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4

병자호란 1 | 병자호란 1 | 한명기 | 알라딘

병자호란 1 | 병자호란 1 | 한명기 | 알라딘
병자호란 1 - 역사평설 |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은이)푸른역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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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매진해온 저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로 자리 매김한다.

「서울신문」에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목차


책을 내면서 _ ‘G2시대의 비망록’ , 병자호란

권력을 쥐고 자신감이 높아지다
숙부와 조카의 숙원宿怨|‘반정反正’이 성공하다|“금수의 땅이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이 되었노라”|숭명배금崇明排金의 열기가 고조되다|명,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호기를 잡다

권력을 빼앗길 뻔하다
동요하는 민심, 권력을 지키려는 조바심|이괄, 거병하다|인조의 공주 파천과 이괄의 서울 점령|춤추는 민심과 이괄의 몰락|실추된 권위, 흉흉한 분위기

‘친명’의 질곡 속에 사라진 개혁 의지
정권 보위에 모든 것을 걸다|‘은 먹는 하마’가 나타나다|개혁 시도가 흐지부지되다

모문룡에게 코가 꿰이다
모문룡, 조선의 ‘갑甲’이 되다|날로 심해지는 ‘은인’의 작폐|‘밀수 왕초’, ‘해외천자’의 사기 행각

명은 지고 후금이 떠오르다
명의 말기적 증상|요동의 방어선이 무너지다|원숭환, 누르하치를 제압하다|홍타이지, 칸汗이 되다|홍타이지, 후금의 전열을 재정비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나다
홍타이지의 승부수|인조, 강화도로 피신하다|아민, 화의를 제의하다|조선, 후금의 ‘아우’가 되다|북쪽과 남쪽의 의병|서북 백성들의 비극과 모문룡의 사기 행각

자괴감, 위기의식, 그리고 무대책
‘오랑캐’와 화친한 자괴감이 커지다|그치지 않는 모반과 역모들|총체적인 난국에 직면하다|표방은 있으되 실천은 없다

일본의 기가 되살아나다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원수’, 절호의 상경 기회를 잡다|‘공허지국’ 조선, 상경을 허용하다

명, 자멸하기 시작하다
모문룡의 본질이 폭로되다|‘국제 사기꾼’의 최후|홍타이지, 허를 찌르고 반간계를 쓰다|‘장성’이 무너지다

‘샌드위치’ 조선, 가도 정벌을 시도하다
조선, ‘샌드위치’가 되다|모문룡의 죽음과 조선|‘1629년 황성 기습’의 여파와 조선의 진퇴양난|유흥치의 반란과 조선의 가도 정벌 해프닝|유흥치의 역공과 죽음, 코가 꿰인 인조

동상이몽 속 흔들리는 형제관계
후금의 무역에 대한 갈망|개시 문제를 둘러싼 파열음|명사처럼 대접받고 싶었던 후금 사신들|후금, 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후금, 조선을 떠보다

대릉하성의 비극
홍타이지, 대릉하성을 포위하다|부메랑이 된 홍이포|조대수의 투항과 홍타지이의 배포

조선, 내우외환에 신음하다
‘청북 포기론’에 민심이 동요하다|원종 추숭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다|후금의 엄포에도 가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기세등등한 후금, 명을 흉내 내다

후금, 대조선 정책을 확정하다
후금은 다시 배를 요구하고, 조선은 절교를 결심하다|공경孔耿, 반란을 일으켜 후금으로 귀순하다|조선, 고래싸움에 다시 휘말리다|군사력의 균형이 무너지다|후금, 조선을 ‘손 안에 든 물건’으로 규정하다

노유녕과 강학년
또 다른 ‘중원의 대도’가 입국하다|강학년,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리다|이어지는 충돌, 훈수하는 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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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1623년 3월 13일, 두 사람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97)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접기 - bookholic
(259)
정묘호란 이후 조건은 이렇게 모병과 후금군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오랑캐’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을 힐난했고, 후금은 그들대로 조선이 맹약을 어리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조선 조정은 양자 사이에 끼여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은 부득이한 기미책(羈縻策)임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후금 사신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모병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단을 일으켰고, 후금군도 그에 맞서 병력을 풀어 요격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모병들은 후금군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 조선 관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요컨대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샌드위치’가 되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은 화약고가 되었다. 접기 - bookholic
두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모문룡을 잘 대접하고 그를 도와 후금과싸우는 것이었다. 요컨대 명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을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그 과정에서 기우는 제국‘ 명의 궤도 속으로 더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게 된다. (p.51) - mailbird
이괄의 난 이후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어영군과 총융군을 창설하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는 와중에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방어는 몹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이괄의난 이후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정권 안보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가 안보의 기반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그것은 분명 당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던 그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p.81) 접기 - mailbird
1626년 인조는 ˝작년 태감들이 사신으로 와서 온 나라가 비로 쓴 것과 같았다˝고 통탄했다. 요컨대 ‘은 먹는 하마’이자 ‘최악의 약탈자‘들에게 순순히 은과 인삼을 내주어야 했던 것은 인조대 조선이 안고 있던 ‘친명의 질곡‘ 이었던 셈이다. (p.90) - mail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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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한명기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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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가톨릭대, 한신대, 국민대에서 강의했으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를 썼고, 그 밖에 여러 저술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첫 책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로 2014년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접기

최근작 :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최명길 평전>,<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총 40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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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한글, 불편한 진실>,<이 담배 열풍을 어찌할꼬?>등 총 322종
대표분야 : 역사 5위 (브랜드 지수 621,88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通史

● 광범위한 사료 섭렵을 통해 확보한 학문적 엄밀성과 전문성
● 한국사는 물론 중국사, 일본사의 자료와 연구 성과까지 흡수하여 확보한 시야의 국제성
● ‘과거’이자 ‘역사’로서 병자호란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오늘’의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반면교사로서 승화시킨 문제의식
● 복잡하고 전문적인 역사적 사실을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재구성해낸 스토리텔링의 매력

병자호란, ‘과거’가 아닌 ‘현재’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
1675년(숙종 1) 봄, 만주 벌판을 달려온 한 사내가 압록강의 중강中江에 도착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단安端.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하던 도망자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안단은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가 된다. 그리고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자신의 주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한다.
1674년, 오매불망 고국으로의 귀환을 열망하던 안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주인이 북경을 비웠던 것이다. 1673년 오삼계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남이 혼란에 빠지자, 안단의 주인은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강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단은 탈출을 감행한다. 물경 38년 만의 시도였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을 통과하고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무사히 가로질렀다. 탈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안단의 사연을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봉황성으로 압송해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窮鳥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단의 기막힌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병자호란이 남긴 고통의 그림자가 길고도 길었음을 새삼 절감한다.

참담했던 병자호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被擄人들(병자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던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전쟁을 일으켰던 가해자 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청의 침략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도 별다른 대책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조선의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병자호란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낼 수 있을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매진해온 저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1.2》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로 자리 매김한다.
저자가 《서울신문》에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세세하게 살피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동시 출간된 병자호란 소설 그리고 강좌,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 높이다
저자는 지난 10월 3일부터 EBS 역사특강에서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라는 제목으로 병자호란 관련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부인 유하령은 돌아갈 ‘조국’이 없던 조선 포로들 ‘화냥년’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전쟁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지난했던 삶을 섬세하게 그린 《화냥년―역사소설 병자호란》을 썼다. 《역사평설 병자호란》과의 동시 출간이다.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시대의 비망록’이다.” 이 강좌와 소설이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성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병자호란의 현재적 의미, 병자호란을 ‘G2시대의 비망록’이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함의를 살피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조 정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파탄을 드러내다

병자호란이란?
주지하듯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조선 침략 전쟁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인해 이미 쇠락해진 조선은 청이 침략한 지 두 달여 만에 항복하고 만다.
1627년 정묘호란 뒤 후금後金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점차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거기에 조선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이 후금과의 실리적 외교를 제한했다. 문제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점차 세력을 키우던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을 갖는다. 그런데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 태종은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했다.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은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든다. 청군 철기鐵騎의 가공할 기동력과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항복했다.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행했다. 치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더욱 처참했다.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비싼 속환가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돌아온 후에도 ‘화냥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게 병자호란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조국’마저 앗아갔다.

인조, ‘정권 안보’에만 급급
조선은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였다. ‘끼어 있는’ 약소국이 자존을 유지하며 생존하려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병자호란과 인조 정권의 행적을 돌아보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먼저 ‘정권 안보’에만 급급했던 인조 정권의 난맥상을 지적한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 광해군 정권에게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지만 그들 또한 권력을 잡은 뒤에는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적산 탈취, 권력 남용, 인사의 난맥상 등이 잇따라 불거졌다. 그 귀결이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 진압 이후에는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보위하는 데 급급하다가 날이 새고 말았다. 새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실망은 컸다. ‘당신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냉소와 비아냥이 번져갔다.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이 같은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인조 정권은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가 청에 저항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입도入島조차 못했다. 무능력과 무책임의 산물이었다. 청군의 침략 사실조차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한번 패한 뒤에는 근왕을 포기하고 숨어버렸던 김자점,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들을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고 병사의 기본조차 모르면서 장졸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김류, 자신의 가족과 인척들을 강화도로 가는 배에 먼저 태우고 세자빈마저 김포 쪽에 방치했던 김경징 등의 행태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적과 싸우겠다는 호언과 의기는 높았으되 국정 전반은 ‘나사가 풀린 상태’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반정공신들 못지않게 인조의 책임이 컸다. 인조는 ‘명을 배신한 패륜 정권을 응징한다’는 명분과 공약을 내세워 집권했으되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일관성 없는 즉흥적 대책으로 안팎으로 곤경을 자초했다.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했던 것을 맹렬히 비난했으면서도 자신은 생부 원종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것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 실천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수사와 궁가들에게 부여했던 경제적 특권을 줄이거나 철폐하라는 요청에는 귀를 닫았다. 그리고 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백성들에게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사과’로 점철되어 있던 시대였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과거 정권을 뒤엎는 ‘파괴’에는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새로운 차원으로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다. 건설은커녕 ‘정권 안보’에만 급급하다가 ‘국가 안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 피해는 온통 백성들이 뒤집어썼다. 조선 역사의 비극이었다.

인조, 객관적 사실에는 눈을 감고 주관적 허상에만 매달리다
저자는 또한 인조 정권이 대외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주관적으로 규정하려 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명과 후금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후금에 대한 대책 또한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619년(광해군 11) 명의 강요에 떠밀려 조선군이 참전했던 사르후薩爾滸 전투를 대하는 인조 정권의 시각과 해석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원한을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원정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인조는 명의 거듭된 압박과 신료들의 집요한 채근에 밀려 1만 5천의 병력을 파병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명 장수 유정 휘하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619년 3월, 심하深河에서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려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왜 이런 참극이 빚어졌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명군의 난맥상 때문이었다. 당시 명군이 절대로 후금군을 이길 수 없었다. 병력, 무기, 작전, 기율, 지휘관의 역량, 인화人和 등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열세였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는 실책을 저질렀다. 네 부대를 지휘했던 두송, 마림, 이여백, 유정 등 장수들은 서로 전혀 화합하지 못했다. 특히 두송은 공을 독점하려는 욕심 때문에 일제히 출전하기로 약속했던 날짜를 어기고 먼저 출전했다가 사르후에서 후금군에게 전멸되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부대들 또한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군은 유정의 강압에 떠밀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조건 전진하다가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렸다. 참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인조 정권은 사르후 전투 참패의 원인을 오로지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광해군이 미리 투항을 지시하고 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명군이 참패했고 요동 전체가 넘어갔다’고 말이다. 이전 정권의 ‘허물’을 부각시켜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명 조정으로부터 승인을 얻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이 대목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조는 곧이어 명에 출병 기일을 알려주면 병력을 동원하여 후금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한다. 명과 후금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했던 섣부른 약속이었다. 당시 명은 후금을 공격할 의지나 여유가 없었다. 천계 황제의 무능, 환관 위충현의 전횡 아래서 명의 내부는 곪아터지기 직전이었다. 반면 후금의 정치, 군사적 역량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조가 후금을 치겠다고 섣불리 약속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타고난 존명尊明 의식에 권력을 잡은 직후 넘쳐났던 자신감에서 비롯된 언사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명과 후금의 역량과 정세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부정확한 정보에 주관적인 해석까지 더해지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매몰되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약속이나 공약을 남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문룡을 비롯한 명의 관리들에게 ‘후금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먼저 다짐했다가 역풍을 맞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아무리 밉더라도 사르후 전투와 관련된 사실은 ‘사실’대로 인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싸움의 주체인 명군의 문제점이나 후금군의 장점은 전혀 알려하지 않고, 원정 실패의 모든 책임이 광해군 정권에 있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렇게 ‘팩트Fact’에 눈감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지속하면서 문제점은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전략적인 ‘오늘’을 위한 거울

‘복배수적腹背受敵’의 한반도, 무엇을 해야 하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고 표현했다. ‘배[腹]와 등[背] 양쪽에서 적이 몰려오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정면의 중국 대륙과 배후의 일본 열도 사이에 ‘끼인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면이나 배후에서 기존 질서의 판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면 ‘끼인 자’ 한반도의 처지는 심각해진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패권국에게 도전하는 상황이 되면 ‘끼인 자’는 위기를 맞는다. 조선 역시 그랬다.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한족의 명이 떠오르던 14세기 후반에는 왜구의 발호가 극심해지고 홍건적이 고려로 밀어닥쳤다. 명이 쇠망의 조짐을 드러내고 일본이 굴기하던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명이 더 쇠약해지고 누르하치의 만주가 떠오르던 17세기 초반에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이 쇠퇴하고 일본이 다시 굴기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할퀴었다. 14세기 후반 이래 주변에서 힘의 전이가 벌어지면 한반도는 어김없이 전쟁터가 되었다.
현재라고 다를까? ‘복배수적’의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냉전시대 이래 세계의 패권국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쥐락펴락했던 미국이 쇠퇴하고, 지난 100여 년 동안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중국의 부상이 눈부시다. G2로 떠오른 중국의 자신감과 넘버 3으로 내려앉은 일본의 초조감에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 맞물리면서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예측불가의 상황을 맞고 있다.

