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1931~2020)의 생애에서 식민지 시기(일제강점기)는 그의 사상적 원형과 '절대적 평화주의'가 싹튼 가장 결정적인 형성기였다. 그는 전시 체제하의 참혹한 사회적 환경을 목도하고 개인적인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일찌깃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김낙중의 식민지 시기 경험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전시(戰時) 체제하에서의 유년기와 전쟁의 체화
김낙중이 태어난 1931년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과 군국주의 광풍을 본격화하던 해였다.
6살 무렵에는 중일전쟁을 위해 대륙으로 날아가는 일본 전투기들을 바라보았고, 식민지 민중이 전쟁 동원 체제 속에서 겪는 수탈과 압제를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2. 근로동원을 피하기 위한 진학과 식민지 교육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이 극에 달하자 일제는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며 인문계 중학생들을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한 '근로동원'으로 강제 차출하였다.
당시 소년 김낙중은 징용과 근로동원을 피하기 위해 학업 실습지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에서 제외되던 경성농업중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3. 폐병(폐결핵)과 사상적·종교적 탐구의 시작
식민지 시기 말기인 16세 무렵, 김낙중은 당시 치명적인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폐병(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기로에 섰다.
죽음의 공포와 식민지 현실이라는 이중의 암담함 속에서 그는 남대문도서관을 다니며 철학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였다.
종교와 철학의 섭수: 일요일 아침에는 새문안교회에서 기독교의 '사랑'을 배웠고, 오후에는 조계사를 찾아 불교의 '자비'를 들었으며, 유교의 '인(仁)'과 노장사상을 접했다. 또한 YMCA 등에서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과 인간에 대한 의식을 넓혀갔다.
종합적 의의
김낙중에게 식민지 시기는 단순히 일제의 억압을 받던 시대를 넘어, 전쟁의 참상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사상적·인간적 자아를 확립한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형성된 동양과 서양의 성찰적 사상,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고뇌는 해방 이후 그가 한국전쟁의 비극을 목도한 뒤 "서로 죽이지 않고 더불어 사는 길"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통일·평화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만든 기초가 되었다.
김낙중의 식민지 경험은 <강한 민족차별의 체험>이나 <항일운동의 체험>이라기보다, <전쟁으로 점점 잠식되어 가는 식민지의 소년 생활>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그는 1931년생이므로 해방 당시 만 14세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리영희(1929년생)나 김은국(1932년생)과 거의 같은 ‘식민지 말기 소년 세대’에 속합니다.
김낙중 자신의 훗날 회고를 보면 그가 식민지 시기를 기억하는 핵심어는 <전쟁>입니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해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고 회상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사실상 전쟁과 함께 시작된 삶으로 설명합니다. 여섯 살 무렵에는 일본 군용비행기들이 중국 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억합니다. 즉 식민지라는 정치적 개념보다 먼저 어린 김낙중에게 들어온 것은 <비행기·군대·전쟁 분위기>였습니다.
1. 파주의 농촌 소년에게 식민지는 처음부터 ‘일상’이었다
김낙중은 193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 일본의 지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일부였으므로, 어린 시절의 학교·행정·언어·전쟁동원 체제가 모두 당연한 생활환경이었습니다.
이 점은 1917년이나 1922년생처럼 식민지 중기에 학교교육을 받고 청년기에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세대와 상당히 다릅니다.
김낙중 세대가 세상을 의식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제국 자체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급속히 군사화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식민지 근대란 철도, 학교, 도시문화 같은 것보다도 <전쟁국가의 일상화>와 훨씬 밀접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훗날 평화주의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2.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근로동원을 피하기 위해 농업학교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 말기의 김낙중 경험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 <경성농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훗날 그는 그 이유를 매우 현실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반 중학교 학생들이 근로동원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농업학교 학생들은 학교의 실습농장에서 일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근로동원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농업학교를 택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일제 말기 조선인의 경험을
<일제의 강제 → 조선인의 저항>
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김낙중의 기억은 훨씬 생활사적입니다.
소년과 가족에게 우선적인 문제는 거대한 ‘항일’ 담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동원을 피하고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가>
였습니다.
즉 식민지 조선의 일상에는 협력과 저항 사이에 매우 넓은 <적응·회피·생존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김낙중의 농업학교 선택은 바로 그 좋은 사례입니다.
3. 그런데 농업학교에서도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근로동원을 피하려고 농업학교에 갔지만, 학교생활 자체가 이미 전시체제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농장에서 노동을 했고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전쟁 말기의 교육이 단순한 교과교육이 아니라 생산과 노동을 포함하는 체제로 바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김낙중의 회고에서도 학교는 자유롭게 공부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전쟁경제에 연결된 생활공간으로 나타납니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서 폐병에 걸렸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파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회복한 후 서울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중학교 2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청소년기의 경계선에는 아주 선명한 단절이 있습니다.
