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3·1운동 전후의 왕정복고[복벽]운동을 중심으로
A Study of Conflict between Republicanism and Restoration Theory in the Early 20th Century Korea: Focused on the Advent and Decline of Monarchism after ‘March Ist Independent Movement 1919’
한국학
약어 : KSQ
2007, vol.30, no.1, pp. 57-76 (20 pages)
DOI : 10.25024/ksq.30.1.200703.57
UCI : G704-000772.2007.30.1.004
발행기관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분야 : 인문학 > 기타인문학
박현모 /Park Hyunmo 1
1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 지원과제의 연구결과물입니다. [KRM 바로가기]
[2005년 인문사회분야지원심화연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치사상: '민주공화국'의 탄생과 변형, 그리고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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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1900여 년간(B.C. 57년 신라건국~A.D. 1905년 대한제국 패망) 지속되어온 왕정체제는 20세기 초반에 들어 종식되었다. 하지만 그 종식은 우리 민족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외세에 의해 단절된 왕정체제를 복구[復]하려는 노력은 192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글은 일제시대에 나타난 왕정복고운동의 양상과 성격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31운동’을 전후해 나타난 복벽주의는 단순히 옛 왕조를 회복하자는 복고적인 발상이나 시도가 아니었다. 그 시기의 복벽주의자들은 독립을 회복하고 정치를 안정시키는 효과적인 체제의 하나로서 왕정체제를 채택했으며, ‘의친왕 상해망명’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조재흥(李朝再興)”을 위해 “황제를 추대”하려는 복벽주의 운동은 “인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보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하려던 공화주의자들과 충돌되었다.둘째, 일제세대의 왕정체제론은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통치형태론으로서 이른바 ‘단극적(單極的)’ 정치운영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왕정체제론은, 신하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의정부 서사제’나 ‘군신공치론’ 등의 ‘다극적(多極的)’ 정치운영론과 대조를 이룬다. ‘육조직계제’와 ‘황극정치론’ 등으로 표출된 단극적 정치운영론은 일원화된 보고체계와 국왕의 높은 재량권, 그리고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일제시대의 왕정복고운동을 시대착오적인 움직임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국가운영과 관련된 한국정치사상사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로 자리매김해야 한다.셋째, 하지만 왕정복고운동은 대동단이 주도한 일련의 사건들, 즉 ‘의친왕 망명’의 실패와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 계획(‘제2독립선언’)의 좌절 등으로 그 기세가 꺾였다. 특히 고종순종 등 실존했던 국왕들의 실망스런 모습도 사람들로 하여금 복벽주의 대신에 공화주의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민심의 변화는 해외에서도 나타났는데, 만주지역의 동포들이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단체에는 군자금을 제공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 그 예이다. 요컨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현재까지 계속되어온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론은 이런 논쟁과 대립의 과정을 거쳐 발전되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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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 3⋅1운동 전후의 왕정복고[復辟]운동을 중심으로 -
박 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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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Ⅰ 문제 제기
Ⅱ 왕정시대의 왕정 공화정 논의
Ⅲ ⋅ 운동 전후의 왕정⋅공화정 논쟁과
복벽운동의 전개
Ⅳ 맺는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독립에 관하여 원래 조선 내에 사는 사람과 해외에서 재류하는 사람과는 사상
이 다르다 조선 내에 있는 사람은 이조 李朝 의 복벽 復辟 을 말하나 해외의
조선인은 공화정치라든가 민주정치라든가 하는 것을 주장하여 도저히 공동일
치의 행동을 하는 것은 안 된다
― 김가진 金嘉鎭
I. 문제 제기
이 글의 목적은 대한제국의 패망 이후에 등장한 왕정복고 復辟 운동의 성격과
그 정치사상적 의의를 고찰하는 데 있다 아울러 왕정체제로 표현되는 일극정치론
一極政治論 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구명 究明 하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
==
이 ⋅ 운동 직후 선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이하 임시헌장 제
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차
⋅ 차 ⋅ 차 개헌 및 해방 이후의 헌법에서
도 계속해서 민주공화국 은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일제에 의해 패망되었다지만 조선왕조만 하더라도 최소한
여년 왕정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공화정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을까
오히려 외세에 의해 부정되고 합병되었기 때문에 왕정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았을
까 ⋅ 운동 이후 나라의 독립을 추구하고 정치체제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혹시
왕정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지 않았을까
임시정부 이하 임정 내 최고 의결기구인 임시의정원 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
