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 강사가 sns에 올린 글

황현필 강사 : "완전히 역사적 오류"
79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역사 유튜버인 황현필 한국사 강사도 지난 11일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올리며 정진석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황 강사는 20대 대통령선거 당시 이재명 후보를 공개 지지했던 인물이다.
정 위원장의 글을 본 황 강사의 첫 마디는 "환장하겠다"였다. 그는 "이건 거의 망언", "막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정 위원장의 글을 하나 하나 설명했는데, 글의 뉘앙스에 대해 "일본의 침략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집안에 내분이 있었는데, 강도가 그 집에 들어가서 나쁜 행위를 했다. 그런데 내분이 문제였다. 그 강도의 침략은 큰 잘못이 없다 이래버리면 이건 진짜 이 사람의 사상을 의심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특히 황 강사는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정진석의 발언에 "완전히 역사적 오류"라고 반박했다. 이어 "조선 건국하고 나서 왜구 침략이 178회, 제가 오죽하면 이걸 외우고 있다"며 삼포왜란(1510), 사량진왜변(1544), 을묘왜변(1555), 임진왜란(1592~1598) , 정유재란(1597~1598) 등을 나열하며 "일본에 침략을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황 강사는 동학농민운동(1894) 과정을 언급하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과정 중에 3시간 동안의 전투가 있었다. 무혈입성이 아니다"며 "경복궁 전투를 통해서 강제로 장악했는데 (전쟁이 없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느냐. 그리고 1년 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했잖나"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황 강사는 정 위원장에게 "몰랐으면 무식한 것"이라며 국회의원이 "이렇게 무식한 소리를 하면 되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영상 끝에 황 강사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에 대해 "자신의 성공과 야욕을 위해 자신이 직접 친일을 선택했고, 그 친일은 (스스로의) 의지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 후손들의 친일은 친일파의 후손으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호의호식하면서 자기 아버지이자 자기 조상에게 세뇌된 친일이기 때문에 답도 없다"고 일갈하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던졌다.
지난 2014년 뉴스타파는 정진석 위원장의 조부인 정인각이 일제 강점기 당시 계룡면장을 지내며, 친일행적을 한 문건이 드러났다고 보도한 바 있다.
제시된 글에 대한 비평과 분석이다.
제시문은 이른바 <조선자망론(朝鮮自亡論)>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대한제국의 내재적 개혁 역량과 외세의 구조적 개입에 주목한 글이다. 글쓴이는 가지무라 히데키의 외압론과 한일 간 근대화 시차론을 축으로 삼아, 식민사관에서 기원한 망국 담론을 설득력 있게 반박하고 있다.
논지의 강점과 검토해야 할 쟁점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차론>과 외압의 구조적 비대칭성 규명 글쓴이가 인용한 가지무라 히데키의 시각처럼, 일본의 개항(1854년)과 조선의 개항(1876년) 사이에 존재한 20여 년의 시차는 결정적이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후 상대적으로 서구 열강의 직접적 군사 침탈을 덜 받으며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은 개항 직후부터 청일 양국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국의 내정 간섭,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으로 이어진 연쇄적 외압은 조선의 자주적 개혁 공간을 체계적으로 축소시켰다. 이를 <자망(自亡)>이 아닌 <외압에 의한 좌절>로 파악한 점은 매우 타당하다.
식민주의 사관의 계보 추적 기쿠치 겐조, 시노부 준뻬이, 시데하라 타이라, 아오야기 쓰네타로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 관변·식민학자들의 저술 계보를 구체적으로 짚어낸 점이 돋보인다. <양반 부패론>과 <당쟁망국론>이 순수한 학문적 관찰이 아니라 조선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획된 식민주의 담론이었음을 명확히 드러냈다.
역사적 반사실(Counterfactual) 추론에 대한 신중한 접근 필요 글의 후반부에서 <대한제국이 존속했다면 1919년경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이행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부분은 다소 신중한 보완이 필요하다.
광무개혁 당시 고종과 집권층이 취한 정치 노선은 입헌화가 아니라 전제군주제의 강화(1899년 <대한국 국제>)였다.
민간 지식인층(독립협회 후신, 자강운동 계열)의 입헌군주제 구상과 황실의 전제권 수호 의지 사이에는 극심한 갈등이 존재했다.
따라서 외압이 없었더라도 체제 전환이 순조롭게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로 나아갔을 것이라는 전망은 당대 지배층의 보수성과 사회 내부 갈등을 다소 낙관적으로 평가한 측면이 있다.
재정적 한계와 근대화의 구조적 결핍 글에서도 언급되었듯, 1900년 전후 한일 간 조세 수입 격차는 단순한 시간의 차이뿐 아니라 국가 기구의 조세 징수 능력, 상업 및 화폐 경제의 발전 수준 등 심층적 경제 구조의 차이를 반영한다. 당시 대한제국 내장원(왕실 재정) 중심의 재정 운용은 근대적 단일 예산 체제 확립을 지연시킨 측면이 있으며, 이러한 내부적 한계를 입체적으로 함께 서술할 때 <자망론> 비판의 객관성이 한층 높아진다.
