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3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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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

최근 수정 시각: 2021-01-02 23:10:41


분류
5.18 민주화운동/역사왜곡
 상위 문서: 5.18 민주화운동/왜곡
 


5.18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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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북한개입설이 거짓이라는 근거
3.1. 북괴는 오판말라3.2. 김일성: "미국과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기에 개입 못했다."3.3. 미국 정부 및 CIA 등의 기밀문서 관련3.4. 시민들의 20사단 지휘차량 탈취3.5. 시민들의 장갑차 및 군용차량 운용3.6. 시민들의 전차 운용 및 개발3.7. 북한제 무기 발견3.8. 당시 무기고 습격과 탈취의 전문성 여부3.9. 북한의 5.18 기념
3.9.1. 5.18 남파간첩 위령비3.9.2. 북한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3.10. 시민군측 카빈소총 사상자3.11. "5.18 광수" 특수부대 안면분석3.12. 탈북자의 증언?3.13. 윤기권 월북사건을 보면 북한의 개입 내지는 종북세력의 준동을 짐작할 수 있다?3.14. 5.18 신원미상 사망자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이다?4.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5. 자유한국당의 북한군 개입설 주장

1. 개요[편집]

북한이 600명의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광주를 점거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시위를 지휘하고 계엄군을 폭행했다.
지만원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하는 설. 북한이 개입한 사실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대체적으로 5.18 사건이 나자 북한군이 투입되었다는 주장과, 일어나기 이전부터 주민들을 선동하여 5.18이 일어났다는 주장 등으로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잘 맞지 않는다. 아래 내용들은 인터넷에서 주로 회자되는 내용임을 밝힌다.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처럼 언론에 떴다가 난리가 나기도 하는 쉰 떡밥들이기도 하다.

2. 설명[편집]
이름대로 5.18 민주화운동이 항쟁이나 민주화 운동이 아닌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설로,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과 단체로는 지만원[1]과 전사모, 일베저장소, 일부 극우성향의 디시인사이드유저 등의 단체들이 있다.

이 주장은 자유민주연합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5.18 특별법이 통과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정설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의 지지 기반이었던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는 중장년 세대를 중심으로 거지반 사실로 취급되고 있다.[2] 이는 5.18 직후 계엄군이 학살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설이며,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4.19까지도 북한의 개입[3]이 있었다고 조작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치안 상태를 보면[4] 특수부대를 전라도까지는커녕 서울 이북 지역까지 잠입시키는 것도 천운의 도움을 얻어 겨우 할 수 있었을 지경이다. 또한 광주의 경우 주요거점으로 삼을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부산이나 목포와 같이 항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규모 부대가 포진해있는 것도 아니였다. 있어봤자 당시 퇴역기체들이 있던 광주공항이나 상무대, 31보병사단 정도. 곡창지대라 해도 지금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아니고, 비행기를 땅굴로 가져와 광주공항에서 날릴것도 아닌데 굳이 4백여명의 특수부대를 보내 인명피해를 내면서까지 점령할 이유가 없었다. 파괴공작이나 총력전이라면 모를까. 게다가 정말 북한 특작부대가 중대 규모로 광주까지 잠입했다면 책임자들이 즉각 경질되어야 정상이다. 그만큼 국가 안보가 미비했다는 소리일 뿐이니까.

2018년 SBS에서 미 국무부의 기밀 문서를 바탕으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5·18 북한군 침투설을 처음으로 거론한 것은 바로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그것도 5·18 직후인 1980년 6월 4일에. 보도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은 신원 미상의 사망자 22명을 북한의 침투 요원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으며, 5·18의 책임이 김대중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 진행 도중에도 간첩이 광주에 침투했다거나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있다는 등 미국에 각종 가짜 정보를 흘려보냈으나, 미국은 이에 속지 않았다. 이후 분석된 CIA의 “체로키” 문건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시위대가 인민재판을 시행하고, 무장투쟁 장기화를 위해 폭도 2천여명이 산악지대로 도주했다느니,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독침사건 등 공작활동을 하고 있다느니 하며 마치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있다는 식으로 거짓 정보를 미국에 흘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에도 미국은 북한군의 특이 동향이 없는 등 신군부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나, 계엄군의 실세는 이희성이 아닌 전두환이라는 것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떨어진 광주에 130여 명의 정보보안 형사들의 감시망을 뚫고 북한군이 단 1명이라도 들어왔다면, 그래서 그 북한군을 사살하였다면 그 치적은 국방사에 있어 길이길이 남을 최고의 자랑거리에 일선 사수부터 장성급까지 그 이유로 훈장이 쏟아져야 하나, 그런 이야기도 없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취재한 적이 있는 기자인 조갑제 역시 단 1명의 북한군과도 연관이 없다는 꾸준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5.18 자체가 숭고한 반공 민주화 운동이자 계엄군의 총에 힘없는 민간인이 맞아 죽은 사건임을 강조하며 35년이 지난 2017년 현재도 그 논조는 변함없다. 북괴는 오판말라!라는 현수막이 찍힌 사진이 바로 조갑제 기자가 찍은 사진인데 이 말의 의미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북한군이 개입하는 일을 막기 위한 시민의 순수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 현수막만 봐도 북한군이 개입할 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 일화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시민들이나 시위대가 잡아서 군에다 넘겨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민행동본부의 대표인 서정갑 역시 "당시에 개미 새끼도 하나 그거 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우리 정보기관이 샅샅이 다 뒤졌어요. 그러면 (북한군) 6백여 명 중에 한 놈이라도 안 걸렸다. 그 자체가 그게 말이 됩니까?"라 하면서 이 건은 3대 거짓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극우 행동으로 악명높은 보수 인사조차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1981년 4월 18일, 중국 심양에서 열렸던 덩샤오핑-김일성 회담에서 김일성이 "우리가 광주사태와 같은 인민봉기에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서 …(중략)… 이에 대해서 우리 정치국은 여러 번 토의를 했다. 미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만일 우리가 개입하면 또 미국과 싸워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다."라며 개입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5]

Timothy Scott Shorrock 이라는 이름의 미국 기자가 "체로키(Cherokee)" 로 알려진 CIA 문건을 폭로하며 600명의 북한군 개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밝혔으며, 결국 CIA가 직접 5.18 관련 기밀 문건을 공개하면서 북한 개입설은 거짓이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사실 5.18이 재조명 되던 1996년, 대법원은 계엄군의 사실상의 국헌문란의 폭동행위로 간주했다. 당시 계엄군은 '폭동'을 진압한다는 같잖은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둘렀고 닥치는 대로 죽이기까지 했는데, 이를 폭동적 시위진압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전두환[6]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의 진압 행위를 폭동으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피고인들이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주요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비상계엄을 부당하게 전국으로 확대한 행위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헌을 문란케 한 행위이고 위의 시위 상황에 의하면 광주 시민들은 위와 같은 피고인들의 국헌문란 행위를 항의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시위에 나온 것이므로 이것은 주권자이며 헌법 제정 권력인 국민이 헌법 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할 것이고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동원하여 위에서 본 것처럼 난폭하게 이를 제지한 것은 강압에 의하여 그 권한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어서 국헌 문란의 폭동에 해당한다.
(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가 국헌문란에 해당하는지 여부(적극)
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대법원 판례 96도3376)

물론 5.18 이전에 이미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북한 공작원들이 5.18 당시 정보활동을 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정보원이 적국의 소요사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적인 대규모 침투설은 물론이고, 광주시민들을 공작원들이 선동했다고 볼 만한 증거도 전혀 없다.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5.18 민주화운동 문서의 r1821
, 8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3. 북한개입설이 거짓이라는 근거[편집]
미국이 북한군들의 개입을 묵인 했단거 자체가 말이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게다가 침투를 한다면, 아무리 진보 성향이 강한 광주에서 활동하지 않고 서울에서 활동하였을 것이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의 공작이라면 군사적으로 진압을 하지 않은 미국조차도 한패인가?
3.1. 북괴는 오판말라[편집]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잠입취재를 했던 조갑제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3.2. 김일성: "미국과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기에 개입 못했다."[편집]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은 뒤에 북한의 미국의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1981년 4월 심양에서 김일성과 등소평이 회담을 한 내용이다.

