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
===
[음악] 안녕하십니까 어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시간입니다 어 오늘은 그 일본은 왜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
지난 시간 지지난 시간 조선이 근대 근세를 앞둔 근대화를 앞둔 어 조선이
어떤 상황이었다는 거를 우리가 그 배웠는데요 어 이번에는 그러면 같은
때에 바로 옆나라인 일본은 그럼 도대체 어떡하고 있었고 왜 일본은
성공적으로 근대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는가 어 그거를 어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음악]
하겠습니다네 그러면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특히 어 중국에 비해서도
어 훨씬 빨리 급격하게 근대에 성공을 했고 또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그랬습니다 어 그 성공의 비결을 어 이유를 원인을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사실은 어 일본이 근대 국가 건설 그러니까 봉건
전근대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 있어서 어 사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성공한 경우입니다 그 우리 이웃이고 우리와의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문 뭐 관계가 있어서 그런
맥락에서 일본을 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객관적인 눈으로 어 일본이란 나라를 어 예를 들어서 서양의
역사학자들의 시각에서 일본의 역사를 근대사를 보면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 그렇게 전근대 국가가 자신들의 힘으로 자력으로 근대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적은 없습니다 1번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자 그러면 왜 그렇게
됐을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요 우리가 지난 시간 19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경제 국제 관계가 어땠고 왜 쇄국을 했고 이제 이런 거를 쭉 봤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 그때 당시 조선이 어
겪었던 조선이 처했던 상황하고 같은 시기에 같은 시기에 일본은 그럼
어떻게 달랐을까 그래서 일단 어 일본의 근대화 성공 요인을 보려
그러면 근대화 이전의 1번의 모습을 우리가 간략하게 마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어 일본의 주자학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의 주자학은
조선의 주자학은 뭐 훨씬 일찍 그 들어왔죠 우리는 뭐 사실 조선 계곡
자체가 주자 성리학을 들여오기 위해서 그래서 이제 불교 국가를 유교 국가로
바꿨다 이런 말씀을 쭉 드렸으니까 사실 14세기부터 조선은 이제 국가 주자 성리학의 국가로 그 개조를 해
나가는 어 역사였고 일본은 훨씬 늦게 들어옵니다 일본에 주자학이 들어오는
건 사실은 임진 회란 이후에나 들어옵니다 임진 회란 이후에나 주자학이 일본에 도래하는 거고 그중에
이제 대표적인 학자 학자가 야마자키 안사이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이 사람은
이제 1618년 태안에서 1982년에 어 죽었는데 무슨
말씀이냐 임진란 훨씬 어 후죠 근데이 사람을 일본에 거의 최초의 주자
학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야마기 한사이 여러 저술이 있고 그렇지만 참 재밌는 인용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면 어 일본 사람들이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그
태도와 시각과 조선 사람들이 주자학을 받아들이 그
시각 굉장히 다릅니다 특히 제가 이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사가 위정 사파가 주자학을 받아들 드는 모습과 어이 일본의 주자학들이
받아들이 모습 너무나 다릅니다 자 그래서 야마사키 안 사이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뭐냐면 어느날
야마사키 안사이 제자들고 이제 수업을 하던 중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이렇게
합니다 지금 저 나라가 그니까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삼고 맹자를 부장으로
삼아서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라를 한다면 공맹의 도를 배우는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합니다 공자 맹자가 중국 사람들이니까이 사람들이 어느날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를 들어오면은 지금 공자 맹자의 도를 배우고 있는
유교 주자학을 배우고 있는 우리는 그럼 어떻게 상대를 할 것인가 이제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저는 질문자체가 참 기발하다고 생합니다
조선의 주자 학자들이 저렇게 저런 질문할 수 있었는가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글쎄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이제 답이 더 기가 막힙니다
이에 대답이 없죠 이제 제자들이 할 말을 할 말를 잃었습니다 뭐 하도
어려운 질문이니 그랬더니 이에 대답이 없자 다시 제자들에게 불행하게도 만약
이러한 재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들은 몸에 견고한 갑옷을 걸치고 손에 예한
병기를 잡고 그들과 일전을 수행하여 공명을 잡아 국군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도다 공자 맹자가 가르키는
것이 외국에서 이적이 쳐들어온다 그러면
쳐서 없애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국군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가르치는데 그게 설령 공자 맹자라는 그러니까
저는 이걸 보면요 그 사상과 이념은 받아들이되
자기 식으로 자기 입장에서 정확하게 객관화를 시켜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마 어 조선의 주자 학자들은 감이
공명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국군에 보답할 거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만
보더라도 1번이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조선이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것 너무나 달랐었다 그러니까 근데 이전의
모습도 굉장히 달랐다는 거를 알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다음에 본의에도 시대에 독구 가와 시대 그러니까 임진 혜란이 끝나고 어
도쿠가와가 그 들 그 정권을 잡은 한 200년간에 이제 평화가 있죠
그러면서 어 19세기 말까지서 서양이 도래할 때까지 이제 독구 가와 시대라
그러는데 그 시대에 주자 학도 들려오지만 또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고구 각고 국학이 나옵니다이 국학이게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뭐 국학 연구원
