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0 미국의 흑선, 일본의 운명을 바꾸다

미국의 흑선, 일본의 운명을 바꾸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0회 - YouTube

미국의 흑선, 일본의 운명을 바꾸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0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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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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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회 강연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쿠로후네, 黑船)> 함대의 내항과 이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의 250여 년 세력 균형 및 쇄국 체제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리기 시작한 과정을 다룬 내용입니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70회 요약

  1.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과 충격 1853년 7월,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거대한 증기 군함(흑선)이 에도 만(우라가) 앞바다에 출현하여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거대한 화력과 증기기관으로 무장한 흑선의 등장은 250년 넘게 평화와 쇄국을 유지해 오던 에도 사회에 막대한 군사적·문명사적 충격을 안겼다.

  2. 도쿠가와 막번 체제의 세력 균형 붕괴 도쿠가와 막부는 흑선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무력 대응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국가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례적으로 조슈·사쓰마 등 도자마 다이묘들과 교토의 천황 조정에 미국의 친서를 회람하며 여론을 수렴했다. 그러나 이는 막부가 지켜온 절대적 권위와 통제력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그동안 배제되었던 지방 웅번과 천황이 정치 전면에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 국론 분열과 개국 대 쇄국(양이)의 대립 흑선 내항 이후 일본 사회는 서구의 군사력을 직시하고 통상을 수용하려는 <개국파>와, 신성한 황토(皇土)를 침범한 외세를 배척하려는 <존왕양이파>로 양분되었다. 막부 지도부는 현실적인 타협을 모색했으나, 미토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 강경 쇄국파와 하급 무사층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하며 극심한 국론 분열에 빠졌다.

  4. 전통적 안보 체제의 종말과 근대적 재편의 서막 흑선 사건은 단순한 외교적 사건을 넘어, 칼과 성곽 중심의 전통 사무라이 군사 체제가 서양식 포함(砲艦)과 근대 화력 앞에서 완전히 무력함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막부는 물론 각 번들은 국가 생존을 위해 서양식 해방(해안 방어), 포술, 증기선 도입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향하는 정치·군사적 격변의 출발점이 되었다.

평론

제70회 강연은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이 도쿠가와 막부의 구조적 모순을 폭로하고 일본을 근대적 대변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문명사적 전환점임을 명확히 규명한다.

첫째, 외세의 군사적 압력이 봉건 체제 내부의 권력 구도를 해체하는 메커니즘을 설득력 있게 추적한다. 막부가 흑선의 위협 앞에서 자율적 통치력을 잃고 다이묘와 천황에게 의견을 묻는 순간, 250년간 유지되어 온 막번 세력 균형의 빗장이 풀리고 권력의 중심 추가 이동하기 시작했음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흑선이라는 물리적 실체와의 조우를 통해 관념적 명분론이 현실적 안보 위기의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일본 지배층이 흑선의 충격을 겪으며 서구의 군사적 우위를 직시하고, 맹목적 거부가 아닌 '서구 무기 체계의 모방과 흡수'라는 실리적 국방 노선으로 빠르게 방향을 틀게 된 구조적 배경을 잘 짚어낸다.

당시 흑선의 등장이 가져온 사회적 패닉과 함께, 이 충격이 어떻게 일본 지사들을 각성시키고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의 도화선이 되었는가를 거시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밝혀낸 매우 명쾌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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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70회

<미국의 흑선, 일본의 운명을 바꾸다> 요약·평론

70회는 앞선 63~69회에서 축적해 온 설명을 <페리 제독의 등장>이라는 결정적 사건으로 모은다. 함재봉의 핵심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주로 영국에 의해 문호를 열었는데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개항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왜 페리의 흑선은 280년 가까이 유지되던 도쿠가와 막부의 균형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는가?>

이다.

이번 회는 단순히 “미국이 와서 일본을 열었다”는 외교사가 아니라, 미국의 태평양 진출, 고래잡이 산업, 일본의 쇄국정책, 막부체제의 내부 취약성이 어떻게 한 점에서 만났는지를 설명한다.


1. 왜 일본의 문을 연 나라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나

19세기 아시아에서 영국은 압도적인 제국주의 강국이었다.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에 이르는 지역을 영국이 개항시키거나 지배했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이 개항시켰다.

함재봉은 그 이유를 미국의 지리와 국가발전 과정에서 찾는다.

미국은 원래 대서양 국가였다. 그러나 1846~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 영토를 확보한다. 이후 미국은 태평양 국가가 된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되고 서부 인구가 급증한다.

이제 미국은 자연스럽게 태평양 건너편 중국시장과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중요한 나라가 일본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게

<중국으로 가는 중간기지>

가 된다.


2. 일본이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 ― 고래잡이

함재봉이 상당히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이 고래잡이다.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대에는 석유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다.

도시의 등불과 산업용 윤활유 등에 고래기름이 널리 사용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 최대의 포경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많은 미국 포경선이 대서양을 넘어 태평양까지 진출한다.

특히 북태평양에는 고래가 많았다.

이 포경선들에게 일본은 매우 중요했다.

긴 항해를 하려면

  • 식량
  • 석탄
  • 선박수리
  • 난파 선원 구조

를 위한 기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에 요구한 ‘통상’은 처음부터 반드시 일본 상품을 대량으로 사고팔기 위한 요구만은 아니었다.

<항구를 열어 미국 배가 물과 연료를 보급받고 난파 선원을 보호할 수 있게 해달라>

는 현실적 요구도 상당히 컸다.

함재봉은 이를 통해 일본 개항을 미국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단어로만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3. 1853년 페리의 등장

1853년 7월 매슈 페리 제독이 네 척의 군함과 약 1,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난다.

증기군함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배들을 <흑선(黑船)>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 배와 비교하면 크기도 훨씬 컸고 함포의 위력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페리는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국서를 막부에 전달한다.

요구는 대체로

<일본과 평화적 관계를 맺고, 미국 선박에 항구를 제공하며, 난파선원을 보호하고, 교역의 길을 열자>

는 것이었다.

막부가 즉각 대답하지 못하자 페리는 다음 해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떠난다.

여기서 일본은 국가적 위기에 빠진다.


4. 미국인의 행동방식과 일본인의 충격

함재봉이 재미있게 설명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페리 함대와 일본 하급관리들의 첫 접촉이다.

기존 일본의 쇄국정책에서는 외국 배가 오면 가능한 한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돌아가도록 요구했다.

그런데 미국 함대는 그런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하급 일본 관리가 배에 올라가 협상을 시도하려 하지만 미국 측은

<우리는 일본 정부의 최고위 관료에게 국서를 전달하러 왔다>

는 태도를 보인다.

일본 측에서는 난학을 배운 통역관을 동원한다.

네덜란드어를 매개로 미국 측과 의사소통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67회에서 설명한 난학이 실제 국제위기의 순간에 기능하는 것이다.


5. 막부는 왜 페리를 쫓아낼 수 없었나

함재봉은 여기서 63회 이후 계속 설명해 온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적 약점을 다시 끌어온다.

에도 막부체제는 약 280년 동안 놀라운 평화를 유지했다.