김일성: 1979년 남조선 사태(12.12 군사반란) 이후,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등 혁명적 상황이 앞으로 다시 재현될 수도 있고, 군대 내에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결정적인 관건은, 미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데 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남조선 정세발전을 보면 한동안은 안정될 것 같다. 등소평 동지가 아는 바와 같이우리는 남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전략방침에 대해서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가 살아 계실 때 연구 결정해 놓았는데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는 상황하에서, 우리가 남조선 인민봉기에 개입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 때문에 우리는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가 광주사태와 같은 인민봉기에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서 남조선의 혁명가들은 우리를 비판하였다. 인민들이 죽는 것을 우리가 수수방관했다는 것 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 정치국은 여러 번 토의를 했다. 미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만일 우리가 개입하면 또 미국과 싸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고, 남조선 혁명가들에게 무조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세계는 지금 조처에 제 3차 대전이 폭발할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조선에서 먼저 싸움을 일으켜 세계를 재난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우리는 남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민주화투쟁을 강화해서, 담판(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문제를 점차 해결할 수 밖에 없다. 부차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러니 시험해 볼 만한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기 대문이다.

요컨대 지금 상황화에서는 혁명의 방법, 폭력의 방법으로는 정권을 쟁취할 수 없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 유일한 방법은 연방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미국에 대해서 공작을 해서 미국이 연방제를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연방제는 남조선의 현행 사회제도와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도 변경하지 않으며, 두 정권 위에 최고민족회의를 설치해서 동등한 인원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남북이 각기 1년씩 의장을 맡는 것이다. 이것은 쌍방 모두 유익하다. 여러 분야에서 협력의 폭을 넓히고, 교류를 해서 정치상으로 오해를 제거하고 남북 이산된 가족이 서로 왕래하게 한다.

미군 문제에 관해서, 미국과 남조선이 미 군사기지를 보유하는 것이 서울이 염려되고, 또 소련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연방제에 동의한다면 쿠바의 관타나모와 같이 진해만을 미국에 제공해서 미군을 그곳에 집결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부득이한 상황을 말한 것이다.

만약, 미국이 소련을 견제할 군사기지가 곡 필요하다면, 이런 양보를 해서 우리의 연방제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에 등소평 동지는 나에게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서, 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발표하는 것을 고려해보라고 말한 바 있다. 원래 작년 봄에 그런 성명을 발표할 작정이었는데 남조선 형편의 변화로 그만두었다. 우리는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친선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하며, 중국이 조선·미국 관계개선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지금 남조선 경제가 우리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 문제는 밑에 사람들이 토의할 것이다. 끝으로 말할 것은,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니 동지는 안심하라.』 - "심양(瀋陽)에서 등소평과 김일성의 대담기록". 1981. 4. 18.,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81~83쪽에서 재인용.

『김일성의 미국에 대한 이런 식의 '짝사랑'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71쪽

『김일성과 등소평의 대화를 주의해서 보면, 김일성이 대남전략과 관련해서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도 상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등소평에게 '대미 전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심지어 김일성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쿠바의 관타나모처럼 '통일 후'에 진해항을 미국에게 내줄 용의가 있다는 점까지 밝히고 있다. 김일성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의 정도가 이런 수준이었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84~85쪽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미국이 무서워서 '광주사태'(5.18 민주화운동)에 개입 못 함
미국과 친해지기 위해라서라면 진해항을 미국에게 주겠다고 함.[7]
미국과 친해지게 해달라고 중국에게 구걸 (그러나 등소평은 끝내 이뤄주질 않음)[8]

3.3. 미국 정부 및 CIA 등의 기밀문서 관련[편집]
2017년 1월 18일, 미국 CIA는 관례대로 기밀보존기간이 끝난 과거 기밀문서들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는데 이번 공개된 과거 기밀문서 중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문서도 있었다.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사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미국 CIA의 정보분석 내용으로 밝혀졌다. 기사



저 원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79년 10.26과 12.12사태가 일어났을때는 그게 북한을 놀라게 하는 위기국면이었지만(그래서 미국이 오판해서 한반도 문제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면 군사개입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문제는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며 지금은 그 당시와 전혀 다른 상황으로 북한군의 움직임은 현재(1980년 5월 9일로 표시된 당시) 전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기사

지만원 등 일부 극우는 1979년 당시 위기상황에 미국이 오판해서 한반도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면 이런 조건하에서 북한이 오판해 군사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부분을 가지고 또 거짓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1980년 5월 9일 그 당시 북한군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 뒤 1980년 5.18 전후해서도 북한군의 움직임에 관한 그 어떤 구체적인 언급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핵심적인 대목이 여기도 나온다.

5·18이 끝난 직후인 같은 해 6월 2일에 작성된 미 NIC 문건에는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어떤 행동도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고 있다"고 나와 있다.기사

1980년 5.18 전인 5월 9일 그리고 그 뒤인 6월 2일 미국의 핵심적 문서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5.18일 전후 북한군에 관한 그 어떤 언급자체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주한미군 방첩요원이었던 김용장씨의 언급에 따르면, 사태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미국에서도 군사첩보 위성이 광주를 집중적으로 주시하도록 궤도를 바꾸고 집중감시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이미 군사가 광주를 완벽히 포위하던 상황인데다 첩보위성까지 집중적으로 마크하는 감시망을 뚫을 수 있다면 창작적인 소설에나 가능할거란 소견까지 남겼다.#[9]

이외에도 극우 인사들은 지속적으로 5.18의 북한 개입설에 미국 측 문서를 가져다붙이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최근까지 팩트체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 5월 15일에는 한 극우인사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통해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측 문서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써놓고 있다'는 주장이 퍼져나갔는데, 이 문서는 1980년 5월 31일 당시 이루어진 계엄사령부의 공식발표를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3.4. 시민들의 20사단 지휘차량 탈취[편집]
"시민군이 어떻게 사단 지휘부가 지나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사단 지휘부라면 경비 또한 매우 삼엄했을텐데 시민군이 이를 어떻게 빼앗았는가?"라는 신박한 논리도 존재한다. 이는 5.18의 성격이나 사태의 심각성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다.[10]

당시 20사 전투상보상에서 추산한 시위인원은 10만명이었는데, 10만명이라면 당시 약 70만명이었던 광주 인구로 따지면 1/7 수준이지만, 연령인구로서 20세 이상 60세 미만 인구였던 약 34만명(국가통계포털)을 전체로 잡으면 전체의 약 1/3 정도다.[11] 즉, 도시 청장년 인구의 1/3이 넘는 인원이 19일부터 격분하기 시작해서 광주 전역이 들끓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즘의 "시청 앞", "OO광장" 등등처럼 특정할 수 있는 지역 내에서만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시위가 아니었다.

시위는 18일부터 시작된 무차별 구타 및 발포로 인한 시민들의 사망으로 인해 학생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분위기가 완전히 고조된 상태였고[12], 더군다나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공단으로 진입한 21일 아침의 상황은 바로 전날 밤 11시에 광주역 광장에서 다수 시민들을 향한 발포가 있었던 다음날이었다. 따라서 군 병력을 대하는 태도는 고왔을 리가 없다.