국학 연구서 이런 이런데 쓰는 바로 그 국학이 일본의에도 시대에 나왔던
그 국학 있니다 근데이이 학이라는 것은 주자학과 굉장히 다른 일본
고유의 고유성을 찾는 그러한 그
학문이었고 할 수 있는 모토오리 노리 나가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는데요이
사람이이 사람이 중국 학문에 대해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니까 자기네의 국학을 만들면서 중국 학에 대해서는
뭐라고 얘기했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중국 책도 여가에 충분히 읽을
만하다 중국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단점도 알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일본의 고서가 전부 한문으로
쓰여 있으므로 중국 문자를 몰라서는 학문도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만사에 그릇되어
있음을 잘 이해하고 또한 일본 혼만 뚜렷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밤낮으로
중국 책을 읽는다 해도 마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조선의 주자들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우선 전제가 중국 책도 여가는 충분히 읽을만하다
뭐냐면 중국 책은 그 내용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로서 간 남을 때 재미로서 읽을
만하다 왜냐면 중국 책을 읽지 않으면은
그날의 단점을 알 수 없답니다 중책을 읽어야 되이가 날의 단점을 알기
위해서 읽는다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일본에서도 한문을
씁니다 다 모든 책이 한자로 돼 있기 때문에 그 한자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중국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거고
공부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걸 안 읽으면 일본 책도 모르니까 우리 책도 못 읽으니까 우리의 학문이 국학이
진전이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는 어쩔 수 없이 읽지만 읽을 때 뭡니까 이게
다 틀린 내용이고 그리고 일본 혼만 뚜렷하면 아무리 책 중국 책을 많이
읽는다 해도 마음이 동요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객관을 시켜봅니다 하나의
도구로서 중국이 왜 잘못됐고 그리고 자기네 학문을 하기 위한 한문을
익히기 위한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그 내용상으로는 중국
책들이 그렇죠 유교 경전들이 아무 내용이 없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일본 국학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일본은 중국을 다르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다음은요 이제 19세기에 들어오면 사쿠마 쇼잔이라는 어 학자가
있습니다이 사람은 어 요즘 말로 얘기하면 이제 안보 전문가입니다 사실
근대적인 의미의 외교 최초의 일본 최초의 외교 안보 전문가입니다 그러면서이 사람은 어 서양이 자꾸
오는데 어떻게 해양 방어 그러니까 바다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이런 거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어 그리고 서양 거를 이제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어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에 자기의 죽음 자기의 나묘 테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그때 이제 서양의 문물들이 들어올 때 그거에 반대하는
어 조선의 위정 척사파 같은 일본의 손로이 파 뭐 예를 들어서 아주
지독한 보수파들이 있습니다이 파들이 서양 문물을 일철 반대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나라에 남아 있는 자원조사 못하고 변에 달하여 시대가
변할 때에 달하여 병제 고칠 줄 모르며 그니까 군사제도를 고칠 줄
모르며 포슬이 있다고는 해도 옛날에 고루한 습속에 빠져 새로이 얻는
묘수를 강구하지 않으며 그니까 일본이 뭐 임진한 때도 대포 다 쓸 줄 알고 그랬었죠 그렇지만 다
옛날거다 불편한 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만 알뿐 개정할 방도를 모
자기 라만의 좋은 것에만 집착하여 외국이라면 무조건 경하고 그들의
실사에 하여 국가의 이익도 일으키며 병력도 번성하고 포도 뛰어나고 항에
능숙한 것 등 훨씬 자국보다 우에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영국과의 사이에 난이 일어 일어나면 대패할 것이다라고 기합니다 그 자꾸 무서
오니까 를 시켜야 되겠다 싸우자 아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형인지 모르고 무조건 싸 싸워봤자 나라의 구력만 가져다 올
뿐이다라고 사쿠마 쇼전 이데 생물 연대가 1811년에 1864년
이면요부 을 어 오류를 보면서 가리킬 방법이 없으니까 격퇴해야 된다고 하는
의정 사파와 같은 시대에 살든 일본의 안보 지식인은 저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서양 것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일본의 계국 구체적으로 계곡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는 소위 그
페리 제독의 페리 함대가 1853 53년에 어 교만에 이제
애도 만에 나타납니다 페리 제독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이끌고 오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역사적으로 상기해야 될게 참 재밌는 부분이 뭐냐면요
어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 뭐 인도에서 시작해서 뭐 태국이 됐든 무슨 월남이
됐든 인도네시아가 됐든 중국이 됐든 다 누가 그 나라들을 시키면 영국이
시킵니다 영국 아니면 네덜랜드 이런 나라들이 개국을 시키는 거죠 그죠
그니까 왜 그러냐면이 아시아가
유럽하면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로 오는게 가장 빠릅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출발해서 동쪽으로 오다 보면은 쭉 거치게 돼서 중국에까지 옵니다 그래서 전부 다 개항을 시키는 것이
영국입니다 그런데 미국만 생각해보세요 일본을 개시키 것은 미국입니다 왜냐면
이때이 미국이 이미 어떻게 됩니까 미국이 미국의 동부에서 시작을 하지만
이미 1800 60년대가 되면은 50년대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벌써 서부 개척을 통해 가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도착을 해서 샌프란시스코 큰 한구가 되면서
미국이 태평양 국가로 떠오릅니다 대서양 국가만이 아니라 대서양고 유럽
건너서 대서양 국가만이 아니라 이제는 태평양 연안의 국가가 되면서 그러면
태평양 연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을 하면 제일 먼저도 도달한 나라는 아시아의 국가는 일본입니다 그니까
