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3

5.18 관련 무책임한 증언들의 진실 찾기 | 제3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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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무책임한 증언들의 진실 찾기
제3의길2019.05.213Hot Issue

<<광고>>











¶글쓴이 : 길벗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이라고 자처하는 김용장 발언, 윤지오의 장자연 증언 연상시켜

-윤흥정 등 서울 올라와 전두환 만났는데 그 시간에 전두환이 광주에서 사살명령 내렸다니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전두환이 사살 지시?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는 소리”





또 다시 5월, 어김없이 5.18은 다가오고, 그리고 또 어김없이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주장만 난무한 증언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온 언론들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들어도 이에 대해 정면에서 반박하는 양심과 용기를 가진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찾기 힘듭니다.



선동은 단 한 마디로 가능하지만, 그 선동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데는 천 배, 만 배의 노력과 시간이 들지요. 문제는 노력과 시간이 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 5.18로 밥벌이 하는 자, 5.18이 정치적 자산이 되고 자신의 신념이나 이념의 자양분이 되는 자, 5.18의 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에 의한 집단 다구리가 선동을 반박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훨씬 큰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겁박과 집단적 이지메가 두려워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3월 15일, jtbc는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이라고 자처하는 김용장을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김용장은 jtbc 출연에 이어 5월 13일에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하는 특별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어 5월 16일에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도 출연하고, 광주로 내려가 이용섭 광주시장도 만나고 광주 국군통합병원도 찾았다고 하는군요.



김용장이 피지에서 귀국해 증언하게 된 것은 홍남선 변호사의 아들인 홍기섭의 설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런 모습들에서 왕진진(전준주)과 윤지오의 그림자가 보이고, 최근에 벌어진 장자연 사건 재수사 데자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



검찰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캐나다에 있는 윤지오를 설득해서 왕복 비행기 값에 숙박료까지 지급하고 경호까지 붙여주며 귀국하게 해 증언토록 한 것이나, 안민석이 윤지오에게 국회의 출판기념회 자리를 마련해준 것, jtbc 손석희가 윤지오를 ‘뉴스룸’에 초대해 장시간 인터뷰하고, 김어준도 ‘뉴스공장’에서 인터뷰해 주었습니다.



MBC와 KBS 등 언론들이 앞 다투어 윤지오 증언을 대서특필한 것, 윤지오의 증언과 인터뷰에 왕진진의 가짜 편지 내용이 혼재해 있는 것, 윤지오의 증언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총괄팀장(김영희)이 “윤지오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설레발 친 것 등과 오버랩됩니다.



윤지오의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져 오히려 장자연 사건 규명을 방해했는데 김용장의 증언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하네요.



제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된 데는 그 동안 읽어본 5.18 관련 기록들과 김용장의 증언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용장의 주장이 100%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동안 5.18 단체가 주장했던 것과 검찰, 국방부가 수사해 발표한 보고서 내용과 모순되기 때문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용장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낮 12시경에 광주에 내려와 긴급회의를 하고, 이 자리에서 시위대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그 직후인 오후 1시경에 전남도청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앉아쏴 자세로 일제 사격을 해 시위대를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5월 20일, 일명 ‘편의대’라는 특수부대원들이 가발과 사복을 입고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시위 군중에 섞여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시위대를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600명이 했다는)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전남지역의 무기고를 터는 등 총격, 방화 행위로 시민들의 과격 행동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어김없이 5.18은 다가오고, 그리고 또 어김없이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에 부합할까요?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기록, 1995년 검찰의 수사 보고서, 5.18 단체들의 주장에서 금방 드러납니다.



1. 전두환은 5월 21일, 광주에 내려갔는가?



먼저 1980년 5월 21일 낮 12시에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김용장의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두환은 21일 점심 12시를 전후로 K57(광주 제1전투비행단, 광주비행장)에 왔습니다.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으며,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과 불상자 1명 등 4명 가량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저는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명령’이라고 봅니다. 그 회의에서 사살명령이 전달됐다고 믿습니다. 이건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참고로 발포명령과 사살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하기 위해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플라이트 플랜, 즉 비행계획서가 분명 공군에 남아있을 것입니다.그리고, 당시 공군 보안부대원 중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날 전두환은 서울에 있었고, 광주에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당시 계엄군의 조직 편제는 대통령(최규하)-국방부장관(주영복)-계엄사령관(이희성 육참총장)-2군 사령관(진종채)-전교사령관(윤흥정)-31사단장(정웅)으로 되어 있었으며, 광주에 계엄군으로 파견된 공수부대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 계엄군의 조직 라인에 따라 명령과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수사보고서 201페이지 ‘(2) 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 항목을 보면 명확하게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지휘권이 이원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1995년 검찰의 수사 당시 수석 검사가 채동욱이었고, 채동욱이 전두환을 사형 언도 받게 재판정에서 심문했습니다. 이 수사보고서도 당연히 채동욱이 직접 조사한 결과물입니다. 채동욱은 호남 출신이고 좌파 진영에서 “까도 까도 미담만 나온다”고 청문회에서 칭찬하던 인물입니다. 채동욱이 전두환에게 일부러 유리하게 수사 보고서를 쓸 이유가 전혀 없겠죠.



그러면 1980년 5월 21일, 계엄군 지휘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까요?



