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4

병자호란 2 | 병자호란 2 | 한명기 | 알라딘

병자호란 2 | 병자호란 2 | 한명기 | 알라딘


병자호란 2 - 역사평설 |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은이)푸른역사2013-10-29








































미리보기




책소개
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매진해온 저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로 자리 매김한다.

「서울신문」에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목차


책을 내면서 _ ‘G2시대의 비망록’ , 병자호란

다시 일본을 다독거리다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이 발생하다|‘야나가와 이켄’과 조선의 고민

형제관계, 파탄이 시작되다
홍타이지, 칭기즈 칸가家의 옥새를 얻고 고무되다|만몽한滿蒙漢 신료들, 홍타이지에게 황제가 되라고 강권하다|이상한 조문 사절단이 입국하다|도주하던 용골대 일행, 인조의 유시문을 탈취하다|홍타이지는 제위에 오르고, 조선 사신은 배례拜禮를 거부하다

절체절명의 시간들
고조되는 명분론|미약한 군사력, 어정쩡한 결전 태세|청과의 관계에 못을 박다|격화되는 화전和戰 논의, 갈팡질팡하는 인조|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청, 병자호란을 일으키다
청군, 침략을 개시하다|철기의 질주, 최명길의 용기|남한산성인가? 강화도인가?

남한산성의 나날들
베테랑 외교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고립된 산성, 고개 드는 탈출론|재연되는 화전 논쟁, 통곡하는 인조|소소한 승리를 거두다

무너지는 근왕병, 스산한 연말연시
강원도 근왕병이 패하다|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하삼도 근왕병의 패전과 승전|평안도 근왕병의 때늦은 분전|얼러도 보고 때려도 보지만|스산하고 참담한 연말연시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
사신을 다시 보내 ‘조유’에 절하다|‘황제’로 인정하되 칭신은 거부하다|청, ‘명=천하’ 인식을 부정하다|청, 조선의 신복을 요구하다|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인조의 절박함과 홍타이지의 절박함

강화도가 무너지다
김경징의 ‘멸공봉사滅公奉私’|치밀한 청군, 안이한 조선군|금성탕지, 무너지다|이어지는 자결, 처참한 죽음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
청군의 양동작전에 무너지다|파국의 전야|해가 빛이 없다

처참한 후폭풍
삼학사의 최후|이어지는 굴욕, 이산의 슬픔|가도의 동강진이 무너지다|척화신들, 벼랑으로 내몰리다|인조, 백성들에게 사죄하다

친청파가 된 인조, 권력 유지에 부심하다
청, 인조와 신료들을 길들이려 시도하다|인조, 친청파로 변신하다|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

피로인들의 고통과 슬픔
상품인가? 인간인가?|피로인들의 끔찍한 고통|속환을 둘러싼 난맥상|‘속환녀’와 ‘귀환 여성’의 슬픔|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일본의 변신
일본, 공세를 취하다|높아지는 위기의식, 유화적인 대일 정책|일본, ‘원수’에서 ‘우방’으로 변신하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그 멀고도 험한 길
조선, ‘반청反淸’의 와중에 청에 길들여져가다|김종일과 소현세자|일본의 길, 조선의 길

책을 마치며 _ 병자호란, 인조 정권,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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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접기 - bookholic
(179)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접기 - bookholic
(181)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시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접기 - bookholic
(281)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했다. 하지만 ‘변신’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접기 - bookholic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본과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 문제에 만주로 매달려왔던 상황에 또 다른 난제가 추가된 것이다. 인조와 조정신료들은 서북과 동남, 양쪽에서 위협받고 있는 조선의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심해야만 했다. 이래저래 일본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더욱 더 유화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p.27) 접기 - mailbird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요구대로 볼모를 보내지 않는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던 조선, 그나마 그 계획조차 이미 청에 읽혀버린 조선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p.51) - mailbird
‘오랑캐를 타오르는 불길처럼 여겨 겁먹고 두려워하면서도’ 청과의 화친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조선은 이렇게 군신 상하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상태에서 전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p.79) - mailbird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이 없는 데다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1월8일, 예조는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p.148-9) - mailbird
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을 불쌍히 여겨 소방에게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p.161) - mailbird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방이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있었다. (p.214) - mail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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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한명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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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가톨릭대, 한신대, 국민대에서 강의했으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를 썼고, 그 밖에 여러 저술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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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通史

● 광범위한 사료 섭렵을 통해 확보한 학문적 엄밀성과 전문성
● 한국사는 물론 중국사, 일본사의 자료와 연구 성과까지 흡수하여 확보한 시야의 국제성
● ‘과거’이자 ‘역사’로서 병자호란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오늘’의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반면교사로서 승화시킨 문제의식
● 복잡하고 전문적인 역사적 사실을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재구성해낸 스토리텔링의 매력

병자호란, ‘과거’가 아닌 ‘현재’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
1675년(숙종 1) 봄, 만주 벌판을 달려온 한 사내가 압록강의 중강中江에 도착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단安端.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하던 도망자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안단은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가 된다. 그리고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자신의 주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한다.
1674년, 오매불망 고국으로의 귀환을 열망하던 안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주인이 북경을 비웠던 것이다. 1673년 오삼계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남이 혼란에 빠지자, 안단의 주인은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강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단은 탈출을 감행한다. 물경 38년 만의 시도였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을 통과하고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무사히 가로질렀다. 탈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안단의 사연을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봉황성으로 압송해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窮鳥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단의 기막힌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병자호란이 남긴 고통의 그림자가 길고도 길었음을 새삼 절감한다.