역량 강화만이 살 길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끼인 자’인 약소국이 복수의 강대국 모두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강대국들끼리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이 되면 ‘끼인 자’는 결국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황제의 나라’ 명, ‘형의 나라’ 후금, ‘원수의 나라’ 일본과의 관계를 ‘모두’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다가 끝내는 파국으로 내몰렸던 전철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서 다시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략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활로를 찾으려 애쓰되 우리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일정 정도 이상의 독자적인 역량이 없을 경우, 외교적 노력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군사력을 비롯한 국가적 역량이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명과 청의 대결 속으로 속절없이 휘말렸던 병자호란의 전철을 돌아보면 ‘역량 확보’는 절박하다. 경제적 실력, 군사적 역량, 문화적 매력 등에서 주변 열강이 무시할 수 없는 ‘근사한 민주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 세대만이 아닌 후대 세대를 위해서라도.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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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청(淸)과 명(明)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를 펼치지 못했던 인조 정권의 실정(失政)을 거울 삼아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시기다. 최근 ‘최명길 평전’을 쓴 한명기 교수의 책은 그런 지혜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조선사 그 가운데 17세기는 지난 2월 16일 남한산성 해설 후 급격히 친근해진 느낌이 든다. 병자호란 이전의 임진왜란과 ... 더보기
벤투의스케치북 2020-03-02 공감 (10) 댓글 (2)



명과 청의 패권국 사이에서 눈치밥을 먹던 조선. 그리고 병자호란의 깊은 상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앞이 내다보인다. 가독성이 좋은 역사소설이기도 하다.
쎄인트 2019-07-16 공감 (19) 댓글 (0)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초등학교 때 소풍을 장릉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단다. 특별한이유는 없었고, 관내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저학년 때라서장릉이 누구의 무덤인지도 몰랐고, 그저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주변잔디밭에서 놀다 온 기억뿐이구나. 그리고 나중에 장릉이 조선시대 인조라는 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인조라는... 더보기
bookholic 2018-04-04 공감 (1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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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강국 명과 신흥 부상국 청 사이에 끼여 이도저도 못하고 나라 말아먹은 인조를 보니 단순한 과거의 역사로 보이지 않는다. 국제정세를 속에서 한반도의 상황을 파악할 때 지침이 되는 역사평설. 정세파악도 중요하지만 역시 내부의 역량이 튼튼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머큐리 2020-04-2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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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정연하고 체계적인 느낌. 읽는 내내 물 흐르듯이 술술 읽혔다. 좋다.
가양3동스나이퍼 2013-11-08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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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으로 중국의 명과 청, 조선 그리고 일본. 병자호란이라는 단어를 넘어 흐름을 읽을 쑤 있는 이야기들.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하루 2013-11-2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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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어본다. 너무나도 다르지만 같은, 너무나도 같지만 다른.
赤赤 2014-01-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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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제국이 스러지고 청 제국이 일어서는 동아시아 격변기에 조선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인조 정권은 의기가 드높았으나, 여러 가지 실정으로 개혁은 물 건너갔고, 후금(청 제국)과 명 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결국, 무대책은 전쟁과 항복이라는 파국을 불렀다.
解明 2019-02-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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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이가 왕이 되면 벌어지는 일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초등학교 때 소풍을 장릉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단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관내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저학년 때라서 장릉이 누구의 무덤인지도 몰랐고, 그저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주변 잔디밭에서 놀다 온 기억뿐이구나. 그리고 나중에 장릉이 조선시대 인조라는 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조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능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그런 왕의 무덤으로 소풍을 가서 그랬는지 소풍에 가서 무덤의 주인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구나. 선생님이 일부러 안 알려주셨던지, 아니면 아빠의 기억력의 한계이던지..

무능한 왕의 무덤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왕릉의 존재를 잘 모를 거야. 아빠처럼 그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알고 있지 말이야. 초등학교 때 소풍 이후에는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단다. 하기야 그렇다고 다른 왕릉에 가본 적도 별로 없구나. 우리집 근처에 있고, 아빠가 좋아하는 정조대왕의 왕릉만 여러 번 가본 것 같구나.



인조가 왜 무능한 왕이었는지, 아빠가 이번에 읽은 <병자호란>이란 책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단다. 지은이 한명기라는 분은 아빠가 십여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광해군>이라는 책을 쓰신 분이란다. 그 책을 통해서 아빠가 광해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반정으로 내쫓길 만큼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인조. 그런 인조는 왕다운 왕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



1.

1623년 3월 13일. 조카 능양군은 신료들의 힘을 등에 업고 숙부 광해군을 끌어내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인조이고, 역사는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고 하였단다.

광해군.

임진왜란 때 도망간 왕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로 국내에서 활약했던 세자 광해군. 그런데 전쟁이 끝났을 때 선조의 정비는 이미 죽고, 후궁들만 있었는데, 뒤늦게 정비를 맞아들이고, 영창대군을 낳았어. 적자가 태어난 거야. 이미 후궁의 아들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분조까지 해서 왕이 될 준비까지 했는데 말이야. 영창대군이 크고 나면 세자가 바뀌는 것은 아닐까 광해군도 걱정이 되었겠지. 그런데 얼마 뒤 선조는 죽고 광해군이 즉위했단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 영창대군은 언제든 자신을 위협할 존재였어. 결국 영창대군을 죽였단다.

조선시대에 왕 주변의 권력다툼으로 친인척을 죽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단다. 영창대군뿐만 아니라 반대측을 죽였는데, 그 중에 능양군의 아버지, 능양군의 동생도 포함되었단다. 그리고 관계상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목대비도 유폐시켰단다.

능양군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생각했을 테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 거야. 그런 능양군과 뜻이 맞는 신하들이 있었고, 반정을 계획했어. 궁 안에서도 그런 반정의 기미가 보였지만, 안일한 대응을 했고, 결국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늘 인조. 명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 명나라에서 반정을 인정해주고, 왕으로 승인을 받아야 했어. 그렇다 보니 명나라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광해군을 몰아낸 이유 중에 하나라고 내세운 것이 후금에 공격을 받는 명나라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었거든. 명나라는 인조 왕권을 미루면서 그런 인조의 처지를 이용했어. 2년이나 승인을 미루면서, 조선군의 지원을 받게 되었단다.

….



2.

인조 반정에 성공에 공을 세운 사람 중에 이괄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분류되고 외지로 발령받는 등 불공평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괄은 다시 난을 일으켰고, 놀란 인조는 공주성까지 도망을 갔단다. 이괄의 난은 내부 배신자에 의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단다. 인조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작은 난에도 왕이 멀리까지 도망을 갔으니 민심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고, 개혁안을 밀어붙이기에는 능력 부족이었고, 명나라 사신들은 툭하면 와서 어마어마한 은과 인삼을 요구해서 강탈당하는 수준이었단다. 특히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함경도 앞에 작은 섬 가도에 머무르면서, 양곡을 수탈해갔어. 금과 조선을 견제한다고는 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본적이 없고, 조선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을 뿐이었단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가 광해군이 후금에 대한 공세가 소극적이었다는 것인데 인조반정 이후 후금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어 광해군의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단다.

반정 왜들 했나.



명나라 모문룡.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사람이었단다. 앞서 아빠가 인조 책봉에 있어 명나라가 2년간 질질 끌다가 이루어졌다고 했잖아. 모문룡은 자신이 인조 책봉에 큰 공을 세웠다면서 이것저것 참 많은 것을 요구했어. 인조 정권은 모문룡을 위한 송덕비까지 만들어주었단다. 이 노회한 인물은 조선에 대해 갑질 자유이용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어. 모문룡은 광해군 때부터 가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광해군은 그의 노회함을 알고 그를 멀리 했어. 하지만 인조는 책봉의 은인으로 발목이 잡혀서 그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단다. 모문룡 한 사람만 거들면 참아보기라도 하지.. 그의 군사들도 가도 밖에 나가서 온갖 수탈을 했단다. 그런 그의 군사들을 처벌을 했다가 오히려 좌천된 조선의 관리도 많았어.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참 꼴불견이구나.



3.

당시 명나라 사정을 좀 이야기해줄게. 한마디로 지는 해였어. 망해가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다고 보면 돼. 온갖 비리의 중심이었던 만력제라는 황제가 죽고 장남 태창제가 즉위를 했어. 개혁시도를 했지만, 명나라도 운이 다했는지, 이 능력 있어 보이는 태창제는 즉위 한달 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어.

그리고 16살의 준비라고는 전혀 안된 천계제가 즉위했단다. 이후 환관들이 권력을 잡고 정권농단에 앞장섰어. 그나마 웅정필, 원숭환 등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장수들 덕으로 요동 지역을 후금의 공력으로부터 막고 있었어. 특히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두었고, 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루하치가 부상당한 후 죽었단다.

이후 누루하치의 후계자로 홍타이지가 즉위했어. 홍타이지는 참 영리한 사람이었단다. 홍타이지는 한인 포용 정책을 써서 명을 배신한 한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어.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강경파였기 때문에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명나라 공격에 걸리적거리던 조선을 공격하기로 했어. 조선 때문에 명나라를 공격할 때 늘 후미가 신경 쓰였거든.

그는 1627년 1월 8일, 조선 정벌을 명령했단다. 그것이 바로 정묘호란이야. 홍타이지가 조선 공격을 서둘렀던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었어. 누루하치의 후계자이긴 했지만 권력을 아직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홍타이지는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이 일인자임을 보여주려고 했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어. 조선의 군사였다고 후금에 투항을 했던 강홍립 같은 이도 같이 데리고 왔어.

후금 진격 소식에 방어할 생각은 전혀 없이 도망갈 생각부터 한 인조… 곧바로 강화도로 도망을 가버렸어. 후금은 대륙을 근거지로 한 나라이기 때문에 수군이 없었거든. 몇몇 장수들이 도망보다는 임진강에서 방어를 하겠다고 인조에게 군사를 요청했지만, 인조와 신료들은 자신들의 호위군을 보강하기 위해 군사를 지원해주지 않았어. 이괄의 난의 트라우마였나…. 나라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시는 위대하신 왕이시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을 가자, 후금군 대장 아민은 화의를 제안했어. 사실 후금도 명의 후방공격에 부담이 있어 조선에 오래 머물 수 없었거든. 조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어. 쯧쯧 도망간 것들이 무슨… 그러다가 결국 화친을 맺었어. 후금을 형으로 모시고, 조선 자신은 동생이 되겠다고 했어. 참 이상한 관계가 성립이 되었네. 조선은 명을 부모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명과 전쟁중인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으니 말이야.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럴 거면 반정을 왜 했는지….

후금이 형이 되었지만, 그리 착한 형은 아니었어. 후금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가는 곳마다 온갖 약탈을 했단다.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그래서 평안도 정봉수 등이 자체적으로 의병을 만들어 후금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어. 그러자 후금은 심한 불만을 쏟아냈단다. 감히 형이 하는데 동생이 무슨 참견이냐.



후금과 조선의 화친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당연히 강한 불만을 가졌어. 그리고 가도에 틀어박혀 있던 모문룡은 전혀 도와줄 생각 안하고 관망의 자세를 보였어. 조선은 모문룡이 후금의 후방을 공격해주길 기대했지만 가마니 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어. 정묘호란이 끝나고 나서는 자신이 기책을 내어 후금을 쫓아냈다고 명에 거짓보고를 했지. 참… 어찌 보면 어리숙한 인조와 조선 조정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구나. 하지만 그런 무능한 왕으로 인해 받는 백성들의 고통은 너무 크구나. 촛불을 들 수도 없고..



