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6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YouTube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YouTube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놀토 SENOLTO
156,249 views  Oct 5, 2026  역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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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10만 명의 조선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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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요약과 심층 평론입니다.

자료 요약

  1. 포로 연행의 배경과 성격 임진왜란, 특히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영토 점령 실패 후 인력 수탈을 주된 목적으로 삼아 극심한 <사람 사냥>을 벌였다. 당시 100년 넘는 내전을 끝낸 일본은 농사, 축성, 노역을 위한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민간인을 무차별 포획했다. 남원성 함락 전후 등에서 수많은 양민이 끌려갔으며, 군대를 뒤따르는 인신매매 상인들에 의해 포로들은 노예처럼 매매되었다. 연행된 인원은 학계에 따라 수만 명에서 1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2. 끌려간 조선인들의 세 갈래 삶

  • 해외 노예 무역으로의 유출: 국제 무역항 나가사키를 거쳐 포르투갈 상인 등에게 팔려 마카오, 말라카, 고아, 마닐라 등지로 팔려 나갔다.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에게 팔려 로마까지 간 <안토니오> 등이 대표적 기록이다.

  • 기술과 학문 전수: 일본 다도 문화의 유행과 맞물려 도공들은 영주들의 보호와 통제 아래 도자기를 구웠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백자 원료를 찾아 일본 도자기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심당길 일가는 사쓰마(나에시로가와)에서 조선의 풍속과 가마를 지켰다. 또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 등과 교류하며 일본 성리학 정립에 기여한 뒤 귀국하여 <간양록>을 남겼다.

  • 일본 사회로의 동화와 정착: 어린 나이에 끌려간 이들은 언어와 문화를 흡수하며 일본 무사 계급이나 관료로 편입되었다. 가나자와의 마치부교(시장급)에 오른 김여철(와키타 나오타), 사가번 영주의 측근이자 뛰어난 서예가로 활동하다 주군을 따라 순사한 홍호연 등이 대표적이다. 오타 줄리아처럼 권력자의 시녀로 일하다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유배된 인물도 존재했다.

  1. 쇄환의 한계와 비극적 귀결 전쟁 후 사명대사와 쇄환사들의 노력으로 약 6,000~7,000명이 송환되었으나, 전체 포로 수에 비하면 극소수였다. 일본 영주들이 포로를 숨긴 데다, 이미 일본에서 생계를 꾸리고 가정을 이룬 포로들은 귀국을 주저했다. 더욱이 고국 조선은 살아남아 돌아온 이들에게 <적에게 굴복했다>는 멍에를 씌우며 절의를 묻거나 부역·반역 혐의로 탄압하는 등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결국 다수의 백성은 귀환을 포기하고 일본 땅에 남았다.

  2. 400년 후의 기억 도잔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 이삼평, 사쓰마 도자기 명가로 15대째 이어진 심수관 가문, 반면 같은 마을 출신으로 일본 외무대신이자 A급 전범이 된 도고 시게노리(박무덕) 등 후손들의 궤적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오즈 시나 아리타 등 일본 현지에서는 이들을 지역 문화의 시조로 기리는 반면, 조선 본토의 기억은 충절을 지킨 양반 관료 중심에 머물러 일반 민초들의 삶은 오랫동안 망각되었다.

평론: 국가주의의 폭력과 경계를 넘은 민초들의 디아스포라

  1. 국가의 무능과 민초에게 전가된 저리의 폭력 임진왜란 포로 문제는 국가 권력이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참극의 전형을 보여준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 지휘부는 조직적으로 인력 약탈을 자행했고, 농민·여성·아동은 전쟁 물자이자 상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비극은 끌려간 순간에 그치지 않았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조선 왕조는 전란이 끝난 후 이들을 온전히 품어 안지 못했다. 유교적 명분론과 정절 이데올로기는 무력하게 납치되었던 힘없는 백성들에게조차 <살아 돌아온 것 자체가 죄>라는 낙인을 찍었다. 강항이 귀환 후 남긴 수기의 원제가 <죄인을 싣는 수레>를 뜻하는 <건거록>이었다는 사실과, 귀환 포로 박수영이 반역 혐의로 처형당한 사건은 국가 권력이 자신의 무능을 개인의 도덕적 흠결로 치환해 탄압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2.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강제 디아스포라와 문명 변용 이들의 이주는 단순한 한일 양국 간의 문제를 넘어, 16~17세기 초 동아시아와 서구를 잇는 초기 세계화의 비극적 단면이다.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마카오, 말라카, 고아, 로마로 이어진 노예 무역의 경로는 자본과 종교의 이름 아래 인체 매매가 정당화되던 당대 해양 제국들의 식민 네트워크와 정확히 일치한다. 동시에 이들은 가혹한 예속 상태에서도 문명 전파와 문화 융합의 능동적 주체로 작동했다. 일본의 백자 산업을 일으킨 이삼평과 심당길, 일본 주자학의 토대를 놓은 강항, 무사 사회의 행정과 예술에 기여한 김여철과 홍호연의 삶은 피지배 포로가 침략국의 문화 지형을 재구성한 독특한 문화 변용(acculturation) 사례다.

  3. 박제된 애국주의를 넘어: 삶의 주체로서의 인간 귀환을 거부하고 일본에 남은 이들을 향해 당대 사신들은 <오랑캐 풍속에 물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갈 수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국가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일군 생계, 가임 가족, 그리고 조선에 돌아갔을 때 마주할 빈곤과 멸시 때문이었다. 삶을 영위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 이들의 선택은 국가라는 추상적 공동체의 충성 요구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절박한 생존의 결단이었다. 심수관 가문이 400년간 정체성의 뿌리를 기억하며 한일 문화의 가교가 된 반면, 박무덕(도고 시게노리)이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을 총괄하는 외무대신으로 변모한 역사는 디아스포라 후손들이 겪은 정체성의 복잡다단한 균열을 웅변한다. 이를 단순한 <민족적 미담>이나 <배신자에 대한 단죄>라는 이분법적 민족주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것은 역사 속 개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실존적 맥락을 거세하는 일이다.

  4. 기억의 전도 현상과 역사적 복원 자료가 예리하게 지적하듯, 이들을 더 오래, 더 깊이 기억한 쪽은 정작 침략국이었던 일본의 지방 공동체들이었다. 일본은 이들을 신사의 신(도잔 신사), 도자기의 시조, 문화재의 주인공으로 기리며 지역 정체성의 자산으로 흡수했다. 반면 한국 사회의 기억 공간은 오랫동안 승전 장수와 의병, 충절을 지키고 자결한 이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열려 있었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살아남아야 했던 10만 포로들의 발자취는, 역사가 특정 국가의 명분이나 승패의 기록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폭력적 구조 속에서도 삶을 밀고 나간 인간 개개인의 존엄과 궤적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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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과 평론

자료: 세진 SENOLTO, 2026년 10월 5일 공개 영상, 약 34분 33초. 첨부된 11쪽 영상 대본을 바탕으로 작성.

1. 들어가며 —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어진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인명 피해와 사회적 파괴를 가져왔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주로 전투, 학살, 의병, 이순신의 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에 집중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의 운명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상의 출발점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약 10만 명에 달했다는 추정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에서 노예가 되었고,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 등을 통해 해외로 팔려갔다. 또 일부는 일본 사회에 정착하여 기술자, 상인, 농민으로 살아갔다.

그들의 후손 가운데는 자신의 조선 출신 조상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 오늘날까지 혈통과 가족사를 이어왔다.

영상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으며, 그들의 삶과 후손의 기억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임진왜란의 피해 규모를 묻는 것이 아니다. 전쟁, 강제이주, 노예제도, 문화적 동화, 가족의 기억, 민족적 정체성이 서로 얽혀 있는 역사사회학적 문제이다.

2. 포로 10만 명이라는 숫자의 의미

영상에서는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노동력과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조선인들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고 설명한다.