따라서 시민들이 그 지점에서 사단 지휘부의 이동을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조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루트로 들어왔든 조우하여 충돌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마치 평상 시 사단 지휘부가 회식하러 가다가 도중에 시민을 만났는데 갑자기 멱살 잡고 "당신, 왜 우리를 여기서 기다린 거지? 대체 누가 우리 정보를 흘린거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또한, 왜곡된 서술과 유가족 모욕으로 인해 2018년 출판이 금지된 전두환 회고록 1권[13]에서 전두환 본인조차도 21일 오전에 광주 시내로 진입하려다 지휘차량을 탈취 당한 20사단 지휘부 병력은 사단 주력이 아니라 단순한 차량행렬이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지극히 왜곡되고 편파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전두환의 회고록에서마저 20사단 지휘부 병력에 대해서 "단순한 차량행렬이었다"라고 밝힌 것과, 20사단 지휘부가 당시 광주 시내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진입을 시도했던 정황을 살펴보자. 참고로 이때의 20사단은 세계 최강 기계화 전력 보유 타이틀로 유명한 그 20사단이 맞지만, 당시에는 81년 차량화보병, 83년 기계화보병으로 개편되기 이전이라 일반 보병사단이었다. 즉, 왜곡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 최강 정예 기계화 부대의 사령부가 훈련 받은 특수전 병력에 의해 공략당한 상황"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기고도 그렇고, 장갑차도 그렇고, 모든 걸 당시 당사자 시점이 아닌 현재 본인들이 아는 기준에만 맞춰서 상상하고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퉁쳐버리는 기적의 타임워프물을 보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전두환 회고록 1권은 20사단 병력의 증파원인에 대한 사실관계가 왜곡돼있다. 전두환은 해당 저서에서 "군 사망자 발생과 MBC 방화를 보고 받고, 질서 유지를 위해 20일 밤 10시 경에 20사단을 파견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시위대 버스 돌진으로 인한 함평경찰서 사망자(4명)는 20일 밤 9시 20분 경이며, MBC 방화는 9시 40분 경이었고[14], 트럭 전복에 의한 계엄군 사망자 발생(3명)은 20일 밤 10시경이었다. 반면, 전두환의 회고록 서술과는 달리 20사단의 전투상보 상에는 1개 연대 병력 투입 지시를 접수한 시각이 20일 밤 8시, 곧이어 1개 사단 병력 투입 지시를 접수한 시각이 20일 밤 8시 30분으로 기록돼있다.#


3.5. 시민들의 장갑차 및 군용차량 운용[편집]
"일반 시민들은 군용 장갑차를 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장갑차를 몰았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

주로 "장갑차가 트럭이랑 같아? 그걸 일반인들도 몰 수 있다니 가당키나 한가?" 같은 논조로 주장되는 내용이다. #, # 하지만 이런 발언들은 대한민국 예비역들을 한참 무시한 발언일 뿐더러, 장갑차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 잡혀있는 소리다.


실제로는 일반인들도 군용 장갑차를 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80년대 당시 광주에 있는 방위산업시설은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가 유일했는데 [15] 1976년 기아자동차에게 인수된 이후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당시 KM900 장륜식 장갑차 및 여러 군용차량을 생산하였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작사 피아트에서 설계한 것으로, 궤도식 장갑차와 달리 일반인들의 운용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추가설명은 KM900 문서 참조) 광주 시민들은 이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차량과 장갑차를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전국 남성들은 의무군복무를 했으며, 당시 시민군들은 대부분 국방의 의무를 다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군 복무중 장갑차 운전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수두룩 했고, 이들은 차륜형이든 궤도형이든 충분히 몰 수 있었다. 더구나 이때는 국군의 월남파병으로부터 10년도 안지난 시점이다.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사회에 수두룩했고, 전라도 최대도시인 광주에도 없을 확률은 0%이다.거기다 당시 광주 서구에는 대한민국에서 최고규모를 자랑하는 기갑 훈련소인 상무대가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기갑교육시설이 있는 도시에 과연 장갑차 하나 몰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없었을까?

군용트럭이나 지프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당시 아시아자동차가 생산을 맡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셈. 군대 가서, 장갑차나 군용트럭이나 지프를 몰 줄 아는 사람이 과연 없었을까? 전술한대로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사회에 수두룩했던 그 시기였다.

실제 군대에서 전차/장갑차 승무 특기 교육생을 선별할때도 운전면허증 유무는 고려하지 않는다. 면허증 없어도 클러치 없이 단순히 조향, 가속페달, 제동페달, 중립-저속-고속 기어만으로 굴러가는 구형 장비들은 쉽게 배울 수있다.


궤도식 장갑차차륜형 장갑차의 구동은 전혀 다른 시스템이다.

가끔 전차 조종수 출신들이 나서서 "장갑차 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일반 차량 운전이랑 완전히 달라. 몰아는 봤냐?"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가장 오해(혹은 호도)하고 있는 점은, 1) 장갑차라고 하는 것은 넓고도 모호한 개념으로, 일반인들이 전차와도 곧잘 헷갈리는 궤도형 장갑차만을 장갑차라고 하지는 않는 점[16], 2) 일반 차량과 같은 차륜시스템을 적용한 장갑차의 운전은 스틱이나 조향핸들로 하는 궤도형 장갑차의 조종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17]이다. 즉, 본인들도 차륜형 경장갑차 운행은 해보지도 않고 "장갑차 몰아는 봤냐?"라고 주장하는 셈.[18]

대한민국 국군의 대다수는 육군이고, 그 육군 병력의 대다수는 전방에 배치돼 있으며, 그 전방에 배치된 대부분의 장갑차가 험지개척에 용이하도록 궤도가 장착된 K-21임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똑같이 궤도 달린 전차나 자주포 조종수 출신들도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장갑차라는 이름이 뭔가 특별해서, 혹은 생긴 게 일반 차량과는 달라보여서 차륜형 장갑차의 컨트롤이 궤도형 장갑차와 다르다는 것을 실감을 하기 힘들다면, 차륜형 장갑차에 대한 아래의 자료들을 한번 살펴보자.


KM900의 오리지널 모델인 피아트 6614의 조종석 내부와 여러 개조형 (내부는 동일) : 조선닷컴의 유용원의 군사세계
승용차만 운전 해본 중앙일보 기자의 K806 시승기
국방일보에 소개된 K808 시승기
국방TV의 K806/808 홍보영상 : 조종석 내부는 5초쯤
여기에서도 'K806/808 차륜형 장갑차' 문단 내용 중에 조종석 내부를 볼 수 있다. R N D 1 2 3 소오름[19][20]
"생긴 건 비슷해도 운전은 다를 것이다?" : 6륜 차륜형 장갑차인 파트리아 사의 파시장갑차의 운전영상[21]
방산청 네이버 블로그의 차륜형 장갑차 홍보포스트 : #
UR-416 차륜형 장갑차는 실제로 트럭 차대에 그냥 장갑을 씌운 거다.[22] ㄹㅇ 장갑차
JTBC 팩트체크, 양욱 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의 인터뷰 : "(3:05부터) KM-900이라는 장갑차는 일반 트럭이라든가 일반 차량을 장갑차화 한 거라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운전 조작 방식이 일반 차량과 비슷합니다. 대형차량을 몰아본 사람이라면은~~ 충분히 누구나 몰 수 있습니다." 말투에서부터 매우 답답해하는 심경이 묻어나온다.
심지어 일베에도 올라온 무기고 습격과 장갑차 운전의 비전문성 일베용어주의 팩트일베 기대하고 일베 가려고 두 차례나 올렸지만 일베유저들은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KM900의 원래 모델인 피아트 6614의 조종석 【접기/펼치기】
해외파병부대에서 운용하는 바라쿠다의 운전석 【접기/펼치기】


또다른 차륜형 장갑차인 판두르 장갑차의 조종석 : #

(...) 이래도 차륜형 장갑차의 구동이 일반 차량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보이는가?

비유하자면 K-9 자주포 조종수였던 사람이 "105mm 자주포가 민간인 손에 탈취당했다"는 얘기에 "자주포를 어떻게 일반인이 탈취하느냐, 택도 없는 소리, 그건 분명 훈련된 특수부대 공작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얘기와 같다.아반떼 운전자가 어떻게 싼타페를 몰아, 그건 싼타페 운전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싼타페 운전수가 틀림없다.