4.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을 맺고 인조는 다시 서울 경덕궁으로 돌아왔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고, 곳곳마다 민란이 일어났어. 그렇다고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썼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도 기가 살아났어. 국내 사정을 일본에 숨기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일본은 국교 재개를 요청했는데,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있나. 후금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실리를 찾고자 일본과 교역도 다시 재개했어.



명나라는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했어. 가도의 모문룡의 지지기반은 천계제와 그 주변의 환관들이었는데, 숭정제가 즉위하고 지지기반이 없어졌어. 이를 이용하여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치하기로 했어. 모문룡을 초대해서 속임수를 써서 처단했단다. 그래서 원숭환은 가도의 군대를 이용하여 요동반도 전체의 수비를 강화하려고 했어.

하지만, 홍타이지.. 이 영악한 인간이 꾀를 썼어.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질시킨 거야. 명나라 사신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거야. 원숭환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숭정제는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원숭환을 단칼에 처형시켰단다. 숭정제도 정세에 어두운 황제였고, 역시 간신들로 둘러싸여 있었어.

결국 명나라와 후금의 운명은, 그 나라의 지도자인 숭정제와 홍타이지의 능력의 차이로 결정나고 있었어. 이것은 비단 명나라와 후금만 그런 것은 아니지.. 당시 조선도 인조라는 왕으로 인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날에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봐도 바로 알 수 있잖니.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뿌듯하더구나.



다시 책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명나라와 후금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은 더욱 난처한 입장이 되었어. 샌드위치 신세라고 할까. 원숭환이 죽고 나서 가도는 무주공산.. 명나라의 유홍지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도의 일인자 되었어. 조선이 기회다 싶었어. 명나라의 반란을 일으킨 유홍치를 잡아 명나라에게 도움을 주고, 후금에게도 가도를 정리했다고 할 말이 생기고…. 그렇게 생각하고 가도 정벌을 나섰는데, 유홍치가 재빠르게 도망을 가버렸어.

그런데 도망을 갔던 유홍치는 명나라 정부를 어떻게 꼬득였는지, 반란군이 아닌 정식 관리인으로 다시 가도로 귀환을 했어. 모문룡이 유홍치로 바뀌었을 뿐 바뀐 게 없었어. 다시 조선을 괴롭히고 수탈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하고 내부 분란으로 죽고 말았단다.



정묘호란 이후 돌아간 후금은 조선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어. 화친을 맺으면서 약속했던 것들을 실행이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야. 무역 거래를 하기로 했는데, 조선이 무역 거래에 미온적이었고, 명나라보다 후금이 더 강한데 제대로 된 대접을 안 한다고 불만을 가졌어. 화친의 약속으로 조선의 배와 수군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조선은 그것도 빌려주지 않았어. 임진왜란에서의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주변국가들은 당시 조선의 수군과 전함이 명나라보다 낫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대. 그러고 보면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어서 그나마 결국은 승리를 했는데, 이때는 그런 영웅도 없고, 무능한 임금만 있었으니…



5.

홍타이지는 명의 거점이었던 대릉하성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었어. 이 전투를 통해 명나라의 중요 장수들이 청으로 귀순을 했단다. 홍타이지는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고, 그들도 후한 대접에 보답을 하듯이 명군이 가지고 있던 대포와 전함 기술을 전수해주었어. 이로써 후금은 수군도 갖추게 되었단다. 조선은 여전히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장차 후금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도망가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러면서 방어진지도 강화도에만 집중을 하였단다. 참나.. 백성들은 육지에 다 있구만…

….

그 사이 인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신경을 썼어. 자신의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는데만 신경을 썼어. 이것으로 신하들과 계속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일이 년도 아니고 무려 10년이나 이어졌단다.



그 사이 후금은 계속해서 화친 때 약속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인조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의 처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후금과 절교 선언을 해버렸어. 대단한 용기일세. 많은 신하들이 만류하고 간청을 했지만, 절교 선언은 홍타이지에게 전달을 했어.

홍타이지는 오히려 조선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였어. 지금은 명과의 전쟁에 치중을 해야 할 때였거든…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존재로 생각을 했을 거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 이미 손 안에 든 물건이라고 생각을 했다는구나.

….

강학년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인조의 실정을 이야기하면서 정신 좀 차리라고 이야기했지만, 쇠 귀에 경읽기였어.. 강학년의 비판을 소개하면서 병자호란 1권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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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1634년 11월, 강학년은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자신을 장령으로 임명하자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인조의 실정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광해군의 아들을 죽인 것, 숙부 인성군을 죽인 것, 생부 정원군을 부묘하려는 것 등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조반정 이후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다음의 내용이다.

“<서경>에 ‘정치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어하고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전에 보전하라’고 했는데 전하의 국사는 이미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들어섰습니다. 여러 차례 대란을 겪었음에도 조금도 허물을 반성하지 않고 고식책만을 써서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옛날 난정 때문에 나라를 전복시킨 자들과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전하께서 반정한 거사는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세상의 드문 조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엄연년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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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259)
정묘호란 이후 조건은 이렇게 모병과 후금군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오랑캐’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을 힐난했고, 후금은 그들대로 조선이 맹약을 어리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조선 조정은 양자 사이에 끼여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은 부득이한 기미책(羈縻策)임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후금 사신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모병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단을 일으켰고, 후금군도 그에 맞서 병력을 풀어 요격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모병들은 후금군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 조선 관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요컨대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샌드위치’가 되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은 화약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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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8-04-04 공감(16)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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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팟캐스트 전성시대에 창비에서 만드는 라디오 책다방을 즐겨 듣는다. 비디오가 아닌 오디오로 만나는 책에 대한 정보가 참 쏠쏠하다. 얼마 전,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 방송을 듣고 바로 이 책 사서 읽어야지 결심했다. 분량은 두툼한데,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다 읽지 않고서는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한명기 교수의 또다른 역사평설 <광해군>을 읽고 나서, 그동안 서인정권이 극악한 폭군으로 매도한 광해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됐다. 그 후에 나온 영화 <광해>는 말할 것도 없고. 한명기 교수의 역작 <병자호란>은 바로 그 광해군 시대를 종결하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시대에 벌어진 시대의 비극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평설이다. 지금으로부터 378년 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 새로운 천년에 또 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잠자는 사자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도전할 정도로 굴기한 이웃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미묘한 시각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가 이 책을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부른 이유를 비로소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됐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17세기 전반은 조선이 개국 이래 상국으로 사대하던 중국의 명나라에서 만주족 청나라로의 교체가 진행되던 파란의 시기였다. 어느 왕조가 그렇듯, 동아시아의 패권국 명나라는 내우외환의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환관의 엄당과 사대부의 동림당으로 나뉘어 국론의 분열, 정치에 직접 개인한 환관들의 만연한 부정부패 그리고 민생고에 시달린 백성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만주에서 발흥한 만주족 후금의 공세에 바람잘 날이 없었다. 만주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서정을 감행하면서 명나라의 동북 국경은 비상사태로 돌입하게 된다.



한편, 이런 국제정세 가운데 병자호란의 무대였던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의 집권 이래 가까스로 안정을 찾아가던 차에 훗날 인조가 능양군을 추대한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1623년)로 정권을 뒤집어지고, 광해군 시절 이래 명청교체기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외교정책 역시 부정되면서 화이론에 입각한 서인 강경 척화파들이 정권을 이끌면서 조선 정국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문제는 누르하치에 뒤를 이어 후금의 지배자가 된 홍타이지는 자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신복(臣僕)을 거부하며 오로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조선 정벌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629년 황성(북경) 기습과 1631년 대릉하성 공략으로 대륙 정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던 대칸 홍타이지는 투항한 범문정 같은 한족 출신 이신(貳臣)들을 활용해서 만주족의 후금을 다민족국가로 거듭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아버지 누르하치를 영원성 전투에서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최신 무기 홍이포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후금군의 약점으로 지적된 수군과 전함 확보에도 열심이었다. 이렇게 명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만주는 물론, 요동과 차하르 몽골까지 정복해서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으로 발흥하고 있던 후금에게 도대체 조선은 무슨 깡으로 도전했던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광해군 시대의 폭정을 규탄하며 집권에 성공한 인조정권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혁을 약속했지만 반정에 공헌한 서인정권은 그럴 만한 능력도 그리고 개혁을 수행하기 위한 의지와 도덕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격변의 시대에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 보존을 위한 정책도 전무했다. 우선 노골화되는 후금/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서 위해서 국가 재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실시되지 못한 세수 확보를 위한 양전사업과 군대를 기르기 위해 필수적인 인구 조사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는 민심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괄의 반란 이후, 연이은 역모 때문에 강화된 인조정권의 기찰로 지방 수비군들은 의심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조차 실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세력이 침략을 감행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인조정권의 정당성 문제는 명나라에서 파견하는 환관 칙사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조의 정권 인수 문제와 소현세자 책봉사로 파견된 명의 환관 사절들은 은 징색에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들은 명나라에서 출발하는 순간에서부터 조선에서 한 몫 잡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이어지는 사행로에서 인삼과 은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뜯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조선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내줄 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명에서 인조의 공식 책봉사로 파견된 호양보와 왕민정은 자그마치 13만 냥에 달하는 은을 착취해 갔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 연간 국가 경비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상국으로 모시는 명나라가 자신의 정권을 인정해 주고, 자신의 핸디캡 중의 하나인 아버지 정원군의 원종 추숭 문제까지 명나라의 승인을 받고 감지덕지하는 인조의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주권국가의 수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더 까다롭게 하는 점 중에 하나는 가도에 진주한 명나라 패잔병 모문룡 집단이었다. 조선 땅에 있으면서 후금을 후방에서 견제한다는 이유로 군량과 각종 물자를 끝도 없이 요구했다. 정당한 왕위계승을 하지 못한 인조정권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모문룡은 가도에서 밀수왕초 혹은 해외천자로 행세하면서 조선 백성에게 행악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금은 후금 대로,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다음 가도의 모문룡에 대한 원조를 끊으라고 다그쳤지만 여전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정신과 후금은 오랑캐의 나라라는 중화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 불가능했다. 언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사대부들과 정권 지도부는 명에 대한 의리와 대의명분만을 강조하면서, 점증하는 전란의 위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조선의 죄없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부의 무책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으로 국토가 유린되었다.



기본적으로 인조 정권은 서인 반정공신의 주도하여 능양군(인조)을 추대한 군신복합체였다. 이들은 광해군의 실정을 지적하면서 집권했지만, 실제로 전대의 문제들을 개혁하는데 실패했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둔감했으며 대처할 능력도 없었다. 오로지 인조를 중심으로 한 정권안보에만 유능했던 김류와 이귀를 중심으로 한 서인정권은 그야말로 운명공동체였다. 훗날 강화도 함락 당시 멸공봉사(滅公奉私) 정신의 화신이었던 정권최대의 실세 김류의 아들이자 반정공신이었던 김경징에 대한 처벌을 두고 인조가 주저했다는 사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아무리 과거가 현재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17세기에도 그랬듯이 서북의 중국(후금/청나라)과 동남의 일본 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21세기에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냉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으로 미국은 미래의 가상 적국 중국을 포위하는 한미일 삼각 미사일 디펜스 대전략에 우리나라를 포함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최근 우리를 방문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과거에 전쟁까지 불사했던 적국에서 친척이 되었노라고 선언하면서 우리의 최대 무역파트너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동남 일본의 아베 정권은 고노담화를 포기하고, 집단자위권 행사라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해서 노골적으로 무장국가로 가는 우경화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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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4-07-07 공감(12)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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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배경이 된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



17세기 청(淸)과 명(明)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를 펼치지 못했던 인조 정권의 실정(失政)을 거울 삼아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시기다. 최근 ‘최명길 평전’을 쓴 한명기 교수의 책은 그런 지혜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조선사 그 가운데 17세기는 지난 2월 16일 남한산성 해설 후 급격히 친근해진 느낌이 든다.



병자호란 이전의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광해군과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된 그의 조카 능양군(인조)의 악연 등 배경 설명이 충분한 책이다. 물론 전황(戰況)도 상세하다. 인조는 반정 후 광해군대의 조선을 금수(禽獸)의 땅으로 규정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요동 수복을 기치로 내세우며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진을 친 장수다.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여서 후금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후금을 자극해 역공을 초래하는 모문룡 부대에 대한 근심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기에 의거(義擧)했다는 반정 세력들의 주장은 후금과의 대결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명은 인조 책봉 카드로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정당성 없는 정권에 책봉이라는 은혜를 베풀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생긴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봉전지은(封典之恩)이 추가된 것이다.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를 의미한다.



