직, 치안 통제 시스템은 패전 후 일본의 전후 부흥 체제뿐만 아니라, 냉전기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군사정권의 지배 구조, 나아가 중국 동북 지역의 중공업 기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셋째, <역사 서술의 한계와 주체적 시각의 잔존>이다. 일본 비판적 진보 사학의 시각을 충실히 견지하고 있으나, 텍스트의 중심축이 여전히 관동군 정책과 일본인 관료의 구상 등 지배자 중심의 자료에 다소 편중되어 있다. 만주라는 공간을 직접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중국인, 조선인, 몽골인 등 피지배 민중의 주체적 저항과 생활 세계의 복원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제국주의 권력이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국가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명징하게 밝혀낸 수작이다. 근대 국가가 국가주의와 결합할 때 어떻게 자국민과 타국민 모두를 총력전의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지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혹시 이번 도서와 연계하여, 만주국 통치 메커니즘이 전후 한국이나 일본의 개발주의에 미친 연속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 싶으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오카베 마키오 요약과 평론
岡部牧夫, (1978 초판, 2007 개정 문고판) | 최혜주 옮김, 어문학사, 2009
1. 서론: 만주국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오카베 마키오(岡部牧夫, 1941년생)의 은 1932년 건국되어 1945년 소멸한 만주국의 정치적 성격과 경제적 기능을 분석한 일본 제국주의 연구서이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명확하다. 만주국은 일본이 동아시아에 근대적인 신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주의적 실험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의 자원과 노동력을 확보하고 소련 및 중국에 대한 군사적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속국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만주국 건국의 명분으로 와 를 내세웠다. 전자는 도덕적 통치가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후자는 일본인·한인(漢人)·만주인·몽골인·조선인 등 여러 민족의 공존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카베는 이러한 이념과 실제 통치 사이의 모순을 지적한다. 만주국의 국가기구는 일본 관동군의 감독을 받았으며, 산업개발과 농업정책은 만주 주민의 복지보다 일본의 전쟁 준비에 종속되었다.
이 책의 특징은 외교사와 군사사뿐 아니라 산업개발, 재정, 노동력 동원, 농업정책을 분석하여 제국주의 지배가 주민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한다는 점에 있다.
1978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2007년 고단샤 학술문고로 재간행되었으며, 한국어판은 2009년 출판되었다.
2. 만주국의 탄생: 군대가 만든 국가
만주국의 출발점은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이다.
일본 관동군은 남만주철도 선로 부근에서 폭발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중국 동북지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국가원수로 추대되었으며, 1934년에는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실권은 관동군에 있었다.
오카베가 강조하는 것은 만주국이 단순히 일본 정부의 외교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현지 군부가 군사행동으로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만들고 일본 정부에 이를 승인하도록 압박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헌정질서와 문민통제는 크게 약화되었다. 관동군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대륙정책을 추진했고, 일본 정부는 결과적으로 군부의 행동을 추인했다.
만주국 건설은 따라서 중국에 대한 침략인 동시에 일본 국내 정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전환점이었다.
저자는 이 국가가 외형적으로는 독립국가였으나 실제로는 일본군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만주국을 일반적인 식민지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이다.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공식적인 식민지였지만, 만주국은 명목상 독립된 주권국가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결정에서 관동군과 일본인 관리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만주국은 간접적인 식민지 지배의 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3. 산업개발과 전쟁 준비: 5개년계획의 모순
책의 두 번째 부분은 만주국의 산업개발정책을 분석한다.
1937년 만주국은 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철강, 석탄, 전력, 화학, 기계 등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교통망을 확충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이러한 정책은 표면적으로 근대적 산업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그러나 오카베는 산업개발의 궁극적인 목적이 만주 주민의 생활 향상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고 설명한다.
만주국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철강·석탄·식량·군수품을 공급하는 기지로 계획되었다. 특히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여 병참기지와 군수산업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했다.
산업개발에는 막대한 자금과 물자가 필요했지만 일본 자체의 경제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만주국의 산업화는 심각한 모순을 안게 되었다.
첫째,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주민 생활에 필요한 소비재 생산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둘째, 산업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강압적 동원이 확대되었다.
셋째, 전시경제가 강화되면서 물자 통제와 주민 부담이 증가했다.
넷째, 산업개발은 만주국 경제의 자립성을 높이기보다 일본 경제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켰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만주국의 경제정책이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로 더욱 빠르게 전환되었다.
오카베가 주목하는 것은 산업화 자체가 아니라 그 산업화를 누가 계획했고, 누구를 위해 운영했으며, 비용을 누가 부담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분석은 만주국에서 공장과 철도, 도시가 건설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4. 농업정책과 일본인 이민: 농민에게 돌아간 희생
세 번째 부분인 은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대목이다.
만주 지역은 대두·밀·수수 등 농산물을 생산하는 광대한 농업지대였다. 일본은 만주를 식량 공급기지이자 일본 농촌의 인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주지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만주에 일본인 농업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일본 국내의 빈곤한 농촌에서 이주민을 모집하고, 이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여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는 주민이 없는 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역에는 이미 중국인 농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민정책은 토지의 강제적·불공정한 취득, 현지 농민의 경작권 침해,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일본인 이민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반면, 현지 농민은 토지와 생계수단을 잃을 위험에 노출되었다.
오카베는 일본인 이민을 단순히 농업개척이나 근대적인 농촌 건설의 역사로 서술하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1945년 일본의 패전이었다.