참담했던 병자호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被擄人들(병자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던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전쟁을 일으켰던 가해자 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청의 침략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도 별다른 대책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조선의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병자호란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낼 수 있을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매진해온 저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1.2》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로 자리 매김한다.
저자가 《서울신문》에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세세하게 살피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동시 출간된 병자호란 소설 그리고 강좌,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 높이다
저자는 지난 10월 3일부터 EBS 역사특강에서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라는 제목으로 병자호란 관련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부인 유하령은 돌아갈 ‘조국’이 없던 조선 포로들 ‘화냥년’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전쟁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지난했던 삶을 섬세하게 그린 《화냥년―역사소설 병자호란》을 썼다. 《역사평설 병자호란》과의 동시 출간이다.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시대의 비망록’이다.” 이 강좌와 소설이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성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병자호란의 현재적 의미, 병자호란을 ‘G2시대의 비망록’이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함의를 살피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조 정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파탄을 드러내다

병자호란이란?
주지하듯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조선 침략 전쟁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인해 이미 쇠락해진 조선은 청이 침략한 지 두 달여 만에 항복하고 만다.
1627년 정묘호란 뒤 후금後金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점차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거기에 조선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이 후금과의 실리적 외교를 제한했다. 문제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점차 세력을 키우던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을 갖는다. 그런데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 태종은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했다.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은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든다. 청군 철기鐵騎의 가공할 기동력과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항복했다.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행했다. 치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더욱 처참했다.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비싼 속환가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돌아온 후에도 ‘화냥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게 병자호란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조국’마저 앗아갔다.

인조, ‘정권 안보’에만 급급
조선은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였다. ‘끼어 있는’ 약소국이 자존을 유지하며 생존하려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병자호란과 인조 정권의 행적을 돌아보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먼저 ‘정권 안보’에만 급급했던 인조 정권의 난맥상을 지적한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 광해군 정권에게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지만 그들 또한 권력을 잡은 뒤에는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적산 탈취, 권력 남용, 인사의 난맥상 등이 잇따라 불거졌다. 그 귀결이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 진압 이후에는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보위하는 데 급급하다가 날이 새고 말았다. 새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실망은 컸다. ‘당신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냉소와 비아냥이 번져갔다.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이 같은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인조 정권은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가 청에 저항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입도入島조차 못했다. 무능력과 무책임의 산물이었다. 청군의 침략 사실조차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한번 패한 뒤에는 근왕을 포기하고 숨어버렸던 김자점,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들을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고 병사의 기본조차 모르면서 장졸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김류, 자신의 가족과 인척들을 강화도로 가는 배에 먼저 태우고 세자빈마저 김포 쪽에 방치했던 김경징 등의 행태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적과 싸우겠다는 호언과 의기는 높았으되 국정 전반은 ‘나사가 풀린 상태’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반정공신들 못지않게 인조의 책임이 컸다. 인조는 ‘명을 배신한 패륜 정권을 응징한다’는 명분과 공약을 내세워 집권했으되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일관성 없는 즉흥적 대책으로 안팎으로 곤경을 자초했다.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했던 것을 맹렬히 비난했으면서도 자신은 생부 원종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것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 실천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수사와 궁가들에게 부여했던 경제적 특권을 줄이거나 철폐하라는 요청에는 귀를 닫았다. 그리고 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백성들에게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사과’로 점철되어 있던 시대였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과거 정권을 뒤엎는 ‘파괴’에는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새로운 차원으로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다. 건설은커녕 ‘정권 안보’에만 급급하다가 ‘국가 안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 피해는 온통 백성들이 뒤집어썼다. 조선 역사의 비극이었다.

인조, 객관적 사실에는 눈을 감고 주관적 허상에만 매달리다
저자는 또한 인조 정권이 대외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주관적으로 규정하려 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명과 후금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후금에 대한 대책 또한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619년(광해군 11) 명의 강요에 떠밀려 조선군이 참전했던 사르후薩爾滸 전투를 대하는 인조 정권의 시각과 해석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원한을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원정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인조는 명의 거듭된 압박과 신료들의 집요한 채근에 밀려 1만 5천의 병력을 파병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명 장수 유정 휘하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619년 3월, 심하深河에서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려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왜 이런 참극이 빚어졌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명군의 난맥상 때문이었다. 당시 명군이 절대로 후금군을 이길 수 없었다. 병력, 무기, 작전, 기율, 지휘관의 역량, 인화人和 등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열세였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는 실책을 저질렀다. 네 부대를 지휘했던 두송, 마림, 이여백, 유정 등 장수들은 서로 전혀 화합하지 못했다. 특히 두송은 공을 독점하려는 욕심 때문에 일제히 출전하기로 약속했던 날짜를 어기고 먼저 출전했다가 사르후에서 후금군에게 전멸되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부대들 또한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군은 유정의 강압에 떠밀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조건 전진하다가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렸다. 참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인조 정권은 사르후 전투 참패의 원인을 오로지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광해군이 미리 투항을 지시하고 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명군이 참패했고 요동 전체가 넘어갔다’고 말이다. 이전 정권의 ‘허물’을 부각시켜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명 조정으로부터 승인을 얻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이 대목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조는 곧이어 명에 출병 기일을 알려주면 병력을 동원하여 후금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한다. 명과 후금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했던 섣부른 약속이었다. 당시 명은 후금을 공격할 의지나 여유가 없었다. 천계 황제의 무능, 환관 위충현의 전횡 아래서 명의 내부는 곪아터지기 직전이었다. 반면 후금의 정치, 군사적 역량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조가 후금을 치겠다고 섣불리 약속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타고난 존명尊明 의식에 권력을 잡은 직후 넘쳐났던 자신감에서 비롯된 언사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명과 후금의 역량과 정세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부정확한 정보에 주관적인 해석까지 더해지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매몰되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약속이나 공약을 남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문룡을 비롯한 명의 관리들에게 ‘후금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먼저 다짐했다가 역풍을 맞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아무리 밉더라도 사르후 전투와 관련된 사실은 ‘사실’대로 인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싸움의 주체인 명군의 문제점이나 후금군의 장점은 전혀 알려하지 않고, 원정 실패의 모든 책임이 광해군 정권에 있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렇게 ‘팩트Fact’에 눈감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지속하면서 문제점은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전략적인 ‘오늘’을 위한 거울

‘복배수적腹背受敵’의 한반도, 무엇을 해야 하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고 표현했다. ‘배[腹]와 등[背] 양쪽에서 적이 몰려오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정면의 중국 대륙과 배후의 일본 열도 사이에 ‘끼인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면이나 배후에서 기존 질서의 판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면 ‘끼인 자’ 한반도의 처지는 심각해진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패권국에게 도전하는 상황이 되면 ‘끼인 자’는 위기를 맞는다. 조선 역시 그랬다.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한족의 명이 떠오르던 14세기 후반에는 왜구의 발호가 극심해지고 홍건적이 고려로 밀어닥쳤다. 명이 쇠망의 조짐을 드러내고 일본이 굴기하던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명이 더 쇠약해지고 누르하치의 만주가 떠오르던 17세기 초반에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이 쇠퇴하고 일본이 다시 굴기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할퀴었다. 14세기 후반 이래 주변에서 힘의 전이가 벌어지면 한반도는 어김없이 전쟁터가 되었다.
현재라고 다를까? ‘복배수적’의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냉전시대 이래 세계의 패권국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쥐락펴락했던 미국이 쇠퇴하고, 지난 100여 년 동안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중국의 부상이 눈부시다. G2로 떠오른 중국의 자신감과 넘버 3으로 내려앉은 일본의 초조감에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 맞물리면서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예측불가의 상황을 맞고 있다.