당시 일본은 장기간의 전국시대를 거쳐 통일정권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 광업, 도시경제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존재했고, 사람을 사고파는 거래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끌려간 조선인들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뿐 아니라 여성, 어린이, 승려, 장인, 학식이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10만 명이라는 숫자가 확정된 인구통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보여주는 일관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10만 명은 여러 추정 가운데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숫자가 전달하는 역사적 의미는 분명하다. 전쟁은 군사적 패배와 영토의 파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인적 자원을 일본과 그 밖의 세계로 강제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3. 노예가 되어 팔려간 사람들

영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이 상품처럼 거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에 도착한 사람들은 가족과 헤어지고 낯선 장소로 이동했다. 노예나 예속 노동자가 되어 집안일과 농업, 수공업에 종사한 사람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집안에 넘겨지기도 했다.

영상은 특히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적인 인신매매에 주목한다.

16세기 말 나가사키는 일본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교역하던 중요한 항구였다. 이곳에서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 포로들도 매매 대상이 되었다.

일부 조선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손을 거쳐 마카오, 동남아시아, 인도 등지로 이동했다. 이 가운데 어디까지 이동했는지, 실제로 어떤 생활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인신매매는 당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상에서 소개되는 개별 인물의 사연을 모두 확인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생생하게 재현된 대화와 감정은 역사적 정황을 바탕으로 한 서사적 구성일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노예무역의 존재와 개별 인물의 구체적인 체험을 구별하는 일이다.

4. 일본 사회에 정착한 조선인들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모두 노예로 남거나 해외로 팔려간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은 일본 각지에 정착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도자기 장인들의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아리타, 사쓰마, 하기 등 여러 도자기 산지의 역사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도공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은 일본의 도자기 기술 발전과 생산방식의 변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양면성이 있다.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조선 장인들의 기술적 공헌은 성공적인 문화전파의 사례이다. 반면 장인들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쟁과 강제이주로 인해 발생한 비자발적 기술 이전이었다.

후대의 문화적 성취가 최초의 강제성을 지워서는 안 된다.

영상은 또한 일본 사회에 동화된 조선인들이 이름을 바꾸고 일본의 관습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몇 세대가 지난 뒤에는 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조차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는 후손의 일본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강제로 이주한 조상을 두었다는 사실과, 그 후손이 일본 사회에서 형성한 정체성은 서로 다른 역사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5. 오타 줄리아 — 조선 소녀에서 일본의 기독교 신자로

영상이 소개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오타 줄리아(おたあジュリア)이다.

오타 줄리아는 임진왜란 중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출신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훗날 도쿠가와 정권의 기독교 탄압과 관련하여 유배 생활을 했다.

그녀의 삶은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어린이가 일본에서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녀의 정체성은 단순히 조선인 또는 일본인이라는 구분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녀는 조선 출신이면서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었고, 동시에 초국가적 종교 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했다.

셋째, 그녀의 생애에서 종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새로운 삶의 의미와 공동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영상은 그녀의 신앙과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그러나 실제 오타 줄리아가 자신의 조선 출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는 직접적인 증언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생애와 후대의 종교적 추모 전통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6. 돌아온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영상은 귀환 문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포로를 돌려보내기 위한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졌다. 특히 1607년과 1617년 등의 조선통신사 파견 과정에서 피로인(被擄人), 곧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송환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렇지만 일본에 남아 있던 모든 조선인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끌려가 성장한 사람은 조선어를 잊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본에서 배우자와 자녀가 생긴 사람도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귀환할 수 없었던 사람과, 일본에서 새로운 생활을 형성했기 때문에 귀환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포로들의 귀환을 당연한 소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조선은 이미 현실의 생활세계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출생지였을 수 있다.

반대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쉽게 이전의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재산과 가족, 달라진 사회적 관계, 전쟁 경험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은 이러한 귀환과 비귀환의 갈림길을 개인들의 이야기로 보여준다.

7. 400년이 지난 뒤에도 남아 있는 기억

영상 후반부는 현대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조상의 흔적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일부 일본 가문에서는 조선에서 끌려온 조상에 관한 기록이나 구전이 이어져 왔다. 지역사회에 남아 있는 묘소, 사찰의 기록, 가문의 전승과 도자기 장인의 계보 등이 이러한 기억을 보존하는 매개가 되었다.

영상은 일본인 후손들이 조상의 고향을 찾거나 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장면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조선이라는 역사적 고향은 단순한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사가 된다.

후손들에게 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자신을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온 일본 사회의 역사 안에 조선과 연결된 또 하나의 층위가 존재한다는 발견일 수 있다.

다만 영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가족사와 후손들의 발언은 대본만으로는 실명, 원자료, 인터뷰 출처를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모두 실증적인 사례로 인용하기보다는, 역사적 기억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구성된 이야기와 확인 가능한 가계 기록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8. 종합 평론 — 피해의 역사를 넘어 강제이주의 사회사로

이 영상의 가장 큰 의의는 임진왜란을 국가와 군대의 역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네 가지 문제를 더 검토하고 싶다.

① 포로는 단순한 전쟁 피해자가 아니라 강제이주민이었다

조선인 포로의 경험을 전쟁사의 일부로만 다루면 중요한 사실을 놓친다.

이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생활터전을 잃었으며, 전혀 다른 사회에서 생존해야 했다. 노동, 언어, 종교, 가족관계와 문화적 관습 모두가 변화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연구하는 강제이주, 난민,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연결된다.

물론 16세기의 포로를 현대 국제법상 난민과 동일한 범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향의 상실, 가족의 해체, 새로운 사회에서의 생존이라는 경험에는 비교할 만한 요소가 많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첫 세대의 강제이주가 후손 세대에 이르러 자발적인 지역적 정체성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이 일본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일본을 고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강제이주의 역사가 반드시 영구적인 민족적 소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② 문화적 공헌과 인간적 고통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조선인 도공들이 일본 도자기 산업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때때로 일본이 조선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는 문화교류의 역사로만 설명된다.

그것은 역사의 절반이다.

기술은 이동했지만, 기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노동과 기술이 일본의 경제와 문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기술 이전을 가능하게 한 군사적 폭력과 강제이주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조선인 장인들의 삶을 오직 비극으로만 설명해서도 안 된다. 일부는 일본 사회에서 새로운 명성과 생활기반을 얻었고, 후손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복합성이야말로 민족주의적인 피해 서술과 문화적 성공담을 넘어서는 역사적 접근이다.

③ 동화는 반드시 망각을 뜻하는가

영상은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의 이름과 언어가 사라진 현상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정체성의 변화는 단순히 원래의 민족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아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생활환경 속에서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소속감을 발전시킨다.

17세기의 조선인 포로가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사실과 21세기의 후손이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이들의 역사는 조선인의 일본화이면서 동시에 일본 사회 자체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한 역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일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된 조선인 후손의 삶을 우리는 민족적 정체성의 상실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일본 사회의 역사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아야 할까?

역사사회학적으로는 후자의 관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④ 한일관계의 기억은 국가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역사는 국가 간 침략과 지배, 저항과 갈등의 역사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조선인 포로들과 후손의 역사는 한일관계가 국가 간 관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의 피해자는 조선인이었지만 그 후손 가운데 많은 사람은 일본인이 되었다. 조선인 장인이 발전시킨 기술은 일본의 문화유산이 되었고, 조선에서 끌려간 어린이가 일본 기독교사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역사를 어느 한 국가의 역사에만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한일 양국의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이동과 혼합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는 한국의 피해사이면서 일본의 사회사이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인구이동과 문화변동의 역사이다.

9. 영상에 대한 비판적 평가

영상에는 세 가지 한계가 있다.

첫째, 10만 명이라는 추정치를 충분한 사료 설명 없이 제시한다. 포로 규모와 해외 인신매매의 실태에 대해서는 당시의 일본 기록, 조선의 외교문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 등을 교차 검토해야 한다.

둘째, 역사적 사실과 상상에 근거한 이야기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특히 개인들의 대화, 고향에 대한 그리움, 후손들의 감정에 관한 상세한 묘사는 시청자에게 감동을 주지만 사료적 근거를 확인하기 어렵다.

