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山
n͏t͏S͏d͏o͏r͏p͏o͏e͏s͏g͏f͏6͏0͏u͏i͏u͏8͏6͏7͏9͏s͏c͏t͏2͏f͏ ͏0͏9͏1͏9͏9͏3͏5͏t͏3͏i͏A͏a͏1͏:͏ ͏m͏7͏h͏4͏2͏ ͏t͏i͏a͏5͏1͏g͏2͏l͏1͏0͏m͏i͏ ·
8월 14일 밤, 아나미의 집에 있었던 조선인 장교
1945년 8월 15일 새벽, 일본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가 자결했다. 포츠담선언 수락이 결정되고 천황의 항복 방송을 몇 시간 앞둔 때였다. 그런데 이날 아나미의 집에는 한 조선인 장교가 머물고 있었다.
일본 이름은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한국 이름은 이형근(李亨根)이었다.
훗날 대한민국 육군대장과 초대 합동참모회의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당시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 장교였으며, 아나미의 둘째 아들 고레아키라(惟晟)와 육사 동기였다. 그는 중국 후난성에서 전사했다.
패전을 앞둔 8월, 이형근은 친구의 최후를 부모에게 전하기 위해 아나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고레아키라의 어머니 아야코(綾子)에게 말했다.
“저 혼자 살아남아 면목이 없습니다.”
아야코는 눈물을 흘리며 “부디 고레아키라의 몫까지 힘내주십시오”라고 답했다. 남편이 격무로 귀가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음 날 함께 육군성으로 가자고도 했다. 아들의 친구를 만나면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날 밤 집에서 묵도록 권했다.
이형근은 훗날 육사 동기생 회보에서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마음으로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다음 날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아버지인 육군대신 아나미가 자결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지도부는 전쟁을 끝내는 문제로 심각하게 갈라져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했지만 육군에는 본토결전론이 강했다. 아나미 역시 연합군에 일격을 가한 뒤 국체호지를 비롯해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육군의 입장을 내각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천황의 ‘성단(聖斷)’으로 포츠담선언 수락이 결정된 뒤에는 군의 복종을 요구했다. 항전을 주장하는 군인들에게 그는 말했다.
“성단은 이미 내려졌다. 이제는 그것을 따를 뿐이다. 불만이 있는 자는 먼저 아나미를 베어라.”
아나미에게 이것은 ‘책임’의 문제였다. 육군대신으로서 군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과 국가의 최종 결정에 군을 복종시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에서 의견을 말하되 결정이 내려지면 따르는 것이 군인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그런 생각은 1936년 2·26사건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농촌의 피폐와 사회문제에 분노한 청년장교들의 문제의식은 이해했지만 군인이 무력으로 정치를 바꾸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농촌의 구제를 외치고 정치개혁을 주장하려는 자는 먼저 군복을 벗은 뒤에 행하라.”
그래서 아나미가 남긴 “용기와 비겁함의 차이는 작으나 책임관념의 차이는 크다”는 말에는 그의 군인관이 담겨 있다. 정의를 확신하는 것과 법을 넘어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정치에 뛰어들겠다면 먼저 군인이기를 포기해야 했다.
자결을 앞둔 아나미가 떠올린 사람은 전사한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며 “나도 고레아키라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말했다. 아들의 사진을 벗어놓은 군복 안에 넣고 자신이 죽으면 그것을 몸 위에 덮어달라고 부탁했다.
정작 그 무렵 아들의 친구 이형근은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패전과 함께 ‘마쓰야마 다케오’의 삶도 바뀌었다. 해방 후 그는 이형근이라는 이름으로 국군 창설에 참여해 주요 지휘관을 거쳤고 육군대장에 올랐다. 일본군에서 근대 군사교육을 받은 조선인 장교가 새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군대의 최고 지휘부로 이동한 것이다.
이것은 해방 전후사를 생각할 때 흥미로운 대목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식민지 지배가 끝난 거대한 정치적 단절이었지만 사람과 지식, 경험까지 모두 사라진 날은 아니었다.
일본군과 만주군 등에서 군사교육과 실무를 경험한 조선인 가운데 여러 사람이 해방 후 국군 창설 과정에 들어왔다.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그러한 인적 계승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이형근과 아나미 집안의 인연도 패전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전후에도 교류가 이어졌고 고레아키라의 어머니 아야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형근은 장문의 조사를 보냈다고 한다. 체제와 국적은 달라졌어도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와 그 가족에 대한 기억은 남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보이는 8월 15일은 교과서의 연표보다 복잡하다. 식민지와 해방을 가르는 선은 분명하지만 그 선을 넘어 살아간 사람들의 인생까지 전후로 잘라낼 수는 없다.
그날 밤 한쪽에서는 패망하는 일본 제국의 육군대신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의 집에서 훗날 대한민국의 장군이 될 조선인 청년이 전사한 친구를 생각하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그리고 이형근(李亨根).
한 사람의 두 이름만으로도 1945년 8월 15일 전후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ㅅㅗㅇ
Se-Hwan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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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왜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었는지? 그래서 무엇을 잃었고 또 무엇을 얻었는지? 해방은 어떻게 또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이 모든 것을 감정 및 윤리 관점을 벗어나 이성 및 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죽창가, 친.반일과 같은 과거의 감정적 반응을 벗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열어 갈 수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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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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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왕의 무조건 항복에 국내 일본군이 연합군에 저항하지 않고 따랐기에 패전 후 일본이 분단되지 않고 맥아더 군정 하에서 민주 일본으로의 회복이 빨랐겠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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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an Sang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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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장교로 근무했기에..., 일본군 지휘부의 고뇌와 결단,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등...어슬프게나마 공감으로 다가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는 일본 정신이 지금도 존속하껬지요...
반면, 무력한 책임감 속에 사는 대한민국이 대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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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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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위치에서 의견을 말하되 결정이 내려지면 따르는 것이 군인의 역할"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라는 분 정말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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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hyun 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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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으로 주권도없는나라
그것은 먹고살기위한인간의본질이다
비난할것도없다 욕할려면 왜나라가나앿했는지 거슬려올려가봐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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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Hak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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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명절에 항복했을까요
일본의 최대 명절인 오봉(お盆)은 매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4일간 진행됩니다. 이 기간 동안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고 가족들과 함께 성묘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공식적인 국가 공휴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업과 학교가 연휴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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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ho 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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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저렇게 얽힌 분들이 많이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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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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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을 마쓰야마라고 읽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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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yo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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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군번 1호가 이형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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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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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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