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4

비명을 찾아서(상, 하) | 복거일 1987

[전자책] 비명을 찾아서(상) | 복거일 | 알라딘
[eBook] 비명을 찾아서(상) |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은이)문학과지성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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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복거일의 대체역사 장편소설. 소설은 일제 강점기에서 역사의 물꼬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 흥미진진한 상상을 펼친다.

처음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또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가벼운 부상만을 입었다면? 하는 가정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가상의 역사가 생겨난다.

소설은 상, 하권의 두툼한 분량임에도 고급스럽고 재미있게 읽힌다. 소설 읽기를 재미있게 하는 풍자와 가벼운 냉소, 진지한 성찰의 편린들이 떠돈다.



저자 및 역자소개
복거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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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충남 아산 출생. 과학소설 『비명을 찾아서』, 『파란 달 아래』, 『목성 잠언집』, 『그라운드 제로』, 『애틋함의 로마』, 『내 몸 앞의 삶』, 『역사 속의 나그네』와 과학 산문집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벗어남으로의 과학』, 『복거일의 생명예찬』 등을 펴냈다.

최근작 : <정체성의 진화>,<미추홀, 제물포, 인천 2>,<미추홀, 제물포, 인천 1> … 총 12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가 지금도 일본인의 지배하에 차별받는 ‘반도인’으로 예속되어, 우리말과 역사가 송두리째 말살되고 민족적 뿌리가 없어진 상태 속에서 참담하게 살고 있다면…… 스위프트적인 기지와 오웰적인 분위기 속에 피어나는 풍자적 날카로움과 비판적 성찰.

[소설로 들어가기 전에]

문학 작품의 앞뒤에 작가가 말을 덧붙이는 것에 대해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러나 좀 낯선 소재라서 머리글을 쓰는 게 좋겠다는 실제적인 지적이 있었다. 작품의 시공적 위치에 대해 약술한다. 작품과 직접 대면하고 싶은 분들은 이 머리글을 건너뛰고 읽어도 될 것이다.

[전제]

이 작품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이 1909년 10월 26일 합이빈(哈爾濱)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씌어진 이른바 ‘대체 역사(代替歷史)alternative history’이다. 이또우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정치적 식견과 능력은 근대 일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그는 쪼우슈우번(長州藩) 출신의 무인이면서도, 야마가따 아리또모(山縣有朋) 공작을 중심으로 하는 쪼우슈우벌(長州閥)의 육군 강경파들과는 달리 매사에 있어서 온건하고 점진적인 접근을 주장한 정치가였다. ‘정한론(征韓論)’의 반대, ‘대일본 제국 헌법’의 제정, 입헌 제정당(入憲帝政黨)의 결성 등에서 그의 그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자연히 그는 일본 정계에 있어서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존재는 일본에 언제나 팽배했던 군국주의적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의 전제가 된 대체 역사에서는 그가 합이빈에서 저격당한 뒤에도 열여섯 해를 더 살았다. 그 사실은 자연히 다이쇼우(大正) 시대의 일본 정국과 동북아시아의 형세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형세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세계 역사의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대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중요한 사건의 결말이 현재의 역사와 다르게 났다는 가정을 하고 그뒤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삼는 기법으로, 주로 ‘과학소설science fiction’에서 쓰이고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남부가 이겼다는 사실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룬 무어Ward Moore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1953)가 고전으로 꼽힌다. 그 밖에 루즈벨트 F. D. Roosevelt가 암살되고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독일과 일본에게 점령되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1960년대의 미국 사회를 그린 딕Philip K. Dick의 『높은 성 속의 사람The Man in the High Castle』(1962), 엘리자베드 I세 Elizabeth I가 암살되고 서반아의 무적 함대 Armada가 영국을 정복하였다는 가정 아래에서 1960년대의 영국 사회를 그린 로버츠 Keith Roberts의 『파반춤 Pavane』(1966), 그리고 워싱턴 George Washington이 전사하고 미국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를 그린 해리슨 Harry Harrison의 『대서양 횡단 터널, 만세! A Transatlantic Tunnel, Hurrah!』(1972)가 이름이 있다.

