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회
법률방송
143,250 views Jul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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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여섯 번째 시간에는,
중국은 아편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근대화를 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비교해 어떤 점이 달랐기에 중국의 근대화가 실패했는지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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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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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아 봉 한국인의 탄생입니다 오늘은 어 지난
시간에이어서 어 중국은 근대화에 왜 실패했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 일본은 어떻게 어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는 달리 자력의 힘으로 근대화의 성공을 했을까
어 서양이 도래했을 때 서강이래 어떻게 그 기회를 국권을 빼앗기거나
어 그러지 않고 종속되지 않고 어 자체적인 힘으로 근대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그 요인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말하지면 반대로 어 그 반면 교사로 그럼 중국은 왜
실패했을까 이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근사를 알고 어 우리가
근대화 과정을 제대로 의하기 위해서는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어 일들을 겪었던 어 중국과 일본을 살펴봐야 하는데 오늘은 중국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중국은 왜 어 근대화의 실패했을까요 어 일본과 어떤
달랐을까요 우선 어 하나 우리가 특기야 될 점은
뭐냐면 중국은 서양과의 조 조우가 훨씬 일찍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1853년에 개국을 하지만 중국은 이미
1842년에 계곡을 합니다 그때 1차 아편 전쟁에서 패하면서 어 그 중국이
개국을 합니다 어 그러면서도 1차 아편 전쟁에서 개국은 하지만
어이 중국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어
그 이게 근본적인 어떤 세계가 변하고 있다 자기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이 서양의 도래로 인해 갖고 뭔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라는 거를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래서 1차
하편 전쟁을 통해 가지고 홍콩을 빼앗기고 홍콩을 이제 그 영국이
100년 동안 조차를 하고 그리고 이제 그 중국에서 마음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되고 특히 이제 아편을 맘대로 팔 수 있게 되고 어 이런 거는 하지만 굉장히 지역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어 중앙정부 뭐 북경에 있는 베이징에 있는 중앙정부 있죠으면 저기 그 광동 남쪽에 어 그
홍콩이라는 뭐 쓰지도 않는 섬 그거 하나 이제 달라 그러니까 주고 그냥
어 서양 사람들 몇 사람이 와서 어 비록 편이라는 거를 장사하는 거는 정말 싫지만 어쨌든간에 뭐 굳이
하겠다니까 하는 거지 이게 어떤 자기네 체제 자기네 이념 자기네
세계를 바꿀 거라는 거는 감지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게 바뀌는게 뭐냐면
2차 앞편 전쟁 때 때입니다 2차 앞편 어 그 전쟁은 1856년에
일어나서 어 1 어 8 60년까지 이제 지속되는 그 전쟁입니다 자
그러면 어 1차 편 전쟁이 일어났던 건 이런 겁니다 간략하게 우리가 세계
정세를 좀 이해를 해야 되는 거니까 자 영국이 뭐 유럽 영국 뿐이 아니지만
영국이 줄지만 이제 유럽이 중국에 왔을 때 중국을 발견했을 때에 특히
이제 뭐 명나라 때부터 왔었던 거죠 그러니까 뭐 마테오리치 이런 그 그 예수의 신부 카톨릭 신부님들은 뭐
영나라 때부터 왔으니까 굉장히 교류가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이 중국에 오는 거는 이제 무역을 하기
위해서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 무역에 뭐 뭘 무역을
했냐면요 중국의 비단을 사고 중국의 도자기를 사고 특히 중국의 차를 그렇게
샀습니다 차라는 거를 중국에서 처음 배워서 유럽 사람들한테 최고의
기호식품이 됐습니다 우리는 그럼 커피를 발견을 해서 뭐 스타벅스 다 뭐 하면서 무수히 많은 커피 점들이
들어오면서 지금 한국 사람들 최고의 기호식품이 돼서 어딜 가나 커피숍이 있지 않습니까 영국에서는 특히
유럽에서는 중국의 차를 발견했을 때가 지금 우리가 커피 발견한 거 같은
엄청난 기호식품의 그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무진장으로 사갑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요 중국에서 차 비단 도자이
이런 온갖 거를 사 가는데 반대로 중국에다 팔게
없어요 영국이 유럽이 갖고 있는 어떤 물건도 중국이 원하는게 없었습니다
그니까 전혀 지금 무역 역조가 형성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팔 물건은 없는데
사고 싶은 것 많으니까 결국 어떡합니까 돈을 줘야 되는데 그때 돈이 뭐가 있습니까 은화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영국이나 스페인이나 이런 나라들이 그 은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중국의 차와 도자기 비단을 사는
거죠 그래서 전세계 은혜 태반이 중국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그때에 유럽 사람들이 뭐라 그랬냐면 유럽 은혜
무덤은 중국이다 중국은 유럽 은의 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
들어갑니다 자 그러니까 영국 사람들이 장사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거고 은이 무진장으로 일본 저 중국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명나라 때 아예은은 동전을 실제 화폐로 썼을 정도로 은이
많았습니다 영나라 때는 자 그러니까는 이거를 어떻게 서지이 무역
역조를 시정을 해 보려고 하는데 아무리 물건을 갖다 대도 팔 팔아도 팔리는게 없어요 그러다가 이제
드디어 인도 자기네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재배하는 아편을 팔면 되겠다
그래서 그 아편을 팔기 시작했던 거고 중국에서는 당연 이 이거를 철저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은 어 일 저 영국이
전쟁까지 일으켜서 1차 앞편 전쟁에서 패하면서 어 편을 이제 마음대로 팔
수 있는 그런 어 그 체제가 구축이 됩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중국 사람들이 이게 무슨 근본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뭐 아유 모이 한 마리가 와 갖고 이제 저 중국 남쪽에서 귀찮게 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었다 거죠 체제를 당연히
변화시킬 이유도 없고 그런데 그럼에 그렇게 아편을 팔기 시작했는데도
도대체 무역 역조가 시정이 안 됩니다 그니까 영국이 또 한번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 2차 편 전쟁을 일으킬 때 이유 목적은 뭐냐면요 아 홍콩 하나만 갖고는 안