명이 인조를 책봉하기 전까지 인조는 서조선국사(署朝鮮國事)로 불렸다. 임시로 조선의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으로서는 모문룡을 도와 후금과 싸워야 했다. 기울어가는 명의 궤도 속으로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반정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난은 몇 가지 점에서 기록을 세웠다. 조선에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인조의 숙부 흥안군(선조의 열 번째 아들)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공주까지 피신했던 인조는 반란이 진압된 후 서울로 돌아와 백성들이 불지른 창경궁 대신 광해군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신축한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불린)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이후 역모 사건이 터졌다. 북관대첩의 주인공 정문부(鄭文孚)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이귀는 인조에 대하 호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어영군을 새로 창설했다. 이서(李曙)는 총융군(경기지역 병력)을 만들었다. 이서 등은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유사시의 국왕 피신처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정비하려고 시도했다. 즉 적군이 침입하면 국왕은 훈련도감과 어영군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세자는 총융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증원군을 받아들여 항전한다는 계획이었다.



반정 세력들은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고 상대적으로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방어는 몹시 소홀히 했다. 정권 안보에만 집중하고 국가 안보는 등한시 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운영하던 해방(海防)을 중단하면서까지 명의 책봉사 접대에 매달렸다.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세 가지 난정을 바로잡겠다며 등장했다. 난정이란 폐모살제,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한 것 등이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은 엄청난 은(銀) 징색(徵索)을 했고 가도의 모문룡 진영은 항상적인 양곡 수탈을 했다. 인조 정권은 친명은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책을 시행했다. 이 상황에서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문룡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모문룡 부대를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한명군(駐韓明軍)이라 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막강한 후금과 싸워 요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명은 가도를 조선과 후금을 견제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보았다. 모문룡 부대 즉 모병(毛兵)은 조선이 명을 배반하거나 후금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수단이었다.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표방했지만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문룡은 명 조정의 실력자 환관 위충현의 비호를 받고 명 황제를 속이고 조선에 온갖 민폐를 끼쳤다. 문제는 명 조정으로부터 모문룡을 감사(監司)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짓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 큰 민폐를 끼쳤고 후금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그런 모문룡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천계 연간 극심한 당쟁과 환관들의 발호 때문에 명은 무너져갔다. 1619년 3월 명군은 후금을 공격했지만 역습에 휘말려 참패했다.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이 전투를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이 가운데 명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 휘하의 병력이 패한 전투를 심하(深河) 전투라고 한다.



1만 5천 명에 이르는 강홍립 부대는 전투의 대세와 무관한 병력이었다. 영원성 원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누루하치가 죽었다. 161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금(후금)으로 칭하고 칸이 되었다. 훗날 태종이 되어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 치욕적 항복을 받아낸 인물이다.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제 문제 해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명 본토를 치기 위해 서진(西進)하려는 데 방해가 되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추대 형식으로 칸의 위치에 오른 홍타이지는 지위에 걸맞은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정묘호란을, 투항한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일으킨 전쟁으로 본 송시열의 견해는 잘못이다.



후금이 투항자의 사주(使嗾)에 따라 동병(動兵) 여부를 결정할 만큼 간단한 나라인가? 서인은 정묘호란의 근원적 책임을 광해군과 강홍립에게 돌리고 광해군 정권을 후금과 같은 부류로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처한 명분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홍은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이 함락되기 직전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장렬히 순국했다.



그는 죽기 직전 지휘관이 되어 습진(習陣: 진 치는 훈련)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는 말을 했다. 정권안보를 위해 기찰(譏察)에 혈안이 되었던 반정 세력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인조는 백성들에게 사과성명을 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터져 항복하고 나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잃어버린 10년인 셈이다.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괄의 난이 터지자 공주로 피신했던 것처럼. 후금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고 한 척화파들의 의견이 있었다.



실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비분강개만 하는 모습이라니...어떻든 두 나라는 화의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 등 내정의 난제들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배후의 원숭환(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타격한)의 위협을 고려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얻어내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후금은 형의 나라, 조선은 동생의 나라가 되었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섬으로 피해 목숨을 보전했다. 모문룡에게 후금군의 머리를 베어 바친 사람들(평안도 지역의 의병, 백성들)이 있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수급(首級;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속여 바친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이를 자신의 군공(軍功)이라며 명 조정에 천연덕스럽게 보고했다. 반정 세력들이 오랑캐와 화약을 맺음으로써 반정 명분을 스스로 크게 훼손했다고 찜찜해 하던 차에 명은 후금과의 화의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화의 이후 곳곳에서 역모가 일어났다. 삼레의 유생 이기안은 “능양군을 믿을 수 없다. 그가 오래 갈 수 있을까?”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라는 총체적으로 난국(難局)이었다.



인조는 오랑캐 토벌 의지는 대단했지만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630년 가평군수 유백증은 신은 광해(1575 - 1641)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란 직격탄을 날렸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참수(斬首)당한 것이다. 원숭환은 어제 그대를 죽인 것은 조정의 대법을 밝힌 것이고 오늘 그대를 제사함은 동료의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뿌렸다.



황경원은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한 은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이여송에 못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원숭환은 홍타이지의 계략에 말려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마방태감 양춘과 왕성덕을 포로로 잡았다. 이 둘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과 포승선이 밀담을 나누었다.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탈취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의도적 연출이었다. 고홍중과 포승선은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고 양춘과 왕성덕을 풀어주었다. 양춘과 왕성덕 두 환관은 부리나케 자금성으로 달려가 숭정제에게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옆방에서 들은 사실을 고했다. 원숭환이 오랑캐를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고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 통주에 이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살의 숭정제는 대국을 보는 눈이 없어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원숭환은 책형(磔刑)을 당했다. 이는 동림당과 엄당의 격렬한 상쟁과 복수가 배경에 깔린 사건이다. 원숭환이 처형당한 뒤 명은 자멸의 길로 확실히 들어섰다. 원숭환을 제거하는 반간계를 구상하고 실행한 주체들은 이신(貳身)들이었다.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출신 신료들이다.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우대하고 중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이신들은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신들까지 포용한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사람과 대국을 볼 줄 몰랐던 숭정제는 어리석었다. 지도자의 국량(局量)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원숭환은 모문령을 제거한 뒤 조선에 편지를 보내 모문룡 처단의 전말을 설명하고 모문룡과 부하들이 조선에 끼친 커다란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병력을 동원해 같이 후금과 싸우자고 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역이었다. 명이 자신들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아우국 조선과의 교역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후금이 조선에 요구한 물자 가운데 서적들도 있었다. 조선은 후금에 사서를 비롯 춘추, 주역, 예기, 통감, 사략 등을 넘겨주었다. 당시 후금은 홍타이지가 한인 신료들을 적극적으로 임용하고 문치에 입각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국력을 갉아먹은 사건이었다. 1633년 모문룡 휘하에 있던 공경(孔耿: 공유덕, 경중명)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하자 조선은 그들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했다. 1636년 12월 홍타이지는 조선이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고 후금과 적대한 것을 병자호란 도발의 주요 명분으로 제시했다.



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한 것(심하전투 참전)이 후금에 정묘호란을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조선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조선은 후금이 보유한 수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후금은 1631년 보낸 국서에서 우리가 쳐들어가면 너희는 보나마나 섬으로 도망칠 것이라 조롱했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계기로 전함과 수군까지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는 원종의 부묘(祔廟)를 밀어붙이느라 오버했다. 강학년은 인조에게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다. 이괄의 난 때 백성들 가운데 서울을 떠나는 인조의 가마를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로 민심 이반을 통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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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20-03-02 공감(1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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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교 정책을 묻다



한국의 동맹국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일본? 터키?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아마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미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대한민국의 동맹국이 어떤 나라들이 있는가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로지 미국은 대한민국의 동맹국이다, 미국은 6.25 전쟁시 우리나라를 빨갱이들로부터 지켜준 은혜를 베푼 국가라는 글 투성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당시에 조선이 중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태도이다. 명이 쇠퇴하고 청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그 시점에서 인조의 조정은 청은 형제의 나라도 될 수 없는 야만인, 오랑캐의 나라이며 명은 임진왜란 시 우리나라를 다시 서게 해준 재조지은의 나라라는 주장말이다. 그렇게 재조지은이라는 말로 백성들의 불만을 억누르던 인조의 조정이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는 우리가 익히 잘알고 있는 바이다. 인조가 청에게 대들다가, 시대착오적으로 명을 편들다가 심하게 얻어맞았다,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고 확인하고 싶다면 굳이 이 책을 읽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교과서를 읽어라. 그것도 새로나온 교과서 말고 그냥 학교에서 보이는 교과서를 읽으면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단편적인 정보를 습득하는데 머물지 말고 우리의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명은 재조지은을 베푼 상국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명 일변도의 외교정책은 나라를 거덜내는, 그리고 백성들을 피폐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도대체 인조가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가 의아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조가 원래 멍청해서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인조가 가진 명분론의 한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런데 이렇게 멍청한 짓을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하고 있다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한민국이 독립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연합군의 승리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급작스러운 항복 때문에 훈련받던 독립군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고, 그 때문에 안타까워했다는 일은 이젠 비밀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전적으로 미국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이들이 미국의 은혜로 대한민국이 독립하게 되었다면서 미국을 "천조국"으로 이해한다. 무기를 사도 미국무기, 콜라를 먹어도 코카콜라, 영화를 봐도 할리우드 영화를 선호한다.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사들이는 무기도 미국 무기를 이미 낙점해 놓고 요식행위로 비교절차를 밟는다. 그러면서 항상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는 미군과의 공동 작전 수행 능력을 위해서 미국 무기를 샀다고 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지들끼리 해먹는 다는데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아파치를 들여와도 미사일을 빼고 들여와도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자국의 안보와 평화는 팽개치고 미국 일변도로 외교를 진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자이툰 부대 파견도 솔직히 이해가 안되는 마당에 우리나라에서 쓸모없는 킬체인을 사온다든지, 사드를 도입한다든지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낮은 각도로 쏴도 한국에 충분히 들어오는 재래식 무기들이 많은데 북한이 바보가 아닌 이상 비싼 미사일을 고각으로 쏘아올려서 한국을 폭격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문명 게임 유저들도 막판에 돈이 남고 시간이 남을 때 재미로 하는 짓이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하지 않는 행위다. 그런데도 사드를 들여온단다. 요즘은 이스라엘의 아이언 돔에 꽂혔는지 조만간 그것도 들여오겠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제주도에는 강정에 해군 기지를 만든다고 국민들을 강제적으로 쫓아내고 있다. 당연히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고, 국방 전문가들이 들고 일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의외로 중국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을 겨냥하여 들여온다는 MD체제, 사드 체계에 대해서, 강정 마을의 해군 기지 건립에 대해서 중국이 꽤나 강하게 불쾌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중국을 겨냥하는 미국의 해외 정책을 편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 때문이다. 중국의 불편함이 꽤나 설득력이 있다. 지도가 있다면 한번 펼쳐보라.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혹은 군사 행동을 벌이는 지역이 어디 인지! 일단 일본과 한국이 있다. 다음으로 아프간이 있다. 그 다음은 이라크이다. 터키도 있고, 사우디도 미국이 잡고 있다. 대만에도 미국이 줄을 대고 있고, 필리핀은 말해 무엇하랴. 그곳들을 표시해 놓고 살펴보라.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 중국이 있다. 이는 밀덕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기초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지금 우리나라가 미국 일변도로 외교정책을 몰고 가는 것도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협하는 큰 불안요소가 된다. 과거에는 그래도 눈치를 봤는데 요즘은 대놓고 한다. 그러면서 대외적으로는 중국이 아닌 북한이라고 말하고 대내적으로는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말한다.



외교는 정치다. 정치는 적절한 순간에서 주고 받아야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타협할 만한 것들은 타협을 해야 한다. 이 기술이 외교술이고, 정치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인조 조정처럼 우리 것을 처음부터 다 주고 들어간다. 그리고 미국에 기대어 그것만이 살 길이요,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치는 이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못해 뻔뻔하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딱 두가지가 있다.



"생각 좀 하고 살자."



"부끄러운 줄 아시오. 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그깟 사대의 명분이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길래 2만의 백성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요?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고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하겠고.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의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



이 두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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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8-12 공감(6)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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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의 <병자호란>을 읽고



역사가 논란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후대에 어떤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지를 가지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한국을 넘어서 일본과 중국까지 모두 역사를 놓고 긴장이 커져간다.

이 와중에 역사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며 대입시험에 비중을 높이자, 입사시험에 역사관을 보겠다고 점점 강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것인가?

가장 큰 난리였던 임진왜란을 놓고 보자.

3대 대첩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쉽게들 대답할 것이다.

행주,진주,한산이 답이다.

하지만 일본측에서 볼 때 3대 대첩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면 답이 쉽게 나올까?

조선과 명군 수 만명의 목숨이 일거에 사라진 참혹한 전투는 용인에서도 사천에서도 있었다.

이런 역사는 잘 가르치지 않기에 일반인들은 거의 알기 어렵다.

더해서 일본군이 끌고 온 조총, 명군의 홍이포 모두 서양의 기술이다. 우리는 거북선을 가르치지만 이들 신기술이 어떤 경로로 흘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데 역할을 했는지는 잘 익히려 하지 않는다.



대중들의 역사인식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역사 베스트셀러들을 보자.