미국이 번을 개강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 이제 페리 제적이 번에 어 이제 오게 됩니다 자 그래서 그때
와서 어 그 강제로 어 개국을 시킵니다 개국을 안 하려고 여러 가지
애를 쓰지만 결국은 힘의 미국의 놀라운 힘에 어 결국은 승복을 하면서
바로 엽니다 그래서 미국하고 어 조약을 맺
1854년에 가나가와 조약을 맺고 1858년에 해리스 조약이라고 일미
수호 통상 조약이라는 걸 맺습니다 자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 나서는 어
1860년에 최초로 사절단을 미국에 보냅니다
1858년에 해리스 조약을 통해서요 미국에서는 자기네 공사를 일본에
상주를 시키기 시작합니다 근데 일본은 일본 입장에서 지금 미국에가서 건물을 사고 거기에 가서
외교 활동을 할 수 있는만큼 뭐 영어나 모든 것이 능통하고 이런 사람들이 없으니까 아예 상주 외교관을
파견할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1860년 데서는 야 그래도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번 답방이
해야겠다 그 미국이 공사를 파견을 했으니까 여러분 나중에 우리가
1882년에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1883년에 미국의 후트 공사가
오니까 우리는 미국의 후트 공사를 파견 상주를 시키지 못하지만 그때
대신 답방을 해서 보빙사 보내지 않습니까 민영익을 필도 해서 그 보빙사의 모델이 바로이 견미사절단
있니다 그래서 1860년에 견미사절단 보냅니다 그래서 미국이 군함을 어
제공을 해서 그 군함을 타고 대사 그러니까 사절단 대표들이 군함을 타고
이제 어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을 샌프란시스코로 갑니다 그런데 그때에
일본 사람들이 간닌 마루라고 하는 조그만 배가 있습니다이 배를 어 몇 년 전에
네덜랜드 터 구입한 배입니다 그러면서 네덜랜드이 배를 받아 가지고요 일본
사람들이 뭘 했었냐 그은 네덜랜드 보고 해군 장교들 하고 수병들을
파견을 해서 우리들한테이 서양 군함을 어떻게 배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가르쳐 달라 그래서
수년간 그 훈련을 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네 대사급 공식 사절단을 저 조그만 배에 태워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제공하는 군함에 태워서 보냈죠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들끼리 그래도 몇
사람이라도 그동안 우리가 훈련했던이 간닌 마루를 타고 그 군함을 따라서 태평양을 건너겠다면
그래서 그걸 따라갑니다 저 조그만 배를 타고 한 달을 걸쳐서 그 풍랑을 해치고 그래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갑니다
그래서이 사진에서 지금 보시는 그 여섯 명이 앉아 있는 사진이 뭐냐면
그때에 간닌 마루를 타고 갔던 선원들입니다 근데 굉장히 재밌는게 그 간닌 마루를
타고 갔던 선원들 앉아 있는 여섯 명 중에 지금 사진을 보시면 향에서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기입니다 젊은 후구 자이
나중에 개요 대학을 세우고 일본의 최고의 근대 지식인이 되고 우리가
문명 개화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한 바로 그 후쿠사 유기 치입니다 이때
후쿠사 기치가 어떻게해서든지 자기는 서양에가 봐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는
부탁 부탁을 해 갖고는이 배에서 이제 하급 그 선원으로서 타게 됩니다
그래서 건너서 미국을 갑니다 그래서 미국을
가서 자 대사들은 이제 그 그때 거기서 다시 대륙을 횡단해 어 가서
뭐 워싱턴도 보고 미국을 저녁을 이제 몇 달 동안 봅니다 여기 사진 보시면
어이 대사들이이 사절단이 워싱턴 DC 있는 조선소를 어 시찰하고 하고 사진
찍은 그 일본 김모노 사무라이 김모노 그대로 입은채로 어 그 찍은 사진도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 아까 그 구사와 기치를 비롯한 마를 타고
간 선원들은 지금 사절단을 따라서 동부까지 갈 수가 없죠 왜냐면 그 배가 있으니까 그니까이 사람들은 다시
그 배를 갓님 마를 타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서 그냥 일본으로 돌아와야 됐습니다 근데 그때에 기왕
미국에 간 김에 한 달간 머물 수 있게 합니다 해줍니다 그래서 한 달간
샌프란시스코에니다 그런데 그때 머물고 있을 때요 후크의 기치가 가져간 돈으로 거기에 있는
모든 책들을 다삽니다 특히 교과서 역사책 서양의 이런 책들을 제대로
잊지도 못하지만 그걸 다 삽니다 그러고는 그것만 하는게 아니라 그
동네 사진관에 가서 샌프란시스코 사진관에 가서 그
사진관의 딸 그 딸하고 사진 좀 찍어도 되겠냐 그러면서 사진까지 찍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시는 사진이
유명한 사진입니다 그때 후쿠사 유키치 가서 사진사이 12살짜리 딸 테오도라
앨리스 슈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그 외국을 배우려고 하고
어 외국 거를 받아들이더라도 객관화를 시켜서 자기 걸로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하고 하는
그러한 어 전통 그러한 시각 그런
지적인 습속이 있기 때문에 어 일본이 저는 근대화를 굉장히 빨리 받아들이는
거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러면 일본이 본격적으로 어 그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건 이제 메이지 유신이라는 걸 통해서죠 메이지 유신은 1868년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1853년에 개국을 했다가 15년 후에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걸 통해서
정권이 바뀌면서 독구 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독구 가를 무너뜨리는 그
역할을 한 것이 사진에 보시는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다카모리 그다음에 이제 만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건 모도 요마 그다음에 이제 여기 사진은 없지만 오쿠보도시미치 이런 사람들이 어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뭐냐면은 일본이 지금 수백년 동안
그니까 6세기 7세기 이후로 일본은 막부 채였습니다 그러니까 막부는게 어
장군이 쇼군이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거고 천황 그죠 번의 왕은 천황은
교도에 있는 거고 근데 완전히이 쇼군 테
가려서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립니다 천왕이 그러면서 이제 본이 250개
번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250개 번이라는게 말이 번이지 사실 국이라고
합니다 그니까 250개 나라로 나져 있었던 거고 각 나라마다 다 즉 왕
같은 사람이 다 있었던 거고요 그렇게 일본이 살아가고 있었던 거고 그 중에서 제일 센 어 그중에 제일 센
다이묘가 그게 바로 이제 독구 가오고 독구 가와는 지금의 동경 근처에 영지를 이제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 그런데 지금 메이지유신려면 중앙집권
근대 국가가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각 번마다 다 왕이 있고
다묘가정 있고 대신들이 있고 군대가 있고 다 사무라이 이런게 아니라
이제는 도쿄에 중앙정부가 있고 중앙정부에서 모든 군사 세금 걷는 거
