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子文子
金子 文子 | |
|---|---|
『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労働経済社)より | |
| 生誕 | 1903年1月25日 神奈川県横浜市 |
| 現況 | 獄死(死因不明) |
| 死没 | 1926年7月23日(23歳没) 栃木県栃木市栃木刑務所 |
| 罪名 | 大逆罪 |
| 刑罰 | 死刑、後に恩赦で無期懲役に減刑 |
| 親 | 文一, きく |
| 有罪判決 | 1926年3月25日 |
金子 文子(かねこ ふみこ、1903年1月25日 - 1926年7月23日[1])は、大正期日本のアナキスト、ニヒリスト。
関東大震災の2日後に、治安警察法に基づく予防検束の名目で、愛人(内縁の夫)[注 1]である朝鮮人朴烈と共に検挙され、予審中に朴が大正天皇と皇太子の殺害を計画していたとほのめかし、文子も天皇制否定を論じたために、大逆罪で起訴され、有罪となった(朴烈事件)。後に天皇の慈悲として無期懲役に減刑されたが、宇都宮刑務所栃木支所(現・栃木刑務所)に送られた後、獄死した。
現代の韓国においては「良心的日本人」とされており[2]、2018年11月17日、国家報勲処より日本人としては2人目になる大韓民国建国勲章(愛国章)が追叙され[3]、2022年、布施辰治とともに2023年5月の今月の独立運動家に選定された[4]。
人物
幼少期
神奈川県横浜市に生まれる。父親の佐伯文一は広島県安芸郡の出身で、タングステン鉱石を掘り当てるため山梨県牧丘の杣口を訪れ、農家の娘であった文子の母親きくと駆け落ちする。本人による幼少期の回想によれば、四歳頃には寿町に住んでおり、「父はその頃、寿警察所(現・南警察署)の刑事かなんかを勤めていたようである」とある[5][注 2]。父親が家庭を顧みず母以外との女性関係を幼い頃から繰り返し見せつけられるなど、複雑で恵まれない家庭環境の中で過ごした[6]。文子の出生は届けられず、小学校にはすぐに入学できなかった。その後、父は家を出て義妹(文子の母の妹)と同居。母は他の男と同居するという複雑な家庭状況のもとで育った。
8歳になり母の再婚先、山梨県北都留郡に同行するが、しばらくして叔父に引き取られ、母の実家金子家のある山梨県東山梨郡諏訪村大字下杣口(同郡牧丘町、現山梨市)へ移る。さらに母は他家に嫁ぎ、文子は「父には逃げられ、母には捨てられる」と自覚し、「子供ながらに考えても判らない自分の身の上に嘆き呪う」と後に予審の訊問調書で述べている。
9歳の時、実父の妹の結婚先、朝鮮忠清北道清州郡芙蓉面(現在の世宗特別自治市芙江面)の岩下家に引き取られ養子となる。そこに同居していた父方の祖母は、無籍者や私生子は引き取れない、という理由で文子を母方の祖父母の五女として入籍させた。文子は朝鮮でも養家先の親族から無理解な待遇を受け続け、自殺を考えるほどであった。1919年には独立運動の光景を目撃して「私にすら権力への叛逆気分が起こり他人事と思えぬほどの感激が胸に湧く」と予審で述べたように、朝鮮人の立場をみずからの境遇と重ね、深い共感と愛情を抱いていた。
社会主義との出会い
16歳で母の実家に再び戻ったが、母はそれまでにも結婚を繰り返しており、当時は蚕種問屋に嫁いでいた。後に文子は「家の無い私は数日ずつ付近の親類方を彷徨つた」とこの頃のことを回想している。 やがて、学問への欲求が強くなり、また山梨での親族たちとの生活も嫌になったため、1920年4月、17歳で単独上京した。当初は下谷区三ノ輪町の洋服商をしていた母方の大叔父宅に居たが、上野の「新聞売り捌き店」に入って夕刊販売を始め、社会主義者らと出会う。この頃、働きながら正則英語学校と研数学館に通った。学校は3ヶ月で退学したがその間、同じ学校で学んでいた新山初代と知り合い、社会主義やロシアのナロードニキの活動に関する本を借り、大きな影響を受けた。
1920年7月末頃、本郷区湯島に間借り、粉石鹸の夜店を出す。同年末、浅草で女中奉公。本郷区追分町の社会主義者で印刷屋の堀清俊方に住み込み活字拾いの仕事を続け、その間に社会主義の書籍や雑誌を読む。1921年夏頃、留学などで東京に滞在していた朝鮮の社会主義者たちと知り合う。11月、有楽町の社会主義者の集まる「岩崎おでん屋」に女給として入る。
朴烈との出会い
1922年3月、無資産無名の朝鮮人、朴烈と出会い、5月から同居を始める。文子も当時朴烈が組織した朝鮮人の社会主義者の研究会である黒濤会に加入した。しかし、会は9月に共産主義派とアナキズム派に分裂。朴烈が中心となり洪鎮裕、朴興坤、申焔波、徐相一、張祥重らと黒友会を組織。金重漢、新山初代、栗原一男、文子も次いで加入。11月頃、文子と朴は運動紙『太い鮮人』を発行。
翌1923年4月、文子と朴はアナキズムにより関心を持たせるため不逞社を組織、3月から住んでいた東京府豊多摩郡代々幡町代々木富ヶ谷1474番地(現渋谷区)の借家を集りの場とする。5月27日頃に第一回例会を開く。文子は「不逞社は権力に対して叛逆する虚無主義や無政府主義を抱いて居る者の集まり」であったと供述。『太い鮮人』は『現社会』とタイトルを変えて刊行を続け、文子も執筆する。6月には当時の著名なアナキスト、望月桂や加藤一夫の講演会を開き、中西伊之助の出獄歓迎会も開催する。
朴烈は、以前から文子以外の同志には内密に進めていた爆弾の入手を巡り(数人に依頼をするが結局は入手できず)同志金重漢との関係がこの頃から悪くなる。8月の例会では喧嘩騒ぎになる。黒友会の解散も同時期に課題になり、新山と金は独自の雑誌を発行し、文子や朴烈と別の行動をとるようになる。
逮捕と死刑判決、獄死
関東大震災後の9月3日、爆弾を使ったテロ計画など無政府主義活動に対する調査過程で居場所が露呈していた不逞社には過去の活動を踏まえて予防検束という名目で文子は朴烈と共に警察に連行される。続けて他の同志たちも検束。警察は「保護」から治安警察法違反に切り替え取り調べを続け、使用目的が具体化していなかったが爆弾入手をしようとしていたことが発覚していたため、文子は刑法73条(大逆罪)で朴烈とともに起訴、予審にまわされる。旦那の朴が大正天皇と皇太子の爆弾による殺害を計画していたとほのめかし、文子も朴に共感して天皇否定論の立場から天皇の殺害を主張したため、大逆罪に該当して起訴され、有罪となった。「天皇は病人ですから……それで坊ちやんを狙つたのです」と文子は予審で当時の皇太子を攻撃目標と考えていたと供述している[2]。
