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에 동학 지도자와 동학교도 및 농민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조선 양반 관리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농민군은 흥선대원군, 이준용과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 반의하면서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민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하였고 농민군과 제휴하였다. 농민군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 거병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살해당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는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3]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4]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갑오개혁(한국 한자: 甲午改革)은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1]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2]까지 추진한 근대화 개혁으로서 갑오경장(한국 한자: 甲午更張)[3]이라고도 불렸다. 현대식 날짜 표기로 제1차는 7.27 개혁(7.27 改革)과 제2차는 12.17 개혁(12.17 改革)으로 표기한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세분하며, 이후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요 내용은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은본위제,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다.[4]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고,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일본 또한 톈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파병을 하였다. 톈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침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자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과 맺었던 전주화약으로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새로 신설하여 자주적인 개혁을 하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고, 교정청을 해체하고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신설하였다. 이렇게 추진된 개혁은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 사회 내부의 개혁적 요구를 반영해 신분제를 철폐하는 등 근대적 제도 개혁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의 위세에 의존한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이 추진된 근본적 한계 때문에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군사개혁에 소홀히 하는 등의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그 위세를 잃으면서 추진력을 급격히 상실하였다. 조선 정부는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친러정권이 수립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다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이에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세력이 득세하였고, 김홍집 등 갑오개혁 중심 인물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도주 또는 망명하여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개혁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을미개혁(乙未改革)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 직후[1]부터 1896년 2월 11일(을미년 음력 12월 28일) 아관파천 직전까지 추진된 조선의 제도 개혁을 말한다.
제1·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김홍집이 내각의 수반이었고 갑오개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한다. 을미개혁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을미사변 직후에 추진되었고 친일 개화파 세력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주도한 개혁으로, 3차에 걸친 갑오개혁들 가운데 가장 친일적 성향이 짙었다.
개혁 내용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9일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파천한 사건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사건을 고종 러시아공관 망명(러시아어: Бегство Коджона в русскую миссию)이라고 불렀다.
명칭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을 한자로 '아라사'(俄羅斯)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1] 따라서 ‘아관’(俄館)이란 러시아 대사관을 뜻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노서아'(露西亞)라고도 하였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노서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9월 5일 노서아-일본의 강화 조약(포츠머스 조약) 기록이 유일하며, 러시아 대사관을 '노관'(露館)이라고 칭한 것도 1897년 두 차례에 불과하다.[2] (아관은 고종 때 네 차례, 순종 때 한 차례 등장)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 경제, 교육, 시설 면에서 근대화와 남에게 보호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끔 국력을 증강하려는 노력이었으나
- 재정집중’을 포기한 채로 국가재원의 이속과 백동화 발행으로 황실재정을 확충함으로써 정부재정을 침해하였기 때문에 근대적 재정국가 건설에 실패했다.
- 또 특권을 전제로한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지향을 현실화시키는데 성공할 수 없었다.
- 이런 여러 개혁 정책은 복고주의 성향과 집권층의 보수 성향과 개혁의 미미한 성과와 열강 세력에 간섭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 근본적으로 황제와 측근들 중심의 비상 수단과 황제의 권위에 의존한 개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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