그 균형은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이묘 사이의 세력균형>

<천황권력의 억제>

<외세를 차단하는 쇄국>

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평화가 역설적으로 막부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사무라이들은 전쟁을 하지 않았다.

에도에서 소비생활과 문화생활을 즐기는 계층이 되었고 군사적 긴장감은 떨어졌다.

동시에 막부 재정도 약화되었다.

반면 조슈·사쓰마 같은 주변 번은 서양군사기술을 받아들이며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즉 페리가 도착한 1853년은

<외세가 가장 강했을 때이면서 동시에 막부가 군사·재정적으로 가장 취약해진 시기>

였다는 것이다.


6. 쇄국의 역설 ― 조슈와 사쓰마를 오히려 강하게 만들었다

막부는 외세에 대비하기 위해 각 번에

<스스로 해안방어를 강화하라>

고 요구했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각 번이 서양식 대포를 만들고 서양식 군함을 배우고 군대를 근대화하면 그 군사력은 외국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막부를 향할 수도 있다.

특히 조슈와 사쓰마는 원래부터 도쿠가와의 가장 강력한 잠재적 적대세력이었다.

따라서 막부는 딜레마에 빠진다.

<번을 무장시키지 않으면 외국을 막을 수 없고, 번을 무장시키면 막부 자체가 위험해진다.>

함재봉에게 이것이 후기 도쿠가와체제가 풀 수 없었던 결정적인 모순이다.


7. 천황이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페리의 등장으로 흔들린 두 번째 축은 천황이다.

에도시대 동안 천황은 교토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정치권력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조약을 맺는다는 엄청난 국가적 문제가 발생하자

<누가 일본을 대표할 권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막부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천황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가?

그동안 상징적인 존재였던 천황이 국제위기를 계기로 정치적 정당성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함재봉은 이 점을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결정적 변화로 본다.


8. 존왕양이의 사상적 기반 ― 미토학

이번 회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미토학>이 등장한다.

도쿠가와의 친족 번인 미토번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본사를 천황 중심으로 서술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함재봉은 이것을 매우 역설적으로 본다.

<도쿠가와 가문의 일부가 연구한 역사학이 결국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천황중심주의의 사상적 무기가 된다.>

미토학자들은 일본역사를 천황을 중심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역사관이 막부 말기 존왕운동과 결합하면서

<막부보다 천황이 일본의 진정한 중심>

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즉 페리가 나타났을 때 천황주의는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9. 1854년 페리의 재등장과 개항

페리는 약속대로 1854년 다시 일본에 온다.

이번에는 더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온다.

막부는 결국 미국과 <미일화친조약, 즉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일부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한다.

함재봉에게 중요한 것은 조약의 내용 자체보다 그 정치적 결과다.

도쿠가와 막부가 약 200년 동안 유지해 온 쇄국정책이 무너졌다.

그리고 한 번 외세에 문을 열자 다른 서양국가들도 일본에 비슷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막부의 권위가 급격히 흔들린다.


10. 페리의 흑선이 깨뜨린 것은 단순한 쇄국이 아니었다

이번 회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것이다.

페리가 무너뜨린 것은

<일본의 국경>

만이 아니다.

도쿠가와체제를 지탱하던 세 개의 균형을 동시에 흔들었다.

첫째, 쇄국이 무너졌다.

둘째, 번들이 군사적으로 강해졌다.

셋째, 천황이 다시 정치적 정당성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 결과

<막부의 권위 ↓>
<조슈·사쓰마의 군사력 ↑>
<천황의 정치적 권위 ↑>

라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이 세 가지가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진다.


평론

1. 70회는 지금까지의 설명을 구조적으로 연결한 회차다

이번 회의 장점은 페리의 흑선을 단순한 ‘외부 충격’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페리가 메이지유신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면 설명이 너무 단순하다.

함재봉의 설명에서는 오히려

<이미 내부적으로 약해지고 있던 체제에 외세가 마지막 충격을 가했다>

는 구조가 중요하다.

즉 외세는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였다.

이 점은 매우 설득력 있다.


2. 미국의 일본 개항을 고래잡이와 연결한 것은 흥미롭다

이번 회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미국의 일본 접근을 단순히

<제국주의적 시장개방 요구>

로만 설명하지 않고

<태평양 항로 + 중국무역 + 고래산업 + 보급기지>

라는 복합적인 경제·전략적 배경으로 설명한다.

이 관점은 일본 개항을 19세기 세계경제의 변화 속에 놓아준다.

다만 고래산업이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과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 전체를 고래산업으로 설명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강연에서도 중국시장과 태평양 진출이 함께 제시된다.


3. 함재봉의 ‘세 축’ 설명은 이해하기 쉽지만 다소 도식적이다

함재봉은 도쿠가와체제를

<다이묘 균형 + 천황 억제 + 쇄국>

이라는 세 축으로 설명한다.

교육적으로 매우 효과적인 모델이다.

하지만 실제 도쿠가와체제는 더 복잡했다.

막부재정, 신분제, 상업경제, 농촌사회, 번의 재정개혁, 막부관료제, 도시문화 등도 모두 체제 유지에 중요했다.

따라서 세 축은 역사 전체라기보다 <설명을 위한 분석틀>로 읽는 것이 좋다.


4. 중요한 역설 ― 평화가 국가를 약하게 만들었다?

함재봉은 에도시대의 장기 평화가 사무라이의 군사정신을 약화시켰다고 반복해서 설명한다.

여기에는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

25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군사적 쇠퇴>

이면서 동시에

<행정·교육·경제·문화의 발전>

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평화 속에서 성장한 교육·경제·난학이 메이지유신의 자원이 되었다.

따라서

<에도의 평화가 막부를 약하게 만들었다>

보다는

<에도의 평화가 막부를 군사적으로 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일본사회를 경제·문화·지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것이 에도시대의 진짜 역설일 것이다.


5. 가장 중요한 문제는 ‘페리가 왜 성공했는가’가 아니다

70회를 읽고 나면 더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페리가 왜 일본을 열었는가?>

보다

<왜 일본은 페리가 나타났을 때 그 충격을 약 15년 만에 국가체제의 전면적 재편으로 바꿀 수 있었는가?>

가 더 중요하다.

같은 시기에 청나라도 서양에게 엄청난 군사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 충격이 막부붕괴와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졌다.

함재봉의 63~70회 전체가 사실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63~70회를 연결하면

지금까지 여덟 회는 거의 하나의 긴 논문처럼 읽힌다.

<63회> 참근교대와 도쿠가와 정치체제

<64회> 조슈·사쓰마와 도쿠가와의 오래된 갈등

<65회> 시장경제와 지방 번의 성장

<66회> 높은 문해력과 사상적 다양성

<67회> 난학과 서양과학

<68회> 사쿠마 쇼잔과 안보의식

<69회> 요시다 쇼인과 인재 네트워크

<70회> 페리의 흑선과 막부체제의 균형 붕괴

이렇게 보면 페리의 출현은 시작이 아니다.

<이미 수백 년간 만들어지고 있던 변화가 폭발하는 계기>다.

이것이 함재봉이 말하려는 핵심이다.