역량 강화만이 살 길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끼인 자’인 약소국이 복수의 강대국 모두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강대국들끼리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이 되면 ‘끼인 자’는 결국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황제의 나라’ 명, ‘형의 나라’ 후금, ‘원수의 나라’ 일본과의 관계를 ‘모두’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다가 끝내는 파국으로 내몰렸던 전철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서 다시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략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활로를 찾으려 애쓰되 우리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일정 정도 이상의 독자적인 역량이 없을 경우, 외교적 노력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군사력을 비롯한 국가적 역량이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명과 청의 대결 속으로 속절없이 휘말렸던 병자호란의 전철을 돌아보면 ‘역량 확보’는 절박하다. 경제적 실력, 군사적 역량, 문화적 매력 등에서 주변 열강이 무시할 수 없는 ‘근사한 민주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 세대만이 아닌 후대 세대를 위해서라도.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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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7 부터의 -정리-부분은 단연 압권이었다. 읽으면서 몇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가양3동스나이퍼 2013-11-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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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조정 탓에 외침을 겪어 이역만리로 끌려간 수십만 조선인 포로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解明 2019-02-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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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전의 과거가 현실로 와 맞닿을 때
赤赤 2014-11-0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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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했던 조선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shuita 2022-02-1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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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리더의 최후는 늘 그랬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자, 그럼 병자호란 2권을 이야기해줄게. 2권에서도 해 줄 이야기가 많으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책 이야기를 해줄게. 1권은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을 거쳐, 인조가 겁도 없이 다시 후금과 절교한다는 내용까지 해주었잖아. 2권은 더욱 아픈 역사가 이어진단다.

패배의 역사. 그 패배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니 한번 살펴보자꾸나. 후금의 홍타이지는 몽골족마저 모두 차지하고 영역을 더욱 넓혀갔어. 사라졌던 칭기즈칸의 옥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도 홍타이지가 받았어. 그리고 명나라의 한족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귀순을 했단다. 그만큼 홍타이지는 포용정책을 썼어. 이제 동아시아의 대세는 후금이 되어가고 있었어.

후금의 만주족, 몽고족, 명나라의 한족을 ‘만몽한’이라고 불렀는데, 몽타이지는 만몽한의 신료들로부터 황제가 되라고 강권 받았단다. 처음에는 몇 번을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어. 나라이름도 우리가 청나라로 부르는 ‘대청’이라 하고, 연호는 숭덕이라고 했어. 이제 홍타이지는 거대한 나라의 황제가 된 거야. 이제 아빠도 후금이라고 하지 않고 청나라라고 이야기할게.

이제 청나라의 신료가 된 몽골족의 사신들이 조선에 왔는데, 조선은 몽골족의 사신을 야만족 다루듯 푸대접했단다. 이 일은 청나라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단다. 그뿐만이 아니야. 조선의 사신이 청나라에 갔다가 황제에게 배례를 하라는 명령에 끝까지 거절했다가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어. 나덕헌, 이확이라는 신하들인데, 그 기개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정세파악을 못한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홍타이지가 뒤늦게 알고 때리는 것을 말려서 멈추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생각하기에 홍타이지는 이미 조선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어. 지금은 그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나두는 것 같았지. 나덕헌과 이확은 배례를 안 했다고 얻어맞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그때 청나라의 국서를 들고 귀국을 했는데, 그 국서에는 청나라의 불만이 가득 남겨있었어. 그리고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도 써 있었지. 이걸 가지고 갔다가는 왕에게 혼날 것 같아서 오는 길에 버렸는데, 그것마저도 인조는 벌을 내려 그들은 귀향살이를 했다는구나.

최후통첩을 받은 인조. 여전이 청나라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방어할 생각도 안하고. 그저 강화도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단다.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일단 백성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거짓이라도 머리를 굽혀야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백성들 버리고 혼자 도망갈 생각만 하다니…

정온, 최명길 등이 화친 맺지 않고 싸울 거면 강화도가 아닌, 압록강에 군대를 총집결 해서 싸우자고 했어. 거기서 싸워야 져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청나라의 속내를 다시 확인하자고 했어. 하지만 인조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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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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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36년 11월 25일. 홍타이지는 결국 조선과 전쟁을 선언했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지. 만주족, 몽골족, 한족의 군사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향했어. 청나라는 철기를 중심으로 한 군대라서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조선은 산성에서 수비하는 방법을 선택했어. 그런데 청나라는 그런 산성을 굳이 공격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로를 통해서 서울로 향했단다. 산성을 지키던 조선군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청나라의 뒤꽁무니를 쫓는 격이었어.

인조도 청나라의 침입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한참 후에 들었어. 그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청나라 군대로 코앞까지 닥쳤을 때였지. 그 이야기는 강화도로 도망갈 타이밍을 놓쳤다는 거야.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어. 아, x됐다는 생각만이 머리가 가득 찼겠지. 강화도에서 수비하려고 그곳에 군비를 갖추었는데, 이제 어디로 가나….

결국 차선으로 결정한 것이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천험의 요새라서 방어하기는 좋지만, 중요한 것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야. 군량과 마초가 턱없이 부족했어. 조선은 청나라가 쳐들어오더라도 따뜻한 봄이 되면 오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강화도에만 전쟁 준비를 하고.,. 참, 한심하십니다.