셋째, 포로들이 일본 사회에서 어떤 법적·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는지 충분히 구분하지 않는다. 노예로 팔려간 사람, 영주에게 예속된 장인, 일반 노동자,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 귀환에 성공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상은 대중 역사 콘텐츠로서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익숙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 다큐멘터리로서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사례별 사료 출처와 후대의 재구성을 명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0. 결론 — 10만 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이 영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한 사회의 인구와 문화를 얼마나 깊이 변화시키는지 생각하게 된다.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는 노예로 팔려간 사람도 있었고, 일본 사회에 정착한 사람도 있었으며, 마침내 조선에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역사 기록에서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사라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과 기술은 일본 사회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의 자녀와 후손은 새로운 가족과 공동체를 형성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전쟁으로 강제 이동한 사람들의 역사가 몇 세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사회의 일상적인 역사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의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의 역사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형성에 참여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후손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조상의 고통을 지우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상의 고통을 기억한다고 해서 후손들이 형성한 일본인 정체성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영상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이러한 복합적인 역사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 데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더 깊이 탐구해야 할 문제는 조선인 10만 명이 어디로 갔는가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강요된 이주와 새로운 사회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가족을 형성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후손이 만들어낸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구분을 어떻게 다시 생각하게 하는가?

이것이 이 영상을 단순한 전쟁의 비극을 넘어 동아시아의 사회사와 이주사로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주: 위 글은 첨부 영상의 주요 서사와 논점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요약·평론이다. 개별 인물과 가족사의 실증 여부 및 포로 규모는 별도의 사료 검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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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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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seconds임진혜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이 1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0:044 seconds남원에서 진주에서 영광 앞바다에서 눈바던 아버지와 [음악] 부엌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 이제 겨우 열살 남짓한 아이들이 새끼줄에 목이 묶긴 채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넜어요.
0:1515 seconds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지금도 학자마다 말이 다를만큼 기록이 흐릿합니다. 한 고울 두 고울 사람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0:2424 seconds숫자죠. 우리는 임진느란 하면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은 바로 떠올리는데 끌려간 그 많은
0:3131 seconds사람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배운 기억이 거의 없잖아요. 전쟁이 끝났으니 다들 고향으로 돌아왔을까요?
0:3838 seconds남의 나라에서 종으로 부려지다 이름없이 눈을 감았을까요? 남겨진 가족들은 바다 건너를 바라보며 그 사람을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실제
0:4646 seconds기록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하나 둘 나옵니다. 일본보다 훨씬 먼 바다를 건너 낯선 유럽 도시의 거리에
0:5555 seconds서게 된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도 일본의 한 신사의 이름이 모셔져 있는 사람이 있고 12살에 끌려간 소년이 남긴 그 시안은 일본에서 문화제가
1:041 minute, 4 seconds됐습니다. 몇태 뒤 조선 사신이 그들을 데리러 바다를 건넜을 때는 포구 갈 때 밭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해요.
1:121 minute, 12 seconds나는 조선 사람이요 나를 태워 주시오. 그런데 정작 그 사진들이 남긴 기록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적혀 있습니다. 10만 명이
1:201 minute, 20 seconds끌려간 그 바다 건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은 기록 속에 남은 그 사람들의 발자국을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1:301 minute, 30 seconds먼저 그 전쟁부터 들여다 보겠습니다.
1:321 minute, 32 seconds일본군은 조선에 두 번 쳐들어왔습니다. 처음 쳐들어온 임진년 전쟁과 몇태 뒤 다시 쳐들어온 정유년 전쟁이에요.이 두 전쟁은 성격이 꽤
1:411 minute, 41 seconds달랐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일본은 한양을 거쳐 영나라까지 가겠다며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어요. 땅을 차지하는게 목표였죠. 그런데 두 번째 전쟁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1:521 minute, 52 seconds영나라까지 가는 건 이미 어렵다는게 드러난 뒤였고 일본군은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남쪽을 휩쓸고 전어요. 그래서
2:002 minutes한 일본학자는이 두 번째 전쟁을 사람 사냥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땅보다 사람을 노린 전쟁이었다는 거죠. 조선 쪽 기록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요.
2:092 minutes, 9 seconds남은 사람 조경남이 쓴 난중 잠록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오 씨가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이 나옵니다. 머리 대신
2:162 minutes, 16 seconds코를 베어보내 전공을 증명하게 하고 그다음에는 사람을 산채로 잡아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거예요. 교토에 지금도 남아 있는 귀덤이 그때 베어간
2:252 minutes, 25 seconds코를 묻은 곳입니다. 그 숫자는 여기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2:292 minutes, 29 seconds그의 가을 교토의 큰절 승려들이 모여이 무덤 앞에서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럼 일본은 왜 그렇게 사람을 데려가려 했을까요?
2:382 minutes, 38 seconds그무렵 일본은 100년 넘게 이어진 내전이 막 끝난 참이었습니다. 오랜 싸움에 농사 지을 사람, 성을 싸울 사람, 잠일을 할 사람이 크게
2:462 minutes, 46 seconds모자았어요. 영주들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이 공짜일선이었던 거죠. 게다가 붙잡은 사람을 장사꾼에게 넘기면 그 자리에서
2:552 minutes, 55 seconds돈이 됐습니다. 사람을 잡는게 곧 전리품을 챙기는 일이었던 겁니다.
2:592 minutes, 59 seconds붙잡으면 일을 시킬 수 있고 일을 안 시키면 팔 수 있으니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사람이 사라져 갔어요. 그 사냥이 가장 처절하게 벌어진 곳
3:083 minutes, 8 seconds가운데 하나가 남입니다. 정유년 여름 일본군의 대군이 남성을 에워쌌어요.
3:133 minutes, 13 seconds조성군과 명나라 군대가 함께 성을 지켰지만 끝내 성은 무너졌습니다. 에 있던 군사와 백성들은 대부분 목숨을
3:203 minutes, 20 seconds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줄줄이 포로로 끌려갔어요. 오늘 이야기에 남은 사람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이 때문입니다.이 전쟁에서
3:283 minutes, 28 seconds남원만큼 많은 사람이 바다 건너로 끌려간 고울도 드물었거든요. 남성이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정윤년 가을 전라도 영광 앞바다 30살 선비