세진님, 제시된 글은 자망론이라는 거친 도식에 맞서 식민사학의 기원과 외압의 실체를 명확히 짚어낸 준수한 논평입니다. 다만 <역사의 가정> 부분에서 내부 정치 권력의 한계(고종의 전제권 집착 등)를 균형 있게 덧붙인다면 한층 더 단단한 논리 구조를 갖출 것으로 보입니다.
비판에 대한 역사학적 논평
1. 총평: 설득력 있는 식민주의 비판이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인 대한제국 이해
이 글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조선은 내부의 부패와 무능 때문에 필연적으로 망한 것이 아니다. 일본보다 늦게 근대화에 착수했고, 외세의 개입으로 개혁이 방해받았으며, 마침내 일본의 침략으로 독립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나는 이 주장의 기본 방향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특히 조선의 내부적 취약성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글에는 중요한 한계도 있다.
대한제국이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그 개혁이 성공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공화제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핵심은 다음 세 가지 명제를 구별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자력으로 근대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있었다.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성공적으로 근대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두 번째는 논쟁적이다. 세 번째는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추론이지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식민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강하지만, 대한제국의 정치사회적 구조와 개혁의 실현 가능성을 분석한 글로서는 보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의 원칙이다.
대한제국의 국가적 실패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일본의 한국병합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구별이 전체 논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 가지무라 히데키의 설명: 개항의 시차와 외압의 차이
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일본 역사학자 가지무라 히데키 (梶村秀樹, 1935–1989)의 논의를 원용한 대목이다.
가지무라는 일본과 조선의 근대적 운명이 서로 달라진 원인을 민족적 능력이나 문명 수준의 차이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국제정세와 개항의 시차, 그리고 외부의 압력이 작용한 방식의 차이를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저서 朝鮮史―その発展의 출판사 소개에서도 20여 년의 개항 시차가 두 나라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논점이 명시되어 있다.
이 해석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다.
일본은 1853~1854년 미국의 페리 함대에 의해 개항을 강요받았지만, 이후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부를 수립할 정치적 공간을 확보했다.
반면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후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의 세력경쟁에 휘말렸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은 조선의 정치적 선택을 외부의 군사력이 결정적으로 제약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가지무라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일본 역시 외압을 받았다.
메이지유신은 외압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군사적 압박에 대한 대응으로 추진되었다.
불평등조약과 치외법권, 관세자주권의 제약은 일본의 국가개혁을 강력하게 자극했다.
따라서 정확한 비교는 외압의 유무가 아니라 외압의 성격과 그것에 대응할 국내 정치구조의 차이다.
일본은 외부의 압력을 중앙집권적 국가건설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외부의 세력들이 국내 정치세력과 결합하면서 개혁의 연속성을 훼손했다.
둘째, 조선의 개혁 지체를 외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조선 내부에도 개혁을 가로막는 구조적 조건이 존재했다.
왕권과 관료집단의 갈등, 중앙정부의 취약한 재정기반,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력의 한계, 신분제적 이해관계, 토지와 조세제도의 문제 등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역시 단순히 20년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에도시대에 형성된 교육, 상업, 재정, 지방행정의 축적, 그리고 번(藩) 단위의 정치·군사 조직이 메이지 국가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조선에는 다른 종류의 제도적 유산과 정치사회적 조건이 존재했다.
결국 가지무라의 설명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려면 국제정치와 국내 사회구조를 결합해야 한다.
3.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실제 성과와 구조적 한계
이 글은 대한제국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구체적인 역사적 근거가 있다.
대한제국은 1897년 수립된 이후 광무개혁을 통해 국가의 재정, 군사, 산업, 토지제도 등을 개편하려 했다.
대표적으로 양전사업과 지계 발급, 군비 확충, 상공업 진흥, 근대적 도시시설 정비 등이 추진되었다.
특히 토지 측량은 전국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218개 군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는 근대적 과세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실질적인 국가사업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개혁 의지도 능력도 없는 정체된 국가였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개혁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개혁의 성공 가능성이 충분했다고 볼 수는 없다.
2025년 발표된 이선민의 연구 는 이 문제를 비교적 균형 있게 제기한다. 이 연구는 광무개혁이 국방·산업·도시건설·인재양성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적 통합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대한제국은 근대적 국가기구를 건설하려 했지만, 과연 국민을 국가의 구성원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는가?
근대국가의 형성은 군대와 경찰, 세금제도를 개편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고, 법적 권리를 보장하며, 국가권력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사된다는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이 점에서 상당한 한계를 드러냈다.
1899년 반포된 는 황제의 전제권을 명시했으며, 권력분립과 국민의 권리를 규정하지 않았다.
고종 정부는 근대적 행정과 군사제도는 도입하려 했지만, 황제권력을 제한하는 정치적 근대화에는 소극적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개혁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문제만은 아니다.
