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3

1908 MBC 부장,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한 김용장에겐 증거가 없다!조갑제닷컴

MBC 부장,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한 김용장에겐 증거가 없다!







MBC 부장,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한 김용장에겐 증거가 없다!
“‘PD수첩’의 주장 뒷받침할 증거 요구에 아무것도 제시 못해”


조갑제닷컴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신문과방송> 8월호에 ‘전두환이 1980년 광주에 왔다’는 주장을 한 김용장 씨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가 실렸다.

박건식 MBC 시사교양본부 부장은 ‘거짓 제보자에 속지 않으려면 기본 원칙을 지켜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자신을 미 군사정보관으로 소개한 김용장을 PD수첩 팀에서 단독으로 보도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소개했다. 그의 신원과 증언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으나 김용장 씨가 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용장과 관련된 박건식 부장의 글을 발췌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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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보도와 취재원의 신뢰도

박성현 MBC 시청자위원은 2019년 5월 7일 보도한 PD수첩 <2019, 광주가 분노한 이유>편에 대해 “이번 5•18 내용은 전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내용이어서 새로운 정보 제공보다는 정리 차원에 머문 느낌이 있다”고 평가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PD수첩’은 5•18 광주 편을 기획하면서 5•18 당시 보안사 505보안부대에 근무했던 허장환 씨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 받았다.

허장환 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 육군 정보부대인 501정보여단에서 군사정보관(MIS, 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으로 근무하면서 미국에 군부 동향을 보고한 김용장 씨가 메가톤급 폭로를 할 예정인데, 이건 ‘PD수첩’과 단독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광주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과 회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고, 그 회의 이후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이뤄져 시민 54명이 숨졌기 때문에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이었다는 것이 김용장 씨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게 사실이면 그야말로 한국사를 새로 기록할 만큼의 메가톤급 증언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 야망으로, 민주화운동을 사전에 진압할 욕심으로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억울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전두환이 1980년 당시 서울을 희생양으로 삼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고 위험해서 서울보다는 규모가 작은 다른 도시를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추론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이즈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계엄사령부를 방문해 계엄사령관 등과 함께 시위 진압 작전을 논의했다는 육군군수사령부의 공식 기록도 나와 전두환의 광주 방문 가능성에 대한 의혹도 더불어 커지는 상황이었다. 허장환은 ‘PD수첩’ 제작진에게 자신과 함께 피지로 가서 김용장의 인터뷰를 단독으로 방송하자고 제안했다.

엄청난 특종 앞에 ‘PD수첩’ 팀은 흥분했다. 게다가 공군 706보안부대장의 운전병이던 오원기 씨가 1980년 5월 21일 오전 전두환이 용산 미8군 헬기장에서 헬기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오후에 전두환이 광주에 도착했다는 주장과 맞물려 큰 파장을 낳았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오원기 씨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전두환이 광주로 내려갔다는 증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원기 씨의 발언은 전두환이 오후에 광주에 도착했다는 김용장의 주장과 합쳐지면서 국민들에게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로 갔다는 짐작을 하게 만들었다. 오원기 씨의 증언까지 나오니, 김용장의 주장은 확고한 진리처럼 보였다. ‘PD수첩’ 팀은 김용장 씨의 인터뷰를 방송하기만 하면 큰 반향을 몰고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 셈이었다.