광주지역 계엄을 관리하던 진종채 2군사령관은 5월 20일부터 광주시의 시위사태가 격화되어 무장한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5월 21일 오전에 김준봉 작전참모를 대동하고 광주를 방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습니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무장한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어 자위권 발동이 필요하니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자위권 발동문제를 건의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위권 발동의 첫 건의자가 현지 지휘관인 호남출신 윤흥정 사령관이었습니다.



진종채 2군사령관은 바로 서울로 가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하고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지시해 주도록 건의했습니다. 이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종채 2군 사령관과 함께 장관실로 갔습니다. 장관실에는 주영복 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전두환),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정호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광주소요사태의 실상을 보고하고,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 불가피함을 건의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군 수뇌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건의를 승인했고, 주영복 장관의 승인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1일 19시 30분경 ‘광주사태에 관련된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5.18 기록관’ 등 5.18 단체들이 인용하며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 개입의 근거로 삼는 <5공 전사>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5공 전사>에는 “2군사는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을 뵙고 현장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께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장관실로 갔다. 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지역을 담당했던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서울로 올라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했고, 그 때 전두환(보안사령관)과 정호용(특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실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이런데 김용장은 전두환이 5월 21일 낮 12시경에 광주로 내려와 광주공항 K57 비행단장실에서 정호용과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미상 1인과 회의를 하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서울에 있었던 전두환과 정호용이 어떻게 광주에도 존재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이재우 보안부대장과 미상의 1인과 미팅하고 그 자리에서 사살 명령을 내린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살 결정을 내릴려면 최소한 그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전 전교사령관, 정웅 31사단장이 있는 자리여야 하는데, 정호용과 이재우 보안부대장만 모여 결정하고 시행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그리고 정호용도 당시 광주에 내려갔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없는데 어떻게 정호용이 광주 K57 비행단장실에 그 시간에 있을 수 있습니까?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에 내려왔다는 증언은 김용장 말고도 현재 둘이 더 있습니다.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와 505 보안부대원 허장환입니다.



오원기는 5월 1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jtbc 손석희와 706보안부대장 운전병 출신 오원기의 인터뷰>

오원기/5·18 당시 공군본부 보안부대장 운전병 : 미8군 헬기장으로 빨리 가자고 해서 가니까 헬기는 도착해 있었고. (전두환) 사령관 혼자 타고, 수행원 없이 전두환 씨 혼자 갔어요.



오원기는 전두환이 혼자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고 주장하는데, 이번에 김용장을 피지에서 귀국하게 한 홍남선 변호사의 아들 홍기섭은 전두환이 광주로 내려갈 때 3인이 동승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래는 홍기섭이 MBC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앵커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MBC와 홍남선 변호사 아들 홍기섭의 인터뷰 내용>

 진행자 >이 부분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동안 전두환 씨는 광주에 간 적이 없다고 해오지 않았습니까?
 홍기섭 >그 부분은 본인은 계속 거부하였으나 김용장 선생님의 증언이 토대가 되어 국방부 자료에 5월 21일 그 모든 헬기 탑승자는 명단이 다 기재가 되게 돼 있습니다.
 진행자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홍기섭 >네, 그런데 그 날만 21일 날 출발한 전두환 씨가 타고 있던 헬기만 안보요인 3인으로 기명이 안 돼 있었습니다. 무기명으로. 유일하게 그 날 전두환 씨가 타고온 헬기만.
 진행자 >그러니까 5월 21일 날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게 있었는데 그냥 안보요인, 이렇게 적혀 있었다는 거군요.
 홍기섭 >네, 안보요인 3인으로 돼 있었습니다.
 진행자 >3인으로. 그래서 이제 이 3인 중에 한 명이 전두환 씨일 것이다 라고 얘기하시는 거고,
 홍기섭 >그건 확실합니다.



홍기섭은 전두환이 탔던 헬기에는 안보요인 3인이 탑승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오원기는 전두환 혼자만 헬기에 탑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거나, 둘 모두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이 맞다고 보십니까? 홍기섭은 그나마 국방부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오원기는 물적 증거 없이 단지 자신의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허장환의 주장에 대해서는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과 이재우 전 505보안부대장이 1995년 검찰 수사 당시 검찰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반박했습니다.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1995.6.5 검찰 진술조서)>
문: 일부 고소인들과 당시 505부대의 수사관이던 허장환 등은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 K-57비행장을 통해 광주로 와 전교사에서 브리핑을 받고 귀경한 직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정호용, 윤흥정, 부사령관 김기석, 참모장인 진술인, 3개 여단장, 505부대장 등이 참석하에 회의를 열어 정호용과 여단장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이던 백남이는 93.5.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시 5.22 전두환이 내광하여 전교사로 왔으며 당시 전두환 사령관의 비행장 도착과 전교사 출발사실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바도 있으며, 5.27 작전개시 전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전교사를 방문하였는데 자신은 노 사령관의 얼굴을 본 사실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가 그 당시나 사후에라도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노태우 사령관의 내광사실에 대해 그와 같은 이야기 자체를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만약 전교사에 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참모장인 저가 알고 있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며, 참고로 당시 전교사의 주요 간부들 즉 윤흥정 사령관, 김기석 장군, 저, 김순현 장군, 임헌표 장군과 백남이 대령 등 전교사의 대령급 장교들로 구성된 친목모임인 “무등회” 라는 것이 있어 거의 매월 모임을 가지고 있는 바 백남이의 인터뷰 직후에 백남이도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 기사를 화제 삼아 백남이에게는 물론 참석자들끼리 서로 확인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고 당시 백남이도 우물쭈물하며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아 더 이상의 추궁을 하기도 무엇하여 넘어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중략)



문: 백남이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할 이유가 있는가요.