3:383 minutes, 38 seconds강황은 피란길의 가족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일본 수군에게 붙잡힙니다. 배째로 끌려가는 그 와중에 어린 아들과 딸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 목숨을 잃었어요.
3:483 minutes, 48 seconds아이들을 잃은 아버지는 그대로 일본으로 끌려갑니다. 비슷한 무려 붙잡힌 또 다른 선비 정의득의 집안 이야기도 기록으로 전합니다.
3:563 minutes, 56 seconds일본군에게 붙잡히던 날 그의 어머니와 형수 아내와 누이가 차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해요. 끌려가 욕을 당하느니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였죠.
4:054 minutes, 5 seconds정의득은 혼자 살아남아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두회쯤 뒤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남은 가족 없이 돌아온 그 길이 어땠을지는 진작하기도
4:134 minutes, 13 seconds어렵습니다. 그의 겨울 일본군 진영 안에서는 이런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일본 규슈의 한 영주를 따라 의사겸 승려로 종근한 게이라는
4:224 minutes, 22 seconds사람이 일기를 남겼는데 이렇게 [음악] 적었습니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이 건너왔는데 그 가운데 사람 장사꾼도 있었다. 본진 뒤를
4:304 minutes, 30 seconds따라다니며 남녀 노소를 사들려 새끼줄로 목을 묶어 모으고는 앞으로 몰아세웠다. 걷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몰아치며 때려 달리게 하니
4:384 minutes, 38 seconds지옥의 옥조이 죄인을 다그치는 것이 이러할까 싶었다. 이게 끌려간 조선 사람이 남긴 기록이 [음악] 아니거든요. 끌고 간 쪽 일본 군대를
4:464 minutes, 46 seconds따라온 일본 스님이 자기 눈으로 보고 적은 겁니다. 이걸 쓴 사람이 일본 쪽 스님이었다는게 저는 좀 멈칫했습니다. 같은 편이 봐도 지옥
4:554 minutes, 55 seconds같았다는 얘기니까요. 군대 뒤에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이 따라다녔고 붙잡힌 조선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값이 매겨져 팔려 나갔습니다.이
5:045 minutes, 4 seconds사냥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정윤년 이듬의 가을 히데오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군은 서둘러 조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해요.
5:125 minutes, 12 seconds그런데 돌아가는 배에도 조선 사람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남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싸움을 버린 노량 회전도 바로이 철수하는 일본
5:215 minutes, 21 seconds배들을 막아서는 싸움이었어요. 그 배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다를 건너갔고 그 안에 실린 조선 사람들도 함께 일본 땅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5:305 minutes, 30 seconds끌려간 사람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이 퍼져 있어서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국 학계는 10만 명 안팎으로 보고 일본 학계는 2만에서
5:395 minutes, 39 seconds3만 명이 넘는다고 봐요. 어느 쪽으로 보든 바다를 건 조선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는 건 분명합니다.
5:455 minutes, 45 seconds그럼 이렇게 목에 줄이 묶여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느냐?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닙니다. 어떤 사람은 또 한번 팔려서 일본보다 훨씬 먼 바다
5:545 minutes, 54 seconds건너로 갔고 어떤 사람은 손해 가진 기술 때문에 일본 영주들이 일부러 데려갔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일본 사람이 되어 살았습니다. 첫 번째
6:036 minutes, 3 seconds길은 일본의 서쪽 끝 한구 나가사키에서 시작됩니다.
6:086 minutes, 8 seconds나가사키는 그무렵 일본에서 가장 국제적인 한구였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커다란 배를 타고 드나들면서 중국 비당과 은을 사고 팔던
6:176 minutes, 17 seconds곳이에요. 그런데이 한구에서 거래된 물건 가운데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6:216 minutes, 21 seconds일본군이 끌고 온 조선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시 포르투카 상인들에게 팔려 나간 거죠. 이렇게 팔린 사람들은 중국 마카오, 말레이반도의
6:296 minutes, 29 seconds말라카, 인도의 고아, 필리핀 마닐라 같은 곳으로 실려갔습니다. 얼마나 팔렸는지 정확한 숫자는 남아 있지 않아요. 다만 전쟁 동안 한해에
6:386 minutes, 38 seconds천명이 넘는 조선 사람이 포르투카 상인에게 [음악] 팔렸다고 보는 연구가 있습니다. 마카오에는 조선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작은 공동체가
6:466 minutes, 46 seconds생겼다는 연구도 있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남쪽 한구에서 같은 처지의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며 살았던 거죠.
6:526 minutes, 52 seconds사람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값이 크게 떨어졌다고 합니다.
6:566 minutes, 56 seconds사람값이 시장에서 폭락했다는 말을 이렇게 문장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여기에는 얄구준
7:037 minutes, 3 seconds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히데오시는 전쟁을 일으키기 몇 해 전에 일본 사람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걸 금지하는 문서를 낸 적이 있거든요. [음악]
7:117 minutes, 11 seconds포르투카 상인들이 일본 사람을 사서 해외로 데려가는 걸 맡겠다는 거였어요. 천주교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내쫓겠다는 명령을 내리기 바로
7:197 minutes, 19 seconds전날다운 문서였습니다. 서양 상인과 선교사들이 일본 백성을 노예로 사가는 걸 문제 삼은 거죠. 그러니까 일본 사람을 파는 건 안 되는데 조선 사람을 파는 건 막지 않은 셈입니다.
7:307 minutes, 30 seconds자기 [음악] 백성은 지키겠다던 그 사람이 남의 나라 백성이 같은 한고에서 팔려 나가는 건 눈감은 거죠. 저는이 문서 한 장이 그
7:377 minutes, 37 seconds시대일보니 조선 사람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보여주는 거울 같다고 생각해요. 음마전 한국 축구가 사연패를 하며 시상을 하던 장면이
7:457 minutes, 45 seconds떠오르는데 참 씁쓸합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사람으로 대접받기도 하고 물건으로 팔리기도 했던 겁니다. 그
7:547 minutes, 54 seconds한구에서 조선 사람을 산 유럽인이 직접 남긴 기록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온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라는 사람이에요. 세 개를 한
8:028 minutes, 2 seconds바퀴 돌며 장사를 하고 나중에 그 여정을 책으로 남긴 그는 나가사케에 머물던 무려 조선 사람 다섯 명을 샀다고 적었습니다. 그 값이 다섯
8:118 minutes, 11 seconds명을 다 합쳐서 은화 열두이 핀 남짓이었다고 해요. 다섯 사람을 다 합쳐서 그 값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카를레티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8:198 minutes, 19 seconds않습니다. 그는이 다섯 사람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인도의 고아에 이르렀을 때 풀어 주었다고 적었어요.
8:268 minutes, 26 seconds그리고 그 가운데 한 명은 자기 고향 이탈리아까지 데려갔습니다. 그는 그 사람에 대해 이렇게 썼어요. 지금은 로마에 있고 안토니오라고 불린다.
8:348 minutes, 34 seconds유럽 땅을 밟은 조선 사람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8:388 minutes, 38 seconds나머지네 사람이 고아에서 풀려난 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요. 조선의 어느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을 텐데 전쟁에
8:478 minutes, 47 seconds붙잡히고 팔리고 풀려나서 로마의 거리를 걷게 된 거예요.이 안토니오를 두고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8:538 minutes, 53 seconds벨기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그림 가운데 한복처럼 [음악]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를 그린 소묘가 있는데이 남자가 바로 안토니오라는 이야기예요.
9:029 minutes, 2 seconds한국에서도 꽤 널리 알려졌죠. 물론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오차림도 그렇고 시기도 얼추 맞아 떨어지니까요. 근데 그림을 가지고
9:099 minutes, 9 seconds있는 미국 개술관도이 사람이 저선 사람이라고 못 박지 않았습니다. 몇 해 전에는이 사람이 중국 상인의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까지 나왔어요.
9:189 minutes, 18 seconds이탈리아 어느 마을에 코리아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그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도 근거가 약한 전설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일수록
