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공족
왕공족(王公族)은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제국에서 대한제국 황족에 대해 규정한 신분으로, 화족의 상위에 둔 것 신분이다. 고종 광무제의 가계를 ‘왕족’이라 하고, 나머지 황족의 방계를 ‘공족’이라고 칭하였다.
연혁
한일 병합 조약 제3조에 “일본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 및 후예를 각기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조한다.”라고 명문화되어 있는 까닭으로부터 왕공족 제도의 설치가 시작된다.
일제는 합병 당초 일본 천황의 조서로 대한제국 순종효황제를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에 책봉하고, 황태자를 ‘이왕세자’로 격하시켰다. 양위를 하고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태황제는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에 책봉하였다. 순종효황제와 그 직계가족에 대해서는 왕족의 칭호를, 그 근친자들에게는 공족(公族)이라는 칭호를 붙여 신분을 규정하였다. 예우상으로는 일본 황족과 동등한 예를 받고 전하(殿下)라는 존칭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합병 당시 공포된 천황의 조서에 나타난 왕공족의 법적 지위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불완전한 규정이었다. 일본 궁내성은 왕공족의 변동이 있을 때마다 천황의 칙허를 통해서 임시방편으로 대응해 나갔고 1926년이 되어서야 왕공족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을 공포하여 왕공족의 신분상 모호성을 해결한다.[1]
순종효황제(창덕궁 이왕 척)의 동생이자 ‘대한제국 황태자’인 영친왕은 ‘이왕세자’로 격하되어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이왕가(李王家)의 가독을 승계하여 ‘창덕궁 이왕 은’이 되었다.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경성에 이왕직(李王職)을 설치하여 조선 총독의 감독하에 두었다. 왕공족은 경성에 본저(本邸)를 도쿄에 별저(別邸)를 두었다. 왕공족의 자녀는 학습원(學習院, 일본의 황족과 귀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 또는 여자학습원에 취학하였다. 또 일본의 황족남자와 동등하게 왕공족 남자는 만 18세가 되면 육해군의 군인이 되어야 했다. 왕공족 제도는 조선귀족 그리고 화족 제도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 폐지되었다.
정의
왕족
왕족(王族)은 이왕·이왕비·이태왕·이태왕비·이왕세자·이왕세자비·이왕세손·이왕세손비, 즉 이왕의 장자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 배우자를 가리킨다(왕공가궤범 제14조). ‘덕수궁’이나 ‘창덕궁’은 궁궐의 이름으로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와 같은 일본 황족의 궁호와는 다르다. 따라서 ‘창덕궁전하’라고는 하지 않고, ‘이왕 은 전하’(李王垠殿下)처럼 이름으로 불렀다. 왕족은 공족과 마찬가지로 만20세가 성년이다(왕공가궤범 제38조).
일본이 패망하자 왕족들은 그 특권과 함께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본국으로 귀국하기를 희망했으나, 한일 양국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무국적 상태로 일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후 영친왕은 영친왕비와 함께 귀국하여 국적을 회복하였다. 1970년에 영친왕이 서거하고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 은’이라는 칭호로 국장을 치르고 금곡릉에 묻혔다. 영친왕비는 ‘이방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남편의 유업을 계승하던 중 1989년에 서거하고 금곡릉에 합장되었다.
공족
공족(公族)은 공·공비, 가계를 물려주고 물러난 ‘공’(왕족의 태왕에 해당)과 그 자손, 즉 공의 장자(長子)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 배우자를 가리킨다(왕공가궤범 제15조). 가계를 물려주고 물러난 경우에는 ‘공’의 칭호는 소멸하게 된다. 공족도 왕족과 마찬가지로 전하의 칭호를 받게 되어있으며 ‘이우공 전하’와 같은 식으로 불리며, 가계를 물려주고 물러난 경우에는 ‘이강 전하’와 같이 공의 칭호 없이 부르도록 했다(왕공가궤범 제19조).
서열
왕공족의 반위(班位)는 일본 황족 다음으로, 아래의 순서였다(왕공가궤범 제40조).
- 이왕 - 이왕가의 가계를 계승하고 있는 자.
- 이왕비 - 이왕의 비.
- 이태왕 - 이왕이 가계를 물려주고 물러났을 때.
- 태왕비 - 이태왕의 비.
- 이왕세자 - 이왕을 이어받을 아들.
- 이왕세자비 - 이왕세자의 빈.
- 이왕세손 - 이왕을 이어받을 손자.
- 이왕세손비 - 이왕세손의 빈.