된 이동녕 李東寧 이 이 때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을 안겨주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군주제를 부활하려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추
세에 따라 이 나라에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모종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군주제의 부활
이 아닌 민주제의 정착 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어투에서―그것도 세계적
인 추세 라고 힘주어 말하는 데서― 군주제를 부활하려는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년 월 일 저녁 시부터 다음날 오전 시까지 진행된 임시의정원 제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국호 國號 를 제정한 것에 대해서 김희곤 교수는 다음과 같
이 말한다 신석우 申錫雨 와 이영근 李渶根 의 동의와 제청으로 제정된 대한민
국 이라는 국호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졌는데 하나는 빼앗긴 국가를 되찾는다는
뜻에서 년 전에 상실한 국가 이름인 대한제국 에서 대한 을 다시 찾아 쓴 것이
고 또 하나는 정치체제에 제국 이 아닌 민국 을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민국이라
는 국호의 제정은 ⋅ 운동 직전까지 소수이긴 했지만 면면히 이어져 오던 복벽
주의 復辟主義 를 완전히 극복하고 한국사에서 최초의 민주정체 民主政體 를 달성
했음을 의미한다
「헌법⋅공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쪽
김석영 선구자 이동영 일대기 을유문화사 서론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지식
산업사 쪽에서 재인용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그러나 복벽주의를 완전히 극복 했다는 주장과 달리 임시헌장의 제정 이후에도
복벽운동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년 월 일 일경에 서울에서 열린 국민
대회 준비위원회 ―일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으므로 곧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
부를 조직하려는 준비위원회―에서 유림 儒林 출신 인사들이 대한제국의 회복을
요구한 것 즉 우리가 대한 제국의 이름으로 결단이 났기 때문에 정부조직을 대
통령제로 하지 말고 제국식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좋겠다 는 요구는
시기상으로 약간 일 앞서 있다는 점에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극복 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조선민족대동단 朝鮮民族大同團 이하 대동단 소속의 인물들이 이
조 李朝 의 복벽을 도모 하고 의친왕 이강을 해외로 망명시켜 황제로 추대 하려
는 일부의 시도 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운동에서 분출된 독립의 열기를 다시 고양시키기 위해 전국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개 사회 대표자로 조직된 대동단은 선언서 등을 작성하면서 임시정부의
민국기원 이 아닌 건국기원 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대동단의 주요 인물인 이달
하 李達河 와 전협 全協 은 같은 해 음력 월에 나눈 대화에서 복벽을 다짐하고
있다 즉 이들은 공화주의라든가 대통령이라든가 하는 담화를 나누었는데 이달
하가 조선의 독립은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이나 청심과욕 淸心寡慾 이 아니면 국사
國事 를 운위할 수 없다 제 帝 의 의 義 를 위해서 상 喪 을 발 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쪼록 이조 李朝 의 복벽을 도모하자 고 말하자 전협이 전적으로 찬성하
고 있다
김희곤 위의 책 쪽
이규갑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 ≪신동아≫ 년 월호 쪽 년 월 일 서울에
서 개최된 국민대회 와 한성정부 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현주 한국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일조각 쪽 참조
이에 대해서 신복룡교수는 논란의 여지 가 있다고 지적했다 왜냐 하면 대동단원들이 의친왕을
탈출시키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黨論으로 「황제로 추대하려고 한 것」은 아니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고에 대한 신복룡교수의 코멘트 하지만 정두화 鄭斗和 는 신문조서에서 조
선독립을 도모하는 데는 먼저 李王 그 왕세자 및 이강공 전하 중 누군가 한 분을 황제로 추대하
고 여기에 조선 민심을 수람 收攬 하는 것이 아니면 도저히 독립은 불가능하다 는 이달하의 말을
회고하면서 자신도 그 말에 대찬성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당시 의친왕 상해망명사건 을 주도했
던 전협⋅김가진 등은 대동단의 핵심멤버였던 바 그 사건이 당론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하여 크
게 논란 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정두화 신
문조서 쪽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한마디로 조선왕조 내지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는 대한민국 이라
는 국호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극복 되지 않았으며 논쟁과 실천적 움직임
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국 이 선언되었다고 해서 민주 정
체가 달성 된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복벽주의자들을
단순히 구시대에 연연해하는 시대착오적 인물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왕정 내지 국왕중심의 정치 체제야말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최
선의 대안이라고 하는 전략적 사고 를 하고 있었고 이는 조선시대의 영⋅정조나
세조 등의 국왕중심의 정치운용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조선왕조에서 공화란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으며 어떻게 소개되는지를 먼저 살펴본다 제 장 이어서 본 논문의 핵심 개
념인 복벽 의 의미와 ⋅ 운동 이후의 복벽주의 운동을 그 논리와 실천 차원에서
살펴볼 것이다 유인석 柳麟錫 으로 대표되는 유림들의 간도지방의 복벽주의 의병
운동과 국내 한성정부 수립과 관련된 대동단의 복벽주의가 그것이다 제 장 그리
고 이러한 왕정복고론이 갖는 정치사상적 의미를 일극정치론 一極政治論 과 다극
정치론 多極政治論 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간단한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II. 왕정시대의 왕정-공화정 논의
1. 조선시대에서‘공화’라는 말