되겠다 그러니까 최소한 열개 항구를 열어서 영국 상인들이 마음대로 가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자 아편을 팔든 모든
팔든 를 열어라 중국 보고 그랬더니 중국은 지금 아니 열 이유도 없고
열어봐야 편밖에 와서 영국 산비 팔팔 거 없을 거고 그러니까 당연히 이제
반대를 했던 거고 그래서 이제 반대를 했던 거고 그다음에 또 하나 영국이 요구했던게
뭐냐면은 중국 북경에 중국 수도인 북경에 우리 외교관들이 좀 가서
있어야겠다 그니까 서양에서는 일찌감치부터 외교관계를 어
수립하면 상호간에 외 관들을 교환을 해서 뭐 대사 공사들이 상대방 상대국
수도에 가서 이제 상주를 하면서 외교 활동을 벌리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중국인 중국 수도에 가서 거기 수도에 있는 최고위 관리들 하고 황제나 이런
사람들하고 늘 사귀고 교류하고 그러면서 아 이런 문제가 있으면 이런
것 좀 고쳐 달라 법을 이런 걸 고쳐 달라 뭐 이런 걸 해 달라 우는 이런 걸 하겠다 그러면서 이제 늘 협상을
하면서 협의를 하면서 무역을 그 더 늘려가고 이제 그 그럴 요량으로 요구를 하는 거죠 근데
이것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천자는 다른
어떤 나라의 왕들 다도 훨씬 한단계 위라고 어
그 진짜 최고의 정점에 있는 존재라고
했던 거고 중국 입장에서 봐서는 도대체 북경 중국 수도인 북경의
외국에서 사신들이 온다 그거는 천자 중국 황제한테 조공을
바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공을 바치러 와서는 뭐를 해야 됩니까
누구든지 삼괴 국고 둘에 그러니까 무릎을 세 번 꿇고를 한 번 꿇을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찢는 그러니까 굴욕적인 그 인사를 먼저 들여야지 황제를 아 천자를 아련할 수
있었던 거죠 자 그러니까는 근데 이제 서양 사람들은 절대로 그걸 못 하겠다고 하는 거고
그러니까는 말도 안 된다 그야말로 자금성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여기에
어떻게 서양 오랑캐들이 마대로 왔다 갔다 들어오게 하냐 있을 수 없는 일하면서 이제 거절을 하는 거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서 어 영국하고 프랑스가 연합군을 파견을
합니다 그래서 파견을 해 갖고 어 그 전쟁을 하기 시작을 하고 어 어 뭐
청군이 한 번 정도는 승리를 하지만 역시 이제 상대가 되지 않아서 어 그
영불 연합군이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까지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베이징까지 쳐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수도까지 이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1차 합편 전쟁 때는 홍콩
그렇죠 지금 북 저 저 광동에서 전쟁이 일어났었던 거고 저 멀리 수도
북경에서는 아무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건데 이번에는 아예 영국하고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까지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베이징에 쳐들어오는 오니까 황제가 그때
함풍제가 한 풍제 놀라서 조종을 이끌고 피서산장 베이징으로부터
200km 북쪽에 있는 피서 산장 우리가 피서 간다라는 그 피서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 피서
산장에서 가서 이제 북경을 버리고 가버린 거고 그
그러면서 이제 한 다른 한편 협상을 시작을 합니다 이제 연불 연권 그래서 영국 프랑스 연권 협상을 시작을 해
갖고 그때 영국 공사였던 해리 파스 그다음에 그 당시 뭐 그 저 영국
런던 타임즈의 기자 뭐 이런 사람들로 구성이 돼 갖고 어 영국 사람들
25명 프랑스 사람들 한 13명 이렇게 갖고 아주 대규모 협상단을 꾸려 가지고 청나라 측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이게 근대적인 근대 전에 있어서는 서로가
그런 약속을 하고 한쪽에선 전쟁을 하다가도 잠깐 시전을 하고 또 협상을 하고 이런 거가 되는데 중국 측에서는
그거를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중국측 장수인 승고 링 신이라는 유명한 장수가이 사람들을 잡은
다음에 그 협상단을 왔는데 협상단을 다 잡아서 가두고 나서 고문을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은 그 사람들이 풀려 나오게 되는데
아슬아슬하게 풀려 나오지만 이미 그중에 20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그 고문을 당해서 죽은 사체들이 이런 거를 보고 이때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들어가서 그걸 보고는 기절을 하면서 그때 연합군의
사령관이었던 긴경이라는 국의 영국의 귀족이 있습니다 일경이
그때 뭐라 그러냐면 이거는 가만놔두면 된다 이렇게 협상단을 잡아서 이렇게
하는 법은 없다 이거는 뭔가 우리가 한번 교훈을 가르쳐야 된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자금성 아니면은 원명원 불태우고 약탈을 해라
그래요 자금성은 공식 궁이 있습니다 자금성은 지금도 있는 국궁이 그게 명나라 때 지었던 궁을 청나라가
그대로 이어받아서 공식적인 행사는 다 하지만 청라 만주 청나라 황제들은
사는 거는 거기에서 안 살았습니다 사는 거는 원명원이라는
기가막힌 궁전을 지어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 원명은 강희재 때부터 시작해서 곡곡
지었고 걸제 이어서는 정말 놀라운 수준이고 면적이 자금성에 다섯 배였고
거기에 있었던 건물들은 아예 비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금성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명원 결국은 자금성 아니라 원명원
불태우기를 합니다 그래서 원명원 군사들을 풀어놓고 3일 동안
원명을 불태우고 약탈을 합니다 그때에 약탈을 하러 들어갔던 사람 중에
장교가 대회가 있었는데 찰즈 고든이 나중에 이제 그 그 이홍장 밑에서
상승군이라는 서양식 군대를 이끌고 어 태평천국의 나을 평정도 하고 나중에
또 수단에 가서 하는 아주 영국 당시 대형 제국에 제일 나중에 유명한 장군이 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이
사람이 그때 대위로 있으면서 집에 어머니하고 누이한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나갔고
그곳을 약탈한 후 궁 전체를 불태웠다 마치 반달족 럼 반달족이라는게 옛날에
로마를 쳐들어왔던 북쪽에 독일 그쪽 사람들이었죠 그야만 족들 반달 족이라
그러는데 그 반달 족들 럼 400만 되찾을 수 없는 어 그 가장 귀한
재물들을 우리는 어머니는 우리가 불태운 궁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상상도 못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우는 우리의 마음은 렸습니다이 전각들은 어찌나 컸는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지 제대로 약탈도 못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금 장식품을
마치 충동인 듯 태워 버렸습니다 군대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처참한 지시였습니다 모두가 약탈에 미쳤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어 그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유고가 장문의
공개 편지를 써서 이당 이때에이 프랑스하면 비판을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어 중국 문명의 아니면 인류 문명의 가장