남한산성에 오긴 했지만, 이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김류는 인조에게 몇몇만 몰래 강화도로 가자고 했어. 비겁한 인조는 그러자고 했어. 몰래 산성에 나와서 강화도로 향하다가 빙판길에 몇 번 넘어져서 부상만 입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단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후에도 어떻게 하면 강화도로 내뺄까 하는 생각만 했대.

….

청나라 군사들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공성전을 벌였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마냥 구원군만 기다리고 군량만 축내고 있었어. 그것도 얼마 없었어… 그리고 신하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여 논쟁만 벌였단다. 어떻게든 도망가자는 이들.. 끝까지 싸워보자는 이들… 지금이라도 화친하자는 이들… 결정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어. 몇몇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어. 그러다가 기다리던 지원군이 지방 곳곳에서 오지만, 그들도 제대로 된 체계가 없었고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각개로 왔다가 연이어 지고 말았어.



2.

결국 인조는 화친을 하기로 했어. 단, 조건을 걸었어. 남한산성에서 자신은 나가지 않겠다. 왕세자를 인질로 줄 수 없다… 하지만, 청나라는 지난날 조선의 잘못만 늘어놓으며, 화친을 위한 요구 조건을 점점 높여만 갔어. 청나라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의 기본은 조선의 왕이 산성에서 나와서 항복의례를 하라는 것이었어. 인조는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했지. 그런 와중에 강화도에서 소식이 날아왔어.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

당시 강화도에는 먼저 피신해 있던 왕의 가족과 신하들의 가족들이 있었어. 강화도의 군대는 김경징이라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청의 수군을 얕보고,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 그에 비해 청나라는 강화도 함락을 철저히 준비했어. 명에서 귀순한 공유덕, 경중명을 중심으로 수군을 갖추고 있었거든. 제대로 된 방어가 없던 강화도는 쉽게 함락이 되었단다. 강화도의 왕족과 신하들의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그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어.

강화도의 패배 소식은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좌절케 했어. 청나라는 다시 왕이 나와서 화친을 하라고 요구했어. 말이 화친이지 나와서 항복하라는 거지. 결국 조선은 청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고 전쟁의 패배를 인정했어. 인조가 직접 나와서 항복의례를 했단다. 그 유명한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했어. 그리고 나서 도성인 창경궁으로 돌아왔단다. 아, 얼마나 비참한 귀환이더냐…



3.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앞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써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대신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데려가겠다.

조선 군대는 원조를 해야 한다.

특히, 곧바로 전함 50대와 수군을 지원해라.

주기적으로 대신들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쳐라.

외교 의례는 명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해라.

많은 수의 포로를 데리고 가겠다.

그런데 그 포로들이 도망 오면 다시 청나라로 보내라.

등등… 청나라의 요구조건은 엄청 많았고, 그 요구조건들 하나하나가 조선의 가슴을 베는 것 같았어. 그리고 청나라는 화친을 방해했던 신하들을 청으로 보내라고 했고, 자진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게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고 말았단다. 청은 조선 수군을 동원해서 오랜 목엣가시와 같은 가도를 정벌했단다.



이제 인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청나라의 비위를 맞추며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어. 예물과 군량미를 꾸준히 바치면서… 그로 인해 조선 백성들은 굶어 죽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고… 소현세자. 일반적으로 인조와 소현세자는 사이가 좋이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데 그랬겠지.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갈 때, 청의 황세자 도르곤에게 잘 봐달라고 간절히 부탁도 했었어. 첫 번째 귀국할 때만 해도 소현세자를 극진히 대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청나라는 조선이 전쟁 패배에 대한 요구조건을 안 들어주자, 인조를 폐위하겠다고 경고를 하게 되었어. 여러 차례… 자신을 폐위시키면 누구를 왕에 세울 것인가?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왕위에 세울 것으로 인조는 생각했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되었어. 소현세자는 장인어른의 장례식 때문에 두 번째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인조는 냉대하였고, 세자빈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못 가게 하는 등 꼰대를 부리기 시 작했어. 나중에 소현세자가 완전이 귀국을 한 다음,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병에 걸렸고, 병에 걸린 지 삼일 만에 죽고 말았단다. 검시 결과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아무도 누구 짓인지 밝히려 하지 않았단다. 그저 불쌍한 죽음 하나 추가였지.

….

병자호란 이후 피로인은 커다란 사회문제였어. 피로인은 청군에 잡힌 민간인 포로를 이야기하는데 그 수가 약 50만이나 된대. 그들의 대우는 처참했고, 도망이라도 가면 다시 끌려가야 했어. 그리고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부잣집 피로인들은 돈을 주고 데리고 오기도 했대. 그것을 속환이라고 해.

허박이라는 하는 신하는 나라차원에서 속환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어. 속환하여 나라로 돌아온 이들에 대한 대우도 좋지는 않았어. 끌려간 것도 자신들 뜻이 아니었는데, 그들, 특히 여자인 경우는 속환녀라는 딱지를 붙이고 버림을 받았어. 한번뿐인 인생인데 그들은 시대를 잘못 만났고, 왕을 잘못 만난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일본도 조선이 청나라에게 패배한 소식을 전해 듣고, 온갖 간섭이 늘어나고 요구사항도 많아졌어. 힘없는 조선이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니. 동네북이 되어버렸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많은 신하들은 조금만 버티자는 생각을 했대. 몽골족의 사례를 생각하면서, 오랑캐 국가는 길어야 100년 밖에 못 간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청나라는 포용정책을 통해 오랫동안 지속했단다. 아빠가 오래 전에 청나라 전성기 역사를 다룬 <강희대제>, <옹정황제>, <건륭황제>라는 역사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 그 소설을 통해 청나라가 그저 야만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그들 나름대로 통치철학이 있었고, 유능한 지도자가 있다면 오래 번창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여기까지가 병자호란에 관한 이야기란다. 패배의 역사라고 읽는 내내 가슴 아팠단다. 무능한 왕의 표본을 볼 수 있었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단다. 그리고 주변 강국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 같구나.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오늘날의 우리나라… 균형 잡힌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인 듯 싶구나. 거기에 북한이라는 존재까지… 어쩌면 인조시대 때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북한, 중국을 다루시는 것을 보면 뛰어난 협상가이자 중재자라는 생각이 들어. 일 년 전 타임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표지모델로 삼으면서 뽑았던 Negotiator라는 제목이 얼마나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구나. 그의 이런 노력들이 가까운 미래에 좀더 좋은 열매로 맺어지질 바랄 뿐이란다. 오늘은 그럼 이만…