종합 평가

70회는 앞의 여러 회차에 비해 새로운 인물이나 사상을 소개하기보다, 그동안의 설명을 <1853년이라는 결정적 순간>에 결집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함재봉은 일본 개항의 역사를

<미국이라는 새로운 태평양 강국의 등장>

<도쿠가와체제 내부의 장기적 약화>

가 만난 사건으로 본다.

따라서 흑선이 일본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제목은 절반만 맞는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흑선은 일본을 근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이미 변화하고 있던 일본이 더 이상 기존 체제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표현이 이번 회의 내용을 가장 잘 압축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대목은 조선과 비교할 때 특히 중요하다.

일본과 조선 모두 19세기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았다. 그런데 충격을 받은 순간의 내부조건이 달랐다.

일본에는 이미 번 단위의 군사·경제적 경쟁, 난학, 높은 문해력, 서양정보를 번역하는 지식인, 국가안보를 고민하는 인물, 천황 중심의 대체적 정치정당성까지 존재했다.

그래서 기존 막부가 무너지자 대체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함재봉이 조선의 개화파를 본격적으로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살펴볼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조선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기존 체제를 무너뜨린 뒤 즉시 대체할 정치·군사·지적 네트워크가 있었는가?>

70회까지의 함재봉의 잠정적인 답은 아마 <없었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조선 후기의 개화세력, 실학, 서학, 개항 이후의 정치구조를 실제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함재봉의 일본론이 조선론으로 전환될 때 훨씬 더 큰 논쟁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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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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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어 오늘은 어 지난 시간에 예고해
드렸던 [음악] 대로 어 일본이 갖고 있었던 체제가 에도막부
시대를 [음악] 통해서 외세의 충격을 통해서 어떻게 변화를 하기 시작했는지
그래서 결국은 [음악] 메이지신이란 데까지 가게 됐는지 어 그 부분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미국이 왜 일본으로 와서 열게 [음악]
됐는지 그리고 미국이 폐리제독이 갖고 온 그 충격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아시아의 근세사를 보면요.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 예를 들어서 뭐
우리가 인도부터 물론 어 시작을 하고 중동도 그렇지만 인도 그다음에 중국에
이르기까지 그렇죠. 동남아시아 중국 영국이 다 열었습니다.
영국이 개항을 시켰습니다. 그렇죠.
인도에서 홍콩까지. 그런데
일본은 일본은 누가 개항을 시킵니까?
미국이 개을 시킵니다. 그러면 왜 왜 모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사실은 영국이 개항을 시켰는데 왜 해피면 일본은 미국이
개항을 시켰는지 사실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스토리를 얘기를 풀어 나가야 됩니다. 왜냐면
왜 페리제독이 미국 해군이 미국 해군이 왜 일본을 열었느냐?
영국이 아니라 사실 미국이 연 아시아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일본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페리제독이 일본에 올 때까지 에도만에 도착할 때까지 그때쯤이면요.
그때쯤이면 미국은
유럽 쪽에 구소위 구미열강이 아니라 유럽 미국은 이미 태평양 국가가
됐습니다. 태평양 연한의 국가입니다. 유럽은 대소양 국가이고 태평양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유럽의 영국을 포함한 모든 유럽 국가들은 미국은
북미 대륙을 끼고 있으면서 한쪽으로는 당연히 동쪽으로는 대서양 권에
들어가겠죠. [음악] 그러니까 구미 유럽권에 들어가겠지만
대륙횡단 철도를 놓고 서부 개척을 하고 그러면서 샌프란시스코라는 한국가
열리고 러스앤젤러스가 열리고 호틀랜드가 열리고 하면서 [음악] 미국이란 나라는 서해안을 통해서
평행양으로 나가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일본이란 나라는 유럽에서 시작하면요.
유럽에서 영국에서 일본을 가려 그러면은 어떻게 됩니까? 유 서유럽을
지나서 동유럽을 지나서 중동을 지나서 [음악] 인도를 지나서 동남아시아를
지나고 중국을 지나고 그렇죠. 그리고 [음악] 맨 끝에
가장 유럽에서 멀리 있는게 그게 [음악] 일본입니다.
파이스트 극동. 그게 뭡니까?
유럽 중심으로 봤을 때 영국 중심으로 봤을 때 그게 극동입니다. 파이스트가
됩니다. 그런데 미국의 입장에서 어떻습니까? 미국의 입장에서는
물론 동해안 미국의 동해안에서 시작하면은 역시 대서양을 건너서
유럽을 가서 그쪽으로 가려 그러면 당연히 어떻게 됩니까? 미국에서 동쪽으로
가려 그러면은 가장 끝에 있는게 일본이겠죠. 그렇지만 미국이
서해안에서 출발해서 태평양을 건너면은 가장 먼저 도달하는 나라가 어디니까?
일본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일본을 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다도 구체적으로 이런 겁니다. 우선 이제 미국은 어 미국
멕시코 미국 전쟁 그렇죠. 그 1846년에서 48년 전쟁을 통해서
어 멕시코로부터 지금의 어 텍사스 독립을 하고
그다음에 아리조나 뭐 네바다 이런 거 다 해서 캘리포니아까지 그게 전부 다
멕시코 땅이었습니다. 그거를 다 미국이 뺐습니다. 그러면서 텔레포니아하고 그걸 다 백고 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게 전부 다 미국이 태평양 국가가 되는 거죠. 그니까 우리가 지금 샌프란시스코 산프란치스코
로스 안겔로스 안 그니까 천사들의 도시 이거 전부 다 스페인 말들
아닙니까? 멕시코 땅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평양 국가로 부상을 하기 시작하고 태평양 연안을 개발을
하기 시작을 하고 그러면 서해안죠. 미국의 서해안을 개발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골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있지 않습니까? 1848년에 금광이 금이 발견이 되면서 상금이
발견이 되기 시작하고 금광이 발견되면서 캘리포니아에서 전 세계적인이 [음악]
캘리포니아 골드라시가 어 그 일어나고 서해한 인구가 급증을 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제 중국 사람들도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골드라시에 참여를 하기
시작을 하고 제 이럽니다. 그러니까 영국이 앞편 전쟁을 통해서 중국을
개방시키니까 미국도이 중국 시장에 뛰어들고 싶어 가지고 그래서 중국하고 1844년에
어 왕 조약이라는 것을 이제 맺습니다. 그리고는
아시아 무역에 뛰어드는데 중국하고의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태평양을 건너오는게 빠르죠. 당연히