아마 대중서와 만화가 많을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히트친 것은 나름 반가운 일이지만 만화 하나로 이해하기에는 역사는 훨씬 복잡 미묘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역사책이 거의 없다 보니 대중들의 생각은 한쪽에 쏠려 있어서 막상 필요한 부분에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한명기의 <병자호란>은 이렇게 좁은 시야에 머무는 한국사를 한층 높여 보려는 애씀의 산물이다.

전작 <광해군>의 뒤를 이어서 새로 집권한 인조 정권의 실상을 소상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훈신에 둘러싸여 개혁 보다는 이권 다툼에 머문 반정.

광해의 폐모살제를 비난하며 집권했지만 인조 또한 숙부와 동생을 죽이게 되는 정쟁.

왕이 아니었던 자신의 부친을 추숭하려고 신하와 대립하는 왕의 모습.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명 사신에서 10만냥이 넘는 은을 바치느라 재정이 파탄나게 되는 외교.



하나 하나 까볼수록 아 이래서 역사가 이런 길로 갔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절로 나온다.



일본,청이 신흥국이라면 조선과 명은 오래된 국가였다. 명은 청에 의해 정복되며 망했지만 조선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미 조선 또한 명과 거의 비슷한 노쇠함을 보이는 국가였다.

명의 노쇠함은 만력에서 숭정까지 이어지는 정치의 졸렬화에 잘 나타난다. 환관들의 폭주에 내정이 파탄나고 막판에는 충신을 참살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덕분에 명의 수명은 급속히 줄어든다.

반면 청은 대륙을 제패한 유목민족의 경험을 집대성해서 한인들을 끌어 안는 포용력을 발휘한다.

거기에 비해 조선의 정치에는 아쉬움이 많다.

당대 조선의 조정과 청을 직접 비교해 보는데는 김훈의 <남한산성>이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생생하게 드러나는 당대의 호흡을 통해 노쇠함이 어리석음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백성의 피를 쏟게 하는 비극으로 간다는 역사의 이치를 잘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역사 공부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흥망이다.

왜 흥하고 왜 망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망하는 길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경계해나가야 한다.

저자는 G2 시대에 한국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한국만큼 세계화의 흐름을 잘 타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국가가 없다. 그럼에도 FTA 나오면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움을 한다. 논쟁은 없고 그냥 싸움이다. 조선의 당쟁과 무엇이 다를까?

너네는 중국에 물건 팔아먹으며 왜 미국 편만 드느냐는 중국 관리의 비아냥이 편히 들리지 않는다.



역사는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각,해석만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제대로 따져보고 치열하게 논쟁해봐야 정말 도움이 되는 지혜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명기의 이 작품은 그 시작이 되기에 좋은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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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4-01-20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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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G2시대, 중국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등장 한 것은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서양의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수천 년 동안 중국 역시 많은 왕조들이 부침의 역사를 반복했다. 그러한 중국의 역사는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맞물리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이다. 한때, 짧은 기간 동안 내전을 겪으면서 그 지위가 약화된 때도 있었지만 오늘날 G2의 위상은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역사 역시 그런 중국과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조선 이후 고구려와 고려, 조선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우리와 중국의 관계는 곧 현대 한국이 처한 동아시아에서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 결코 약화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우두머리인 미국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며 그 지위를 격상시키고 있는 중국은 우리의 이웃으로 경제적 교류가 중심이 되지만 그 이전에 북한과 함께 한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 이것이 중국을 현대적 관점에서 본질적인 측면을 살펴야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중국과의 관계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통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 고려 말과 조선의 정묘, 병자년에 일어난 양대 호란이다. 임진왜란보다 더 굴욕적인 역사가 어떻게 보면 이 양대 호란일 것이다.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정통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문학부분에서도 이미 다뤄진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단편적이나마 잘 알려진 역사가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양자 호란을 당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조선 내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심도 깊게 다룬 대중 출판물이 얼마나 될까?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발간한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1, 2’는 1627년(인조 5년)에 일어난 후금과의 전쟁인 정묘호란 전후로부터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후까지 동아시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단순히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중심으로 한 47일간의 이야기나 주화파 척화파나 삼학사, 삼전도 굴욕 등 역사적 단편을 중심으로 병자호란을 다루지 않고 긴 역사적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우선 ‘병자호란 1’은 그러한 흐름에서 중국의 역사인 명나라와 청나라 정권 교체기와 조선의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던 인조반정과 1627년의 정묘호란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후금(後金)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치루는 동안 명나라와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는 조선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정립을 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숭명배금(崇明排金)’을 바탕으로 한‘재조지은’이라는 임진왜란 때 입은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에 묶여 변화하는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때 후금은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를 유지한다는 정치적 기조를 목적을 이룬 것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발목이 잡힌 이유가 뭘까? 임진왜란 때 입은 은혜가 표면상 직접적인 이유로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중심에 성리학이라는 사상의 유입으로 조선의 중심적 사상으로 자리 잡은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을 보내준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등장한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정권을 바꿀 만큼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등장해 그런 정치적과제를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살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말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점은 어느 정권이든 권력의 근본 바탕인 백성을 외면해서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정권이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백성은 살아남아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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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無盡 2014-01-1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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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병자호란은 사대숭명사상에 찌들어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국방에의 노력을 게을리한, 자격 없는 이들이 정책 결정자라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잘 가르쳐 준 사건이라고 보통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훈 외에도, 이 사건은 배후에 엄청 많은 사연과 맥락을 지니고 터진 역사적 이벤트였습니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지속되었고 열도와 대륙의 역학 관계 변화 등 복잡한 배경을 띤 사건이었는데 병자호란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여러 원인과 우연과 필연이 겹쳐 터진 사건이라서 우리가 간단히 자학 비슷한 걸 한다고 그 의의가 정리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병자호란은 만주 쪽에서 불세출의 영웅인 누르하치가, 이전에 없던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나서 터진 사건이고, 개인의 그런 야심 속에 동기가 한정되지 않는 엄청난 움직임이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군사적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조선 측의,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비참한 패배로 귀착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 역시 없었습니다. 만주 측 역시 코너에 몰려 동병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는 무리수가 많이 따랐으며, 조선은 이를 적정 수준에서 막아낼 여러 지혜로운 수완이 있었습니다. 중립 실리 외교 같은, 사실 그 실체도 뚜렷하지 않고 계속 추진할 동력이 넉넉지도 않았던 선택 말고도, 우리에게 다른 여러 옵션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낳게 합니다.




인조의 후계자 효종이 추진한 북벌론 같은 건 또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만주에서 세력을 키울 때도 만주의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병자호란을 계기로 그들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중원으로 진입하여 패권을 잡은 후에는 그들이, 말 그대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지닌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병자호란 당시 군사적으로 강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침착하기까지 했던 그들에게 우리가 패배한 건 일종의 필연으로 다가오지만, 참 얄궂게도 "강자를 몰라보고 함부로 까분" 수준까지는 또 아니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만주족은 적어도 최상위 지배가문들만 놓고 봤을 때 역사에서 흔히 보이는 광기 어린 내부 쟁패라든가 비이성적인 의사 결정 과정 같은 게 전혀 없습니다. 이 점이 놀라우며, 병자호란 당시에도 궁지에 몰려 조금 무리수를 두긴 했으나 상대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보고 필요 최소한의 희생만 치른 후, 목표를 달성한 후 신속히 원 위치에 복귀하여 "궁극적 목표"에 그저 충실했던, 냉철하고 이성적인 행보가 또한 놀랍습니다. 많이들 착각하는 게 만주족은 명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멸망시킨 주범이 아니며, 농민 이자성이 초래한 무정부상태를 수습하고 체제의 보호자를 자처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여타의 정복자들과 달리 별나게 명분에 집착했고, 그러면서도 위력을 보여 줘야 할 때는 무자비하게 보여 줬다는 점에서 효율적이고 실리지향적 정복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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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21-10-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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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누가 맨 처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탁월한 통찰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억이며 기록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에 대한 그토록 상세한 기억과 병자호란에 대한 무지가 쉽게 설명이 된다. 어쨌든 승리로 기록된 전쟁과 임금이 직접 항복을 해야만 했던 전쟁에 대한 기억과 기록은 그토록 다른 것이다.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졌을 뿐 아니라, 어쩌면 역사는 그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은 전쟁의 시작부터 중간 끝까지 그토록 자세하게 알고 있으나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지하다는 표현을 쓸만큼 모르는걸까. 혹시나 해서 적자면 난 이 책을 읽고 병자호란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만큼 모른다는걸 깨달았는데 -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 무지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내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적어도 난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도 비교적 평균이상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니 과희 나와 감상이 다른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인조와 병자호란은 내게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으로 기억되는데, 다른 건 기억에 남지 않지만 한없이 그 겨울이 춥고 고달팠겠구나 라고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 [병자호란]을 읽고 나서 곱씹어보니 그 남한 산성에서 인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를 꽤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랄까.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은 당시 역사적인 사실위에 작가의 상상력을 얹어서 나온 이야기인 만큼 당시 그 남한 산성 주변에 있던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고 서술하는데 집중한다. 반면 역사학자가 쓴 [병자호란]은 궁극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추적하는 글인지라 넓게 보려고 하고 사료로 매워 지지 않는 틈을 매꾸려 할 뿐이다.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은 1, 2권으로 빡빡하게 구성 되어 있는데, 왜 두권인지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이 것도 부족하네' 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 - 가능해도 아주 드물다 - 양쪽 모두의 입장과 상황을 봐야한다. 조선과 청의 입장을 봐야하고 전쟁의 원인에는 명을 빼놓을 수가 없고 임진왜란 이후 왜(아, 당시 일본이었는지 이 부분은 불명확하다) 는 어떠했는지도 봐야하니 두권으로도 부족한 편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다른 왕과 정치적인 입지는 여타 왕과는 달랐다. 엎친데 덮쳤다랄까 그 당시 조선은 떠오르는 태양 청과 지난 달 명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속된 말로 가장 핫하게 재평가를 받고 있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기본이 그 두 나라 사이에 균형을 잡고자 함이었다면, 인조는 반정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조의 행동과 생각을 분석할 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태생을 빼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광해군과는 다르게 명에 대한 사대는 거부할 수 없었고(거부할 생각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광해군과는 다른 외교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또한,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만큼 왕권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을 느껴야 했다는 점을 그의 행동을 분석하는데 꼬꽤 자주 언급하는 편이다. 일견 이해가 되고 꽤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다. 인조의 고뇌라고 해야하나 시대의 어쩔 수 없음이라고 해야하나. 결국 국내권력에 싸움에 매몰되어 있다가 나라 전체를 던져버린 꼴이다. 갈팡질팡하던 조선도 조선이지만, 청 국내에서도 새로 생긴 나라의 국내 정치를 안정화 시키는 방법으로 대외전쟁을 벌일 수 박에 없었던 분석이 함께 여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병자호란]이 납득할 수 있는 역사책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당시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비록 사후지만 다양한 면에서 분석을 해서 보여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두 나라 사이에 갈팡질팡 했어도 당시 청의 국내정세만 아니었어도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인조가 반정이 아닌 일반적인 즉위를 한 왕이었다면 국내정치에 그리 매몰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면 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는건 아니냐고 묻고 싶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당시 전쟁은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충돌해서 만든 사건 같다 정도로 분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역사를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는 이유는 '그 때 그 시간은 도대체 왜 일어났는가'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인조에 대해서는 무색무취로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만큼,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보면 비극적이었던 전쟁으로만 기억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히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친미와 반미과 화두인 이 시대만큼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시대와 가장 비근할 때가 또 있을까. 역사는 돌고 돈다더니 빈말이 아님이다.


+ 이 책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가 임진왜란을 두고 선조와 광해군에 대해서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 내용을 강연으로 한게 있다.
정말 괜찮은 강의이다. (아래 리스트에서 90번이 한명기 교수의 강연내용이다)


https://itunes.apple.com/kr/podcast/id59384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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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013-12-2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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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설 병자호란 - G2시대의 비망록





애시당초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돌이켜 보면 수없이 많은 치욕의 기억이 존재할테지만 나는 양란의 시대인 선조와 인조 재위 때를 포맷하고 싶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지금의 우리 형편을 보고 '헬조선'이라 비하하지만, 전쟁터보다 더한 지옥은 아마 현실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된 후 200년이 흐른 1592년, 조선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섬나라 오랑캐라 얕보았던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며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물렸다. 일본의 도발 징후가 뚜렸하게 감지되었음에도 조선 조정은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 보자면 그들은 엄연히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고단한 미래에 애써 눈감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겪은 조선에게 하늘은 더욱 가혹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참혹한 전란을 미래의 교훈으로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지만 현실 정치는 그의 뜻을 따라가지 못했다. 무능했던 군주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권좌에 올랐지만 머지 않아 큰 격변이 또 한번 휘몰아 친다.