1926年3月25日、朴烈とともに大審院により死刑判決を受けたが、4月5日には恩赦による減刑で無期懲役となり、文子は宇都宮刑務所栃木支所(現:栃木刑務所)に服役したが、7月23日、獄死した。刑務所の発表では縊死とされているが、死因に疑問をもった布施辰治弁護士や同志は文子の母親とともに刑務所の墓地に向かい遺体を発掘するが、死に至る経緯は不明瞭であった。東京に戻った同志による文子への追悼と遺骨保管を妨害するため、警視庁は母親と同志たちを半日検束した。
検束された栗原一男と椋本運雄はそのまま釈放されず、8月半ば、朝鮮に送還された。彼らは大邱で組織されていたアナキズムの読書会を弾圧した真友連盟事件に関連させ、治安維持法違反容疑で起訴を受けた。
妻であったという認識から、朝鮮から朴烈の兄が息子とともに文子の遺骨を引き取りに来るが、警視庁は遺骨を直接渡さず朝鮮の警察署に送った。朝鮮に戻り、警察から遺骨を戻された兄は故郷、聞慶(ムンギョン)の山奥に遺骨を埋葬、土盛だけであった[要出典]。
不逞社の件では予審の後免訴になり、獄外から文子への救援を続けていた栗原一男が、保管していた文子の原稿をまとめ、歌集と自伝が刊行されたが、歌集は発禁処分となった[要出典]
タイトルは、
- 歌集『獄窓に想ふ』1927年1月発行、自我人社刊。
- 自伝『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1931年7月発行、春秋社刊。
1976年3月、山梨県東山梨郡牧丘町杣口の金子家の敷地に「金子文子の碑」が建てられた。
肖像写真の取り違え

2010年、外部リンク節にあるブロガーの指摘により、長く新聞や書籍等で「金子文子」として使われていた写真が別人ではないかとの疑惑が生じ、文子の顕彰活動をしている「やまなし金子文子研究会」が検証したところ、同姓同名の別人であったことが判明した。
2012年6月17日付けの読売新聞のコラムによると、『金子文子 わたしはわたし自身を生きる』を出版している「梨の木舎」は写真の差し替えを検討しているとのこと。同研究会の佐藤信子代表は、ミスが30年以上も表面化しなかった背景について、「文子の生涯が22年6ヶ月と短く、資料が少なかったからではないか」と指摘している[7]。山梨市牧丘町杣口の文子の実家には、父親が文子のいとこという男性が住んでいるが、文子の写真などは残ってないとのことであった。
主要な金子文子関連書
- 1946年12月25日 布施辰治、張祥重、鄭泰成共著『運命の勝利者朴烈』世紀書房
- 1963年3月 - 4月 森長英三郎「朴烈・金子文子事件」(『法律時報』所収)
- 1972年6月30日 瀬戸内晴美著『余白の春』中央公論社
- 瀬戸内晴美著『瀬戸内晴美作品集』2、筑摩書房、1973年
- 内容: 『遠い声』、『いってまいりますさようなら』、『余白の春』、解説: 平野謙
- 瀬戸内晴美著『余白の春』(『中公文庫』)中央公論社、1975年、ISBN 4122001749
- 瀬戸内寂聴著『瀬戸内寂聴伝記小説集成』第3巻、文藝春秋、1990年2月、ISBN 4163638806
- 各巻タイトル: 遠い声・余白の春、内容: 『遠い声』、『いってまいりますさようなら』、『鴛鴦』、『余白の春』、『美女伝』
- 瀬戸内寂聴著『瀬戸内寂聴全集』第6巻、2001年7月、新潮社、ISBN 4106464063
- 内容: 『遠い声』、『いってまいりますさようなら』、『余白の春』、解説
- 瀬戸内晴美著『瀬戸内晴美作品集』2、筑摩書房、1973年
- 1973年9月1日 金一勉著『朴烈』合同出版
- 1977年 『朴烈・金子文子裁判記録』再審準備会黒色戦線社<手書き公判調書をそのまま複製>
- 1987年7月 布施辰治著『運命の勝利者朴烈』復刻版、黒色戦線社
- 1988年 小松隆二編『続・現代史資料アナーキズム』みすず書房<公判調書を活字にする>
- 1991年12月25日 『朴烈・金子文子裁判記録』黒色戦線社<公判調書を活字化>付録として大審院判決、減刑等の公判書類原本縮小パンフ、『黒濤』『太い鮮人』『現社会』の復刻、『連帯』誌<山梨での碑の除幕式報告掲載* 1976年4月15日発行>が刷り込まれている。
- 1996年12月5日 山田昭次著『金子文子 自己・天皇制国家・朝鮮人』影書房、1996年12月、ISBN 4877142274
- 金子文子・朴烈関係文献目録・年表: p344 - 376
- 1999年9月15日 佐藤信子著「金子文子を支えた人々 栗原一男を中心に」(『甲府文学』12 に所収)
- 2006年2月『彷書月刊』2月号特集「金子文子のまなざし もう一つの大逆事件」彷徨舎
- 2006年8月 鈴木裕子(編)、亀田博(年譜)『金子文子 わたしはわたし自身を生きる 手記・歌・調書・年譜』梨の木舎、ISBN 4816606076
- 2006年8月『山梨学講座4 山梨の人と文化 日本とアジアの架け橋になった人々』
- 2017年12月15日 金子文子著『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獄中手記』岩波文庫、ISBN 9784003812310
金子文子を題材とした作品
映画
- 金子文子と朴烈(パクヨル)(2017年、韓国、監督:イ・ジュニク、出演:チェ・ヒソ)
- 金子文子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2025年9月11日、「あいち国際女性映画祭2025」のオープニング作品として上映[8]、2026年2月から全国で順次公開予定、監督:浜野佐知、主演:菜葉菜)[9]
舞台
著作
- ブレイディみかこ『女たちのテロル』(2019年、岩波書店、ISBN 978-4000613422)
- 金子とエミリー・デイヴィソン、マーガレット・スキニダーを題材とした伝記エッセイ。
- ブレイディみかこ『両手にトカレフ』(2022年、ポプラ社、ISBN 978-4591173992 / 2024年、ポプラ文庫、ISBN 978-4591183861)
- 小説。主人公が「カネコフミコの自伝」に出会う。
脚注
注釈
- 籍は入れていなかったものの、文子は事実上の妻で、妻と表記する書籍もある。
- この時期にはまだ寿警察署は存在せず、その前身である石川町警察署があった
出典
- “【コラム】韓日、中央政府は戦っても地方自治体・民間交流は続けるべき”. 中央日報 (2019年7月29日). 2025年7月11日閲覧。
- 日本からの世界史p110,鈴木亮
- “金子文子氏に韓国政府が勲章 独立運動家・朴烈氏の妻=日本人は2人目”. 聯合ニュース. 2018年11月15日.
