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4 조선을 바꾼 일본의 혁명, 메이지 유신 - 조슈와 사쓰마의 복수

조선을 바꾼 일본의 혁명, 메이지 유신 - 조슈와 사쓰마의 복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4회 - YouTube

조선을 바꾼 일본의 혁명, 메이지 유신 - 조슈와 사쓰마의 복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4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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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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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뿌리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조슈·사쓰마번의 200년 복수극을 다룹니다. 
하급 무사와 황실 귀족이 결합한 사초 동맹이 어떻게 막부를 무너뜨렸고
그 과정이 오늘날 자민당과 아베 가문의 뿌리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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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요청하신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64회 강의 내용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 일본 군국주의의 맹아와 정한론의 대두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봉건 사무라이 계급의 해체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 급진 군부 세력은 조선 정벌을 주장했으나,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와쿠라 사절단 등 내치 우선파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정한론의 완전한 폐기가 아니라 시기의 유예였으며, 결과적으로 1875년 운요호 사건을 통한 강제 개항으로 이어졌다.

  • 조선의 위기 인식과 체제적 한계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척화비 건립은 서구 열강 및 서구화된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통적 대응이었으나, 세계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구조적 한계를 노출했다. 고종 친정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하며 근대 만국공법 질서에 강제로 편입되었으나, 자주적 국방력과 외교적 전략의 부재로 인해 동아시아 세력 균형의 종속 변수로 전락했다.

  • 동아시아 패권 경쟁과 삼국 관계의 재편 19세기 후반 한반도는 청나라의 전통적 종주권 주장,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격전지로 변모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구축한 군사·산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단계적 침략 구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평론

제64회 강연은 메이지 일본의 대외 팽창 노선인 정한론의 구조적 기원과, 이에 맞선 조선 말기 지배 엘리트의 전략적 무능을 지정학적 냉엄함 속에서 해부한다.

첫째,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을 단순한 도덕적 악(惡)이나 개인의 야심으로 환원하지 않고,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무사 계급의 사회적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분출된 구조적 대외 팽창 압력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제도사적 접근은 제국주의 팽창의 내적 메커니즘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

둘째, 조선의 전통적 대응 방식이 지닌 시대착오적 취약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성리학적 명분론과 중화 질서에 갇혀 만국공법과 군사 기술로 무장한 근대 제국주의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채, 외교적 자율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서술하여 근대 국가 수립 실패의 내적 요인을 통찰하게 한다.

다만, 일본 지배층 내부의 정한론 갈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외교·군사 엘리트 중심의 역학 관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동아시아 해역과 기층 민중이 겪어야 했던 실질적 경제 침탈과 안보 위협의 다층적 양상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반도가 근대 동아시아 제국주의 각축장으로 빨려 들어간 경로를 거시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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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64회

<조선을 바꾼 일본의 혁명, 메이지유신 ― 조슈와 사쓰마의 복수> 요약·평론

이번 64회는 앞의 63회에서 설명한 메이지유신의 제도적 배경을 한 단계 더 깊이 파고든다. 핵심 질문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세력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이 200여 년 동안 막부에 품었던 원한을 정치혁명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가>이다.

함재봉은 그 중심에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놓는다. 두 번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패한 세력의 후예였고, 이후 250여 년간 도쿠가와 막부의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남았다. 메이지유신은 단순히 19세기에 갑자기 발생한 서구화 운동이 아니라, 에도시대 내내 축적되어 있던 정치적 원한·지역적 경쟁·신분질서가 서양의 충격과 결합하여 폭발한 사건이라는 것이 이번 강연의 기본 시각이다.


1. 세키가하라 전투와 200년의 기억

함재봉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메이지유신의 출발점처럼 다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의 패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도요토미 정권에 충성하는 서군이 맞붙었다. 조슈의 모리 가문과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서군 쪽에 섰다.

결과는 도쿠가와의 승리였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조슈와 사쓰마를 완전히 없애지 않았다. 이것이 훗날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두 번은 살아남았지만 막부의 핵심 권력에서 배제되었고, 특히 조슈는 영지를 크게 삭감당했다.

함재봉은 여기서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한다. 조슈에서는 매년 정월이 되면 가신들이 번주에게

<“막부를 칠 때가 되었습니까?”>

라고 묻고, 번주가

<“아직 때가 아니다.”>

라고 답하는 의례가 약 200년 동안 반복되었다고 설명한다.

역사적 사실의 세부는 별도로 검증할 필요가 있지만, 강연에서 이 일화가 맡는 역할은 분명하다. 세키가하라의 패배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집단적 기억>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즉 메이지유신에는 서양의 압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 내부의 오래된 정치적 복수심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2. 도쿠가와의 통치술 ― 다이묘를 세 등급으로 나누다

함재봉은 도쿠가와 막부가 다이묘들을 세 범주로 구분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신판 다이묘>로 도쿠가와 일족이다.

둘째는 <후다이 다이묘>로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에 충성했던 가문이다.

셋째는 <도자마 다이묘>로 세키가하라 전후에 복속한 외부 영주들이다.

조슈와 사쓰마가 대표적인 도자마 다이묘였다.

막부는 단순히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정치·영토·혼인·경제를 복합적으로 관리했다.

후다이 다이묘에게는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도자마 다이묘는 중앙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반란 가능성이 있는 번에는 전략적으로 주변 영지를 배치하여 포위했다.

조슈와 사쓰마 주변에도 도쿠가와에 충성하는 번들을 배치하여 군사적·지리적으로 억제했다.

앞 회차에서 설명한 참근교대 역시 이러한 통치체제의 일부였다.

즉 도쿠가와 막부는

<군사력 + 신분제 + 영지 재배치 + 혼인통제 + 경제적 압박 + 참근교대>

를 결합하여 약 250년의 평화를 유지했다.

함재봉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다.

<에도의 평화는 단순히 사람들이 평화로워서 유지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설계된 권력균형의 결과였다.>


3. 그런데 왜 조슈와 사쓰마는 살아남았는가

도쿠가와 입장에서 보면 조슈와 사쓰마는 가장 위험한 가문이었다.

그럼에도 두 번을 제거하지 못했다.

함재봉의 설명에서는 이것이 도쿠가와 정치의 절묘한 균형을 보여준다. 완전히 제거하면 다른 다이묘들이 불안해지고, 지나치게 강하게 통제하면 반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막부는 적을 없애기보다

<약화시키고, 감시하고, 중앙정치에서 배제하되 존속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이 막부의 약점이 된다.

살아남은 적대세력은 200년 동안 정치적 기억과 지역적 정체성을 유지했고, 19세기 서구세력이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막부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이 부분은 이번 강연의 가장 흥미로운 역설이다.

<도쿠가와 체제의 안정장치가 훗날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는 세력을 보존했다.>


4. 사쓰마와 조슈의 서로 다른 성격

함재봉은 두 번을 동일하게 보지 않는다.

조슈는 세키가하라 이후 도쿠가와에 대한 원한이 특히 강한 번으로 묘사된다.

사쓰마도 서군에 속했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했고, 지리적으로 일본 남단에 있어 막부가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다.