[시대상]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1920년대 초반까지는 조선을 대륙 진출의 확실한 전진 기지로 만들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는 내각과 군부 사이의 협조 속에서 국제적 여론을 무마해가면서 중국의 동북 지구를, 즉 만주를 잠식하여 세력권 안에 넣었다. 이어 1940년대 초반에는 미국으로부터 ‘만주국 문제’에 대한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지도적 위치를 구축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우호적인 중립 노선을 지켜 큰 번영을 누렸다. 그리하여 가라후또(樺太) 남부와 찌시마(千島) 열도를 포함하는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 ‘국제연맹’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마샬 군도 등 서태평양의 섬들, 조차지인 요동 반도의 관동주와 산동성의 교주만을 영유하며, 방대한 만주국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경영하는 일본은 모든 면에서 미국과 노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강대한 나라였다.

반면에 국내적으로는 어두운 면들도 많았다. 정부의 통제가 심화되어, 사회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국민들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군부가 정치의 주역이 됨으로써 일어난 문제점들이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고,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장기 집권했던 도우조우 히데끼(東條英機) 정권이 남긴 부정적 유산들이 사회 발전을 막고 있었다.

세계는 미국과 노서아를 각각 그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전에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식민 제국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어서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점령국인 미국의 도움으로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으나, 미국과 노서아가 분할 점령했던 파란은 끝내 동서로 분열되어버렸다. 중국은 황하를 경계로 하여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치하고 있어서 민족의 역량이 내전에 소모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만주국의 세 나라로 분단된 상황을 극복하여야 한다는 민족적 각성이 점차 적극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또우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된 ‘국어 상용 운동’으로 조선어는 1940년대말까지는 조선 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울러 꾸준히 추진된 조선 역사 왜곡 작업에 의해, 특히 ‘비(非)국어 서적 폐기 정책’에 힘입어 조선의 역사도 완전히 말살되고 왜곡되었다. 1980년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들이 되었고, 자신들이 내지인들로부터 받는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내면서]

우리는 신인 발굴에 노력해온 계간 『문학과지성』의 연장선 위에서, 복거일씨의 전작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을 출판함으로써 새로운 소설가를 우리 문단에 자랑스럽게 내보낸다.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가상(假想)의 역사(작가 자신은 이를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라고 부르고 있다) 속에서 우리말과 역사가 송두리째 말살된 상황 속에서, 한 기업체의 과장이며 시인인 ‘반도인’ 주인공이 자신의 민족과 뿌리를 어렵게 찾아내고 그 때문에 가해진, 그리고 가해질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 망명을 떠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 소설의 의미는, 자아와 그것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탐구하려는 정신적 모험의 고귀함과, 오늘의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풍자적 날카로움에서 우선 발견될 수 있다. 완벽한 소설적 형상력에, 원고지 3천 장의 긴 작품을 단숨에 읽게 하는 고급하면서도 긴장된 재미가 어울려 있는 이 장편소설에는 전반적으로 스위프트적인 기지와 조지 오웰적인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지만, 그러는 가운데 작가의 진지한 내성과 끝까지 역사에 대한 희망과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완강함이 커다란 미덕으로 우리를 감동케 한다. 의표를 찌른 기발한 착상에도 불구하고 매우 사실적이며, 섬세하고 아름답고 튼튼한 이 소설의 출현은 앞으로의 우리 장편 문학이 나아갈 길 한 가지를 암시해주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 소설이 80년대에 비교적 침체해 있었던 우리 소설 문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중요한 성과의 하나로 꼽힐 것으로 확신한다.

작가 자신의 자기 소개에 따르면, 1946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저자 복거일(卜鉅一)씨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은행과 제조 회사·무역 회사 등에 근무했고 기업체 근무중에 노동조합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현대문학』에 시를 1회 추천받은 바 있으나, 오랫동안 희망해온 문학에 전념키 위해 1983년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4년 동안 이 소설의 집필에만 몰두해왔다. 그는 예이츠의 시들에 대해 절망적인 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공상과학소설에 심취해 이 방면에 많은 독서를 해왔다고 하는데 이 독창적인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그 자신의 이러한 이력과 그의 문학적 취향이 탁월한 상상력 속에 부드럽게 용해되어 창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인 작가들의 투고작을 출판사의 편집위원이 열독하고 검토하여 책으로 발행하는 문화 선진국의 관행을 바람직하게 따르게 된 이 장편소설의 간행이 우리 문단과 출판 풍토에 중요한 전례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와, 이 작가의 앞으로의 새로운 창작 활동에 대한 독자들의 격려를 이제 우리는 기대한다. 여기 뛰어난 재능이 나타났다!라고.