- “2023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4인 선정·발표” (朝鮮語) (2022年12月13日). 2023年5月6日閲覧。
- 金子ふみ.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ー獄中手記ー”. 2025年5月15日閲覧。
- 『人物学習事典』 2(オハ~サト)、学研、1986年、67頁。ISBN 4051018210。
- “あの「読売」が、大逆犯の復権に貢献!?”. 進工舍の人びと. 2019年3月9日閲覧。
- “金子文子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 あいち国際女性映画祭2025 Aichi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 2025年10月10日閲覧。
- “死刑判決から自死するまで、金子文子に何があったのか?浜野佐知の監督作が来年公開”. 映画ナタリー (2025年7月10日). 2025年7月11日閲覧。
- 北村 泰介 (2019年8月12日). “韓国映画「金子文子と朴烈」が舞台化、東京・下北沢で上演 演出家と出演者が語る思いとは”. まいどなにゅーす. 2019年8月12日閲覧。
- “「日韓問題考えたい」新宿梁山泊が挑む、シライケイタの「烈々と~」開幕”. ステージナタリー (2019年8月13日). 2025年3月5日閲覧。
参考文献
- 『朴烈・金子文子裁判記録』黒色戦線社、1991年刊
- 布施辰治、張祥重、鄭泰成共著『運命の勝利者朴烈』世紀書房、1946年刊
-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岩波文庫 無料web図書館 青空文庫サイト https://www.aozora.gr.jp/cards/000246/files/59950_73696.html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가네코 후미코 | |
|---|---|
「영상이 말하는 「한일 병합」사」(노동 경제사)로부터 | |
| 탄생 | 1903년 1월 25일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시 |
| 현황 | 옥사망(사인불명) |
| 사망 | 1926년 7월 23일 (23세몰) 도치기현 도치기시 도치 기 감옥 |
| 죄명 | 대역죄 |
| 형벌 | 사형 , 나중에 은사로 무기징역 으로 감형 |
| 부모 | 분이치, 키쿠 |
| 유죄 판결 | 1926년 3월 25일 |
가네코 후미코 (카네코 후미코,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 [ 1 ] )는 다이쇼기 일본 의 아나키스트 , 니히 리스트 .
간토 대지진 2 일 후, 치안 경찰법 에 근거하는 예방 검속 의 명목으로, 애인 (내연의 남편) [ 주 1 ] 인 조선인 박열 과 함께 검거되어 예심 중에 박이 다이쇼 천황 과 황태자 의 살해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칭찬하고, 문자도 천황제 부정을 논했기 때문에 대역죄 로 기소되어 유죄가 되었다( 박열 사건 ). 나중에 천황의 자비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우츠노미야 감옥 도치기 출장소(현 도치기 감옥 )로 보내진 뒤 옥사했다.
현대의 한국에 있어서는 「양심적 일본인」이라고 되어 있어 [ 2 ] , 2018년 11월 17일, 국가 보훈처 로부터 일본인으로서는 2명째가 되는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수되어 [ 3 ] , 2022년, 선 시정치 와 함께 202 ] .
인물
어린 시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 태어난다. 아버지의 사에키 분이치는 히로시마 현 아키군 의 출신으로, 텅스텐 광석을 파내기 위해 야마나시현 마키오카의 관문을 방문해, 농가의 딸이었던 후미코의 어머니 와서 달려간다 . 본인에 의한 어린 시절의 회상에 따르면 4세 무렵에는 스즈마치 에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그 무렵, 수경찰소(현· 남경찰서 )의 형사인가 뭔가를 근무하고 있던 것 같다”고 한다 [ 5 ] [ 주2 ] .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 이외와의 여성 관계를 어렸을 때부터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등 복잡하고 축복받지 않는 가정 환경 속에서 보냈다 [ 6 ] . 분코의 출생은 전해지지 않았고, 초등학교에는 곧바로 입학할 수 없었다. 그 후, 아버지는 집을 나와서 여동생(분자의 어머니의 여동생)과 동거.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동거한다는 복잡한 가정 상황 하에서 자랐다.
8세가 되어 어머니의 재혼처, 야마나시현 기타토루군 에 동행하지만, 잠시 후 삼촌에게 인수되어, 어머니의 친가 가네코가가 있는 야마나시 현 히가시야마나 시군 스와무라 대자 시모에구치(동군 마키오카초 , 현 야마나시시)로 옮긴다. 게다가 어머니는 타가에게 며느리, 문코는 “아버지에게는 도망가고, 어머니에게는 버려진다”고 자각해, “어린이면서 생각해도 모르는 자신의 몸 위에 한탄 저주한다”라고 나중에 예심의 문문 조서로 말하고 있다.
9세 때, 친아버지의 여동생의 결혼처,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 부유면(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의 이와시타가에 끌려 입양된다. 거기에 동거하고 있던 아버지의 할머니는, 무적자나 사생자는 빼앗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문자를 모방의 조부모의 오녀로서 입적시켰다. 문자는 조선에서도 양가처의 친족으로부터 무해한 대우를 계속 받아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1919년 에는 독립운동의 광경을 목격해 “나에게조차 권력에 대한 반역 기분이 일어나 타인사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솟는다”고 예심에서 말했듯이 조선인의 입장을 보지 않은 처지와 거듭해 깊은 공감과 애정을 안고 있었다.