모든 거를 이제 다 통과 총괄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이제 중앙 직권 국가를 만드는 거죠 그러려면은 뭐냐면
250개 한마다 다이묘가 각 한을 몇 백 년씩 통치를 해 왔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의 가문으로부터 이제는 그 번의 통치권을 뺏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래서 하나로 묶어서 중앙 정부의 권력으로 다 묶어 버리는
거죠 자 그러면요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실
유럽에서 프랑스가 됐든 독일이 됐든 영국이 됐든 그 중앙집권화를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전쟁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장미 전쟁이고 무슨 루 14세가 일으키는 전쟁들이 다 그런 전쟁들이
왜냐면 영주들이 그걸 안 내놓겠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영주들이 그걸 다
내놓습니다 근데 그 라고 앉아서 천왕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때 뭐라 그러냐면 메이지가 메이지의 이름으로 이제내는 거죠 당신이 지금
그 조슈번의 스마 번의 다이메 수 있는 이유는 뭐냐 몇백년 전에 나 천왕의 멧조
할아버지가 당신의 멧조 할아버지한테 그 땅을 봉토로 내려주 하사기 때문에 된
거 아니냐 그렇죠 그니까 원래는 뭡니까 원래는 천왕거다 그런데 지금의
메이지 유신을 하고 나서 메이지 천왕이 이제는 전에는 당신들한테
이렇게 따로따로 맡겨서 통치를 하라 그랬지만 이제는 친정을 하겠다 내가 직접 통치를 하겠다 그러니까 내 놔라
이러는 겁니다 물론 경제적인 보좌 보상은 어느 정도 해줬죠 그래도 그렇죠
완전히 걸 다 놓는 건데 1번의 근데 가 근대화가 너무나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도 다 본건 체제에서 근데 중앙 직권 체제로
넘어가는데 다 전쟁을 겪는데요 엄청난 전쟁들을 겪는데 일본은 전쟁을 안
겪습니다 그 내용이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어 이때 그
드라고 영국 사람이 일본에 와서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뭐 1853년부터
영국 사람들이 특히 58년 또 본격적으로 이제 와서 살기 시작을 했으니까 그때에
후쿠이성에 후구 번에 그 살고 있었던 어이 영국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에
판적 봉안이게 일어나는 거죠 그게 뭐냐면 야 내가 너희 조상들 이걸
통치할 권한을 줬는데 그걸 도로 내놔라 그걸 이제 판적 봉안이 그랬던 거죠 그래서 판적 봉안이 일어나는
상황을이 대가 가서 그걸 직접 보는 거 겁 그래서 이렇게 그때에 생생하게
증언을 하게 있습니다 나는 아직 봉건제도의 하에 있는 후구 이성에
살고 있었기에이 칙령 그니까 판적 봉의 즉각적인 효과가 어떤 것인지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장면은 1871년 7월 18일 번에
관청에 천황의 판적 봉안 령이 도착했을 때였다 경악 분노 공포 불
예감이 충성심과 모두 뒤죽박죽이다 천황의 대리인이자 1868년에 공표된
계조의 서문을 초환 있던 유리 기미 마사를 죽여야 한다는 의도다 이제 그런데 그다음에 이제 기가막힌 얘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1871년 10월 1일 성의 대접전 실에서 키젠 후구
이성을 다른 이름입니다 키젠이 다이묘가 수백명의 신하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국가에 대한 애국심으로 바꿀 것과 지역의 이익을 국가 의
이익으로 전환할 것을 당부하는 순고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그니까 자신에
대한 충성심 번에 대한 충성심을 이제 천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꿔
달라 그리고 여태까지는 후구 번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힘써 왔지만
이제는이 통일된 나라 전체 이익을 위해서 힘써 달라라고 순고한 연설을
합니다 세 번째는 그다음 날 아침 영주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성을 마지막으로 나서 아무런 권력도 없는 평범한 신사로 여생을 살기 위해
도쿄로 출발하는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키젠의 4만 시민 거의 전부가
길거리로 나와 배웅하는 장면이다 일본은
해서 250개 번호로 나뉘었던 본건 국가가 이렇게해서 통일이 됩니다
일본은 이렇게 해서 통일을 이제 이루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그
250개 번으로 나눠져서 뭐 우리가 사무라이 영화들 보면은 전국 시대에
그렇게 서로 싸우고 맨날 전투하고 죽이고 하든 그
일본이 놀랍게 빨리 순조롭게 통일 국가로 나갑니다
근대화를 위해서 그리고는 그다음에 또 하나 놀라운 일이 뭐냐면
이와쿠라 사절단이 거를 파견합니다 그게 뭐냐면 이와쿠라 이제 그 당시에 어 최고
대신 중에 한 사람이었던 메이지 정부의 최고 대신 중에 한 사람이었던 사람이고 그 사람을 대사로 보내고
이제 수행원들 따라 보내지만 그래서 이꾸라 사절단이 되는 겁니다 자
이꾸라 사절단이 1871년에 떠났는데요 이때에 떠난 이유가 뭐냐면
불평 조약 재협상 있니다 아까 가나가 조약을 통해서 처음으로 미국하고
조약을 맺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때에 사실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불평등 조항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치외법권 그러니까 미국 사람이 일본에 살 때는 본법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 등등의 치 치유법이 굉장히 구력이 거죠 우리 우리도 이제 그렇게 배웠었던 거고 그런게 불평등
조약인 일본도 불평등 조약을 당했는데 조약이라는게 20년마다 다시 몇 거요
재협상을 하거든요 그래서 1873년 이면은 조약을 재협상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미리 그 협상 여지를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제 또 사절단을 파견하는 거
두 번째 이유는 사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뭐냐면 서양 선진 문물을 시찰하러 보냅니다
그런데이 시찰단이 이와쿠라 도모미 그 당시 최고 어 정부 최고 수반이 있고
오쿠보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도 히로부미 등 46명의 공식 수원인데이
사람들이 뭐냐면 전부 다 메이지유신의 핵심 인물들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냐 여러분 지금 200년 된
정부를 간신히 무너뜨리고 폐번 치연 같 저 그 판적 보안 같은 걸 통해서
간신이 통합 국가를 만들었는데 그러자마자
정부 사람들이 뭐라 그랬냐면 야 근데 여기까진 우리가 했는데이 근대
국가라는 걸 도히 어떻게 만드는 거냐 이거 도저히 모르겠다 우리 한번 나가서 공부를 좀 하고 오겠다
와야겠다 그래서 일부는 당신들 남아서 나라 좀 지키고 우리 외국 나가서
공부하고 올게 그러면서 정부가 정부가 최소의 숫자만고 정부
전체가 해외 유학을 떠납니다 여러분 2년간 떠납니다
그래서 미국을 거쳐서 유럽을 전부 다 돌면서 2년간 유학을 다녀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 역사 인류 역사상 정부가 전체적으로 유학을
동시에 함께 떠난 일은 들어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그게 이와라 사절
단입니다 그만큼 외국의 거를 배워야겠다 외국의 문물을 드려야겠다는 그리고 들어와야만