아름다웠던 어 건축 중에 하나를 이때에 그 영불 군사가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어 처참하게 부셨다고 지금 하고 있습니다 가서 보시면은 돌로
만들었던 건물만 지금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자 이런 일을 당하고 결국은 항복을 하고 그러면서 영국이
요구한 열개 어 그 항구를 열고 그리고 이제 유럽의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외교관들이 북경에 베이징에 상주를 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피서 산장에가 있던 함풍제가 안
돌아옵니다 전쟁에 적고 다 이제 평화 협정을 맺고서 했는데도 돌아가서 서양
오랑케 외교관들이 베이징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자기를 보겠다 이런 걸 못 보겠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돌아가질 않습니다 문제는 피서 산장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좋을지 몰라도 겨울이
되면은 견들 수가 없이 추워지는 됩니다 그리고 더 온다나 여기는 여름에만 사용하는 잠시 사용했던 거기
때문에 황제 일행이 와 가지고 뭐 몇 달씩 있을 수 있는 그런 특히 겨울을
날 수 있는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있겠다 그러면서 늦가을에 이미 도착했을 때도
늦가을이 있는데 그래서 그 겨울을납니다 그 겨울을 나면서 한 풍제 병을 얻고 결국은 그다음에 어
8월에 1861년 8월에 이제 9월에 갔다 1860년 9월에 피사 산장으로
갔다 1861년 8월에 열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그때 유일한
아들 다섯살 란 애신 강라 재순한테 왕 저 황위를 물려주는
그것이 그 사람이 이제 동치제가 되는 겁니다 근데이 동치제 거의 황제 이름 자체가 뭐를
보내지 같이 통치한다 그러니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실은 모랑 어머니와
같이 통치한다 정과 같이 통치한다 그런 뜻에서 아예 이름도 그렇게 동치제 아고 어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함풍제가 임종 직전에 보종 대신여
여덟명 자기한테 가장 충성을 했던 대신 여덟 명한테 내 아들을 잘 보필해 달라 그러면서 섭정으로 명을
임명을 합니다 근데이 사람들 역시 극렬한 반서구 주의자들 있니다
이때에이 동치제의 생모는 황후가 아니라 후궁이었던
나중에 서태후 유명해지는 서태후 이름으로 유명해지는 후궁이었던
이때에 26살밖에 안 된 여인이었는데이 사람이 뭐를
생각하냐면 지금 아들이 다섯 살 날 아들이 이렇게 됐는데 여덟 명의 대신들이 섭정을
하면은 아무것도 이제 할지 못한다 모든 건 다 대신들이 할 거고 특히
자기는 아예 아무리 생물에도 공식적인 황우도 아니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이제 그냥 궁에 갇혀서 평생을 지낼 것이다 그리고이 사람들의한테 막 면은 지금서 서양이
저렇게 몰려오고 있는데 이거를 끝까지 반대를 해 갖고 쇄국을 하겠다 그러면 이건 큰일 난다 하면서이 사람들이이
사람이 서태후가 그 함풍제의 공식 황후인
동태후 와 같이 손을 잡고 그리고는 어 그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궁정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그 쿠테타를 일으켜서 결국은 그 여덟명의 보정
대신들을 네명은 어 귀을 보내고 네명은 죽입니다 어 특히 황실 출신
네명은 한 명은 어 그 차명에 처하고 나머지 세명은 자결을 하도록 하고
그러면서 아무튼 정리를 해 버리고는 정권을 권력을 잡고서는 그때부터 어
그 동치제의이 그 통치가 시작되면서 이때부터
양무운동 서양을 배우려는 운동을 서태후가 시작을 합니다 자 그런데
그때 서태후가이 국정 구테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게 되는 과정을
그때 프레드릭 블루스라는 초대 주중 영국 공사입니다 그러니까이
이제 베이징으로 가서 상주할 수 있게 됐으니까 최초의 영국 공사가 이제 거기에 상주를 하게 되는데 그게
프레드릭 브루스인 그 사람이 이렇게 보고서를 씁니다 그토록 오랜동안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나라의 재정을 좌우하고 인사권을 쥐고 있던 남성들이 총 한번 못 쏴보고 그리고 그들을
변화하는 단 한 명의 목소리도 손 듣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이 무너진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제가 파악하는 한도 내에서는 여로는 만장 일치로 숙순 그의 동료들 그
여덟명의 보정 대신입니다 그의 동료들 비난하고 있고 그들이 받은 처벌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뿐만 아니라
쿠테타는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졌으며 관청 하나 바꾸는 것 외에 어떠한
혼란도 야기된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근데 관청 하나 바꾼
거 외에는 그게 뭐냐면요 그게 총리 아문이마
거예요 총리 각국 사무 아문 그게 뭐냐면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중국은
외국을 대할 때는 무조건 와서 조공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 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랬는데 지금 이제 결국은 2차
앞편 전쟁까지 겪고 나서 보니까 서양의 열강들을 대등한 관계로 인정을
할 수밖에 없고 외교관들이 백 베이징에 와서 상조하는 거를 허용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대등한 국가대
국가로의 관계를 이제는 맺어야 될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관계를 담당할 새로운 관청이 필요한 거고 그게 총리
[음악] 아문이마 특기할 사실은 뭐냐
자 서양의 열강들 하고는 그렇게 총리 아을 통해서 대등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지만 조선과 같은 속방 하고는 총리 암문을
통해서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건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중국 중국이
조선을 다루는 방법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뭡니까 예조
예를 통해서 조건 관계를 유지를 하는 겁니다 임없이 예를 그래서 총리 아을
통하지 않습니다 조선에는 외교관을 파견하지 않습니다 속은 외국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이 그 총리아문 하나 빼놓고는 설치하는 거 빼놓고는 아무런
혼란도 얘기 야기하지 않으면서 서태후가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는 거를 외국 사절이 얘기를 하는 거고요
그다음에 서태후가 그때에 이제 그 중용을 하는
증국번이라는 이제 또 놀라 어 그 대신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나는 과거에 위대한 황제들도
이루지 못한 황태후의 슬기롭고 결 결단력 있는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나는 존경과 경외심에 몸둘 발을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서
권력을 잡은 세우가 자기 권력을 잡는데 도움을
줬던 공친왕 그러니까 함풍제의 이복 동생이었습니다 그 사람한테 총리
아몬을 맡겨서 외국과의 외교를 하도록 하고 그다음에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이런 사람들을 한족 그니까 만주족이 아니죠 청황실 아닌 한족 대신들을 다
불러들여 가지고는 군대를 일으켜서 태평천국의 난을 어 그 당시
18 1850년부터 일어나고 있던 천 그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을 어 하도록