그러니까 태평양을 건너오다가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일본에다가 거점을 마련하고
그거를 통해서 중국하고도 교육을 하려고 그런 계획하에 일본을 개양을
하게 됩니다. 일본이 미국한테 중요했던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역을 하기 중국하고의
무역을 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일본이 중요했지만 또 하나는 뭐냐면요.
고래 산업 때문이었습니다.이 이 고래잡이 때문이었습니다. 자, 고래잡이가 뭐냐면요. 예를 들어서
산업 혁명의 가장 상징적인 것이 런던의 하이드 파크, 런던의 하이드
공원에 가로등들이 세워지기 시작하고 그 가로등이 밤이 되면 불이
켜집니다. 그러니까는 인류라는게 밤이 되면 깜깜한 데서 촛불이나 켜고 살았던 사람들이 산업 혁명을 통해서
도시가 도시가 화하게 밝혀지는 자기 집도 아닌 공원 같은 데가 밝혀지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는게 그때 이제 산업 혁명을 겪는 사람들의 그
그 놀라움 경의로움 새 시대가 걸렸다라는 논 그 그 느끼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제 불이 켜지 밤에 불이 켜지는 거거든요. 여러분 그 불리를 어떻게 켰는지 아십니까?
전기 전해요. 훨씬 전입니다. 18세기 19세기 초 이런 때에는 이때는요.
고의 기름으로 켰습니다.이 모든 공장 윤활하류고이
등뿌리고 켜지는게 부잣집에 크게 화려하게 밤에 불을 켜고 하는 그
연료는 전부 다 고래 기름이었습니다. 특히 향고래.
스웰 향고의 기름이 그렇게 오래 타고 냄새 안 나고 끄름 없고
그래서 집에 보통 집에서도 그걸 썼지만은 산업 모든 기계에 다 그게
필요했던 거죠. 이게 언제까지 필요했냐면 케로신이라는게 발견이 되고 발명이
되고 유전을 발견하기 시작. 그래서 미국에서 펜슬베니아에서 유전이 발견이 되고 그거를 거기서 나오는 기름을
등유라는 캐로신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산업 혁명은
고래 기름으로 이루어졌었습니다. 고래잡이 배는 유조선이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유조선인 거죠. 그래서이 고래를 잡기 위해서
엄청난 선단들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고래 자비가 나옵니다. 그래서 자비를 합니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추산 추산하기를 [음악] 19세기에만 고래를 24만 마리를 잡았다
그럽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1846년에 게스너라는 사람이 에이브라이
게스너라는 사람이 캐러 등의 제조법을 발명하고 1858년에
가서야 펜슬베니아의 유전이 발견이 되고 그 유전을 발견하면서 석유가 공
대량으로 공급이 되면서 그거를 등유로 만들어서 불을 밝히고 윤난류로 쓰고
이제 이런 일이 되면서 그때부터 이제 고래들을 잡는 거를 중단하기 시작하고
이제야 뭐 요즘에 아예 전 세계적으로 고래잡이 자체가 금지가 되어 버린 거죠.
멸종 위기에 있다. 그래 갖고 그렇게 했는데 멸종 위기에 빠진게 뭐냐면 바로 이때 19세기의 고래잡이를
산업에 윤활류로 쓰기 위해서 산업 혁명의 윤활류를 쓰기 위해서 고래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이 고래 기름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
혁명이 산업화 초기 단계에 가장 고래를 많이
잡음으로써 말하자면 지금의 석유를 산업 혁명의 석유를 가장 많이 대기
시작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은 전 세계 최고의 고래잡이 국가가 됩니다. 그래서 특히 미국
[음악] 동부 연안에 지금 보스던 바깥에 있는 탑켓 섬 그쪽에 가면
거기가 천해 한국이고요. [음악] 천해의 고래잡이었습니다. 대서에 그렇게 고래잡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낸타켓 섬 그쪽을 중심으로 해서
고래잡이 산업의 전 세계 중심지가 됩니다. 자,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문학의 미국 문학의 백미 최고봉이라고 하는 허만
멜빌의 유명한 모비데크 그죠? 백경 우리가 백경이라고 그러는데 화이트웨일
흰래 아닙니까? 그 책이 왜 나옵니까? 허은 멜빌
본인이 고래잡이 배를 탔었던 선원으로 탔었던 것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 최고의 산업이었던 낸타켓에 살면서 거기에 살면서 경험했던 얘기들
거기서 들었던 얘기들 그렇죠. 이런 거대한 괴물 [음악] 같은 흰래가
있어서 고래를 이렇게 남맥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수를 해서 수많은
배를 침몰시키고 뭐 [음악] 이제 그래서 에헤브 선장이 나오고 이제 이런 이스마엘이 나오고 이런 유명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하는 것도 그 그 얘기가
낸타켓을 배경으로 하고 미국의 근대문학의 백미가 되는 것도 미국이
고래잡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자, 그런데이 고래잡이 대서양을 이제 다니면서
고래를 잡고 근데 대서양의 고래들이 결국은 미국도 잡고 영국도
잡고 다 잡으니까 어떻합니까? 대서양의 고래들이 씨가 말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합니까?
태평양으로 건너오게 되는 거죠. 자, 그러면 태평양으로 건너와서 고래를 또 잡습니다. 근데 문제가 뭐냐면요.이
고래잡이 배은 선단들이 한번 포구를 떠나면 보통 어떻게 됩니까? 뭐
낸타켓에서 예를 들어서 더군다나 태평까지 오려 그러면 2년씩 항해를
해야 되는 겁니다. 고래를 잡으러 다니는 거죠. 한번 떠나면 고향을 떠나면 그러면 2년 동안 어떡합니까?
당연히 어디에 가서 음식도 배급을 받고 그리고 나중에 이제 증기선이
나오기 시작하면은 어떻게 됩니까? 석탄을 공급을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석탄을 공급받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이제이 이렇게 다니다 보면은 가끔가다 배가 난파할 수도 있는 거고 난파하면 이제 선원들이 저
흩어져서 이상한 나라에 간 딴 나라 모르던 나라에 표류를 할 수가 있는 거고 그러면이 사람들 다시 데려와야
되는 거죠. 자, 그러니까 자기네가 고래잡이를 하러 다니는 나 그 바다에
연들 고래 어장이 있거나 그러면 그 연의 국가들한테 가서
협상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고래 잡으러 오고 배들이 와야
되는데 우리가 석탄을 공급받아야 되니까 우리가 여기 있다가 좀 당신들 땅을 좀 조차해서 빌려서 여기다가
석탄 저장소 좀 만들게 해 주셔. 그리고 혹시 우리 배가 난파가 돼
갖고 우리 선원들이 여기로 표류해서 오면은 그 사람들 좀 잘 좀 거둬서
우리한테 다시 인도를 좀 해 주십시오. 이런 것을 합의하는 조약을 맺는
겁니다. 여러분 통상 조약이라는게 그런 거 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선에 나타나는여 연의 순조 때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는 여러 배들 영국 배도 있고 미국 배도 있고 근데 그 배들이 원하는게 뭡니까? 통상을
요구한다. 그러지 않습니까? 통상을 요구한다라는 거는 그냥 물물 우리 실제로 무역하자는 것도 있지만은 많은
경우에 뭡니까? 석탄 저장소 좀 코링 스테이션 좀 짓자. 그리고 선원들이
난파은 좀 돌려다오. 서로 피차간의 그런 조약을 맺는 거죠.
그리고 이제 온 김에 그런 큰 배들이 지나다녀야 되니까 도대체가
해안선 어느 쪽을 가야지 바다가 깊고 배가 지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어디에
모래톱이 있는지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이런 거를 하기 위해서 측량 좀 하자. 그래서 맨날 측량선이 다니고