우리 역사에서 공화 共和 란 말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출현한 것은 아마도 광
해군일기 일 것이다 광해군은 자신을 옹립하는 데 기여한 이이첨에게 박승종 朴
承宗 ⋅유희분 柳希奮 과 함께 보합 保合 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이첨 李爾瞻 은
그것을 공화 共和 라고 일컬었다 그러자 유학 한계 韓誡 가 비판하고 나섰다
즉 이이첨이 감히 차자 가운데에서 공화 共和 라는 두 글자를 썼는데 공화라
는 말 은 원래 주 周 나라 여왕 厲王 이 체 彘 땅으로 달아나서 왕위가 비어있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이달하 신문조서 쪽
광해군일기 癸未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그가 조정을 전하의 조정 이 아니라 자기 자
신의 물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서 공화의 정치
란 국왕이 부재한 상태에서 몇몇 권세가들이 조정을 사적인 물건 私物 이나 도구
私器 로 여기고 천단 擅斷 하는 좋지 않은 상태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에서 금기시되던 공화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통치 형태가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일찍이 최한기 崔漢綺
는 지구전요 地球典要 에서 영국의 의회와 미국의 민주정을 상세히 소개
했다 영국 의회에 대해서 그는 도성에 의회 公會所 가 있다 하나는 상원 爵房
이라 부르고 하나는 하원 鄕紳房 이라 부르는 것으로 양분되어 있다 상원은 작위
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선교사들이 거하고 하원은 서민들의 추천과 선택에 의
해 뽑힌 재주와 학식 있는 자들이 거한다…이 제도는 구라파 제국들이 모두 같이
시행하고 영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 하여 상하원의 이원적 조직과 기능 등
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최한기는 또한 미국의 최고권력자인 대통령 勃列西領 를 대총령 大
總領 이라고 명명하면서 대통령제적 민주정의 구성 원리와 주요 관할 업무를 설
명했다 건륭 년 에 논의하여 미국 米利堅 을 세워서 콜럼비아의 워싱턴
을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그 길로 국왕을 세우지 않고 프레지던트 인을 두어서
전국의 군사 형벌 부세 관리의 출척을 종리 綜理 하게 하였다…프레지던트는
광해군일기 癸酉 이에 대해서 헌납 민심은 유학 한계가 이이첨의 말을 악의적으로 왜
곡하여 인용하고 있다면서 공화 의 또 다른 사례를 언급했다 즉 이이첨은 본래 신하들이 국왕을
위해 협화 協和 하고 상화 相和 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뜻으로 공화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교
묘하게도 주나라 여왕 厲王 의 사례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심에 따르면 이이첨이 원래 의
도한 공화의 의미는 주 선왕 周宣王 때에 주공 周公 과 소공 召公 이 함께 공화의 정사를 행하였
다 는 주 周 나라 본기 本記 의 경우였다 광해군일기 甲戌 이를 통해서 볼 때 공화라
는 말은 좋은 경우 선왕의 사례 와 나쁜 경우 여왕의 사례 를 함께 지칭하는 양가적 용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공화의 순기능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효종 때의 참찬관 김익희 金益熙 의 말이 그것이다
김익희에 따르면 주 여왕이 달아난 뒤 주공과 소공이 공화를 년간 실시하여 왕의 은택이 사라
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 선왕이 그것에 힘입어 주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었다 효종실록
丙子 하지만 조선왕조에서 공화라는 말은 국왕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체로 금기시되는 용어였다
최한기 지구전요 권 불랑서국 官 여강출판사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년을 임기로 하여 임기가 차면 대체하는데…한 번 더 연임할 수는 있으나 세습하
거나 종신하는 일은 일체 없다 는 설명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습하거나 종신하지 않는 프레지던트가 나라를 다스리고 국왕을 세우
지 않는다는 미국의 사례가 세기 중반에 이미 소개되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가져오지는 않은 것 같다 그야말로 외국의 다양한 통치 형태의 하나를 개인적으
로 소개한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2. 개항기 이후의 입헌군주론
공화정이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것은 그로부터 여년 뒤였다 년
월 일자 음력 ≪한성순보 漢城旬報 ≫에는 구미입헌정체 라는 논설이 실렸다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라파주와 미주에는 여러 나라가 있으나 치국
治國 의 요 要 는 오직 두 가지가 있으니 군민공치 君民共治 와 합중공화 合衆共
和 로서 모두 입헌정체라고 칭한다 군주국은 그 위 位 를 세습하지만 합중공화
는 세습의 예 例 가 없기 때문에 대통령이 그를 대신하며 대통령의 임직에는 역
시 연한이 있다
갑신정변 이전에 개화파의 기관지였던 ≪한성순보≫에 입헌군주제의
유형과 삼권분립의 장점 그리고 선거의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소개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전제군주제의 취약점을 인지하고 입헌군주제 특히 군
민공치의 제도를 선망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
는 움직임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드러났다 년 월 일 선포된 혁신 정강
중에서 조와 조가 그것이다 혁신정강 조는 대신과 참찬은 날마다 합문내
의정소에 모여서 토의 결정한 후 정령을 포고하여 정사를 시행할 것 이라고 선언
되었으며 조는 정부 육조 이외의 중요하지 않은 벼슬아치 冗官 들은 다 혁파
하되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작량 酌量 의정 議定 하여 품계 禀啓 하게 할 것
이라고 포고하고 있다 국왕에 의한 전제적인 결정이 아니라 의정소에 모인 신
최한기 위의 책 권 북아묵리가미리견합중국 官
≪한성순보≫ 제 호 년 월 일자 歐米立憲政體 참조
김옥균 갑신일록 년 월 일조 김옥균전집 아세아문화사 쪽 최근에 쉬운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료들이 의논해서 결정하고 집행한다는 입헌군주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천하 로 실패함으로써 입헌군주제로의 전환 시도는 좌절되었다
입헌군주제의 실현은 그로부터 년이 지난 후인 년의 갑오경장에 이르러
서였다 년 월 일 고종이 종묘에서 선언한 홍범 조 의 제 조는 왕실 전
범을 제정하여 대위 大位 계승과 종척 宗戚 의 분의 分義 를 밝힌다 라고 되어
있으며 제 조는 대군주는 정전 正殿 에 나아가 정사를 보되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재결하고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라고 하