하고 어 그러고는 문상과 같은 그 당시에 유명한 그 그 만주족 또
대신들을 고용을 하고 그러면서 어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그
시대가 동치중흥이라고 하는 어 나중에 역사가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주된 내용은 서양의 문물을 아까도 말씀드린 양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어 그
시대를 엽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보면요 사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못지
않게 극소수의 개국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궁중 구테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그리고는 정말 능력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나라를 여는 그런과 그 과정이 중국에서도 어 일어납니다
이걸 신유 정변이 하는데요 그런데 그러면 왜 이것이 성공하지 못했는가
일본의 매주 신 성공했는데 그것이 참 어 역사의 우리가 배워야 될 중요한
교훈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신유 정변을 통해서 어 서태후 그다음에 어 공친왕 어
중국본 문상 이홍장 좌종당 이런 사람들이 이제 권력을 잡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가 본격적으로 열 수밖에 없다 자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2차 편 전쟁 이후부터는 중국이 아 서양이 와서 이러는 것이 그냥
잠깐 왔다가 돌아갈 일이 아니구나 이거는 뭔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거구나 우리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시대는 끝났고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그나라는
거를 감지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이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될까라는
얘기를 그거를 모색하면서이 사람들이
자강이라는 어 그 구호를 어 잡습니다 그러면이
자각이라는 구호가 어디서 나오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처음에는 변통이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는 거를 그 변통 시대라고도 했었습니다 근데 그 변통 시대라는 것이 어디냐면 주역에
나옵니다 역경의 계사 전에 궁변통구 구 공하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이제 이렇게도 봤고 그렇지만 사실 더 많이 쓰는게 우리도 많이
역사를 통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자강 자강 운동할 때 이제 자강 있데
그 자강 역시 역경 건계 상전에 나옵니다 그 문구는 뭐냐면 천체의
운행은 건실하다 군자는 그 그것으로서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 그런데요이 문구를 발견하는게 위원이라는 사람입니다 위원이라는 사람
발견하는데이 문구는 우선 송나라 때 송나라가 여진족을 금나라를 상대할
때에 어떻게든지 저 이적을 물리쳐야 될 된다
그때에 부르짖던 구호가 바로 자각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이번에도
외적이 이번엔 서양 오랑캐가 동이족 여진이 아니라 이번에는 양이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올 때 나라를 어떻게 지킬까 역시 자이다 이제 이렇게 하면서 역경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 그렇지만 중국 사람들은 큰 변화 시계에 항상 주역을 참조를
하죠 그래서 주역에서 찾아낸 말이 바로 자강이고이 자강을 구어로 만든
것이 위원이라는 사람이고 그 위원이 바로 누구냐 면은 1차 아편 전쟁
직후에 처음으로 해국 도지는 책을 씁니다 해국 도지가 뭐냐면 아 왜
해군력을 길러야 되고 왜 해양 방어를 해야 되는가 중국은 역대
역사를 보시면요 중국의 방어는 항상 북쪽을 방어를 했습니다 만리 장성을 쌓고 서북 쪽에서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만리장성을 쌓고 해안 경비는 중구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외구이 가끔가다 일본에 혼란이 생길 때 외구이 약탈을 하는
건 있어서 있지만 바다를 방어할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역대 중국의
왕조가 바다는 전혀 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해양 방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항상 방어는 북쪽
서북쪽을 방어 하는 거였죠 근데 이때 처음으로 해국 도지는 책을 쓰면서
서양으로부터 우리가 이러 이러 걸 배워야 된다라는 책을 썼는데 그 해국도지 대해서 말씀을 드린 이유가
뭐냐면 그 해국 도지는 책이 조선의 개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맺힙니다
왜냐면은 박규수가 그 해국 도지는 책을 가지고 와서 자기 집에서
당시 젊은 선비들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런 사람들 불러다가 해국 도지를 같이 읽으면서 우리가 개국을 해야 된다는 얘기
개화를 해야 된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었는데 그때 사용했던 책이 바로이 위원의 해곡 도지고 위원이라는
사람이이 자각이라는 말을 그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어 도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 그래서 신유 정변을 통해서 그러면 개화파가
그야말로 이제 중국시 개화파가 어 개국가의 잡았습니다 자
그런데 중국은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뭐 일본도 물론 그랬지만 완전히
갈라지는 거죠 지금 여태까지 중국이 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고
찰나는 문명을 꽃 피웠었는데 우리가 이거를 도대체가 받아들일 이유가 있냐라고 극구 대하는 보수파 청류파
청의 되고 청류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이 사람들이 사실 중국
대부들의 다수 엘리트들의 다수 절대 다수였습니다이 사람들은 절대 서양
오카의 문물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다음에 지금이 양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일입니다 양무운동 파입니다
근데 이제 양무운동 파는 뭐냐면요 이런 겁니다 어 자이 청의 아주 수구파 그이
요만큼도 서양의 거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러는데 자기네가 봐서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유 정병까 일으켜서 정권까지 잡고서는 서양을 받아들이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설득을 해야
되느냐면 야 우리 거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핵심적인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교 문명은 제대로 지켜야 되지만 그거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의 의 과학기술 무기
같은 거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들여와야 된다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 이걸 소위 말해서 그러니까 중체서용 체 본체는 중국 거고 도구로