(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181)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시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281)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했다. 하지만 ‘변신’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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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8-04-07 공감(2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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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을 계기로 빚어진 조선과 명, 청 관계의 총체적 해명



용골대란 청나라 장군 타타라 잉굴다이를 말한다. 병자호란 한 해 전인 1635년 12월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달라진 후금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참월(僭越: 주제 넘음)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화급하게 도망치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인조가 보낸 유시문(諭示文)이 용골대 일행에게 입수되었다. 1636년 4월 11일 여명,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帝位: 황제 또는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식장에 사신 나덕헌, 이확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형제국이지 청에 신속(臣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인들,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청의 관원들에게 심하게 맞았다. 홍타이지는 두 사람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며 신하들을 다독였다. 조선에 먼저 절교할 수 있는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결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 신료들을 가리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만 일삼는 소인배들로 규정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후금을 원수로 규정한 이상 자신은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들을 죽이는 쩨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연암(燕巖)은 나덕헌, 이확의 행동을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나는 허세(虛勢)로 본다. 힘을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명분만 내세운 허세로 보일 뿐이다.



절하지 않을 거라면 즉위식에는 왜 갔을까? 절을 하도록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는가?(절을 하지 않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면 청은 조선 사신이 즉위식에 가지 않았어도 어떤 식으로든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맞고 홍타이지가 준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협박과 조선을 조롱하는 내용의) 국서(國書)는 왜 받았는가?



나덕헌, 이확은 홍타이지가 준 국서를 만주 통원보의 숙소에 몰래 던져놓고 내용을 등사(謄寫)하여 조정에 올렸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나덕헌, 이확의 목을 베어 홍타이지에게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나덕헌, 이확은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인조는 오랑캐와의 결별과 대결을 선언했지만 조선의 군사력은 미약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의 군사력은 국가 안보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정권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부제학 정온(鄭蘊)은 인조에게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정예병들을 원수(元帥)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안이한 자세로 일관했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오랑캐를 타오르는 불길처럼 여겨 겁먹고 두려워하면서도 청과의 화친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조선은 군신 상하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전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원수 김자점은 겨울에는 청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봉화 두 개(청군 침략시 올리도록 한)가 오른 것을 무시했다.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자점은 뒤늦게 장계(狀啓: 서면 보고)를 올렸다. 인조는 광해군 시절부터 유사시의 피난처로 점찍어 준비했던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강화도행을 촉구한 신하가 있었지만 인조는 청군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인조는 결국 상당한 양의 군량과 화약이 비축되어 있었던 강화도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맥이 빠졌던 청은 이번에는 아예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나섰다. 인조에게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가 담판을 벌일 테니 그 틈을 타 남한삼성으로 들어가라고 건의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당도한 것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김류(金瑬)가 강화도로 가자고 고집했다. 그러나 김류는 청군이 1633년 공유덕 등의 귀순을 통해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인조는 김류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길이 얼어 붙은 탓에 돌아와야 했다. 강화도 대신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병자호란은 1만여 조선군과 그 열 배에 이르는 청군의 싸움이었다. 남한산성 농성(籠城: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 초기 조정에는 청군은 화약만 맺으면 곧 철수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퍼지고 있었다.



청군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木柵)을 설치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 차단해 성안 사람들을 고사(枯死)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청이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렀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는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청군은 예상과 달리 대오도 정제되어 있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았다.



인조는 화친(和親), 주전(主戰) 등으로 엇갈린 신하들의 주장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선군은 청이 산성으로 접근하고 있음에도 화의 시도를 망칠까봐 발포하지도 못했다. 전전긍긍이었고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물자들은 동이 나기 직전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면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할 판이었다.



당시 추위는 혹독했다. 갑자기 소집되어 들어온 병사들이 방한 장구를 갖추었을 리 없었다. 공석(空石: 빈 가마니) 하나를 방한복 삼아 어깨에 두른 채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 싸우던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일이 속출했다.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결전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상헌은 물론 최명길도 비숫한 주장을 했다.



당시 청군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져가는 데 결사적이었다. 동료의 시신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불문율이었다. 청의 주력군이 도착함으로서 그나마 있었던 작은 전과들이 무위가 될 상황이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근왕병(勤王兵)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사이 어느덧 병자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조선은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도 명나라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거르지 않았다.



“충성스런 조선이었다.”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稱)한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뛴 것도 명나라 때문이었다. 대다수 신료들은 명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려다가 조선이 이렇게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의 일편단심을 명나라는 과연 알고나 있을까?” 산성 안의 마초(馬草)가 고갈되자 조선군 장졸들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청군은 남한산성과 외부와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근왕병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개 격파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사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청군 선봉대가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로 주변 산성에 머물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와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오는 청군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았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처럼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140 페이지)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小邦)이 곧 망할 뻔하였을 때 명의 신종황제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란 국서를 보냈다. 광해군 시절인 1619년 명의 강요로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을 때에도 조선은 참전 명분으로 재조지은을 내세웠었다.



당시 후금의 누르하치는 그 명분을 인정해주는 자세를 보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하는 크고 나라는 많다. 너희를 구해준 것은 오직 명나라 하나뿐인데 너희는 어찌해서 천하를 운운하는가? 명나라와 너희의 허탄(虛誕)하고 망령됨이 끝이 없구나.“ 청은 이미 명나라를 주조(朱朝) 즉 주원장이 세운 나라로 폄하하고 있었으니 조선의 명 = 천하 인식이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보낸 국서에 대해 작심한 듯 반박과 비아냥, 협박하는 내용의 언사들을 쏟아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636년 3월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서 도주한 직후 평안감사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을 문제삼았다. 장차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으려 하니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는 내용은 정묘호란 당시 맺은 맹약을 조선이 먼저 어겼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란 주장에 대해서는 전쟁을 모르는 나라가 왜 과거에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느냐고 힐문했다. 조선이 자신들을 가리켜 노적(奴賊)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는 도둑이란 몸을 숨겨 몰래 훔치는 자를 가리키는데 우리가 과연 도둑이라면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체포하지 않고 내버려두느냐고 따졌다. 조선은 이 반박 논리들을 다시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자신의 판도 안으로 들어오면 적자(赤子: 갓난 아이, 비유적으로 임금에 대해 백성)와 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항복 요구였다.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란 글을 보냈다.