답: 저가 말씀드리기는 무엇 하지만 통상 전교사 작전참모는 장군으로 승진을 할 수 있는 보직으로 여겨졌음에도 백남이는 장군진급을 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광주사태를 조기진압하지 못한 데 대해 당시에도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저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인 사실이 있음) 5.24 교도대와 공수부대의 오인사격에 대해 백남이의 상황전파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사태 직후 징계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이 되며, 이와 같은 일과 함께 저의 기억상으로도 노태우 사령관이 사태 후에 보안사령관이 되어 광주와 전교사에 한 번 온 사실이 있는데 이를 착각하여 증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재우 전 광주보안부대장(95.1.20 진술조서)>
문: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의 양심선언(김영진 저,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권, 228정 이하) 내용에 의하면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률 중령이 5.18 오후에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내려와 5.20 저녁에 상경한 바 있다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홍성률 중령이 광주에 내려 왔던 것은 사실이나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5.21 이후에 보안사령부로부터 광주시내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광주 시내에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가서 상황파악을 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5.27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 상경한 것입니다.



문: 위 양심선언 내용에 의하면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작전부대의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인데 윤흥정 장군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난 일이 없다고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저도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문: 5.21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뒤에는 광주시내 상황을 어떻게 파악했는가요.



답: 당시에는 보안부대 활동망, 경찰 정보망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여서 광주시내의 상황에 대하여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에서 홍성률 중령을 내려보낸 것이며 진압작전과 관련해서는 작전부대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침투시켰었다는 사실을 진압작전이 끝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장의 주장은 5.18 단체가 그 동안 주장해 왔던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호남일보의 기사입니다.



‘5.18 기록관’은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집단발포가 이뤄진 직후 ‘자위권 발동과 계엄군 광주외곽 배치’와 관련한 회의를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확인했다. 같은 날 오후 2시35분께 국방부장관실에서 시위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전씨 등이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전환 배치해 봉쇄한 뒤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자위권을 발동, 신속히 진압키로 했다는 내용이다.

전두환, ‘광주학살회의’주도·최종 결정했다



‘5.18 기록관’도 전두환이 5월 21일, 오후 2시 35분께 서울의 국방부장관실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5공 전사>에 나오는 내용과도 일치하지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도 최보식 조선일보 기자와 최근 대담에서 전두환은 5.18과 관계없다고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에 내려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김용장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또한 1988년,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제7차(제144회)에 있었던 이해찬과 이희성(계엄사령관) 간에 질의-응답한 자위권과 발포명령 관련해 이희성이 답변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희성은 당시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음을 증언하고 자위권도 위수령 제15조1항(대통령령 제4949호)에 의거 정상적으로 행사된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위권 행사는 ‘군인복무규율 제34조’에 의해서도 그 정당성이 담보됩니다.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의 자료는 ‘5.18 기록관’에도 나오니 직접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現 위수령 제15조>
제15조 (병기사용한계) ①위수근무에 복무하는 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병기를 사용할 수 없다.

1. 폭행을 받아 자위상 부득이 한 때
2. 다중성군하여 폭행을 함에 즈음하여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진압할 수단이 없을 때
3. 신체·생명 및 토지 기타 물건을 방위함에 있어서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방위할 수단이 없을 때
②위수근무에 복무하는 자가 병기를 사용하였을 때에는 즉시 위수사령관에게 보고하여야 하며, 위수사령관은 이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現 군인복무규율 제34조>
제34조(초병의 무기사용) ①초병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하여 휴대하고 있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개정 1998. 12. 31.>

1. 신체ㆍ생명 또는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
2. 야간에 3회 이상 수하하여도 이에 불응하여 대답이 없거나, 도주하거나, 초병에 접근할 때
3. 폭행을 당하거나 또는 당할 우려가 있는 경우 그 상황이 급박하여 자위상 부득이할 때
②초병은 지휘계통상의 상관의 명령이나 지시없이 휴대하고 있는 무기나 탄약을 타인에게 넘겨주어서는 아니 된다.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광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김용장은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린 직후인 오후 1시에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앉아 쏴‘ 자세로 일제 사격하여 시위대를 사살(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오후 1시를 전후한 전남도청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 중에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1995년 이 사건을 수사하고 전두환을 사형선고 받게 한 인물이 채동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이 검찰 수사보고서에 대해 의문이 있으시다면 채동욱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 5.21. 08:00 : 전남도청 앞에 수 만명의 시위대가 사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시위.
-. 10:00 : 시위대 대표 4명, 도청에서 장형태 도지사와 면담.
-. 11:00 : 장형태 도지사 시위대 앞 연설 포기하고 헬기로 시민 자제 요구 방송.
-. 12:00 : 공수 부대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횡대로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 저지,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의 백여 대 차량으로 공수부대 저지선 압박.



-. 13:00 : 시위대가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 투척,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 공수부대의 저지선 무너지고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 사망. 시위대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 건드려 공중 발포.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의 일환으로 스피커 통해 애국가 방송하며 해산 호소.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하여 버스 운전자 1명 사망.



-. 13:30 : 시위대쪽에서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돌진하자 경계중이던 공수부대원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여 청년 1명 피격.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카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임.