그러나 ‘PD수첩’ 팀은 흥분하기에 앞서 허장환, 김용장의 주장을 꼼꼼하게 검증했다. 먼저 공군 항공운항기록을 살폈다. 공군 항공운항기록은 헬기 등의 비행기 탑승자는 반드시 기록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공군 항공운항기록에는 1980년 5월에 당시 최규하 대통령,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간 탑승기록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탑승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계엄사령부 상황일지, 광주 전투 교육사령부 상황일지, 5•18 평가일지, 중대별•대대별 병력일지 및 《광주사태 소요진압 평가와 교훈》이라는 책자 등을 살펴봤다. 그 어디에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로 내려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전두환이 광주에 직접 내려왔다는 증언은 김용장 씨가 직접 목격한 내용이 아니었다. 김용장은 이 내용을 정보원에게서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PD수첩’ 팀은 김용장 측에 당시 정보원의 연락처나 사진, 녹음자료, 미국 501정보여단의 보고자료 등 전두환이 광주에 왔다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 증거를 요구했지만 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제시되지 못했다. 물론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초실세여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 역시 입증의 책임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근무일지 또는 상황일지 등 교차검증이 가능한 영역이 남아 있다. 그 사이 ’PD수첩’ 팀은 당시 보안사에 근무했던 요원들을 직간접적으로 접촉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전두환을 광주에서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PD수첩’ 팀은 김용장 씨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특종의 유혹이 컸지만, ‘PD수첩’ 팀이 검증한 바로는 김용장 씨의 발언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D수첩’ 팀이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한 이후, 김용장 씨는 국내로 들어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JTBC 뉴스룸’,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에 연이어 출연해서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2019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에서 김용장 씨의 신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번역가 설갑수 씨는, 김용장 씨가 미 육군 정보부대 정식직원인 군사 정보관이 아닌 통역요원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등장한 군사정보관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김용장 씨의 신분이 군사정보관이 아니라, 통역관으로 기재돼 있었다. 이후, 김용장 씨는 “미국 501정보여단에서 한국인 근무자들의 직함은 통•번역관(Interpreter•Translator), 군사정보관(MIS), 언어관(Linguist) 등으로 시기에 따라 달리 불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장 씨가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기안품의를 올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직 김용장 씨는 당시의 정보원에 관한 내용이나, 당시의 보고서 내용이나 군사정보관 관련 신분 자료들을 어느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2019년 5월 김용장, 허장환의 ‘전두환 광주 방문 소동’의 원인은 특종이 주는 유혹에 빠져 제보자에 대한 검증을 소홀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김용장의 신분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당수의 언론은 김용장이 미 육군의 군사정보관이란 주장을 여과 없이 소개했다.

문제는 제보자가 아니라 언론

이상 워싱턴포스트, 미국 CBS의 메모 게이트, BBC의 길리건 기자 보도 사태,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김용장, 허장환 주장의 사례들을 살펴봤다.

이들이 주는 교훈은 명료하다. 문제는 제보자가 아니라, 언론이라는 점이다. 제보자들은 실로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언론을 상대한다. 여기에 언론이 원칙을 갖고 제보자를 대하지 않으면, 자칫 제보자의 노리개가 되기 쉽다.

즉, 언론이 특종과 속보의 욕심을 누르고 팩트들을 교차검증하고 항상 반론을 청취하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기본원칙에 충실할 때, 언론은 가짜 제보자의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입견과 단정의 오류에서 벗어나 반대의 경우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항상 열려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거짓 제보자에게 놀아나지 않는 지름길이다. 즉, 언론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다.


글 박건식 / MBC 시사교양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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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 7월 기사 7 JTBC의 ‘김용장 보도’에 언론상을 준 5·18 재단은 실수한 것 아닌가?
여전히 남아 있는 신분 관련 의문…“의문은 해소됐다”는 재단
金永男(조갑제닷컴)

지난 7월 5·18 기념재단과 광주전남기자협회는 5·18언론상 취재 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JTBC의 ‘5·18 진상규명’ 연속보도 등을 선정했다. 이 재단은 심사평에서 JTBC 보도와 관련, “5·18 당시 미501여단 한국인 정보요원 김용장씨의 증언을 이끌어내 5·18 진상규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시킨 점이 심사위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이 재단은 “김용장씨의 미군부대 정보요원 신분에 대한 일각의 의문제기에 대해서는 5·18 재단에서 정보요원 입증자료와 관련자 증언을 확보해 의문이 해소됐음을 밝혀둔다”고 덧붙였다. <조갑제닷컴>은 5·18 재단에, ‘의문을 해소한 자료와 증언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했으나 31일 현재까지 답변을 듣지 못했다. 김용장씨의 신분에 관한 논란은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입증자료가 언론을 통해 공개돼 의문이 해소된 적도 없다. 오히려 김용장씨의 신분이 ‘정보요원’이 아니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언론에 소개됐다.