교섭을 잘하면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조선은 난감했다. 조선은 인조가 성에서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홍타이지가 조선이 이미 칭신(稱臣)했음에도 인조의 출성(出城)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홍타이지를 분노하게 한 것은 대국 명조차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나덕헌, 이확 등이 끝까지 배레하지 않은 것을 통해 보듯 소국 조선이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덕헌, 이확의 불배(不拜)를 허세라고 말했거니와 그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악수가 되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 등의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藩國)인 조선조차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켰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홍타이지에게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인조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존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출성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는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그런데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인조는 청군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 며느리 강빈(姜嬪)과 봉림대군 등 왕실 피붙이들, 조정 대신들 중 늙고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도록 조처했다.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아버지의 추천을 받고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멸공봉사(滅公奉私), 선사후공(先私後公)했다.



김경징 집안의 가술과 50개나 되는 재물 궤짝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도의 마부들이 거의 모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금성탕지(金城湯池; 철옹성)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내팽개쳤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였다. 봉림대군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홍타이지는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묘수를 찾느라 고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화도 함락이었다.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 본 것이다. 청군은 육로로 동거(童車)라는 작은 수레를 이용해 병선을 운반했다. 에상하지 못한 작전이었다. 청군 가운데 만주병들은 어느 정도 군율이 잡혀 있어서 탐욕과 음란함이 덜했지만 몽골병이나 한병(漢兵)들은 달랐다. 특히 공유덕과 경중명 휘하의 병사들이 저지르는 겁략(劫掠)이 심각했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월 23일 청군은 양동작전을 폈다. 조선이 척화신(斥和臣)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강화도에서 급히 데려온 종실 진원군과 내관 나업을 보여주었다. 강화도 함락을 알린 것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듣고 인조는 출성을 결정했다. 출성을 면하게 해달라던 인조는 대신 안전 귀순을 간청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 연호를 반납할 것,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칠 때 조선도 군사를 보내고 무기 협조를 할 것,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성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용골대 등은 조선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제 1등 절목 즉 함벽여츤(銜璧輿櫬)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함벽여츤이란 손이 뒤로 묶인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메고 나아가 항복하는 의식이다. 용골대는 삼전도에 이미 수항단(受降檀)을 만들어놓았다는 사실과 1월 30일을 항복 의식을 행하는 날로 정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그리고 인조가 용포를 입어서는 안 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는 나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례를 행했다. 강화도에서 끌어온 강빈과 왕실 신료들도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신료들이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면서까지 배에 먼저 타려고 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포로들은 인조에게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며 절규했다. 인조 생애에서 가장 길고 처참했던 하루가 갔다.



척화신이 여럿이었지만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가 끌려가 처형당한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홍타이지의 참월을 비난하고 주화신들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홍익한을 회유(懷柔)하려고 했다. 인조는 홍타이지를 배웅할 때도 삼배구고두의 례를 행했다. 인조는 소현세자 일행이 떠나는 날 창릉(昌陵) 근처까지 거둥하여 배웅했다.



심양으로 들어간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청인들은 소현세자를 지렛대로 삼아 인조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려 했다. 여차하면 인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대신 즉위시키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 와중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경쟁자가 되고 정적이 되었다. 1622년 모문룡이 처음 들어가 동강진을 설치한 이후 가도는 청의 서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청은 수군이 없고 해전에 익숙하지 못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이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뒤 청은 조선 수군을 징발해 가도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조청 연합 수군은 가도 동강진을 정복했다. 1637년의 일이었다.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결사항전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문신들 특히 척화신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척화신들은 항복이 시간 문제인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들은 명분과 관념으로 전쟁을 하자고 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보며 조선 왕실의 의료 시스템을 생각하게 된다. 조선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내의원 등의 어의들만이 아니었다. 대신들도 내의원 제조, 약방 도제조 등의 직함을 가지고 일종의 자문으로서 왕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에 참여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어의를 비롯한 의관들이 맡았지만 진료와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유학자(儒學者) 출신의 삼제조가 맡는 구조였다.



삼제조는 정1품 이상의 정승이 맡는 도제조, 정2품 이상이 맡는 제조, 정3품 이상이 맡는 부제조를 이르는 말로 삼제조가 감시하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의관들은 자신 있게 진찰하지 못했고 이것이 조선 왕들의 진료와 치료를 실패로 이끈 가장 큰 문제이자 원인이었다.(이상곤 지음 ‘왕의 한의학’ 참고)



인조는 척화파들이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용골대 참수를 운운하며 오버한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 궁극에는 자신과 백성들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인조는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말끔한 전후 처리를 하지 않았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인조는 청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온 피로인<被擄人: 주회인: 走回人>들을 색출해 청으로 다시 보내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최명길은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회생하고 비(否)가 극에 달하면 태(泰)가 오는 법이라며 인조를 위로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입조(入朝: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 청 황제를 알현시키는 것)시키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조청(朝淸) 관계가 격동하면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흔들렸다. 1643년 소현세자의 귀국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우호 차원에서라면 봉림대군까지 모두 보내야 하는데 소현세자만 보내려는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소현을 즉위시키려 한다고 믿었다. 소현과 강빈은 청 조정의 고위 인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등 심양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소현은 동아시아 판도가 바뀌는 현장을 직접 목도했다. 1644년 명을 대신해 중원의 주인이 된 청은 소현세자를 영구 귀국시키기로 했다. 명이 망한 이상 인질까지 잡아두며 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이후 친청파로 변신한 인조는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저자는 인조실록을 비롯 당시 기록 어디에도 환향녀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기에 속환을 통해 돌아온 여성은 속환녀, 불분명한 방식으로 돌아온 여성은 귀환여성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말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일 위기감은 커졌다. 청군의 침략으로 한양과 경기도 이북 지역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일본까지 움직일 경우 조선의 안보가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의 압박과 요구에 순응하는 행보를 계속했다. 유백종은 인조의 친청 행위를 보며 그렇다면 반정은 왜 했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몽골족의 원(元)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지배한 시기는 1279년부터 1368년까지의 90년에 지나지 않았다. 1673년 명에서 청으로 투항했던 한인 출신 번벌(藩閥)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청은 더욱 강해졌다. 이에 조선의 청에 대한 저항은 관념적인 차원으로 흘러갔다. 조선은 명이 망한 지 60년이 지난 1704년(숙종 30년)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었다.