사회주의와의 만남
16세에 어머니의 친가로 다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결혼을 반복하고 있어, 당시는 잠종 도매상에 신부하고 있었다. 후에 문코는 “집이 없는 나는 며칠씩 부근의 친척을 방황했다”고 요즘을 회상하고 있다. 이윽고, 학문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고, 또 야마나시에서의 친족들과의 생활도 싫어졌기 때문에, 1920년 4월, 17세에 단독 상경했다. 당초는 시모 야구 미노와마치의 옷상을 하고 있던 어머니의 오숙부택에 있었지만, 우에노의 「신문 매도점」에 들어가 석간 판매를 시작해, 사회주의자들 과 만난다. 요즘 일하면서 정칙 영어학교 와 연수학관 에 다녔다. 학교는 3개월 만에 퇴학했지만 그동안 같은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신야마 초대 와 알게 되었고, 사회주의나 러시아 의 나로드니키 의 활동에 관한 책을 빌려 큰 영향을 받았다.
1920년 7월 말경, 혼고구 유시마에 빌려, 비누의 밤점을 낸다. 같은 해 말 아사쿠사에서 여중봉공. 혼고구 추분쵸의 사회주의자로 인쇄 가게의 호리 키요시타카타에 살고 활자 픽업의 일을 계속해, 그 사이에 사회주의의 서적이나 잡지를 읽는다. 1921년 여름 무렵 유학 등으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 사회주의자들과 알게 된다. 11월 유라쿠초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는 이와사키 오뎅야에 여급으로 들어간다.
박열과의 만남
1922년 3월 무자산 무명의 조선인 박열 과 만나 5월부터 동거를 시작한다. 문자도 당시 박열이 조직한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연구회인 흑황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회는 9월에 공산주의파와 아나키즘파로 분열. 박열이 중심이 되어 홍진유, 박흥우, 신焔波, 서상이치, 장상중 등과 흑우회 를 조직. 김중한 , 신산초대, 구리하라 카즈오 , 분코도 이어 가입. 11월경, 후미코와 박은 운동지 「굵은 선인」을 발행.
이듬해 1923년 4월, 후미코와 박은 아나키즘에 의해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불사를 조직, 3월부터 살고 있던 도쿄부 토요타마군 요요만초 요요기 토미가야 1474번지(현 시부야구 )의 차가를 모으는 장소로 한다. 5월 27일경에 제1회 예회를 연다. 후미코는 "불령사는 권력에 대해 반역하는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안고 있는 자의 모임"이었다고 공술. '굵은 선인'은 '현사회'와 타이틀을 바꾸어 간행을 이어 문자도 집필한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모치즈키 가쓰라와 카토 이치오 의 강연회를 열고, 나카니시 이노스케 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한다.
박열은 이전부터 문자 이외의 동지에게는 내밀하게 진행하고 있던 폭탄의 입수를 둘러싸고(몇명에게 의뢰를 하지만 결국은 입수할 수 없고) 동지 김중한과의 관계가 요즘부터 나빠진다. 8월의 예회에서는 싸움 소란이 된다. 흑우회의 해산도 같은 시기에 과제가 되어, 신산과 김은 독자적인 잡지를 발행해, 문자나 박열과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체포와 사형 판결, 옥사
관동대지진 후인 9월 3일 폭탄을 이용한 테러 계획 등 무정부주의 활동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거처가 드러나던 불경사에는 과거 활동을 바탕으로 예방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문자는 박열과 함께 경찰에 연행된다. 이어 다른 동지들도 검속. 경찰은 '보호'에서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바꾸고 조사를 계속해 사용목적이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폭탄 입수를 시도했던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문자는 형법 73조(대역죄)로 박렬과 함께 기소, 예심에 돌린다. 남편의 박이 타이 쇼 천황 과 황태자 의 폭탄에 의한 살해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칭찬해, 문자도 박에 공감해 천황 부정론의 입장으로부터 천황의 살해를 주장했기 때문에, 대역죄 에 해당해 기소되어 유죄가 되었다. 「 천황은 병인 이니까 …
1926년 3월 25일, 박열과 함께 대심원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4월 5일에는 은사에 의한 감형으로 무기 징역이 되어, 문자는 우츠노미야 감옥 도치기 출장소(현:도치기 감옥)에 복역했지만, 7월 23일, 옥사했다. 형무소의 발표로는 죽음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인에 의문을 가진布施辰治변호사와 동지는 문자의 어머니와 함께 형무소의 묘지로 향해 시신을 발굴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경위는 불명료했다. 도쿄로 돌아온 동지에 의한 문자에 대한 추도와 유골 보관을 방해하기 위해 경시청은 어머니와 동지들을 반나절 검속했다.
검속된 구리하라 카즈오와 시모모토 운웅은 그대로 석방되지 않고 8월 중반 조선으로 송환됐다. 이들은 대구 에서 조직된 아나키즘의 독서회를 탄압한 마토모 연맹 사건과 관련시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를 받았다.
아내였다는 인식에서 조선에서 박열의 형이 아들과 함께 문자의 유골을 인수하러 왔지만, 경시청은 유골을 직접 건네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에 보냈다. 조선으로 돌아와 경찰에서 유골을 되찾은 형은 고향 문경의 산속에 유골을 매장, 토모리 뿐이었다 [ 요출전 ].
불사의 건에서는 예심 후 면소가 되어, 옥외에서 문자에의 구원을 계속하고 있던 구리하라 카즈오가, 보관하고 있던 문자의 원고를 정리해, 가집과 자전이 간행되었지만, 가집은 발금 처분이 되었다 [ 요출전 ]
제목은
- 가집 『옥창에 상후』 1927년 1월 발행, 자아인 사간.
- 자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시켰는가 』 1931년 7월 발행, 춘추사간.
1976년 3월,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군 마키오카마치 나구치 의 가네코가의 부지에 「가네코 문자의 비석」이 세워졌다.