하는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국이 1번을 여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일본에도 석탄 저장고도 만들고 혹시 난파가 됐을 때 배가 난파되고
그랬을 때 선원을 서로 교환하고 이런 거를 하자라고 그래서도 일본을 개양을
시키는 겁니다. 1853년 5월 26일 어해질 무렵에 페리
제독이 미국함대를 이끌고 류규 지금 오키나와
근처죠 류규 국의 나하 오키나와 나하항에 입학을 합니다. 지금도
오키나와의 수도가 그 나한 아닙니까? 류는 당시 사스마의 속방이었고
동시에 중국의 속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스마번은 바로 위에 있으니까
사스마번이 또 정보를 해서 자기네한테 조공을 바치라는 거였었고 그리고 또
영나라 때부터 이미 육규구로서 육국으로서
영나라에도 종을 바치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영국 프랑스 배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육기를 드나들고 있었던 거죠. 미국 배도 했고요. 그런데 뭐이 서양
사람들은 도대체 뭐 속방이 뭐고 뭐고 이런 거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때 와서 와 갖고는 거기에 머물면서 오키나 류에 머물면서 그
집을 임대해서 아예 거기에 2주간 머물면서 류규국하고도 협상을 진행을 합니다. 그래서 협상을 잘하고
그리고는 농기구, 농작물, 씨앗 이런 거를 이제 류 사람들의 선물도 하고
류 사람들은 이제 뗄감 그죠. 물, 식량 이제 이런 거를 미군한테 이제
제공을 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류규에 가서 한번 간을 보는 거죠. 어떻게 될 건지 일본하고 어떻게 될 건지.
6월 9일 날 이제 나항을 추항해서 미국 감대가 오가사와라 군도. 어일명
분인도인데이 오가사라군도는 어 그 김옥균 김옥균이 어 임 갑신정변
실패하고 1번에 갔다가 계속해서 고정하고 민비 암살 위협을 받고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골치 아프다. 그래서 그때 내무상이었던 야마가따리
도모가 유배를 보내라. 그래서 일본 내에서
유배를 보낸게 오가사활 군도입니다. 그러니까 박영효 어 서강범 이런
사람들은 이런 분들은 미국으로 그냥 다시 망명을가 버리는데 김옥교는
미국으로 망명 안 가겠다고 남아 있다가 결국은 일본 정부가 골차프다 그래 갖고 보내는 그 섬이 바로
어가사화를 군도였습니다. 어 1853년에 페리 함대가 어 나왕을 출발해서
오가사를 들러 군도를 들러서 그리고 어 거기에서
사무실하고 부두 석탄 저장소를 짓기 위해 짓고 그리고 다시 나하로
돌아왔다가 이제 일본 본토로 출발을 합니다. 1853년 7월 8일.
그러니깐 어 여시다 쇼인이 에도로 다시 그 가태 경에서 풀려나서
다시 돌아온지 6개월 만에 에도로 돌아온지 딱 6개월 만에 페리 담대가
일본에 도착을 합니다. 그래서 에도만 어에 있는 도쿄 지금 도쿄만의 어유에
있는 우라가 해협에 도착을 합니다. 그래서 이때 당시에 미국 함대는
네척의 군함 그리고 60문의 [음악] 포 포가 있었고 그리고 군내는
967명 [음악] 거의 1천명 가까운 군사력을 어 대동을 하고 이제 왔습니다.
미국 배가 당시 일본 배의 여섯 배였었습니다. 크기가. 그리고 이제
검은 어 칠을 해 놨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이때 이제 미국 배한테 서양
배한테 붙인 이름이 흑선 구로훈 까만배라는게
되고 이제 그때부터 이제 구로훈의 까만배라는 건 이제 서양배를 뜻하는 것이 어 돼 버립니다. 이때에
이때에이 서양 배가 나타나니까 일본의 해안선을 지키고 있던 일본의이
하급 관리들이 미국 사람이 경우에 이제 미국이죠.
미국 사람들을 대하는 그 방식은 참 놀랍습니다.
조선의 연안에 배가 왔을 때에 상륙을 하려 그러면 조선 거기 관려들이 나가서
절대 오지 말라. 필요 없다. 다 절대 오지 말라고 이제 무조건 돌려보내고 이제 이러는데
여기서는요. 이때도 우라가 해협이니까 그 우라가라는
동네의 요리키 그니까 여력 그니까 그 아주 하급 관리입니다.
하급 관리가 이름이 나카지마 사브로스케라는 사람인데 그다음에
통역사가 있었습니다. 허리 다스노스케가 있습니다. 왜 통역사가 있습니까? 난학을 했으니까
란 갖고 란학을 했으니까 네덜랜드 말을 하는 거죠. 서양 말을 어쨌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이 사람들은
서양 사람인지 그게 네덜랜드 사람인지 누구 사람인지 모르니까 어쨌든 서양 사람이 나타났다니까
네덜랜드어 통역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이 사람들이 페리함대의 기함민
서스케하나호로 갑니다. 미국에서는 미국 배에서는 어이 너 너희들
올라오지 못한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이 상륙하기 전에 일본이 먼저가 버리는 가는 거죠. 하급 관리들이
가서 승선을 하겠다. 그러니까 미국 함대가 오히려 승선하면 안 된다. 거절을 하는데 통역관 홀리 어
다츠노스케가 어쨌든 설득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배오릅니다. 미국 장교들이 [음악]
배 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어 올라가 갖고 호리가 딱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훈령이 있다. 외국 배가 나타나면 무조건 돌려보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다라는 그 정책을 쓴
거를 이제 미국 측에다 보여 주는 거죠. 회리 제독은 이때 나타나지 않고 선장실에 그냥 있으면서 아예
이런 학업 관리들 나는 안 만나겠다. 그 대신 부관을 시켜서 우리는 통상
조약을 맺기 원한다. 그리고 미국의 현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밀러
필모 대통령의 친서를 내가 지첨하고 왔으니까 이거를 일본의 고위 관리한테 우선 직접
전달을 해서 그 고위 관리가 쇼근한테 전달하게 되기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얘기를 어 부활을 시켜서 전달합니다. 다음날 또 다른 요리키
가야마 에이자 에이자에몬이라는 또 다른 하급 관리가
이번엔 자기가 꽤 높은 장교인 척하고 지난 전날엔 하급 요리기라고 그러고
가니까는 그쪽에서 아예 만나 주지도 않고 패리 나타나지도 않고 가니까 이번에 내가 조금 높은 장교다가
부교다 이래 갖고 이제 이제 또 갑니다. 그래서 이때는 이제 이때
역시 패리는 안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 부관이었던
프랭클린 뷰캐넌을 만납니다. 뷰캐논은 나중에 남북 전쟁 때 큰 전공을
세우는 굉장히 유명한 장군이 됐는데요. 그 그 프랭클린 뷰캐넌이
어 그 다른 장교들을 대동하고이 친구를 이제 가야마를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여기 우라가에서는 애도 바로 수도 바로 여기니까 여기서는 우리가 외국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외국 국서를 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나가사기로 가라. 나가사기는 그래도 그 뭡니까? 데지마도 있고
외국 저 네덜랜드 상인들도 있고 상관장도 있고 그러니까 거기는 그래도
그런 외국 사람들 만나고 할 수가 있는데 그로 가라. 이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뮤캐논이 이럽니다.
당신들이 지금 우리 국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가 군대를 상육시켜서 그냥 애도로 직접 쳐들어가서 가서
국서를 전달하겠다. 그랬더니 가야마는
알았다. 내가 박후한테 보고를 할테니까 사흘 이내에 답을 주겠다. 조그만
기다려 달라 이렇게 하고 갑니다. 그러니까이 젊은 그 관료 하급 관료들의 기지들이 대단합니다. 어쨌든
끝까지 이게 누군지 왜 왔는지 그리고 자기 그 알아보고 그리고 자기네
정책을 관을 시키려 그러고 안 되니까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결국은 아 우리 수도인 애도 바깥에서 하지