참고로 궤도차량이지만 일반차량처럼 운전하는 K532 차량의 경우에도 조종수가 아니라 운전병이 운전하는 차량이다. K532 소개 (운전석을 살펴보자)


시야가 제한적인 작은 관측창 만으로 운전을 해야하므로 숙련이 필요하다?

제대로 활용을 하려면 당연히 숙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애초에 관측창은 해치를 닫지 않는 이상 볼 이유도 없고. KM900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운전석 전면의 관측창 높이가 높지 않기 때문에 머리를 빼꼼히 내놓은 상태에서 운전할 수 있고, 교전상황이 아니라면 실제 그렇게 운용한다. 애초에 대부분의 군용차량(심지어 탱크까지(!))은 비전투상황에서는 관측창을 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저러면 보병과의 연계 작전에서 사고위험이 대폭 증가하기 때문에.



만약 장갑차를 운용한 시민군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특수전 병력이었다면 탈취한 장갑차를 이런 식으로 타고 몰진 않았을 것이다.7.62미리 탄환을 막으면서 기관총 엄호사격까지 해가며 10명이나 되는 무장병력을 일반차량에 준하는 속력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저 귀한 APC를 저렇게 그냥 1톤 트럭 타듯이 탄다는 것은.. 즉,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는 것.
3.6. 시민들의 전차 운용 및 개발[편집]
시민들이 장갑차를 운용했다는 주장에서 더욱 악질적이고 판타지스러운 얘기로 변질된 주장이다.

시작하기 앞서 일러두자면 이 설을 최초로 주장한 이들은 다름아닌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로, 종북주의자들이다.[23]

대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북한이 시민군에게 전차를 수십대 공여해줬는데, 공여된 전차의 대부분은 T-72였으며, T-80T-90은 소량을 지원해줬으며, 공여된 전차들은 모두 시민군에 의해 운용되었고, 대부분이 시민군에 의해 자폭 처리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시민군이 독자적으로 전차를 설계했는데, 이 전차의 프로토타입이 매우 뛰어나서 이 프로토타입과 설계도를 이후 입수한 계엄군이 이 설계도를 약간 손봐서 서방식 전차처럼 수정해서 전차를 생산했고, 그 전차가 바로 K-2 전차라는 것. 이후 이 설계도는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에게 팔았는데, 중국은 이 설계도를 99식 전차를 개발했는데 참고했으며, 러시아는 아르마타를 개발했는데 참고했다고 한다.

밀리터리에 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이 주장을 뜯어 보면 완전한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T-90은 5.18이 일어난 한참 뒤에 개발된 물건이며, 북한은 T-72와 T-80을 전혀 보유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도 보유 못한 물건들을 어떻게 북한이 시민군에게 공여해줬고, 도대체 북한이 어떤 능력으로 사방이 봉쇄된 도시에 전차 같은 중장비를 수십대씩 보내줄수 있겠는가?[24] 한반도에 T-80이 처음 들어온 것도 90년대 한소수교로 인한 1차 불곰사업 때이다. 그리고 시민군이 전차를 설계했다고 하는데, 전차는 그렇게 쉽게 설계하고 프로토타입을 한달도 안되는 기간만에 뚝딱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25] 인도의 아준 전차가 괜히 악명을 떨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K-2 전차는 K-1 전차의 후계 기종이기에 K-1의 설계를 바탕으로 설계가 되었으며, 아르마타는 T-95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현대 전차와의 설계 사상과 운용 사상부터가 판이하게 다른데, 뭐하러 구세대 전차의 설계를 참고하겠는가?

사족으로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시민군이 전투기와 헬기를 운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오히려 이런 장비를 갖고도 허무하게 무너진 시민군의 전술 운영은 매우 문제가 많았고 무능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된다. 결국 시민군들께도 결례인 주장이다. 참고로 당시 광주공항에 있던 기종들은 퇴역기종들로, 그 엔진들은 지금 활주로에서 눈녹이고 있다. SE-88 참조.

3.7. 북한제 무기 발견[편집]
북한군의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실제 그 증거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장. 주로 AK소총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당시의 국시는 반공이었다. 광주민주화 운동 또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하에 계엄군이 진군한 것이다. 근데 AK소총이 실제로 다수 발견되었다면 분명 전두환 정권이 이를 증거삼아 자신이 저지를 행위를 옹호했을 것이다.[26] 그러나 인터넷을 아무리 뒤저도 실제로 AK소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나 정확한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애초에 북한제 무기를 가져와 대량운용 했다면, 탄약체계[27]부터 모든 게 호환되지 않는 무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28] 한마디로 증거자료에 동구권 무기에 대해 언급이 돼야 하지만, 그런 것조차 없다.



한때 5.18에 관련된 박물관에서 북한제 총이 나왔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무기의 정체는 PPSh-41... AK 소총도 아니고 2차대전 당시 쓰던 총기다. AK-47이 베트남전에서 쓰인지 10년이 더 넘은 시점에서 북한이 뭣하러 파파샤를 줄까? 그것도 일반군이 아닌 특수부대라는 사람들에게. 하지만 폭동설 지지자들은 PPSH-41이 시가전에서 굉장히 뛰어나며, 내구도도 오히려 높았기에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29]

그런데 반론이 나왔다. 위 사진의 확성기를 자세히 보면 Q마크가 있는데, Q마크는 82년도부터 나왔다. 게다가 유물 전시회도 아닌 그냥 시민군 체험 행사. 그냥 촬영용 소품을 가져다 전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장전손잡이도 없는데다, 방아쇠울이 제대로 구현되어있지 않고, 무엇보다 안전장치가 없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총기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장치도 없는 실총을 유리막과 같은 어떠한 보호 장치도 갖추지 않은 채 저런 식으로 전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행사 주최측에서 소품 고증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소품을 가져온 심각한 실수에 가깝다.

3.8. 당시 무기고 습격과 탈취의 전문성 여부[편집]
이런 주장을 하는 인물의 대표로는 파워블로거대사가 있다. 당시 시민들의 무기고 습격 전개를 보면 최소 1천명 이상의 인원을 조직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와 목적지를 정해서 동시 습격을 지시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무기고 습격에는 이런 전문성은 전혀 필요없다. 직장 예비군 무기고의 추억 (답글 내용 유)

이와 관련해서는 심지어 일베 내부에서조차 이런 글이 올라온 적 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겠지 (일베용어주의) 광주 민주화운동이 여전히 폭동이라고 생각하는 일베유저마저 지적한 무기고 습격 및 장갑차 탈취의 비전문성[30]

1990년대 초에 예비군 무기 이관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전국의 경찰서나 파출소, 출장소에 무기를 보관했다. # 당시 무기고는 보안이 허술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에 따른 범죄가 여럿 일어났다.[31]

카아빈 3정 모두 예비군서 훔쳐

한편 문과 이가 3년동안 범행에 사용한 총은 카아빈 3정으로 이총들은 이들이 자살한 후 현장에서 각각 발견됐다. 이들 총은 모두 72년 9월 4일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 6시사이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모 예비군 분산 무기고에서 도난당했던 총으로 확인됐다.[32]

경찰에 따르면 도난당일밤 무기고를 지키던 야간근무자 4명은 무기고에 자물쇠를 잠가놓은 채 근무지를 이탈, 마을로 내려가 있었다는 것인데 경찰은 그동안 수사결과 총기의 행방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74.07.29#

예비군 교육중 카빈 도난
김씨 총기 수사서 드러나

이정수씨 피납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된 김지홍 씨가 숨겨둔 카빈 총의 출처 수사에서 서울 성동구 신사동 예비군 중대에서 카빈총 1정을 잃어버린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예비군의 무기관리가 소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동아일보 1972.10.10#