-. 13:00~15:35 : 시위대, 광주 인근 전라 지역 파출소, 지서, 경찰서, 광업소, 화약고, 한국화약 등에서 카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백 7십여 발 탈취.
-. 14:45 : 61항공단 UH-1H 헬기 전남도청 상공에서 공중 정찰 중 시위대의 대공사격으로 6발 피격.
-. 14:50 : 시위대 장갑차 전남도청 광장쪽으로 돌진, 공수부대 발포로 후퇴.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수협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 배치하여 도청 부근 접근하는 시위대에 총격.



-. 15:00 : 남평지서에서 무기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 도착.
-. 15:15 :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천명 모여 칼빈과 실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
-. 15:50 :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도경 쪽으로 사격하면서 이동.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하던 헬기 시위대 대공사격 6발 피격.



-. 16:00 :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 칼빈 분배.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 헬기 향해 사격.
윤흥정 전교사령관, 공수부대 전남도청 철수 지시.



-. 16:30 : 전남도청 상황실 폐쇄.
-. 17:00 : 공수부대 전남도청에서 철수 시작.
-. 17:15 : 전남도경 상황실 폐쇄, 경찰 병력 철수 시작, 전경들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철수.
-. 20:00 : 전남도청 시민군에 의해 접수됨.



시위대에 대한 사살 명령을 하달 받은 계엄군(공수부대)이 실탄을 제대로 지급 받지도 못하고, 무장 시위대에 밀려 전남도청과 전남도경에서 철수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사살 명령을 받은 정예화된 우리나라 최고의 부대인 공수부대원들이 훈련받지 않고 조직화되지 않은 민간인들의 공격에 저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 있을까요? 공수부대원들이 사살 명령을 받은 상태라면 과연 그 날 전남도청 인근에서 사상자가 그것 밖에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그 많은 공수부대원들을 포함한 계엄군들 중에 지휘관이든 사병이든 사살 명령은커녕 발포 명령을 받았다거나 부하들에게 지시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요? 사살 명령을 받았거나 지시했다면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2. 편의대는 남한 특수군으로 광주 시민들을 과격 행동하게 유도했나



다음으로는 김용장의 두 번째 주장, ‘편의대’를 광주 시내에 보내 총격, 방화, 유언비어 유포하여 시위대를 격분시키고 무장난동을 유도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명 ‘편의대’라 불리며 시민 행세를 했던 사복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5월 20일쯤 K57 광주비행장으로 왔습니다.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약 30~40명이 왔으며, K57 격납고 안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침투했습니다. 



저는 이 첩보를 입수한 후,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재차 확인했습니다. 나이는 20~30대에 짧은 머리였고 일부는 가발을 썼으며,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습니다.그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광주로 보낸 것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고,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서의남 505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K57에 출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당시 보고 내용입니다. 이들이 온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북한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 탈취 등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에 어려운 극렬 행위들은 바로 이 편의대, 저는 남한 특수군이라 부르겠습니다. 



이 남한 특수군이 선봉에서 시민들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 확산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입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든 후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고도의 공작을 펼친 겁니다.

이들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광주의 모든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5.18 당시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와 유사한 조직이 운영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대는 김용장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민들의 과격 행동을 유도하고 총격, 방화, 탈취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또 편의대가 투입된 것도 김용장이 말하는 것처럼 5월 20일이 아니라 5월 26일입니다.



편의대는 계엄사가 전남도청을 탈환하고 광주를 장악하여 사태를 진압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하고, 작전이 개시되는 5월 27일 새벽 이전에 전남도청 및 광주일원의 상황을 파악하고 무장 시위대의 위치, 무장 상태, 경계 상황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투입한 것입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전남도청 지하에 있었던 도청을 날려버릴 수 있었던 량의 TNT 뇌관도 사전에 제거하였고, 피해를 최소화하여 진압작전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김용장의 주장처럼 방화, 총격, 탈취 등 극렬 행동을 할 이유도 없었고, 또 그런 임무가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투입된 시기도 이미 광주가 무장 시위대에 장악된 뒤인 5월 25일과 26일이었습니다.



‘5.18 기록관’도 인용하는 <계엄사> 160쪽에는 이런 요지의 기록이 있습니다.



5월 27일 새벽을 기해 광주재진압작전이 시행됐다. 3공수는 30명 특공조를 편성해 전남도청을 01:00부터 05:10에 점령했다. 제7공수는 262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광주공원을 01:00부터 05:06에, 제11공수는 37명으로 특공조를 편성해 01:00부터 04:40에 점령했다(주: 사망자는 150명이라는 예측치와는 달리 17명으로 종결됐다).



정보수집원들은 가발을 쓰고 민간복장을 하고 침투해 어느 건물 어느 장소에서 어느 규모의 난동자들이 활동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는 광주재진입작전을 펼치기 전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보 수집차 사전에 투입한 민간인으로 위장한 정보요원이었습니다.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에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와 관련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5.25. – 전남도청 진입작전 준비 상황)
O 5.25. 04: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여, 이에 따라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이 작성되었음.

O 14:30경 계엄사 탄약검사반이 은밀히 전남도청에 투입되어 수류탄 278발, 최루탄 170발을 분해하였음.