인물 사진 착오

2010년, 외부 링크 절에 있는 블로거의 지적에 의해, 오랫동안 신문이나 서적 등으로 「가네코 문자」로서 사용되고 있던 사진이 별명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겨, 문자의 현창 활동을 하고 있는 「야마나시 가네코 문자 연구회」가 검증한 바, 동성 동명의 별인이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2012년 6월 17일자의 요미우리 신문의 칼럼에 의하면, 「가네코 후미코 저는 내 자신을 살 것」을 출판하고 있는 「배의 목사」는 사진의 교환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 이 연구회의 사토 노부코 대표는 미스가 30년 이상도 표면화하지 않은 배경에 대해 “문자의 생애가 22년 6개월로 짧고 자료가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지적하고 있다 [ 7 ] . 야마나시시 마키오카쵸 나구치의 문자의 친가에는, 아버지가 문자의 사촌이라고 하는 남성이 살고 있지만, 문자의 사진 등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었다.
주요 가네코 문자 관련서
- 1946년 12월 25일 후시 다쓰지, 장상중, 정태성공저 “운명의 승리자 박열” 세기서방
- 1963년 3월 - 4월 모리나가 히데사부로 「박열·가네코 분코 사건」(『법률시보』 소수)
- 1972년 6월 30일 세토우치 하루미 저 「여백의 봄」 중앙 공론사
- 세토우치 하루미 저 「세토우치 하루미 작품집」2, 쓰쿠마 서방, 1973년
- 내용 : '먼 목소리', '가는 작별 인사', ' 여백의 봄 ', 해설 : 히라노 켄
- 세토우치 하루미 저 「여백의 봄」(「중공 문고」) 중앙 공론사, 1975년, ISBN 4122001749
- 세토우치 료청 저 『세토우치 료청 전기 소설 집성』 제3권, 문예 춘추, 1990년 2월, ISBN 4163638806
- 각권 타이틀 : 먼 목소리 · 여백의 봄, 내용 : '먼 목소리', '말하자 안녕', '鴛鴦', ' 여백의 봄 ', '미녀전'
- 세토우치 료청 저 「세토우치 료청 전집」 제6권, 2001년 7월, 신시오샤, ISBN 4106464063
- 내용 : '먼 목소리', '가는 작별 인사', ' 여백의 봄 ', 해설
- 세토우치 하루미 저 「세토우치 하루미 작품집」2, 쓰쿠마 서방, 1973년
- 1973년 9월 1일 김일공부 『박열』 합동 출판
- 1977년 '박열·가네코 문자재판기록' 재심준비회 흑색전선사 <필기공판조서를 그대로 복제>
- 1987년 7월 후시 타츠하루 『운명의 승리자 박열』 복각판, 흑색 전선사
- 1988년 고마츠 류지편 『속·현대사 자료 아나키즘』 미스즈 서방<공판 조서를 활자로 한다>
- 1991년 12월 25일 “박열·가네코 문자 재판 기록” 흑색 전선사<공판 조서를 활자화> 부록으로서 대심원 판결, 감형 등의 공판 서류 원본 축소 팜프, “흑황” “굵은 선인” “현 사회”의 복각, “연대” 잡지 “야마나시에서 게재” 1976년 4월 15일 발행>이 인쇄되고 있다.
- 1996년12월5 일
- 가네코 분코 · 박열 관계 문헌 목록 · 연표 : p344 - 376
- 1999년 9월 15일 사토 노부코의 「가네코 분코를 지지한 사람들 구리하라 카즈오를 중심으로」(「고후 문학」12에 소수)
- 2006년 2월 「방서 월간」2월호 특집 「가네코 후미코의 눈빛 또 하나의 대역 사건」 방황사
- 2006년 8월 스즈키 유코(편), 가메다 히로시(연보 )『가네코 후미코 나 자신을 살아가는
- 2006년 8월 “야마나시학 강좌 4 야마나시의 사람과 문화 일본과 아시아의 가교가 된 사람들”
- 2017년 12월 15 일
가네코 후미코를 소재로 한 작품
영화
무대
저작
- 브레이디 미카코「여자들의 테롤」(2019년, 이와나미 서점 , ISBN 978-4000613422)
- 브레이디 미카코 『양손에 토카레프』(2022년, 포플러사 , ISBN 978-4591173992/ 2024년, 포플러 문고 , ISBN 978-4591183861)
- 소설. 주인공이 「카네코후미코의 자전」을 만난다.
각주
주석
- 적은 넣지 않았지만 문자는 사실상의 아내로, 아내라고 표기하는 서적도 있다.
- 이 시기에는 아직 수 경찰서 는 존재하지 않고, 그 전신인 이시카와초 경찰서가 있었다
출처
- “ 【칼럼】한일, 중앙정부는 싸워도 지방자치단체·민간교류는 계속해야 한다 ”. 중앙일보 (2019년 7월 29일). 2025년 7월 11일 열람.
- 일본의 세계사 p110, 스즈키 료
- “가네코 분코씨에게 한국 정부가 훈장 독립운동가 박열씨의 아내=일본인은 2명째” . 연합뉴스 . 2018년 11월 15일.
- “ 2023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4인 선정·발표 ” (朝鮮語) (2022년 12월 13일). 2023년 5월 6일에 확인함.
- 가네코 후미. “ 무엇이 나를 이렇게 했는가-옥중수기- ”. 2025년 5월 15일 열람.
- 『인물학습사전』 2(오하~사토), 학연, 1986년, 67페이지. ISBN 4051018210.
- “ 그 “요미우리”가 대역범의 복권에 공헌! ? ”. 진공란의 사람들 . 2019년 3월 9일 열람.
- “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했는가 ”. 아이치 국제 여성 영화제 2025 Aichi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 . 2025년 10월 10일에 열람.
- “ 사형 판결부터 자사할 때까지 가네코 후미코에게 무엇이 있었는가? 하마노 사치의 감독작이 내년 공개 ”. 영화 나탈리 (2025년 7월 10일) .
- 키타무라 타이스케 ( 2019년 8월 12 일). “ 한국 영화 ‘가네코 분코와 박열’이 무대화, 도쿄 시모키타자와에서 상연 연출가와 출연자가 말하는 생각이란 ”.
- “ “한일 문제 생각하고 싶다” 신주쿠 양산박이 도전하는, 시라이케이타의 “열렬히~” 개막 ”. 스테이지 나탈리 (2019년 8월 13일). 2025년 3월 5일 열람.