특히 사쓰마는 류큐왕국과의 관계를 통해 독자적인 경제·외교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차이가 19세기에 중요해진다.

처음에는 조슈와 사쓰마가 서로 경쟁하고 충돌했지만,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합쳐야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다.


5. 사카모토 료마와 사초동맹

강연에서 함재봉이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다.

료마는 도사번 출신의 하급 무사였다.

함재봉은 하급 무사들이 메이지유신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기존 질서에서 충분한 권력을 갖지 못했지만 교육을 받았고 무사로서 정치·군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료마는 서로 적대하던 사쓰마와 조슈 사이를 중재하여 <사초동맹>을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동맹은 막부 타도의 결정적인 기반이 된다.

즉 메이지유신은 단순히 천황과 귀족들이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지방의 하급 무사들이 지역 간 동맹을 만들어 중앙권력을 무너뜨린 혁명>

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함재봉은 메이지유신의 사회적 동력을 엘리트층 내부의 수평적 연대에서 찾는다.


6. 신분을 넘어선 연대

이번 회에서 특히 함재봉이 놀라워하는 것은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인물들이 신분적으로 매우 다양했다는 점이다.

귀족, 다이묘, 상급 무사, 하급 무사들이 서로 연결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와쿠라 도모미가 등장한다.

이와쿠라는 교토 궁정의 귀족이었지만 막부 타도와 왕정복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훗날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며 근대 일본의 국가제도를 설계하는 핵심인물이 된다.

함재봉은 여기에서 일본 사회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한다.

전근대적 신분질서가 매우 강했음에도 국가적 위기가 닥치자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연대했다는 것이다.

조슈·사쓰마의 무사와 교토의 궁정귀족이 협력하여 메이지유신을 추진한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조선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7. 혼인과 인맥도 정치혁명의 기반이었다

이번 강연에서 독특한 부분은 메이지유신을 단순한 사상이나 군사력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가문·혼인·혈연·인맥>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조슈와 사쓰마의 유력 가문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고 궁정귀족과 지방 다이묘 사이에도 복잡한 친족관계가 존재했다.

함재봉은 이런 연결망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치적 연대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평소에는 서로 경쟁하고 싸우더라도 위기가 오면

<“우리는 같은 엘리트다.”>

라는 의식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초동맹과 메이지유신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기반이었다고 설명한다.


8.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살아남은 가문들

이번 회차 후반부에서 함재봉은 상당히 긴 시간축을 사용한다.

조슈번의 명문가들이 메이지유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일본의 정치와 군사 엘리트로 이어지고, 다시 전후 일본 정치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기시 노부스케다.

기시는 조슈 지역과 깊은 연고가 있고, 만주국 산업정책에 참여했으며 전시 일본의 관료였다. 전쟁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수감되었지만 기소되지 않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정치에 복귀해 총리가 된다.

그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다.

따라서 함재봉은

<조슈 → 메이지유신 → 일본제국 → 기시 노부스케 → 아베 신조>

라는 장기적인 계보를 제시한다.

그는 이를 통해 일본 정치에서 지역과 가문의 연속성이 놀라울 정도로 길게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평론

1. 이번 회의 가장 뛰어난 점 ― 메이지유신을 1868년에 가두지 않는다

64회의 가장 큰 장점은 메이지유신을 1853년 페리의 내항이나 1868년 왕정복고에서 갑자기 시작된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함재봉은 무려 1600년 세키가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접근법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정치혁명은 외부 충격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기존 체제 안에 누적된 균열, 배제된 엘리트, 지역적 원한, 경제력, 군사력,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페리의 흑선이 메이지유신을 만들었다>

는 단순한 설명보다

<서양의 충격이 이미 존재하던 일본 내부의 정치적 균열을 폭발시켰다>

고 보는 편이 훨씬 깊은 설명이다.


2. <집단기억>이라는 관점도 매우 흥미롭다

조슈가 세키가하라 패배의 기억을 200년 동안 유지했다는 설명은 메이지유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기억>이 된다.

조슈에게 세키가하라는 패배한 전쟁이면서 동시에 정체성의 근거였다.

여기에는 한국사와 비교해 볼 만한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식민지배, 한국전쟁 같은 기억이 이후 세대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함재봉이 조슈의 세키가하라 기억을 설명하는 방식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정치>라는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3. 다만 ‘200년 복수’라는 설명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위험하다

이번 강연의 가장 재미있는 설명이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 할 설명이기도 하다.

<조슈와 사쓰마가 200년 동안 복수를 준비해 메이지유신을 일으켰다>

라고 정리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19세기 조슈와 사쓰마의 정치 지도자들이 실제로 움직인 이유에는 막부와의 오래된 관계뿐 아니라 서양세력의 압박, 번의 재정개혁, 군사현대화, 상업경제, 존왕양이 사상, 천황제 이념, 국제정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세키가하라의 기억은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자원>

이었겠지만

<메이지유신의 직접 원인>

으로 확대해서는 곤란하다.

함재봉 특유의 장점과 약점이 여기서 동시에 드러난다.

역사를 매우 긴 서사로 연결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 서사가 너무 매끄러워질 때 실제 역사의 복잡성이 사라질 수 있다.


4. 조선과의 비교에는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강연 후반에서 함재봉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신분과 지역을 넘어 협력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이 비교에는 일리가 있다.

메이지유신의 정치연합은 실제로 매우 놀랍다. 서로 싸우던 사쓰마와 조슈가 연합하고, 하급 무사와 궁정귀족이 협력했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은 협력할 줄 알았고 조선은 당파싸움만 했다>

라는 식으로 읽으면 위험하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암살, 내전, 쿠데타, 번 간 전쟁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메이지정부가 성립된 뒤에도 사가의 난, 하기의 난, 세이난전쟁 같은 무력반란이 발생했다.

즉 일본 엘리트들이 처음부터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화합한 것이 아니다.

<서로 죽이고 싸운 끝에 특정 연합이 승리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5. 기시–아베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흥미롭지만 ‘혈통 정치’로 과장하면 안 된다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를 조슈의 정치전통과 연결하는 설명 역시 매우 흥미롭다.

일본 정치에는 실제로 세습 정치인이 많고 정치가문이 장기간 영향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조슈의 메이지유신 정신이 아베 신조에게 그대로 내려왔다>

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 사이에는 제국주의의 붕괴, 미국 점령, 평화헌법, 냉전, 민주주의 선거정치, 경제성장 등 엄청난 단절이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사상의 직접 계승이라기보다

<가문·지역·인맥이라는 정치적 자원의 장기적 연속성>

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63회와 64회를 함께 보면

두 회를 연결해서 보면 함재봉이 말하려는 메이지유신의 구조가 훨씬 선명해진다.

63회에서는 <에도시대가 어떻게 근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사회적 기반을 만들었는가>를 설명했다.

참근교대, 도시화, 상업, 교통, 중앙집권화가 핵심이었다.

64회에서는 <그 체제 내부에서 누가 정치혁명을 일으켰는가>를 설명한다.