청년구속 예비군무기소서 총 훔쳐

[대전] 1일 보령경찰서는 예비군 무기소에서 총을 훔친 서울 서대문구 연희1동 108 김영국씨(20)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달 29일밤 본적지인 보령군 웅천면 독산리 예비군무기고의 문을 부수고 카빈1정과 실탄60발을 훔쳐 달아난 혐의다. 충남도경은 현지무기고 관리책임자를 문책할 방침이다.
동아일보 1971.12.02#

영등포 공포 3시간
카빈 든 10대 둘 다방서 난동
경관 두명 사살
백여발 난사
네명 중경상
예비군무기고 총 훔쳐 심야인질 손님이 검거

17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4가 2 제일나사 2층 대호다실(주인 박동근, 사이)에서 강원도 영월서 상경한 박모(17) 김모(16)군 등 2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쳐 갖고 온 카빈총을 난사, 손님과 종업원등 팔 명을 인질로 삼고 영등포 경찰서 중앙 파출소 정윤종 순경과 행인 김봉주 씨 등 2명을 쏴죽이고 행인 한병호 씨 등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동아일보 1971.08.18 #

또 카빈 5정 도난
예비군 무기고 실탄 9백발도
직장예비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소총과 훈련용 실탄이 관리소홀로 대량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9일 경찰에 따르면 전남 여수시 충무동 한전 여수 지점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카빈소총 5정과 훈련용 카빈 소총 실탄 9백발이 지난 4일 상오 9시부터 7일 사이에 도난당했다는 것.

이 같은 총기류 도난 사고는 지난 7일 하오 3시 한전 여수 지점 경비원이 순찰근무중 무기고 출입문을 잠가놓은 철제 빗장이 파손돼 있는 것을 발견, 무기고 내부를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
경향신문 1982.03.09 #

허술한 예비군 무기고
두 중학생 소총 3자루 훔쳐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 3자루를 훔쳐낸 중학생 2명이 경찰에 붙잡혀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같은 마을 친구인 대구시 D 중 3년 조모군(15)과 경북달성군 D중 3년 이모군(15)등 2명은 지난 1월 22일 밤 9시경 달성군 옥포면 모 예비군 무기고에서 담을 넘어 환기창을 뜯어내고 침입, 이무기고에 있던 M1소총 1자루와 카빔[33]1자루를 훔쳐내 무기고에서 1백m가량 떨어진 비닐하우스에 숨겨두었다가 다음날 3km정도 떨어진 야산바위틈에 묻었었다는 것.

또 이 들은 1월 25일밤 9시 경 같은 방법으로 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1자루를 다시 훔쳐냈다.
동아일보 1982.03.05 #

보면 알겠지만 무기소 습격의 전문성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여러 시민들이 무기고의 위치를 인지한 상태이며 그 무기고 습격에는 어떠한 전문성도 요구되지 않지만 미리 조직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3.9. 북한의 5.18 기념[편집]
북한이 5.18을 기념하기때문에 북한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라는 주장. 이런 논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케네스 배 선교사가 북에 억류되었을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이 사람을 석방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므로, 케네스 배는 우리 정부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4.19와 6월 항쟁도 기념한다.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2010년 4월 20일 동향(4.19 혁명)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2007년 6월 11일(6월항쟁) [34] 에 들어가면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북한은 4.19 혁명, 6월 항쟁, 부마항쟁, 미선이 효순이 사건도 자기들 입맛에 맞춰 왜곡해가며 기념한다. 이것은 단지 위의 사건들을 반정부 투쟁으로 내부 선전하기 위해 써먹는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2.28 사건을 기념한 것과 일맥 상통한 것.

5.18을 왜곡하는 우익 세력들 중 4.19 혁명도 북한 간첩이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세력들도 존재하긴 한다. # 그런데 저 말은 곧 나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35]

3.9.1. 5.18 남파간첩 위령비[편집]
북한에서 위령비가 나왔다. 남파간첩에 대한 위령비라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위에서 언급했듯 북한 고위간부 출신의 탈북자들이 줄줄이 광주에 군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언급한 것이 유머.[36] 이 사실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저 위령비가 실제 광주에 남파된 간첩을 위한 위령비라는 증거 자체가 없다. 단순히 5.18 사건 발생 후로 한달 뒤에 만들어진 비석이란 이유로 이것이 북한 개입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은 억지와 추측에 불과한 주장일 뿐이다.

저 위령비에 쓰여진 대로면 사상자가 150여명이다. 광주에서 시신 100여구가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이것이 더 사실처럼 들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당시 계엄군의 사상자는 20여명. 그러면 나머지 130여명은?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은 위의 4,19 혁명과 6월 항쟁의 그것과 같은 내부 선전용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장에 의하면 사진에 광주에 파견된 간첩들이라고 나온다는데 사진에서는 전혀 광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도 없고 이러한 위령비는 북한 도처에 산재한다고 한다.

3.9.2. 북한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편집]
1985년 조선로동당 출판사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 라는 책에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세한 정보가 담겨있고, 이것이 북한 개입의 증거라는 주장.

구체적으로 광주의 분노라는 책을 보면, 사망자들의 명단과 정보(직업, 나이 등)가 담겨있고, 어느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이 주장은 그럴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북한이 당시 남한에 널려있던 흔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짜깁기해 만든 선동용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사망자들의 명단은 사건이 끝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사들에 의해 공개되었다.

광주사태 사망자 명단-1980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또한 무기고를 탈취한 것도, 당시 언론사들에 의해 어느 무기고를 탈취했는지와 당시 정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광주 데모사태 닷새째-198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당시 언론과 출판은 계엄공고 제 2호에 의해 검열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계엄공고 제 2호-1979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 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선전하던 당시에는 언론사들을 앞세워 당시 상황을 낱낱이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언론사들의 사건 보도를 허용하고, 보도자료를 자신들이 날조한 '시나리오' 에 버무려 선전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도 상세히 보도된 자료들을 북한이 못 구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무함마드 깐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한에 침투한 간첩들의 간단한 업무가 남한의 신문자료 전송이다. 북한 특수부대 수백명이 계엄령이 발령된 남한의 방어선을 뚫고 침투해 광주에 들어갔다가 다시 계엄군을 따돌리고 북한으로 복귀할 확률과, 남한의 신문 한 장을 구할 확률 중 어느것이 더 높은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3.10. 시민군측 카빈소총 사상자[편집]
카빈에 대한 노컷뉴스 기사

시민군이 쏘던 카빈소총에 의한 사살이 시민군측에서도 나왔으니, 이것은 북한군이 쏜 것이 아니냐는 주장. 카빈소총을 북한제의 카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계엄군은 광주의 7개 주요 통로를 봉쇄했는데 그 중 하나가 광주교도소였다.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옆에 붙어있는 교통요충지이다.[37] 계엄군이 봉쇄한 7개 도로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7명이 사망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카빈소총과 계엄군이 사용하던 M16소총 중 어느 총에 맞았느냐에 대한 분류는 육안으로 판명해야 했었다고 당시 관계자가 밝혔다고 한다. 이 부문은 위키백과에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또한 1996년 부검 전문가 황적준 교수가 검찰 사체 검안서를 검토한 월간지 기사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보길 바란다. 완전 공개 검찰 작성 5·18사망자 165명 부검 자료[38] 몇몇 희생자는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했음에도 검시 보고서에 카빈으로 인한 총상이라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밖의 사체검시에 대해서도 여러 의혹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5.18 당시 사체검시를 했던 전남대병원 의사 문OO 씨는 1995년 6월 21일 검찰 진술에서 "당시 사인 판단에 있어 계엄당국이나 기타 외부로부터의 주문이나 소위 압력 같은 것은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당시 군의관이나 검찰, 경찰관이 입회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사인 판정을 할 만한 의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라 전적으로 저희 의사들이 사인을 판정하였으며, 판정 기준은 검시조서에 나와 있는 대로 총상, 자상, 타박상, 차량사, 미상으로 대별하고, 다시 총상의 경우에는 M16, 카빈과 함께 M16인지 카빈에 의한 사망인지 확정할 수 없는 애매한 사체에 대해서는 기타로 판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상의 경우 판단 기준은 저희가 검시현장에서 사체를 살펴보며 사입구와 사출구를 확인하고 그 크기를 재었는데,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가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사출구의 크기가 큰 경우와 사입구만 확인되고 사출구는 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 또는 사체 상태가 불량하여 사입구와 사출구가 명확하게 식별이 되지 아니하나 손상 부위가 상당히 큰 사체는 M16에 의한 사체로 판단하였고, 그렇지 아니한 사체들은 카빈으로 구분을 하였으며, 그러한 기준에 의하더라도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는 기타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일체 그러한 압력이나 주문은 없었습니다."라고 답변을 한 바 있다.