말고 나가사기로를 빼돌리자. 이제 이렇게 이런 온갖 출수들을 이제 다 써 보는 겁니다. 우라가의 봉행
그러니까 우라가의 뭐 군수 같은 사람이겠죠. 우라가의 봉행이 이제 그
유리키기보다 이제 높은 사람이 책임자가 어 이도 히로미치였는데
보고를 합니다. 보고서를 올려 갖고 미국 함대가 우라가에 와 있는데 이거는 우리의 무력으로는 축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역부적입니다라고 보고를 합니다. 그런 사이 이제 미국 함들은 에도만을
측량을 하는 거죠. 그니까 정확하게 어디에 배가 들어갈 수 있고 이제 앞으로도 또 올올 생각을 해 갖고
이제 해도를 지도를 만드는 거죠. 그러면서 일본이 우리가 측량하고
이러는 걸 조금이라도 위협하면 우리가 즉시 공격을 하겠다 이제 이럽니다.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에도 막부의
관리들은 그냥 미국 배가 휘적고 다니면서 측량하고 온갖 저걸 하는 거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 배가 에도만에
자기네 수도의 그 만에 들어왔다라는 그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완전히 이제 일본이 전국적으로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외국의 국사를 받는
거는 그 당시 국법으로는 쇠국이었으니까 외국 국설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 받으면은 미국이 공격을 하겠다니까 그것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지금 큰 엄청난 고민에 빠지고
동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박후가 어떡합니까?
일단 국서는 받자. 그리고 국서를 받으면은 그러면 얘네들이 돌아갈 거
아니냐? 그 사이에 어떻게 할 건지 장기적인 계획은 우리가 논하자. 어쩔 수 없다. 국서를 받자. 이렇게
결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7월 9일 날 국서 전달식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구리하마라는 그 해변가에서 벌어지는데요. 거기서 일본은 국서
전달식을 국서를 받기 위해서 두 명의 고의 관리를 파견을 하고 그리고 건물을 새로 짓고 주변에 다이어들을
보내 갖고 다이어들 보고 군대를 해안가로 [음악] 직결시키라
그럽니다. 그래서 해안가에다가 양쪽에 사무라이들이 쫙 무장을 하고 이제 집결을 해 있습니다.
페리제독은요. 대 한포들로 하여금 일본군을 조준하도록 명령을 한 후에 자신이
내려서 양측에 미국 국기를든
거대한 흑인 거구의 흑인 성문 승문을 거느리고 도열에 있는 일본 무장들
사이를 사무라이들 사이를 능하게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어린 미국 승무원 어린 남자 승무원들이 대통령의 친서가 들어 있는 금으로
장식한 자단나무 상자를 들고서 페리제독과 그 거구의 흑인
병사들을 이제 따라서 어 들어갔습니다. 협상은 페리는 영어로 하고 그러면
이것을 네덜랜드어로 번역을 해서 그거를 다시 일본말로 번역을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통역이 진행이
됩니다. 1번에서는 1번 측에서는 어 지금이 와병 중이어서 실제 답을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다. 모든 국가 이처럼 중대한 정책은 수근이 직접 해
줘야 되는데 내려야 되는데 결정을 해야 되는데 수근이 와정 와병 중이라서 당장 답은 줄 수 없다
그랬는데 실제로 도크가와 이해요 씨는이 당시에 그 몸이 아주
아팠습니다.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여기 그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초상화상으로도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는 그런 초상화가 남아 남아 있습니다. 페리는 1번층에 설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다음해 지금 7월 아닙니까? 1853년 7월이니까
다음에 4월이나 5월쯤 다시 돌아오겠다. 그때는 일본 황제에
납시를 받겠다. 그러니까 아직도이 사람들은 쇼근이 황제인 줄 알고 황제 따로 천왕 따로 있는지 모르는 거죠.
근데 아무튼 일본의 최고 지도자의 답신을 그때 와서 받겠다라고 하고 돌아갑니다.
법률 방송이 출간하는 시사 교양지 [음악]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음악] 읽어 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음악]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이때가 사쿠마 쇼산이에도 정부에 상소를 올려 갖고 우리 미국에 학생들
좀 보내자. 유학생 보내자 하고 하는 이제고 시기입니다.
막부에서는 당연히 사쿠마 쇼산이 그런 그런 이제 요청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요시다 쇼인이 이제 미랑 너래도 가라 그래서 그 그
미량을 하려다가 이제 잡혀가는 일이 한쪽에서 벌어지지만 이제 도구가 막부 박구 후의 입장에서는 이제 진짜 큰
일이 벌어지는 거죠. 한번 복습을 하자면은 자 바꾸후 체제라는 것 에도부 체제라는 것은 세 가지 축을
축이 있어서 그 균형을 통해서 280년간 평화를 유지했던 겁니다.
그 세 가지 축이라는 건 뭐냐면 다이묘들 간의
세력 균형 첫 번째 두 번째 천황 권력의 억제
그리고 세 번째가 다이묘들이 각자 알아서 외국하고
손을 잡는 것을 외국에 도움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한 쇠국 쇠국 정책이 세
가지입니다. 다이어들 간의 세력 균형 그렇죠. 산낀 거 창근 교대 산긴 고타 같은 거를 통해서 어떻게든지
세력 균형을 힘센 자기한테 반대했던 조수주 사스마 같은 거를 이제 제어를
하려고 했었던 그 다이며들 간의 세력 균형 그다음에 천왕이
힘을 못 쓰게 하는 거 계속해서 천왕을 엉로 교도에 천왕을 새를
누르는 거 그리고 세 번째 쇠곡 정책 이렇게 세 까지였습니다. 뭐 첫 번째
다이며들 세력 균형은 뭐 이제 심판다이며 도자마다 다이며 후다이다며 이런 걸로 나눠 가지고 뭐 경제적
균형을 유지를 하고 지리적으로도 그 도자마 다이며들이 애도를 향하는
길목을 갖다가 다른 자기네 심판 다이며나 후다이 다이며들을 갖다가 설치를 해 갖고 봉토를 줘서 그걸 막
막기도 하고 이제 [음악] 이런 그러면서 굉장히 세심하게
균형 균형을 [음악] 유지를 하려 그러는 거죠. 그죠? 인질제도 이런 거를 통해서도. 그런데 지금
도구가와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바로이 균형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독구가와의 영지였던 관동 평야, 간또 평야,
지금 도쿄 바깥에 있는 그 관동 평화 평야죠. 그 평야를 중심으로이 혹창을
지금 차지하는게 도크가고 도크가와의 어 그
신판다이며 후다이 다이며들이 그 곡창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화가 극도로 발달하고 경제가 극도로
융성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경제적으로 번영을 하기 시작하고 문화적으로
번성을 하면은 사무라이들의 정신력이 해야지는 겁니다. 사무라이들은 항상
전쟁을 해야 되는 거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항상 긴장을 하고 있고 그리고 항상 전 장에 나가서 지금 막부 아닙니까?
텐트를 치고 막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지금 나라를 지켜야 되는게 그게
군인인데이 엄청난 평화와 번영을 지금 누리고
있으면서 대저택지들을 지어놓고 그 맨날 좋은 연극 보고 좋은 술
마시고 맛있는 음식 먹고 기가 막힌 비단옷도 있고 이러면서 지금 사무라이 정신이 유지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조슈하고 사스마 같이 도커가에 맞었던 번들이나 저 멀리