조슈와 사쓰마, 하급 무사, 궁정귀족, 사카모토 료마,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등장한다.

따라서 두 회를 합치면 함재봉의 메이지유신론은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에도시대의 장기적 평화와 경제발전이 근대화의 물질적 기반을 만들었고, 도쿠가와 체제가 억눌러 두었던 지방 엘리트들이 서구의 충격을 계기로 연합하여 막부를 무너뜨렸으며, 그들이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만들었다.>

이것이 함재봉이 조선 개화파가 바라본 <일본이라는 근대화 모델>이다.


종합 평가

64회는 63회보다 정치사적으로 더 흥미롭다.

특히 메이지유신을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현명한 일본인의 선택>이라는 단순한 성공담으로 설명하지 않고,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시작된 권력투쟁과 원한, 번의 경쟁, 신분제, 혼인관계, 지역 네트워크까지 추적한 점이 좋다.

이번 강연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문장은 오히려 함재봉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이 취지의 주장이다.

<역사는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조슈의 세키가하라 패배가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고, 메이지유신의 정치가문이 제국일본을 거쳐 전후 일본 정치에까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다만 그 ‘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역사적 변화를 혈통과 가문의 운명으로 설명하는 위험도 생긴다.

따라서 이번 회는 이렇게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메이지유신은 단순한 서구화가 아니라 에도시대가 만들어 놓은 경제·사회적 변화와 오래된 정치적 갈등, 새로운 국제적 충격이 결합하여 발생한 복합적인 권력혁명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조선 개화파가 본 일본은 단순히 ‘서양을 흉내 낸 이웃나라’가 아니었다.

<자기 전통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낸 살아 있는 실험실>이었다.

