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앞에 있으면서 뒤에도 있는 백면서생이 큰일 도모하다”

백낙청은 대한민국 최고 명문가의 일원으로 독재와 분단체제에 맞서는 실천적 삶을 선택했다. 그는 뛰어난 학자, 문학비평가이면서 지혜로운 전략가로 민족운동의 중심에서 싸웠다. 그는 모든 종류의 ‘맹목’에 반대했고, 그 대가로 좌우 양쪽의 극단론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그가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사상적 유연성이 민족운동, 민주화운동에 새 지평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자신을 문학평론가로 불러 달라고 주문한다. 서울대 영문학 교수로서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오랜 편집인으로, 베스트셀러를 양산한 출판기획가로, 통일운동가·시민운동가·정치평론가로, 종국에는 이 시대의 걸출한 지성으로 종합적 평가의 대단원을 맞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노무현 정부 초기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이해찬 이후의 차기 총리의 한 후보로 거론됐거나 거론되는 것은 그런 평가의 대단원치고는 다소 초라한 대접인지도 모른다. 백낙청이라는 이름 뒤에 항상 따르는 ‘선생’이라는 존칭대명사가 어색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평생의 화두로 생각한 영국의 소설가 D. H. 로런스 연구를 어떻게 마무리지을까를 염두에 두며 살고 있다. 그는 역시 천생 문학평론가다. 그는 2003년 2월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선 하나는 내가 영문학도로서 로런스(D. H. Lawrence)를 전공했고 박사논문도 썼는데… 그에 관한 글은 이것저것 발표했지만 책은 아직 한 권도 못 냈거든요. 그런데 그 일을 자꾸 미루다 보니 그동안 써놓은 글을 그냥 모아 논문집 같은 것을 내기는 싫어지고, 완전히 손을 봐서 지금 시점에서 로런스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왜 오늘까지 로런스를 붙들고 있는가, 그런 것을 일반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책을 만들려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에 매이다 보니 문학평론가로서는 휴업상태였다는 것이 그의 자기진단이다. 그것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운동선수가 한번 은퇴했다 컴백하는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고민거리다. 트레이닝을 한참 하고서야 가능한 일인데 그는 아직 훈련캠프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그는 그렇게 바빴고, 지금도 그는 바쁘다. “군대에 가면 갔지 미국이 싫었다” 그는 10월14일 현재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가 있다. ‘한국과 독일의 민주주의, 통일과 평화’를 주제로 한·독 학술대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토론회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받은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부대행사다. ‘한·독 최고 지성인의 의견 및 담론 교환’이 학술회의의 목표이고, 백낙청은 김우창·최장집·박명림 교수와 소설가 황석영·김원일 씨, 인권대사 강금실 씨 등과 함께 이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 토론회의 발표문을 작성하고 영역하는 일에도 손수 매달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완성할 로런스 연구서의 출간이 언제까지 미뤄질지 알 수 없다. 