- 공 - 대한제국 황족 및 광무황제의 방계 자손.
- 공비 - 공의 비.
권리 및 의무
일제가 1926년 12월 공포한 《왕공가궤범》에 따라 왕공족에게는 일본 황족과 같이 아래의 권리와 예우가 주어졌다. 하지만, 왕공족 남자에게는 일본 황족처럼 일본 천황의 황위를 계승할 권리, 섭정에 임명될 수 있는 권리, 황족회의원이 될 수 있는 권리는 없었고, 추밀원 회의에 반열하는 권리, 귀족원 의원이 될 수 있는 권리도 없었다.[2] 다시 말해, 적당한 대우만 해주고 일본 정치에 끼어들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이다.
권리와 예우
- 경칭을 받는 권리 (왕공가궤범 제19조)
- 황족과 마찬가지로 전하라는 경칭을 받는다.
- 조선귀족의 일원이 되는 권리 (왕공가궤범 제20조)
- 왕공족의 자손으로써 왕공족이 아닌 자(서자)가 일가를 창립할 경우에는 천황의 칙지에 의거하여 조선귀족의 일원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 조현(천황 알현)의 권리 (왕공가궤범 제12조, 제39조)
- 왕계 또는 공계를 계승하고 있는 자는 비와 함께 천황·상황·태황태후·황태후·황후에게 조현한다. 왕·왕세자·왕세손·공은 성년이 될 시에 천황·황후·상황·황태후·태황태후에게 조현한다.
- 사법상의 권리 (왕공가궤범 제28조~제30조)
- 황실재판령의 규정을 준용한다. 민사소송의 관할에 관한 특별규칙이 있다. 칙허 없이는 구인·소환되지 않는다.
- 취학상의 권리 (왕공가궤범 제37조)
- 취학에 관해서 황족취학령이 준용되어 학습원·여자학습원에 취학한다.
- 반위의 권리 (왕공가궤범 제40조)
- 황족에 이어 화족보다 윗 반열에 놓인다.
- 수훈의 권리 (왕공가궤범 제51조~제58조)
의무와 제한
- 임관의 의무(왕공가궤범 제59조)
-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육군 또는 해군 무관으로 임관한다.
- 거주의 제한 (왕공가궤범 제31조)
- 왕·태왕·왕세자·왕세손·공은 칙허(천황의 허락)를 거쳐 그 주소를 정한다. 그 외의 왕공족은 왕 또는 공의 허가를 받아 주소를 정한다.
- 여행의 제한 (왕공가궤범 제32조)
- 왕공족이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일본 황족과 마찬가지로 칙허(천황의 허락)를 필요로 한다.
- 혼인의 제한 (왕공가궤범 제119조)
- 왕공족은 혼약을 하기 전에 칙허(천황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1920년 영친왕이 나시모토노미야노 마사코 여왕과 혼인 시에는 《왕공가궤범》이 제정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 《황실전범》(皇室典範)에도 황족의 혼인은 동족 또는 화족에 의한다고 되어 있었다. 결국 황족 여자는 왕족 또는 공족한테 시집갈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한 《황실전범증보》(皇室典範增補)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3]
- 입양의 제한 (왕공가궤범 제24조)
- 왕공족은 양자를 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왕공족은 칙허(천황의 허락)를 받으면 일반신민의 가독상속인이 되거나 가독상속의 목적으로 양자가 될 수 있다.
- 행위의 제한 (왕공가궤범 제33조~제36조)
- 왕공족은 상공업을 하거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단의 사원 또는 임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 주주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단체의 임원이 되는 경우는 칙허(천황의 허락)를 요한다. 또, 임관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수를 받는 직에 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공단체의 관리 또는 의원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제도
왕공족의 가무를 관장하기 위해 일본 궁내대신 관리하에 속하는 이왕직이 설치되었고 그 규정은 《왕공가궤범》을 따로 제정해 따랐다.
이왕직에는 장관·차관·사무관·전사(典祀)·전의(典醫) 등의 관직·직책이 설치되었다. 옛 대한제국 궁내부의 후신이라는 명목으로 1920년대 중반까지는 조선인을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대한제국 역대 황제의 실록 제작도 이왕직에서 맡았다. 전52권52책의 《고종실록》과 전22권8책의 《순종실록》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이왕직차관(후에 장관)을 편찬위원장으로 하여 1927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경성제국대학의 협력을 얻어 1935년에 완성되었다.