5·18 재단은 심사평 마지막 부분에서 “2020년 5·18 40주년에는 언론인들이 보수세력의 5·18조작, 왜곡의 위장막을 거둬내고, 5·18진실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제쳐주길 소망하고 기대한다”고 했다. 이 재단은 ‘진실의 문’을 언급했는데 JTBC 보도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김용장씨의 신분에는 의문이 아직 많이 남았다. 김용장씨에 대한 의혹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이유를 차례로 소개한다.



1. 在美 번역가의 취재로 밝혀지는 김용장의 신분

김용장씨는 3월 JTBC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5월에는 한국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갖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미 여러 차례 국가기관의 조사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 정보여단 군사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한 김용장씨의 실제 직책이 정보요원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군사정보요원이 아닌 Language Specialist, 즉 한국어 전문가(통역가)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용장씨가 언론에 공개한 501 정보여단으로부터 받은 ‘상장’에 적시돼 있다.

차례로 설명하기에 앞서 요약을 하면, 그가 ‘미군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증거로 제시한 ‘상장’ 등은 오히려 그가 정보원이 아니라 통역 등 언어전문가로 활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군사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민간인 언어전문가가 정보를 보고할 수는 없다. 즉, 통역 업무를 비롯해 정보원을 만나 정보를 수집할 수는 있었겠지만 직접 보고하는 정보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용장씨의 신분에 처음 증거를 갖고 의문을 제기한 것은 설갑수라는 번역가이다. 그는 황석영 등이 쓴 5·18 관련 책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김씨의 기자회견 후인 5월 16일 <’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이라는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김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설갑수씨가 집중적을 의문을 제기한 부분은 김용장씨의 당시 신분이었다. 김용장씨의 주장 이외에는 증거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김용장이 501그룹 시절 받은 포상은 그가 501그룹 종사자였음을 증명할 뿐 광주에서 군사정보 전문가로 일했다는 증거는 아니다”라며 “지금까지 공개된 501부대의 두 상급기관,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와 국방정보국(DIA) 문건에서 광주 근무 ‘한국인 정보전문가’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김씨의 증언의 정확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김용장씨는 앞서 소개한 기자회견에서 “1980년 광주에 CIA나 국무부 직원은 없었다”고 한 바 있다. 설갑수씨는 자체적으로 조사를 실시, “CIA 요원 상주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주에는 국무부 소속 미 문화원들이 있었고 미국의 5·18 초기 정보는 문화원 직원들의 작품이었으며 20년 넘게 광주의 미 육군정보 요원이 이들의 존재를 모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설갑수씨는 INSCOM의 1980년 연례보고를 검토, 당시 501 그룹에는 미군 194명, 직접 고용한 민간인은 두 명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중 하나가 김용장이었을까”라며 “그러한 특기자가 굳이 광주 공군기지에 20년간 배치됐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설갑수씨는 6월2일 <5·18의 ‘꿈 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김용장씨의 직책과 관련된 후속취재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미군 당국에 정보요청을 하는 등의 취재를 통해 “그가 501 군사정보단의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로 근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설갑수씨에 따르면, 김용장씨는 9급 통역으로 501 정보단에 1974년 입단했고, 90년대 중반 통역관(Language Specialist)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갑수씨는 “이 기간 그는 비공식 정보원으로서 광주 주변의 첩보를 수집해 보고할 수도 있었으나 그가 속했다던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라고 했다.