- 1987. 3. 문학과지성 편집 동인(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오생근)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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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8.5





이 분도 한쪽으로 쏠리기 전에는 이렇게 좋은 글(더군다나 많이 쓰지않는 분야)도 쓰시곤 했다. 나이를 먹어가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좋은 작가는 사회를 깨우는 일로 사회적 기능을 해야하는지라 한쪽에(그것도 오른쪽에.....) 쏠리면 안된다는 생각 - 글은 좋다!!!
독서꽝 2014-06-20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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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국사 공부 왜하냐는 애들에게 걍 이거 읽어보라면 될거 같음. 후덜덜.
crema 2014-07-29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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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은 어린이나 보는 공상 고학소설이란 국내 문단의 편견을 깬 책이지만 본격적인 과학 소설이라가 보다는 하위 장를인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하는것이 더 정확하다.국내 SF소설로 강추한다!
카스피 2011-12-25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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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국사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수작이다. 모든 국민이 읽어봐야 할 듯.
의진 2015-07-0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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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공부를 해야할까...문학의 맑은물...정수를 본 느낌...
manijuni 2012-09-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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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시절에 읽었던 책. 예전의 감동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볼 만한 소설이다.
장돌뱅이 2015-10-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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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타임슬립과 관련한 내용 난 이런 책이 재미있다.
지키미 2015-09-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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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까치 2018-03-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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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역사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샤유 2013-04-0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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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고 충격과 감동을 받은 책. 누레진 고서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분명 의미 깊은 책이고, 다른 후속작도 기대했는데... 세상일이 독자가 바라는 대로 가지는 않는 듯. 작가님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밀가루 2024-03-09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비명을 찾아서

작가 피에르 불은 그의 작품 「혹성탈출」을 통해, 인간이 유인원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다라는 엄청난 반전도 원숭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보려 했던,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정을 보여주었더랬습니다. 영화 <Back to the Future> 역시, 비프를 향한 아버지 맥플라이의 주먹 한 방이 이후 양 쪽의 가세(家勢)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었지요. 이처럼 --- 과거의 한 지점에 결정적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후의 전개, 즉 (그 '과거의 한 지점'이 이끌어 낸) '현재'의 '현재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상상해 보는 것을, 이 책 「비명을 찾아서」의 작가 복거일은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또우 히로부미 공작이 1909년 10월 26일 합이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씌어진 이른바 '대체 역사'이다. (상권, p9) …… 대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중요한 사건의 결말이 현재의 역사와 다르게 났다는 가정을 하고 그 뒤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작품의 배경을 삼는 기법으로...(상권, p10)

……………………………………………………………………




​【 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인가? 】




이 작품은 왜 하필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라는 사실(史實)을, 그 반대의 가정을 가해볼 만한 과거의 미묘한 한 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작가 복거일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서술해 놓고 있는 다음의 구절 속에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일본 정계에 있어서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존재는 일본에 언제나 팽배했던 군국주의적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상권, pp9-10)

​우리에게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지만1, 사실 그는 조선에 대해 회유2적인 노선을 펼친 인물이었다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토는 안중근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후 응급처치를 받으며 자신을 쏜 사람이 누구냐 물었고,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듣고는 "바카나야쓰3!"라 중얼거렸다 하더군요. 왜 그가 뱉은 최후의 일성이 '바카나야쓰'였을까요? --- '아마도 대한국 정책에서 온건파를 대표했던 자신이 한국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에서였을 것이다.'4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로 넘어갔으며,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의미했습니다.5 실제 이토가 죽은 지 일곱 달만에 일본은 합병조약을 체결시켰지요.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다 합니다. : "이렇게 보면 온건파 이토의 죽음이 한일병합을 앞당긴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 때문에 일본의 일부 논자들은 안중근의 이토 사살을 '자충수'라고 평가한다."6