왕공족 시종무관에는 주로 구 한국 군인 출신의 조선 군인이 충원되었다. 또한 이왕가와 왕궁 경호를 위해 조선보병대, 조선기병대를 두었으나 1913년에 조선기병대를, 1930년에는 조선보병대를 폐지했다. 이 부대들은 조선인들로만 구성되었기에 이왕가의 실질적인 근위병이었다.
구성원
괄호 안의 기간은 왕공족 합류와 이탈 시점이다. 별도의 표기가 없는 이탈은 사망이다. 1910년 8월 29일 왕공족 8명으로 시작되었으며, 1947년 5월 3일 신적강하가 이뤄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왕공족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은 모두 24명이다.[4]
왕족
공족
같이 보기
각주
- 김기훈, <일제하 재일 왕공족의 형성배경과 관리체제>, 부경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p. 35~46.
- 이승우, <일제하 일본의 조선 왕실에 대한 인식과 이왕직의 운영>, 동아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p. 14.
- 이승우, <일제하 일본의 조선 왕실에 대한 인식과 이왕직의 운영>, 동아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p. 11~12.
- 판원진일, <조선왕실 자손들과 그 대한민국 국적 : 왕공족의 법적신분과 그 등록을 중심으로>, 서울국제법연구원, 1999
- 신적강하
- 혼인으로 왕가 이탈, 화족 편입
- 순종실록부록 (1912년 9월 20일). “이희 공의 아들을 개명시켜 이준 공으로 칭호하다”. 국사편찬위원회.
- 이왕직 (1940). 《이희공계제1세이준공족보(李熹公系第壹世李埈公族譜)》.
- 혼인으로 공가 이탈
- 이왕직 (1933). 《이강공계제1세이강공족보(李堈公系第壹世李堈公族譜)》.
- 은거
- 이건과 이우를 제외하고 19명의 자녀가 더 있으나, 족보에 등재되어 있던 자녀는 이건과 이우 뿐이다.
외부 링크
- 왕공가궤범, 국가법령정보센터.
王公族
王公族(おうこうぞく、朝鮮語: 왕공족)は、韓国併合後の旧韓国皇帝とその一族(李王家)の日本における称号である王族と公族の総称である[1][2]。皇帝の直系が王族、李王家の一族である2家が公族だった[2]。
本記事では制度としての王族・公族について記述し、家系については李王家で記述する。
概要
1910年(明治43年)、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により韓国併合された後、同条約に基づき、韓国皇帝(純宗)、太皇帝(高宗)、皇后(尹氏)、皇太子(垠)の4名が「王族」に、李堈と李熹が「公族」となった[3]。それぞれ、男子によって継承された。
一部制約があったものの(後述)、日本の皇族に準じる扱いを受けており、また李垠は後に梨本宮家の方子女王と婚姻し、皇室と姻戚関係となった。昭和時代になると王公族は皇族とほぼ同一視され、李垠は軍隊において他の皇族と同じように「宮様」と呼ばれていた[4]。
1926年(大正15年)12月1日に「王公家軌範」が公布され、細部の制度が確立されるとともに、皇族男子同様、旧日本陸軍又は旧日本海軍へ武官として任ぜられることが義務付けられた[5](詳細は皇族軍人も参照)。うち、李鍝公が公務中に広島市への原子爆弾投下で被爆・薨去し、「戦死」扱いとなっている[6]。
歴史
成立
日本において韓国併合の方針が固まりつつあると、大韓帝国皇族の扱いについても検討が開始され始めた。1909年(明治42年)に日本で作成された『大韓細目要項基礎案』では、併合後の韓国皇帝純宗にはヨーロッパの例(Grand Duke、大公)に倣って「大公」、太皇帝高宗と皇太子、義王李堈は「公」の称号で呼び、敬称として「殿下」を用いることとされていた[7]。さらに大公とその一門を東京に移住させ、政治には関わらせないようにするとされていた[8]。これは純宗を日本の皇太子の下、親王の上に位置づけるという明治天皇の意向に基づき、外務省が作成したものであった[7]。
1910年(明治43年)8月16日、京城(現在のソウル特別市)において併合交渉が始まり、韓国統監寺内正毅が大韓帝国首相の李完用と農商工部大臣趙重応に対して併合の概要を提示した。李完用は唯一の希望として「韓国」の国号と「王」の尊称を残すことを述べた。寺内は国号については「朝鮮」に改める点を伝達し韓国側の了承を得たが、単に「王」とすると将来において「朝鮮王」を名乗る危険性があるとして「李王」という案を提示した[9]。趙重応はこれに不満であったが、やむを得ず了承した[9]。