▶6·15 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백낙청 상임대표(오른쪽)와 북측 안경호 위원장이 지난 6월16일 고양종합경기장에서 열린 남북 여자축구경기 도중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지난 6월과 7월에도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6월에는 6·15 공동행사 남측준비위 상임대표를 맡아 평양을 방문했고, 7월에는 평양·백두산·묘향산 등지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남측 대표단장인 고은 시인과 함께 참석했다. 프랑크푸르트로 출국하기 하루 전인 10월12일에는 시민방송 제2기 이사장 자리에 재취임하는 의욕과 ‘에너지’를 보여줬다. 그는 현재 이해찬 총리 이후의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고 있다. 특히 당외 인사가 물망에 오를 경우 백낙청은 가능성 1순위로 꼽힌다.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김근태 장관의 당 복귀가 실현될 경우 내년 지방선거와 국내 정치는 당과 내각이 각각 주도하게 된다. 정국의 이런 흐름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문제 해결,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에 남은 임기를 ‘올인’한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복안이다. ‘백낙청 총리론’은 그러한 임기 말 구상의 맥락 속에서 논의된 카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백낙청은 지난 5월 말 발간된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주식회사 한국’의 CEO 박정희에 대해 민주화 진영이 충분한 인정을 안 해준 것이 사실”이라고 써서 뉴스메이커가 됐다. 이런 표현은 매스컴을 타면서 ‘변주·증폭’돼 유신을 반대하다 해직까지 당했던 진보 지성인의 ‘박정희 끌어안기’라는 식으로 보도됐다. 그는 왜 지금 시점에서 박정희를 끌어안는가? 그는 그 ‘전후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글은 지난해 11월 호주에서 열린 ‘박정희 시대 재평가’라는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것이다. 당시 박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을 지낸 오원철 씨가 기조연설을 했다. 놀랍게도 한국 교수들 중에는 박정희 찬미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 기조연설자로 나선 내가 현장에서 다시 글을 써서 발표했다. ‘좋다, 최고경영자로서 잘한 것 인정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최고경영자와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다르고, 역사를 평가할 때 그런 측면만 봐서는 안 된다’며 반론을 펼친 것이다.” 그는 지난해 8월 <중앙일보> 시평에서 발전에 대한 박정희의 공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발전은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는 표현도 썼다. 그의 이런 주장은 “교묘한 부국강병주의나 개발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여러 학자의 비판을 들었다. 그의 고민에는 일정한 ‘정세적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반 대중이 ‘박정희를 하나부터 열까지 나쁘다고 하는 민주화 세력을 어떻게 믿느냐’는 정서를 갖는 것은, 박정희 유산을 청산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도 말했다.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그 변증법적 지향과 ‘제3의 지평 열기’를 강조하는 백낙청 특유의 논리 전개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백낙청은 1938년 1월10일 모친의 친정인 대구에서 6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 백붕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인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의 동생이다. 두 형제 모두 6·25 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었으나 북에서 사망한 사실이 최근 북한 당국을 통해 알려졌다.<상자기사 참조> 부친의 고향인 평북 정주의 실향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수원 백씨 문중은 ‘정주 일대의 유지로 대대로 선덕을 베푼 선비 집안’이었다. 부친 백붕제는 교토(京都)제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고시 양과(사법·행정)에 합격한 수재로 해방 전에는 지방 관리로, 해방 후에는 변호사로 일했다. 백낙청은 부친의 전근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1학년 때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평북 정주의 보통학교를 각각 1학기씩 수학했다. 2학년 때 서울로 가 제동초등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브라운대학을 마치고 하버드에 진학해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때 한국으로 돌아와 군에 입대하는데, 당시 그의 입대는 ‘자진입대를 위해 귀국한 하버드 석사’로 과장되게 미화되면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신문에 소설을 써놓았더군요. 군장성들이 읽고 감격했더랍니다. 훈련을 마치고 국방부에 차출돼 차관실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장관실에 있던 소령이 5·16 이후 최고회의로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갔지요. 