설씨는 또한 김용장씨가 501 정보단 직책을 맡았다는 것을 물증으로 증명한 적이 없었다고도 지적했다. 20년 동안 501 정보단에서 일했다는 근속표창만을 제시했을 뿐 어떠한 직책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부대 표창 중 하나에는 그가 ‘민간인 통역관’이었다는 설명도 담겨 있다.

그가 공개한 표창은 ‘COMMANDER’S AWARD FOR CIVILIAN SERVICE’이다. ‘민간근무자에 대한 사령관 표창’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받은 상장 내용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1995년 3월 1일부터 1996년 3월 31일까지 501정보여단에서 언어전문가로서 이례적으로 우수한 근무를 해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문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그가 소개한 ‘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가 아니라 ‘LANGUAGE SPECIALIST’로 근무했다.

INSCOM 공보국은 이와 관련된 설갑수씨의 질문에,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며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용장씨 퇴직 직전 501 부대장이었던 퇴역 장성 H씨 역시 김용장씨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H 장군은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느냐’는 설갑수씨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자고 했다고 한다.

2. 아이러니한 한겨레의 특종

설갑수씨의 기고문이 공개된 이후인 6월 5일 한겨레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단독] “김용장씨, 미 육군 방첩부대 501정보여단 재직 맞다”’는 제하의 기사이다. 한겨레는 5·18 당시 케이-57 기지(공군 제1전투비행단)에 재직했던 전 군 정보요원 ‘ㄱ’씨를 인용, “김씨가 군사정보관은 아니었지만 통역관 호칭으로 첩보를 수집하는 등 활동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그는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 근무했던 그(김용장)는 통역사였지만 득문 내용을 미군 정보관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기관 방문 때 정보관들과 동행해 통역했으며 각종 정보도 수집했다”고 했다. 이어 “김씨가 공식 보고서를 쓸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 기사는 한겨레의 말처럼 특종이다. 그러나 진짜 특종인 팩트는 ‘김용장씨는 미군 정보여단에서 재직한 게 맞다’가 아니라 ‘군사정보관은 아니었지만…’이 아닐까?

김용장씨는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501정보여단에서 정보 수집 및 보고 활동을 하는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igence Specialist, MIS)으로 재직했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501정보여단에서 근무했던 직원 중 미국인 일반 정보요원은 ‘스페셜 에이전트’로 불렀지만 한국인 근무자들의 직합은 통역, 번역관(Interpreter/Translator), 군사정보관(MIS), 언어관(Linguist) 등으로 시기에 따라 달리 불렸다”며 “한국인 근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함은 군사정보관이었고 이 직함도 요청하면 언제든지 바꿔준다”고 했다.

앞서 설명했듯 군사정보관과 통역 및 번역, 즉 언어전문가는 차이가 크다. 그런데 이런 직책이 계속 바뀔 수 있다는 게 김용장씨의 주장이다. 설갑수씨가 인터뷰한 501 부대장 H 장군은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3. 김용장은 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나?

김용장씨는 한겨레에 “통역 및 번역관의 직함이 적힌 표창장과 군사정보관이라고 적힌 신분증도 찾아서 공개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인터뷰가 나간 지 한 달 반이 지난 현재, 이런 신분증이 언론에 공개된 적은 없다. 5·18 재단에 이런 신분증을 확인한 것인지 문의했지만 아직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

김용장씨는 ‘언어전문가’, ‘미스터 김용장’으로 소개된 상장과 표창장은 모두 제시했는데 가장 무게감이 있는 ‘군사정보관’이라는 직함이 적힌 어떤 것도 공개하지 않았다. 의문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다.

한편, 당시 한국군 505보안부대에서 근무했다는 허장환씨는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김용장씨와 함께 참석했다. 그도 광주에 전두환 장군이 왔었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설갑수씨의 두 번째 경향신문 기고문이 게재된 후인 6월 13일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썼다. ‘김용장 선배가 연락을 피한다’는 취지였다. 그는 김용장씨의 신분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분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관련 글에 있는 오타 등을 수정하지 않은 채 전문 소개한다.