9:279 minutes, 27 seconds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봐요. 진짜 기록하나가 이미 충분히 [음악] 무겁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두고 유럽 교회 안에서도 생각이 갈렸습니다.
9:359 minutes, 35 seconds나가사키에 있던 세르케이라 주교는 조선 사람을 사는 자는 교회에서 내쫓겠다고 경고했어요. 그리고 일본인 신자들에게 조선인 포로를 대사서 풀어
9:449 minutes, 44 seconds주라고 했습니다. 스페인의 한 신학자는이 매매가 합법이라는 판단을 내놓았어요. 같은 교회 안에서 한쪽은 막으려 했고 한쪽은 괜찮다고 한
9:539 minutes, 53 seconds겁니다. 그 사이에서 조선 사람들은 계속 배에 실려 나갔죠. 먼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긴 했습니다. 진주삼비 조 완벽은 일본에
10:0210 minutes, 2 seconds끌려간 뒤 일본 상인의 배를 타고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까지 세 번이나 [음악] 다녀왔어요. 그리고 끝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10:1010 minutes, 10 seconds당대의 학자 이수광이 따로 글로 남길만큼 신기한 일로 여겨졌어요.
10:1410 minutes, 14 seconds조선 사람이 베트남 땅을 밟고 돌아왔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기록에 이름이나 사연이 남은
10:2310 minutes, 23 seconds사람은 아주 드니다. 끌려간 [음악] 사람 대부분은 일본 어느 영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성을 쌓거나 남의 집 부엌에서 일하며 이름없이
10:3110 minutes, 31 seconds살다 갔어요. 주인이 바뀔 때마다 다른 집으로 넘겨지기도 했고요.
10:3510 minutes, 35 seconds오늘이 영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연히 기록이 남은 몇 사람일 뿐입니다. 그 뒤에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훨씬 많은
10:4410 minutes, 44 seconds사람들이서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이렇게 팔려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일본 영주들이 팔지 않고 [음악] 일부러 곁에 둔 사람들도
10:5210 minutes, 52 seconds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영주들이 탐내는 무언가가 있었거든요.
10:5810 minutes, 58 seconds일본 영주들이 가장 탐낸 건 흙을 다루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무렵 일본에서는 차를 마시는 다도가 무사들
11:0611 minutes, 6 seconds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어요. 좋은 차사발 하나가 성하나값에 만모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그런데 일본은 아직 단단하고 하얀 그릇을 구원내는
11:1411 minutes, 14 seconds기술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 눈에 귀한 보물처럼 보였을 거예요. 재미있는 건 일본 무사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긴 첫사발
11:2311 minutes, 23 seconds가운데 조선에서 건너간 그릇이 많았다는 겁니다. 조선에서는 막쓰던 평범한 사발이 일본에 건너가서는 최고의 차사발로 대접받았어요. 그런
11:3211 minutes, 32 seconds조선 사발 가운데 하나는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된 교토의 한절에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무심히 빚던
11:3911 minutes, 39 seconds그릇이 바다 건너에서는 보물이 된 거죠. 그 그릇을 만들던 사람들을 직접 데려가고 싶어 한 영주들의 마음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11:4711 minutes, 47 seconds일본에서도이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만 이건 [음악] 전쟁이 끈다고 규슈 곳곳에 감마가 늘어난 결과를 두고 붙인 별명이에요.
11:5611 minutes, 56 seconds도공을 데려가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뜻은 아닙니다.이 부분은 오해가 많아서 짓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12:0212 minutes, 2 seconds그 도공들 가운데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이 이산평입니다. 그는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군에게 끌려가 처음에는
12:0912 minutes, 9 seconds한 가신의 땅에서 지내다가 지금의 아리타 지역에 자리를 잡았어요.
12:1312 minutes, 13 seconds일본에서는 가나가의 삼베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아리타 근처 이즈미야마라는 산에서 하얀 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돌을
12:2212 minutes, 22 seconds찾아냅니다.이 돌을 캐서 빠으면 백자의 원료가 되는 거죠. 이산평은이 원료로 아리타를 자기를 굽는 마을로 키워냈습니다. 그보다 앞서 근처
12:3012 minutes, 30 seconds감마에서 이미 자기를 구었다는 학설도 있어서 그를 일본 최초에 자기를 만든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2:3712 minutes, 37 seconds그래도 원료를 찾아내 한 마을의 산업으로 키운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어요. 그는 끌려온 뒤 60년 가까이 아리타에서 그릇을 구우며 살다가 그 땅에 묻였습니다.
12:4712 minutes, 47 seconds그렇게 아리타에서 구운 자기는 다시 바다를 건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이 그릇에 사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과 중동으로 대량
12:5612 minutes, 56 seconds수출되기 시작했어요. 한 번에 수만 개 단위로 주문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음악] 유럽 왕실과 귀족들의 궁전 장식장에 아리타 자기가
13:0413 minutes, 4 seconds올라갔죠. 끌려간 사람의 손에서 나온 그릇이 끌려간 사람들이 팔려 나가던 그 바닷길을 따라 유럽까지 간 겁니다. 한쪽 배에는 사람이 실렸고
13:1213 minutes, 12 seconds다른 쪽 배에는 그 사람들이 빚은 그릇이 실렸던 거예요. 남원에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유년에 남원성이 무너졌을 때 사스마의 영주
13:2113 minutes, 21 seconds심마주군이 남 사람명 남짓을 붙잡아 갔어요. 그 가운데 심당길이라는 도공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규슈 남쪽
13:2813 minutes, 28 seconds90키노라는 바닷가에 내렸다가 몇테 뒤 나의시로가와라는 마을로 옮겨가 자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마을에 당군을 모시는 사당을 세웁니다.
13:3613 minutes, 36 seconds옥상궁이라는 이름이었어요. 남의 나라 땅 한가운데 우리 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음악] 세운 거죠.이 이 마을 사람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조선마을 쓰고 조선 옷을 입었습니다.
13:4613 minutes, 46 seconds일본이 근대 국가로 바뀌는 메이지 시대까지 그 풍속을 지켰다고 해요.
13:5013 minutes, 50 seconds사스마의 영주가이 마을을 보호하며 도자기를 굽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혼슈 서쪽 끝 하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13:5813 minutes, 58 seconds모리가문이 데려간 조선 도공 이경은 나중에 무사대우를 [음악] 받고 새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름에 고려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전해집니다. 일본
14:0614 minutes, 6 seconds이름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어디서 갔는지는 이름 속에 남긴 셈이죠.
14:1014 minutes, 10 seconds규슈 후쿠호가에 다카토리 감아도 구로다가문이 데려간 조선도공이 [음악] 연곳입니다. 하기의 그릇은 지금도 일본 다도에서 손꼽히는
14:1814 minutes, 18 seconds차그릇으로 대접받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이름난 가마 가운데 상당수가 이렇게 조선 사람의 손에서 시작됐어요. 일본 사람들이 귀하게
14:2614 minutes, 26 seconds여기는 그릇의 밑바닥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손잡국이 남아 있는 셈이죠. [음악] 흙만 데려간게 아니었습니다.
14:3514 minutes, 35 seconds글도 데려갔어요. 앞에서 아이들을 바다에서 잃은 선비 강황.
14:3914 minutes, 39 seconds기억하시죠? 그는 처음에 시코의 오즈라는 곳에 갇혀 있다가 교토 근처 후심미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학자를 만나요.
14:4914 minutes, 49 seconds세이카는 원래 승녀였는데 유학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어요. 세이카를 따르던
14:5614 minutes, 56 seconds아카마스 히로미치라는 영주도이 모임에 함께했습니다. 강황은 포로신 분이었지만 세이카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승 같은 존재였던 거죠.
15:0415 minutes, 4 seconds강황은 세이카와 함께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 오경을 일본 사람들이 읽기 좋게 풀어쓰는 작업을 했습니다.
15:1115 minutes, 11 seconds한문에 일본식 읽기 표시를 달아주는 일이었어요.이 작업이 일본에서 성리하기 자리를 잡는데 한 축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두 사람이
15:1915 minutes, 19 seconds주고받은 글을 모은 책이 지금도 일본 덴니 대학에 남아 있어요. 아이들을 바다에 잃고 끌려온 포로가 끌고 간 나라의 한문에 뿌리를 내려준