개혁이 추구하는 국가의 성격 자체가 문제였다.
4. '조선은 망하고 있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망하고 있었다'는 개념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쇠퇴는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판단 기준 | 대한제국의 상황 |
|---|---|
경제적 쇠퇴 | 경제 전체가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
국가재정의 취약성 | 분명한 문제였으며 개혁의 제약요인이었다. |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 | 왕권과 개혁세력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
행정·군사 능력의 한계 | 존재했지만 개선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
외교적 독립성의 상실 | 1904~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결정적으로 심화되었다. |
왕조의 붕괴 가능성 | 존재했지만, 그것이 국가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왕조와 국가의 구별이다.
조선왕조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소멸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부르봉왕조, 러시아의 로마노프왕조, 중국의 청왕조가 무너졌지만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라는 국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역시 황제의 전제권력이 붕괴하더라도 입헌군주제나 공화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왕조의 위기'와 '국가의 멸망'을 동일시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적 오류다.
다만 대한제국에서는 왕조의 정치적 위기와 국가의 외교·군사적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왕조 붕괴와 단순하게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보다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스스로 소멸하는 과정에 있었다기보다는, 내부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외부의 제국주의적 압박 속에서 독립국가로 존속할 능력을 위협받고 있었다."
5.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했는가?
원문의 가장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가 진전되기 전에 서둘러 병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검토가 필요하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려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일본의 군사적 안전보장 문제였다. 한반도는 일본의 대륙 진출과 방어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둘째, 청나라와 러시아를 상대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경쟁이었다.
셋째,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제팽창이었다. 한국의 토지, 시장, 자원, 철도 및 항만은 일본 자본과 국가에 중요한 이해관계가 되었다.
넷째, 일본이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문명화 지도국으로 설정한 제국주의적 이념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침략이 단순히 쇠퇴한 한국을 수동적으로 접수하는 과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904년 2월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요한 한일의정서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일본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재정과 외교에 일본이 추천한 고문을 두도록 했다.
1910년 병합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의 통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의 장래 근대화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병합을 서둘렀다는 주장은 별도의 증거가 필요하다.
당시 일본 정부의 정책문서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발언에서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가 일본의 지배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직접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현재의 역사적 자료만으로는 군사안보와 대륙정책을 우선적인 동기로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따라서 원문이 제시한 설명은 가능한 해석 가운데 하나지만, 입증된 일본의 정책목표처럼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6. 일본과 한국의 '30년 격차'는 충분한 설명인가?
원문은 일본과 한국의 근대화 격차를 약 30년으로 평가하고, 그 격차는 결국 좁혀질 수 있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경제발전은 단순히 먼저 출발한 나라를 뒤따라가는 직선적 과정이 아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것은 개혁의 시기뿐 아니라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사회구조와 정치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분야 | 메이지 일본 | 대한제국 |
|---|---|---|
정치체제 | 번체제 해체와 중앙집권화 |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강화 시도 |
조세개혁 | 지조개정으로 비교적 안정된 재정기반 형성 | 양전·지계사업 추진, 재정기반 불안정 |
군사 | 징병제와 근대적 군대의 전국적 확립 | 신식군대 확대, 재정·조직상 제약 |
교육 | 전국적 학제와 교육제도 확대 | 신식학교 설립, 보급 속도 제한 |
정치참여 | 제한적이지만 의회와 정당정치 도입 | 독립협회 해산, 황제 전제권 강화 |
대외관계 | 불평등조약 아래에서도 국가주권 유지 | 강대국의 경쟁 속에서 주권 침해 심화 |
일본이 이 모든 분야에서 처음부터 우월했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정부도 심각한 재정위기와 민중저항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도 유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본과 같은 경로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특히 원문에 나오는 1900년 일본과 한국의 조세수입이 거의 100배 차이가 났다는 수치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비교하려면 국가예산인지 조세수입인지, 중앙정부와 황실재정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통화가치를 어떻게 환산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국가재정의 총규모는 인구 규모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재정능력을 비교하려면 1인당 조세수입과 정부의 실제 징세능력도 살펴야 한다.
또한 1960~1970년대 한국과 일본의 경제발전 격차를 1900년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유추로서 한계가 크다.
20세기 후반 한국은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냉전, 기술이전, 세계시장에 대한 접근 등 전혀 다른 조건에서 산업화를 추진했다.
따라서 100년 뒤에 한일 경제격차가 좁혀졌다는 사실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지 못한다.
7.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제나 공화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원문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추측적인 대목이다.
원문은 일본이 병합하지 않았다면 1919년 무렵 한국에서 공화제 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나는 이것을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는 반사실적 역사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등에서 나타난 새로운 정치의식은 한국사회 내부에서 근대적 정치질서에 대한 요구가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공화혁명의 가능성과 연결하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치적 근대화를 요구하던 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얼마나 넓었는가?