당시에는 유학 가려는 사람들을 위해 1년 만에 병역을 마치고 귀휴시켜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귀휴 후 일정 기간 내에 입학 수속을 마치고 도미하면 제대 명령이 떨어지는 조치였어요. 저도 귀휴 조치로 1년 만에 제대할 수 있었습니다. <창비> 창간한 28세 청년의 기개 제가 처음 가서 대학 4년 마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 갔다 그 첫해에 귀국을 결심했거든요. 미국생활이 지긋지긋했어요. 그런데 군대를 안 마치고 갔기 때문에 그때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 할 형편이었지요. 제 동기나 주변의 동학들은 그것이 큰 이유가 되어 30, 40대까지 귀국을 안 하다 아예 미국에 눌러앉은 사람도 많은데, 저는 군대에 가면 갔지-물론 군대가 어떤 데인지 몰라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미국에서 더 살기는 싫어 귀국했던 겁니다.” 그렇게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62년 다시 하버드대학으로 돌아가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서울대에 교수 자리가 나자 귀국했다. 그는 1963년부터 서울대 전임강사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10월12일 백낙청 RTV시민방송 이사장이 개국 3주년을 맞아 남산한옥마을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백낙청이 부임한 1960년대는 서울대 영문과의 발전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다. 이양하 교수가 1963년 세상을 떠났고 권중휘 교수가 한국외국어대 학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를 이어 문상득·김우창·백낙청 교수 등이 1962∼1963년, 이경식·김종운 교수가 1965∼1966년에 부임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이들 젊은 교수의 등장으로 영문학과의 연구와 교육은 단연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됐다. 학생들에 대한 독서 요구량도 절대적으로 많아졌고, 학생들이 써낸 논문에 자세한 논평이 달려 되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강의 내용도 다양하고 충실해졌으며, 이와 같은 고무적이고 참신한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나름대로 영어연극을 정기적으로 공연하는가 하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파울로니아(Paulownia)> 등 연구지와 영자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개교 이래 20년간의 열악한 상황에 비하면 1960년대 후반기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역사에서 하나의 작은 황금기였다. 희망의 이 시기는 1970년대 중반 관악산으로 캠퍼스를 옮길 때까지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그 황금시기는 묘하게도 백낙청의 해직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계간지 <창작과비평>은 백낙청의 분신이다. <창비>는 백낙청 문학비평의 거대한 호수이면서 그 호수는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이라는 물로 채워져 있다. <창비> 없는 백낙청을 논하기 힘들거니와 <창비> 없는 한국 현대문학사를 논하기도 힘들다. 백낙청은 <창비>를 통해 자신의 문학비평·사회변혁론·민족통일론을 설파했고, 지금은 거목으로 성장한 숱한 문인을 배출했다. 백낙청은 1966년 학술문예지 <창작과비평>을 계간 형식으로 창간했다. <사상계>가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비판적 지성의 산실이었다면 <창비>는 1970∼80년대의 실천적 지성의 요람이었다. <창비>는 처음 2,000권을 찍었다. 통권 14호가 1만 권을 돌파한 시점인 1969년 백낙청은 다시 하버드로 떠나 박사 학위를 받고 1972년 귀국해 본격적인 문학운동을 시작했다. 베이스캠프는 물론 <창비>였다. 그가 <창비>를 계간지로 구상한 것은 기존 잡지보다 수준을 높이면서 재정적 압박을 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다. 열악했던 당시 문단 사정상 월간 잡지는 태작에 의존하기 쉽고 경영상의 수지를 맞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창비>가 창간될 무렵 문단은 4·19를 직접 몸으로 부닥친 세대가 주도했다. 그 주역은 김현·김승옥·김치수·이청준·염무웅·박태순 등이었다. 이들은 데모하고 술 먹고 골방에서 고민하며 그 시대를 살았다. 백낙청은 그러나 4·19 때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나중에 4·19세대의 상당수가 동시대의 잡지 <문학과지성>으로 가버리고, 미국 유학파인 백낙청이 가장 강성인 <창비>를 만든 것은 아이러니다. 그 아이러니를 백낙청의 4·19 콤플렉스로 분석한 호사가도 있다. 이 점에 대한 백낙청의 해명은 담백하고 단순하다. “창간 무렵에는 4·19세대 문인들과 잘 몰랐다. 얼마 후 염무웅 같은 이가 <창비>에 동참했고, 김현 씨나 조동일 교수 같은 이도 초창기부터 기고했다. 나는 미국 유학파였지만 나머지는 4·19세대였다. 그러다 다른 잡지를 해보겠다고 그들이 나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32쪽, 정가 70원짜리 <창비>가 1966년 1월15일 태어났다.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는 “낯이 설 수밖에 없는 가로짜기 조판인데다 논문은 길고 헷갈려 쉽게 정이 가는 잡지는 아니었다”는 첫 대면의 인상기를 남겼다. 리영희 교수는 “중국의 혁명가 진독수가 만들었던 <신청년>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는 소감을 밝힌 적이 있다. 어쨌든 <창비>는 화제가 됐다. 백낙청이라는 28세의 청년 논객은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도발적인 논문으로 한국 문단에 충격을 줬다. 이 논문의 요지는 3년 후인 1969년 ‘시민문학론’이라는 이론으로 정리돼 발표된다. 