이것이 함재봉이 63·64회를 통해 조선 개화파의 일본관을 이해시키기 위해 길게 메이지유신을 설명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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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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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오늘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이제 두 번째 어 시간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새끼가라 전투를 통해서
도구가와 권력을 잡게 되는데 도구가와 그다음에
어떻게 통치를 하는지 특히 자기한테 저항했든 새끼가라 전투 때
자기한테 반대편에 섰든 대표적으로 조수하고 사스마번이 있는데이 번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왜 그 번들이 들이
결국은 독구가한테 맞서서 메이지을 주도하게 됐는지 조수하고 사스마와
독꼬와 막부 사이의 그 절묘한 정치적 균형 관계
이것이 어떻게 유지됐었는지 그 부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새끼가라 전투에서 독구가편에 맞서는 그 세력들이
대표적으로 조슈번하고 사스마번입니다. 그런데 어
사스마라 데는 이제 지금 큐슈 제일 남쪽에 있는 규슈죠. 그러니까 후곡가
우리 그 한국에서 한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항이 후코가
공항인데 그 후가 그죠 규슈 우리가 알고 있는 어 그
사스마약기 심수관 벌써 13대가 14대째 내려오는 조선의 도공들이
그렇죠 조선의 도공들이 잡혀간 가서 뿌리를 내린 데가 바로 서스마
후곡가부터 해서 가고시마까지 이제 그 부분 아니니까 거기를 이제 그 시마즈
가문이 통치를 어 했었던 거고 그다음에 이제 조슈는 모리 가문이
이제 통치를 했는데이 두 번의 공통점이 뭐냐면은 이제이
사람들이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도요도미한테 충성을 했던 거죠. 도토미가
죽어가면서 자기 다섯 명의 대신들 오다이로를 임명을 하면서 다섯
살짝짜짜리 자기 아들 히대요리를 좀 잘 보자해 달라 보필해 달라라고
했는데 이제 도구가 배신을 하는 거고 그 과정에서 끝까지 도돔에 충성했던
번들이 도크가와 충성하는 번들하고 이제 싸웠던게 그게 새키가라 전투였고
그리고 그 전투에서 이제 패해서 서군이 패했던 거죠. 보니까 조슈하고 사스마가 패왔던 겁니다. 근데
조슈하고 사스마는요. 임진한테 조선의
군대를 보낸 대표적인 번들입니다. 조선에 왔던 대부분의 군대들이 교수,
가고시마, 그리고 야마고치. 조선에 임재 때 가장 출을 많이 한게 모리
장군입니다. 모리라는 사람들이 야마지현의 지금의 야마고치원 조수번의
다이며들이었고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뭐 갓도 기호마사 어 권니시기나
아까 다 큐슈 출신들 아닙니까? 도요도미에
충성을 하면서 도요도미가 조선을 정보하자. 중국까지 정보를
하자 그랬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도요도미를 도았던 사람들이고 그리고
나중에 도요도 가문이 도요토미가 죽고 도구가가 거기에 반대
반란을 일으키니까 끝까지 도유도미를 지키려고 했던 것도 역시 모리가문하고 시마즈 가문 조하고
사스합니다. 군대도 가장 강했었고 전쟁 경험도 제일 많고
비록 조선 정보의 실패라고 패하고 돌아왔지만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었던 도유도미가
가장 믿는 두 번이었던 거죠. 자, 그러면 도구가와 입장에서는
새끼가라 전투에서 이겨서 그 연합권을 이제 저
격태를 시킨 시킵니다. 참 그 과정에서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은 권니 씨 권니 씨 육기학과 소소행정 권니
씨가 끝까지 충성을 하죠.도 더였더미 파에 그래서
새끼가라 전투에서 패해서 동군에 독구가와 편에 포로가 됩니다. 그
정도 장군이면은 명예롭게 할복을 하게 세포크를 하게 하는 거죠. 근데
권니 씨가 카톨릭 아닙니까? 권니 씨는
권니시 아구스티노라는 본명을 받은
독실한 카톨릭 신였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벌에 왔을 때도 임진단한테
침략해 왔을 때도 어떡합니까? 포르투갈 종부님을 모시고 와서 전쟁을
했죠. 그리고 울산성을 임진회란하고 정유재란 사이에 울산성을 7년 동안 점령하고
있으면서 그때 수많은 그 지역 사람들을 카톨릭으로 개정을 시켰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는 근데
카톨릭은 어떻게 합니다? 카톨릭은 카톨릭은 자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니 씨는 끝까지 할복 자살을
안 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유일하게
참수 형을 어 당한 그런 어 장수였다
그럽니다. 그러니까는 참이 얽혀 있는 얘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역사하고 1번 역사하고 근데 아무튼 어 고니 씨는 조선에 와서 못된 짓은
많이 했지만 아무튼 일본에서는 자기의 죽은이었던 도요더미 가문에
끝까지 충성을 하다가 어 새끼가라를 전투에서 패해서 죽게 되는 그런
장수였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막강한 장수들이 있었고 엄청난 전쟁
경험을 갖고 있는 조선에 건너가서 7년 동안 전쟁했던 펄펄 살아 있는
그 군인들이 있는 데가 바로 조주하고 샀음하죠. 근데 거기가 자기한테 반대를 했었으니까 비록 전투에서
당장은 이겼지만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니까 도구가와가 그 당시에 전력으로
봐서 이거를 완전히 몰살해서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워낙 크고
인구도 많고 사무라이도 많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그 대신 독구가 그다음부터 200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면서 통치하는
방법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뭐 참근 교대 이런 것도 다 시키고 해서 자꾸 힘을
빼려 그러고 자기네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그러고 이제 여러 가지 작전도 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현실적으로 뭐냐면 철저하게 자기한테 반대했던 번들은 절대로
중앙정치에 참여 못하 하도록 그러면서 어떻게서든지
영지도 뺏을 수 있데까지 많이 뺏고 그리고 경제력도 죽이려고 무진애를
쓰는 거고 그러면서 이걸 다스립니다. 근데 그 다스리는 방법 중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전국에 있는 번들을 세 가지 번을 3등급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남누는게 그러니까 후다이
다이며 신판 다이며 도자마다 다이며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후다이
다이묘라는 거는 그냥 자기네한테 충성했던 다이묘들 그 처음부터 끝까지
도구가와 측에 섰던 그런 다이며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도크가와 막부 정치를 하면서
전국적인 정치의 문제도 논하고 그럴 때에 자기네 다 그 영지만이 아니라
그럴 때에 그 중앙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번은 바로이 후다이
달며 출신들밖에 안 됩니다. 조슈하고 사스마 같은 데는 아예 생각도 못
하게 중앙 정부의 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거 생각도 못 하게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신판다이며 신판다이는
뭐냐면 도구가와의 반계. 그니까 도구가와 집안이 어 그 여러 굉장히
그 컸던 집안이고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어 심판 다이어들은
중앙 정부에도 참여를 하지만은 그보다도 더 어떻게 하냐면은 지금
사스마나 조수 같은 번은 언제든지 자기 치고 나올 수가 있 있지 않습니까? 자기한테 또 반란할 수
반기를 들 수가 있으니까 영지들을 없었던 영지들을 새로 만들어서
조슈를 꽁꽁꽁 에워싸는 땅 둘레 있는 땅을 그거를 차지하게 합니다.
사스마를 꽁꽁 에어싸게 해서 가고시마에서 나오지 못하게 에어싸는
역할을 그런 영지를 줘. 그게 심판다이며들입니다. 그죠? 그러니까 하나는 아주
독국가와의 충성을 하면서 독국과와 같이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그런 번이 있는 거고 그다음
번은 자기한테 반대했던 번들이 반기를 들고 나오지 못하도록
지리적으로 아예 꽁꽁 묶어 두는 그런 영지를 갖고 통치하게끔 하는 심판
다이녀들이 있고. 자,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가 도자마다이며입니다.이 도자마다이며
이제 조주하고 사스마가 대표적입니다. 새끼가 아라 전두 때 도구가에 맞었던
그 번들입니다. 근데 그러니까 한자로도 외양 그니까 외부에 있는