(5.26. – 진입작전 준비상황)

O 21:00경 전교사 문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하였고, 같은 시간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가발과 민간인 복장을 공수하여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 부대원을 격려하였으며, 22:40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5.27. 새벽 진입작전을 개시할 예정임을 보고하였음.



(5.27. – 전남도청 진입작전 상황)

O 5.26. 23:00경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 운동장, 조대부중, 조대여고, 전남기계공고, 조대앞, 노동청을 거쳐 5.27 04:00경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으로 진입하여 05:21 전맘도청 점령을 완료하고, 07:30경 20사단 61연대에 전남도청을 인계한 후 08:00경 부대로 복귀하였음.

O 7공수여단은…..(중략), 11공수여단 특공조…..(중략)



O 20사단은….(중략) , 31사단은 …. (중략)07:25 계획대로 작전 완료하였음.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p197~ )



(1) 발포 경위
-. 다만,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 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만약 김용장의 주장대로 장갑차를 탈취하고 방화, 총격한 외부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5.18의 성격 규정을 다시 해야 하며, 5.18에 대한 평가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물론 5.18에 대한 엄밀한 재수사가 즉시 실시되어야 하겠지요. 필요하다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진실 규명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김용장의 주장으로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이 새삼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김용장과 지만원은 탈취, 총격, 방화로 시위대를 격분시키고 상황 악화를 유도한 세력이 있다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주장이 다른 지점은 그 주체를 김용장은 남한군(편의대), 지만원은 북한군 600명이라고 지목하는 것뿐입니다(저는 개인적으로 김용장의 주장도, 지만원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용장의 주장대로 전두환이 사전에 계획하고 편의대를 군중에 투입하여 그 짓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전두환과 그 일당을 재판정에 다시 세우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반인륜적이며 극악무도한 파렴치한 죄로 고령이라고 봐 줄 문제가 아닙니다.



반면에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면 김용장은 물론 김용장을 부추킨 사람들과 세력들은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설갑수씨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김용장의 주장에 대해 합리적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기고]‘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



아래는 ‘5·18 참상을 세계에 알린 사람’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와 피터슨 목사의 5.18 광주사태에 대해 썼던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5.18의 실상이 다 알려진 1995년 이후에 저술된 것인데도 이렇게 사실과 다른 내용을 책에 담아 진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5.18 당시 헬기 기총 소사가 있었다고 증언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검찰 수사 결과 피터슨의 증언은 사실과 다름이 확인되었지요.



5월 21일에 이르러서는 광주지역의 수십만 시민들이 군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냈고 그 후 5일간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원회가 이 도시를 통제했다. 이 위원회는 500명이 이미 죽었고 약 960명이 실종되었다고 확인했다.[각주: 이 수치는 하비(pharis Harvey) 목사가 이끄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감시단체인 ‘한국 인권 감시 북미 연맹’(North American Coalition on Human Rights in Korea)에서 1980년 9월에 집계한 것이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창비, 2004)



1980년에 광주 인구는 약 75만 명이었다. 그 인구 중 광주의 여러 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수는 대략 2천 명이었다. 이들 2천 명의 침례교인들 중에서 우리는 두 명의 사망자를 경험했는데, 그 비율은 1,000명 대 1명인 것이다. 만일 그 비율을 광주시 전체에 적용하면 약 750명의 사망자가 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일반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망자를 경험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 832명의 사망자 수는 – 혹은 대략 그 정도의 수는 – 통계적으로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5.18 광주사태> 아놀드 A. 피터슨 목사. 정동섭 옮김, 1995년)



•해당 관련 기사
1. <3/15, jtbc -전두환, 5·18 발포명령 개입했나…”광주 방문 조사해야”>

2. <5/13, 더불어민주당 주최, 김용장 국회 특별 기자회견 전문>
https://blog.naver.com/kopark2012/221536341940
http://facttv.kr/facttvnews/detail.php?number=25113&thread=14r08



3. <5/16,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김용장 “5·18, 전두환의 정권찬탈 위한 시나리오.. 美도 알았다”>

4. <김용장 – “계엄군, 5·18 희생자 시신 소각…일부는 바다에 버렸다”>

5. <MBC – “미국은 5.18 미리 알고 있었다”, 김용장 추가 증언 할까?>



아래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이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 대담한 내용입니다. 이희성은 전두환이 5.18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광주 진압은 내가 지휘, 전두환 관련 없다.”>
[(편집자 注)광주 5·18 사건 36주년을 앞두고 崔普植 조선일보 기자가 진압작전의 최종 지휘자였던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李熺性(이희성) 씨를 인터뷰하였다. 월요일마다 조선일보에 실리던 ‘최보식이 만난 사람’은 어제 나오지 않았다. 이희성 씨는, 당시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이 광주 진압 작전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李 씨는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위험을 느껴 쏜 것일 뿐, 발포 명령도 없었다’면서, ‘광주사태가 불처럼 他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民亂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진 인터뷰 全文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설(說)이 보도됐을 때, 그쪽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학살 주범’인데,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문제라면 기자(記者)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1980년 당시 정국을 관장한 李熺性(92)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첫인상이 단아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나는 곧바로 본질로 들어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하고 특별사면됨).’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周永福)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 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뒤처리와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저쪽, 위·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아래는 발포 경위와 지휘권 이원화 여부에 대한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 내용입니다.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p197~ )



(1) 발포 경위
O 고소,고발인들은, 공수부대의 발포는 5.20. 23:00경 광주역 앞에서 시위 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5.21. 13:00경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의 형태를 보면, 이는 시위대의 차량 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 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별도로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의도적인 발포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하였음.