간또 평화 같은 곡창이 아니라 저수 남쪽이라든가 야 야마구치 현이쪽에 이런 쪽에 작은
영지수에 있었던 데에서나 거기에 하급 사무라이 같은 사람들이나 그 무사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지 오히려 에도의 평화 에도의 체제가 너무 잘 됐었기
때문에에도 체제의 중심이었던 도구가와
그리고 도구가와 가문을 보필하고 있었던 그 가문들은 오히려 무사
정신이 무사도 정신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매주신 일어나기 철신 전부터 도구가와의
무력 무독가와의 정신력은 약화되기 시작하라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거를 지금 막으려고 했던게 지지난 시간에 말씀 덴보의 개혁 같은 거죠. 그러니까는
그 검약해야 되다 그러면서 극장들을 갖다 다 애도 바깥으로 쫓아내고
그렇죠. 모든 걸 검수하게 해야 되고 그러면서 예를 들어서 산긴고타의 창근
교대 정책도 자꾸 이제 폐지를 하고 줄여 나가기 시작하면서 이제부터 뭐라
그러냐면 야 우리 도구가 막부의 힘만으로 안 되니까 우리가 지금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각 번들이 각자가 좀 개혁을 해 가지고 각자가 방위를
맡아라 이렇게 얘기죠 하기 시작하는 거죠. 근데 문제가 뭡니까? 그러면
각 번들이 점점 점점 군사력이 외세를 맡기 위해서 군사력이 강해진다라는 것은 그 군사력을 동시에 뭡니까?
덕구가 막불를 향해서 향해서 저항하는데 쓸 수도 있는 거죠. 그니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선택에
봉착을 하게 됩니다. 자기네 무력이 약해졌고 에도의 평화 때문에 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외세가 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그러면 외세를 그
나라를 위협하는 거를 막기 위해서는 독구가 막보 자신이 다시 강해져야
되는데 그러기에는 지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고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각 버언 보고 알아서 너희가 해라.
그러니까 이제 뭐 조주번 같은 데서는 사쿠마 쇼사 이런 사람들이 가서 포대
구경도 하고 요시다 쇼인도 도구에 가서 포대 구경도 해보고 어떻게 방비를 하나라고 이런 연구를 하기
시작해서 자기 뭐 기도가요시는 나가사에 가서 서양식
군함을 만드는 제조술도 배워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이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그거는
독구가 막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해하라고 하기는 하는 거지만 그런수록 그 번들은 점점 무력이
강해지는 거고 특히 독구와 상대로 굉장히 강해지는 거고 실제로 그렇게
가장 적극적으로 그런 면에서 외세에 맞서기 위해서 준비를 하던 조슈하고
샀은 도구가와의 속적이었었던 거고 그 번이 나중에 힘을 합쳐서 도가를 칠
때에 도가가 거기에 맞설 힘이 없어서 결국 무너지면서 메이지신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도크가와 막부는 온갖 방법을 써서 동시에 대내적인
자기 경제를 다시 일으키려고도 애를 쓰고 그래서 자기 가장 가까웠던 어
심판다이며 후다이 다이며의 영지를 내놓라고도 또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한테 다 그러니까 이제 뭐 당연히 그 사람들은 어 심판다이며 이런 데는
특히 절대로 이제 어 못 내놓겠다고 이제 하면서
독구가와 자신의 무력을 강화시키려는 계획들은 다 수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폐리가 나타날 때쯤 되면은 바로 그 순관이 뭐냐면 독구와 막부는 역대로
가장 약화될수 경제적으로 그다음에 무력에 있어서도 가장 약해진 상태였을
때에 폐리제독이 나타납니다.이 이 막번 체제의 어 두 번째 축은 이제
교도에 있는 천왕 그리고 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조종 그러니까 조정이
있었던 거죠. 천왕이 있으니까 당연히 황제 천왕이 있으니까 그 밑에 조종이 있었던 거고 그 조종이 이제 제가
말씀드렸던 쿠게라는 공가라는 오랜 규적들 그 옛날부터 6세기 7세기부터
내내 윤령국가 처음 만들 때부터 있었던 그 교 천왕가의 주변에 있었던
그 그 귀족 세력들이 있었던 거죠. 그 사람들이 이제 교도에 살고 있었던
거고 지금이 막부는 에도에다가 군사 막사를 차리고
거기에서 이제 통치를 천왕의 이름으로 통치를 하면서 천왕가를 억누르는 거죠.
그러니까는에도 시대 초기에는 진짜 다 천왕의
존재조차 잊혀지는 거고 페리제독도 우리가 에도로 가서 에도에 있는
천왕한테 너희 천왕한테 황제한테 친서를 직접 전달하겠다라는 걸 보면은
페리도 에도에 있는 추억군이 천왕인 줄 알았던 거죠. 도구가와 막부 체제를
약화시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였냐면은
천황 이념의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천왕에 대한 어천왕을
나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연구가
에도막 막부의 가장 중심부에서 그게 일어납니다. 천왕가가 너무 약해져
있고 교도가 너무 힘을 못 쓰고 외국 사람들은 아예 그런게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약해지니까 진짜 역설이
뭐냐면요. 쇼근을 배출하는 미토번이라고
있습니다. 그 미토번인는 나중에 마지막 쇼근도 거기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같은 도구가와
가문이고 도구가와 가문의 방계가 가서 다해로 있는 따라서 독구가 집안하고
독구가 집안이고 실제로 그리고 독가가 집안에서 에도의 독구가
집안에서 후계자가 대가 끊겨서 후계자가 안 나오면 밑도번에서
데려다가 쓸 정도로 소근을 안 칠 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교입니다.이 이
밑도번에서 천왕 사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믿도번이 밑도 학파가 나와서 미도
학파가 하는게 뭐냐면 천왕 사상을 연구를 하기 시작하라는 겁니다.
특히 그 밑도번의 11 번째 다묘어였던 독구가와 요리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이 사람이 1608년에 다해루 봉해지면서요.
천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을 합니다.이 이 유리사의 또 셋째 아들
어 미스쿠니는 도코가 미스쿠니는 아예 아버지가 이제 시작한 그 천왕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시켜서 쇼코칸이라는 어 장고 연고관이라는
어 그 아예 학교를 설립을 해서 연구소를 설립을 해 갖고 여기서 대일본사를
편찬을 합니다. 아주 전설적인 시대로부터 자기네
대까지 일본사를 편찬을 하는데 당연히
그 역사의 중심은 누굽니까? 천왕이죠. 뭐 진구 천왕 어쩌고 해서 그게 계속해서 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를 일본 역사를 이때에 밑도번에서 독구가와 감은 내에서
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천왕사를 쓰는 거죠. 일본사를 천왕 중심으로 써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이 책이 1910년인가에나 완성이 되는 반대한 책입니다.
역사서입니다. 그니까 우리나라로 보면 이제 왕조 실록 같은 건데 다만 아예 그냥
삼국 시대 이전부터 시작해서 그걸 전부 다 이제 편찬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이 책을 중심으로 해서 밑도번의이 연구가
바로 존황 양이 사상을 배시킵니다. 도구가와의
가문에 가장 중요했던 반계에 하나였던 미토본에서 나중에 결국 독구가와의