当時日本は関東大水害によって混乱しており、また通信の問題により韓国での交渉の経緯も十分に伝わっていなかった。8月16日に作成された詔書案では、純宗と高宗に対して大公、王世子を公、義王については一代限りの公とするとされていた[10]。これを受けた寺内は8月17日に大公を王に改めるよう桂太郎首相に要請し、承諾された。8月20日には寺内から純宗を李王として昌徳宮を称させ、高宗は太王として徳寿宮と称させ、更に公として高宗の兄であり、8月15日に興王となった李熹も公に列するよう伝えた[11]。8月22日には日本政府から純宗を「王」にするとし、「李王にあらず」と注釈をつけて伝えた。新城道彦は、宮内省が皇族の礼遇を受ける王公族に姓である「李」をつけるのを嫌ったものとしている[12]。
8月22日に調印された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により韓国併合された後の大韓帝国皇室の扱いについて、同条約は以下のように定めた。
日本国皇帝陛下ハ 韓国皇帝陛下太皇帝陛下皇太子殿下並其ノ后妃及後裔ヲシテ 各其ノ地位ニ応シ 相当ナル尊称威厳及名誉ヲ享有セシメ 且之ヲ保持スルニ十分ナル歳費ヲ供給スヘキコトヲ約ス— 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第3条
8月29日、「前韓国皇帝ヲ冊シテ王ト為ス詔書」「李堈及李熹ヲ公ト為スノ詔書」(以下、「冊立詔書」とする)が出され、李王家に対して「皇族の礼」と「殿下」の称を用いることが定められた。
王公族の監督権については統監府側が要求していたが、宮内省によって監督されることとなった。1911年(明治44年)2月1日には李王職官制(明治43年皇室令第34号)に基づき、宮内大臣の管轄下で王公族の家務を掌る李王職が京城に置かれた。李王職の職員はほとんどが大韓帝国の宮内府の職員であり、朝鮮に駐在する職員については朝鮮総督の監督下にあると規定された[13]。
制度の確立

左から、李王垠、李鍵公、李鍝公
その後しばらくは、李王家の扱いは法的に定まっていなかったが、1916年(大正5年)に王世子李垠と梨本宮家の方子女王の間に縁談が持ち上がり、李王家の法的関係を定める必要が生まれた。11月4日に枢密顧問官伊東巳代治を総裁とする「帝室制度審議会」が設立され、折から問題となっていた皇室令改正とあわせて李王家の問題も扱われることになった。
審議の結果、王公族制度は日韓併合条約とその後の詔書に基づくこと、身分は皇族に準じ、臣籍ではないことなどを基本とした「王公家軌範案」が作成され、「皇室令」によってこれを公布するという形を取ることとした[14]。しかしこれは枢密院では否決されてしまい、採択に至らなかった。枢密院は皇族以外の存在である王公族の身分を皇室令で定めることには反対であり、一般臣民の規定同様法律の制定によって定めるべきであると主張した[14]。これは元老山縣有朋の強い影響下にあった枢密院が、伊東の影響力が増大することを恐れていたという背景もある[14]。一方で枢密院は李垠と方子女王の結婚自体については賛同しており、皇室典範を増補して王公族を皇族の結婚相手として認める案が出された。しかし帝室制度審議会の伊東と平沼騏一郎は王公族と皇族が同族ではないと明示するような増補には強硬に反対した[15]。天皇の沙汰という形になっている縁談を中止することはできず、政府と宮内省は帝室制度審議会の反対を押し切って皇室典範の増補に踏み切った。1918年(大正7年)11月2日、皇室典範増補は皇族会議の満場一致で採択され、12月1日に正式に李垠と方子女王の婚約が成立した[16]。
1922年(大正11年)に山縣が没し、伊東の勢力が拡大したことと、旧山縣閥の一木喜徳郎が宮内大臣に就任し、皇室制度改革に協力的になったことで、王公家軌範制定の道筋がつけられるようになった[17]。こうして「皇室令によって王公族の身分を定めることを、法律によって認める」ことで法的な疑義を解消する方針が固まった[17]。1925年(大正14年)11月10日に王公家軌範案が隠居規定の創設など細部修正の上で枢密院可決された。王公族の扱いを皇室令によって定めることができるとした「王公族ノ権義ニ関スル法律」(大正15年法律第83号)は、3月23日に[18]帝国議会で可決されており、これが12月1日に公布され、これを受けて同じ12月1日に皇室令第17号として「王公家軌範」が公布された。