한다라는 그 당위성을 너무나도이 사람들이 잘 이해를 했던 거죠 그래서
떠나면서 어 공식 수행원과 수십명의 이제 학생들까지 데려갑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을 데리고 가면은 거 거기에 남자 학생들을 뭐 놓고서는 거기서
고학을 시켜서 그 학생들이 공부를 해 갖고 나중에 그 그 하바드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중에 큰 대신들이 되고 뭐 이런 일들이 수도 없이 어 벌어지고
그때에 여학생들 어린 여학생들 다 다섯명을 사무라이의 딸들을 데리고
가서 미국에서 미국에 있는 문에다 그 부탁을 해서 거기서
자라면서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여자 대학교까지 다 나오게 해서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와서 여자 대학을 세우게 하고 뭐 등등 에들을 참 놀라운 일들을 어 이제이 사람들이 합니다
그래서이 지도를 한번 보시면요이 지도를 보시면은 어 그 일본에서 함 출발을 해서
샌프란시스코로 해서 미국에서 4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있다가 시카고를
거쳐서 뉴욕 워싱턴으로 갔다가 그다음에 뉴욕으로 해서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서 런던으로 해서 그리고
이제 유럽을 전역을 어 돌아다닙니다 1년 반 동안 대학교 공장 철도 하여튼 그
당시 첨단 모든 것을 다 합니다 그래서 영국에 가면 빅토리아 영을 만나고 프랑스에 가면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고 독일에 가서는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납니다 만나 갖고 국제
관계란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그때 오쿠보도시미치 기도 다까 요씨 이와쿠라 이런 사람들 보고
가르쳐줍니다 야 독일 우리도 최근까지
갈갈이 갈라져 있었던 본금 국가였는데 내가 이렇게 해 갖고 통일을 된 근대
국가를 만들었다 당신들도 이렇게 하라라고 하는 연설도 듣고 그걸 배워
갖고 또 오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은 2년에 걸친 어 그 그 유학 끝에
정부가 1873년에 돌아옵니다 자 그런데요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우리 역사와 너무나도 밀접한 이와 거라사 절단이 돌아오는
가장 2년 만에 뭐 원래도 그 정도 있을 생각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일정을 줄여 가지고 더 빨리 시급하게 귀 해야 될 이유가 있었는데 그게 말 뭐냐면 바로 이와쿠라 사절단이 외국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해외 유학을 다니고 있을 때 일본에서 남남 있던
사람들 사이에 정한론이 일어납니다 그 유명한 정한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정한 론이 뭐냐면은 일본이 아직까지도 수백개 다 그 번으로
나눠져 있었던 나라를 간신이 판적 봉안 이런 걸 통해서 이제 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불만이 많습니다
옛날에 옛날이 그립고 옛날 체제가 더 좋았다 왜 이런 혼란을 지금 일으키고
있느냐 그러면서 반대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러니까는 남아 있었던 정부
사람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 중에서 특히 사이고 다까 머리라고이
사고가 야 이렇게 나라가 지금 갈라져서 통합을 못 하고 있는데
그러면이 나라를 통일하는 방법이 뭐냐면은 옆에 나라하고 전쟁을 하면은
나라가 통합이 되지 않냐 그런데 지금 전쟁을 어떻게 일으키느냐다 보니까
조선이 조선이 자꾸 사신을 보내 갖고 어 그 외관에 사신을 보내 가지고 아
우리 정부가 이렇게 바뀌었으니까 조선하 다시 조약을 맺자
이런 얘기를 했을 때 그때 이제 조선에서 다 거부를 했었던 거죠 그러니까 이제 그때 어 사고가 뭐라
그러냐면 내가 내가 또 한번 조선에 건너 와서 단판을 지을 텐데 분명히
조선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면 나를 죽이면 그거를 핑계로 해서 너희들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와라 근데 그렇게 군사를 일으키면 뭔 일이 벌어지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뭐냐면 전쟁을 일으키면 나라가 하나로 통합이 된다는 겁니다 정론은 국론 통일을 하자고
하는 겁니다 사실 그래서 정론은 뭐 기도 다시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때가 되면은 국이 분열 때는 꼭 정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1873년 8월 사고를 조선의
사신으로 파견하겠다는 공식 결정을 내 내려서 천왕이 메이지가 그렇게 임명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 당시에 정부 정부에서 급격히 급히 이거라 사절단에
전보를 쳐서 빨리 귀국하라 큰일났다 조금만 며칠만 기다리면
사고가 조선에 건너가서 보나마나 죽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이제 또 전쟁을 일으키자는 얘기가 나올테니까 빨리
큰일 다 돌아오라 그래서 1873년 9월 달에 이와쿠라 하고 오쿠보
기도가 급거 귀국을 합니다 귀국을 해 가지고는 그 천왕이 임명한 거를
철회하게 합니다 그 당시에 상황을 그려놓은 유명한 그림들이 있는데이 그림에서도
보시면은 앉아 있는 그 대신 옷을 앉아 있는게 이제 그 그 이학구 하고
그 앞에 큰 수염을 하고 서양 옷을 입는게 이제 어 사이고 다까 머리고 그러면서 그때에 서로가 칼을 빼들고
겨누면서 아지 그 싸웁니다 근데 결국은 천왕이 어 이걸 중지를
시킵니다 그러면서 쿠보가 사고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쿠보가 외교적으로 조선을 열어야 된다 그래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는게 오쿠보 때문에 어 그 강화도 조약을 맺어서 조선의 국이 그렇게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면 바로 그다음에 1877년에 세난 전쟁 선남 전쟁
사고가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서 어 자기의 중고가 보낸 전쟁 그 군대와
싸우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그렇게 해서
죽고 기도 다가요시는 병으로 죽고 그리고 어
오쿠보는 사를 당합니다 사고를 추종하는 세력한테 사를 당 자이
이래서 그 메이지 유신의 1세대가 어 모두 어 거의 동시에 사망을 하고
그다음 세대가 이제 어 이토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런 사람들의
마츠카타 마사요시 이런 2세대들이 들어와서 일본의 본격적인 근대화를 또
시작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요 어 그 근대
국가의 모습이 뭐냐면요 이런 그 개혁이 뭐냐면 메이 주신의 본격적인 개혁이 뭐냐면 정치 개혁입니다 내각제
서양식 내각제를 하고 두 번째가 경제 개혁을 합니다 세제 개혁을 하는 거고
산업화를 일으키는 거고 매이지 헌법을 만드는 거고 교육 개혁을 합니다
여러분 1875년이 되면요 매이지 유신한지 68년에 매이지 유신 하고 7년 만에
일본의 초등학교가 2만 개가 세용 생깁니다 그리고
1870년대에 영어로 가리키는 학교가 56개가 설립이 됩니다 1번은 이렇게
해서 근대화를 시키는 거고 군사는 징병제를 전에는 사무라이들이 전쟁을
하는 계층이었다 않습니까 신분제를 없애버리고 사무라이들을 없애고 이제는 모든 국민을 징병을 합니다 그래서 모