사용하는 건 서양거다 그까 중체서용 이란는 말을 하죠 우리는 또 동도
서기란 말도 하지 않습니까도 핵심적인 거는 도덕 뭐
모든 중심은 동적 거지만 우리 동양 거지만 기술 과학 기술 그릇 도구는 서양과자
동도서기 일본에서는 화혼 양제는 말도 씁니다 일본의 혼과 서양의 도구를
같이 쓰자이라는 얘기도 일본 사람들 하고는 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다 동도서기 중체 서형 화원 양체 다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이걸 들려오는데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고 봅니다 1본의 메이지 유심과 왜 신유 정변이 왜 차이가 냐 운동이
차이가 뭐냐면 일본에서는 동도를 안 지키려
그럽니다 중체 화 화까지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근대화를 하고 서양을 하려면 완전히 해 버리자는 겁니다 제대로 배워 보자는 거고
중국에서는 그리고 사실 조선에서도 그렇게 많이 생각을 하는 거죠 서양의 거를 받아들이되 우리 거의 핵심은
지키자 여러분 그게 말은 참 아름다워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지만요 실질을
해보면 나중에 일본의 근대화와 중국의 근대화를 보면은 어떤
쪽이 근대화 잘했을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통도 잘 지킵니까 지금 자기의
전통을 아름답게 보수했고 지켰고 그걸
계속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함양하고 자기를 광고하는데 일 광고하는데
사용하는게 더 잘하는게 일본입 중입니까 당연히 일본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
있냐면요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 그냥 다 들여와야 돼요 그걸 있는 대로 다
들여와서 하더라도 그게 일본 사람이 하는 거면은 아무리 일본 사람 의식적으로는
서양화를 하겠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1번씩 근대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를 굳이 일본에 이거는 지키겠다 하면서 요것만 일부
오겠다 그러면은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는
양무운동과 어 그 메이지 유신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무운동의 성과는 놀라왔습니다
1864년에 이홍장이 상소를 올립니다이 상에는 양무운동의 정신이
아주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조금만 길지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니까 1860년에
신정을 통해서 정권을 중용이 된 이장이 자 왜 우리가 약무 운동을 해야 되는지 개국을 해야 되는지
개화를 해야 되는지 이제 설명하는 상입니다 지금의 일본은 바로 명나라
때의 외 외입 즉 일본은 이미 개국을 해서 서양 거를 배우고 있다라는 걸이
용장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상소를 올리면서 황제한테 상소를 올리면서 1번 이해를 드은
겁니다 명나라 때 외구 아닙니까 서양 국가와는 거리가 가 멀고 중국과는
가깝습니다 우리가 자립할 수 있다면 장차 고려로 하여금 우리를 따르게
하고 서양인의 단점을 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면
일본은 또한 저들을 효우회 저들을 이제 약간 이용해서 서양인의 이수
이수라는게 뭡니까이 부의 근원 어 어쨌든 하여튼 그 그 이익을 나눠가질
것입니다 일본은 해외에 보잘 것 없는 소국인도 오히려 때에 맞게 전처를
고쳐서 옛날 법들을 고쳐서 체제를 고쳐서 법을 모방할 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국은 궁함이 그게
달하면 통하는 이치 궁주 통의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아마도 성대하게 계획을
변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니까 고려로 하여금 조선은 우리를 따르게
하고 일본은 우리가 배워야 된 일본 같이 우리를 돼야 된다 왜냐면 아니면은 일본이 서하고 손을 잡고서 우리를
이길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건 안 되니까 우리도 빨리 개혁을 세워서 일본과
같이 어 그 약무 운동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자이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저는 생각한 생각건데
중국이 자각하길 원한다면 외국의이기를 학습하는 것이 최선이에요 외국의이기를
학습하고자 한다면 기계를 만드는 기계를 구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여러분
기계를 만드는 기계죠 그러니까 기계만 도입하면 안 되고 그 기계를 만드는
공장지도 도입해야 된다는 얘기죠 자 여기까지는 참 너무나 맞는
얘기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다음에 이홍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제조법 배울뿐 그 기술자들을 모두 등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계를 만드는 기계와 일을
제조하는 사람들을 찾고자 한다면 혹은 일과를 전설 아여 선비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국 선비들 사이한 이런 거를 가리키는 과목을 개설해서 그 사람들한테 가르키면 되지
않게 될 겁니다 서양의 기술자들 그 과학 기술자들 다 불러 들려올 필요
없습니다 그들한테 배울 필요 없습니다 선비들을 죽을 때까지 부기 공명의 목표로 유혹한다면 사업을 이루고
기술을 정밀하게 연마하며 재주를 가진 자들을 또한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선비들에게 부기 공명을 약속을 하면은 그 사람들이 와서 선비들이 와서 과학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번에 어떻합니까 그까
사무라이 다이묘 신분 계급 자체를 없애버립니다 아예 무사고 뭐고 다
없애 버리고 완전히 근대국가 국민으로서 탈바꿈을 시켜서 다 공평한
사람들을 통해이라고 해버리면서 신분의 귀천 없이 똑같이
학교를 보내고 똑같이 군대 보내고 똑같은 국민 대우를 해 주면서 그중에서 제주 개개인의 능력 있는
사람들 취해 가지고 국가를 건설을 해 나가는 반면에 지금이 형장에 이홍장이
주문하는 건 뭡니까 대부 체제 그대로 놔두고 그 사대부들 중에서 일부를
서양에 공장 만드는 공장의 기술만 좀 배우게 하면은 우리가 충분히 이거를
따라갈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 이게 근본적인 패착이라고 패착이었다 생각을 하고 중국의
근대화가 성공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게 양무 운동입니다 자 우선 첫 번째가
18 55년에 해관을 설립합니다 여러분 해관이는게 뭐냐면요 이제
드디어 서양이 와서 열개 한 구를 열어라 그래서
와서 장사를 하겠다 그럼 이제 장사를 한다라는게 뭐냐 교역을 무역을 한다 그럼 무역은 외국 물건이 들어오고
우리 물건이 나가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럼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당연하게 관세를 먹기지 않습니까
관세를 매기는데 지금 그런 개념이 없었던 거죠 중국에는 조공무역 같은게 무슨 관세를 매기고 그럽니까 그랬는데
이제 관세를 매겨야 되는 거를 알게 되는 거죠 서양 국가들이 아 서로가
물품을 수입할 때는 관세를 매기고 거기에서 그 관세를 가지고 정부의 그
예산으로 쓰고 이러는 거고 재정으로 충당하고 아 이렇게 해서 국부를 늘려가는거나 이제 처음으로 이제 알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세관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일이 이게 보통 일이 아니 이죠 중국같이 거대한 경제에서는