軌範に基づき皇族における皇族会議と同機能を持つ王公族審議会が設置された。王公族審議会は総裁及び審議官をもって組織され、総裁は宮内大臣の奏請により枢密院議長枢密院副議長及び枢密顧問官の中より勅命され、審議官は10人とし宮内大臣の奏請により親任官勅任官及び朝鮮貴族の中より命ぜられた。
日本敗戦後
1945年(昭和20年)、ポツダム宣言受諾が決定されたが、8月12日に昭和天皇が皇族に伝達した際には、王公族の李垠と李鍵も参列している[20]。昭和天皇はこの際に王公族の今後についても協議するべきではないかと考えたが、内大臣の木戸幸一によって制止されたため、協議は行われなかった[21]。
日本の降伏によって、日本は朝鮮半島における支配権を喪失したが、王公族の身分にはこの時点では変更はなかった。しかし1945年度で王族に対する歳費は打ち切られ、王公族の暮らしは苦しいものとなった[22]。さらに1946年(昭和21年)の財産税によって、李垠の家計は非常に困難となった[23]。またこの年には李王職が廃止され、李王職が保持していた公家の住居などの不動産は王公族に分配された[24]。
1947年(昭和22年)5月2日の皇室令及附屬法令廢止ノ件[25]で「王公家軌範」が廃止され、5月3日の日本国憲法施行の際現に効力を有する命令の規定の効力等に関する法律(昭和22年法律第72号)の発効で「王公族ノ権義ニ関スル法律」「王公族から内地の家に入つた者及び内地の家を去り王公家に入つた者の戸籍等に関する法律」(昭和2年法律第51号)が廃止されたことで、華族とともに王公族はその身分を失った。
王公族の身分喪失は華族と同様に皇族以外の貴族身分を認めない日本国憲法第14条の規定に基づくとされる説が有力ではあるが、当時は王公族はかならずしも条文の「貴族」と見られて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臨時法制調査会の一員として帝国憲法改正にともなう法制整備の調査を担当していた萩原徹外務省条約局長は、王公族を貴族と解釈するには若干の疑問があると述べ[26]、さらに「王公族は皇族にしてしまうか、又は皇族に準じた地位を与えてもよいのではあるまいか」と考えていた[26]。新城道彦は新憲法施行により身分を喪失したというよりも、公布の前日5月2日に行われた外国人登録令の施行と同時に一般の在日朝鮮人と同様、王公族は「外国人」となり(王公族の地域籍は朝鮮と見なされていた)、合わせて身分を喪失したとしている[27]。ただし、外国人登録令は、在日朝鮮人の法的地位を変更する規定はなく、第11条第1項で、「外国人登録令の適用について当分の間、外国人とみなす」、と規定していただけであり、この見解は妥当ではない。
その後も王公族は法的に特殊な存在であった。1949年(昭和24年)に桃山虔一と改名していた李鍵は、離婚について宮内庁に報告を行い、手続きを行っている[28]。1950年(昭和25年)に李垠の子李玖がアメリカ留学しようとした際には大韓民国政府から旅券が発給されず、宮内庁から臨時旅券を取得しようとしたため、駐日代表部の金龍周が非公式ながらも個人名で旅券を発給したという事例もある[29]。
1952年(昭和27年)の平和条約の発効により、朝鮮に対する主権の放棄がされ、民事局長通達は、これにより、日本に居住していた朝鮮人の日本国籍は、喪失したとした。従って日本に居住していた旧王公族である李垠・桃山虔一の一家は日本国籍を喪失した。しかし大韓民国の李承晩大統領は旧王公族の大韓民国籍を認めず、日本に残った王公族は無国籍者となった[30]。1957年(昭和32年)に李垠夫妻が李玖の卒業式に出席するためにアメリカに出国しようとした際も、大韓民国は旅券の発給を認めなかったため、日本政府が大学の招聘状に基づいた特別の旅行証明書を交付している[31]。1960年(昭和33年)に李垠夫妻は日本国籍を取得した[31]。
李承晩が失脚した後、韓国では旧大韓帝国皇室の人物の復権が進んだ。1962年(昭和35年)に朴正煕大統領は李垠夫妻の大韓民国籍を回復させ、1963年(昭和36年)には生活費の送金を開始した[32]。同年12月には李垠夫妻が韓国にわたった[32]。
王族
王族にはその子女に対しても殿下の敬称が用いられ、朝鮮刑事令第3条により、王族への不敬行為について皇族に対する不敬罪の対象となった[33]。また年間150万円にも及ぶ歳費が下されたが、これは皇族の各宮家が一家あたり4~10万の歳費を受けていたのに対して破格のものであった。しかし膨大な職員を抱える李王職を維持する必要があり、財政は困難であった。1921年までに李王職の定員が削減され、歳費も180万円に増額されたが、それでも財政は苦しかった[34]。また年4回の大祭や年一度の清明祭など、王朝時代の祭祀も続けて行った[35]。