▶1988년 2월27일 백낙청 교수가 3년 만에 회사 명의를 회복한 ‘창작과 비평사’ 현판식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당시 편집인 백 교수, 김윤수 사장, 이사영 부사장.

“당시에는 소시민 의식을 강조하고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민족문제라든가 역사적 현실을 이야기하면 촌스럽게 보고, 거대 서사보다 작은 이야기에 몰두해야 한다는 요즘의 추세와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시민문학은 그런 소시민 의식에 대한 반발이었고 참여문학에 대한 내 나름의 입장 정리였다.” 당시 백낙청에 의해 소시민문학으로 지목되었던 것이 김승옥과 이청준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대학 1학년 때 4·19를 겪은 김승옥은 감각적 문장으로 1960년대 중반 한국사회의 정신적 쇠락을 그려내면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백낙청에게 그 감수성은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었다. 백낙청이 당시 시민문학의 전범으로 내세운 작가들은 한용운과 김수영·신동엽이었다. 초창기 백낙청이 도움을 받은 시인은 김수영이었지만 점차 무게중심은 신동엽 쪽으로 옮겨갔다. 1969년 백낙청이 하버드로 떠나고 염무웅이 <창비>를 주도하면서 좀 더 민중적인 방향으로 체질을 개선할 때 신동엽은 김수영보다 더 필요한 존재로 부각됐다. “누가 더 위대한 시인인가를 떠나 신동엽을 이야기하는 것이 당시 우리의 방향과 맞았다”는 것이 백낙청의 최근 회고다. 잊을 수 없는 시인들 이후 <창비>의 그늘로 들어온 문인은 끝없이 이어진다. 소설가 이호철 씨가 <고여 있는 바닥-어느 이발소에서>를 창간호에 발표한 이래 이문구·방영웅·황석영·천승세·윤흥길·현기영·고은·신경림·조태일·김정환·김용택 등이 <창비>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구축했다. 백낙청에게는 특별히 잊을 수 없는 시인들이 있다. 김남주·김지하·박노해 등이 그들이다. 1974년 처음 만난 김남주 시인(작고)은 시 정신과 시적 테크닉 모두 범상치 않았다. ‘물건을 발굴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74년 여름호에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게재하고서야 그를 만났다. “촌놈 인상인데 첫 대면부터 진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 백낙청의 감상이다. 김남주는 그 후 광주에서 서점 ‘카프카’를 운영하며 창비사의 사업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백낙청은 김남주의 시에는 반했지만 사업 수완에는 절망했다. “<창비>의 책을 많이 보내줬는데 장사 소질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서점이 광주지역 문학패들이 와서 술 먹던 장소여서 사업은 엉망이었고 책 대금도 많이 받지 못했다.” 김지하의 시는 1975년이 돼서야 실렸다. <오적(五敵)>의 시인 김지하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에 어디에든 작품을 싣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1967년 김지하가 아직 무명이었을 때 조동일이 지하의 시 한 묶음을 들고 찾아온 적이 있다. 백낙청은 이때 그 시들을 싣지 않았고, 이 일 때문에 백낙청과 조동일은 서먹한 사이가 됐다. “자신이 없어서 김수영 시인에게 보여줬는데, 당시 그는 서정성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이 굉장히 심할 때였다. 김지하 시를 보더니 ‘이용악 같은 이들 시를 보면 이런 것이 많다’고 평가절하했다. 나보다 시를 훨씬 잘 아는 분의 말씀이어서 게재를 포기했다. 편집자로서는 큰 실수를 했고, 훌륭한 시인을 데뷔시킬 기회를 스스로 놓친 셈이 됐다.” <창비>의 수난, 백낙청의 고난 

▶백낙청 남측민간대표단장(왼쪽)이 지난 6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백낙청의 담담한 반성에 대한 조동일의 반론은 드세고 격하다. 그는 지난 8월16일 한 강연회에서 그 해묵은 일에 대한 섭섭함을 원색적으로 드러내 화제가 됐다. ‘1960년대 문학활동을 돌아보며’라는 강연에서 그는 “김수영이 당시 지하의 시를 폄하했다면 그것은 김수영 특유의 소심함을 지나칠 정도로 나타낸 피해망상증이며, 백낙청이 김수영의 의견을 그대로 따른 것은 문학보다 처신을 더욱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조동일은 이어 한국문단을 상징하는 잡지 <창작과비평>에 대해 “김지하만한 시인을 등장시킨 적 있는가”라고 반문한 후 “<창비>에서 주는 만해문학상을 김지하가 받았는데, 나 같았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백낙청은 박노해 시인에 대해서는 늘 소극적으로 평가한다는 세간의 오해에 시달렸다. 