둘째, 고종과 황실은 과연 스스로 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을 것인가?
셋째, 정치제도가 공화제로 바뀐다고 해서 국가재정과 군사력, 행정조직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인가?
특히 두 번째 문제가 중요하다.
고종은 새로운 기술과 제도를 수용하려 했지만 정치권력을 국민과 나누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1898년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존속했다면 정치체제의 변화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높다.
비교사적으로 보면 청나라가 좋은 사례다.
청나라는 1900년대 신정개혁과 입헌준비를 추진했지만 1911년 혁명으로 붕괴했다. 그 결과 수립된 중화민국도 곧바로 안정된 민주공화국이 되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에도 유사한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성공적인 공화국이 되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역사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의 병합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의 정치체제가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변화했을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시기, 방향, 성공 여부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조건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8. '조선자망론'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이 만들어낸 것인가?
이 부분에서 원문은 최혜주의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통치론을 참고하고 있다.
최혜주의 연구는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한국사를 어떻게 서술했으며, 그 역사서술이 식민통치의 정당화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한다.
원문이 지적하는 왕조부패론, 양반망국론, 당쟁망국론은 식민주의 역사서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구별할 문제가 있다.
조선의 왕실과 양반 관료집단에 대한 비판 자체가 일본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국가운영과 조세제도, 양반의 특권을 비판했다.
19세기의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운동 역시 지배체제에 대한 내부적 비판과 저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개화파들도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했다.
따라서 '조선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비판은 식민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말하면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특징은 그러한 비판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했다는 데 있다.
즉 조선사회의 정치적 모순을 조선인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운 민족적·문명적 결함처럼 설명했고, 이를 일본의 지배가 필요했다는 주장으로 연결했다.
여기에 식민주의 역사서술의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조선의 부패가 실제로 존재했는가가 아니라, 그 부패를 어떤 역사적 인과관계 속에서 해석했는가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막부정치에도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위기, 심각한 권력갈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에서 그것들은 근대적 변혁을 촉발한 구조적 위기로 설명된다.
반면 조선의 유사한 문제는 종종 민족적 무능이나 국가 소멸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었다.
바로 이 해석상의 비대칭이 식민주의 역사관의 핵심이다.
9. 한국인의 '자망론'은 모두 식민사관의 잔재인가?
여기에는 한층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조선왕조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역사인식은 여러 계통에서 발전했다.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자주적 자기비판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박은식의 나 신채호의 역사서술은 망국의 내부적 원인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을 분명하게 규탄했다.
이들은 조선의 내부적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 민족의 역사적 능력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실패를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이는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같은 왕조비판이라도 그 목적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식민주의적 왕조비판은 외세의 지배가 불가피하고 정당했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자주적 개혁론의 왕조비판은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학자나 지식인이 조선왕조의 무능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식민사관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에서 형성된 개념이나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경우에는 그 계보와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장자의 국적이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제시하는 증거와 인과관계의 타당성이다.
10. 가장 중요한 누락: 조선 민중의 역사
나는 이 글의 또 다른 한계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지나치게 국가와 지식인 중심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주요 행위자는 고종, 개화파, 유생, 일본 제국주의 정부, 해외 유학생들이다.
그러나 근대화의 가능성을 평가하려면 농민과 상인, 도시민, 여성, 노동자 등 당시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었던 사람들도 분석해야 한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부패한 지방행정과 수탈에 저항했고, 동시에 외세의 침략에도 반대했다.
그들이 추구한 사회개혁은 고종의 황제권력 강화나 개화파의 서구식 제도개혁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즉 조선의 근대화에는 적어도 세 가지 방향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황제와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둘째, 개화파 지식인과 신흥 사회세력이 추구한 정치·사회제도 개혁.
셋째, 농민과 민중이 추구한 사회경제적 개혁과 정치적 참여의 확대.
이 세 흐름은 때로 협력했지만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이 독립을 유지했다면 근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서로 다른 근대화 구상 사이에서 정치적 갈등과 타협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 관점에서는 국가의 근대화가 반드시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일본의 메이지국가 역시 근대화의 과정에서 농민에게 무거운 조세를 부과하고, 군사적 동원과 정치적 억압을 강화했다.
그러므로 근대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국가의 군사력이나 산업생산의 성장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민의 권리, 사회적 평등, 정치적 자유, 생활수준의 변화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
11. 종합 평가: '자망론'과 '근대화 가능성론'을 모두 넘어
이 글의 가장 큰 공헌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한국사 내부의 부패와 무능으로만 설명하는 역사인식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데 있다.
일본의 한국병합은 조선왕조의 쇠퇴가 자동으로 가져온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군사적 선택이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동시에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한제국이 성공적인 근대국가로 발전할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를 네 가지 차원에서 다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한제국의 내부적 위기는 실제로 존재했다. 국가재정, 행정능력, 정치적 정당성, 사회적 통합 등에서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인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역사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대한제국 내부에는 근대화와 정치개혁을 추진할 역량도 존재했다. 따라서 국가적 위기가 반드시 국가 소멸로 이어져야 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일본의 침략은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종국에는 차단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실제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었는지는 독립적인 역사연구의 대상이다.