併合時に王族となったのは、李王坧とその妃尹氏、李太王李㷩、王世子李垠の4名であった[36]。1920年(大正9年)に李垠の妃方子が王族に列し、1921年(大正10年)には王世子夫妻に李晋が生まれた。この際には王公家軌範が成立していなかったため、大正天皇の詔書によって王世子の子孫にも殿下の継承を用いることが定められた[37]。
1925年(大正15年)の王公家軌範の成立により、李太王の庶子であった李徳恵が「故李太王の子にして王家に在る者」として王族に列したが、敬称は「殿下」ではなく、「姫」と呼ばれた[38]。徳恵は1931年(昭和6年)に伯爵宗武志と結婚し、王族の地位を離れた[39]。また同年には王世子夫妻に第二子李玖が生まれ、王公家軌範の規定により王族に列した[40]。
王
最後の皇帝であった純宗は「王」に冊立され、呼称される際には「李王」と呼ばれることとなった。これは中華世界の伝統にある「冊封」と捉えることがあるが、1910年8月29日に行われた冊立の儀式では、王が東面、勅使が西面するなど、君主の代理たる使者が南面し、臣たる王が北面することで君臣の礼をとる「冊封」の儀式とは異なるものであった[41]。呼称される際は「昌徳宮李王坧(しょうとくきゅうりおうせき)」と呼ばれた。李王坧は、李王家が所有する昌徳宮に居住した[42]。
皇太子李垠は「王世子」とされ、非公式な場では「昌徳若宮」とも呼ばれた[43]。李垠は皇太子時代から東京に留学しており、その後も東京に居住した。 王位は男子によって世襲されるものと定められ、大正15年(1926年)の李王坧の薨去により、王世子の垠が王位を継いだ。この際、宮内省の会議では「昌徳宮李王」は李王坧個人の呼称であり、単に「李垠王殿下」と呼ぶべきであるという案も出たが、朝鮮側の希望が「李王」であると判断されたため、「昌徳宮李王垠(しょうとくきゅうりおうぎん)」とされた[44]。李垠は昌徳宮に居住していなかったが、この頃には「昌徳宮」は皇族の「宮号」のように扱われていた[45]。同年生まれた李玖は王世子となった。
李王家系図
- 李王坧-李王垠-李玖
李太王
太皇帝(前皇帝)高宗は太王とされ、「徳寿宮李太王㷩(とくじゅきゅうりたいおうき)」と呼ばれた。太王の地位は一代限りとされており、併合後に生まれた李太王の庶子も王族とはされなかった。このため李太王は寺内総督に強く働きかけ、庶子李徳恵を王族に列させることに成功した[46]。李太王自身は生涯京城を離れず、李王家が所有する徳寿宮に居住し続けた[47]。
李太王家系図
- (李太王)㷩-李徳恵
公族
大韓帝国において王位をもっていた親族には「公」の称号が与えられ、その夫人とともに「公族」に列せられた。公となったのは高宗の庶子で純宗の弟に当たる李堈と高宗の兄の李熹である。公族の子に対しては「殿下」の敬称が用いられず、男子は「様」「公子様」、女子は「姫」と呼称された[33]。また王族とは異なり、不敬罪の対象とはならなかった[33]。また公族には歳費の支給が行われなかった[48]。しかしその財政は李王職によって監督されたため、公家が自由に使えるものではなかった[48]。
李堈公家は2代、李熹公家は4代にわたり世襲された。
李堈公家
李王垠の異母兄・義王李堈の家系。併合時に恩賜公債84万円が賜与されその利子を得たほか、慶尚南道や咸鏡南道の漁業権を民間に貸与することで収入を得た[48]。李堈はかねてから奔放な生活を送っており、漁業権を別々の人物に貸与するなどの詐欺行為を働いたほか、18人の夫人に28名の子を産ませる、摂政裕仁親王に公を廃して平民にしてほしいと直訴するなど問題行動が多く見られた[49]。このため1930年に李堈は隠居に追い込まれ、子の李鍵が公となった。李堈の庶子はほとんどが認知されず、公族となった李堈の子は2名のみである[50]。戦後、外国人登録令により外国人登録の対象となった李鍵は翌日に日本式の「桃山虔一」と改名した[51]。「桃山」は明治天皇の陵墓である伏見桃山陵にちなんだものであり、昭和天皇の了承を得て改名したものである[52]。その子孫は日本に居住している。また李堈の庶子の一部は、大韓民国において韓国皇室後裔として活動している。
李堈公家系図
- 李堈公-李鍵公
李熹公家
李太王高宗の父、興宣大院君李昰応の長男であった興王李熹の家系。併合時に恩賜公債100万円が賜与され、その利子と不動産の利益で生計を立てたが、財政は苦しく、李王家からの援助で補填せざるを得なかった[53]。第二代公の李埈は1917年に急逝したが男子がなく、李堈の次男李鍝を養子として迎えた[54]。1945年(昭和20年)の広島市への原子爆弾投下によって李鍝が戦死したため、子の李清が公を継いだ。李鍝公妃賛珠は戦前から朝鮮で居住しており、その子孫も大韓民国に住居している。