징병제가 생기면서 국민 군이 생기고 어 독일로부터 총참모부는 거를 배워서
187 78년에 설립을 하고 참모 대학을 1883년에 세 면 이제는 강력한
군대까지 키워나가는 것이 어 일본의 어 그 근대 화액 급격한 근대화의
모습입니다 자 그러면요 조선의
개화파가 바로요 1번을 보는 겁니다 저희가 19세기 조선이 어떻게
살았고 왜 조선은 쇄국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얘기를 쭉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그때에 일본에 지금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죠 바로 옆나라에서 그러니까는 참 역사적으로
재밌는 문제가 뭐냐면 질문이 뭐냐면 그럼 어떻게 해서 쇄국을 해서 완전히
걸어다 있었던 조선이 어떻게해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이 놀라운
변화를 배울 수가 있 있었고 어떻게 개화이 그걸 알게 됐을까 참 미스테리
아닙니까 사실 그런 것이 역사의 역사를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은 제일 재밌는 부분이 바로 그런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걸 풀어가는 그걸 이해하게끔 연구를
해 나가는 찾아나가는 방법이 그 역사의 정말로 묘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어떻게 일본의이 모습을
알게 되가 불교 승 때문에 그랬습니다 불교 스님
이동인이라는 불교 스님 때문에 일본의이 변화를 알게 됐습니다 그걸 어떻게 냐면 이런 겁니다
이동이라는 불교 스님이 동네 범어사 출신입니다 부산 분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뭐 젊 어렸을 때 뭐 뭐를 했는지 전혀 모르죠 그냥
금강산에 가서 거기에 있는 어 고승을 만나서 좀 배웠다 뭐 이런 정도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불교 스님은 조선 시대는
천민이었던 스님들을 위한 뭐 학교가 있습니까 불경을 따로 뭐 나라에서
인쇄를 해 줘서 어디 도서관이 있어서 가서 찾아서 볼 수가 있습니까 학교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그랬데 아까 1876년에 강화 도자를 맺었다 그러지 않습니까 강화도 조약을
맺 맺었다면 뭐냐면요 일본의 오쿠보 도시 미치가 강화도
작을 믿고서 조선을 열었습니다 그럼 연다라는게 무슨 뜻이냐 여는게 뭐냐면 그 전까지
외관 동네 초량집 외관 고기만 일본 사람들이 와서 잠깐 와서
장사를 하고 갈 수 있게끔 만들어 놨었던 완전히 닫아 놓은 제한적인 거래만 할 수 있는 체제였던 거를
강화도 지역이 뭐라 그러냐면 그 외관에 있었던 철조망을 다 치워 버리고 이제는 일본 상인들이 오면은
마음대로 어느 넓은 지역 내에 가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거기에
이제 조선 사람들도 들어와서 같이 만나서 교류를 할 수 있게 하자라는 것이 그게 강화도조약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어떻게 됩니까 량진 둘러싸고 있던 철조망과
200년 동안 둘러싸고 있던 철조망과 이걸 다 무너뜨리면서 일본 사람들이 이제 건너 오면은 와서 거기에서 살기
시작하고 집을 짓고 도로를 내고 재판소를 자기네들이
인구가 많아지기 시작하니까 재판소를 만들고 병원을 짓고 그러고 마지막 막
뭐가 냐면요 종교 생활을 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번 정부가 아 스님들을 파견
해야겠다 절이 있어야 되겠구나 사찰이 있어야겠구나
그래서 스님을 파견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그때 어느 정부에서 어느 절을
찾아가면 교도에 가면 히가시 간지라는 절이 있습니다 한번 꼭 동본원사 우리
발음으로 그렇게 하 기가막힌 절입니다 근데 그 원사가 옛날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조선하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그 당시 그 절에 어 있었던 스님 보고 어 당신이
좀 건너가서 일본 사람 그러니까 부산에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일본 사람들 사이에 가서 좀 그 사람들 종교 활동을 위해서 사찰도 열고 이제 뭐 포교 활동을 하시오
이렇게 오쿠무라 엔진이라는 분한테 부탁을 합니다 근데 그 오꾸라 엔신 의 대조 할아버지가
누구냐면 오다노부나가라는 일본의 무장 유명한 무장이 있었는데 그 무장이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이 사실은 조선에 건너와서 부산에
건너와서 고독사는 절을 창건을 합니다 그 그 그 사람의 몇대 후손입니다 그
사람한테 오쿠무라 신한테 가서 당신이 몇 대조 할아버지를이어서 다시 조선에 건너가지 그래서 건너갑니다 그래서
와서 동본원사 부산 결론이라는 절을 세웁니다 그 부산의
한복판에 근산 절을 세웁니다 그때에 바로 보호사 출신인 이동인 이분이 새
사찰이 부산 한복판에 생기는 거고 가서 보니까 온갖 불경 책들과 모든
거를 다 갖추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이 동인이 나타납니다 어느 날 오꾸라
신한테 나타나서 오꾸라 진한테 와 갖고 뭐 내가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얘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거를 오쿠무라 인씨는 당시 매일같이 보고서를 써서 다 가시가지 보고를
했던 그 내용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동인 어느 날 이동인이라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뭐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러는데 어 그 예사롭지
않은 사람 같다 오히려 불교 얘기 같은 거보다는 국제정세 이런 거를 자꾸 물어보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무튼 뭐 와서 얼마든지 대화를 하 자 그래갖고 와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그러면서 이제 책도 보여주고
사진도 보여주고 본이 근대 하는 모습도 이제 보여줬던 거죠 그랬는데 오 엔진 기록에 어느날 갑자기 이동인
사라졌다 그럽니다 매일 나타나더니 어느날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동인 어디에 나타나면 서울에 가서 서재필 박사 일기에
나타납니다 서재필 박사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해인지 기억이 안 되나 아마
봄철이 하루는 김옥균이 여러 사람들 데리고 절이라고 지금도 있나 세절 절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때 흔히 세 절이라고 불렀는데 그 절로 놀러 가자고 그런단 말이야 그래 그 절에
갔더니 중 한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매우 공손하고 말도 잘하고 또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이고 근데이 중이이 중이
처음에는 사진을 보여 주는데 세계 여러나라 도해 초여 도시 군인의 모양 같은 걸 많이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걸 요지경 요지경으로 본데 모두 처음 보는 것이라 재밌단 말이야
이렇게 하기를 1년 이상이나 걸려서 오꾸라인지 저 이동인이 가져온 책들을
다 읽었지 그때 그 책이 일본말로 쓴 것인데 우리가 한문은 되게 짐작하게
한한 문자만 연달아 읽어 보면 뜻을 모두 통한다 말이야 그래서 그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강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이라는 중이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세 절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할 것이야 여러분