황단이라고 불렸던 이 제단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의 만력제(신종)를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한 장소였다. 당시 청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묵인했다. 그 과정 자체를 조선이 청에 길들여지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대다수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이자 원수로 여겼으나 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또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조반정에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정권 안보에만 급급해 온갖 난맥상을 연출했다. 인조반정을 통해 영달했던 사람들 가운데 최명길,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인조는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했던 것을 맹 비난했지만 자신은 생부 원종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인조는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했으나 구체적 정책 실현에는 무관심했다.



인조 재위 기간은 사과(謝過)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기간 자주 울음을 보인 군주였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지시를 어긴 지휘관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인조는 사정(私情)에 눈이 어두워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했다.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던 심기원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들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인조는 1619년 광해군 재세시 명의 압력에 못이겨 강홍립이 1만 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한 사르후 전투의 패배를 오직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팩트에 눈감고 주관적으로 해석한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 등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했음에도 변화를 꾀하지도 않은 채 유사시 강화도로 피난하려는 계획에만 집착했다.



‘맹자’에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말이 있다. 절박한 처지의 환자 입장에서는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나가서 쑥을 뜯어야 그것이 한 달 묵은 쑥, 1년 묵은 쑥, 그리고 3년 묵은 쑥이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 세대는 그것을 먹지 못하고 죽더라도 후손들을 위해 쑥을 뜯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최근 국회방송을 통해 인간 책방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된 것을 보았다. ‘남한산성 1, 2’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의 ‘최명길 평전‘이 소개되었다. 환향녀라는 말을 초청 인사가 쓰는 것이 들렸다. 중요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인지 그것을 시정해주지 않아 아쉬웠다. 과문(寡聞) 탓이겠지만 유연한 주화(主和) 정책으로 조선을 곤경에서 구해낸 최명길이 인조반정 가담자였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가졌었는데 인조반정을 통해 영달했던 사람들 가운데 최명길,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적지 않았다는 글을 통해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인조반정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는 지적에 일방 비난을 가했던 나를 반성했다. 남한산성 농성 중 추위에 비까지 계속 내려 말할 수 없이 스산하고 참담했던 상황에서 인조가 기청제를 드리며 엎드려 울부짖었다는 대목에서는 울컥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인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고통과 수난에 내몰린 군병들과 백성들을 생각하며 가지게 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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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20-03-04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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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실이다



역사는 현실이다

우리가 중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굳이 중국이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들먹이지 않고도 우리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면 금방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일이다. 아시아의 변방에 위치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문제와 역사 속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의 지위가 강화 될수록 한국이 처한 현실은 녹녹치 않음을 알기에 중국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이 중국과의 직면한 문제를 대하는 정치적 실태를 볼 때 한국의 미래가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병자호란을 주목하는 저자의 시각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이 겪었던 경험을 되살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것이다. 이는 비극으로 끝난 병자호란의 실상을 제대로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을 막기 위한 조선군의 저항은 미비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굴욕적인 모습으로 왕조의 나라에서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차치해두고서라도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다쳤으며 포로로 끌려갔다. 전쟁이후 경제는 피폐했으며 왕권은 추락했으며 신료들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실상이다.





“전쟁을 일으켰던 가해자 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청의 침략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도 별다른 대책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조선의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병자호란 2’ 의 중심은 청의 2차 조선 침입이었던 병자호란에 있다.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전후 사정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청의 원인제공도 중요한 점으로 지적하지만 그보다 먼저 조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광해군의 대청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인조반정이 이후 국제정세를 올바로 읽지 못한 것부터 명에 대한 의리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현실을 분간하지 못한 점, 국방이나 백성의 삶보다는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한 점 등 부지기수로 많은 문제점들을 올바로 바라볼 때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이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켜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G2의 사이에 끼어 두 강대국과의 교류에서 갈등하는 현실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모양은 달리하더라도 주화론자나 척화론자는 존재할 수 있다. 시각을 달리하지만 이 두 세력은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근거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지와 각기 주장하는 바가 어디로 귀결되어지는지를 살펴 어떤 것이 타당한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처한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사하는 세력들의 주장이 지난 병자호란의 주화론자나 척화론자의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세삼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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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無盡 2014-01-1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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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군주를 둔 조선의 비극



1권은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까지, 2권은 병자호란부터 효종 즉위까지다.

좀 늘어지는 느낌이 들긴 하나 소설 읽듯 재밌게 완독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지도자의 자질과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고, 명청 교체기라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 약소국으로써 인조 같은 이를 섬기고 있었던 조선도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인조가 아니라 좀더 능력있는 사람이 군주였다면 끔찍한 전란은 피할 수 있었을까?

정묘호란 때는 형제의 맹약 정도로 마무리가 됐지만 병자호란은 청의 기세가 강해져 신속하지 않는 이상 전쟁은 불가피했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아들 김경징의 어처구니 없는 강화도 방어 태만의 결과로 왕족들이 볼모로 잡히기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아버지 김류가 권력을 유지한 걸 보면 반정공신의 위세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1권에서는 모문룡의 뻔뻔하고 몰염치한 태도에 화가 났는데 2권에서는 정말 인조라는 군주의 무능력에 한숨이 나온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선조나 인조가 아니라 조선 초의 태종이나 세종이 군주였다면 결과가 훨씬 좋았을까?

혹은 고종이 아닌 좀더 책임감 있고 능력있는 군주였다면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숭명사상은 너무나 집요하고 철저해 놀라울 따름이다.

사대주의라는 것이 오늘날 생각하는 단순한 외교정책 따위가 아니고 마치 이슬람이나 기독교 같은 종교적 가치였다는 것을 느꼈다.