다이묘들이랍니다. 그러니까 도자마라는 말이 우리 식으로 한자를 읽으면 이제
외양 번이 되는데이 외양번은 전투에는 새끼가 때 지긴졌지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막강은 군대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를 무력으로만
다스릴 수는 없었던 일이죠. 그래서 어 그냥 자신한 도구가와가 나한테
충성을 맹세는 해라. 그래서 충성 맹세하는 신용을 이제 했던 거고
그래서 그고 영지를 대폭 축소시켜서 뺐고 그렇지만 다이어르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남겨 두는 거죠. 그 대신 당연히 늘 감시의 대상이고이 도자마의
다이며들은 꽁꽁 묶어서 애도 쪽으로 치고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다 막아 버리고 지리적으로도
아예 막아 버리고 그리고 절대 중앙 정치에 참여를 하면서 영향력을
넓히거나 이럴 수 있는 기회를 완벽하게 이제 차단을 하는게 그게 차단을 당하는게 그게 이제 도자마다
다이며들입니다. 대표적인 도자마다 나이며 이제 조슈의 시마 저 사스마의
시마즈 가문 그다음에 조슈의 머리가문 전부 다 임진한테 쳐들어왔던
사람들이죠. 그리고 희고 구마모도의 호소가와 가문 그러니까 호소가와 총리
일본 호소가와 총리 있지 않습니까? 일제 시대에 대해서 일본이
잘못됐다라는 그 저 사과도 했었고 총리가 된 저 그만둔 후에도 늘
한국에서 많이 초청해서 여기저기 회에 와서 옛날에 일본이 잘못한 거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하는 그
호석가와 총리의 그 집안이 대단한 희고
구마모도의 그 집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본에 가서 구마모도 성이라는 성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몇 년
전에 지진이 나서 조금 흔들렸었지만은 가장 멋진 아직도 그 성 그 그 성과이
기가막힌 어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그 성이 있는데 그 구마모도 성의 주인이
호석가와 집안입니다. 다이며지만 세등분을 해 갖고 각자 전혀 다르게
이용을 하면서 통치를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공건 일본을 그나마 중앙직권
적으로 힘을 안 이르면서 다스릴 수 있는가를
위해서 정말 도덕하와 사람들이 벼하 제도와 벼별 생각을 다 해야답니다.
절묘한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그 균형을 그렇게 싸우던 일본에 그럼 무시무시한
다이어들을 누르고 달래고 얼르고 포위하고 이러면서 인질로 잡고
그러면서 통치를 하는 것이 그게에도 시대의 정치 체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이
지도를 보시면은 이제 지도가 구체적으로 그게 보입니다. 아사노라는 다이어를 히로시마에 이게다는
오까야마에 이런데 이제 영지를 줍니다. 그럼 지도상를 보시면 오가야마 히로시마 이런 것은 전부 다
조슈가 조슈번이에도 쪽으로 향해서 가지 못하게 에도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그렇죠
번들이죠. 그다음에 어 호소가와는 구마모도에 그리고 구다는 후꽃가에 또
영지를 줘서 그러면 뭡니까? 사스마가 폭상할 수 없도록 말 거죠. 실제로
저런 식으로 해서이 조하고 사스마를 갖다 꽁꽁꽁 묶어두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자 그러면 그러면요 반대로 조하고 사스마 어떡합냐? 엄청난
영지를 빼앗깁니다. 그렇지만 살아남습니다. 그런데요.이 이 구전으로 내려온
얘기들인데 조주사스마 사가번은이 세 번이
임진라도 참전을 하지만은 특히 새끼가 아라 전투에서 끝까지 맞었던 번들인데이
번들은 도구가와 일단 머리를 숙이고 충성을 맹세하고
하지만은 도구가 시절 200년 내내 복수를 다짐합니다.
어떻게 다짐하냐면요. 조슈 번에서는요. 매년 정월 초화료가
되면은 원로 대신들이 그 번에 조시번에 원로 대신들이 다이어한테
와서 박후를 격태할 때가 왔습니까?라고
라고 문능납니다. 그러면 라이어가 아직은 이르다.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하면은 물러갑니다. 이게 매년이 사람들이 치료는 예식이었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새끼가라 전투를 잊지 않고
도크가와 도요더미 가문을 배신한 거를 절대 잊지 않으면서 언젠가는 우리가
복수를 하겠 하하겠다. 그러니까 매년
의뢰적이 의뢰적으로 어쨌든 이해식은 치르는 거죠. 가면서
혹시 바코를 격제할 때가 왔습니까? 그까 다오고는 돼 있다라는 거죠.
항상 그러면 이제 다묘가 아직은 아니다. 때가 안 됐다라고 그거를
매년 정월처로 한번 따라 했다 200년 동안 했다는 겁니다. 새끼가라 전투 이후에.
그리고 조수의 여인들은요. 애들이 발을 잘 잘 때 발을 꼭 동쪽
애도 쪽으로 발을 놓고 자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박후를 모욕하는
에더 정부를 모욕하는 임에서 그랬답니다. 그러면서 꿈에도 새끼가라
전투를 잊지 마라라고 아이들한테 아들들한테 꼭 조주의 여인들이 얘기를
했다 그럽니다. 사스마에서는요.
매년 새끼가하라 전투 전날인 9월 14일 날 조카마치 그러니까 성
성하의 마을에 있는 사무라이들이 전부 다 무장을 완전 군장을 하고 그리고
가고시마의 묘지라는 절에 모여서 새끼가 하라 전투에 대해서 묵상하고
다음날 조가마치로 돌아와서 새끼가 하라 군기
군기죠. 군기 전투를 전투가 어떻게 전개됐다는 걸 적어 놓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누가 낭독을 하면서 그걸 함께 같이 들었답니다.
매년 그러면서 새끼 가라 전도 뒤지 마라. 새끼가 전도 뒤지 마라. 복수해야 된다. 독구가와 우리가
복수를 해야 된다라는 거를 매년 타짐을 했답니다. 19구라는 섬 그니까 도사라는 번은
지금의 19구 섬이었었는데 수도는 고치였었고요. 그러면 그 거기를
통치하는 도사번을 통치하는 집안은 야마우치 집안이었습니다. 근데 야마우치 집안은 사실은 새끼가라
전투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야마우치 가문에다가는 원래는 어 갖고
있는 땅, 그러니까 그 소출량 소출량을 원래 6만석밖에 안 되는 작은 번이었는데
24만 석을 배출할 수 있는 엄청난 그 번호로 만들어 줍니다. 독구가가
그만큼 땅을 농토를 더 하살를 하는 거죠. 그 당시에 뭐 농토라는 거가 경제력을 대변하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야마우치 가문은 그 도사번의 야마우치 가문은 끝까지 사실 굉장히 도구가와
고마워하고 메지신 일어날 때도 도구가와 편을 버리질 않습니다. 안 버리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런데 왜이 말씀을 드리냐면요. 그 도사번에
제일 유명한 사무라가 누구냐면 사과모두라는 사람입니다. 사과모도 류마가 누굽니까? 나중에 우리가 또
자세히 여러 번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사건모도는 조슈하고 사스마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다투고 있을 때 둘이서 야 당신들이 힘을 합쳐야지 독구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면서 소위 말한 사초동맹 사스마와 조수 동맹을 끌어내는
유도해내는게 그게 사건 오토리오마입니다. 그래서 그 사카모토리오마가 일본 사람들이 추앙을
하고 있는 가장 그 근대의 일본의이 메이지신을 일으킨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에 하나로 늘 꼽는게 그래서 이제 사과모두리오마인데 근데이 사과모도리오마는
도사의 출신이거든요. 근데 말씀드린 대로 지금 도사번의 번주는 별 저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느냐? 왜 사과또마는 번주와는 달리 끝까지
도구가와 반대를 하느냐? 왜 그러냐면요. 원래
도사번을 통했던 집안이 조속카베라는 집안이었습니다.이
조속카베라는 사람은 굉장한 장군이었었는데이 사람은 도였서 싸웠습니다. 새끼 가라
전투에서. 그래서 새끼가라 전투에서 싸우면서 결국은 저서 참 장렬하게 싸웁니다.
그 전투하던 흔적 같은 전적지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그런데요.
그때에 여기서 져서 처형을 다합니다.
그러면서 그 번의 통치권이 야마우찌 가문으로 이제 넘어간 거죠. 그런데
그러면 원래 조속합의 가문이 오랫동안 통치화된 번이었 도사였으면은 특히 그
도사 번에도 높은 사무라이들은 당연히 야마우치
가면이 들어오면서 다 갈아버렸겠죠. 그런데 저 밑에 있는 제일 하급
무사들 소위 말하는 향사 그니까 시골에 남아 있는 사무라이예요.
그러니까 조카마치 같은 그 성의 중심
성을 중심으로는 그런 그런 마을에도 살지 못하고 그냥 그 정도에도 못 살고 저 마을에 사는 그렇죠. 시골에
사는 사무라이들 향사라 그러죠. 고시라 그러죠. 이번 말로이 사람들이
사람들은 사실은 끝까지 저속합의 감문에 충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과마토리오마가 바로 그런
하급 무사 출신이죠. 도사회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게 일본의 하급
무사들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사과머도하고 자기
번은 사실은에도 시대 내내 굉장히 도크가와의 은혜를 많이 입고 번창하는