어쨌든! 역사학계(의 일부)가 바라보는 안중근의 투쟁이 지닌 역사적 의미인 "이토 히로부미의 부재로 인한 무단통치의 가속화를 불러오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7" 이란 해석을 작가 복거일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 보입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하여 부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였었다면 --- 무단통치의 가속화도 없었을 것이고, 이토의 문화적 식민통치의 결과, 한국인의 식민지배 내면화는 더욱 확산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식 역시 강화되지 못하지 않았겠느냐8라는 것이지요. 어쨌든! 작가가 밝히고 있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또우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강력히 추친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 1980년대9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이 되었고, 자신들이 내지인들로부터 받는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권, pp11-12)








​【 문제의식의 발로 】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상권, P54)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는 직업군인이었다 제대한 후, 금속 회사의 무역파트에서 근무하며, 시(詩)를 쓰기도 하는 조선인입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예의 모르고 있었었던 그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완전히 똑같은 사고를 하고 있는 인물이지요.





조선인들이 내지인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이 일본 제국의 변두리에 자리잡은 데 근본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상권, p45)

하지만! 조선에서 보여지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서만큼은 억울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 땅에 있는 그 많은 불평등을 내지인과 조선인 사이의 선천적인 능력의 차이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 조선인들은 다만 악순환에 시달리는 것이다. 차별과 무지와 빈곤의 악순환에."(상권, p131)




이랬던 히데요의 사고(思考)는, 우연히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두 권의 책을 읽은 후, 그러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자신의 시(詩)를 통해 작게나마 자신의 힘을 더하여야겠다는 것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지요. : "나는 앞으로는 조선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조선인을 대변하는 시를 쓰려고 해."(상권,p144)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시도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무언가 자신이 이제까지 '진실'이라 굳게 믿어왔었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라 의심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르게 됩니다. 조선에도 무려! 독자적인 언어와 역사가 있었었으며, 그것들이 사라지고 잊혀진 것 역시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 여전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특히나 젊은 세대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실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히데요의 의문과 고민이 시작됩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진실을 알아야 하는가?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당구장으로 들어간 학생들이 조선에 관한 진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그들의 길이 어두운가? 내가 그 진실을 안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는 길이 더 밝아지는가? …… 그래도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다. 왜? 왜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가? …… 이처럼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인가? (상권, pp284-285)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기까지의 고민은 --- 김은국의 「순교자」에 등장하는 인물인 '장 대령'의 일성(一聲), "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10​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게다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존재했었던 조선의 말과 글이었기에, 누군가는 아직도 그 조선의 말과 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히데요는 뜻밖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조선의 말와 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의 고민은 한 단계 더 깊어지게 되지요. 헌데 말이죠! ---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히데요의 이 고민란 게 기실 새로운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1차적으로, 그리고 작가 복거일이 그 고민을 작품 속에서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란 게 저의 생각관 맞지 않더란 점에서 다시 한 번 더! 이 작품에 대한 저의 만족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장사에 관한한 중요한 건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이 국가라는 집단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일이야. …… 자네가 그 군복을 차려입고서 사람들에게 한다는 얘기가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 …… 사람들이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들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나?

- 김은국 作, 「순교자」, p174, 문학동네 刊, 2010.