소련군이 만주에 진입하고 일본의 통치체제가 붕괴하면서 일본인 이주민들은 혼란 속에 놓였다.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가족과 헤어졌고, 전쟁고아와 잔류 일본인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역사적 비극이 존재한다. 일본인 이민자는 중국 농민의 토지를 침해하는 식민지 지배의 수혜자였지만, 동시에 일본 제국의 이민정책에 동원되어 패전 후 버림받은 피해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만주국 역사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하지 않는 데 중요하다.
5. 만주국의 유산: 패전 이후에도 남은 것
만주국은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멸했지만, 그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첫째, 산업적 유산이다.
일본이 건설한 철도, 공장, 광산, 발전시설은 전후 중국 동북지역의 산업발전에 일정한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동북지역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중공업지대로 성장했다.
그러나 산업시설이 남았다는 사실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건설한 시설이 전후 다른 사회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그 건설 과정의 강제성은 구별해야 한다.
둘째, 정치적 유산이다.
만주국은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개발계획, 관료적 통제를 결합한 국가운영의 사례였다. 군대와 경제관료가 산업, 노동, 농업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는 전시 동원국가의 특징을 보여준다.
셋째, 인적 유산이다.
만주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관료, 기술자, 군인, 기업인들은 패전 후 일본 사회로 돌아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후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 활동했다.
넷째, 기억의 유산이다.
일본에서는 만주국에 대한 기억이 침략과 지배의 역사인 동시에 개척, 근대화, 이민자의 고난이라는 여러 이야기로 남았다.
이 가운데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만주국에 대한 역사인식은 크게 달라진다.
6. 평론 ①: 근대화와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오카베의 연구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식민지 근대화의 평가 기준이다.
만주국에서 중공업과 교통망이 발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식민지 지배가 주민들에게 유익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근대화의 성과를 평가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 생산력과 기반시설이 얼마나 증가했는가.
둘째, 그 발전의 혜택이 어느 계층과 민족에게 돌아갔는가.
셋째, 개발 과정에서 주민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과 노동, 토지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가.
오카베의 분석은 첫 번째 지표만으로 식민지 근대화를 평가하는 접근의 한계를 보여준다.
다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만주국의 산업시설과 관료조직이 전후 중국의 경제발전에 구체적으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별도의 장기적인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는 일과 그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물질적 변화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은 양립할 수 있다.
7. 평론 ②: 조선 식민지 지배와 만주국의 차이
한국 독자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조선과 만주국의 비교이다.
두 지역 모두 일본 제국의 군사적·경제적 이해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배형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구분 | 식민지 조선 | 만주국 |
|---|---|---|
정치적 지위 |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 | 명목상 독립국가 |
통치의 중심 | 조선총독부 | 관동군과 만주국 정부 |
지배의 정당화 | 동화와 일시동인 | 왕도낙토와 오족협화 |
경제적 기능 | 농업·산업·인력 공급 | 군사기지·중공업·자원 공급 |
일본과의 관계 | 공식적인 제국 영토 | 사실상의 종속국가 |
만주국은 특히 일본이 기존 국가를 직접 병합하지 않고도 군사력과 경제적 지배를 통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조선인은 만주국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족이면서,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이주민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 조선인은 만주국의 군대·경찰·행정조직에서 활동했고, 다른 조선인들은 일본 제국의 억압이나 토지 문제를 피해 이주했으며, 항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주국의 조선인 역사는 단순히 일본의 피해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식민지 신민, 이주민, 현지 농민, 행정 협력자, 항일운동가라는 다양한 위치가 교차했다.
이러한 복잡한 사회적 관계는 오카베의 정치경제적 분석을 확장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는 영역이다.
8. 평론 ③: 이 책의 의의와 한계
오카베의 연구는 1978년에 처음 출판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만주국을 이상적인 다민족국가나 산업개발의 성공 사례로 기억하는 서술이 여전히 존재했다.
오카베는 이러한 인식에 맞서 만주국의 정치적 종속성과 경제적 착취 구조를 역사자료에 근거하여 분석했다.
그의 중요한 공헌은 만주국에 관한 논의를 건국이념이나 정치지도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실제 산업정책과 농업정책의 결과로 옮겼다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는 세 가지 보완점이 있다.
첫째, 중국인과 조선인 주민의 경험을 더 풍부하게 복원할 필요가 있다. 정치경제적 구조 분석만으로는 다양한 주민의 일상과 선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둘째, 만주국의 지배체제를 단순히 일본이 명령하고 현지인이 복종한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지 군벌 출신 관료, 기업인, 지주 등도 국가운영에 참여했으며, 그들의 이해관계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셋째, 만주국의 역사를 전후 일본과 중국의 역사에 연결하는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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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영(Louise Young)이 누구지요?
루이즈 영 (Louise Young)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의 일본사 교수입니다.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 만주국, 전쟁과 사회문화의 관계를 연구해 온 학자입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20년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UW–Madison
+1
1. 대표적인 저서
Japan's Total Empire: Manchuria and the Culture of Wartime Imperialism
1998년,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한국어로 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미국역사학회 존 K. 페어뱅크상을 수상한 대표작입니다.
UW–Madison
+1
이 책의 중심 주장은 만주국이 관동군과 정치지도자들만의 작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문과 잡지, 기업, 대학, 여성단체, 청년조직, 농업협동조합 등이 만주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영은 일본 제국주의를 군사적 정복뿐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의 참여와 동원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Beyond the Metropolis: Second Cities and Modern Life in Interwar Japan
2013년,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삿포로, 가나자와, 니가타, 오카야마를 연구하여 일본의 근대화가 도쿄 중심으로만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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