박노해의 시는 등단 후 11년이 지난 1996년 봄호에 처음으로 게재됐다. ‘민족문학’을 강조해 온 그가 상대적으로 ‘노동문학’을 주창하는 작품에 대해 의도적 폄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도 억울해 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 1980년대 중반 이래 박노해를 무조건 예찬하는 사람들 빼고 나만큼 높게 평가하기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시를 싣는 것이 늦어졌고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야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창비에서 내게 됐다. 아마 박노해를 무조건 치켜세우는 사람하고 내가 논쟁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박노해를 깎아내리는 사람으로 인상이 남아 있을 텐데, 박노해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백낙청은 1974년 서울대에서 파면당했다. 그해 11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한 61명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교수가 정치에 참여했다’는 것이 파면의 사유였다. 긴급조치의 시대에 <창비>의 수난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5년 봄호가 긴급조치 9호에 의해 판매금지당한 이후 <창비>는 수시로 판금 조치의 수난을 겪었다. 그는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공안기관에 끌려다녀야 했다. 그는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시절 서울대에 복귀했지만 7월 마각을 드러낸 신군부는 수많은 진보, 민주적 매체와 함께 <창비>를 아예 등록취소해 버렸다. 정기간행물로 복간되기까지 <창비>는 무려 7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1975년 해직 당시의 상황을 2003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문인 61인 선언’이 나오게 된 직접적 계기는 그 이전의 개헌청원운동에 있었어요. 이럴 때 문인들이 가만있을 수 없다고 해서 정초에 내가 주로 한남철 씨와 함께 세배 다니면서 서명을 받았지요. 명동 YWCA 코스모폴리탄 다방에서 이호철 선생의 사회로 내가 선언문을 써서 낭독했는데, 그때만 해도 61인이라는 수가 적은 수도 아니었고, 실제로 참석한 분들이 꽤 쟁쟁했어요. 이희승 선생에 안수길·박연희 선생 같은 원로들, 그리고 김지하 씨 등도 참여했지요. 황석영·최민 씨가 당시로서는 궂은일을 맡은 ‘따까리’였던 셈이고요. 경찰에서는 쉽게 풀려났는데, 이튿날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면서 다시 한 사람씩 정보부로 불려갔지요. 사실은 내가 주동자인 셈인데 불똥은 엉뚱하게 이호철 선생한테 튀었어요. 이호철 선생은 그때 이미 여러 번째여서 찍혀 있었거든요. 임헌영·장백일·정을병 씨 같은 사람들을 묶은 문인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한 겁니다. 나는 그야말로 ‘초짜’이고, 또 서울대 전임강사이니 아무래도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갓 돌아와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자유주의자 대접을 받아 엄중 경고받고 훈방된 거예요. 그해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할 때는 서명은 했지만 표면에는 안 나섰지요. 그런데 그 달 27일인가 ‘민주회복국민선언’에 또 서명했거든요. 학교 쪽에서는 수습하려고 노력했는데 어차피 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나 역시 <동아일보>에 ‘교수의 인권과 대학의 기능’이라는 글을 싣는 등 수습을 위해 뛰어다니는 학교 측 인사에게는 섭섭한 짓을 계속했고요. 사표를 내달라고 하는데 사표도 안 내고…. 그래서 결국 파면당하고 말았지요.” 1980년 <창비>가 폐간되던 때의 전후 사정은 허망했다. 신군부는 백낙청에게 ‘신체의 자유’를 주는 대신 ‘운동의 일터’를 빼앗았다. 자연인 백낙청보다 백낙청이 <창비>를 통해 벌이는 민주개혁운동이 더 불온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신군부가 빼앗은 ‘운동의 일터’ “1980년 5·17이 나면서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연행됐는데 나는 거기서는 빠졌어요. 7월에 2차로 검거한 사람들 중에 끼였지요. 그게 제헌절이었을 거예요. 집에서 한창 원고를 쓰고 있는데 합수부에서 데리러 왔어요. 나는 안기부 같은 데에 다니면서 실무자들 덕을 본 적이 많아요. 나를 취조한 친구가 지금도 누구라고 하면 아는 사람은 알아주는 대단한 수사관으로, 자기 말에 따르면 ‘사람백정’이었어요. 