번이었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새끼가라 전투에서 원래 자기의 죽은이 원래
죽은이 도미었었고 도yo가 편에 반대를 하다가 죽임을 당했 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라는 걸 이거를 를 하급 무사들이 잊어버리지 않는 거예요. 200년이 지난 다음에 그
하급 무사들이 역시 또 지금 아까 조슈와 사스마의 사무라이들이 매년
정월 초로가 되면 어떡하고 아이들을 뭐 동쪽을 보고 자기 발해도 하고 이렇듯이 새끼가라 궁길를 매년
을듯이이 사람들도 절대로 있지 않는 거죠. 그니까 하급 사무라이들의 몇대 손일
텐데도이 사람들이 그걸 안 잊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사초 동맹을 일으켜서
이끌어내면서 메이주신을 성사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또이
도자마번이었던 도사의 사건을 두려워합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도자마 다이묘들은 아까 심판 다이며나 후다이 다이며 달리 중앙정치에는 아예 접근도
못하도록 이제 차단을 당하는 거죠. 그런데 그러니까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이 도자마 다이며들 조수와 사스마 같이 중앙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돼 버린 그 번들은
누구랑 혼을 유지하느냐면은 똑같이 자기네와 비슷하게
중앙 정보로부터 완전히 제재당하고 그러면서
시골에 파묻혀서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린 인실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특히 혼인 관계를 계속해서 맺습니다. 나중에 메이주신
일어날 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황실 옆에 있는 쿠게 옛날 귀족들
교도의 귀족들 그 원래 귀족들과 황실하고이 조주하고 사스마 가문이 혼내으로
계속해서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는 그 쿡의 옛날 황가의 그 그 진짜
귀족 집안 일본의 진짜 귀족 다이묘들은 그냥 군인들이었고 사실 무장들이었고 다이묘들이 힘은 있었고
경제력도 있었고 그랬지만은 진짜 가문의 뭐 그 뭐라 그러냐 뭐
혈통이나 무슨 뭐이 이런 걸로 따지면은 이제 천왕 옆에 늘 몇백 년 동안 교도에서 사는 그게 이제 진짜
가문들이었는데 여기 사람들하고 하고 조수하고 사스마 도사의 하급
사무라이가 손을 잡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또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일본의 가장 높은 귀족들이 대표적인게 이제 이화꾸라
그 이와꾸라 도이라고 메이주신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이와꾸라 사절단이라는 걸 통해서 일본 정부가 2년 동안 해외를 떠돌아다니면서 유학을 다닐 때에 그
놀라운 이학 이학구라 사절단을는데 그 이학구라입니다. 근데이 사람도 크게
왕실 황실 옆에 수백년 동안 내려오는 대표적인 귀 귀족 가문 중에
하나예요. 그러니까 저는 처음 역사를 보면서 가장 오래된 귀족 감은
사람들하고 가장 지방에 있는 번에
하급 사무라이들하고 손을 잡아서 중간에 있는 수호근하고
다이며들을 쫓아내는게 그게 그게 메이지신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사실 학급 사무라이들만 했어도 안 되는 거죠.
청통성이 안 생기니까. 아무리 똑똑하고 잘라고 했더라도 그런데
오크보도심미치 사이고다까 머리 뭐 기도다요시 도도 저 이또 히로부이
야마가리 또 뭐 이런 하급 사무라이들이 이와꾸라 사회원지 이런 최고의 귀족
감문하고 손을 잡습니다. 물론 도구가에 대한
원한이 똑같이 있었던 점은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 계층으로 보면은 더 이상 차이가 날 수 없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힘을 합쳐서 서로를 전혀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같이 일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은 이또 이또
히로부미가 화족제도라는 걸 만듭니다. 그러니까 뭐 백작 남작 후작 이런 거를 일본
사람들이 만들지 않습니까? 그걸 이도 히로부미가 만드는데요. 그 화족 제도를 만드는데 있어서 그 놀라운게
뭐냐면 그 화족 중에는 전직 다묘 자기네가 쫓아냈던 250개
변의 다이들 그다음에이 공가 교도에 있었던 수백년 된 진짜 귀족들
그리고 자기 하급 사무라이들을 끼어서 끼워넣어 갖고 500명을
서추려 갖고 이제부터 우리는 화족이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귀족이다. 이렇게 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이 제기를 안 하고 최고 귀족 가문하고
다이묘들 가문하고 하브스 사무라이들이 똑같이 서로를 대하면서 일본을 만들어
나가는게 그게 또 매주시입니다. 그러니까이 사람들이 무슨 이유였지 뭐 나라를
위해서 그랬든지 뭐를 위해서 그랬든지 정말로 그런 신 오래된 신분 제도
같은 거를 다 극복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똑같이 힘을 합치면서 같이
논의하고 그러면서 나라를 바꿔 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굉장히 힘들었던 그런 양상들입니다.
그 혼을 유지한게 이제 사스마의 시마즈 가문이 그
쿠의 집안 중에 제일 유명한 집안이 아니라 권호의 집안입니다. 권호에 나중에 이제 정치인들도 나오고
그러는데 건호의 집안하고 혼 결혼을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의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은 어쨌든 도자마다 다이모로서
같이 재회 재회당하고 열외당하고 있던 황실과 쿠게들하고 손을 잡는데 그 유
유대 관계가 결혼을 통해서 유지가 되는 거고 그런 맥락이 있으니까 나중에 메이주신을 같이 일으킬 수가
있었던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거죠. 시마즈 가문이 왜
고의 가문하고 혼맹이 됐느냐? 이것도 놀랍습니다. 시마즈 감은요. 옛날에 언젠가 권호의
가문의 청직이었답니다. 청직기를 했었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집안 마님하고 청지기 하고 결혼을 시키는 겁니다. 그니까
이것도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어쨌든 그런 청직을 했다는 인연
때문에 심화스 가문을 권호의 가문이 굉장히 각별히 생각했고 그래서 혼을
유지했던 거고 그러니까 나중에 200년 후에 대해서 혁명을 일으킬 때 같이 힘을 합칠 수
있는 그런 또 하나의 연줄 기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사의 야마오치 가문도 교도의이 산조
가문 그 제일 그 명망 있는 가문들하고 어 정치를 맺었고 조슈의
모리 가문은 황실과도 계속해서 혼을 유지를 합니다.이
이 도자마다이며들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정한론을
외쳤던 원래 정한론 임진란이 정한론이었으니까
조선을 정발하자라는 얘기가 그래서 이제 도요도 밑에 건너갔던 거죠. 그러면 정한눈을 일으켰던
조슈 머리 데르데모도라는 대표적인 그 다이묘 그다음에 주슈
쪽에 뭐 갓토기어 마사 그다음에 어
근니씨나까 이런 사람들이 이제 끝까지도 그니까 도요도미를 도와서
임진을 일으켰다가 그랬다가 임진화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도요더미에다 힘을
하나도 치어주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큰 새를 유지할 수 있었던 도구가와
임진내란에 갔고 도였더에 충성했던 사람들하고 맞서서 싸워서 결국은
조선에 출했던 파와 출하지 않았던 파가 붙어 갖고 전쟁을 전투를 했던게 그게
새끼가 전투였고 조선에 출하지 않았던 도구가와 이겨서 정권을 잡으면서이
조수와 사스마를 도자마 번니라고 하면서 축소를 시키고 견제를 하면서 꽁꽁 묶어두면서
평화를 유지하는게 그게 200년 동안 유지하는게 그게에도 시대인 거죠.
그러니까 도구가와가 권력을 잡자마자 1609년에 조선한테 광해군 때 와 갖고 뭐라
그럽니까? 우리 임진나란 이후로 완전히 모든게 끊어졌는데 그러지 맙시다. 우리 다시
교류를 합시다. 그게 뭡니까? 그게 그때 돕고 가가가 뭐라 그럽니까?
우리는 전제 우리는 군사 안 보냈어. 조선에
그죠?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그래. 근데 맞아. 너희는 군대 안 보낸 거
맞아. 근데 그 대신에 몇 가지 조건을 들어 주면 우리가 학게 그
왕릉들 독을해 간 것들 도굴꾼들 그거 다 잡아다가 받쳐 도로
대령해.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독가가 들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조선하고 일본의 교류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새로운 조선하고의 약주 그 조약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도구가와는 정한론에 반대서 조선에 쳐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중에 조주번에서