15:2815 minutes, 28 seconds셈입니다. 비슷한 길을 간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이진영이라는 선비는 일찍 끌려가 일본에서 학문을 익혔고 훗날 기슈 지역 영주의 학문 스승이
15:3615 minutes, 36 seconds됐어요. 기슈의 영주는 도쿠가와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의 선비가 일본 최고 권력문의 아이를 가르친 거죠.
15:4315 minutes, 43 seconds칼로 끌려간 사람이 붓으로 그 나라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 겁니다. 그의 아들도 대를 이어 기슈의 유학자가 됐어요. 아버지가 끌려간 땅에서 아들이 학문의 집안을 일군셈이죠.
15:5315 minutes, 53 seconds강황은 3년 가까이 일본에 붙잡혀 있다가 끝내 함께 잡혀온 일행 30서른 여명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붙잡혀 있는
16:0116 minutes, 1 second동안에도 일본의 지리와 군사, 영주들의 사정을 [음악] 몰래 적어 조선 조정에 보내려 했었어요. 포로 신분으로 적국을 살핀
16:0916 minutes, 9 seconds첩보 보고서였던 셈이죠. 돌아온 뒤에는이 글들과 함께 일본에서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가 그 기록에 처음 붙인 제목은
16:1716 minutes, 17 seconds건거록이었습니다. 죄인을 씻는 수레라는 뜻이에요. 살아돌아온 사람이 자기록에 죄인의 수레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16:2616 minutes, 26 seconds한참 뒤 제자가 펴내면서 간양녹록으로 이름이 바뀌어요. 흉로에 붙잡혀 양을 치면서도 절개를 지켰다는 옛 중국
16:3316 minutes, 33 seconds사람 소무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강항은 돌아왔습니다.
16:3716 minutes, 37 seconds하지만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서 아예 일본 사람이 되어 살아간 이들도 많았어요.
16:4416 minutes, 44 seconds세 번째 길을 걸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대부분 아주 어린 나이에 끌려갔다는 겁니다.
16:5016 minutes, 50 seconds어른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고향 말과 기억을 붙들고 있지만 아이들은 낯선 땅의 말과 풍습을 스펀지처럼
16:5716 minutes, 57 seconds빨아들이거든요. 그래서 어려서 끌려간 아이들일수록 일본 사회 깊숙히 섞여들었고 그 가운데 몇몇은 일본 사람들도 놀랄만큼 높은 자리에
17:0517 minutes, 5 seconds올랐습니다. 일곱살에 끌려간 김여철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17:0917 minutes, 9 seconds임진년 전쟁 때 오키타 히데이에라는 일본 장소의 군대에 붙잡혔어요.
17:1417 minutes, 14 seconds오키타는 히데요 씨가 아끼던 젊은 영주였는데이 아이를 데려가 자기 아내에게 맡깁니다. 아내는 히데오시의 양였던 고이메라는 여인이었어요.
17:2317 minutes, 23 seconds아이는 그 집에서 자라다가 다시 가가 지역을 다스리던 마에다 가문의 여인 손에 맡겨집니다. 조선 아이가 일본 최고 권력자의 집안을 차례로 거치며
17:3217 minutes, 32 seconds자란 거죠.이 이 아이는 자라서 와키타라라는 무사 집안의 사위가 됩니다. 이름도 와키타 나오타로 바꿨어요. 그리고 일본 전국 시대의
17:4017 minutes, 40 seconds마지막 큰 싸움이었던 오사카 전투에 나가 공을 세웁니다. 그 덕분에 노봉이 크게 늘었고 가가의 중심도시 가나자와 시내 행정을 맞는 마치부교라는 자리에까지 올라요.
17:5117 minutes, 51 seconds우리로 치면 시장쯤 되는 자리입니다.
17:5317 minutes, 53 seconds일본 전통 연작인 낸도 뛰어났고 지금도 가나자와에 남아 있는 정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조선에서 끌려간 아이가 일본 무사 사회 한가운데에서
18:0218 minutes, 2 seconds출세를 한 거예요. 그가 공을 세운 오사카 전투가 어떤 싸움이었는지 보면 좀 묘한 기분이 듭니다.이 싸움은 도쿠가와 이에스가 히데오시의 아들을
18:1018 minutes, 10 seconds무너뜨린 싸움이었거든요. 조선을 쳐들어와이 아이를 끌고 가게 만든 바로 그 히데오시의 집안이이 싸움으로 끝장이 납니다. 그리고 그 싸움터에
18:1918 minutes, 19 seconds도크가와 편 마이다 가문의 무사로 나선 사람이 그 전쟁에 끌려온 조선 소년이었던 거죠. 역사가 참 기묘하게 돌아간 셈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눈길를 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8:3018 minutes, 30 seconds평생 일본 이름으로 살던 그가 말년에 자기 원래 이름인 여철, 여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18:3818 minutes, 38 seconds않습니다. 저는 이걸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함부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이른이 넘도록 일본 사람으로 산 사람이 마지막에 조선에서
18:4618 minutes, 46 seconds받은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걸 생각하게 됩니다. 홍호현이라는 소년도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진주 성사이
18:5418 minutes, 54 seconds벌어지던 무렵 경상도 산청 근처에서 사과의 영주 나베시마군에게 붙잡혔어요. 12살이었습니다. 그는 교토의 큰 절들에서 공부를 하며
19:0319 minutes, 3 seconds글씨와 학문을 익혔고 이름난 서해가 되어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 가스시계의 곁을 지켰어요. 영주가 가장 믿는
19:1019 minutes, 10 seconds측근이 된 거죠. 그리고 말년에 고향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길을 떠났다가 영지 경계에서 다시 불려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1819 minutes, 18 seconds이건 기록이라기보다 전에 오는 이야기라서 그대로 믿기는 어려워요.
19:2219 minutes, 22 seconds그래도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오래 전해 왔다는 것 자체가 그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마지막도 일본
19:3019 minutes, 30 seconds부사의 방식 그대로였습니다. 끌려간지 예수쯤 지난 어느 봄 죽은 나베시마 가스 시계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른 여섯살이 된 홍오여는 사과의
19:3919 minutes, 39 seconds아미다지라는 절에서 붓을 들어 글자 하나를 크게 써요. 참을 인.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참으면 마음에 보배가
19:4719 minutes, 47 seconds되고 참지 못하면 [음악] 몸에 재앙이 된다. 그리고 죽은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이 글씨가 지금 사가연의 문화재로 지정되
19:5519 minutes, 55 seconds있는 그 글씨예요. 죽은이 세상을 떠나면 가까운 가신이 뒤따라 목숨을 끊는 걸 순사라고 하는데 그무렵 일본
20:0220 minutes, 2 seconds무사 사회에서는 이걸 충성의 진표처럼 여겼어요. 홍우연은 그 길을 택했습니다. 여태 뒤 막부는이 순사를 법으로 금지하게 되는데요. 그러니
20:1120 minutes, 11 seconds그는이 오래된 풍습의 거의 끝자락에서 주군을 따라간 셈입니다. 조선 아이로 태어나 이본 무사의 방식으로 생을 마친 거죠. 여인들의 길도
20:1920 minutes, 19 seconds있었습니다. 오타 줄리아라고 불린 조선 여인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에 붙잡혀 일본으로 [음악] 갔습니다. 고니시는
20:2720 minutes, 27 seconds천주교를 믿던 영주였는데 그 집안에서 자한 소녀도 세례를 받고 줄리아라는 이름을 얻었어요. 그녀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에서 시중을
20:3620 minutes, 36 seconds드는 시녀로 일하게 됩니다. 조선에서 끌려온 소녀가 일본 최고 권력자의 성안에서 살게 된 거죠. 그런데 이에야스가 천주교를 금지하면서 그녀의
20:4420 minutes, 44 seconds삶이 뒤집힙니다. 신앙을 버리라는 명령을 거부한 줄리아는 도쿄 남쪽 바다의 외딴 섬들로 차례차례 유배를 가요. 마지막에 간 섬이 고주시마라는
20:5320 minutes, 53 seconds작은 섬이었습니다. 도쿄에서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닿는 바다 한가운데 화산 섬이에요.이 섬 사람들은 그 뒤로 400년 가까이 섬 안에 있는
21:0121 minutes, 1 second돌탑파나를 줄리아의 무덤이라 여기며 모셔왔어요. 지금도 해마다 줄리아를 기리는 축제가 열립니다. 한 때는 그
21:0821 minutes, 8 seconds무덤의 흙을 한국 천주교 성지로 옮겨와 모시기도 했어요. 그런데 최근 연구를 보면 그녀는 그 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유베에서 풀려나
21:1721 minutes, 17 seconds나가사키로 옮겨갔고 오사카에서 그녀를 돕고 있다는 한 신부의 편지가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에요. 섬 사람들이
21:2421 minutes, 24 seconds정삼껏 모셔온 무덤에 정작 그녀는 없었던 셈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 섬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21:3121 minutes, 31 seconds않아요. 낯선 섬에 홀로 끌려온 조선 여인은 400년 동안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니까요.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21:3921 minutes, 39 seconds권 빈첸시오라는 사람은 어려서 고니시군에게 붙잡혀 일본에 왔고 13살의 세례를 받아 천주교 전도사가
21:4721 minutes, 47 seconds됐어요. 그리고 천주교 박해가 거세지던 때 나가사키에서 불에 타 순교했습니다. 훗날 로마 교황청은 그를 복자로 올렸어요. 그와 함께