<경성농업학교 — 일제의 전쟁체제>
→ <폐병과 귀향>
→ <1945년 해방>
→ <서울중학교 — 새로운 대한민국의 학교>
입니다.
4. 그런데 그의 회고에는 ‘일본인에 대한 강렬한 원한’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김낙중의 식민지 경험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입니다.
<굽이치는 임진강>과 훗날 인터뷰를 보면, 어린 시절의 일본인을 악인으로 유형화하거나 일본인 교사에게 받은 민족적 모욕을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는 그가 일본인 교사나 학생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창씨개명·황국신민서사·신사참배·일본어 상용 등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까지 충분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굽이치는 임진강>에는 ‘소년시절’이라는 별도의 장이 있지만, 현재 온라인에서 확인되는 서지 정보만으로는 그 장의 전체 내용을 읽을 수 없습니다. 책은 1985년 삼민사에서 406쪽으로 출간되었고 제2장이 <소년시절>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공개되어 있는 그의 자기회고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일본인이 나를 차별했다>
라기보다
<나는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자랐다>
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5. 김은국의 <잃어버린 이름>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 분명합니다
김은국은 1932년생이므로 김낙중보다 한 살 아래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이름>에서 식민지 경험의 중심은 <민족적 굴욕>입니다.
일본식 이름을 강요받고, 조선인의 이름과 자존심을 빼앗기며, 학교와 국가가 한 소년에게 “너는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험이 서사의 중심입니다.
김낙중에게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의 기억에서는
<민족적 굴욕>보다 <전쟁과 동원>
이 더 전면에 나옵니다.
간단히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 김은국 | 김낙중 | |
|---|---|---|
| 출생 | 1932 | 1931 |
| 식민지 경험의 중심 | 민족적 모욕 | 전쟁과 동원 |
| 기억의 대표 장면 | 창씨개명·학교 | 군용비행기·근로동원 |
| 일본제국의 모습 | 조선인의 정체성을 빼앗는 국가 | 소년까지 전쟁에 끌어들이는 국가 |
| 훗날 문제의식 | 잃어버린 민족정체성 | 전쟁과 폭력의 거부 |
물론 김은국의 작품은 소설이고 김낙중의 것은 회고이므로 직접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연령대의 두 사람이 식민지 말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6. 그리고 이것이 훗날 김낙중의 평화주의와 연결됩니다
김낙중의 생애 전체를 생각하면 식민지 경험의 의미는 1945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 무렵 태어나고
→ 중일전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 태평양전쟁기에 중학생이 되고
→ 1945년 일본 패전을 경험하고
→ 불과 다섯 해 뒤 1950년 한국전쟁을 경험합니다.
즉 그의 생애 첫 20년 가운데 거의 전부가
<만주사변 →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 해방과 분단 → 한국전쟁>
이라는 연속적인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김낙중의 경우에는 식민지 경험과 한국전쟁 경험을 별개로 떼어놓으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과
<남북한이 서로 죽인 한국전쟁>
사이에 하나의 근본적인 공통점이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국가와 이념이 인간에게 서로 죽이라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그의 회고를 토대로 한 제 해석입니다. 김낙중 자신이 정확히 이 문장으로 설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 태어나 화약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고 회고하고, 훗날 한국전쟁을 경험한 뒤 극단적인 평화통일운동에 뛰어든 그의 생애를 연결하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7. 그래서 김낙중의 식민지 회고가 특별합니다
앞서 함께 살펴본 여러 회고록과 비교하면 김낙중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식민지 시절을 <일본에 대한 원한을 형성한 시대>로 기억하기보다는 <전쟁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로 기억합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그의 나중 행동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반일민족주의>가 아니라
<반전평화주의>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낙중의 <굽이치는 임진강>을 식민지 생활사 자료로 읽는다면 저는 다음 문장을 가장 핵심적인 평가로 삼겠습니다.
<김낙중에게 일제강점기는 ‘일본인에게 억압받았던 어린 시절’인 동시에,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가 사회 전체를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 정상처럼 되어버린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1931년생 김낙중은 <식민지 경험 → 민족주의>라는 일반적인 궤도보다는 <식민지 전쟁체험 → 한국전쟁 → 반전·평화통일주의>라는 매우 독특한 궤도를 걷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앞서 관심을 두신 <식민지를 실제로 어린 나이에 살았던 사람들의 서로 다른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낙중은 상당히 좋은 비교 사례입니다. <리영희(1929)–김낙중(1931)–김은국(1932)> 세 사람의 식민지 소년 경험만 따로 떼어 비교하면, 같은 세대가 식민지를 얼마나 다르게 기억했는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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