여 왕위 계승의 문제와 함께 국왕의 권한 그리고 종친과 외척의 정치참여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홍범 조는 왕실 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 조 하고 왕
실 비용을 절감하는 조 등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러
나 을미사변 과 아관파천 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
면서 왕권 축소 시도는 중단되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조직된 신정부는 구본신참
舊本新參 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한 내각 제도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구하는 등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수립했다
하지만 군민공치의 방식으로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 움직임은 독립협회라는 시민단체와 ≪독립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해 추
진되었다 년 월 일 창립된 독립협회는 열강의 침략의 위협 하에서 전제군
주제가 국왕의 동의 하나만으로 국권이 박탈될 수 있는 취약한 체제임을 절감하고
입헌대의군주제의 수립을 정치 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의 핵심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독립신문≫에는 전제군주제의 취약성을 다음과 같이 지
적했다
대저 동양 풍속이 나라를 정부가 독단하는 고로 나라가 위태한 때를 당하여도
백성은 권리가 없으므로 나라 흥망을 전혀 정부에다가 미루고 수수방관만 하
고 정부는 나중에 몇몇 사람이 순절 殉節 만 할 줄로 성사를 삼는 고로 나라
힘이 미약하여 망하는 폐단이 자주 날뿐더러…
우리말로 신복룡 교수 등이 편역한 갑신정변 회고록 건국대학교출판부 쪽 참조
구한국관보 제 권 개국 년 월 일자 고종실록 甲寅
신용하 「 세기 개화파의 자주적 근대화 사상의 구조」 한국사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쪽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정부 즉 국왕이 나라를 독단하기 때문에 나라 힘이 미약하여 망하는 폐단이 자
주 난다 는 이 지적은 을사조약 을 체결할 때 현실화되었다 이토 히
로부미 伊藤博文 가 고종황제에게 보호조약안 의 수락을 강요하자 고종은 나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정부 관료에게 자문하고 또 인민의 의향을 물어야 한다 고 미
루었다 이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 관료들에게 자문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
만 인민의 의향을 묻는다는 말은 기괴천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귀국은 헌법 정치가
아니고 군주전제국이기 때문이다 라고 반박했다 입헌군주국이 아닌 전제군주국
에서는 황제의 재가와 내각의 동의만으로 조약을 합법화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어쨌든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입헌군주제 추진 세력은 대중 강연과
거리 시위를 통해 전제군주제의 개혁을 요구했다 대략 년 월부터 본격화된
이들의 정치 운동은 월 일에 친러 내각을 붕괴시키고 박정양 朴定陽 ⋅민영
환 閔泳煥 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
정에서 제기된 공화정 수립 음모론 은 어렵사리 채택된 일종의 한국적 의회인 원
형인 중추원을 좌절시켰다 즉 독립협회 회원 등 시민들이 건의한 헌의 조
를 고종황제가 받아들여 새로 수립된 중추원 제도 월 일 는 조병식의
고발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즉 조병식은 독립협회 세력이 왕정을 공화정으
로 체제를 바꾸고 고종을 폐위한 뒤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삼으려 한다 고 고종
에게 일러바쳤는데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중추원 제도를 폐지하고 독립협
회를 해산시켰다 월 일
어쩌면 왕조체제에서 공화정 수립론이 갖는 위험성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이 때문에 유길준 兪吉濬 은 공화정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입
헌군주제를 선호했다 그에 따르면 각국의 정체는 ① 군주가 천단 擅斷 하는 정체
② 군주가 명령하는 정체 압제정체 ③ 귀족이 주장하는 정체 ④ 군민이 공치하
≪독립신문≫ 년 월 일자
강만길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쪽 을사조약 체결 당시의 분위기는 황현
임형택 외역 매천야록 梅泉野錄 문학과지성사 쪽을 참조할 것 매천야록 에
는 고종이 널리 묻고 알아보아 결정지어야 한다 고 말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민이 제멋대로 떠드는 의론은 마땅히 병력으로 진정할 것이니 폐하께
서는 양국의 우의를 각별히 생각하여 즉시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쪽
신용하 앞의 논문 쪽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는 정체 입헌정체 ⑤ 국인이 공화하는 정체 합중정체 로 나뉜다
당시 조선은 ②에 해당되었는데 유길준 자신은 ④의 입헌정체를 가장 선호했
다 왜냐하면 이 정체는 그 국중에 법률과 정사의 전반과 대권을 군주 일인이 독
단하는 것이 없고 의정의 여러 대신이 반드시 먼저 작정하고 군주의 명령으로 시
행 하게 되는데 대개 의정의 여러 대신은 인민이 천거하여 정부의 의원이 되는
고로 그 천주 薦主 되는 인민을 대표하여 그 사무를 행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
면 인군 人君 의 권세도 한정한 경계가 있어야 법외에는 일보도 나갈 수 없고
서인 庶人 에 이르기까지 지공한 도를 지켜 비록 소사 小事 라도 사정을 따라 행
할 수 없게 된다
독립협회 회원 중에도 공화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건호 李建鎬 ⋅최
정덕 崔廷德 ⋅이승만 李承晩 을 비롯한 일부 청년들은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공화정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화정 사상은 특히 배재학당 학생들을 비롯
해 청년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중견
간부들은 공화정 수립론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관민공동회에서 이 사항을 금지 항목
으로 설정했다 즉 년 월 일에서 월 일까지 일간 서울 종로에서 개최된
관민공동회의 규정 중 첫째 항목으로 황제와 황실에 불경한 언행은 엄금하며 민주
주의와 공화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금한다 라고 한 규정이 그것이다
결국 공화정의 실시가 공식적으로 천명되고 명문화된 것은 년 고종의 붕어
와 ⋅ 운동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에 의해서였다 서재필이 년 월에 말한