이 작품 속에도, 주인공 히데요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해주는 이가 등장합니다. (소위 말하는) 불온 서적 소지죄로 갱생교육을 받게 된 히데요의 담당 교사 하꾸야마가 바로 '장대령'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꾸야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일본에 의한 조선 역사의 말살·왜곡은 이젠 거의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칠십 년이 넘는 세월이 이끼를 얹어서, 그 가공의 역사가 이젠 진실처럼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과연 조선 사람들이 지금 노력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p227) …… 이젠 조선 사람들에겐, 좋으나 싫으나, 일본 사람들이 되는 길밖엔 없습니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조선 사람들은 원통하지만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합니다. … 살아 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분명히 우리11는 그들12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위해 하는 짓입니다.(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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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 주장 자체에 지체 없이 반대의 뜻을 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13 하지만! --- 이 표현이, 친일 작가라 불리우는 춘원 이광수의 작품 「무정」에 나오는 구절이라면, 이는 충분히 다른 방향 -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차라리 난 친일이라도 하여 작가로서 살 길을 이어가겠노라 - 으로 이해될 수 밖엔 없을 겁니다. 전 그렇게 이해했었었지요.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살 길을 조선인이 아님에 있다'라는 하꾸야마의 논지 속에 ---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라 말했던 「순교자」 속 장 대령의 뜻깊은(!) 속내가 들어있었었다면? 더 나아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속 어느 제사장의 다음과 같은 (이타주의적?) 의도가 (혹은 변명이) 들어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하꾸야마의 주장은 여전히 그리고 당연하게 '친일'이라는 멍에를 벗어낼 수 없는 걸까요?





●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作, 「사람의 아들」 중 어느 제사장의 말



장대령이나 제사장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던 저로서는 예의,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하꾸야마의 논리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 (이 작품의 배경을 잊지 않고 온전히 대입시켜 본다해도) 하꾸야마의 논리 자체가 선택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논리를 깨뜨려 내겠다 펼쳐지는 주인공 히데요의 논리가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었다라 말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작가의 선택 】




"독립은 과연 지고(至高)의 가치이며 언제나 반드시 그러하여야 하는가?"




이 당위에의 의문에 대한 작가 복거일의 대답이 만약 이 작품이라면, 그리하여 작가가 '그렇다! 그러하여야 한다!'라 대답하는 것이라면 --- 제 개인적 의견으로 작가의 논리로는 그 누구도 설득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구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우리 조선인들이 이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몇십 년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자신의 나라를 가졌었다는 사실을.(하권, p129)

이렇게 시작된 히데요의 의문은 이내 하꾸야마의 논리에 부딪히게 되지요. 여기서 히데요는 겨우! "하꾸야마 선생이 전개한 논리의 어느 고린가에 오류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제가 잘못되었거나."(하권,p233)이라는 빈약한 저항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아간 한 발이라는 게 고작





조선적인 것을 다 버렸을 때, 조선인은 일본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조선인이 아닐 따름이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존재. …… 조선인은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 그 자명한 이치를 생각하기가 왜 그렇게도 힘들었던가? 조선인이 조선적인 것을 버리면, 그는 그만큼 왜소해지고 불완전해지는 것이다. 병들어 뿌리와 가지가 시든 나무처럼. 조선인은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본적인 것까지도 조선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섭취해야 한다. 그것이 조선인이 살 수 있는 길이다. (하권, pp275-277)

이건 마치! --- 'A=C 이고, B=C이기도 하지만, A=B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라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을 뿐인 겁니다. --- 히데요의 위와 같은 사고(思考)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이라면 얼마든지 성립 가능한, 어쩌면 반드시 성립되어야 하는 논리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죽지 않았고, 그리하여 식민지배의 내면화가 거의 완전히 이루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전 절대 그렇지 못하다라 생각합니다. (가요의 가사를 빌어보자면) 이는 이미 폐차된 차에 새 타이어 갈아끼우자란 소리 밖엔 안되는 거 아닐까요?





주인공의 고민이 여기에서 그쳤었다면, 이 작품이 이처럼 알려져 있지도 않겠죠. 히데요의 저항은 이제 한 발을 더 나아가 확신의 수준에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조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필연적으로 내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 설령 세상이 바뀌어 내지인들의 조선 통치가 너그럽고 공정하고 현명한 것이 될지라도,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것보다 더 공정하고 현명한 통치가 될지라도, 조선은 꼭 독립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를 다르시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닌 것이다. (하권, p284)

​소설의 이 지점에서 막 헷갈려집니다. 독자 뿐만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말이죠. --- 아니!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라는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가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라는 명분을 어떻게 느닷없이 가져와 쓸 수 있는 것일까요?15이건 작가 스스로 설정해 놓은 전제 자체를 소설의 끝에 와서는 완전히 갈아 뒤엎자란 소리 밖엔 안되잖습니까.