<근간에 즈음 하여 Facebook 상 에 글을 올리는게 조심 스러워 진다
고약한 심성을 가진 자들이 아무렇치도 않게 기고문에 대한 험집내기를 능사로 하고 시사성을 노린 언론은 이를 기사의 호재로 하여 독자들을 현혹 시키는 다시 말해 혹세 무민 함을 주저치 않는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하지만 음해를 당하는 당사자는 작난삼아 던지는 돌 맹이 에 목숨을 잃는 개구리 격이다
진실과 거짓이다 라 는 공방을 떠나
국군 아저씨들의 행열 을 보고 손을 흔드는 개울에 서 멱을 감고 놀던 어린 초등 학생들 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한 5,18당시 시 외각 으로 철수 하던 공수 부대원 들의 행위는 변명 의 여지가 없는 말 그대로 만행이다
진실과 거짓 또는 당위성을 논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
이러한 5,18의 실상을 증언 하기 위해 머나먼 태평양 피지에 에서 노구를 이끌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떠나버린 조국에 날아와서 증언 대에 서서 39 년 동안 무겁게 마음 속 에 자리 잡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 놓으며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증언 하는 김 용장 씨를 ~~
가짜니 통역관에 지나지 않는 존재 감 없는 하짠은 사람 이니 하며 애써 그날의 증언 자체를 평가 절하 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라 아니 할수없다
입을 섞어 상대 할수없는 축생보다 못한 쓰레기 중에 상 급 쓰레기 들 이고 상판에 가래침을 벳어주고 싶은 속물 들이다
피지에 돌아간 김용장 선배는 요즘 내가 전화 를 해도 받질 않는다
당분간은 서로 연락 하지 말고 지내자고 한다
우리가 해야할 모든 역활은 마음의 십자가를 내려 놓는 그순간 다 끝난 것 이라고 한다
정말 씁쓸한 마음 이 든다
나역시 아무도 만나기도 싫다
사람 만나는게 두렵고 말 하는게 불편 스럽다
당분간 Sns 접속도 삼가 해야 할것 같다
노을이 짙게 드리우는 화천 북한강 강 언덕에 팔 베게를 하고 누워 그 간의 힘들었던 순간 순간을 떨쳐 버리련다.>

[ 2019-07-31, 16:42 ]

*2019. 5.15 조갑제닷컴 김영남 기자의 취재기

5·18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황당한 주장이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정보여단 군사정보관으로 활동했다는 김용장씨가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이다. 그는 올해 3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주장을 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주장을 종합하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21일 광주에 내려가 비밀회의를 가지고 ‘사살 명령’을 내렸으며 그가 떠난 직후 ‘계엄군의 집단사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국가차원의 조사가 수차례 이뤄진 뒤에 나오는 것도 황당하지만 이를 보도하고 있는 JTBC의 보도 행태가 더욱 황당하다.

JTBC는 김용장씨가 국회에서 증언(?)을 한 날인 13일, 김 씨 관련 기사를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룸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내보냈다. 두 꼭지는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로 이날 있었던 김씨의 주장을 차례로 소개한 기사다. JTBC는 이후 김용장씨를 직접 스튜디오로 초대해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우선 1차 보도인 스트레이트 기사의 제목은 <“광주에 내려온 전두환” “발포 아닌 사살” 국회 증언>인데 유선의 기자가 보도했다. 손석희 앵커는 이 기사 보도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앵커: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계탑입니다. 오후 1시에서 1시 30분을 향해 가는 시각, 80년 5월 21일 여기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 조준 사격을 했습니다.

김용장: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허장환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를 했습니다. 앉아쏴 자세에서 사격은 절대 자위적 투사가 아닙니다. 그건 사살이지.”