민족도 다른 나라에 그토록 철저하게 마음속으로부터 부모의 나라로 신속할 수가 있는지 성리학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식민지 개념과는 질적으로 매우 다른, 굉장한 정신적 가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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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6-10-11 공감(1)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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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2 / 한명기



"1635년 8월, 홍타이지가 보내온 국서의 내용은 이전의 그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인조에게 '권세가 강한 신료들을 조심하라'며 훈수까지 했다. 그러면서 '형의 나라'로서 '아우의 나라' 조선을 걱정하여 충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2월에도 홍타이지는 마부대를 통해 국서를 보내왔다. 국서에 담긴 내용의 핵심은 대략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이 후금을 대하는 정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힐책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명에 이미 망조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후금이 명과 싸워 계속 이기는 것은 명의 국운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 떨떠름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1635년 후반 무렵 홍타이지는 몹시 고무되어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가 차하르 몽골을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몽골족들을 휘하에 복속시켰던 것에서 비롯되었다."(29-30)




"1636년 3월 1일, 인조는 팔도의 백성들에게 유시문을 내렸다. '정묘호란 때는 부득이하여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하지만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대의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까지도 걸 수 있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3월 7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빚어졌다. '참월僭越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과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골대는 전령을 붙잡아 그가 소지했던 인조의 유시문을 압수했다. 후금으로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조선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45-6)




"6월 17일 (인조는)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격문 형식이었다.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지게 된 것은 조선 탓이 아니라 청나라 탓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귀국은 군사강국이지만 우리는 궁벽진 곳에 위치한 농업국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시작되는 국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먼저 조선이 명을 섬겨 배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묘 당시 합의된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이 한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문제 삼는 청의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뒤이어 변방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청 영내로 몰래 들어가 산삼을 캔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차하르 몽골의 버일러들은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들이니 청 사신과 똑같이 예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명나라의 동번東藩'으로서 강약强弱과 성패成敗 때문에 신하의 절개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62-3)




"조선은 청군의 철기와 야전에 정면으로 맞설 경우,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대신 청군이 돌격해오는 대로에 위치한 진을 버리고 군민들을 주변의 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화포와 조총 등으로 저항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말하자면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구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청군은 조선의 의표를 찔렀다. 그들은 조선군이 수비하고 있는 산성들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들지 않았다. 곧바로 서울로 돌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시도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85-6)




# 1636년 12월 9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도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12월 16일 청군 진영을 다녀온) 윤휘는 다른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화이론의 입장에서 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청군은) 대오도 정제되어 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당시 조선 신료들은 청군의 전력이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했다."(105-7)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조선 편이 아니었다. 포위가 길어지면서 남한산성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고단해졌다. 성을 에워싼 청군의 압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러 가지 물자들이 고갈되고 있던 점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갈팡질팡할 경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113-4)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가 기습작전을 벌이는 등 소소한 전투를 계속 치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12월 19일 오후,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 4천 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성안의 조선 조정은 이 같은 바깥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118-9)




"김자점은 토산에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약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모두 합치면 1만 7천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보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미약한 점이었다." "김자점, 심기원, 조정호 등 남한산성을 구원해야 할 조선의 최고위 지휘관들은 병자호란이 끝나는 날까지 그저 '헤매는 들판'(미원)에 머물면서 상황을 관망했을 따름이었다."(128-30)




"청과의 화친 교섭은 점차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를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 '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171-2)




"1월 20일, (하루종일 큰 눈이 내린) 남한산성 주변의 날씨는 음산했다. 칭신을 다짐하는 국서를 들고 청군 진영에 갔던 사신들은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내용의 답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야만 항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나오기 전에 청과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척화신 두세명을 먼저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목을 베어 '대국에 반항한 죄'를 다스리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다."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178-80)




"인조가 출성을 끝까지 회피하려 했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 하나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신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은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181)




1월 22일, 강화도 함락 소식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한 청군은) 공주의 공산성을 비롯하여 목천,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방이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있었다."(214)




1월 27일 최명길 등이 '굴복 선언'을 담은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국서는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월 28일 용골대가 가지고 온 홍타이지의 조유문은 '그대는 짐이 식언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216-8)




# 청에 끌려간 척화신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오달제, 윤집




이윽고 1월 30일이 밝았다. "홍타이지는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을 울리며 삼전도를 향해 한강을 건넜다. 삼전도에는 아홉 단으로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조가 50여 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산성 밖 5리쯤까지 왔을 때 용골대 등이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拜天 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 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222-3)




"책봉을 통해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인조에 대한 청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청은 인조를 길들이려고 시도했다. 청은 먼저 자신들이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강조했다. 항복을 받아준 것 자체가 '이미 죽은 임금[旣亡之君]'인 인조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이라고 자찬했다. 그러면서 '재조지은'을 계속 환기시켰다. 1637년 7월, '조선이 가도에서 패한 명 장수들을 받아들이고 명과 통교한다'는 풍문이 돌자 용골대 등은 '기망지군'을 다시 세워주었음에도 '명과 교통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어겼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청은 또한 입조론入朝論을 중요한 '카드'로 활용했다. 입조란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들여 청 황제를 직접 알현토록 하는 것이다. 청은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때마다 입조론을 흘리며 인조를 압박했다." "1639년 6월 입국한 마부대는 (도망쳐온 피로인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서) '인조가 심양에 가서 직접 황제를 뵙고 사죄해야 한다'고 압박했다."(258-9)




"인조는 청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1639년 김응조 등이 "대의大義를 밝히라"며 상소하자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또 월왕 구천이 자강을 위해 20년이나 오吳를 섬겼던 고사를 들이대며 "나라가 망할 처지에 있는데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상소문에다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 신료들은 파직시켰다. 1640년(인조 18) 1월, 청이 원손元孫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라일이 형편없는 지경이니 청인들의 요구에 순응하여 의심과 노여움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인조는 친청적인 행보를 보이며 주화파 신료들을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단연 최명길이었다. 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과 주화론을 견지했던 데다, 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268)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입관식에 참여했던 종실의 증언 내용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친청파로 '변신'한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2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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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4-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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