이런 식의 결과를 작가가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 '당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작가 역시 '당위'로만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에 생겨났다라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이해였습니다. 쉽게 말해, '왜 1+1의 답은 2가 되어야 하나요?'란 학생의 질문에 '1+1은 2니까!'라 답해주는 선생 격이라고나 할까요? 차라리!!!



​「순교자」에서,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열 두명의 목사들 모두가, 실제로는 모두 순교자적 죽음을 맞이했던 건 아니었지만, 장 대령 역시 그걸 알고는 있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라 외칠 수 밖에 없었었던 그의 거짓 당위가 안겨주었던 공감같은 것으로 (애초부터 '대체 역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선언했던) 이 작품을 마무리지어낼 수는 없었을까요? 혹 --- "길이 보이는 한, 난 망명객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이다."(하권, p328)라는, 심히 생뚱맞은 이 작품의 결말이 품고 있는 뭔가가, 제가 이해해내지 못한 뭔가가 있는 걸까요?




……………………………………………………………………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설의 구조 자체는 매우 탄탄합니다.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부터는 사실(事實)인지, 소설을 쭉 읽다보면 어느 순간엔 잘 구분이 되지 않을만큼 이야기 자체는 훌륭하게 짜여져 있다 생각합니다... 만!




이렇게만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①일본의 명문가 출신인 젊은 여성과의 뭔가 불륜스런 러브라인은 그것에 '애틋한'이나 '가슴 아픈'이란 형용사를 붙이기엔 지나치게 싸구려스럽기만 하며, ②잊혀질만하면 잊지 말라는 듯 짜잔!하고 등장하는 '아랫배에서 묵직한 욕정이 솟았다'(하권,p214)류의 표현들은 분명! 이 작품의 격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고 있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③주인공 히데요의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망명'의 실질적 이유라는 게 고작 살인죄로부터의 도피였다라는 점은, 이 소설이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를 잠재적 생명력을 완전히 갉아먹었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혹은 작가는) 이 마지막 상황에 대해 '식민지배 계급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 뭐 이딴 식으로 둘러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의 '갑 of 갑'이죠. 만약!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작가는 과연 이 작품의 마무리를 어떻게 만들어냈었을까요?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받았던 제 느낌은 --- 작가 스스로도 하꾸야마의 논리에 맞설 히데요의 대응논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했기에 급작스럽게 '망명'이란 그래도 뭔가 애국적 향(香)을 조금이나마 풍겨낼 수 있는 마무리를 대충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기만 합니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다른 분들은 과연 이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덧> '대체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중요했던 한 순간의 결말을 뒤집어봄으로써, 우리의 '현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그렇다면! --- 이제 머지않은 시간 후면, '이산가족'이라는 단어마저 사어(死語)가 될 우리에게 과연 '통일'이란 여전히 '우리의 소원'으로 남아 있게 될른지, '통일'은 끝까지 '무조건 되어야 하는' 당위의 개념으로 인식될른지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사실, 아직까지는 '통일'이 당위의 개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꽤 오래전 부터 '통일의 경제적 효과'류의 논의들이 '통일'이란 개념을 야금야금 '당위'의 수준이 아닌 일개 '(수단을 동원해 이뤄내야 할) 목적'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왔기는 했었습니다만, 이젠 아예 대통령이 나서서 '통일은 대박!'이라 발언해 버림으로써 '통일'에 대한 개념 자체를 더 이상 '당위'의 차원이 아닌, 그저 "자본주의의 체제 하에서만 유용한 무엇"으로 확정지어버렸었지요. 이건 어쩌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 짧은 한두 마디 : 이 작품이 진정 '역사 소설'로 불리우길 원했었다면, 현재 분량의 딱! 절반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었지 않나 싶. --;;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 김은국 作, 「순교자」 : '당위'에 대한 진지한 의문.

- 이광수 作, 「무정」 : '친일'에 대한 작가의 사전적 변명?

- 피에르 불 作, 「혹성탈출」 : 인류의 역사에 대해 가정해 보는 대체 역사.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신의 善意은 절대적인 것이다'란 당위에 대한 충격적 반론.





