넷째, 한국병합의 책임을 판단하는 문제와 대한제국의 근대화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는 구별되어야 한다. 국제법적·도덕적 관점에서 침략과 강제병합의 책임은 피침략국이 얼마나 부패하거나 취약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원문의 '조선은 스스로 망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대한제국은 심각한 내부적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독립적인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은 한국의 주권을 박탈할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의 위기를 만들어낸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 위기를 국가 소멸로 귀결시킨 결정적인 외부 행위자였다."
이렇게 표현하면 식민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과 대한제국 내부의 역사적 모순에 대한 분석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다 근본적인 역사학적 질문
나는 이 논쟁에서 '조선은 스스로 망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일본에서는 기존 지배체제의 위기가 근대적 국가재편으로 이어졌는데, 조선에서는 기존 지배체제의 위기가 외세의 지배와 국가주권의 상실로 이어졌는가?
이 질문은 가지무라 히데키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확장한다.
그 해답은 개항의 20년 시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의 국가구조, 재정과 군사제도, 사회적 계급관계, 정치적 동원능력, 국제질서, 제국주의의 작용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
특히 조선 후기의 구조적 변화와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대한제국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한다면, 조선사회 내부에 어떤 자생적인 근대화의 역량이 있었고 그 역량이 왜 독립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 못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식민주의적 역사결정론에 대한 유익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를 대신할 설명이 단순한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한국도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또 다른 역사결정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학의 과제는 조선왕조의 무능을 입증하는 것도, 대한제국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변화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제약한 내외부 조건을 동시에 규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조선자망론'을 넘어서는 보다 생산적인 역사연구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함재봉의 저작 <한국 사람 만들기> 연작 및 강연 시리즈 <한국인의 탄생>에서 전개되는 조선 말기 분석을 토대로, 앞선 논쟁(조선자망론 대 외압 좌절론)을 조명하고 이에 대해 비평한다.
1. 함재봉의 시각으로 본 <조선 말기>와 논쟁의 재구성
함재봉은 19세기 말 조선의 위기를 단순한 <부패나 당쟁에 의한 붕괴(자망론)>나 <외세의 간섭과 침략으로 인한 우발적 좌절(외압론)>이라는 1차원적 대립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이 시기를 중화 제국 질서(주자성리학적 문명)의 해체와 서구 주도의 근대 국제질서(베스트팔렌 체제 및 해양 문명)로의 강제적 문명사적 전환기로 규정한다.
이 틀에서 앞의 논쟁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도출된다.
<조선 사람>이라는 인간형의 문명사적 한계
조선은 건국 이래 500년간 주자성리학이라는 단일 정통 교리를 통해 국가와 사회, 도덕 체계를 일체화한 극도로 정밀한 <이념 국가>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의 엘리트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문명의 유일한 보루로 여기는 <소중화(小中華)주의>와 <친중위정척사(親中衛正斥邪)>에 갇히게 되었다. 함재봉의 관점에서 구한말의 파국은 지도층 몇몇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주자성리학적 세계관 자체가 서구 근대의 과학·산업·국제법 체계를 수용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구조적 필연이다.
<외압>을 내면화하지 못한 외교·지정학적 무지
앞선 제시문은 가지무라 히데키를 인용해 <일본은 외압이 없었고 조선은 외압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함재봉의 분석에서 외압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상수가 아니다.
일본은 아편전쟁을 목도한 뒤 서양 세력의 본질(군사력, 국제법, 자본주의)을 파악하고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체제 자체를 해양 세력과 서구 질서에 맞춰 급진적으로 재편했다. 반면 조선의 지배 엘리트(위정척사파와 고종)는 세계사적 축이 이동했음에도 여전히 청나라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라는 대륙적 질서에 의존하려 했다. 그 결과 청·일·러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계산하지 못한 채 종속적 줄타기를 반복하며 외압을 스스로 증폭시켰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국인>의 분열과 주체 형성의 지체
함재봉은 당대를 다섯 갈래의 정체성 모색 과정으로 분류한다: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
앞선 글은 <대한제국이 존속했다면 1919년경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낙관적 가정을 폈으나, 함재봉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사회는 근대적 국민(Nation)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지배층(척사파·황실)은 성리학적 절대군주제를 고수했고, 소수의 개화파는 대중적 지지 기반 없이 외세의 힘을 빌려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다 고립되었다. 따라서 1894~1904년의 10년은 단순히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구체제를 지탱하던 가치 체계와 신문명을 요구하는 세력 간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단기간에 극복하기 어려운 사상적 내전 상태였다고 보게 된다.