사체검시에 참여했던 윤OO 전남대 의대 교수도 같은 질문에 대해 1995년 6월 15일 전화통화 진술에서 "당시가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군의관이 입회를 하였지만 단순히 참여만을 하였고 사진촬영은 경찰관이 하였으나 사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담당의사가 하였습니다."라며, 문OO 씨의 진술과 일치하는 답변을 하였다. 또한 1985년 5월에 안전기획부에서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는 총상 사망자들의 경우 사망원인을 M16 총상, 카빈 총상, 기타 총상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사체검시를 했던 의사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직접 사체검시를 한 문OO 씨 및 윤OO 씨의 주장과 황적준 교수의 주장 중에서 정면으로 대치되는 부분[39]이 있으므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는 결국 위키러의 몫이라 하겠다. 다만 95년도는 이미 문민정부 시기였고, 당시 사체검시를 했던 전남대병원 의사들이 신군부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일관된 진술을 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국방부는 검시 결과에 따라 1985년 7월 광주사태의 실상이라는 제하의 자료에서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 128명 중 군이 보유한 M16에 의한 총상 사망자는 29명(안기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는 36명)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1988년 2월 소준열 장군은 민족화해위원회에서 그 숫자를 45명이라고 증언하였고 1988년 7월 당시 오자복 국방장관은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M16 총상 사망자가 98명이라고 번복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M16 총상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사체검시 당시 사망원인을 기타 총상으로 분류한 경우가 다수였으며, 따라서 어떤 총에 맞았는지 부정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M16에 의한 사망자 수가 심하게 변동하는 것은 외부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3.11. "5.18 광수" 특수부대 안면분석[편집]
지만원의 사이트에서 생산되는 소스인데, 당시 광주를 촬영한 사진들에 등장하는 시민군의 얼굴들을 분석(?)해 보니 북한 군부의 유명인사 및 실세들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다. # 즉 이들이 광주로 유유히 들어와서 봉기에 성공한 후 유유히 북으로 돌아가 그 공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식의 논리. 여기서 "광수" 는 북한 특수부대의 이명으로 보인다.

더 말할 것도 없이 SBS "마부작침" 팀에서 각잡고 달려들어서 처절하게 깠다. 전문 분석기관에 의뢰한 뒤 실제 당사자를 찾아서 인증하고, 그들의 등본까지 떼어다가 확인사살했다. 그와 동시에 시리즈물로 왜곡의 현실왜곡의 메커니즘, 왜곡의 원인까지 전부 다루기도 했으니 한번 읽어보자.

3.12. 탈북자의 증언?[편집]
사실상 위의 반론들이 격파된 이후 우익들이 꺼내든 마지노선이 바로 탈북자 임천용씨를 비롯한 몇몇의 증언에 따른 주장들이다.

북한의 고위층이 포함된 탈북자들의 증언이니 100%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허점 투성이며 사실이라 보기에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애초에 이들의 주장은 매번 달라져 일관성이 하나도 없다.
한국논단 인터뷰
2006년 기자회견
뉴스한국 인터뷰

세 번의 주장 모두 침투경로와 다시 돌아간 경로, 그리고 투입된 병력 수도 다르다. 결국 신뢰성이 없는 자료인 것이다. 게다가 투입된 병력들도 가장 적게 잡은게 400명 이상. 1개 대대에 준하는 수준이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40]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20~30명의 규모도 주민들의 신고로 발각되는 현실에 어떻게 400명씩이나 내려올 수 있었을까. 대한해협 해전에서 전멸한 북한군의 수가 대략 600명이다. 다 더해도 10척이 안 되는 전투함,소해정,상륙정이 해군력의 전부이던 시절에도 후방으로 쳐들어오려던 부대를 잡아냈는데 30년 후의 군대가 400명을 못 잡아낼까? 애초에 이만한 수의 무장간첩들이 내려올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들이 대한민국의 가장 아래지역인 전라도, 광주까지 와서 봉기를 일으킬때 까지 몰랐다는 건 이 설을 지지하는 몇몇 우익세력들이 옹호하는 신군부의 무능만 증명하는 꼴이 된다. 애초에 "400명씩이나 되는 정규군 특수부대원들이 내려왔는데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는건 군인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이자 최대의 직무유기다". 만약 이들이 광주로 가지 않고 청와대로 가 정부가 마비되었다면, 이건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의 책임이 막중하다.

만약 정말로 400명 이상의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면 이건 이미 침투가 아니라 상륙작전 수준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가지고 작정하고 월남하여 제 2의 한국전쟁을 계획하려 한 게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한 인원수다.[41]

또한 이 무장간첩설이라는게 신군부의 당시 주장으로서 제시되는 79년 말 거제도 지역의 간첩사건과 일본 정보부의 첩보에 의한 80년대 남침 음모설과 짬뽕되었던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도 침투 관련 자료는 단 3명이었다.

또한 탈북자의 증언이 화제거리가 되자 다른 탈북군인 협회에선 이 주장이 현실성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 역시 북한개입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 여기서 언급했듯이 이런 식으로 일부 탈북자들이 고의로, 혹은 다른 세력에게 악용당해서 이런 왜곡을 행하는 사례가 5.18 외에도 여럿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이탈주민 문서의 '일부 탈북자들이 일으키는 사회문제' 소항목을 참고할 것.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 특수부대들이 서로가 공수부대와 시민군으로 분장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실제 해외 언론에 보도된 잔학행위는 모두 이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다. 그리고 이런 잔학행위를 찍어서 실시간으로 북한에 생중계해 북한 사람들도 그 상황을 알았다는 이야기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북한에서 심도있게 보도한 건 사실이고 광주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서 묘사된 광주는 다분히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평양에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42]
3.13. 윤기권 월북사건을 보면 북한의 개입 내지는 종북세력의 준동을 짐작할 수 있다?[편집]
윤기권은 현재 5.18 유족들에게도 흑역사로 간주된다. 어차피 핵심 요원도 아니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게 중론. 사실 윤기권은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정확한 증거도 있다.[43] 고등학생도 북한 간첩이 보낸거라고 우기기엔 좀 그렇다. 애초에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다.[44]

3.14. 5.18 신원미상 사망자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이다?[편집]
당시 신원확인 작업은 육안 식별이 대부분이었다. 전 국민의 주민등록 상 지문등록과 증명사진 전산등록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파출소나 동사무소에 비치된 장부를 경찰관, 공무원이 시신과 일일히 확인하는 식으로 신원 확인이 이루어졌다.

DNA분석도 도입되지 않아서, 5.18이 진압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에도 경찰의 DNA수집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현장에서 지문이나 정액, 혈액같은 단서를 수집하는 했으나 이것이 변질되어 분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분석조차 못하고 있다가 30년이 지나고 공소시효가 다 끝나서야 범인이 밝혀졌다.

그렇다보니 총에 머리를 맞거나 부패로 인해서[45] 훼손이 심한 시신. 아예 생전에 주민등록이 되지 않았던[46] 시신은 육안으로 이루어지는 신원확인 작업에서 경찰이 확보한 관내 거주민 증명사진철과의 대조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렇게 신원미상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항쟁 후 진상 규명 과정에서 실종자로 분류된 인원중 신원이 존재할 것이며 실제로도 광주시는 2001년부터 신원미상으로 분류된 시신들을 DNA 대조작업을 거쳐 유가족에게 인계 하고 있다.