것처럼 한국은 년까지 하나의 독립된 왕국 이었으며 년 월에…민주
공화국 임시정부를 조직했는데 이 임시정부는 공화주의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 지도 정신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념 이라고 선언된 것이다 그러면 년
일제에 의해 멸망한 대한제국을 복구하려는 노력은 없었는가 그리고 년
유길준 서유견문 유길준전서 제 권 일조각 쪽
신용하 앞의 논문 쪽
년 월 일자
독립운동사자료집 ⋅ 운동사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쪽
대한제국이 한일협상조약 년 을사보호조약 으로 끝났다고 보는 근거로는 다음과 같다 비
록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 를 보증한다고 명시했지만 조 ① 모든 외교권을 박탈당
했고 조 ② 통감 統監 에게 국내통치권마저 빼앗겼기 때문이다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공화정을 선언했는가 이에 대해
서는 장을 바꾸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III. 3⋅1운동 전후의 왕정⋅공화정 논쟁과 복벽운동의 전개
1.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복벽운동
조선왕조실록에서 복벽 復辟 이란 말은 회 나오는데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하나는 복벽의 사전적 의미 즉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른
다 는 뜻으로서 몽골족에게 사로잡혀간 명나라의 영종 英宗 황제가 풀려나오면
서 잠시 그의 동생 성왕 郕王 에게 갔던 제위 帝位 를 다시 회복한 것을 지칭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국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 국정을 돌보다가 다시 국왕이 친정
親政 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키고 있다 명종 明宗 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끝내
고 집정하게 된 때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벽이란 특정 국왕이 다시 왕위
王位 를 되찾는 것 내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던 정치체제가 원래의 왕정 王政
체제로 복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년의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에 항의하면서 근왕적 의병전
쟁 을 전개한 의병 집단은 대표적인 복벽 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년에서 년에 이르기까지 임병찬 林炳瓚 등이 전주지역을 거점으로 전개한
의병활동은 복벽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토벌작전 의
이희승 감수 민중 엣센스국어사전 민중서림
세조실록 乙未
명종실록 丙申 명종실록 丙申 명종실록 癸亥 광해군일기
己酉
이현주는 구체제로의 복귀 즉 전제군주제로의 지향 을 복벽주의라 정의한다 그는 구체제로
의 복귀라 해도 그것이 전제군주제가 아닌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경우 보황주의 保皇主義 라
한다 는 조동걸의 견해를 언급하면서도 복벽주의가 보황주의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현주 「국내 임시정부 수립운동과 사회주의세력의 형성 」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쪽 각주 이 논문은 앞에서 인용한 책 으로 출간되었다
조동걸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형상 푸른역사 쪽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전개로 국내 의병들은 연해주 등지의 해외로 이동하여 활동했다 예컨대 유인석부
대는 서간도의 통화현과 집안현으로 이진용 李鎭龍 ⋅박장호 朴長浩 등은 장백
현⋅무송현⋅집안현⋅임강현 등지로 그리고 조병준 趙秉準 ⋅전덕원 全德元 등
은 관전현과 환인현 등으로 각각 이동하면서 왕정체제를 회복하려 했다
그런데 이들 의병지도자들에게는 일본군 말고도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것은
되찾아야 할 독립된 정부의 성격에 대한 의견차였는데 만민공동회 때부터 등장했
다가 년 합병으로 더욱 높아진 공화정 수립파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만민공동
회의 좌절과 한일합병 과정에서 고종의 역할에 실망한 이들은 전제군주제로의 복
귀 대신 공화정의 수립을 희망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들에게 중국의 왕정타파는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신해혁명 에 이은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그리고 손문 孫文 과 원세개 袁世凱 의 협
상에 의한 청 황제의 퇴위 로 이어지는 혁명적 변화는 위정척사 차
원에서 복벽 을 달성하고자 했던 의병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복벽주의 계열의 의병집단인 대한독립군은 광복군사령부로 전환하는 과
정에서 내부의 갈등을 겪었다 대한독립군 내부조직인 총재부 안에서 노년층은 왕
정 을 선호해서 각종 선언문 등에 단기 檀紀 내지 융희 隆熙 라는 연호를 주장했
다 이에 비해 임시정부와의 연대를 중시한 소장층은 민국 民國 의 연호를 주장했
다 이들의 대립은 점차 악화되어서 내부적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즉 노년층
은 박장호 朴長浩 ⋅백삼규 白三奎 ⋅전덕원 全德元 등이 주축이 되어 기원 紀元
독립단을 새로 조직했고 민국의 연호를 주장하던 소장층은 조병준 趙秉準 ⋅신우
현 申禹鉉 ⋅변창근 邊昌根 등의 지도하에 민국독립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그에 앞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의병대장 유인석은 년 중국의 중화민
국 수립으로 복벽운동이 흔들리자 공화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에 따르면 군주제
는 적지 않은 폐단에도 불구하고 자칫 외세의 내정 간섭을 초래해 국가를 지키기
어려울 수 있는 선거제보다 훨씬 나았다 국민적 통합과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위의 책 쪽 박환 「대한독립단의 조직과 활동 복벽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 일사례」 한
국민족운동사연구회 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쪽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쪽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민국독립단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쪽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데 유리한 군주제야말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최선의 통치 형태라는 것