참고문헌
- ‘박열·가네코 문자 재판 기록’ 흑색 전선사, 1991년 간
- 布施辰治, 張祥重, 정태성 공저 『운명의 승리자 박열』 세기서방, 1946년간
- 『무엇이 나를 이렇게 했는가』 이와나미 문고 무료 웹 도서관 아오카라 문고 사이트
관련 항목
외부 링크
Kaneko Fumiko
Kaneko Fumiko | |||
|---|---|---|---|
| Born | January 25, 1903 | ||
| Died | July 23, 1926 (aged 23) Utsunomiya, Tochigi, Empire of Japan | ||
Burial place | Mungyeong, North Gyeongsang, Korea | ||
| Other names | Park Munja Park Fumiko | ||
| Japanese name | |||
| Kanji | 金子 文子 | ||
| |||
| Korean name | |||
| Hangul | 가네코 후미코 | ||
| |||
| This article is part of a series on |
| Anarchism in Korea |
|---|
Kaneko Fumiko (金子 文子, Kaneko Fumiko; January 25, 1903 – July 23, 1926[1]) or rarely Pak Fumiko and Pak Munja (Korean: 박문자; Hanja: 朴文子), was a Japanese anarchist and nihilist. She was convicted of plotting to assassinate members of the Japanese Imperial family.
Early life
Kaneko Fumiko was born in the Kotobuki district of Yokohama, Japan, during the Meiji era. Her parents were Fumikazu Saeki, from a samurai family, and Kikuno Kaneko, the daughter of a peasant. As the couple was not officially married, Kaneko could not be registered as a Saeki.[citation needed]
In her early years, Kaneko described her life as relatively happy. Her father worked as a detective, providing for the family despite their modest means. However, Fumikazu eventually left his job, and the family began moving frequently. He developed habits of gambling, drinking, and abusing Kikuno. He also became romantically involved with other women, including Kikuno's sister Takano, whom he later married after leaving Kikuno.[2]
Kaneko faced challenges due to her unregistered status, which rendered her "invisible to educational authorities." This meant she was not officially permitted to attend school.[3] While some schools allowed her to attend classes informally, she was excluded from official school records, did not receive report cards, and was ineligible for graduation certificates. Despite these obstacles and interruptions in her education, Kaneko excelled academically.[4] After Fumikazu left, Kikuno entered relationships with several men, but these did not improve their living conditions. The family remained impoverished, and Kikuno reportedly considered selling Kaneko to a brothel, abandoning the idea only when she learned Kaneko would be sent to another region of Japan.[5] During this period, Kaneko experienced periods of separation from her mother, including a brief stay with her maternal grandparents while her mother remarried.
In 1912, Kaneko's paternal grandmother, Mutsu Saeki-Iwashita, visited and arranged for Kaneko to move to Korea, where she was adopted by her childless aunt. Before Kaneko's departure, she was formally registered as her mother's sister—a common practice at the time for children born out of wedlock.[6]
Life in Korea
Shortly after her arrival in Korea, Kaneko discovered that she would not be adopted or receive the higher standard of living she had anticipated. For the first year, her relatives maintained the pretense of including her in the family by allowing her to use the surname Iwashita. However, this practice ended, and she was referred to by her original surname, Kaneko. Her grandmother introduced her to visitors as a child taken in out of pity from unrelated people. Both her grandmother and aunt treated her as a servant. While they may have initially intended to adopt her, Kaneko believed they quickly decided she was unsuitable due to her perceived lack of refinement and upbringing.[7]
Kaneko was able to attend school regularly for the first time during her time in Korea. However, her relatives restricted her reading materials to mandatory schoolwork.[8] Although she was initially promised an education that would lead to college, she was only permitted to complete primary education and was not enrolled in secondary school. After finishing school, she was required to dedicate all her time to household tasks. She later identified this period as the most challenging of her time in Korea.[9]
Kaneko was abused by her relatives. Despite their relative wealth, she was given minimal clothing and living provisions and was frequently punished with beatings or food deprivation for perceived misbehavior. On some occasions, the abuse was severe enough that she considered suicide.[10] During her time in Korea, she also observed the mistreatment of native Koreans by her relatives and other Japanese occupiers.[11]
Return to Japan
In 1919, at the age of 16, Kaneko Fumiko was sent back to her maternal family in Japan. It is believed this was because her grandmother and aunt, unwilling to arrange a marriage for her, considered her of marriageable age and no longer their responsibility. She resumed living with her maternal grandparents and began forming a close relationship with her Uncle Motoei, who was officially registered as her brother due to her registration status.[citation needed]
During this period, Kaneko also reconnected with her biological father, occasionally living with him. Her father attempted to arrange a marriage between Kaneko and Motoei. However, this arrangement was disrupted when Motoei learned that Kaneko had been involved with another young man. He alleged that her involvement implied a potential loss of virginity, which, in his view, invalidated the agreement with her father.[citation needed]
Following this incident, Kaneko was sent to live with her father again. However, her time there was marked by dissatisfaction, as she was not permitted to pursue the education she desired. In 1920, she moved to Tokyo.[12]
Experiences in Tokyo
When Kaneko arrived in Tokyo in 1920, she initially lived with her great-uncle and soon secured a job as a newspaper girl. She requested an advance on her wages to cover enrollment fees for two co-educational schools and began attending classes in mathematics and English. Through her job, Kaneko encountered various groups, including The Salvation Army and members of anarchist, nihilist, and socialist movements who promoted their revolutionary ideas on the street. However, the job proved challenging. Her employer exploited his workers and engaged in personal misconduct, leaving Kaneko with little time for her studies. Eventually, she quit the job.[13]
Kaneko briefly maintained ties with the Salvation Army but was not drawn to their beliefs. Her connection to the group ended when her Christian friend distanced himself, fearing that his feelings for her conflicted with his religious convictions. Hoping to escape the perceived hypocrisy of the Salvation Army, she joined the socialist movement but became disillusioned when she observed similar contradictions among its members. This led her to distance herself from organized groups and adopt a more independent approach to activism.[14]
Kaneko continued attending school intermittently during this period of personal and ideological exploration. In 1922, she met Hatsuyo Niiyama at night school. Kaneko described Hatsuyo as her "closest friend" in her memoirs and credited her with introducing her to the works of thinkers such as Max Stirner, Mikhail Artsybashev, and Friedrich Nietzsche, which influenced Kaneko's shift from socialism to anarchism and nihilism.[15]
During this time, Kaneko also met Pak Yol, a Korean activist who shared many of her ideas. After abandoning the socialist movement, Kaneko began working closely with Pak to pursue her vision of activism and revolution.[16]
Kaneko Fumiko and Pak Yol
Kaneko and Pak published two magazines that addressed the challenges faced by Koreans under Japanese imperial rule. While not directly involved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 publications reflected their radical beliefs. Kaneko's articles for these magazines were among her most overt acts of activism. Between 1922 and 1923, they also founded a group called Futei-sha (Society of Malcontents), which Kaneko described as advocating for direct action against the government.[17]
Their activities attracted government attention, and they came under increased scrutiny. Following the 1923 Great Kantō Earthquake, widespread public anxiety led to fears that Koreans, many of whom were agitating for independence, might use the chaos to stage a rebellion. The Japanese government responded with mass arrests, primarily targeting Koreans, on limited evidence. Pak and Kaneko were among those arrested.[18]
After lengthy judicial proceedings, Kaneko and Pak were convicted of high treason for allegedly attempting to obtain bombs to assassinate Emperor Taishō or Hirohito. They confessed to the charges, though Kaneko's confession appears to have exaggerated her role, possibly as an act of self-sacrifice for their cause.[19] During her trial, Kaneko wrote an autobiographical memoir.[20] This memoir remains the primary source of information about her life.