수사가 대충 끝나고 나면 상부 결정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마련인데, 그의 말로는 2차 검거자 명단에는 내가 톱으로 올라 있어서 고참이자 유능한 수사관인 자기가 맡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맡은 것을 천행으로 알라, 자기쯤 되니까 나를 구제하자는 건의라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백낙청 남측민간대표단장(왼쪽)이 지난 6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실 나는 복직된 후 우리 국민이 나에게 되찾아준 일터인데 여기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할 때 당분간은 학교 쪽에 충실하고 공부도 더 하고 싶다며 거절하고는 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해 복직시켜 줬더니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때 연행된 사람 중 해직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나는 면했습니다. 조사받을 때 보니 그들은 정말 온갖 정보를 다 갖고 있던데, 유독 <창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묻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모를 리는 절대로 없는데…. 그런데 나와서 며칠 안돼 잡지가 폐간되는 거예요. 이미 없애기로 했으니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백낙청 교수가 평생 잊지 못하는 두 명의 논객이 있다. 박현채와 리영희가 그들이다. 사실 <창비>는 문예지로서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남한에서 진보적 논문이 실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예를 들어 부정기간행물로 발간한 57호(1985년 10월 발간)에 실린 박현채-이대근 교수의 한국사회 성격에 대한 논쟁은 1980년대 운동사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성과로 평가되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시킨 직접적 계기가 됐다. 박현채는 1960년대 초반 인혁당 사건에 관련돼 재판받았고, 그런 경력 때문에 거의 반평생을 ‘경제평론가’라는 직업으로 살아야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돈명 변호사가 조선대 총장이 되면서 그는 비로소 교수 직함을 얻게 됐다. 그는 <창비>에 기고할 당시 충무로 중부경찰서 근처에 작은 집필실을 얻어 ‘국민경제연구회’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매일 그곳으로 출근하고는 했다. 리영희는 1991년 <창비>의 창간 25주년을 기념하는 글에서 창간 당시 ‘큰 우군’을 얻었던 기쁨을 회고하고 있다. 지금도 술자리에서 화제에 오르고는 하는 백낙청에 대한 리영희의 ‘인상비평’은 이랬다. “나처럼 힘겹게 살아온 사람의 눈에는 처음 만난 그 편집인은 그 창간사의 필자일 수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귀공자풍의 백면서생이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대표적 부르주아 계층에다, 내가 조금은 경멸하고 많이는 부정하는 소위 미국 대학 출신이라! 그의 집안 내력과 현재 상황 또한 그가 굳이 그런 깃발을 들고 나설 아무런 이유가 없는 터였다.” 리영희는 <창비> 창간 때 <조선일보> 외신부장이었다. 그는 당시 같은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임재경(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씨로부터 백 교수를 소개받고 1967년 봄호에 한스 모겐스의 ‘진리와 권력-존슨 행정부와 지식인’을 번역해 싣는 것으로 <창비>와 인연을 맺었다. 리영희는 이후 <창비>에 기고한 글 때문에 한양대에서 해직되고, 징역까지 살고, 1980년대 중반 복직될 때까지 창비사의 터줏대감으로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길고 고달팠던 해직 기간을 견뎌냈다. 1980년대 이후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진보 진영 내부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한다. 백낙청식 민족문학이란 노동해방이나 민족해방 등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고 어물어물 넘어간다고 해서 ‘소시민적 민족문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0여 년 전 소시민적 문학 행위를 맹공하며 출범한 <창비>가 ‘소시민적’이라는 공격을 받은 것은 아이로니컬했다. 어쨌거나 백낙청은 “문학은 민중성이나 운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되고 어디까지나 예술성과 균형을 맞추면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그 ‘예술성과 균형’의 강조가 백낙청의 부르주아 근성이라는 극단적 매도 속에서도 ‘백낙청 사단’의 굳건한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백낙청 사단’의 힘 