李熹公家系図
王公族の特権
王公家軌範(大正15年皇室令17号)等により、ほぼ皇族と同等の各種の特権や義務が規定された。ただし皇位や摂政職につくことや皇族会議への参加は認められない。また枢密院会議に班列する権利や貴族院議員たる権利は無かった。
- 皇族女子と婚姻する特権(皇室典範大正7年増補)
- 敬称を受ける特権(王公家軌範第19条)
- 皇族と同様に殿下の敬称を受ける。皇族の宮家の長が○○宮殿下と称されたのに対し、王は李王垠殿下、公は李鍝公殿下などと姓と諱が用いられた。
- 朝鮮貴族に列せられる特権(王公家軌範第20条)
- 王公族の子にして王公族に非ざる者(庶子)が一家を創立する場合に於いては勅旨に依り朝鮮貴族に列されることとなった。ただし適用例はない。
- 朝見の特権(王公家軌範第12条・第39条)
- 王系または公系を襲いだ者は妃と共に天皇・太皇太后・皇太后・皇后に朝見する。王・太王・王世子・王世孫・公は成年に達したときは天皇・皇后・太皇太后・皇太后に朝見する。
- 司法上の特権(王公家軌範第28条ないし第30条)
- 就学上の特権(王公家軌範第37条)
- 就学について皇族就学令が準用され、学習院・女子学習院に就学する特権を有する。
- 班位の特権(王公家軌範第40条)
- 皇族に次ぎ、華族の上位の班位を有する。
- 受勲の特権(王公家軌範第51条ないし第58条)
- 任官の特権(王公家軌範第59条)
- 居住の制限(王公家軌範第31条)
- 王、太王、王世子、王世孫および公は、勅許を経てその住所を定めた。その他の王公族も、王または公の許可を得て住所を定めた。
- 国外旅行の制限(王公家軌範第32条)
- 王公族が外国に旅行するときは、勅許を要した。
- 養子縁組の制限(王公家軌範第24条、第63条ないし第65条)
- 王公族は、養子をすることができない。ただし、王公族審議会の諮詢を経て勅許を得れば、一般臣民の家督相続人となり、または家督相続の目的をもって養子となることはできた。王公家の後継が不在の場合は、王または公の子孫で4世以内のものを養子として迎えることができた(王公家軌範第8・9・10条)。
- 行為の制限(王公家軌範第33条ないし第36条)
- 王公族は商工業を営み、または営利を目的とする社団の社員もしくは役員となることができない(ただし、株主となることはできる)。営利を目的としない団体の役員となる場合は勅許を要した。また、任官による場合を除くほか、報酬を受ける職に就くことができない。さらに、公共団体の吏員または議員となることもできない。
武官
王公族付武官には主として旧大韓帝国軍人たる朝鮮軍人が充てられた。また、李王家と王宮警護のために朝鮮歩兵隊・朝鮮騎兵隊が置かれた。これらの部隊は朝鮮人のみによって構成されるもので、李王家の実質的な近衛兵であった。しかし1913年に朝鮮騎兵隊、1930年に朝鮮歩兵隊も廃止されている。
王公家軌範に基づく王公族の範囲
王公家軌範によると、王公族は次のように規定される。
- 王族:以下のうち王家にある者
- 王 - 李家の当主。純宗・李垠のみ。
- 王妃 - 王の妃。
- 王の子
- 王の子の配偶者
- 太王 - 王が隠居したもの。高宗のみ。
- 太王妃 - 太王の妃。
- 太王の子
- 太王の子の配偶者
- 王の長子孫の系統に在る者およびその子
- 前記の配偶者
- 上記のいずれかの子である女子
- 公族:以下のうち公家にある者
- 公 - 高宗前皇帝ないしそれ以前よりの大韓帝国皇族の傍系。
- 公妃 - 公の妃。
- 公の子
- 公の子の配偶者
- 隠居した公
- 隠居した公の配偶者
- 隠居した公の子
- 隠居した公の子の配偶者
- 公の長子孫の系統にある者およびその子
- 前記の配偶者
- 上記のいずれかの子である女子
班位は以下の順序である(王公家軌範第40条)。
- 王
- 王妃
- 太王
- 太王妃
- 王世子
- 王世子妃
- 王世孫
- 王世孫妃
- 公
- 公妃
日本の皇室・華族との関係

1920年(大正9年)4月、王世子李垠と梨本宮家の方子女王が婚姻し、日本の皇室と姻戚関係となった。二人の間には、晋(夭折)と玖の2男が誕生した。垠と方子女王及び梨本宮家との関係は良好であった[55]。1963年に夫妻は韓国へ帰国し、方子は夫の死去後も韓国に残り、韓国の社会福祉活動に貢献した[56]。
また李鍵公が海軍大佐松平胖の娘松平佳子と結婚、また李徳恵が宗武志伯爵と結婚しているが、戦後に離婚している。李鍝公の妻朴賛珠は朝鮮貴族朴泳孝侯爵の娘である。