그래서 그때에 영국 사람을 고용을 합니다 처음에는 레이시 넬슨 레이라는
사람을 대청 황가 해관 총 세무사 여러분 중국의 세관이 있지만 대청의
황가 황제 집안의 세무 사입니다 어디까지나 황제의 소유물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총 세무사가이 사람이 1855년에 1863년 때였고
이대가 이제 로버트 하트라는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이 사람은
1863년에 1911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중국의 세관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유능한 유럽의 유능한 관리들을 다 등용을 하고 하면서
깨끗하게 철저하게이 세관을 유지를
하면서 중국 황실의 엄청난 재정적인
이윤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이 하트가 또 고종이 나중에 요청을 하니까
멜렌도 아는 독일 사람을 고용을 해서 그 멜렌도 그를 조선에 파견을 해서
조선의 해관을 하 하트랑 레이와 하트가
중국의 해관을 만들듯이 조선에도 그런 해관을 만들어라 강화도 조약을 하고
어 조미수호통상 조약을 하면서 개을 했으니까 거기에 가서 하라라고 사실 파견하는 것도 바로이 로버트
하트입니다 그러면 로버트 하트 같은 사람이 해관을 통해서 엄청난 재정
수익을 정부에 다 조달을 해 주기 시작하니까 재정이 무너지고 있던
경제가 무너지고 있던 전통 청나라 조정이 다시 활력을 되찾을 수 있게
되고 그 돈을 대표적으로 여기 사진에서 보시는 후조 복주에 있는
마미 선정 창이라는 집금 사진으로 보시더라도 마치 포항
제철과 울산 현대 조선소를 합쳐 놓은과 같은 엄청난 기기창 기계
공장과 조선소를 겸하는 그런 공장을 세웁니다 이런 공장을 여러 군데
세웁니다 그다음에 이런 것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뭐 제가 이와쿠라 사절단
얘기도 했었고 일찌감치 유학을 보냈다는 얘기를 하는데요 중국도 그걸 따라서 합니다 중국도 따라서 유럽에
미국의 유학생을 보냈는데요 그 미국 유학생이 최초로 가는게 1872년에
보내집니다 여기 사진에 보시는 어 그 어린 아이들이 누구냐면 바로
1872년에 보내는 최초로 미국에 보내진 학생들입니다 어 근데 그때 그
학생단 인솔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여기 사진에 나오는 용잉 우리 발음으로 하면 용병이
되겠습니다이 사람이 어 어 광동 출신인데 어 미국에서 대학을 나옵니다
1854년에 예일 대학을 졸업합니다 중국 사람으로서 최초로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홍장이 용병한테 부탁을 해서 용병이 학생들을
추려서 그 학생들을 데리고 지금 어 커네티컷 주에 있는 하트포드의 데리고
가서 그 하트포드 있는 어 그 학교를 설립을 하고 거기에서 서양 선생님
님들을 채용을 해서 어 거기서 이제 공부를 시킵니다 그래서 9년 동안
거기서 공부를 시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부 다이 머리 변발을 하고 그러니까 그 청나라 식으로 그 머리를
다 뛰고 다니고 그런 거를 그걸 꼭 해야 되고 뭐 한문도 공부를 해야 되고 서양 권만 공부하는게 이런 걸
했었는데 이제 결국은 나중에는 다 서양적인 걸 받아들이게 됐는데 결국은
아 이렇게 아이들을 서양화 키는 아이들을 키워서 안 되겠다고 해서
청나라 정부가 9년 만에 프로그램을 중단시켜 버리고 거기가 있던 학생들을
전부 다 귀국을 시켜 버립니다 근데 여기 사진 또 하나 보시면은 이게 누구 뭐냐면은 필립스 아카데미 앤버
유명한 그 미국의 뭐 조지부시 대통령이 나오고 한 그 유명한 그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인 거기에 그
여기 사진의 맨 오른쪽 앞에 보면은 이제 중국 학생이 다니고 있었고 그렇게 중국 학생들이 야구를
잘했답니다 그래서 이때에 야구를 배웁니다 중국이 뭐 지금 대만이 아직도 야구를 잘하고
그러는데요 이때에 야구를 하는 전통을 배웠고 결국은 뭡니까
어 일본같이 서양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근대화에 실패하는
떠 또다른 이유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또 하나는 또 하나가이 양무운동을 통해서 중국이
성공한 부분이 뭐냐면요 영토를 지켜내는 겁니다 사실 그 지금 우리가
신장 위구르 아고 알고 있는 티베 그쪽이 그쪽에 그 막 거대한
영토는 청나라 이전까지는 중국의 역사에서 항상 서장 뭐 이런 그렇죠
서역 서장 서은 인도지 하여튼 서장이 서장 지구라 그랬는데 거의 독립
왕국이었던 중국 왕조가 제대로 통치를 못했었습니다 그거를 제대로 통치하는게
청나라 때입니다 그래서 그근데 그때에 이제 태평 의 난이 일어나고 그랬을
때에 이때이 지역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슬람
이슬람 그 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태평 천국이 난이
일어나니까 역시 청에 저항하면서 동간의 반란이라는 유명한 그 이슬람
계의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좌종당이라는 장군은 이거를 쳐야 된다 왜냐면 그쪽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서북 적이 항상 중국의 안보의 핵심은 그쪽이 그게
뚫리면 서쪽에서 어 여러 야만족들이 이제 쳐들어온다 이렇게 돼 있었기
때문에 반면에 이홍장이 뭐라 그러냐면 이홍장은 아니다 해양 방어를 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아까 마미 선정 같은 걸 짓고 해양 해군을 기르고 해야 되는데 아까 그 하트 같은 사람이 그
해관을 잘 운영을 해서 많은 재정 충당을 해주고 있는데 그럼이 돈을 쓰냐에 대해서 둔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좌종당 우리가 육군을 끌고 가서 이걸 반란을 진압해야 된다라는 거고
이홍장은 아유 그건 됐다 내버렸다 그 쓸데없는 땅이다라고 하면서 우리 해양 방어를 위해서 해군에 투자를 좀 해
달라 그랬는데 결국은 좌종당이 이깁니다 서태후가 좌종당 손을 들어 줘서 좌종당이 군대를 이끌고가 갖고
놀랍게 그 난을 정 평정을 하고 신장 위를 그 다시 복속을 시키고 처음으로
그때 신장위구르 그 그 완전히 중국의 영토
공식적인 어 성이 돼 버립니다 자 그래서 이걸 왜 말씀드리면
그렇게함으로써 사실은 한편으로는 해양 방어가 많이 약화가 됩니다 중국이
해군력이 결코 세지는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보면요 그때의 신장위 구루를 점령을 점거를
했기 때문에 복속을 시켰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지도는 바로 청 말기의
좌종당이 만들어 놓은 지도입니다 사실 중국 사람들이 그래서 좌종당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이거는 혹시 미국에 가시면 미국에가 있는 미국의 중국 식당들 가면 거기에 가면은
제너럴 조스 치킨이라는 요리가 꼭 있습니다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근데
저는 그 제너럴 스 치이 뭔지 제너럴 가 누군지 몰랐는데 그게 바로 좌종당
이랍니다 그만큼 청나라 사람들 중국 사람들은 좌종당 대단한 어 장군으로
이제 그 생각을 그 여겼고 그 이유는 이제 신장 위고를 차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이 양문 운동이 이런 성취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실패로 여실이 드러나는게 바로 1884년에 일어나는 청불 전쟁입니다
프랑스가 지금 안남 월남 지역을 복을 시키겠다고 했는데 그때 안남도 중국의
속방이었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속방 이었듯이 똑같이 속방 이었기 때문에
근데 그거를 이제 막으려고 중국의 군대를 보내고 하지만은 결국은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마미 선정 창에서 만들었던 그
군함들 이거를 동원을 해 갖고 프랑스 함대 바로 후조 앞에서 앞바다에서
마강 회전이라는 그 해전을 벌립니다 그런데요 전투가 개시되고 나서