최근 들어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왜곡된 군주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도 그를 것이 연산군과 더불어 반정으로 쫓겨남으로 인해 조종의 시호를 받지 못한 군주였으므로 정사에서 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탓이다. 쫓겨난 군주 였기에 그는 반정세력에 의해 어리석은 군주로 역사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광해군 시대에 있어 여러 국정의 난맥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국제 정세를 보는 밝은 눈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임진왜란 이후 명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만주의 여진족이 발호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근거리 중립 외교를 펼침으로써 국가의 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조선으로선 안타까운 정변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은 기울어져가는 중원의 명 왕조에 사대를 강화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신흥강호 후금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교조주의와 어설픈 소중화 사상의 사대주의에 빠져 파국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역사에서 재확인하면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바로 그 아픔의 역사를 재인식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는 "병자호란은 과거아 아닌 현재다.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새삼 이 시대에 병자호란을 다시 꺼내 이야기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수백년 전 우리 조상이 그랬듯 주변 정세를 제대로 살피고 준비하고자 하는 뜻이다. 떠오르는 거대 중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또다시 피곤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제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제국'이 떠오르는 전환기마다 한반도는 늘 위기를 맞았고, 지혜롭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미국과 중국의 거대한 세력이 주도하는 G2시대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모두 지당한 지적이다. 임진왜란이 그랬듯 병자호란 역시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절한 패배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불과 수십년 전에 그토록 처참한 전란을 경험하고서도 과오를 고쳐나가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비하한다 해도 도무지 변명할 수 없는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로서, 김훈의 <남한산성>을 통해 병자호란을 겪었던 수백년 전 조상들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 삶이 아무리 팍팍하다 한들 그때 그 사람들의 삶에 비할 수 있을까. 어려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늙으막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어야 했던 억세게 운 나쁜 사람들 앞에서 감히 '헬조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참극을 다시 겪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다시금 곱씹어 봐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구호로 끝나서는 안된다. 역사는 현재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고, 반복되는 측면도 있다. 병자호란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다는 한명기 교수의 지적에 뒷머리가 서늘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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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가람 2015-12-2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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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후, '병자호란' 시간폭탄은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었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남한산성,김훈 中>



얼마전, 큰 흥행을 했던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가 있다. 혼례식이 있는날, 청의 부대가 쳐들어 와 사람들을 죽이고 신랑과 신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 신랑과 신부를 구해내는 이는 관군이 아니라 신부의 오빠다. 가장 행복한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큼찍하겠는가. 아마 당시 압록강 부근에서는 이런일이 많았을 것이다.

국가의 안보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보는 좋은 예일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재유정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유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7년전쟁의 회고록이다. 일본침입 원인을 침략국 당사자만의 문제로 본 것이 아니라, '우리내부에는 문제가 없는가?'하는 자기반성 의식이 이었다. 또, 만주족 굴기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 <징비록,김시덕역 참조>



임란, 결국 7년간 그렇게 당하고도 30년만에 정묘호란, 10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책은 임진왜란 후 명과 청사이에 무슨일 일어나고 있었는지, 선조 광해군 인조의 우리조종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알게해주는 명저이다. 읽는내내 오늘을 생각해보았다.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경술국치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전쟁

1953년 정전협정



한반도를 중심으로 권력이동이 일어날때, 우리땅에서는 소위 새우등이 떠지고 있었다. 16세기를 전후하여 만주족이 일어날때와, 21세기 힘의 중심이 미소에서 미중 G2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유사한 점들이 많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권력이동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 망말, 중국의 이어도 방공식별구역 설정,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김정은의 등장과 핵문제, 남한의 정세......

한반도 휴전선을 경계로를 미 중 러 일, 이들 4개국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성장은 이런 긴장상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이 변화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 남북분단을 넘어 경제협력으로 갈려면 우린 어떻게 해야하는가?



잠실 석촌호수 근처에 청태종공덕비가 있다. 흔히 삼전비라 불리는 이 비는 만주어,몽골어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포로로 잡아간 홍타이지(청태종)에게 그 공덕을 칭송하는 비를 제작하게 했던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단순히 만주족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인가? 우리에겐 문제가 없었는가? 과연 북벌이 가당한 얘기였던가?

결국 우리의 힘이 약하고 주변관계가 원할하지 않으면 선택의 기로에 몰리게 되고 결국 이런 참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400여년전 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지금 오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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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용사 2013-12-2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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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과 정묘호란까지의 과정

마치 한 편의 이야기를 읽듯 술술 잘 읽힌다.
소설같은 글쓰기라 역사평설이라는 양식에 잘 부합하는 듯 하다.
오래 전부터 읽어야지 했던 책이고, 너무 많이 알려진 소재라 진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에 대해 정리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저자의 전작 "광해군"에서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광해군이 무리한 토목공사와 공안 정국 형성으로 정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고, 흔히 그의 치적으로 알려진 외교 역시 인조대에도 그대로 계승됐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 책에서는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 정책 차이와 현실 인식에 대한 대비가 강하다.
명의 승인을 바라는 인조 정권의 실상이 읽는 내내 안타까웠고, 모문룡이라는 명의 장수에게 수년 간 휘둘려 농락당하는 과정도 정말 한숨이 나온다.
원래 한민족은 실리보다는 명분에 집착하는 나라인가, 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요즘 인터넷 상의 이른바 보수 진보 논쟁을 봐도 어쩜 저렇게 말을 위한 말, 아무 쓸데없는 소모적 논쟁만 할까 한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정말 민족성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이포로 영원성을 지키고 누르하치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든 원숭환이라는 명나라 장수의 몰락도 안타깝다.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에게 무려 책형, 즉 능지형으로 죽임을 당한다.
전투에 이기고도 살해된 악비에 비견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단지 전투만 잘해서는 안 되고 더 중요한 게 정치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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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6-10-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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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한명기



"당시 명 조정은 '인조반정'의 발생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정보의 원천은 모문룡이었다. 보고를 받은 명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번국藩國에서 정권이 바뀐 이유, 새 정권의 향후 향배 등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는 후금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던 터라 조선의 협조가 절실한 때였다." "인조반정의 처리 방향을 놓고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명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은 호부시랑 필자엄이었다. 그는 <조선정형소朝鮮情形疏>라는 글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인조 등이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난신적자의 행위'이므로 치죄해야 하지만,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의 지원이 절실한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엄은 결론적으로 '인조를 바로 책봉하지 말고, 정변의 정당성 여부를 충분히 따져보고 조선이 후금을 토벌한 공적이 드러난 뒤에 책봉하자'고 주장했다."(46-7)




# 재조지은에 봉전지은(封典之恩,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 추가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의 난맥상 때문에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 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당장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소모되었다. 반정 성공 직후 내세웠던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던 호기는 거품이 되었다. 인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 등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이원익의 증언에 따르면 "변란을 겪은 이후 군기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훔쳐 간 조총의 수량이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후금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땅에 떨어진 인조와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77-8)




# 이괄의 난(1624) : 반정 성공 후 벌어진 논공행상에서 반정 거사 당일 미적대던 대장 김류는 1등공신에 임명됐는데 이괄은 2등공신으로 밀려나고 변방으로 발령까지 났다. 여기에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려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은 마침내 반란의 불길을 올린다.




"대동법, 군적 정리, 호패법 등이 모두 별다른 성과 없이 중간에 무위로 끝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조 정권의 재정 확보와 국방 강화를 위한 방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이 같은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기 위해 백성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 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97)




"가도와 청북 지역을 횡행했던 모병들이 보였던 행태는 1637년, 병자호란으로 가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오랑캐 지역 정탐' 등을 명분으로 수시로 조선에 들어왔고 때로는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점령 지역까지 출몰했다. 더욱이 청북의 곳곳에는 모병과 요민들이 설치한 둔전들이 널려 있었다. 살 길을 찾아 후금을 탈출하는 요민들이 청북 지역으로 계속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가도에 사신을 보내 불필요한 요민들을 명 내지로 송환하라고 요청했지만 모문룡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주민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야 명 조정으로부터 군량을 많이 받아낼 수 있었기에 모문룡은 조선의 요청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 때문에 본래 요동에 머물던 요민들이 동요하자 후금은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은 후금의 보복과 침략을 우려했지만 '은인' 모문룡을 뜯어말릴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108-9)




"1626년 즉위 이후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西進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1621년(광해군 13) 무렵부터 누르하치 이후 후금의 후계 구도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정충신 등의 사절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내 후금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충신은 광해군에게 "귀영가貴盈哥(조선이 다이샨을 부르던 별칭)는 보잘것없는 용부庸夫지만 홍타이지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시기심이 많은데다 부왕의 편애를 믿고 형을 죽이려 한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부 정보까지 보고했다. 조선은 정탐을 통해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강경파이고 다이샨이 온건파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반면 인조 정권은 집권 이후 이괄의 난 등이 남긴 여파를 수습하고 모문룡을 접제接濟하는 데 골몰하느라 후금의 내부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50-1)




#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이유

1. 명목상 칸에 올랐지만 형들과 권력을 분점하고 연정을 펴야 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2. 만주 지역에 심각한 기근이 닥쳤는데 명나라와 교역선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할 곳은 조선뿐이었다.

3. 가도에 웅크리고 앉아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던 모문룡을 제거하여 뒤를 돌아봐야 하는 여지를 없애고자 했다.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627년 1월 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권 이후 '친명배금'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배금' 행위를 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조는 갑작스런 후금의 침략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162-4)




"초반의 전황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형국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그들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강화 협상을 제의했다. 윤훤은 조정에 보고한 뒤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 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군은 왜 갑자기 화의를 제의했을까? 우선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후금은 약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또 영원성에 있던 원숭환의 위협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남하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발생 소식을 접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166-7)




"2월 2일, 호차(胡差, 오랑캐 사신)가 갑곶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친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斥和派들이 들고 일어났다." "척화파들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169)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화이론華夷論을 지니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176)




# 3월 8일, 형제 관계를 맹약하고 화약 성립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전쟁 기간 동안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모문룡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의)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 '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을 크게 물리쳐 쫓아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 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185-7)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어디서부터 국정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반란을 겨우 진압했던 직후인 1624~1626년 무렵에는 백성들을 다독거려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같은 처지에서 후금을 정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벌은커녕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무엇보다 궁핍한 재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 빚쟁이가 가득하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묘사한 조정의 재정 형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당장 후금에 보내기로 한 세폐歲幣 비용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더 커지면서 민원民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모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던 것은 그와 관련이 있었다.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수습하고 후금의 재침에 대비하는 것이 절박했지만 국정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199-201)




"재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1626년 이후 신료들은 궁가, 내수사 등이 육지와 바다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혁파하라고 촉구했다. 또 내수사 노비들에게 면역, 면세의 혜택을 주는 것도 철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마이동풍이었다. 말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폐를 제거하라'고 강조했지만 궁가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닫았다. 1628년에는, 반정 직후 국가로 반환되었던 이현궁과 수진궁 소속의 어전들을 다시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인조는 "선 왕조의 관례였다"는 명분을 들이댔다. 역주행이었다.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1629년 1월, 최명길은 '공신들이 적몰籍沒을 사칭하며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는 폐단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역모 사건이 빈발하면서, 고변 등을 통해 공신이 되는 자들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있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데다 이어지는 역모와 고변 때문에 인조 정권은 공신들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206-7)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한 한족 출신 신료들을 이신貳臣이라 칭하는데 원숭환을 제거한 반간계를 기획한 범문정范文程 역시 이신 출신이다. "1629년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전에 수행했던 범문정은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문정은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포로로 잡힌 환관들의 옆방에 머물며 반간계의 미끼를 던졌던 고홍중과 포승선도 이신 출신이었다." 이신들이 명을 버리고 청으로 귀순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이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된다."(253)




"조선 조정이 위기감 속에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을 공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붙잡아 납치하려는 목적이었다. 《청실록》에서는 이것을 착생捉生이라고 적었다. 단순히 '포로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통해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다. 1631년(인조 9) 8월 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303-4)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 1626년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명군의 홍이포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패퇴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킨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금에서 홍이포를 제작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들이었다는 점이다."(309)




"사령관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갑론을박 끝에)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던 홍타이지는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316-7)




"점증하는 후금의 협박과 '가도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갈등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324)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반정으로 집권했던 직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까지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328)




#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




1633년,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하고 후금에게 귀순한 공경 일행을 먹일 식량을 요구받은 조선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천 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조선이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용골대 일행의 급량 요구를 거절하여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 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어머니 구씨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 '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후금에 대한 찜찜한 마음은 여지없이 사라졌다."(353-4)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귀순은 다른 측면에서도 조선에 악영향을 남겼다. 우선 조선이, 공경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하면서 떠안아야 했던 사회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경 일당과 그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 그리고 후금군이 맞닥뜨렸던 지역에서 가까운 의주, 용천, 철산 등지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의 와중에 농작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더 심각했다. 후금이 전함을 확보하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조선군이 공경 요격에 가담하여 후금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조선의 '본심'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금 내부에서는 당연히 '조선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양국 관계의 파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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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4-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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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하인리히 법칙’이 살아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



추천 권유도 9




나라 전체가 진실 규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목소리 큰 놈이 주인 행세하고, 분별없이

엄한 짓한 주인은 세인들의 눈총을 받고 엄한 곳으로 붙들려 가 제 목소리도 못 내는 이런

어지러운 환경 속에서 이와 유사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우리 선조들은 어떤 혜안으로 어지러운

국가적 난국 상황을 극복했고, 헤쳐나갔는지를 역사로부터 얻어서 개인 차원에서 주변에 널리

알리기 위해 ‘홍경래의 난’이라는 작품 이후 또 다른 작품에서 교훈을 얻고자 - 내가 국가와 민족

을 그 누구보다 생각하는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건전한 상식을 지닌 그냥 평범한 한

국민으로서 - 고심하던 중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능욕’을 당했고 가장 큰 혼란의 시기

였다고 판단된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을 선정해 작품으로 이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평소 알고

있었던 내용보다 작품으로 마주한 우리 조상들의 피해 정도와 후유증이 더욱 심각할 것 같아

읽는 과정내내 속 뒤집어지기가 수차례였다.