O 수사한 결과, 광주에서의 최초의 발포는 5.19. 17:00경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바,
-. 5.19. 17:00경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 공격하면서 불 붙은 짚단을 던져 장갑차에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 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한 것이었고,



-. 또 5.20. 23:00경 3공수여단이 고아주역 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 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 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하여 이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하여 발포하고,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 사격을 하고, 5.21.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 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에 대응하여 돌진하는 차량에 발포하였고, 그 와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와 같은 발포 경위에 비추어 위 발포가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임.



O 5.21.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그 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그 경위에 관하여, 시위대의 1차 장갑차 공격 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 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으나,



-. 수사한 결과, 11공수여단 61, 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 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 간 5.20. 24:00경 대대장이 대대장 짚차 등에 통합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1탄창(15발)씩 분배하고, 63대대는 5.21. 10:30경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동일 13:00경 시위대의 차량 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장교들 위주로 실탄이 분배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 13:00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 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발포가 있었고,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으며, 그 경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였고,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금 건물로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사실이 확인되었음.



-. 다만,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 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 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 구호를 외치거나 차량으로 도로를 진행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 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구체적으로 총기 발사나 차량 돌진 등 군에 대하여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 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음.



(2) 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
O 고소,고발인들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 지휘관인 계엄사령관, 2군사령관, 전교사령관, 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 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 세력의 사전 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음.



-. 즉,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투입될 당시의 광주상황이 공수부대의 투입이 필요할 정도가 아니었고, 현지의 31사단장이나 전교사령관아 요청한 사실이 없음에도 공수부대와 학생들의 최초 충돌 이전 시간에 특전사령관이 벌써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을 지시하였고,



-. 계업사령관이 자위권 보유를 최초로 천명한 것은 5.21. 19:30이고, 2군 사령부가 자위권 행사를 지시한 것이 5.22. 10:30임에도 하급부대인 7공수여단은 5.21. 18:00에, 전교사는 동일 20:30에 미리 자위권 발동 명령을 내리고, 심지어는 5.20. 23:00경 이미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서 발포하였으며,



-. 5.24.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과 효천역 부근에서 두 차례나 군부대 간에 오인 사격이 발생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별도의 지휘체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임.



O 그러나,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 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 진압 투입은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 5.18 오후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 확대 선포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군사령관-2군 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되며,



-.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5.18 14:00경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 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하여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고,



-.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 진압에 투입한 후, 5.18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 배치하고, 5.19. 11공수여단의 추가 작전통제에 따라 책임지역을 구분하여 시이 진압에 투입하고, 5.20. 3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하여 시위 진압에 투입하고, 5.21.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의 일련의 부대 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되며,



-.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보류 천명 시간과 각 부대의 자위권 발동지시 시간이 군자료상 선후가 맞지 않는 듯한 것은 사실이나, 자위권 발동이 결정된 마당에 계엄사령관의 방송을 통한 발표 이전에 자위권 발동 사실이 하급 부대에 통보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5.21. 16: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계엄군 외곽 철수와 함께 자위권 발동 승인을 받은 사실 등에 비추어 그와 같은 지시들이 발령, 전파되는 과정에서 선후가 다르다고 하여 지휘권이 이원화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고,



-. 5.21. 16:00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에는 각 공수여단이 책임지역에서 외곽봉쇄 임무만을 수행하다가 광주 재진입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광주 재진입 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시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하여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 또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 간에 상호 상황 전파 및 통제의 미숙, 단위 부대 지휘관들의 상황 판단 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O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 하에 있었음에도,
-. 31사단 등과는 무전 교신 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 장교들이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 장치를 설치하여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 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 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아래는 5.18 단체가 출간한 <5.18 광주 살육(공수부대)과 항쟁(민중)>에 나오는 5월 19일, 계엄군의 첫 발포가 있었던 장면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으로 보아도 계엄군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후 4시쯤 계림동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중간 길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지나갔습니다. 시민들은 인간사슬로 막아버렸습니다. 장갑차는 가로수를 들이받습니다. 시민들엔 40~50대 되는 부녀자들까지 낀 상태였는데, 시민들은 장갑차에게 우르르 몰려가서 장갑차에 양쪽에 달린 감시경을 돌로 깨버립니다. 안에서 군인들이 나오려하자 시민들은 ‘저놈 죽여라’고 소리쳤고 군인중 2명은 달아나고 7명은 안으로 들어갑니다. 시민들은 근처 페인트가게에서 석유통을 구해 장갑차에 뿌려 붙은 뿌렸으나 타지 않았고 짚더미까지 가져가 했으니 역시 안 탔습니다. 이번엔 뚜껑을 열어 짚더미를 넣으려하자 군인이 뚜껑을 열고 총탄을 쏩니다. 그중 고등학생 김영찬 씨가 손과 대퇴부에 세발을 맞고 쓰러졌고, 장갑차는 이 때를 타 달아납니다.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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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2019.5.22 AM 10:33