앵커: “발포가 아닌 사살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 씨와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 씨는 ‘계엄군의 사격은 사살이었고,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오늘(13일) 국회에서 증언했습니다. (하략)>


손석희 앵커는 기사 소개에 앞서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조준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했다. 그는 그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어떤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이 기사에 소개될 김용장씨와 허장환씨의 주장을 ‘증언’으로 표현해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보도 행태를 취했다. 이 기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입장이나 전두환씨가 같이 회의를 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이들은 과거 검찰 조사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광주에 오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JTBC는 이후 <“헬기 사격, 전투기 출격대기도…” 구제척 증언 ‘일치’>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것인데 기사 첫 문장은 “김용장 씨는 헬기사격을 백악관에 보고했다고 말했습니다”이다. 김씨가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경위나 헬기 사격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어떤 내용도 기사에는 없다. 미 정보요원이 백악관에 보고를 했으니 시청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이다.

이날 뉴스룸 후반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사실확인 노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용장씨의 황당한 주장이 24분 동안이나 전파를 타는 상황이 이어졌다. 손석희 앵커의 역할은 김용장씨의 주장에 신뢰성이 있는지, 무엇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지만 이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손 앵커는 김용장씨가 1997년에 받은 상패를 보여주고 ‘시청자들의 신뢰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광주사태는 1980년에 일어났다.

이날 인터뷰에서 우선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이런 사실을 공개하기로 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격려성 발언을 했다. 이에 김용장씨는 “그렇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제 마음속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웠다. 감히 누가 39년 비밀을 지킬 수 있겠나?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으로서는 그 비밀이 굉장히 컸다”라고 했다.

이런 답변이 나온다면 대다수의 기자들은 ‘당시 현장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직접 봤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 앵커는 ‘미국 정보요원이라는 역할이 무엇이고 보고체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시청자들은 광주사태와는 관련 없는 미국 정보 보고 체계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이후 손 앵커는 ‘광주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도 있을 테고 본인이 직접 취득한 정보도 있을 텐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누구로부터 얻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다면 ‘당시 직접 취득한 정보는 무엇이었습니까’이었을 것이다.

손 앵커의 질문에 김용장씨는 “한국 정보기관 요원 등을 비롯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정보원들을 통해 정보를 받는다”고 했다. 이에 ‘왜곡된 정보를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며 “한국에 있는 정보기관도 그 첩보를 자기 기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하고 우리에게도 주고 또 그 정보가 상보하는 과정에서 크로스체크가 되기 때문에 허위정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질문 과정은 또 한 번 핵심 논점에서 벗어난다. 손 앵커와 김용장씨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전두환 장군이 광주에 와서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일 텐데 미 정보요원의 전반적인 정보 취득과 보고 활동에 대해서만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가 받았다는 상패를 소개한 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전두환 씨가 (광주에) 온 것을 어디서부터 어디로부터 정보를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용장씨는 “전두환 씨가 5월 21일 정오쯤 해서 왔는데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 첩보원은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정보요원”이라고 했다. 이어 “그 분이 첩보를 줬고 그 후에 505보안부대에 근무하는 여러 분들도 본 적이 있다”라고 했다.

손 앵커는 “전두환씨가 온 것을 봤다는 얘기인가”라고 물었다. 김 씨는 “본 적 있다”라며 “그리고 간접적인 증명을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며 전두환씨가 탄 헬기의 비행 계획서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김용장씨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없고 남에게 들은 얘기를 자신이 보고했으니 이를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손 앵커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손 앵커는 본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손석희 앵커는 이후 “전두환 씨는 그때 광주에 안 갔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그런 발포명령의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용장씨는 “그렇다”라면서 “아마 전두환 씨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마 기억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이라고 했다.

김용장씨는 계속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한국군 ‘편의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방화 등을 하면서 무력진압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계엄군의 성폭행과 관련된 보고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주장의 출처는 ‘정보원’이었다.

JTBC 뉴스룸에서 13일 진행한 김용장씨의 인터뷰 기사와 관련 기사 두 꼭지, 김 씨의 주장에 정면 배치되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차례로 소개한다.

[ 2019-08-30, 1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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