제가 어 저 봉원동 어 연세대학교 2대 뒤에 있는 봉원동 자랐습니다 그
봉원동 뒤에 있는 봉원사 그게 세절 있니다 저 어릴 때 그 세절이라 그랬는데요 알고 보니까 그니까 그 세
절이 바로 그 동 저 개화파의 온상입니다 그러니까 오쿠무라 인신을
만나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격한 변화에 대한 사진과 책들을 가지고이
사람이 서울로 와서는 김옥균고 박영효 이런 사람들 찾아서 그거를 서재필
이런 사람들 찾아서 몰래 봉원사 세절 숨어서 그걸 보여주고이 사람들은 그걸 1년씩 공부를 한 다음에 아 우리도
나라를 열어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그때 김균하 박영 가 이동인 테 금괴 세
덩어리를 주면서 당신 어떻게서든지 일본으로 건너 가시오 그럽니다 그래서 이동인이 금괴를 들고서 금덩어리를
들고서 다시 오꾸라 신한테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꾸라 엔신 일기에 나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동인이 다시
나타났는데 금매 덩어리를 들고 와 갖고 자기를 1번에 보내 달라 그런다는 겁니다 왜 왜냐 김옥균 아가
박영호가 당신 빨리 1번에 한번 어떻게 서든지 건너가서 일본을 배우라 그런 겁니다 그래서 오쿠무라 인신이
동보원 사랑 협 협의를 한 후에 이동인 벙어리 거지로 변장을 시켜
갖고 몰래 밀항을 시켜서 일본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일본의 동본원사 가서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 중으로 도식을 하고 1년 만에 일본 스님이 돼서
그다음에는 도쿄로 보내서 도쿄에서 도쿄에 와 있는
외국 사절들이 만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이인이 2차 수신사로 건너온 김홍집 만나서
김홍집한테 설득을 해서 김홍집이 이동인 데리고 가서는 고종한 소개를
한 다음에 빨리 개국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때에 신사유람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다시 보내게 됩니다 어 안타까운 일은 이동인 그때 암살이
됩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게 누가 죽였는지 어 누군가가 주의자가 누군가가 죽였 겠죠 어 그렇지만
뭐 스님 중이 하나 죽은 거에 대해서 아무 수사도 없었던 거고
천민이었던이 그때 건너가게 되는 거고 그때에 어 일준 윤치호 이런 분들이
가서 일본 유학을 하기 시작하고 미국 유학을 가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조선이 개화를 개국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결정 정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이 이동이라는
스님이었다 모습을 조선이 이렇게 배우기 시작하는 거고 그 뒤를이어서
개화파라는 분들이 나와서 일본이 급격하게 시도하고 있는 근대화를
우리도 배우자 그래서 개화파가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네 오늘은 어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는가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중국은
그렇다면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알아보는 어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임무를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해
나가는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이었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음악]
===
세진님, 요청하신 강좌 5회 내용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나를 향하지 않은 본문(요약 및 평론)은 <해라> 체를 사용하고, 각 사실적 정보에는 출처 각주를 붙였으며 강조 기호는 < >로 표기했다.
<일본은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5회에서 함재봉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일본이 조선·중국과 달리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근대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사상적·구조적 배경을 분석하고, 이 변화가 조선 개화파의 형성으로 이어진 역사적 연쇄 과정을 조명한다.
(1) 근대 이전 일본의 실용적·객관적 지적 전통
주자학의 객관화: 야마자키 안사이는 "공자와 맹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침략한다면, 견고한 갑옷을 입고 일전을 벌여 공맹을 잡아 국군에 보답하는 것이 공맹의 도"라고 가르쳤다. 이는 이념을 주체적·실용적으로 객관화하여 수용하는 일본 특유의 지적 태도를 보여준다.
국학(國學)과 중국관의 전환: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중국 학문을 '타국의 단점을 파악하고 한자를 익히는 도구' 정도로 상대화하며, 자국의 정체성(일본혼)을 바탕으로 한 유연한 사유 체계를 확립했다.
사쿠마 쇼잔의 서구 수용론: 위정척사관에 가갇혀 서양을 배척하던 조선과 달리, 서구의 우월한 군사·기술 문물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조속히 수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2) 계곡과 메이지 유신의 구조적 성취
미국의 개항과 서구 문물 시찰: 1853년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된 후, 일본은 가나가와 조약 및 해리스 조약을 체결하고 1860년 견미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때 간린마루호를 타고 동행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은 서구의 서적과 제도를 적극 흡수하여 문명개화론의 기초를 다졌다.
혈전 없는 중앙집권화(판적봉안·폐번치현): 메이지 유신(1868년) 과정에서 수백 년간 250여 개 번을 지배하던 다이묘들이 전쟁 없이 통치권과 영지를 천황에게 자발적으로 반환(판적봉안)했다. 이는 서구 유럽이 겪은 대규모 내전 없이 신속한 근대 중앙집권 국가 수립을 가능케 한 결정적 계기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서구 유학: 메이지 정부의 핵심 지도부(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전체가 2년간 서구 각국을 직접 순방·시찰하며 국가 개조의 방향성을 터득했다. 귀국 후 정한론(征韓論)을 배척하고 내정 개혁(내각제, 세제·교육·군사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3) 승려 이동인과 조선 개화파의 탄생
강화도 조약 이후의 균열: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초량 외관의 봉쇄가 풀리고 일본 사찰(동본원사)이 들어서자, 범어사 출신 승려 이동인이 오쿠무라 엔신을 통해 서구·일본의 근대 문물과 서적, 사진 등을 접했다.
개화파의 온상(봉원사): 이동인은 서울 봉원사(세절)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서구 세계의 실상과 근대화 서적을 전파하며 사상적 충격을 안겼다.