제 글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여 아래에 문재인의 5.18 기념사를 비판하는 ‘아크로’의 ‘비행소년’님이 쓴 글을 복사해 올립니다.
5.18이 성역화되는 것이야말로 5.18 정신을 훼손한다는 것을 문재인이나 꼴통 좌파들, 일부 5.18 유족들과 단체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계엄군을 악마화시키기 위해 근거가 없는 주장들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는 짓이야말로 5.18로 희생된 분들을 욕 되게 하는 것임도 모르는 것 같구요.
——————————————————————————————–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에 깊은 한숨과 우려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 5.18 정신 누구보다 그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고 누군가 5.18 정신을 훼손하는 발언을 한다면 저는 기꺼이 맞서서 토론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닙니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을 옆에서 지켜 본 두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는 그 의도와 진위에 대해서는 그 두명의 증언과 해석중에 누가 맞는 지에 대해서 100%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당사자도 그 의도가 꼭 그렇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좋게 또는 정 반대로 나타나는 것도 허다한 것이 역사입니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한 해석과 그 의미, 그리고 그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견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과도한 성역화는 반드시 부작용도 불러오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해석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게중에서 많은 사료와 증거를 가지고 좀 더 객관적으로 그 견해를 피력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면서 지키려고 했던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에 이견이 없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화자는 그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말을 했거나 아니면 광주의 희생자들은 자신의 정치세력’만’의 정치적 자산으로 독점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파쇼적인 행태입니다.

한편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께서는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해 등급을 매겨서 차별을 하고 계신 듯 합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침략에 나라를 지키다가 생명을 잃은 연평도 해전, 천안함 침몰, 서해 교전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자리는 나 몰라라 하면서 세월호나 5.18에만 나타나셨습니다. 이게 한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할 일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그저 일부 사람들과 지지자들을 위한 대통령입니까. 평소의 이런 행동을 보면, 이견이 없어야한다는 말은 그저 수사법의 실수가 아니라 속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진영논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군가 5.18 정신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맞서서 토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욕도 해주겠습니다.

하지만, 해석을 다르게 본다고 독재자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너도 독재자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출처 : http://theacro.com/zbxe/542817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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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2019.5.22 PM 14:54


김용장의 ‘편의대’ 주장과 비슷한 증언이 있습니다. 5.18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취재한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1995년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 김영택의 증언도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신군부가 광주의 갱생원 원생들 500명을 현장에 투입해 일부러 시위를 선동, 격화시키도록 했다는 주장인데, 이것을 본이니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친지가 말해 준 것이라는데, 그 친지도 직접 본 것이 아니고 누군가 그런 소문을 전해 준 것을 김영택에게 알린 것이라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영택이 직접 목격한 것을 진술한 것을 보면 지만원이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있네요. (저는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을 믿지 않습니다만) 5월 22일 전남 도청으로 500명의 연고대생들이 합류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 김영택은 20~30명의 젊은이들이 현장에 나타나 기존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계엄군이 재진입할 시점 즈음인 5월 26일 소리없이 사라졌다고 증언하고 있네요. 아마 지만원은 이 김영택의 증언을 근거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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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5.18 체험기, “시위대 500명 신군부 측이 의도적으로 광주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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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조서(제2회·1996년 2월 7일·요지)
진술인 : 김영택(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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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진술인은 5.18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당청에 왜 서신을 우송했나요.
답) 서신 내용에 기재된 바와 같이 5.18 광주사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측에서 12.12사건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다시 정권까지 탈취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폭도화시킨 후 이를 진압함으로써 결국 정권장악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공하여 주기 위해서 제가 위와 같은 서신을 우송하여 드린 것입니다.
문) 그럼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유발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답) 예, 제가 5.18 광주사태 당시에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로 재직하면서 느낀 바로는 분명히 5.18 광주사태는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답) 5월 22일 15시08분경 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취재 중이었는데, 항쟁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 곳곳에 500여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미 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외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투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다음날인 5월 23일 13시경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에 복면을 한 시위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확산시키며 주도했는데, 그것 또한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처음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 시민 등 시위대들을 자극하여 시위를 확산시킴으로써 정권장악을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최규하 정부의 무능·한계 인식시키고자

문) 왜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광주 시위현장에 투입시켜 시위를 확산시켰다고 보는가요.
답)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킴으로써 최규하 정부의 무능과 한계를 대외적으로 노정토록 하여 군부가 전면에 나서야만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될 수 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하에 그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 진술인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시위현장에 투입된 상황을 실제로 보았나요.
답) 예, 제가 당시 취재하면서 위와 같은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발표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 당시 도청 앞 광장에 20~3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도착하자 기존의 시위대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서로 간에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습니다.
문) 다른 시위현장에서는 위와 같은 광경을 보지 못했는가요.
답) 저는 당시 도청 앞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광경만을 보았을 뿐 다른 곳에서의 광경은 보지 못했습니다.
문) 그들이 직접 시위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나요.
답) 예, 그들은 위와 같이 환영을 받은 후 기존의 시위학생들과 함께 어울렸고, 그들의 복장도 기존의 시위대들과 구별되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시위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문) 그전에도 연·고대생 30여 명이 광주시내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답) 위와 같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5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날 10시45분에 저는 도청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항쟁본부 스피커를 통해 연·고대생 30명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 위와 같이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투입했다면, 왜 시위대 측인 항쟁본부에서 그들을 환영했을까요.
답) 그것은 시위대들이, 그 대학생들을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위장 투입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그 다음날인 5월 23일 오후경 복면부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화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했는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위하던가요.
답) 저는 당시에 도청 앞 및 금남로 일대에서 복면부대들이 하는 시위광경을 지켜보았는데, 그들은 수십 대의 버시와 트럭 등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차량을 치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기존의 시위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과격하게 하도록 유도했으며, 그때부터 시위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시위대학생 등이 총기를 반납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총기를 반납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우리;는 끝까지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시위를 과열시켰습니다.
문) 복면부대들이 언제까지 시위를 주도했나요.
답) 그들은 5월 26일, 재진압작전이 임박하자 어디론지 전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복면부대, 광주 무등갱생원들로 시위에 투입했을 가능성