2. 함재봉의 시각에 대한 비평
함재봉의 접근은 민족주의적 피해의식이나 일제의 식민주의적 조작론이라는 이분법을 뛰어넘어, 문명사·사상사·국제정치학적 복합 지형을 짚어낸다는 점에서 뚜렷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정한 사상적 편향과 한계 역시 내포하고 있다.
통찰: 체제 옹호론과 단선적 피해자 서사의 탈피
식민사관의 자망론을 반박하려다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외세의 침탈만 없었다면 우리는 저절로 잘했을 것>이라는 식의 안이한 내재적 발전론이다. 함재봉은 조선 말기 사회를 지배하던 성리학적 이념 독점과 소중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지적 쇄국을 낳았는지 냉정하게 해부한다. 망국의 원인을 단순한 정치적 실정이 아니라 문명적 인식의 실패에서 찾는 그의 분석은, 국가의 생존이 국제정치적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상적 개방성에 달려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계: 서구·해양 문명 중심주의와 목적론적 사관
함재봉의 시각은 근대 서구 문명(특히 영미식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전통, 자본주의 체제)을 보편적이자 필연적인 <승리 문명>으로 전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관점에서는 조선의 주자성리학적 질서나 대륙적 전통이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장애물로만 환원되기 쉽다.
조선 후기 내부에서 태동하던 다양한 자생적 질서 재편의 움직임(상업 발전, 서민 문화, 실학적 개혁 모색 등)이 지닌 역동성이 서구식 척도에 밀려 과소평가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지정학적 외압의 폭력성에 대한 과소평가 위험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획득해 나간 과정은 단순한 <우월한 문명의 자연스러운 확산>이 아니라, 노골적인 군사적 폭력과 불평등 조약의 강요였다. 가지무라 히데키가 지적했듯, 일본이 개항 후 누렸던 지정학적 여유(당시 열강의 관심이 청나라와 세포이 항쟁 등에 집중되었던 상황)와 달리, 조선은 개항 직후부터 청일 양국의 무력 충돌이라는 지정학적 회오리에 직접 노출되었다. 함재봉의 사상사적 분석에 지나치게 경도될 경우,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이 지닌 침탈성과 군사적 강제성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희석될 소지가 있다.
결론: 세계시민적 시각에서의 종합
결국 함재봉의 시각은 앞선 글의 <외압 좌절론>과 상호 보완적으로 읽을 때 가장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적 침탈과 방해라는 명백한 외압에 의해 좌절된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붕괴해 가는 중화 질서에 사상적으로 결박된 채 새로운 세계 체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던 내부적 문명 인식의 지체 또한 분명히 겪고 있었다. 자망(自亡)도 순수한 타살(他殺)도 아닌, 세계사적 문명 변동기 속에서 내부의 사상적 경직성과 외부의 제국주의적 폭력이 맞물려 초래된 비극으로 조망하는 것이 온당하다.
세진님, 함재봉 교수의 논의는 조선의 멸망을 단순한 당쟁이나 부패가 아니라 문명사적 패러다임 전환의 실패로 다루고 있어, 자망론과 식민사관 비판 양쪽 모두에 중요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관련 강연 영상으로 함재봉 원장이 당시의 쇄국과 문명사적 배경을 짚은
함재봉의 으로 본 조선자망론과 대한제국의 멸망
1. 총평: 함재봉은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함재봉의 강좌, 특히 에 기초한 조선 말기 및 청일전쟁 관련 강의를 앞서 제시된 '조선자망론' 논쟁과 연결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난다.
앞의 글은 조선의 멸망을 설명하면서 '외세의 간섭과 침략'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강조한다.
반면 함재봉은 외세의 침략을 인정하면서도, 왜 조선은 일본처럼 근대국가로 전환하여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는가를 집중적으로 묻는다.
그의 역사해석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멸망을 이해하려면 일본의 침략뿐 아니라 조선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성리학적 정치질서, 중화 중심의 세계관, 그리고 근대 국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국가체제의 문제를 분석해야 한다."
다만 이것은 함재봉의 여러 강의를 종합한 해석이지 그가 직접 사용한 하나의 결론 문장은 아니다.
함재봉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단순한 '조선자망론'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조선 내부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가지무라 히데키와는 매우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내가 보기에 두 해석의 중요한 차이는 개혁이 실패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느냐에 있다.
가지무라는 외압이 조선의 자주적 개혁을 가로막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함재봉은 조선이 근대적 국제질서와 국가체제에 대응하는 능력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두 설명이 반드시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2. 함재봉의 조선 말기 분석: 다섯 가지 핵심 논점
(1) 조선의 위기는 19세기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함재봉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조선의 정치적·사상적 구조가 장기간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운영의 기본 원리로 채택하면서 왕권, 관료제도, 신분관계, 가족제도와 사회윤리를 하나의 질서 속에 조직했다.
특히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의식을 강화했다.