대표적으로 도구가와 저항을 하면서 특히 도구가와
쇠국을 하는 거에 저항을 하면서 개곡을 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왔을 때 폐리 제독의 함대에 미랑을 해서도 내가 가서 미국을 배워야 되겠다 그러다가 잡혀서
결국은 처형을 외국령을 어겼다고 처형을 당하게 되는
일본 근대화의 또 다른 영웅인 요시다 쇼인이 바로 조주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한 논을 일으킨 사람 중에 하나죠. 근데 왜냐면 옛날 자기네 조주번의
선주 선조들은 다 이미 임진회란 때 도토미를
도와서 이미 정한을 한번 시도했던 또 그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역사와 우리 역사를 조금 엮어 보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데요. 자 조수보는 야마고치 현입니다. 지금
아베신조 일본 총리요. 얼마 전에 암살 당하지 않습니까?
그 아베 신조는 야마구치 현 출신입니다. 야마구치 현이 자기 지역구입니다. 그냥 거기에
정치인이라는게 아니라 조수번 번의 아주 오랜 뿌리깊은 놀라운 명만
가문입니다. 우선 아베총리 본인의 붙이는 아베신따로
아베신따로라고 들어본 분들도 연세 조금 있으신 분들 옛날에 이제 일본 외무상을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외무상했고 아들이 이제 총리 대신을 수상을 했던 거고요. 외할아버지가 바로 기시 노브스케입니다. 자, 기시
노브스케가 누구냐면이 사진 보시면 나오는이 기시가
만주국을 건설한 사람입니다. 관동군을 만들어서
만주국을 건설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32년에
새 나라를 일본이 만드는 걸 시도라 하죠. 그게 만주국 아닙니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위를 데려다가
꼭시로 앉혀서 생기는 그 만주국을 만들고 그 만주에서 철도를 놓고
만주를 산업 강국으로 유전을 거기 따친 유전을 개발을 하고 그러면서
만주를 동아시아 중공업의 중심 지역으로 만들고 그래서 이제 거기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만주를 가서 보고 대표적으로 그때 박정희라는 젊은
사람이 만주에 있는 봉천이 그 일본
사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일본 육사에 가서 졸업을 하고 그리고 다시
관동군에 되면서이 새만주국이라는 걸 일으키는 일본이
완전히 새 나라를 만드는 과정을 도로를 어떻고 철도를 어떻게 놓고
제철서를 어떻게 만들고 이런 거를 다 봅니다. 근데 그 일을 읽어내는게
기신 노브스케고 그것 때문에 그리고 2차 대전 중에는 일본의 상공 대신을
하는 거죠. 그니까 일본이 미국하고 전쟁할 때에 끊임없이 배를 만들고 전투기를 만들고 하는 그 조달라는
역할을 하는게 기신우브스케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기신브스케은
1급 전범으로 미군이 체포를 해서 스가모 형무소 그러니까 가장 중제를 지은
그 전범들이 갇힌 데가 스가모 항무소인데 거기에
이제 그 3년 동안 그 수감이 됩니다. 45년에 잡혀서 48년까지
수감 생활하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냉전이 일어나는 거죠. 나치 나치가
없어지고 나니까 독일의 반적 동독을 소련이 가져가고 동구 유럽을 다 가져가고 그러면서 중앙아시하고 뭐
이거를 다 공산화를 시켜 버리고 중국도 49년이 되면 완전히 공산화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미국이 겪으면서 특히 일본에 있었던 메가더가 일본에서
군정을 45년부터 52년까지 7년 동안 메가다가 군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군정을 하면서 어 처음에는이
놈들이 전범이라 그래 갖고 다 잡 잡아들이고 그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감옥에 넣었던 사회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들 다 풀어 줬어요.
그랬더니 지금 세상이 또 바뀌어 갖고 이번에 어떻게 됩니까? 냉전이 일어나 갖고
전 세계가 공산화가 되는 거 같고 일본조차 이제 공산화가 될 거 같으니까 그다음에 어떡합니까?
미국이 완전히 정책을 바꿔서 거꾸로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다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고 감옥에 있었던 전범 기신부스켓 같은 사람들 다 풀어 주는
거죠. 왜? 반공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이 사람들이 일제 시대
내내 일본이 군국주의 통치하면서 제일 많이 탄압을 했던게 뭡니까? 공산주의자들 아닙니까? 막시스라니까.
그러니까 다시이 사람들을 이용하에서 기시노브스케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기신브스케가
그때에 나와서 만드는 당이 자민당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나서
516 혁명 후에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가 먹고 살려면 일본하고 교류를 다시 시작하고 교육을 해야지만
되겠다. 그러니까 한일 국상화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뭐 김종필 씨를 보내 가지고 협상을 하고 그게 기시
총리입니다. 군국주의자였고 하지만은 뭐를 했던
사람들입니까? 일본을 2차대전 내내 미국하고 싸울
수 있는 그 힘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입니다. 상공부 장관을 영하고 그전에는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세생으로
일으키는 역할을 해봤던 사람들이죠. 그 사람 때문에 한일 협정이 일어나기
일어나는 겁니다. 자, 그러니까 역사라는 건요. 절대 단순하지 않고 이렇게 깨끗하게 정리 안 됩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얽힙니다. 그리고 기시노브스케의
친동생, 그러니까 아베의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의 동생 작은 외할아버지는
누구냐면 사토에이사쿠 총리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 계시게 60년대
70년대 초까지 6년간 일본의 최장수 그때까지 최장수 총리를 했던게 사도
애사구 총리인데 이름이 달라서 우리가 자꾸 일본은 성을 많이 바꾸고 본인들이 바꿀 수도
있고 특히 항상 나면은 다른 집의 양자로 다른 집안의 양자로도 많이
갑니다. 그리고 자기 집안하고 이걸 연을 유지하면서도
그대로 새 집안에 성을 씁니다. 사도의 사건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친형제고 친형제가이어서 총리 대신을 여김을 하는데 사람들은
친형제인지도 잘 모릅니다. 뭐 일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니까 대단한 집안인 거죠.
아베총리의 고조분은요. 누구냐면은 오시마 요시마사라는 장군입니다.이 이
사람은 조슈의 사무라이 역시 사무라이 출신으로서 보신 전쟁 그러니까 마지막에
사초 동맹군하고 독구가와 번하고 마지막에 싸웠던 전쟁을 보신
전쟁이라는데 그 보신 전쟁에 참여해서 혁한 공을 세우고 그리고 일본의
제국군의 장교로서 러일전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차면서 엄청난 계급에
올랐던 사람이 오시마 요시마사 장군인데이
오시마가 또 누구냐면요. 청일 전쟁 때 동학군을 제압한다 그러면서
민시 척적들이 저 민영익 민영준이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청나라 군데 좀 요청을 하자. 그래서 그때에 청군을 요청을 해서 이용장이 청군을 보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총군이 와서 진주성을 전주성을 합락한 동화권을
토벌을 하러가 내려가는 거죠. 전주로. 그러니까 그때에 일본이 뭐라
그럽니까? 야, 우리가 옛날에 갑신정변 직후에 우리가 텐진 조약을
맺어서 했던 얘기가 뭐냐면 우리가 누구 한쪽이 조선의 출을 할 때는
상대방한테 알 통보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리고 도대체 왜 동학란이 일어났는데
너희가 천군이 왜 거기를 가느냐? 우리도 군대 보내겠다 이러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때 청나라도 그랬고 민영학
민영익 이런 사람들도 한 얘기가 뭐 아니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사실 청군을 조선에 보낸다는 거는 자기 나라에 자기 군대를 보내서
경찰을 보내는 거 같은 것이지 딴 나라에 출하는게 아니라는 이런 논리를 쓰는 겁니다. 그랬더니 일본이 그냥
말이 되는 소리냐? 속방이 뭔지 모르겠는데 우리 그런 거 인정 안 한다. 그러면서 1번이 먼저 출을 해
버리죠. 그래서 천군은 남양만을 통해 가지고 전주성으로 가고 있는데 일본은
아예 곧바로 재물포를 통해 가지고 여단을 혼성 여단을
투입을 해 버리는 거죠. 그래서 경복궁을 장악하고 갑장을 시작을 하면서 동시에 군대를 남쪽으로
내려보내면서 전주에서 올라오는 천군하고 어디서 붙냐면 성환
지금 천안 근처입니다. 거기에서 맛붙는 전투가 그게 성환