21:5521 minutes, 55 seconds복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조선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21:5921 minutes, 59 seconds이렇게 일본 땅에 남아 저마다의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조정은 이들을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22:0822 minutes, 8 seconds그런데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면들이 나옵니다.
22:1522 minutes, 15 seconds전쟁이 끝나고 몇 뒤 사명 대사가 바다를 건 의병을 이끌던 그 스님이 그는 교토처 후심미성에서 새로 일본의
22:2322 minutes, 23 seconds실권을 진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만나 단판해 버렸고 끌려간 조선 사람 3천여 명을 데려왔다고 전해집니다.
22:3022 minutes, 30 seconds그 뒤로도 조선은 새 차례나 일본의 사신을 보냈어요.이 이 사신단 이름에는 데려온다는 뜻에 쇠환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을
22:3822 minutes, 38 seconds데려오는게 사신단의 중요한 임무였던 거죠. 조선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나라를 짓밟은 원수의 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거니까요.
22:4722 minutes, 47 seconds그래도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고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게 일본의 성내를 살피려면 길을 다시 터야 했습니다.
22:5422 minutes, 54 seconds일본 쪽에서도 새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가문이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포로를 돌려보내는 일이 두 나라가 다시 말을
23:0223 minutes, 2 seconds트는 조건처럼 된 겁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신길은 나중에 조선 통신사로 이어집니다. 조선 사신들이 에독까지
23:0923 minutes, 9 seconds가는 길마다 일본 사람들이 몰려나와 글씨와 그림을 받아가던 그 통신사여.
23:1423 minutes, 14 seconds그 화려한 문화교류의 출발점에는 끌려간 백성들을 찾아나선 쓸쓸한 사신 길이 있었던 셈이에요. 첫 번째 사신단이 일본을 떠나던 날 오사카
23:2323 minutes, 23 seconds포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신 경섬이 남긴 해사록에 나오는 장면이에요. 귀국하는 배가 떠나려는데 일본인 남편을 속이고 몰래 빠져나와
23:3223 minutes, 32 seconds사신행렬로 뛰어든 여인도 있었고 칼을 쥐고 아내를 막아서는 일본인 남편도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수십명이 그렇게 폭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해요.
23:4123 minutes, 41 seconds그렇게 애를 써서 그에 데려온 사람이 10000여명이었습니다.
23:4523 minutes, 45 seconds경섬은 이걸 두고 아홉 마리 소의 털 가운데 하나를 뽑은 것과 같다고 한탄했어요. 끌려간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 적었다는 거죠. 왜 그렇게
23:5323 minutes, 53 seconds적었을까요? 경은 두 가지를 적었습니다. 일본인 주인들이 앞다 포로를 숨겼다는 거. 그러니까 막보가
24:0024 minutes돌려보내라고 해도 각 영주와 주인들이 쉽게 내놓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포로들도 이미 그곳에 사는 것을 편하게 여기게 됐대다는 것이에요. 그
24:0924 minutes, 9 seconds뒤로 사신단이 갈 때마다 데려오는 사람은 더 줄어듭니다. 두 번째 사신단이 데려온 사람은 첫 번째 1/4도 안 됐고 세 번째는 그
24:1724 minutes, 17 seconds절반에도 못 미쳤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끌려간 사람들은 그 땅에 뿌리를 내렸고 고향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사명대사가 데려온 사람과
24:2624 minutes, 26 seconds세차례 사신단이 데려온 사람 스스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까지 모두 합쳐도 돌아온 사람은 6,에서 7,명
24:3324 minutes, 33 seconds남짓으로 봅니다. 한국 학계 추정대로라면 열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한 셈이고 일본 학계에 적은 추정으로 봐도네 명 가운데 한 명
24:4124 minutes, 41 seconds골밖에 안 돼요. 두 번째 사신단의 기록에는 그 사정이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사신 이경직이 남긴 부상록이에요. 이경직은 끌려간
24:4924 minutes, 49 seconds사람들을 만나보고 나이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는 걸 알아니다. 15살이 넘어 끌려온 사람들은 돌아가자는 말에 먼저
24:5724 minutes, 57 seconds이렇게 물었어요. 지금 조선 살림은 어떻습니까? 돌아가서 먹고 살 수 있느냐를 먼저 따진 거죠. 반면 열살 전에 끌려온 사람들은 말투도 몸짓도
25:0525 minutes, 5 seconds[음악] 이미 완전히 일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고향마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 가운데 창원 출신 김개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5:1325 minutes, 13 seconds12세 살에 끌려와서 조선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사신이 돌아가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20여년 동안 은혜를 입은 주인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25:2325 minutes, 23 seconds끌려온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붙잡아온 사람이 은인이 되어 있었던 거죠. 20년 은혜라는 말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남 선비의
25:3125 minutes, 31 seconds아들 길은 13살에 끌려와 부잣집 상인의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돌아가자는 말 앞에서 쉽게 답하지 못했어요.
25:4025 minutes, 40 seconds사람들을 붙잡아 두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이 본인 주인들은 포로들에게 이렇게 겁을 줬어요.
25:4525 minutes, 45 seconds조선에 돌아가면 죽임을 당하거나 외딴 섬으로 보내진다. 사신들이 너희를 데려가서 자기 종으로 부릴 거다.
25:5225 minutes, 52 seconds주인이 숨기니까 못 오고 못 오는 사이 일본에서 가정을 꾸리고 가정이 생기니까 이제는 안 오게 되는 거예요. 세월이 그렇게 사람을 붙잡아
26:0026 minutes두었습니다. 세 번째 사신다니 에도에 머물던 겨울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신 강중이 남긴 동사록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전라도
26:0826 minutes, 8 seconds한평 양반 최홍의 아내 춘이라는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사신을 찾아옵니다. 그녀는 고향이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아들 순위가
26:1726 minutes, 17 seconds문제였습니다. 순는 일본에서 일본인 아내를 얻어 아이까지 있었고 갚아야 할 빛도지고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데고 함께 가고 싶은데 아들은
26:2526 minutes, 25 seconds아내와 아이와 빚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던 거죠.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보다못한 사신들이 쌀을내어 빚을 갚게 해줬고
26:3426 minutes, 34 seconds순위는 나중에 뒤따라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약속이 지켜졌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사신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돌아가기를
26:4226 minutes, 42 seconds원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도 형이 보낸 편지를 받고도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사신은 남은
26:5126 minutes, 51 seconds사람들을 두고 오랑캐풍속에 물들었다고 나무었습니다. 데리러 간 사람의 눈길부터가 차가웠던 거죠. 그럼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느냐?
26:5926 minutes, 59 seconds스스로 목숨을 걸고 탈출해 온 사람들에게는 조정이 부역을 면해 주는 등 나름의 대우를 했습니다. 남원에서 붙잡혔던 노인이라는 선비는 중국배의
27:0727 minutes, 7 seconds몸을 숨겨 일본을 빠져나온 뒤 중국 푸쟁과 베이징을 거쳐 먼기를 돌아냥까지 돌아왔고 그가 남긴 일기는
27:1427 minutes, 14 seconds지금 보물로 지정돼 있어요. 그런데 사신이 한꺼번에 데려온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사신들이
27:2327 minutes, 23 seconds데려온 사람들을 부상 근처에 내려놓고 그냥 떠나 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까지 가는 길조차 막막했던 거죠. 더 아픈 일도
27:3027 minutes, 30 seconds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박수영이라는 사람은 적에게부터 나라를 배반했다는 죄로 처형됐어요.
27:3627 minutes, 36 seconds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반역자로 몰린 겁니다. 좀 씁쓸합니다.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살아남으려고 일본군 밑에서 일한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27:4527 minutes, 45 seconds그 사정을 조선은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저리를 중요하게 여기던 사회에서 적에게 붙잡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흠이