이었다 그는 아울러 군사적 자립을 위해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 한편 서양의 무
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벽운동은 남만주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년 봄에 남만주의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의 소위 유림파 儒林派 의 전덕원은 김평식⋅오완하⋅이덕 등과 더
불어 통의부 를 이탈해 의군부 義軍府 를 조직하고 통의부 와 유혈충돌까지 벌
였다 이에 대해 채근식은 무장독립운동비사 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불행히도 간부 중 양기탁 梁起鐸 과 전덕원 全德元 등의 의견불화로 의군부
의 독립을 보게 되었다 전덕원은 한말 의병대장출신이요 대한독립단의 군사
부장으로 활약하던 유림 儒林 으로 복벽운동을 꿈꾸는지라 신사조에 젖은 지
사들과 감정 분열이 생겼다 전덕원은 김평식 金平植 ⋅오완하 吳完夏 ⋅이덕
李悳 등과 의군부를 조직하고 채상덕 蔡相悳 을 총장으로 추대하고 이천민
李天民 을 군사부장으로 하여 양부 兩部 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대규모의 유
혈전이 있었다
그 후 년이 지난 년 월 일자 ≪조선일보≫에 상투 틀고 독립운동 한
의군부 의 수령 首領 이라고 소개된 전덕구 역시 격렬한 복벽주의자였다 그는
즐풍목우 櫛風沐雨 바람에 빗질하고 비에 목욕함 로 년 을 지내면서 왕정복고를
신념으로 가지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패망되었기 때문에 다시
독립된 조국의 모습은 응당 원래의 체제인 왕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복벽론자들의 신념은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집단의 비판을 받았다
공화정 수립론자들은 중국이 이미 공화제를 수립했고 러시아도 년 혁명으로
사회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판국에 다시 왕정을 복고하겠다는 것은 무의미한 생각
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대한민국회장 구춘선 具春先 이 대한민국 년 월 에
발표한 포고문은 그러한 생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유인석 의암집 연보 경인문화사
≪독립신문≫ 上海 년 월 일자 월 일자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출판년도 불명 쪽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동포여 군인이 되려면 정부의 군인이 될 것이요 죽을 것이라면 정의의 공화
共和 기치 아래 죽을 것이다…임시정부 이외에 복벽주의 단체들의 군인이 되
어 죽는다는 것은 하등의 가치도 없고 어떠한 성공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가
치 있고 성공적으로 죽으려 한다면 공화정부의 군적에 등록하여 공화정부의
군인이 되어라
복벽단체의 군인으로 죽는다는 것은 하등의 가치도 없다 는 포고문 에
서 공화정론자와 복벽론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양 세력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재만 동포들이 복
벽주의를 주장하는 단체에는 군자금을 제공하지 않는 등 여건이 공화주의 쪽으로
기울게 되자 복벽계열이었던 의군부가 상해임시정부 직할하의 군부대에 합류되
고 육군주만참의부 陸軍駐滿參議府 에 편입되었다 이후로 서간도에서 복벽주의
독립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2. 국내에서의 복벽운동
⋅ 운동을 전후해 왕정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 예가 대동단이다 대동단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성정부 수립의 취지문과
선언서 등을 작성하면서 민국기원 이 아닌 건국기원 을 사용했다 전협⋅최익환
崔益煥 등이 이끈 대동단은 대한제국으로 되돌아가려는 목표를 가지고 독립운동
을 전개했는데 이는 의친왕 망명 기도사건 에서 잘 드러났다
이 사건은 의친왕 義親王 이강 李堈 으로 하여금 해외로 나가서 강화회의 講
和會議 나 국제연맹에 출석하여 조선인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
을 국제적으로 알리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비록 의친왕이 상해로 탈출하려
김정명 편저 명치백년사총서 조선독립운동 東京 原書房
박환 앞의 논문 쪽 각주
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쪽
의친왕 망명기도사건에 대해서는 신복룡 대동단실기 선인출판사 를 참조할 것 이 책은
관련 사실을 넌 픽션 스타일 로 재구성하여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는바 이는 정치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주목된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정남용에 대한 예심조서」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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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안동역에서 검거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복벽세력의 독립운동 전략을 상징적
으로 보여준다 대동단의 총재이자 이 사건을 계획한 김가진은 독립에 관하여 조
선 내에 사는 사람과 해외에 재류하는 사람의 사상이 다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비록 복벽정부의 수반으로서
의친왕 이강이 다소 부족하다 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 이왕 전하―순종 純宗 필
자주 ―는 창덕궁에 계시고 왕세자전하―이은 李垠 필자주 ―는 일본에 계시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친왕을 선택했다
이들은 의친왕이 임시정부로 망명하게 된다면 임시정부의 여러 정치세력들을
규합하고 일제와의 투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제와 투쟁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성공은 우리 왕족이 상해 임시정부로
합친다면 그 이상 좋은 선전이 없다는 관점에서 의친왕의 상해 망명이 유지
有志 들간에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의친왕은 역대 다른 왕자와 같이 정
치에 간여 않고 일종의 유랑생활로 생명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마치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부랑자로 가장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친왕은 일본 관헌에
게 의지가 없는 부랑아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요건을 파악하고 있던 그의 매
부 김춘기 金春基 씨는 그를 변장시켜 상해로 망명을 시키려다가 열차 안에
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물론 길림의 동지 등도…인심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던 대동단의 이와 같은 시도는 안타깝게도 좌절되었다 년