"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회유(懷柔) : 어루만지고 잘 달래서 시키는 말을 듣도록 함. - <네이버 국어사전>
"바보같은 놈!"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24, 페이퍼로드 刊, 2011.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26, 페이퍼로드 刊, 2011.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32, 페이퍼로드 刊, 2011.
이 가정의 상황이 지니고 있는 논리전개에는 동의하지만, 그 역(실제의 史實에 대한 해석)도 과연 성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즉 --- <각주 6>의 저자들처럼 안중근의 투쟁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이라 보는 것은 혹,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간의 관계에서와 같이, 반대방향으로의 역(易)이 항상 성립되는 건 아니다라는 사실을 미처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 아닐까 싶다라는 거지요.
이 작품의 부제인 '쇼우와 61년'은 1987년을 가리킵니다.
김은국 作, 「순교자」, pp152-153, 문학동네 刊, 2010.
조선인 문학가들.
조선인 대중들.
일본작가 구사카베 요의 소설 「A케어」가 딱! 이런 주장을 담고 있는 소설이지요.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썼던 저의 감상문에 다음과 같은 덧글도 달려 있습니다. --- "친일파가 쓴 소설이 무슨 문학 가치가 있으며 왜 궂이 그걸 친송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설령 문학적 가치가 있다해도 지금까지 이런 소설이 읽혀지고 있다는거 자체가 잘못된거 같아요."
물론, 이 '다른 사람'이란 문구에 대해서는 히데요의 다음 독백을 설명으로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도 작가는 예의 '그래도 찾아야 했다'라는, 이유 없는 단순한 당위만을 내밀고 있지요. --- '한 사람이 자기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넓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실체가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믿었던 실체의 상당한 부분이 허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큰 충격일 터였다. 그리고 그 허구로 밝혀진 것을 대신해서 채울 실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리고 두려운 일이었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일는지 모른다는 것은 반생을 넘게 살은 사람에겐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하권,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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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살가죽 2015-11-25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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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군요



저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비명을 찾아서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영어 공용화등에 대한 선입견으로 읽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난 지금 저자가 참 많은 공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참 탄탄하게 잘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 역사소설이라는 것이 단순한 공상에

의해 쓰여지지 않고 많은 자료수집과 고민에 의해 쓰여지면 이렇게 멋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참 오랜만에 만난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 지명을 일본어로 발음할때 얼마나 생소해 지는 것인지

말이라는 것이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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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09-04-29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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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복거일의『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이런 줄거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중에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다시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김명석이 쓴 논문「SF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소설『비명을 찾아서』의 서사 비교>를 읽고 비로소 두 작품 간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김명석은 두 작품의 등장 인물의 성격과 서사 상의 시간 구조, 작품에 내재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 등을 꼼꼼하게 비교ㆍ분석하고 있다.

김명석도 지적하듯이 나 역시 대체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 영화라는 장르 상의 차이를 감안한다하더라도 영화는 소설에 비해 역사와 자아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상력이 현저하게 천박하고 통속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이 소설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재밌으며 무엇보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주의와 국사, 국가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작품이 드러내는 이 명확한 주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진리성과 자본주의체제의 공적(公的) ‘정의’(?)를 변호하는 데 헌신해온 자유주의 이데올로그 복거일1)의 그 유명한 소설 데뷔작을 드디어 이번 기회에 읽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보이지 않는 손』을 얼마 전에 서점에서 본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예전부터 우리 사회의 일상의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복거일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게 상당히 중요하고 또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알다시피 복거일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보수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고루한 근대적 사고의 산물인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과 시장의 무한경쟁을 보장하는 ‘자유’라는 이념 그 자체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무능한 보수주의 일반마저 강력히 비판해온 요즘 말로 소위 ‘New-Right’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2) 또 친일 행위의 평가와 단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존의 통념을 갖고는 ‘친일파’를 명확히 정의할 수도 없고, 오히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의 삶이 조선왕조 통치 하의 그것보다 훨씬 나았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친일파 옹호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탈-근대적’ 역사 감각을 소유한 자유주의자인 것이다.3) 게다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 설파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이 주도하는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사용하지 못해 입는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영어공용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국제적 감각을 지닌 ‘세계시민’(cosmopolitan)이기까지 하다.4)

이렇듯 복거일은 자신이 신봉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탈근대적 자유주의자 곧 신자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가 최초로 쓴 87년의 장편 소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의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을 다시 본다면 스스로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까싶다.