함재봉은 이 같은 중화주의적 정체성이 조선 정치와 대외인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예송논쟁을 단순한 예법 다툼이 아니라 이러한 문명적 정체성과 연결해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후기의 문제는 단순히 부패한 관리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정치문화 자체가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대응하는 방식을 제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비판이 가능하다. 성리학적 질서는 일본의 에도시대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성리학 자체가 근대화의 장애였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2) 근대화의 핵심은 기술도입보다 국가관의 전환이었다
함재봉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전통적 중화질서에서 근대 주권국가체제로의 전환이다.
근대 이전 조선은 중국 황제와의 책봉·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상당한 내부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서구의 근대 국제질서에서는 국가가 독립적인 조약 당사자이자 군사적 주권을 행사하는 단위로 이해되었다.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과정에서 이러한 충돌이 분명히 드러났다.
조선은 청나라와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과 근대적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했다.
함재봉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독립국가의 개념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 관점에서는 조선의 개혁이 단순히 군사·재정·교육제도를 서구식으로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의 정체성과 국제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문제였다.
(3) 일본은 단순히 먼저 개항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재구성했다
함재봉은 메이지유신을 근대적인 국가건설 과정으로 중시한다.
일본은 기존의 막번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 정부를 수립하고, 군사와 재정 및 교육을 개편했다.
그는 일본의 정한론 논쟁조차 이러한 국가건설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즉각적인 대조선 강경책을 주장한 세력과 내치 우선을 주장한 세력이 충돌했다.
함재봉은 이 논쟁을 단순히 침략파와 평화파의 대립이 아니라, 근대국가를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건설할 것인가를 둘러싼 메이지정부 내부의 갈등으로 분석한다.
이렇게 보면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단순히 20~30년의 시간적 격차가 아니다.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조직력과 제도적 역량의 차이라는 것이다.
(4) 청나라와의 관계가 조선의 독립국가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함재봉의 청일전쟁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청나라의 역할이다.
한국의 일반적인 역사서술은 일본의 침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함재봉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행사하던 종주권과 정치·군사적 개입에도 주목한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은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로 전환하려 하면서도 청나라와의 전통적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함재봉에게 청일전쟁은 단순히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5) 조선의 지배층은 국제질서의 변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대응하지 못했다
함재봉은 조선 지배층 내부의 차이에도 주목한다.
일부 개화파는 일본과 서구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기존 국가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기존 정치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은 새로운 국제환경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에 저항했다.
일본의 새로운 외교적 요구에 조선정부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다룬 정한론 강의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강조된다.
이 때문에 함재봉의 역사에서는 개화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단순히 일본을 추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조선이 근대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를 먼저 인식한 정치세력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개화파의 친일적 선택과 일본의 침략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별도의 논쟁을 낳는다.
3. 함재봉과 가지무라 히데키의 해석 비교
쟁점 | 가지무라 히데키를 원용한 글 | 함재봉의 해석 |
|---|---|---|
망국의 주요 원인 | 외세의 개입과 일본의 침략 | 전통국가의 구조적 취약성과 외부 압력의 결합 |
일본과 조선의 격차 | 개항과 개혁 시기의 차이 | 정치사상, 제도, 국가조직의 차이 |
성리학의 역할 | 주요 설명요인으로 강조하지 않음 | 중화 중심 세계관과 정치질서의 핵심 |
청나라의 역할 | 조선의 개혁을 제약한 외세 | 조선의 독립국가화를 가로막은 기존 국제질서의 중심 |
일본의 역할 | 개혁을 차단한 침략국 | 근대화의 모델이면서 군사적 팽창국 |
갑오개혁 | 조선의 본격적 근대화 출발점 | 일본의 군사적 개입과 개화파의 국가개혁이 결합한 사건 |
조선의 개혁 가능성 | 시간이 주어졌다면 발전 가능 | 기존 정치질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 |
함재봉은 개화파를 단순한 친일세력이 아니라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일본의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세력으로 해석한다. 그는 그들이 왜 일본을 문명개화의 모델로 선택했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함재봉의 해석은 원문의 주장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조선에 개혁을 위한 시간이 더 있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기존의 정치적·사상적 구조를 바꾸지 않고 시간만 더 주어진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가지무라의 관점에서도 함재봉에게 물을 수 있다.
"조선이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기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군사적 간섭과 주권 침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독립적인 국가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겠는가?"
이 두 질문은 모두 정당하다.
4. 함재봉의 역사관에 대한 평론
(1) 강점: 조선의 멸망을 장기적인 역사구조 속에서 설명한다
함재봉의 중요한 기여는 조선의 멸망을 1894년 이후의 몇몇 사건이나 1910년 병합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의 성리학적 국가체제, 중화질서, 명청교체 이후의 정치의식, 일본의 메이지유신, 청나라의 대외정책을 함께 분석한다.
이러한 접근은 '왜 일본은 성공하고 조선은 실패했는가?'라는 비교사적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그는 일본의 정한론이나 청일전쟁을 1910년의 결과로부터 거꾸로 읽지 않으려 한다.