월 일 서울을 출발 경기도 고양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시 수색역에서 기차로 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이달하 신문조서 쪽 참고로 고종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고종 명성왕후 민씨 남 순종
귀비 엄씨 남 영친왕 은 남 진 구
귀인 이씨 남 완친왕 선
귀인 장씨 남 의친왕 강
귀인 정씨 남 우
귀인 양씨 녀 덕혜옹주
임병직 임병직 회고록 근대 한국외교의 이면사 여원사 쪽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김춘기 경찰신문조서」 쪽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중 국경인 안동현에 도착했지만 현지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추진한 전협에 따르면 대동단은 상해임시정부 조직의 취지에 찬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켜 김가진⋅이강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독립 기관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기관의 취지는 공화정이 아닌 왕정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년 여름 전협으로부터 대동단의 독립선언서 기초
를 부탁받은 장지영에 따르면 전협은 왕을 세워야 한다 고 주장했다 즉 지금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섰소 그러나 우리나라가 오래 군주국가로 내려온 터이니 지
금 대통령을 세운대야 이 민족의 단결이 이루어지기 어렵소 하니 우리 왕을 하나
세웁시다 라고 말했다 고종황제의 아드님 한분을 모시고 상해로 나가서 한나라
말년에 소의황제를 세운 듯하면 인심이 움직일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를 우리 왕통
정부로 만들어봅시다 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비단 대동단원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처음에 머뭇거리다가
망명계획에 협조한 의친왕 스스로가 조선의 복벽에 강한 신념을 가졌다 그는 상
해로 망명한 후 장차 대한제국의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우리 집안은 남달리 조선 백 년 동안의 주인으로 서 온 집안으로서 그 이외
의 조선인은 하인 또는 손발과 같은 관계인데 그 하인⋅손발인 천만 사람들
이 주인을 생각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 騷擾 하고 있음에 그 주인이 모르
는 체하고 있을 수는 없다…이태왕 李太王 고종 인용자 주 의 붕
어는 그들 일본 인용자 때문에 독살되신 것으로 그들은 아버지의 원수이므
로 어떻게 하든지 그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조선 이외의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부터 외국으로 가서 외교방면에 대해 후
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의친왕을 비롯한 복벽세력들은 다분히 왕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
었다 그들은 조선의 현재의 상황은 이조 백년이 죄 없이 망했다는 이구동성의
장지영 「국어교육에 바친 평생」 ≪월간중앙≫ 년 월호 쪽 주시경의 제자로 한글학자
인 장지영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이현주 「일제하 장지영의 민족운동」 새국어생활 국립국어
원 가을호 참조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정남용에 대한 예심조서」 쪽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민심 에 기반해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에 따르면 가 假 정부 임시정부 인용자 가
주장하는 대통령이라든가 공화정치라든가 하는 것은 신용하는 사람이 적다 이와
반대로 이조 복벽 復辟 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이들 왕정
복고론자와 공화정론자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고 충돌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
조재흥 李朝再興 을 위해 황제를 추대 하려는 생각과 인민이 나라의 주인 이고
관인은 인민의 종 으로 보는 생각이 양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의친왕 망명사건의 좌절로 주요 인물이 납치되고 중국에서 공화정체가 수
립되는 등 공화정이 세계적인 추세 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복벽주의는 국내에서도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특히 대동단 세력조차도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등 왕정복고
론자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즉 년 월 일의 창립선언에 없던 사회주
의 실행 이 같은 해 월의 임시규칙 에 등장하고 있으며 최익환 권태석 權泰錫
김사국 金思國 김영철 金永喆 등 초기 대동단의 지도부 일부와 청년⋅학생층에
속했던 인물들이 출옥 후에 서울청년회의 조직에 관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투
신하고 있는 것이다
IV. 맺는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조가 패망한 이후 년 ⋅ 운동을 전후
하여 왕정을 복구하려는 운동이 국내와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따라
서 임시정부헌장의 선언을 기점으로 모든 복벽주의가 극복되었고 공화주의 이념
이 정립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왕정복고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동단사건」 「정두화 경찰신문조서」 쪽
≪독립신문≫ 년 월 일자
이현주 앞의 책 쪽 이현주 박사는 복벽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
는 두 이념이 만날 수 있는 요소로 대동사상 을 들었다 예기 의 예운편에 대도가 행해졌을
때 천하는 공공의 것 이라는 문구는 곧 사회주의의 이상사회와 연계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중
국의 康有爲가 입헌군주제를 선호한 보황주의자 이면서도 태평세에는 인류가 모두 평등하며 계
급이 없고 국경 또한 없어진다 강유위 이성애 역 大同書 민음사 쪽 고 주장한 점
에서 이들 복벽주의자들의 사회주의자로의 전환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현주 위의
책 쪽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운동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잘못을 범하기 때문이다 왕정복고운동은
유인석의 주장에서 보았듯이 단순히 왕정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아니라 어떤 체
제가 외세를 막아내고 정치를 안정시키는 데 더 효과적인가에 대한 전략과 관련되