또한 신원미상 시체 중에는 영유아 시체도 발견되었다. 고로 북한군 시체라는 증거는 신빙성이 없다. 애초에 전쟁 중이라도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나 영유아를 쏘았다는 것 자체가 전쟁범죄 행위다. 참조

4.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편집]
자세한 내용은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2013년 5월 15일 보도되어 물의를 빚은 보도사건에서 주장된 내용에 대하여서는 5.18 민주화운동/왜곡/채널A, 5.18 민주화운동/왜곡/TV조선 참조.

5. 자유한국당의 북한군 개입설 주장[편집]
지만원의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자유한국당에게 먹혔는지, 2019년 2월 8일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서 "북한군 개입 여부를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
이종명/자유한국당 의원: 첨단과학화된 장비로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것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그런 역할들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순례/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역사적인 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여러분들의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을렀습니다.
김진태/자유한국당 의원: 제가 제일 존경하는 지만원 박사님, 5·18 문제에서만큼은 우리 우파가 결코 물러서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18 왜곡 문서에서 언급되었듯이, 한국의 극우 세력들은 정적인 더민주를 비롯한 좌파 세력들이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해 북한군 개입설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다면 TK 같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나 태극기 부대 같은 극우 세력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당이며 주요 정당은 자유한국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선 중도를 포용해야 하는데, 이런 극우적인 발언은 중도를 멀어지게 할 뿐이며, 결국 후신인 미래통합당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47] 그리고 2020년 5월에야 이 망언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였다.