저항을 하고 도구가와를 무너뜨리게 되는 존황양이 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참 놀라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밑도번이 존양이 사상을 대일본사를
천왕 중심의 일본 역사를 다시 편찬을 하면서 일천왕의 존재를 완전히 부각을
시키시켰을 딱 그때에 외세가 출연을 하니까
막부가 아니면서 막부가 아닌 일본의
사무라이들 일본의 도체에 퍼져 있었던 하급 사무라이들부터 시작해서이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나라를 지금 흔들리는 막부가 아니라
그죠. 여러묘 중에 하나인 비록 제일 세지만 여러묘 중에 하나인
듣고 막부가 아니라 그거보다도 뭔가 더 우리 모두를 1번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무언가가 있을 상징적인 뭔가가 있을 텐데 그게 뭐냐를 당연히
찾게 되는데 그때에 딱 뭐가 있습니까? 대일본사
천왕 사상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박후가 대내외의 도전에 증면을 하니까
천왕이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게 밑도번의
천왕 연구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구가와 가문에 가장 중요했던
중했던 코상케 고상케 가문 고상케라는게 이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도구가 가문에 본가에서 손이 끊겨서 쇼근을 잊지 못할 때에는 반계에서
쇼근이 나올 수가 있는데 그런 집안을 코상계 집안이라 그런는데 대표적인
코상계가 밑도번이었고 미도변은 두 번이나 소근이 나옵니다. 바로 그 번에서
도크가의 막부에 맞서는 조랑양이 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일본 역사의
역설 중에 역설입니다. 그리고 참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것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것이 독구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은
독구가와 요시노부는 바로 밑도감은 출신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조슈하고 사스마가 중심이 돼서
조왕양이 파들이 규합을 해서 도구가와 막불를 타도하자라는 운동이 일어나고
결국은 보신 전쟁까지 가서 전쟁을 치르면서 사초 동맹이
막부근을 격파를 하면서 그랬을 때에 마지막 순간에 가서
도구가와 [음악] 막부가 저항을 하지 않고 막부 부측을 내려놓습니다.
도꼬가와 요신노브가 주변에 있는 아직도 자기한테
충성하는 수많은 다이묘들이 있고
군대가 있었는데도 더 이상 피 흘리지 않는다. 보신
전쟁이 2년 동안 벌어졌지만 사실 살상이나 이런 차원에서 굉장히 규모가 작은
전쟁이었었죠. 그런데 왜 그러면 덕구와 막부가
여시노브가 그렇게 저항을 하지 않고 그냥 내려놓음으로써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막부 체제가 해체가 되고 왕정복가가 일어나면서 그렇게 순조롭게 메이주
유신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가? 그게 왜 가능했을까? 그런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요시노브
본인이 미토 출신이고 즉 존왕양이 사상의 본거지
출신의 출신이 마지막 시호근이었기 때문에 그 조항양이 사상을
자기네가 만들어낸 자기 밀도번이 만들어낸 조항행 사상을 가지고 실제로
천왕을 왕정 복고를 시키려고 하면서 천왕을 앞세워서
도가에 대들었던 그 세력에 모든 무기를 생각보다 예상보다 훨씬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미도번이 조항양의 사상에 본거졌기
때문이라는 그런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축이 그 박구한
체제 도거가 체제의 세 번째 축이 세국였던 거죠. 그러니까 뭐
사스마 같은 데가 자꾸 포르투갈이나 그 스페인하고 자꾸 교류하는 거를
막기 위해서 이제 돼지마섬을 만들고 네덜랜드 상관장으로 교육을 어
국한시키고 이제 이런 거를 했었던 거죠. 그러면서 어 뭐 돼지마을
통해서 네덜랜드 상관 정보고 그 활설서라는 거를 1년마다 하나씩
에도에 와서 쇼근한테 바치라고 하는 것도 그 당시에 모든 정보 이런 거를
어떻게서든지 막보가 독점을 하려는 거죠. 그러니까 외국의
정보를 알아야겠고 그 대신 그 정보를 자기한테 저항하는 어떤 번들이 그걸
이용할 수 없게끔 자기네가 그 정보를 독식하고자 맞는게 화란 풍설서였었고 이러한
균형을 통해서 이것도 아주 세밀한 균형 아슬아슬한 균형을 통해서 최국을
하는 한편 외국의 몸 그 초식은 정보는 받아들이려고 하는고 체제를
유지하는게 독국어와 특유의 쇠국정책이었던 거죠. 미국의 폐리함대의 출연은 바로이 세국
정책을 흔든 겁니다. 사실 그런데 회리 제독이 안 나타 안
나타났었다라면 외세가 안 나타났었다라면 어쩌면 아슬아슬하게 남아 듣고 막보가
더 갈 수도 있었겠죠. 어떻게 보면 쇠국만 하고 있었다면 쇠국이 제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면 미국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은 뭐
박후와 심판다이들의 경제력이 약화가 되고 미토 학파가 나와 갖고 조항양이
사상을 어 만들어내고 곳 곳과 학파도 조항양이 사상을
만들어 내고 이런 것이 나오고 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 외국이 유지되는
한은 그나마 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니다. 그러나
페리의 등장은 결국은 세국 정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독구가와
막부 체제를 유지해오던 그 세력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에도 막부 체제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그 대안으로서
전왕위파가 중심이 되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네. 오늘은 어 에돔 막부 말기의 그 체제가
왜 미국 함대 페리 함대에 등장으로함 등장으로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부분을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서세 동점의 세대라고 말을 하 어 시대라고
말을 하고 외세가 나타나는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그 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면밀하게 어떤 점이 그 전에 체제가 예를
들어서 그전에 조선 체제가 어땠었고 [음악] 그 전에 청회 체제가 어땠었는데 그때에 영국이 나타났고 미국이
나타났고 했을 때에 일본이 나타났고 했을 때 이게 어떤 부분이 흔들려서
이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데 거기에 대한 세력은 그러고 어떻게 나왔고 이런 부분을 우리가 면밀하게
분석을 해내야지만 도대체 구체제가 어떻게 무너지고 근대
체제가 어떻게 형성이 되기 시작했는지에 제대로 된 이해를 도모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갖고 정말 놀라운 그 수준의 연구를
통해서 일본의 에도막보가
어떻게 유지가 되고 있었고 그 부분이 뭐가 약점이었는데 외세의 등장으로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음악] 명확하게 굉장히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해 줍니다. 오늘은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 어 말씀을 드렸고요.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음악]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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