개국과 유학의 물꼬: 이동인은 일본으로 밀항하여 국제 정세를 익힌 후 김홍집을 거쳐 고종을 접견했고, 이는 신사유람단 파견과 유길준, 윤치호 등의 조일·조미 유학으로 이어지며 조선 내부에서 '친일 개화파'가 형성되는 결정적 기틀이 되었다.
2. 평론: 지적 유연성과 사상적 전이(轉移)의 역동성
강좌 5회는 일본의 근대화를 단순히 '운이 좋았거나 무력에 굴복한 역사'로 폄하하지 않고, 내부의 사상적 유연성과 주체적 결단이 만들어낸 문명사적 대전환으로 평가한 객관적 시각을 보여준다.
첫째, 이념을 대하는 '지적 태도의 차이'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조선이 주자학을 절대적·종교적 진리로 봉대하여 스승이나 명분을 바꾸는 것을 금기시했던 반면, 일본은 주자학이나 서구 문물을 국가의 생존과 실리를 위한 '도구'로 객관화했다. 공자와 맹자마저 침략자로 온다면 베어야 한다는 야마자키 안사이의 파격적 논리는, 이념보다 국가의 생존을 우선시했던 일본 근대화 지도자들의 철학적 기원을 명쾌하게 입증한다.
둘째, '기득권의 자발적 해체'라는 메이지 유신의 본질을 조명했다.
유럽이나 여타 아시아 국가들이 봉건 영주들의 기득권 저항으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른 것과 달리, 일본의 다이묘와 사무라이 계급이 국가 통합을 위해 스스로 세습 권력을 반환했던 판적봉안의 역사를 부각했다. 지도층 전체가 2년간 국가 비우기를 감수하며 서구 유학(이와쿠라 사절단)을 떠났던 담대함은 근대화의 성패를 가른 결정적 리더십의 차이였음을 잘 보여준다.
셋째, '천민 승려 이동인'을 통한 사상 전이 파이프라인의 발견이다.
그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불교 승려 이동인이 조선의 닫힌 문을 열고 김옥균, 박영효 등 양반 엘리트들에게 외부 세계를 연결해 준 '핵심 매개자'였음을 입증했다. 신분제 최하층에 속했던 천민 승려가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를 활용해 조선 개화파의 탄생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사회의 균열과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을 보여주는 매우 인상적인 사상사적 발굴이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5회 강연은 근대화라는 문명사적 시험대에서 '지적 유연성과 실용주의'를 택한 일본이 어떻게 급부상했는지, 그리고 그 여파가 어떻게 조선 내부로 침투하여 '친일 개화파'라는 새로운 한국인의 정체성을 탄생시켰는가를 역동적으로 증명해 낸다.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5회
<일본은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요약
• 이번 강의는 앞선 4회의 연장선에서 "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실패했는가"를 다룬다. 함재봉은 일본의 성공을 민족성이나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사상적·정치적·제도적 변화의 결과로 설명한다. 특히 일본은 중국 문명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전통을 가졌으며, 이것이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 강의는 일본 중세의 사상가들에게서 출발한다. 일본은 주자학을 수용하면서도 중국을 절대적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마자키 안사이, 오규 소라이 등 일본 유학자들은 중국과 일본의 현실을 구분하며 일본에 맞는 정치와 문화를 모색했다. 함재봉은 이러한 '비판적 수용'이 조선의 주자학과 가장 큰 차이라고 본다.
• 이어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일본 근대화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쇼잔은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이라는 사고 아래 서양 과학과 군사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자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고 세계 문명을 직접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그는 미국 군함을 직접 보기 위해 밀항을 시도했고, 해외 정세를 몸소 배우려 했다. 비록 실패하여 투옥되었지만 그의 교육은 메이지유신 세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훗날 일본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그의 제자였다고 설명한다.
• 함재봉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개인 몇 명의 혁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유신 이전 수십 년 동안 사상가, 교육자, 번(藩)의 지도자들이 서양 문명을 연구하고 인재를 길러 온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1868년의 정치혁명이 가능했다고 본다.
• 일본은 해외 유학생을 대규모로 파견했다. 정부 관리뿐 아니라 젊은 학생들을 유럽과 미국에 보내 정치, 군사, 산업, 법률, 교육을 배우게 했으며, 귀국 후 국가 개혁의 핵심 인력으로 활용했다. 이는 조선과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 일본은 해외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초빙하였다. 철도, 조선, 군사, 법률, 교육, 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의 전문가들이 일본 정부와 대학에서 활동하였다. 외국 기술을 배우되 일본식으로 빠르게 흡수한 것이 특징이었다.
•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였다.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하여 전국을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하게 만들었으며, 징병제와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국가 개조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 산업화도 국가가 주도하였다. 철도, 조선소, 제철소, 군수공장, 우편, 금융제도를 정비하였고, 민간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함재봉은 메이지 정부가 경제를 직접 통제하기보다 산업이 성장할 제도를 구축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 그는 조선이 같은 시기에 여전히 성리학 논쟁과 척사사상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은 현실을 직시하며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고 본다. 일본은 "무엇을 지킬 것인가"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고, 조선은 "무엇을 막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는 대비를 제시한다.
• 강의 후반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 지도자들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일본 근대화는 개방적 사고와 인재 양성, 해외 경험, 제도 개혁이 결합된 결과였다고 정리한다. 이어 다음 강의에서는 중국이 왜 같은 시기 근대화에 실패했는지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한다.
평론
이번 강의는 일본 근대화를 '사상의 변화 → 인재 양성 → 제도 개혁 → 국가 혁신'이라는 하나의 서사로 정리한다는 점에서 매우 명쾌하다. 특히 사쿠마 쇼잔과 요시다 쇼인을 중심으로 메이지유신 이전의 준비 과정을 강조한 것은 일반적인 한국 역사교육에서는 자주 접하기 어려운 시각이다.
반면, 일본 근대화의 성공을 내부 개혁 역량에 주로 귀속시키면서 국제 환경의 유리한 조건, 막부 말기의 경제 성장, 그리고 제국주의 팽창과 식민지 획득이 이후 일본의 산업화에 미친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게 다룬다. 또한 조선을 지나치게 수동적인 사회로, 일본을 일관되게 능동적인 사회로 대비하는 서술은 역사적 복합성을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이 강의는 '왜 메이지유신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수십 년간 준비된 결과였는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입문 강의이며, 함재봉의 전체 논리에서 친일개화파가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