1873년의 일본 정치인들이 반드시 1910년의 병합을 목표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대조선정책 역시 국내 정치갈등과 국제정세에 따라 변화했다.
이처럼 당시 행위자들이 실제로 가졌던 선택지와 이해관계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역사연구에서 중요한 장점이다.
(2) 약점: 일본의 근대화를 너무 쉽게 성공의 기준으로 설정할 위험
함재봉의 분석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근대화의 기준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군사적·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그 근대적 국가역량을 이용하여 대만과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어느 의미에서 성공이었는가?
국가의 군사력과 산업생산 능력을 기준으로 보면 성공이었다.
그러나 타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적 근대화라는 기준에서는 심각한 모순을 드러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보다 근대적이었다는 명제가 일본의 정치적 선택이 더 합리적이거나 정당했다는 판단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나는 함재봉의 해석에서 이 구별을 더욱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3) 약점: 갑오개혁의 성과와 일본의 군사적 강압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함재봉은 갑오개혁의 제도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36회 강의에서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파견과 제2차 갑오개혁, 홍범14조 등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갑오개혁이 근대적 제도를 도입한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평가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근대적이었다는 사실과 개혁이 추진된 정치적 방식이 정당했는가는 별개다.
1894년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고, 그 군사적 우위 아래 조선의 정치적 재편이 진행되었다.
조선의 개화파가 주도적으로 개혁을 추진한 측면도 존재하지만, 일본의 강압을 제외하고 그 과정을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의 는 갑오개혁의 추진세력을 갑오파, 갑신파, 정동파, 대원군파, 궁정파 등으로 구분하며 개혁세력 내부의 다양성과 갈등을 보여준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이 조선에 일방적으로 제공한 근대화도 아니고, 외세와 무관하게 조선이 자율적으로 추진한 근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내부의 개혁 요구와 일본의 군사적 개입이 복잡하게 결합한 사건이었다.
(4) 약점: 조선 내부의 근대화 가능성을 개화파 중심으로 좁힐 수 있다
함재봉은 개화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복원한다.
이는 친일개화파와 식민지배 협력자를 무조건 동일시하는 해석을 교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 가능성이 개화파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부패한 지방행정과 신분적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국민의 정치적 참여와 공론의 형성을 시도했다.
이러한 움직임도 근대국가 형성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특히 정치적 근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면 동학농민운동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서양식 군대와 관료제를 도입하는 것만이 근대화는 아니다. 지배받는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질서를 바꿀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근대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함재봉의 국가·외교·엘리트 중심 설명에는 이러한 민중적 변화의 역량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룰 위험이 있다.
(5) 가장 근본적인 문제: 문명전환과 제국주의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함재봉의 역사해석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중화질서에서 근대 주권국가체제로의 전환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국제질서는 유럽에서조차 모든 국가의 평등한 주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19세기의 국제질서는 근대적 주권국가 사이의 관계인 동시에 제국주의적 지배관계가 형성된 체제였다.
서구 열강은 독립과 주권의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식민지배를 확대했다.
일본 역시 이러한 국제질서 속에 진입하면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중화질서에서 근대 주권국가체제로의 전환'만으로는 동아시아 근대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위계질서가 붕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위계질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조선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낡은 국제질서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국제질서 자체가 약소국의 주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가지무라가 강조하는 외압의 문제는 함재봉의 분석을 보완하는 중요한 설명요인이다.
5. 종합 평가: 함재봉의 시각은 조선자망론과 어디서 만나고 갈라지는가?
함재봉의 해석은 조선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조선자망론과 일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조선은 근대적 국제질서에 적응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역사적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병합은 불가피하거나 정당했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경험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역사학적 명제다. 후자는 조선의 내부적 문제로부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끌어내는 논리다.
함재봉의 분석을 후자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조선의 내부적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일본의 군사적 강압과 침략이 가진 독립적인 역사적 인과력을 과소평가할 가능성은 있다.
흥미롭게도 동북아역사재단의 김현철이 쓴 서평도 함재봉의 비교사적 서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친일개화파라는 개념과 관련된 역사적 논쟁을 검토하고 있다.
내가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국가의 근대화 능력과 국가의 생존권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개혁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가정해도 일본의 병합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볼 때 함재봉의 설명과 가지무라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결합할 수 있다.
"조선은 전통적인 정치사회구조의 한계 때문에 근대적 국가체제로 전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시에 청나라와 일본 등 외세의 반복적인 개입은 그러한 전환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이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고 독립적인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을 무력으로 차단했다."
이 설명은 조선 내부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책임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마지막으로 함재봉에게 제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일본은 근대국가로의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도 그가 높이 평가하는 메이지 근대국가 건설의 필연적이거나 구조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함재봉의 역사해석은 단순한 국가역량 중심의 근대화론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비교사적 분석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원문의 조선자망론 논쟁보다 더 넓은 주제로 이어진다.
만이 아니라 도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질문에 모두 답할 때 비로소 19세기 말 한국과 일본의 서로 다른 역사적 운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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