李太王は日本人と李垠が結婚することを望んではいなかったが、李王家の存続にもつながるため皇室と縁戚関係になることは望んでいた[57]。李垠など第二世代である王公族は皇族と同様の地位を自明のものとしており[58]、日本の皇族達とも円満な関係を持っていた。戦後も李玖は旧皇族の伏見博明と親しく交友し、方子も皇族と交流があった。 李鍵公は特に皇室とは親しく、三笠宮崇仁親王、賀陽宮恒憲王、竹田宮恒徳王とは月1回持ち回りで宴席を設けるほどの仲だった[59]。李鍝公は兄の李鍵公によれば「その日(朝鮮独立)が来るのを、何にもまして待っていた」と表現されるほどであったが、軍務には忠実であり[60]、高松宮宣仁親王とも親しかった。高松宮は李鍝公を「鍝ちゃん」とよんでいたという[61]。
脚注
出典
- 大辞林 第三版 おうこうぞく【王公族】 (コトバンク)
-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王公族 (コトバンク)
- 『官報』号外「宮廷録事」、明治43年8月29日(NDLJP:2951509/1/19)
- 新城道彦 2015, p. 193.
- 小田部(明治編) 2016 p.231
- 『官報』第5574号「宮廷録事」、昭和20年8月11日(NDLJP:2962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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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伴ゆりな 2008, 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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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田部(大正・昭和編) 2016 p.147
-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李方子 (コトバ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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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考文献
- 新城道彦『天皇の韓国併合 王公族の創設と帝国の葛藤』2011年、法政大学出版局
- 新城道彦『朝鮮王公族 ―帝国日本の準皇族』中公新書、2015年3月。ISBN 978-4-12-102309-4。
- Kindle版:ASIN B0191356D2, 朝鮮王公族 ―帝国日本の準皇族 (2015年3月25日)
- 伴ゆりな「日本による旧韓国皇族の処遇 : 1910~20年代の皇室制度整備に関して( フランス共同ゼミ「パリ・ディドロ(第7)大学とお茶の水女子大学:日本学の新たな構築の試み」)」、お茶の水女子大学、2008年、hdl:10083/35171。
- 小田部雄次『大元帥と皇族軍人 明治編』吉川弘文館〈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2016年7月。ISBN 978-4642058247。
- 小田部雄次『大元帥と皇族軍人 大正・昭和編』吉川弘文館〈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2016年7月。ISBN 978-4642058292。
関連文献
- 島善高「大正七年の皇室典範増補と王公家軌範の制定」『早稻田人文自然科學研究』第49巻、早稲田大学社会科学部学会、1996年3月、1-49頁、CRID 1050282677477861632、hdl:2065/10315、ISSN 0286-1275。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 『王公族』 - コトバンク
- 永井和 「倉富勇三郎日記と植民地朝鮮」 ※本稿は2004年9月20日に韓国ソウルの韓国精神文化研究院で行った講義のために準備したものである。その後随時補注を加えた。
- 王公家軌範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官報に掲載された、王公家軌範(皇室令第17號)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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