[1] 인터넷상에 5.18북한군개입설을 조직적으로 유포한 최초의 인물이다.[2] 사실, 일부 중장년층은 지금도 5·18이 폭동이라는 인식에서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당시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었다는 것만 기억하지 그 이후의 진실 규명 과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정치적 편향이 심하여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정보를 그냥 거부하는 경우 등이 있다.[3] ....또다시 그들은 우리의 최근 국내 정세를 이른바 OO 적화의 호기로 판단하고, 제 2의 4.19로 유도하기 위해, 간첩과 무장공비를 대량 침투시켜, 혼란을 가중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대학총학장들을 대상으로 한 북괴 및 국내정세(시나리오)[4] 1970년 말 한국에서는 북한의 대남 도발에서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 특히 굵직한 안보 사건들이 있었던데다가 냉전이 심화되며 반공교육을 강화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군이 권력을 잡은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삼엄한 통제를 하면서 겉보기 치안은 매우 안정된 상황이었다.[5] 등소평사상연보, pp.188~189,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p.81.에서 재인용.[6] 더 이상 전두환에게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 당시 재판에서 전직 예우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적인 자리에서도 손석희처럼 그냥 "전두환 씨" 정도로 부르는 게 옳다.[7] NLPDR 주사파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미제를 몰아내자는 북한의 선전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믿었지만, 정작 북한은 과거부터 일관되게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다. 미국으로부터의 체제보장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계속 유지되고 있는 북한 외교의 제1목표이다.[8] 이건 국제 정세의 영향이 크다. 냉전 시대에 미국은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북한에 대해선 봉쇄정책으로 일관했다. 등소평 이하 중국공산당 정권이 어찌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중국이 북-미 관계에 중재자로 나설려면 또한 북한도 중국이 대한민국과 대화에 나서는걸 용인해야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김일성이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그리고 1989년 냉전 종식으로 북-미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을 때에 마침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미국 및 서방권 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북미관계를 중재할만한 상황이 못되었다. 그 뒤로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한은 중국을 배제하고 직접 미국과 협상에 나선다.[9] 인터뷰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앵커 손석희는 김용장을 향해 줄곧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향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에 대해) "물론 그것이 어떤 근거자료가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고 거기서 사살명령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것은 김용장 선생님의 추측이시지요?" 내지는 "일단은 이 시간에는 김용장 씨의 주장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유보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럴 때마다 김용장은 너무도 자신있게 "아닙니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고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받은 정보를 보고를 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앞으로 어떤 얘기를 해도 제가 개인적인 추측이나 제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보고했던 내용만을 제가 얘기를 합니다."라며 단호하게 말을 끊는 것이 포인트. 전두환이 헬기로 광주에 왔었는가에 대해서도 처음 나온 주장인 이상 검증은 필요할 것이고 아직 관련 자료가 조금 부족하지 않겠느냐고 난색을 표하는 손석희에 대해 김용장은 "어떤 헬기가 어디서 출발, 혹은 어디에 도착을 하면 무조건 그곳에서는 비행계획서(Flight Plan)라고 해서 기록을 남기게 되어 있고 그걸 따져보면 전두환이 광주에 왔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호언하기도 한다. 또한 김용장은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된 시신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며, 계엄군들이 애초에 시신들을 전부 한데 모아 소각해버렸기에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도 전했다.#[10] 이는 공교롭게도 시위진압 초기에 광주로 진입했던 20사단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는데, 시스템 클럽에 공개돼있는 20사단 62연대 2중대장 최종원 대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대대인사장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좌우로 서 있기에 환영인파인줄 알고(!) 답례로 손을 흔드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광천동이 바로 일부 넷우익 성향의 유튜버들이 '광주 톨게이트'로 착각하고 있는 예전 광주공단 입구, 즉 현재 유스퀘어 쪽이다.[11] 참고로 이 중에서 20-30세 인구가 약 23만, 20-40세 인구가 약 30만이다.그 와중에 베이비붐으로 앞길이 창창했던 과거의 대한민국의 희망찬 모습[12] 19일 이를 보다못한 시내 기관장들과 지역 유지들이 시위진압을 완화해달라, 그게 안 되면 공수부대원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으니 공수부대원들이라도 철수시키고 일반 군인으로 바꿔달라는 식으로 계엄사에 건의를 했으나 오히려 1시간 30분 뒤 실탄 사격이 가해져 당시 조대부고 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이 부상을 입었다.[13] 이 회고록은 2018년 출판 및 배포금지가 된 그 회고록이 맞다.[14] 최근에 MBC 방화 등을 유도했던 편의대의 실체가 알려졌다.광주매일신문 한국경제 부산MBC 전두환이 말한 훈련받은 특수공작원의 실체가 사실은 이거였나..[15] 현재도 동일함[16] 해외파병부대에서 운용하는 바라쿠다 장갑차, 경찰 특공대에서 운용하는 구형신형 장갑차도 전술적 용도가 다를 뿐 엄연히 장갑차임을 떠올려보자. KM900 퇴역 후 도입된 K806/808 장갑차도 마찬가지. 게다가 전술용도로 구분하자면 K-21 장갑차 같은 IFV와, KM900 같은 APC는 같은 장갑차라도 스펙이나 용도가 완전히 다르다.[17] 참고로 궤도형인 K-21 장갑차의 조종석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18]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일반적으로 차량이 스티어링휠을 사용하는 경우 병과는 수송(=운전병=비전투병과)으로, 후반기 훈련은 야수교(현재는 군수교 예하)로 가게 된다. 반대로 차량이 조종간을 사용하는 경우 병과는 기갑(=조종수=전투병과)으로, 후반기 훈련은 기계교(혹은 자주포의 경우 포병병과로서 포병학교)로 가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이 경우도 부조종석은 스틱이다.[19] 참고로 KM900은 중형면허, K806/808은 대형면허로 분류된다.[20] 6자리 특기번호로 세분화되기 전 2812 중형차량운전병 직무개요를 보면 "소형/중형차량 운전면허로 운전할 수 있는 차량, 5/4톤 및 21/2톤 전차종(유조차 제외), 16인승이하 승합차(13인승이상 구급차량 제외), 적재중량 11.5톤미만 상용화물차, 경장갑차(궤도차량 제외), K-532차량, 105㎜포견인차량(특수면허취득자)을 운전하며 인원 및 화물을 수송하는 업무수행"이라고 분명히 소개되어 있다. 이래도 KM900을 전차조종수만 몰 수 있는가?[21] (45초부터) "사람들은 APC 운전이 엄청 어려울 꺼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제론 정말 쉽습니다. 자가용 운전하는 거랑 같죠. 차륜형이잖아! 하지만 다른 점은 좀 크다는 점? 그리고 할인마트에 끌고 가면 주차장 찾기 좀 빡셀 꺼라는 점?" 실제로 차량 무게가 현격하게 다르므로 가속이나 브레이크 조작감 등은 물론 다르다.[22] 실은 원래 이걸 도입하려고 했지만 당시 서독이 분쟁국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밀수 형식으로 몰래 들여와서 쓰다가, 아세아자동차에서 이탈리아 피아트 사의 CM6614를 면허생산하는 식으로 마무리 된다.[23] 종북들은 종종 이 설을 신봉하며, '북한은 광주에 전차를 대규모로 보낼 정도로 강하다!'라는 발언들을 했다.[24] 정말 장난삼아 말해 김일성이 축지법을 쓸수 있다 하더라도, 수십대의 중장비를 봉쇄된 도시에 단기간만에 보낸거는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20톤이 넘어가면 항공수송은 물론이고 작은 화물선으로 나르기도 힘들다. 이는 미군마저도 공수전차를 개발하면서 상당히 애를 먹었던 부분이고, 결국 M551 셰리든을 퇴역시킨 이후로는 사실상 포기. 그나마 뒤에서 안전하게 화력지원하는 자주포도 너무 무겁다며 자주포보다 견인포를 더 선호한다.[25]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전차는 설계에서, 프로토타입 생산까지 최소 1년 이상은 걸린다.[26] 실제로 악명 높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증거물로 내세운 게 흔히 볼 수 있는 라디오로서 이것으로 북한 방송을 청취했다라는 식으로 증거자료라고 내놨던 시절이다. AK나 북한 혹은 중국제 총기 한점이라도 발견되면 이만큼 좋은 자료가 어디 있을까?[27] 당시 시민군이 쓰던무기는 5.56×45mm를 사용하는 M16이나 .30 카빈를 사용하는 M1카빈이였다. 반대로 동구권 AK에 들어가는 총탄은 7.62×39mm이며, 그당시 최신 소총인 AK- 74의 경우 5.45x39mm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총탄을 지급하거나 하지 않으면 총이 있어도 쏘지 못한다. 여기서 일부 사람들이 "구경이 달라도 약간의 계조만 있으면 사격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하며 외국의 건스미스 영상을 가져오는데, 거기서도 언급하다 싶이 이렇게 구경을 바꾼 총기들의 경우 그 구경에 맞는 부품들을 전부 구입해다가 총을 새로 만드는 수준으로 계조한다. 하다못해 그런식으로 총기를 굴렸다가는 한발 쏘기도 전에 기능고장이 일어난다.[28] 애초에 이런 후방침투 공작부대는 자기나라에서 적성국 무기 훈련을 받고 오며, 무기도 최소무장만 하고 온다. 잘 생각해보자. 지하에 KTX를 깔아놓은 것도 아니고 최소 차타고 5시간 거리를 아무런 소리없이 왔다갔다하며 탄약을 보급받는게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인가? 하물며 광주보다 훨신 가까운 청와대를 습격할때도 1인이 겨우 기관단총 한자루에 탄창 몇개씩만 가져올 수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차다리 먼저 가저온 AK 등으로 총기관리인을 죽이고 무기탈취 후 가져온 총은 어딘가 숨겨놨을 거라는게 훨신 현실적이다. 그리고 만약 진짜로 그랬다면 AK에 대한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며 진짜 북한이 처들어왔다고 대대적으로 광고 할 수 있을탠데, 그러한 언급은 전혀 없다.[29] 하지만 이 주장도 웃긴것이, 정작 북한군은 6.25이후에 특수부대들에겐 PPSH-41의 계량형인 PPS-43을 줬다. 단적인 예로 북한군이 청와대를 습격할때도 이총들고 왔다. 오히려 PPSH는 특유의 드럼탄창이 수시로 문제를 일으켰으며 바나나식 탄창은 특유의 구조때문에 PPS-43이 훨신 나았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사진은 결국 행사장비 배치 실수로 인한 해프닝으로 끝났다.[30] 무기고 관련 언급한 부분의 원본을 찾아본 결과 다음과 같다. : 국가법령정보센터, 제주신보, 제민일보, 양평백운신문, 2003년 하동 예비군 관리대대 M16 도난사건[31] 이는 6.25 당시에 경찰도 유사시에 군인과 같이 합동작전을 자주했기 때문이다.유격대들이 설치고 다니는데 군인들은 그 주변 지형에 대해 아는게 없고, 당연히 이러면 주변 지형과 환경, 주민에 대해 잘 아는 경찰과 합동작전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격대중 상당수가 밤에 경찰서와 같은 관공서를 자주 급습했기 때문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방지하기위해서 지구대나 파출소도 어느정도 무장이 돼있었다. 실제로 후에 무기정리사업을 하면서 M1919경기관총을 유사시 대공사격을 위해 가지고 있던 파출소도 있었다.[32]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 에 대한 기사이다. 해당 항목 참조.[33] 카빈의 오타[34] 내부 동향란에 보면 '北, 6.9 南 6월 인민항쟁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 중앙노동자회관에서 진행' 이라고 적혀있다.[35]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4.19 혁명이 나온다. 헌법자체가 4.19혁명 정신 자체를 계승한다고 나와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 헌법이 수차례 변경되는 와중에도 4.19 혁명 이후에 나온 헌법 개정안에는 저 4.19혁명 정신이 빠진 헌법 개정안은 없다[36] 황장엽의 발언, 문서에서 광주로 검색 #[37] 원래 2차전 비포장 국도 밖에 없었지만,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가 개설되고 기존의 국도가 4차선으로 포장되는 바람에 교통요충지가 됐다고 한다. 2014년 광주교도소는 삼각동으로 이전했다.[38] 링크가 깨졌는데, 여기서 읽을 수 있다.[39] 황 교수는 M16과 카빈 소총, 그리고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기록은 당시 의사들이 아닌 검찰이 작성했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반면, 당시 사체검시에 실제로 참여한 의사들은 외부 개입은 없었다고 일관된 진술을 하였다.[40]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세계의 군사학, 전쟁, 게릴라전투를 연구 하는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꼭 연구학자가 아니더라도 전쟁에서의 승리 비책을 찾는 국가라면 돈을 주고 서라도 배우고 싶은 사례가 아닌가? 적국 최후방의 내륙 도시에 400명 이상이나 되는 인원이 몰래 들어와 폭동을 일으키고 흔적도 없이 다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면 어느 나라가 그 비법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느 학자도 이 사건을 그런 방향으로 연구 했다는 기록은 없고, 어느 나라도 이것에 대해 북한에 "비법"을 배우고 싶다며 매달렸다는 언론 보도등은 없다.[41] 애당초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침투 인원이 25명이었다.[42] 신의주 학생 의거나 북한내의 반정부 투쟁을 영화화하면서 북한산에서 촬영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43] 이게 왜 중요한 사실인가 하면, 당시 학생을 포함해 미필자들에겐 집총을 금지했다. 당시엔 교련으로 인해 학생들도 총을 조금은 다룰줄 알았는데도 말이다.[44] 이걸 북한 개입의 증거라면, 역시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은 김완섭을 근거로 5.18은 친일파의 준동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45] 항쟁이 마지막으로 진압된 날이 5월 27일이다. 거의 6월을 향해가는 초여름날씨이다.[46] 당시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실시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으므로. 항쟁 사망자는 공식 자료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47] 5.18 관련 발언이 총선 패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유사한 망언이 이어졌고 자유한국당은 이에 제대로 대처 못하면서 극우 이미지가 누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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