작품을 접하면 느낀 사항을 독후감으로 정리하려다 보니 역사관이 흐릿하거나 과거에 대한

무지의 수준이 과도한 인간들이 나의 독후감을 보았을 때 요즘 사태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비루한 인간으로 비춰지거나 자칫 누구로부터 사주 받아 글을 올리는 ‘꾼’으로 비춰져 폄하할

것 같아 고민하다. 쉽고 평이한 수준에서 머리 속에 맴도는 내용과 나만의 주장을 갖고 정리하려

노력했다.



작품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은 본 작품을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는 최근 우리의

통수권자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과정과 인조반정을 합리화하는 모반 세력들의 처세술, 청나라와

맺는 굴욕적인 외교상황 그리고 이를 비준하는 과정에서 논의하는 신료들의 말과 행동이 최근

우리의 통수권자에 의해 초래된 질 낮은 통치 행위를 촉발시킨 행위와 상당한 유사성을 띄고

있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런 질 낮은 조치를 취하게 만든 정치 환경을 보면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역사는 누가 뭐래도 반드시 반복 된다’는 것과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 그리고 ‘깨진

유리창 효과’,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여러 귀한 문구들

이 지닌 의미성이 한꺼번에 밀려와 큰 소름이 돋았던 시간이었다.

특히, 작금의 사태와 연관지어 보았을 때 위에 언급된 ‘하인리히 법칙’과 ‘깨진 유리창 법칙’에

부합되는 여러 사건이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인 그 이유로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반정공신들과 그 자식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을

바라보면 '촛불정신' 운운하며 집권했고 아직도 그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 뒷다리 잡기가

특징인 어느 집단의 패악질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으며,

자신의 리더만을 위해 만민 앞에 평등해야 할 법을 악용하고 남용하는 집단을 통해 패거리로

왕과 백성을 농단했던 ‘송시열의 잔당’들이 살아 돌아온 느낌이 들었으며,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비토권’을 남발하는 못된 인간 군상들을 통해 또 이유도,

명분도 빈약한 상태에서 정권 쟁취에 몰두하는 수준 낮은 무뇌아 집단도 보았으며,

대단한 권력이라도 잡은 양 입만 열면 ‘국민의 대표’라고 큰소리 치는 대표같지도 않은 인간과

연륜과 경험도 일천한 인간이 옛날같았으면 마주 보지도 못할 선배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며

조선에서 포로로 청나라 잡혀간 뒤 악질로 변한 역관들과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들어와 패악질

을 일삼던 중국의 사신들과 보았다.




특히, 전임자의 알박기 인사로 후임자의 인사권을 제한하며 악날하게 버틴 후 퇴임과 동시에 터진

아가리로 지랄하는 수준 낮은 인간과 자신이 무슨 큰 벼슬을 하고 있는 인간인양 아무에게나

막말과 하대하는 저질의 인간과 민의의 전당해서 국정을 운영해야 할 인물들 줄줄이 탄핵시키고

돌아서서 자랑스럽게 웃음짓는 모습에서 남송의 재상 ‘악비’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 희대의

‘간신’이자 ‘매국노의 상징’인 진회(1090~1155)라는 인물의 환생도 마주했고, 그런 인물이 틈만

나면 우리를 깔보고 흔들어대는 국가에 대해 ‘쎄쎄’만 하라고 외치는 모습과 그런 리더를 믿고

따르자는 무지 몽매한 저능무뇌아 집단을 보면서 저들을 진정 내가, 우리가 뽑은 국민의

대표인가하는 의구심과 자괴감에 밀려와 미치는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갖고 난리친다고 해서 그런 인간들과 그런 인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집단을 질책하자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그런 그의 상대가 똑똑해서 또 그들의 행위가 올바르기

때문에 그의 적수가 되는 집단을 칭찬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집권 세력의 반대의 편에 선 집단이 지금과 같이 국가와 국민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작은

발언 하나, 행위 하나하나가 정권 쟁취라는 그들의 대의명분에 가려져 지속적으로 자살 행위적

발언으로 연결될 경우 언젠가 그보다 몇 배 아니 몇 백 배 크나큰 부담과 국가적 변란으로 우리

에게 나타날 것이 우려되기에 즉, 소소한 현재의 작은 잘못이 ‘하인리히 법칙’과 ‘깨진 유리창

법치’으로 연결되는 것이 우려스러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에 지적하는 것이다.






정치권이 이런 저런 이유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이전투구식 헤게모니 싸움으로 난리를 칠 때

과거 우리의 리더였던 사람이라면 큰 어른으로서 양 쪽을 자제시키고 합심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그 리더였던 양반은 아직도 과거의 미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또 ‘모문룡’의 후손들에게 받았던 홀대는 잊은 채, 고무다리 긁는 애먼 소리만 남발하고 있고,

정치권의 수장이라는 어느 인간은 자기의 분수와 그릇도 모른 채 루돌프 사슴도 아니고 방울소리

요란하게 딸랑거리며 중국집만 기웃거리고 ‘내가 왕이 될 상이 아닌가’ 하고 헛심을 품고 다니며

비루한 면상으로 만면에 웃음을 띠면 자신이 높아지는 줄 알고 폼잡고 있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그 사람 집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도 없는 모양이다. 그런 인간을 보면 거울을 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집에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이다.

- ‘군주의 거울’(21세기 북스, 김상근 著)이라는 작품을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하고 싶다 -






거듭 이야기하지만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과 ‘깨진 유리창 법칙’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 단초를

작금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일부 몰지각한 위정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단초는 우리가 찾아간 나라에서 받은 ‘홀대’에 관한 사항으로 나는 굳이 그것을

‘혼합의 문제’라 칭하지는 않겠지만 ‘하인리히 법칙’과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그와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싶다.

외국 사절을 불러놓고 혼 밥을 하게 하는 문제는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받은 치욕적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 국민과 국가에 대한 모독 행위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미래의 어느날 우리의 새로운 후임 지도자가 ‘모문룡’과 ‘홍타이지’ 후손들에게 동일한 대접을

받아 항의해도

“너희 전임자에게 대접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너희 신임 리더를 동일하게 대접했는데 옛날

전임자는 조용히 밥만 잘 먹고 ‘쎄쎄’하고 갔는데 후임자는 전임자와 달리 왜 지랄하냐?“

며 타박하면 무어라 대응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가 우리의 자위권을 위해 도입한 방어 무기에 대한 굴욕적인 정책을 전임자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우리의 주적에게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를 USB도 줬는데 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아마도 더한 것을 갖다 주었을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후임자가 유사한 사례가 발생했을 때 저들이 전임자는 인상만 써도 잘만 갖고 오던데

너희 후임자는 왜 안 갖고 오냐고 몽니를 부리면 어찌할 것인지 자못 궁금할 뿐이다.

결국 전임자의 수준 낮은 대응 자세로 인한 악순환은 관례가 될 것인데 그래도 혼밥의 문제가

향후 우리의 위상을 결정지을 요소가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혼밥 한 그 당사자는 오늘도 자신은 떳떳하며 해당 출장 기간 동안 자신은 그들 서민의

실생활을 잘 파악하고 왔노라 이야기하고 앉아 있으니....국가를 대표해 회담하러 가라고 했지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다 나오는 그들의 실생활을 파악하러 거기까지 가서 할 일인지가 자못

궁금하며 우리의 말단 공무원도 그런 식으로는 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리더라는 양반은 원래 모지리라 그렇다 치더라고 그를 보좌한 참모라는 작자들이 더 문제이며

진정으로 나라와 리더를 위하는 참모라면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최근 러 - 우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트럼프가 만나 회의 도중 면박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졌을까?

절대 아니다.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부터 해 왔던 일련의 발언들을 생각해 보라.

작은 게 모여 그런 큰 모습을 보인 것이다.

청나라에 의해 이 땅이 침탈 당할 때 수 십 만의 우리 선조들은 북으로 북으로 끌려갔고 종국에는

포로로 끌려간 선조들이 상품으로 취급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그런 그들에게 ‘쎄쎄’를 외치며 굴종하자는 어느 리더의 선조 중 한 사람이 그 호란 당시 북으로 끌려간 사람 중 자신의 조상이 한 명이라도 끼여 있었다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수 있었을까?

세월이 흘러 지금은 몰라도 자잘한 증세가 모여 어느날 크게 밀려 올 때 당신의 후손도, 나의

후손도 안전할 수 없으며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의 이런 발언은 그런 상대국과 철천지 원수로 지내자는 게 아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리더라면 발언을 하더라도 책임 있는 자세로, 행동을 하더라도 국민을 대신한다는 당당한 자세로 해 달라는 것이지 비열한 웃음을 띠며 ‘쎄쎄’하며 헤롱거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제발 우리 민족이 당한 아픈 역사책 좀 읽고 다시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갖추어 수준 낮은 망발과 국민을 낮추어 보이게 하는 발언은 지양하라는 의미다.

법인 카드로 호의호식했을 터인데 그런 구분도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성격’은 얼굴에 나타나고, 본심은 ‘행동’에 나타나며, 인간성은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남을 우리 국민 모두는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듭 이야기합니다.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그리고 어정쩡한 색이든 정신들 차립시다.









작품을 분석해 보니






첫째, 지금도 우리 역사에서 ‘하인리히 법칙’의 단초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옛날의 ‘임진왜란의 일본’과 ‘병자호란의 중국’에 의해 발생한 역사적 침탈 행위, 근세사에서는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점’과 중공에 의한 ‘한국 전쟁 참전’ 등의 사건은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

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자잘한 사건, 사고 역시 또 다른 역사적 ‘하인리히

법칙’으로 연결되어져 몇 년 전 일본에 의해 벌어진 ‘반도체 원재료 수출 금지’ 사건과 중국이

사사건건 몽니를 부리는 ‘싸드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특히 후자로 발생된 일본과 중국이 일으킨 문제는 우리의 수준 낮은 리더가 입만 열면 ‘죽창가’

운운하며 과학적으로 규명된 오염수 문제를 통해 저열한 반일 감정을 부채질하고 우리의 안보를 위해 도입한 싸드에 대한 실행하지도 못할 ‘삼불일한’ 약속을 남발해 중국의 수모를 자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쎄쎄’만 하면 모든 게 해소된다는 망발로 인해 또 다른 ‘하인리히 법칙’을 초래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특히 아쉬운 것은 어느 분이 ‘짱개주의’에 대해 극찬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자 그에 대한 맞장구를

치면서 극찬하고 있는데 과거 청나라가 호란 당시 우리 선조 수 십 만을 끌고 가 상품으로 취급

했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언제적 이야기를 하느냐며 과거에 얽매여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수준이하의 사람이라고 질타할 것이다.

과거를 들먹여 그들과 싸우자는 게 아니다. 과거를 정확히 알고, 미래를 잘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동일한 실수를 발생시키지 않으려면 즉,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을 재발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며 왜 그렇게 중국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죽창가를 운운하며 오염수 방류에 대해 난리를 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전 정부를 ‘삶은 소대가리로 평가’한 북에서도 ‘일본은 100년의 적, 중국의 천년의 적’이라 표현

하지 않았던가. 그런 적 앞에서 ‘쎄쎄’하라?

심청이 아버지 시력검사 하는 소리하고 있는 우리의 질 낮은 차기 리더라고 외치는 어느 작자의

미소가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며 그런 리더에 아부하는 수준 낮은 무뇌아 집단들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하인리인 법칙을 끊어보고자 지금의 통수권자는 당신이 그렇게 밖에 할 수

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잘못된 수단의 선택으로 인해 국민을 아주 피로하게

만들고 있고 그의 편에 서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해도 모든 게 부정 당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같은 이야기의 무한 반복이지만 좀 더 신중했어야 하며 좀 더 체계적이어야 했었다.

결국 리더는 하늘이 내지만 그런 리더를 믿고 따를 수 있는 목표가 정당하고 합리적이어야 했다.