7분만에 7분만에 중국의 전함들이 다 격침이 됩니다 그니까 배는 좋았는지 몰라도
그걸 운영하고 그 전투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던 거죠 사실 어 그
완전히 양동이 실패로 돌아가는 어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근
이게 제가 사진 한 하나만 더 보여 드리면 이게 역사가 얼마나 우리가 재밌다라는 거 여러 가지가 연결이
된다는 걸 제가 그냥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런데요 이때에 마강 해전에서 중국의 남양 수사 지휘한
사람이 장태준입니다 자 여러분 북양함대 북양 함대는 이홍장이 키웠던
해군이 남양 수사 남양 해군이 있습니다 그럼 남양 해군의 그때의
장수가 누구냐면 장륜이라는 사람입니다이 사람은 전혀 군인도 아니고 전쟁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입니다 그냥 근데이 사람이 전쟁에서는 참패를 하고 나서도
참패를하고나 갖고 보고서를 썼는데 보고서를 하도 기가 막히게 글재주가
있어서 기가막히게 써 갖고 그거를 조종해서 베이징에 조종해서 그걸 읽어 봤을 때 자기네가 이겼는지 알았대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패전을 한 거였어요 그래서 뭐 귀양을 보내야 된다 죽여야
된다 다 뺏기고 그랬는데 참 특이한게 뭐냐면 이홍장이 나중에이 장패 사위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장패 그 글제주 있는 장륜 손녀가
누구냐 하면은 장 아이린입니다 아일린 창이라고 색계라는 유명한 영화 있지 않습니까
그 색계의 원작을 쓴게 바로 또 아일린 창입니다 그게
장륜 손녀이고 어 그 이홍장의 손녀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참 근대를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국은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고 어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어 근데 저는 근본적인 거는 결국은 중체서용론
실패다 그 개념 자체가 중국 거를 유지하는데 하면서 서양 거를 받아들인다 안 된다고 저는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체 서형의 실패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게 워렌 여기
인이라고 우리 말로는이 지만은 월이라고 학자입니다
몽골계 학자 학자이고 청나라 최고의 학자이고 황제의 스승입니다 근데이
사람이 뭐라고 유명한 얘기를 합니다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은 주비
산경과 춘추에 비롯된 것이고 화학은 서양의 화학은 서경 주소 홍보과
회남자 나온 것이다 물리학은 항창 아에서 나왔고 광물학 서경에서 광학과
기계 기계 학은 묵자의 전기는 관음자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중국에서 원래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서양의 거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래 우리한테서 나온 거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고 따라가는 거 아무 문제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다 우리가 먼저다
우리가 오래된 것이다 아무 소용 없는 얘기입니다 무엇이 더 과학적이고 보편 타당한 것이고 한
것인가를 우리가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됩니다 저는 그거를 못했기 때문에 에 운동이 실패를 했다고 봅니다 자
그래서 동도서기 화혼 양제 중체서용 저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서양 거를 하려 그러면 서양 거 그냥 받아들여야 됩니다 자꾸 우리 거를
유지하면서 일부를 받아들인다 문명이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려면 그 밑에 깔려
있는 지식 체계와 모든 거를 받아들여야지 그거는 안 받아들이고 도덕 체계는 안 받아드리고 뭐는 안받
고 이것만 받아들인다 기술만 그 되질 않습니다 사실 어 그 동도서기
중체서용의 그 허상에서 그 허구적인 논리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벗어나서 서양 거를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거하면서 근대화에 결국 결국 어 성공하고 전통도 잘 유지하는 것이
그게 번이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거에 그 비하면 어
중국은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그러면서 어 중국대
일본 조선으로 보면은 위정 척사 파대 개화파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의정 척사 파들이 맞 맞았습니다 서양 거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은
결국은 다 몰려 들어와서 우리 거 다 없어진다고 하는게 맞는 얘기죠 논리적으로
그리고 개화파는 그런데 우리 거를 지키려면 사실 우리 거를 부분적으로 지키려고 하는게 아니라 서양 거를 다
근대적인 걸 다 받아들여야지 우리 거도 지킬 수 있다라는 참 모순된 거
같지만은 바로이 논리를 논리가 근대화 서구화를 하려면 제대로
해하는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한 것이
일본이고 아니다 다 있 석이다
중이라는 논리에 양무운동을 버렸던 중국은 실패하게
됩니다네 오늘은 어 중국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를 알아봤습니다 어 다음
시간에는 그러면 일본을 따라가고 싶어서 일본의 문명화
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서 어 그거를 조 시키고 싶어했던 개화파 그
개화파를 중심으로 조선이 어떻게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조선이 어떻게 개국하게 되었는지 다음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 추적해 보는 어 한국인의 탄생 어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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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6회에서 함재봉은 중국이 일본보다 먼저 서구와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에 참담하게 실패한 원인을 추적하며, 그 핵심적인 이유를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거부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타협적 사상에서 찾는다.
(1) 아편전쟁과 세계관의 충돌
개항과 안일한 인식: 중국은 영국과의 무역 역조(차, 도자기 수입과 은의 유출)로 촉발된 1차 아편전쟁(1842년)을 겪으며 홍콩을 내주고 개항했지만, 이를 체제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 아닌 변방의 사소한 문제로 치부했다.
문명적 굴욕과 원명원 소실: 외교관 상주와 대등한 국가 간 관계를 거부하던 중국은 2차 아편전쟁(1856~1860년)을 맞이했다. 서양 사신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조공 예를 강요하고 협상단을 고문해 죽인 대가로, 영불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고 인류 문명의 정수로 불리던 원명원이 불타는 치욕을 겪었다.
(2) 신유정변과 양무운동의 전개
권력 재편과 자강(自强) 모색: 열하(피서산장)로 피난 갔던 함풍제가 죽자, 서태후는 궁정 쿠데타(신유정변)를 일으켜 수구파 대신들을 숙청하고 이홍장, 증국번, 좌종당 등을 등용했다. 주역에서 유래한 '자강'을 구호로 내세우며 본격적인 서구 문물 수용(양무운동)을 시작했다.