전투가 최초의 청일 전재 최초의 육상 전투가 성환 전투입니다. 그 성원
전투를 이끄는 일본의 혼성 여단을 이끄는게 바로
오시입니다. 지금 그 사람의 고손이
아베총리 그 사람의 손주가 기시 노브스케
진짜 얽히 더 이상 얽힐 수 없게끔 우리 역사랑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 역사와 우리 역사를 볼 때이 얽혀 있는 모습들을 이해를 하면서
이해를 하면서 봐야지 일본이 하는 일이 뭐고 우리가 하는 거가 뭐고 왜 일본의이 지역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거고 우리 이렇게 어떻게 하는 거 이거를 지금 우리가 명확히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한 사람만
더 말씀드릴게요. 기왕 기왕에이 말씀을 드렸는데 뭐냐면은 아베 총리 밑에서 계속해서 부총리를
했던 아소다로 부총리 있지 않습니까?이 이 사람도 총리 대신도 여김을 한 사람입니다.이
사람은요. 외할아버지가 요시다 시계루 일본 전후
초대 총리입니다. 요시다 시계로 그래서 그 요시다 덕을서 일본 전후 일본의 부흥을
일으키는 그 총리인데 그러니까 요시다 총리의
민주당하고 기시노브스크의 자유당이 합쳐서 자유민주 자민당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거기에서 기시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데 아무튼이 요시다의 외손주가 또
아베 총리하고 같이 정권을 6년 동안 끌어갔던
아소다로입니다. 그리고 요시다 시계로 그러니까 그 외할아버지 요시다 시계로는 바로
도사번 출신입니다. 사코모토 료마가 나온 그 도사번 출신입니다.
그 사람이 전후 1번을 일으키는 또 요시다 총리입니다. 그리고 요시다는
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삼걸 유신삼걸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까머리 기도 닷가시인데 그 오크보 도시미츠의
손주 사위입니다. 그러니까 도사번하고
사스마번하고 연결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매주실 일으키는 거니까 조주번의 아베와 사스마의 오쿠보와 도사의
료만의 집안하고 이게 다 연결이 되는 겁니다. 뭐 이제는 이제 아베 총리가
암살이 돼서 그 그 정권은 무너졌지만은 결국은 아직도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자민당 그리고 아소다로
같은 사람 결정적인 그 정권을 유지한 결정적인 역할 하는 사람인데이
사람들이 보 뭡니까? 현대판 사초동맹입니다. 현대판 조주와 사스마하고 도사가
일으키는 그 당이 자민당이고 그 자민당이 메이지신도 일으켰지만 전
후에 다시 일어나서 뭡니까? 자민당을 유지하면 사실 일본을 지금까지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 메이지신을 통해서 일으켰던 당과
지금 전후에 자민당이 조선하고 끊임없이 사실은
뭔가를 하려고 계속해서 역할을 해오는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임진한 때부터 시작해서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그러한 연줄이 있습니다. 지금
그만큼 일본의 역사, 일본의 집안들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얽히고 설히고
몇백 년 동안 얽혀 있습니다. 우리가이 역사 알아야 됩니다.이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지 우리가 한일
관계가 뭐고 한일 관계를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정립해야 되는지 비로써 알 수가 있을 거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깊이 있게 일본 역사를 우리가 함께 들여다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메이지신을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어 일본 내의 정치 그다음에
일본 내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가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역사랑 얼마나
얽히고 설켜 있었다라는 거 그 부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메주지를 읽히는 그 세력들이 어떤 배경을 갖고 있었고
어떤 이념적인 어떤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고 도크가와 막부와의 관계가
모였었고 왜 그래서 그러한 왕정복고를 통해서 근대하오로 나가는 일을 그런
일을 도모하게 됐는지 이제 그 그 요인들을 우리가 이제 쭉 살펴보기 위해서 좀 역사를 깊이 들어가
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요.에도 시대의 경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에도 에도 시대는 어 지금이 그림에서
보듯이 그때 당시에 외국 유명한 작가가 와서 뭐 일본에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그 대표적인 찍은 사진 중에 하난데 이게 뭐냐면 당시 도쿄 에도에 있는 번저들입니다.
적게 그 각 번의 영주들이 와서 지어놨던 엄청난 그 저택들이 질비하게
늘어서 있는 에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경제 수준이 생활
수준이 높았는지 아주 놀랍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간또 평야, 관동 평야,에도
부근의 이런 평야를 보면서 이거는 우리 영국 영국의 시골보다도이
농토보다도 훨씬 더 달 정돈이 잘 돼 있고 풍요롭다라고 놀랄 정도로 그렇습니다. 조선은요
그때에 너무너무 가난했습니다. 정말 제가 헬조선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로
힘들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제 조금 더 말씀을 드리면 드린다면은 일본이
조선과는 달리 주자학 같은 한 이념에 매달렸지 않았다는 사실 굉장히
개방적이었습니다. 개방적일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개방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게 뭐냐면 대지마한 조그만 인공섬을
만들어서 거기에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지점을 내서 거기에
상주를 하면서 일반일중 일본 사람들하고 교류는 최소화를 시키니다. 왜냐면 인공선물
만들어서 다리 하나로 해서 딱 지키니까 조선의 외관 같은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오는
수많은 새로운 서적들과 이런 것들이 퍼지기 시작하는 거고 그걸 통해서 일본의 란각구 난학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거고 그것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또 국학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고학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사상적으로 굉장히 다양하고 번영된 그런 사회를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화 이전의 1번, 본건 1번, 전근대 1번의 모습은 우리가
조선의 조선을 봐 갖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려 있었고 풍요롭고
다양한 사회였었다라는 거. 그랬기 때문에 메이지신이라는 거를 일으킬 수
있는 지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여지가 있었다라는 거.이 이 부분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지 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을 했었고 우리가 우리도 국가라는
거를 일으킨다라는 거 국가라는 걸 지킨다라는 건 이런 거구나라는 거를
저는 메이지 유신을 공부를 하면은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랑 뭐 뭐 사이가 나쁜 과거에 여러 가지 뭐가
있었던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뭐 그런 측면도 우리가 알아야 되는
측면이 있지만은 어쨌든 1번이라는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이 제가
초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너무 놀랍기 때문에 너무나 배워야 될 점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이 점을이 부분을 정말로
심도 있게 공부를 해야 된다 그고 생각을 해서 다음 시간부터는 우선 1번이에도 시대의 경제가 가 어떻게
유지가 되고 있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함께 어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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