<창비>가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소위 ‘창비 사단’의 막강한 명망과 실력 때문이었다. 이른바 ‘창비 사단’이 우리 문단의 핵을 이루고 있음은 백낙청에 대한 맹렬한 비판자 강준만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창비>를 통해 등단했거나 활동한 문인들은 시에서 김수영·신동엽·신경림·고은·조태일·김지하·곽재구·김정환·김용택·최영미, 소설에서 천승세·송기숙·박완서·이문구·현기영·황석영·윤정모·공지영·방현석·김하기 등 막강한 위용을 자랑한다. 처음 <창비>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의 기쁨을 원로 소설가 박완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처음 <창비>에서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일급작가가 됐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기뻐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하는데 창비사에서 책으로 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도 다른 출판사와 비교해 보는 마음 같은 것 없이 쾌히 승낙했다. 아무튼 <창비>가 나를 알아줬다는 것이 기뻤다.” <창비>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정서를 꿰뚫어 보는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으며 그 성과는 상당부분 백낙청의 혜안으로부터 나왔다. 출판사 창비는 이미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이름이 높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서른 잔치는 끝났다> <장길산> 등 수십, 수백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를 양산했다.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백낙청이 제기한 독보적 이론은 분단체제론이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분단 현상을 거시 역사로 보면서 남북한과 주변국의 정치적 대립구조와 그 타개 방안을 장기적이고 단계론적으로 그리고 현실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규정했다. 백낙청은 요즘 이론을 제시하고 현상을 해석하는 일이 지긋지긋해졌음이 틀림없다. 그는 올 한 해를 광복 60주년 경축 ‘자주·평화·통일 민족대축전’ 공동준비위 상임대표를 맡아 눈코 뜰 새 없는 날들을 보냈다. 한총련·민노총 등 200개가 넘는 단체들을 이끌며 일련의 광복절 기념행사들을 총지휘했다. 격렬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지난 7월14일 열린 남북축구대회에서 관중이 태극기를 흔들지 않고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는다는 방침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카리스마를 보이기도 했다. ‘어물어물 통일론’의 패러독스 ‘장기적, 단계론적, 현실주의적으로 접근하자는 분단체제론’은 통일을 위한 ‘변혁적 중도주의’의 주창으로도 이어졌다. 과거 독립운동할 때 좌우 갈등이 있어도 당장의 목표를 위해 뭉치는 것이 옳았던 것처럼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대의를 중심으로 되도록 많은 세력이 뭉치자는 것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것이다. 최근 발언한 ‘어물어물 통일론’도 화제가 됐다. 우리의 통일은 남북 민중의 실질적 접근으로 ‘어물어물’ 진행되는 통일이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통일 패러독스’다. 정권 상층부 소수의 거창한 합의보다 사회 각 부문 민중이 다양한 차원에서 교류하고 상호 이해해 가며 신뢰를 쌓아 나가는 것이 진정한 통일의 밑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생 지기이며 동지인 시인 고은은 인간 백낙청의 폭과 깊이를 이렇게 평가한다. “늘 지치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 타고난 공동체 윤리. 백 선생은 늘 앞에 있지만, 늘 뒤에도 있다.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 마시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한다.” 그는 또한 백낙청 앞에는 ‘대지의 지식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백낙청은 어떤 골짜기나 유역의 지식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 ‘대지의 지식인’이 발휘하는 지혜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술 마시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간적 상상력과 관용의 정신일 터다. 그 인문학적 지혜가 과연 ‘현상과 사물을 변화시키는’ 현실적 힘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