양무운동의 성과: 영국인 로버트 하트 등에게 총세무사를 맡겨 해관을 운영함으로써 막대한 재정을 확보했다. 이 자금으로 마미선정창 같은 거대한 근대식 조선소와 병기창을 세웠고, 미국에 최초로 유학생(용홍 인솔)을 파견했으며, 좌종당의 활약으로 신장 위구르 지역을 영토로 복속시키는 성과도 내었다.
(3) 근본적 패착: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
기술만 탐한 엘리트주의: 이홍장은 서양의 기계와 제조법만 들여오면 될 뿐, 서양의 기술자들을 전면적으로 기용하거나 사대부 중심의 전통 체제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무사 계급을 철폐하고 신분제 자체를 해체하며 전면적 서구화를 단행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결정적으로 대비되는 지점이다.
청불전쟁의 참패와 정신승리: 막대한 돈을 들여 해군과 함대를 키웠음에도 1884년 청불전쟁 당시 마강해전에서 청나라 함대는 7분 만에 전멸했다. 완원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은 서양의 수학과 물리학이 모두 고대 중국 고전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우월감에 빠져 있었다.
2. 평론: 절충주의의 환상과 문명사적 맹점
강좌 6회는 '전통을 지키며 기술만 수용하겠다'는 절충주의적 태도가 어떻게 국가의 자멸을 초래하는지 중국의 사례를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첫째, <중체서용> 논리의 허구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핵심적인 사상과 제도(체)는 중국의 것을 고집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무기(용)만 덧붙이겠다는 양무운동의 논리가 오히려 근대화도 실패하고 전통도 잃게 만든 패착이었음을 지적한다. 반면 제도의 서구화를 전면 수용한 일본이 결과적으로 자기 국혼과 전통을 훨씬 더 잘 보존했다는 역설은 매우 설득력 있는 문명사적 통찰이다.
둘째, 체제 혁신 없는 하드웨어 도입의 맹점을 증명한다.
해관을 통한 재정 확충이나 거대한 조선소 건립 등 가시적인 하드웨어 성과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운용할 평등한 국민 국가 시스템이나 인적 자원의 혁신(소프트웨어)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강해전에서 허무하게 패배했음을 잘 짚어냈다. 기술 혁신은 사회 구조의 혁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셋째, 세계관의 객관화 실패가 낳은 비극의 강조이다.
서양 과학이 모두 중국 고전에서 파생되었다며 자위했던 완원의 태도나, 대등한 외교를 거부하고 조공 질서에 매달렸던 청나라 조정의 모습은, 세계 대세를 객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는 자문화 중심주의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6회 강연은 근대화라는 거대한 문명적 파도 앞에서는 어설픈 절충인 <중체서용>이나 <동도서기>가 통하지 않으며, 체제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뼈아픈 결단 없이는 진정한 생존과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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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회
<중국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요약
• 이번 강의는 지난 시간의 일본 편에 이어, "중국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를 다룬다. 함재봉은 19세기 중반 중국과 일본은 모두 서양 제국주의의 압력을 받았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방향으로 나아간 반면, 청나라는 기존 중화질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설명한다.
• 그는 먼저 청나라가 결코 후진국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19세기 초까지 중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권 가운데 하나였으며, 차·비단·도자기 등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은 중국 상품을 원했지만 중국은 영국 상품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이 무역 불균형이 결국 아편무역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 영국은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청 정부는 아편을 금지했지만 영국은 이를 무역 자유의 문제로 보았고, 결국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이 발발하였다. 함재봉은 중국이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 군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 제1차 아편전쟁 패배 후에도 청나라는 체제의 근본적 개혁보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어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패배하면서 서구 열강은 북경까지 진입하였고, 중국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조차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 강의는 함풍제와 서태후를 중심으로 청나라 정치를 설명한다.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과 보수적 정치문화가 개혁을 가로막았으며, 특히 서태후가 개혁보다 권력 유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다만 그는 서태후 개인보다 당시 정치체제 전체의 보수성을 더 큰 원인으로 본다.
• 태평천국운동은 청나라를 근본적으로 흔든 사건이었다. 수천만 명이 희생될 정도의 내전 속에서 청 정부는 국가 개혁보다 정권 유지와 반란 진압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였다. 이후 양무운동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근본적 개혁이 아니라 군사기술과 일부 산업만 도입하는 제한적 개혁이었다고 평가한다.
• 양무운동은 "중국의 도는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 배우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원리에 기초하였다. 군함과 무기, 공장을 건설했지만 정치제도와 교육제도, 사회질서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함재봉은 이것이 일본과 가장 큰 차이라고 본다. 일본은 제도까지 바꾸었지만 중국은 기술만 도입하려 했다는 것이다.
• 그는 중국이 서양 과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서양의 정치철학과 사회제도는 거부했다고 설명한다. 입헌정치, 시민사회, 근대 교육, 법치국가 등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근대국가 형성을 지연시켰다고 주장한다.
• 청일전쟁(1894~1895)은 이러한 차이를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 군대와 국가를 건설한 반면, 청나라는 부분적인 군사 개혁에 머물렀다. 그 결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였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 강의의 핵심 명제는 "근대화는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제도를 함께 바꾸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유교적 질서를 유지한 채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려 했고, 일본은 정치·교육·군사·행정까지 모두 개혁하였다. 이것이 양국의 운명을 갈랐다고 정리한다.
•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비교가 곧 조선의 문제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조선 역시 위정척사와 중체서용에 가까운 사고를 가졌으며, 일본처럼 전면적인 제도 개혁을 선택하지 못했다. 다음 강의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조선의 개화파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하며 강의를 마친다.
평론
이번 강의는 중국과 일본을 비교하여 '기술의 도입'과 '제도의 개혁'을 구분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양무운동의 한계를 "중체서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근대화는 단순한 산업화가 아니라 국가 운영 원리 자체의 변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청나라의 실패를 지나치게 보수적 정치문화와 서태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역사학에서는 인구 증가와 재정 압박, 지방군의 성장, 세계경제의 구조 변화,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력 등 복합적 요인을 함께 분석한다. 또한 양무운동 역시 철도·조선·군수산업·외교·교육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를 단순한 실패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연구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강의는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부분적 개혁'과 '전면적 개혁'이라는 대비로 명확하게 설명함으로써, 이후 등장하는 조선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대립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하는 강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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