Kaneko and Pak, who had been romantically involved for most of their time together, were legally married a few days before their sentencing. Historian Hélène Bowen Raddeker identified as a move to "underscore the obvious irony in the fact that the Japanese state had united them legally in life before uniting them legally in death".[21] Both were sentenced to death, but an imperial pardon commuted their sentences to life imprisonment. Kaneko rejected the commutation, tore it up, and refused to express gratitude to the emperor.
While Pak survived his imprisonment and was later released, Kaneko reportedly died by suicide in her prison cell in 1926. Her death occurred under suspicious circumstances.[22]
Ideological views
Kaneko's perspective on nihilism evolved over time, as reflected in a statement she made to the court in 1925: "Formerly I said 'I negate life'... [but] my negation of all life was completely meaningless... The stronger the affirmation of life, the stronger the creation of life—negation together with rebellion. Therefore, I affirm life." She clarified her view of life affirmation for a nihilist, stating, "Living is not synonymous with merely having movement. It is moving in accordance with one's will… one could say that with deeds, one begins to really live. Accordingly, when one moves by means of one's own will and this leads to the destruction of one's body, this is not a negation of life. It is an affirmation".[23]
Kaneko's anarchist beliefs were supported by her rejection of nationalism, the emperor system, and as a pessimistic belief about the nature of revolutions. At her trial, she explained the reasoning behind her and Pak's plan to throw a bomb at the emperor, stating, "We thought of throwing a bomb to show he too will die like any other human being." She rejected "the concepts of loyalty to the emperor and love of nation" as "simply rhetorical notions that are being manipulated by the tiny group of privileged classes to fulfill their own greed and interests".[24] Kaneko viewed revolution as merely replacing one form of authority with another, stating, "[Revolution] simply means replacing one authority with another." She directed her efforts toward abolishing all forms of authority. She believed that while curing societal evils was not possible, individuals could find personal meaning through actions that aligned with their existence, regardless of the outcomes, stating, "It does not matter whether our activities produce meaningful results or not… this would enable us to bring our lives immediately into harmony with our existence".[25]
Kaneko expressed strong views on gender equality and did not formally associate with the feminist movement.[26] She resisted societal expectations of women, as shown when her great-uncle encouraged her to leave school and marry a tradesman, she insisted that she could "never become the wife of a tradesman". Though she does not appear to have fully verbalized her reasoning to her great-uncle, she stated in her memoir that she wanted to be independent, "no longer… under the care of anybody."[27] She criticized the unequal opportunities for women in gender-segregated education.
Kaneko also highlighted gender inequality within socialist groups. She ended a relationship with Segawa, a socialist, after he dismissed concerns about the consequences of their relationship, such as pregnancy. She stated that she "expected him to take some responsibility" and realized she "was being toyed with and taken advantage of".[28] She pointed to such behavior as indicative of a broader failure of socialist men to uphold ideals of equality. Kaneko specifically challenged the double standard that placed responsibility for relationships on women while excusing men from accountability.
In popular culture
- Kaneko and, particularly, her trial was portrayed in the 2017 film Anarchist from Colony.
- A newspaper containing Kaneko's photograph was discussed in Mr. Sunshine.
See also
References
Citations
- The exact dates of Kaneko’s life are uncertain. The official record lists her birthday as January 25th, 1902, but this record was created years after her birth, and is therefore unreliable (see Early Life section). Her date of birth listed here is based on coinciding statements made by both of her parents. More information: Raddeker (1997), pp. 202–203.
- Raddeker (1997), pp. 203–206.
- Ambaras, David R. (2006). Bad Youth: Juvenile Deliquency and the Politics of Everyday Life in Modern Japa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41.
- Kaneko (2001), pp. 25–32.
- Kaneko (2001), p. 34.
- Raddeker (1997), p. 211.
- Raddeker (1997), pp. 211–212
- Kaneko (2001), p. 65
- Kaneko (2001), pp. 107–108
- Kaneko (2001), p. 102
- Raddeker (1997), p. 215
- Raddeker (1997), pp. 216–219.
- Raddeker (1997), pp. 220–221
- Hane (1993), pp. 122–123
- Kaneko (2001), p. 233
- Raddeker (1997), pp. 225–226
- Hane (1993), p. 76
- Raddeker (1997), pp. 196–201
- Raddeker (1997), p. 8
- Kaneko (2001), p. 6
- Raddeker (1997), p. 84
- Raddeker (1997), pp. 63–66
- Raddeker (1997), pp. 73–74
- Hane (1993), p. 124
- Hane (1993), p. 111
- Additional examination of Kaneko's views about women’s rights can be found in Raddeker (1997), p. 217.
- Hane (1993), p. 81
- Hane (1993), p. 100
Bibliography
- Hane, Mikiso, ed. (1993). Reflections on the Way to the Gallows: Rebel Women in Prewar Japan . Berkeley,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ISBN 9780520084216.
- Hane, Mikiso (2003) [1982]. "Women Rebels". Peasants, Rebels, Women, and Outcastes: The Underside of Modern Japan (2nd ed.). Rowman & Littlefield. pp. 246–293. ISBN 0-7425-2524-4. LCCN 2002151950.