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정치체제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한국정치사상의 뿌
리 깊은 논쟁과 잇닿아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정론은 우리 역사의 도처에서 다른 용어로 사용되고 표출된 통치형태론
의 하나이다 예컨대 세조는 상대적으로 신하들의 재량권이 중시되는 의정부 서사
제 議政府署事制 를 비판하면서 어찌 고금천하 古今天下 에 먼저 신하에게 품
稟 하는 일이 있는가 한 사람에게 명을 듣는 의리에 어찌 또한 심히 어긋나지
않겠는가 만일 논하는 바와 같이 한다면 권력이 장차 옮기는 바를 알지 못할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른바 한 사람에게 명을 듣는 의리 聽於一人之義 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운영론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조선후기의 정조가
오직 임금만이 극을 만든다 惟皇作極 하지 않았던가 위에서는 극을 세우고 밑
에서는 그 극을 돕는 것인데…집의 중심 屋極 이 일단 세워져야 문지도리⋅문기둥⋅
문빗장⋅문설주 등이 각기 제자리에 들어서고 북극이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어야
수많은 별이 에워싸고 돌아가는 법 이라고 하여 국왕중심론을 강조한 것과 맥
을 같이 한다
이렇게 볼 때 만민공동회 당시 독립협회가 주장한 입헌군주론과 고종의 전제군
주론 사이의 논쟁이나 이 글에서 살펴본 일제시대의 공화정론과 왕정론은 유서
깊은 다극정치론과 단극정치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둘째 공화주의자들의 주장과 임시헌장으로 구체화된 운동이 타당하고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복벽주의자들의 주장과 움직임 역시 역사의 전당에서 제자리
를 잡게 해야 한다 특히 최익환 전협 등이 한 때 일진회 회원이었다는 사실 때문
에 그 이후 그들이 한 독립운동까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대동단원으로
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들이 원래 추구했던 바가 전제군주론으로 표현되는 왕정체제를 통한 독립과 개혁
이었다면 그들의 입장 역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세조실록 壬辰
정조실록 丁卯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호
이 진보적인 개혁론으로 평가되는 데 비해 고종과 일진회가 추구한 황제권강화론
은 수구적인 태도로 매도되곤 한다 하지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추진을 일본이
내밀하게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만큼 일진회와 고종의 개혁 목표 및 역할
에 대해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복벽운동이 실패하게 된 요인을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
펴볼 수 있다 왕정론자들이 주장한 논리의 약점 예컨대 전제군주국에서 정치가
안정되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쉬운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앞에서 지
적한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조약의 조건으로 내세운 국왕의 재가 문
제는 왕정론자의 논리적 약점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외적 요인으로서 고종⋅순종
등 실존했던 국왕들의 실망스런 모습 중국의 왕정타파 등 주변 환경의 변화도 함
께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할 대상인 바 이는 추후 연구를 통해 규명할 예정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성순보≫ 구한국관보 ≪독립신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헌법⋅공보」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강만길 한국근대사 서울 창작과비평사
강유위 저 이성애 역 大同書 서울 민음사
김석영 선구자 이동영 일대기 서울 을유문화사
김옥균 김옥균전집 서울 아세아문화사
김옥균 외 신복룡⋅조일문 역 갑신정변 회고록 서울 건국대학교출판부
김정명 편저 명치백년사총서 조선독립운동 東京 原書房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민국독립단 서울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 운동사자료집 서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박환 「대한독립단의 조직과 활동 복벽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 일사례」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주진오 「 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박사학위논
문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서장
기획논문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신복룡 대동단실기 서울 선인출판사
신용하 「 세기 개화파의 자주적 근대화 사상의 구조」 한국사학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유길준 유길준전서 제 권 서울 일조각
유인석 의암집 서울 경인문화사
이규갑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 ≪신동아≫ 년 월호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서울 태학사
이현주 「국내 임시정부 수립운동과 사회주의세력의 형성 」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현주 한국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서울 일조각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서울 신서원
임병직 임병직 회고록 근대 한국외교의 이면사 서울 여원사
장지영 「국어교육에 바친 평생」 ≪월간중앙≫ 년 월호
조동걸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형상 서울 푸른역사
주진오 「 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박사학위논문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서울 대한민국공보처
최한기 지구전요 서울 여강출판사
황현 임형택 외역 매천야록 梅泉野錄 서울 문학과지성사
국 문 요 약
우리 역사에서 여 년간 년 신라건국 년 대한제국
패망 지속되어온 왕정체제는 세기 초반에 들어 종식되었다 하지만 그 종
식은 우리 민족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따
라서 외세에 의해 단절된 왕정체제를 복구 復辟 하려는 노력은 년대 말
까지 계속되었다
이 글은 일제시대에 나타난 왕정복고운동의 양상과 성격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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