27:5327 minutes, 53 seconds됐거든요. 돌아온 사람들은 그런 눈길 속에서 차별과 멸시를 견뎌야 했습니다. 방황이 자기 기록에 죄인의 수레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
28:0128 minutes, 1 second있어요. 붙잡혔던 것도 살아서 돌아온 것도 부끄러움이 되는 사회였던 거죠.
28:0628 minutes, 6 seconds그 시대 기준으로 저리를 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 보실 수 있습니다.
28:1028 minutes, 10 seconds물론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으니까요. 근데 끌려간 사람 대부분이 누구였는지 한번 생각해
28:1928 minutes, 19 seconds보시면 칼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농민과 여인과 아이들이었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저리를 묻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28:2728 minutes, 27 seconds그래서 열이 남았습니다. 일본이 놓아주지 않은 사람, 스스로 남기로 한 사람, 돌아가도 설자리가 없었던 사람이 뒤섞여서요. 붙잡아 두려는 나라와 데려와도 반기지 않는 나라.
28:3828 minutes, 38 seconds그 사이에서 수많 사람들이 바다 건너편에 남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흔적은 지금도 일본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28:4828 minutes, 48 seconds일본 여행 가서 아리타 그릇 한 번쯤 보신 분들 계실 거예요. 그 아리타에 가면 도잔 신사라는 신사가
28:5528 minutes, 55 seconds있습니다.이 신사에는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계와 함께 2, 3평이 신으로 모셔져 있어요. 신사 입구에는
29:0229 minutes, 2 seconds하얀 자기로 만든 도리이가서 있습니다. 에이지 시대에 아리타 사람들이 직접 구워 세운 거예요.
29:0829 minutes, 8 seconds보통 도리인이는 나무나 돌로 만드는데 여기는 도자기로 만든 거죠. 해마다 5월 4일이면 2, 3평을 도자기에
29:1529 minutes, 15 seconds시조로 기리는 제사가 열려요. 신사 뒤쪽 산 위에는 2, 3평을 기리는 커다란 비속도서 있습니다. 아리타 자기 300년을 맞아 마을 사람들이
29:2429 minutes, 24 seconds세운 비석이에요. 그 비석 앞에 서면 아리타 마을과 굴뚝들이 내려다 보인다고 합니다. 아리타에서는 해마다 봄에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데 올해도
29:3329 minutes, 33 seconds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2, 3평의 후손는 지금 14대째 대를 이어 그 이름을 지키고 있어요. 끌려간 도공 한 사람이
29:4129 minutes, 41 seconds일으킨 마을이 400년이 지난 지금 [음악] 일본에서 성고피는 도자기 마을이 된 겁니다. 남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던 나의 시로가와 지금의 미아마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29:5129 minutes, 51 seconds[음악] 당군을 모셨던 옥상궁은 옥산 신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있어요. 나중에 모시는 신이 도자기의
29:5829 minutes, 58 seconds신으로 바뀌긴 했지만 남은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400년 동안 사라지지 않은 거죠. 심당길의 후손이 대를 이어온 심수관 감아도 지금 문을 열고
30:0730 minutes, 7 seconds손님을 맞습니다. 그 가운데 14대 심수관은 한국과 특히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그는 일본 사람으로서는
30:1430 minutes, 14 seconds처음으로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조상이 떠나온지 400년이 되던 남원에서 부시를
30:2130 minutes, 21 seconds가져가에 옮겨붙였어요. 남원의 불로 사스마의 그릇을 구운 겁니다. 그 해 미야마에서는 조선 도공들이 건너온지
30:2930 minutes, 29 seconds400년을 기리는 큰 행사가 열렸고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어요.
30:3430 minutes, 34 seconds일본의 이름난 소설과 시바 탈로는 그를 모델로 고향을 입기 어렵습니다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어요.
30:4030 minutes, 40 seconds그는 몇 해 전 아은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15대가 그 이름을 입고 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전혀 다른 길을 간 후손도
30:4930 minutes, 49 seconds있었습니다. 박무덕이라는 아이가이 마을에서 태어났어요.네 네살 때 아버지가 무사신분을 사서 집안의 성을 일본식인 도고로 바꿉니다. 그 아이가
30:5830 minutes, 58 seconds자라서 도고 시계놀이라는 일본 외모 대신이 [음악] 돼요. 그것도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때 외모 대신이었고 전쟁을 끝낼 때도 다시 외모
31:0631 minutes, 6 seconds대신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A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 금고 20년을 선고받았고 감옥에서 병으로
31:1431 minutes, 14 seconds세상을 떠났어요.이 사람을 두고 조선의 후손이 일본의 전쟁을 이끌었다며 손가락질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물론 그렇게 보실 수
31:2231 minutes, 22 seconds있습니다.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음악] 자리에 있었던 건 분명하니까요. 근데 한번 생각해 보시면이 사람의 조상은 원해서 그
31:2931 minutes, 29 seconds마을에 간게 아니었거든요.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 300년 가까이 일본 땅에서 살다 보니 그 나라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겁니다. 한
31:3731 minutes, 37 seconds마을에서 한 사람은 남원의 부씨를 가져가 그릇을 굽고 한 사람은 일본의 전쟁을 지휘하는 자리에 섰어요.
31:4431 minutes, 44 seconds저는이 [음악] 두 사람을 미담이나 비난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기보다 끌려간 사람들의 400년이 얼마나 여러 갈래로 흘러갔는지를 보여주는
31:5231 minutes, 52 seconds장면으로 보고 싶습니다. 홍호연의 그씨도 한국 땅을 밟은 적이 있어요.
31:5631 minutes, 56 seconds그가 남긴 글씨가 사가연 문화재로 지정되던네. [음악] 그 유무이 잠시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2살에 끌려간 아이가
32:0532 minutes, 5 seconds몸으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씨로만 400년 만에 구양땅을 밟은 셈이죠. 끌려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곳은 일본에 더 많습니다.
32:1332 minutes, 13 seconds고즈시마에서는 지금도 줄리아 축제가 열리고 강황이 갇혀 있던 오지에는 그를 길이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요.
32:2032 minutes, 20 seconds그 비석은 오즈 씨가 직접 세운 겁니다. 조선비가이 고장에서 일본 학문의 씨앗을 뿌렸다는 걸 자랑으로
32:2732 minutes, 27 seconds여긴 거죠. 아리타와 미아마의 신사와 가마도 마찬가지고요. 일본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뿌리로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들이 떠나온
32:3632 minutes, 36 seconds곳은 어떨까요? 남원, 영광, 산청, 진주, 창원, 한평이 사람들의 고향 이름입니다. 물론 우리 쪽에도 흔적은
32:4432 minutes, 44 seconds있어요. 강항의 고향 영광에는 [음악] 그를 모신 서원이 있고 남원에는 남원 성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 있습니다.
32:5232 minutes, 52 seconds다만 그 기억은 주로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 절개를 지킨 사람을 향해 있어요.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농민과 아이들. 그 땅에서 일본
33:0133 minutes, 1 second사람으로 살다 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보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는
33:0833 minutes, 8 seconds개인적으로는 누구 타시냐를 따지는 것보다 누가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느냐가 더 아프다고 생각을 합니다.
33:1533 minutes, 15 seconds끌려간 쪽의 고향밥보다 끌고 간 쪽의 마을이 이들의 이름을 더 오래 불러왔다는 게요.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몇
33:2333 minutes, 23 seconds해 전 한 방송사가 홍연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다뤘고 그 영상은 요즘 다시 올라와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보고
33:3033 minutes, 30 seconds있습니다. 남원에서는 심수강 가문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요. 400년 전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33:3733 minutes, 37 seconds이제야 조금씩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는 셈입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그릇과 글과 이름 속에 섞여 남았을 뿐이죠.
33:4733 minutes, 47 seconds그럼 지금까지 세상 놀란 토끼 세월토 바피디였습니다.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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