- Kaneko, Fumiko (2001). The Prison Memoirs of a Japanese Woman. Translated by Inglis, Jean. Armonk, NY: M. E. Sharpe. ISBN 9780873328029.
- Raddeker, Hélène Bowen (1997). Treacherous Women of Imperial Japan: Patriarchal Fictions, Patricidal Fantasies. London: Routledge. ISBN 0-415-17112-1. LCCN 97-23328.
Further reading
- Ebrey, Patricia Buckley; Walthall, Anne; Palais, James B. (2006).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Houghton Mifflin Company. ISBN 0-618-13384-4.
External links
- "Park Yeol, Kaneko Fumiko, and Korean Anarchism". February 1, 2007. Retrieved January 3, 2009.
- Bowen Raddeker, Hélène (March 2002). "Resistance to Difference: Sexual Equality and its Law-ful and Out-law (Anarchist) Advocates in Imperial Japan". Intersections: Gender, History and Culture in the Asian Context (7). Retrieved 2009-01-03.
- 1903 births
- 1926 suicides
- 1926 deaths
- Birth registration
- Death conspiracy theories
- Japanese anarchists
- Japanese people who died in prison custody
- Japanese prisoners sentenced to death
- Japanese rebels
- Japanese women activists
- Korean women independence activists
- People from Naka, Yokohama
- People from Yokohama
- People convicted of treason against Japan
- Prisoners sentenced to death by Japan
- Prisoners who died in Japanese detention
- People who died by suicide in prison custody
- Women sentenced to death
- Japanese feminists
- Failed regicides
- Nihilists
- Korean resistance members
- Foreign supporters of Korean independence
- Activists from Yokohama
- Female suicides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 | |
|---|---|
| 출생 | 1903년 1월 25일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
| 사망 | 1926년 7월 23일(23세) 일본 제국 도치기현 우쓰노미야 형무소 |
| 사인 | 자살(기록상) |
| 매장지 |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북위 36° 40′ 51.3″ 동경 128° 08′ 11.6″ |
| 성별 | 여성 |
| 국적 | 일본 제국 |
| 민족 | 일본인 |
| 학력 | 충청북도 청원 부강소학교 중퇴 |
| 경력 | 불령사 행동대원 흑우회 행동위원 흑우연맹 행동위원 치안경찰법 위반 등의 혐의로서의 대역죄인 |
| 직업 | 사회운동가 |
| 소속 | 흑우회 |
| 부모 | 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 모 가네코 기쿠노(金子きくの) |
| 배우자 | 박열(1926년) |
| 상훈 | |
가네코 후미코, 카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 かねこふみこ[*]) 혹은 박문자(한국 한자: 朴文子,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이다.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에 묘가 있다.
생애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하여 출생 신고가 되지 못해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학대당하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후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였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나, 문란한 생활을 하던 스님인 외삼촌과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집 점원으로서 노동하면서 세이소쿠 가쿠엔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영향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되었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하였고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하고서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박열과 뜻을 같이하였다.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으며, 이면으로는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 의사를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다.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1]를 조직[2]하였고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당하였다.
如何ナル朝鮮人ノ思想ヨリ日本ニ對スル叛逆的氣分ヲ除キ去ル事ハ出來ナイデアリマセウ。 私ハ大正八年中朝鮮ニ居テ朝鮮ノ獨立騷擾ノ光景ヲ目擊シテ、私スラ權力ヘノ叛逆氣分ガ起リ、朝鮮ノ方ノ為サル獨立運動ヲ思フ時、他人ノ事トハ思ヒ得ヌ程ノ感激ガ胸ニ湧キマス。
그 어떤 조선인의 사상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반역적인 기분을 없앨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다이쇼 8년 중에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 소요의 광경을 목격하고 저조차 권력을 향한 반역적인 기분이 들었으며, 조선 분들이 하고 계신 독립 운동을 생각할 때면 남의 일 같지 않게 감격이 가슴에 벅차오릅니다.— 1924년 1월 23일 제4회 신문조서
그녀는 천황을 암살하려한, 소위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을 판결받았다. 며칠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으로 결혼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일본 제국 내에 시신을 거둬 줄 사람이 없어서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씨 문중의 사람이 되었다.[3] 여사의 묘는 경북 문경읍 팔영리에 조성됐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방치된 채 잊혀졌다. 그러다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현재 위치인 박열의사기념관 내로 이장하게 됐다.
사진 사건
박열과 후미코가 같이 찍힌 사진이 감옥 밖으로 유출되었는데 정우회와 정우본당 등의 야당이 대역범죄인을 우대했다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와카쓰키 내각 사퇴 운동에 이용하였다. 야당은 이 사진을 인쇄 살포하여 정치 문제화 하려고 하였다.[3] 이 때문에 3일간 의회가 정지되었고 사건의 예심판사 다테마쓰는 1926년 8월 9일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11일 사표가 수리되었다.[3]
사후
독립유공자 포상
박열과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이 인정되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6]. 2022년 국가보훈처는 가네코 후미코 선생과 후세 다쓰지 선생을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7].
작품 목록
수기
-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관련 작품
같이 보기
각주
- 東京府豊多摩郡代々幡町代々木富ヶ谷1474 番地に移る。現渋谷区富ヶ谷1-28 NTT裏辺り 2003年5月 現地確認
- <朴烈クロニクル・関連文献刊行録>
- 야마다, 쇼지 (2003). 《가네코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대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 산처럼. ISBN 978-89-90062-04-8.
- “[단독]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건국훈장, 한국으로 온다”. 뉴시스. 2019년 7월 19일.
- KBS, 〈광복절 기획 팩션 드라마 2부작 - 가네코후미코〉1부 2부, 2006년
- “가네코후미코”. 《공훈전자사료관》.
- 공훈관리과 (2022년 12월 13일). “2023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4인 선정·발표”. 국가보훈처. 2023년 5월 6일에 확인함.
참고자료
- 야마다 쇼지 (2003년 3월 15일). 《가네코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번역 정선태. 서울: 산처럼. ISBN 978-89-90062-04-8.
- 허미경 (2003년 3월 28일). “<가네코후미코> 야마다 쇼지 - '천황제' 폭거한 여성 아나키스트”. 한겨레. 2007년 12월 27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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