둘째는 리더의 자질도 중요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리더를 보좌하는 참모다운 참모의 부재(不在).

1) 광해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가 훈련대장 이흥립의 사위였던 국왕의 경호실장

격인 훈련도감 대장인 ‘장신’의 변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전란 중에 가장 시급했던 것은 ‘민생 문제’였으나 조정 신료들은 후금과의 ‘화의’가 불가피

했으나 오랑캐와 화약을 맺을 수 없다는 명분 때문에 고민한다.

‘윤황’은 후금과의 화의에 반대하면서

‘오늘의 화친은 이름만 화친일 뿐 실제로는 항복입니다. 전하는 요행을 바라는 간신들에

넘어가 더러운 오랑캐 사자를 접견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십니다’라는

직격탄을 날리나 오히려

‘유식한 그대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맞받으며 윤황을 잡아다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 요즈음 우리 정치현실과 비슷하다고 여져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3) 당시의 상황을 보면,

신하들은 ‘무관은 춥지도 않은데 떨고 문관은 천장만 바라보고 슬퍼하면서 임금에게만 모든

허물을 전가한다’고 통탄하고 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신료들을 상대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면서 ’왕은 지금

서생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다‘고 힐난하고 있다.

4) 인조는 사태의 책임을 앞뒤를 따져 보지도 않고 오버했던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 궁극에는

자신과 백성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지만 전란 중에 문제를 일으킨 반정공신

과 그의 자손들 김자점, 김경징, 장신 등에 대해 엄격한 군율 적용을 주저하고 있다.

5) 진정한 참모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신규 세력이 등장하면서 구세력을 감싸지 않고 처단을

택해 발전의 동력을 스스로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인조반정 직후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30여 명의 관인들을 처형했다. 쉽게 이야기해 ‘적폐

청산’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던가...‘적폐청산’이라고....

그러다 보니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새 정권이 구정권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새 정권의 행로를 주시하던 구정권의 잔당들 그리고 새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사민들 가운데 불만을 품은 자들이 역모와 고변을 자주 언급하면서 인조 정권은 공신들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기득권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극히 희박했다.

1) 반정 공신들인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의 행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한된 자료에 국한되어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기득권 세력이 된 반정공신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보위와 영구 집권을 위해 반이성적 행위의 주도자들이었다.

특히 군사부문에 있어 반혁명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기찰(譏察, 향동을 넌지시 살핌)’을

강화해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더욱 강화했는데, 이괄의 난 이후에는 자신들을 보호하는

사병의 숫자를 대폭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었지만 정작 인조를 경호하는 인력은 극히 제한

시켰으며 반정공신 ‘신경진’의 경우는 ‘인조’가 군사적 지시를 내렸음에도 이를 무시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 호란 당시 후금 군에 대항해 싸우다 전사한 ‘남이홍’은 ‘인조 정권 실세들이 벌이는

'기찰' 때문에 군사 훈련도 변변히 할 수 없었다’는 유언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 반정 공신들은 광해군 정권을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괄’에 대한 공훈을 낮춘 결과

‘난’으로 연결되어 인조가 파천하는데, 인조를 지원하는 인력이 추종해 이를 따르는 무리가

거의 없었고 인조가 궁궐을 비우자 약탈이 심했다고 하며 심지어 반정 공신들의 집이 백성들

에게 약탈당했을 정도로 민심이 반정 세력으로부터 떠나 있었다는 것은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집단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으며 간단히 이야기해 혁명

으로 권력을 잡은 공신들이 이전 정권의 문제점이라 지적했던 ‘폐정’을 바로 잡기는커녕 광해군

대에 자행되었던 비리를 반복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3) 부제학 ‘정온’은 인조에게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

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정규군에 배속시킬 것’을 간청했으나 인조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고 반정공신인 ‘김류’는 남한산성에서 청의 기습에 당한 것을 자신의 지휘부재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을 잘 따르지 않았던 부하들의 책임으로 돌렸으며, 왕실이 강화화도로

파천하자 강화도 방어 책임자로 자신의 아들(김경징)을 추천하지만 그는 도성을 출발할 때부터

철저히 멸공봉사(滅公奉私)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인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특히 그가 강화도

에서 보인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고 한다. .

---> 반정공신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약’을 받을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의

패악질이 강화도에서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며 반정공신의 아들의 비리가 이정도였다면

반정공신과 그 가속들에 의한 비리는 입에 담지 모 할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4)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백년 전쟁 당시 잉글랜드군에 저항한 책임을 물어 도시를 대표

하는 ‘칼레의 6인’과도 같은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같은 위정자들이 있었던 반면,

인조를 비롯한 높은 관료들은 자칫 자신들이나 자신의 자식이 전쟁의 결과로 청의 인질로 끌려

갈 것을 우려해 고위 관료직을 사직하거나 임명되지 않으려 높은 벼슬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 해당 부분의 부실함이 호란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 두 개가 아니나

나보다 더 똑똑한 분들이 많아 조용히 넘어가고자 한다.

하여간 나쁜 인간들이 너무도 많이 활개치는 세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넷째 권력쟁취와 리더의 안위 보전에 몰입되어 국가 운영에 대한 전략과

전술이 전혀 없었다.



1) 국내적으로는 광해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수립된 인조정권은 권력 쟁취 후 국가 운영에 대한

대안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직 광해 정권을 무너뜨리며 제시한 대의명분(폐모살제, 재조

지은, 청과의 관계,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한 백성 원망) 중 어느 하나 합리적인 운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보여 주었고, 국가적 변란 중 보여 준 지도층의 수준 낮은 행동

으로 인해 그들도 이전 정권과 다르지 않았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2) 국외적으로는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외교 전략에 대한 분석 능력도, 대처 능력도 부실을

초래한 결과, 심각히 전개된 대륙의 거대 세력 싸움에서 오판함으로써 나라와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는데,

대표적 사례가 광해에 의해 치루어진 ‘사르후 전투’(심하전투)‘ 사후 대처부실로 인해 집권층과

백성들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3) 병자호란을 통해 가장 안타까운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청나라에 인질로 나가있던

기간 동안 신문물을 접한 소현세자를 귀국 즉시 독살(?)시켰다는 점이다.

이로써 조선은 국가 발전은 고사하고 외부 세계와의 철저한 단절모드로 들어간 결과 당시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에 대한 난맥상으로 중국과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했다는 점이다.

- 당시 조선은 새로운 칸으로 ‘누르하치’ 8남 홍타이지(1592~1643)에 대해 주시하면서 적정을

탐지할 사신 등을 통해 후금의 내부 사정을 파악했지만 내부 권력 다툼이 심화되면서 대처

능력을 상실했고

- 임진왜란 이후 철저히 관리해 온 일본에 대해서 정보(조선 재침략, 청과의 연합을 통한 조선

침공)를 파악하면서 견제하려 했으나 가장 시급했던 누르하치 위협에 대처하려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판단해 일본의 몽니에 가까운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은 이를 적극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종합적인 판단

해당 독후감을 작성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나로서는 이 내용을 정리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내가 어떤 형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던 시간이 지나 작금의 이 글을 본다면 동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서쪽에서 난리를 칠 것이고, 서쪽으로 쓰면 동쪽에서 지랄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땅에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과도 같은 고난사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동이고 서이고간에 남이고 북이고 간에 합심할 것은 합심하고 가슴에 묻어둘 것은

묻어두면서 즉,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겠다는 자세로 화합하며 앞으로 전진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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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2025-03-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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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설 병자호란



조선의 임금중 가장 멍청한 임금을 꼽으라면 "인조"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인조반정을 이룬 세력들은 광해군을 일러 "혼군"이라 하였지만 인조는 "(혼군)의 제곱"은 더 되겠다.개인적인 자질을 비교해 보아도 왜란을 거치며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급변하는 대외정책을 총괄했던 광해군에 비해 훨씬 떨어지며 다만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세상물정에도 어둡고 꽉막힌 참으로 답답한 임금이었다.정권보위와 자리욕심은 과해 온갖 치욕을 당하면서도 임금자리는 놓치 않았으니 그것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할것이다.이책을 읽는내내 인조와 반정세력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광해군의 최대 잘못은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채 무리한 왕권강화(궁궐공사)와 인목대비폐위와 같은 무리수등을 두어 정권을 잃은 것이다.인조반정세력들처럼 "기찰"이라는 공작정치가 됐든 국경을 지키는 서북지역 병사들을 빼든 정권안보에 목숨을 걸었다면 반정세력에 당하지 않았을텐데..,

어찌됐든,반정세력은 그이후 조선 임금자리를 뒤이어 조선이 망할때까지 노론세력과 더불어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았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심도 두지않고 망해버리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과 시절이 지나도 한참지난 주자성리학만 붙들고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나가다가 결국은 일본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고 힘없는 백성들은 36년간 노예로 살았고 결국 남북분단으로 이어져 지금의 어이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당시에 지금과 같은 24시간 생방송뉴스가 있었다면 날마다 속보가 남발되었을것다.명나라와 청나라가 충돌하던 서북지역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것이다.지금은 참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감사히 여긴다.

강대국에 끼인 신세와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어느때보다도 어려운 처지다.당리당략에 매몰된채 파렴치한 매국사대외교를 기본으로 하는 토착왜구당같은것들이 집권한다면 멍청했던 인조반정세력들의 잘못을 되풀이 할것이다.모든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일반백성이 감당해야 할것이고...,

깨시민들의 각성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때이고 자주,평화세력의 집권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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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2019-12-2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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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호란을 알고 싶다면 우선 이 책을 보라!



[역사평설 병자호란]



-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시대사 연구자인 저자 (한명기 교수, 명지대학교)의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물이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문장으로 풀어쓴 역작이다.



시간의 순서와 인과관계를 고려해 작은 제목을 가진 글들을 연결하여 배치했으며, 이를 통해 호흡이 긴 글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을 덜어냈다. 더욱이 쉽게 접할수 없는 다양한 시각자료와 술술 읽히는 유려한 문체는 전문 연구자의 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읽는 맛'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저자는 책 제목에 '역사평설'이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이러한 시도도 또한 대중들이 혹여나 느낄 부담감을 덜어내려는 배려로 볼 수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1623년 인조반정 이후부터, 1637년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까지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 및 국내 정치 상황들을 자세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이 책의 최대 강점이자 특징은 '병자호란'이라는 테마를 두고 그 조망의 시야를 중국-일본에까지 확대시킨 점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한국-중국-일본의 풍부한 자료는 물론 주요 연구자들의 학설까지 본문에 담아내면서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지적 쾌감을 극대화 시켰다. 더욱이 글속에서 사건의 면면을 파헤치는 저자의 내공 수준도 상당해서, 역사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비롯해 연구자들도 충분히 흥미를 느끼며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깊이를 갖추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풀어내는 부분이 이책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의 처참했던 상황 너머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이해하면서 얻게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정치적 대립 구도라던지 사회상을 묘사한 부분은 백미로, 마치 중국사 책을 보고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더하여 일반적으로 관심을 두기 어려운 당대 조선과 일본 간의 관계까지도 세심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한번 '정독'해 볼 만한 가치가 듬뿍 담긴 책이라고 할 수있다.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 조선이 처해있었던 '엄혹한 상황'에 대해서도 이 책이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음은 물론이다.



한편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오래전 역사를 통해 오늘날 한반도가 배울점이 분명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최근 형성된 중국과 미국의 경쟁(?)구도를 언급하고 있다. 추후 국제정세의 향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나, 실제로 미국이 중국을 은근하게 의식하고 중국 또한 미국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즈음의 상황을 고려하면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충분히 염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본다. 현재 한반도가 처해있는 상황과 대비하여 읽어내려가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이렇듯 저자는 다양한 자료와, 연구성과들을 활용해 상당히 쉬우면서도 깊이있게 당대의 전반을 풀어내고있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 덕택에, 본문 곳곳에 일반 대중들이 읽으면 바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상당수의 인물 및 지명들이 등장해 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다른 '역사 용어'에 관한 설명[EX; 관직명 등]은 친절하게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부분[특히 북한 및 중국, 일본 지도]에 관한 배려가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조그마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상당수 인물들은 시각자료까지 곁들여져 설명이 잘 되어 있다^^)



게으른 독자인 필자의 애꿎은 투정에도 불구라고 이 책의 장점들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누누히 언급했듯이 내용은 충실하고 시야가 넓으며 문장은 유려하다. 역작이다.

정묘-병자호란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 책 하나만 정독'하면 될 정도로 중요하고 세밀한 내용들이 책 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나아가 당대 중국-일본의 상황을 아우르는 역사적 시야를 갖출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시각자료들은 덤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는 조선인들의 치열하고 처참했던 고민과 상황을 잘 묘사했다면, 이 책은 '남한산성의 처참함'이 있기까지의 조선과 동아시아를 설명해 내려간 책이다. 올겨울 이 책과 함께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보면 어떨까? 우리들 책장에 이 책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때이다.
- 접기
DY 2013-11-2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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