문) 진술인의 서신내용을 보면 위 복면부대들은 정규 정보원이 아니라 무연고자인 광주 무등갱생원 원생들로서 광주사태 당시 위와 같은 의도하에 이용당한 후 전부 집단으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설을 접했다고 하는데, 어떠한 경위로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었나요.
답) 저는 최근까지도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정권찬탈을 기도하고 기위대들을 폭도화시키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악화·확산시킬 의도로 정규 정보원을 투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5년 12월 초순경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저의 친지로부터 그 당시 투입된 복면부대원들은 정규 정보원들이 아니고 광주 무등갱생원 원생들로서 그들은 시위에 투입되어 위와 같이 이용당한 후 집단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이에 따라 저는 단순히 첩보 제공의 차원에서 김상회 부장검사에게 사신을 보냈을 뿐입니다.
문) 진술인은 그와 같은 소문을 직접 확인하여 본 사실이 있나요.
답) 제가 직접 그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는 확인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문) 진술인에게 위와 같은 소문을 전해준 진술인의 친지는 그와 같은 소문을 어떻게 듣게 되었다고 하던가요.
답) 단순히 광주 일대에 그러한 소문이 있다고만 했을 뿐 그 구체적인 소문의 진원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말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진술인은 검찰에 위와 같은 첩보를 제공했으면서도, 그 첩보의 진원지인 진술인의 친지를 왜 밝힐 수 없다고 하는가요.
답) 오랫동안 언론기관에서 기자로 재직한 저로서, 그 첩보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위와 같은 소문의 진위에 대해 자신이 없고, 더 나아가 확실하지도 아니한 소문으로 인하여 쓸데 없는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소문을 진술인에게 전해준 진술인의 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소문의 진원지 등을 확인하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답) 제가 다시 한 번 저의 친지와 접촉하여 그 소문에 관하여 확인하여 보기는 하겠으나,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의 말이 있을 것이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문) 무등갱생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아는가요.
답) 그 점에 관하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광주 동부경찰서 관할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뿐입니다.
문) 진술인의 서신상에 광주사태 진압 이후 무등갱생원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했는데, 그 점에 관하여 확인한 사실이 있나요.
답)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의 친지가 전해준 소문내용의 일부일 뿐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문) 광주사태 당시 무등갱생원 원장이었던 박금현이 갱생원을 새로 짓고 다시 갱생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답) 그것 역시 저의 친지가 저에게 전해준 소문내용이 일부일 뿐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문) 무등갱생원 원장이라고 하는 박금현의 인적사항에 대해 알고 있나요.
답) 광주 무등갱생원장을 상당히 오랜 기간 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매우 연로할 것이라고 생각될 뿐 그 이상 자세한 인적사항에 대해는 알지 못합니다.

5.18 광주사태는 신군부의 사전음모

문) 진술인은 ‘5.18 재수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제하의 서신에서 광주사태가 전두환 등 신군부 측의 사전음모에 의하여 계획된 사건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그 이유는, 저의 저서인 『광주 5.18 민중항쟁』의 333~342면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고, 위 서신상에도 요약되어 있는데, 계엄사가 주도하여 재야인사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하도록 당부하는 성명을 신문에 싣지 못하도록 하거나 가급적 작게 싣도록 한 점, 5월 17일 당국의 민주화 일정을 관망하기 위해 시위를 중지하기로 결의한 전국 56개 대학 학생회장단을 연행한 점, 김대중과 만나지도 않은 정동년을 김대중 배후조종에 의한 5.18 주동자로 몰아 사형선고까지 한 점, 시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신혼부부 또는 정상적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가정부들까지 마구 구타하며 연행한 점, 5월 18일 공수부대가 시내에 투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동국대에 주둔 중인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우리가 밀리고 있으니 빨리 출동하라”고 명령한 점, 시내를 빠져나가려는 선량한 시민들을 시내로 몰아넣고 총질을 마구한 점, 신군부 측에서는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동시에 국가보위를 위한 비상기구의 설치를 기도하면서 시위자제를 결의한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등 시위를 오히려 자극했다는 점, 자기들의 정권찬달 음모계획이 누설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록 등 9건의 군 작전관계서류를 없애 버렸다는 점 등입니다.(끝)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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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시장2019.6.27 PM 15:44


1. 헤드라인과 달리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은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던 듯합니다. 현지 지휘관이 작전지역을 이탈할 리는 없겠지요.
2. 2군사령관 진종채가 전교사 윤흥정의 제안을 받아들여(31사단장 정웅이 자꾸 보채니까) 자위권차원의 응사가 필요하다는 허락을 받으려고, 서울에 있는 이희성 참모총장을 찾아갔고, 이희성은 진종채를 대동하고 국방부 장관 주영복 사무실로 갔으며, 거기에서 전두환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3. 이상의 사실은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6년~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에도 나와있습니다. 거기에는 80년5월21일 점심 도청앞 발포경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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