다른 독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도 이 작품이 성취한 새로운 기법으로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를 소재로 한 점에 큰 흥미를 느꼈다.『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소설 속에 다시 다까노 다쯔기의『도오꼬우 쇼우와 61년』이라는 소설을 끼어 넣어 두어 실재하는 역사를 뒤집으면 소설의 세계가 성립되게 만들고, 그 소설의 세계를 뒤집으면서 ‘소설 속 소설’의 세계가 형성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소설의 세계를 빠져나온 소설 속 소설의 세계는 독자인 내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의 역사와 축을 같이 하는 세계임을 말한다.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백 년의 고독』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해독하던 멜퀴아데스의 양피지 원고가 결국 독자가 읽어 온 마르케스의 소설『백년의 고독』이었던 것처럼 환상의 역사와 실제의 역사, 소설과 현실, 소설과 소설 내의 세계 간에 존재하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에 대한, 또는 문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역사의 사실성은 문학의 허구성에 의해 문학의 허구성은 역사의 사실성에 의해 서로 허물어지고 해체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가, 문학 속으로 이입되는 역사와 함께 문학 속의 인물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과거/미래의 시간의 질서도 해체되고 독자들은 역사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설에서 기발한 점은 총 109개의 절마다 다 배치되어 있는 에피그람이다. 처음에는 이 에피그람이 각 절 본문의 내용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했으나 독서가 진행될수록 이것들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소설 내 역사적 사건을 의미해서 쓰인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 존재하는 저서들부터 작가가 창조한 저서들, 가상의 잡지, 실제 역사연표들까지 매우 다양한 장르의 에피그람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느 것 하나도 의미없이 사용된 것이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가령 작품 내부에서 조선인들에게 금서로 되어있는 것으로서 동서양 관계에서의 일본의 위치, 일본의 정치, 일본의 미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노 히사이찌라는 사상가의 '독사수필'이라고 하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작가 복거일이 소설 내에서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 지어낸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서 지식과 사회에 대한 평가의 시선과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5)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가 복거일이 이러한 대체역사의 기법을 통해 과연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실마리가 소설의 제목인 ‘비명(碑銘)’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가 찾는 ‘비명’(碑銘)이란 대체 무엇인가? 작품에서 이 ‘비명(碑銘)’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조선인이면서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가야마 미쓰로, 즉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 ‘여기 잠들다’이다. 이광수 및 이광수적인 선택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감옥에 갇혀 갱생교육을 받을 때 만난 조선 문단의 중견급 평론가이자 조선 평론가협회의 간사인 하꾸야마와를 통해 히데요에게 전달된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길은 ‘조선적인 것’ 즉 한용운이나 박은식의 길과 대비되어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6) 그에게 이광수적인 것은 “조선 민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독립을 선언하노라”고 주장하는 다이쇼(大正) 6년의 민족주의자 춘원 이광수에서 “하루라도 속히 황민화될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쇼와 4년의 배교자 가야마 미쓰로로 상반된 방식으로 호출된다. 가야마 미쓰로, 혹은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를 믿지 못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자신의 기원인 ‘민족’을 부정해 버린 역사의 ‘전범’으로 호출된다.7) 물론 히데요는 그러한 이광수의 길을 바로 잡기 위해 그의 비명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문제는 그가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한 이광수를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려든다는 것이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에 대한 불신, 절망, 비겁함 그리고 반(反)민족적 주체화를 의미하지만 박영세로의 거듭남은 민족적 각성을 통한 진정한 자기의 발견에 이르는 길로서 역사에 대한 믿음, 용기, 피의 정화의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그의 스승의 스승이기도 한 만해 선사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한용운은 민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님의 시학’에 담아낸 혁명적인 민족시인으로서, 민족을 배신한 ‘배교자’로 의미화되는 이광수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이광수의 절망과 대비되는 한용운의 ‘용기’는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행동주의적 결단에 이르는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이광수적인 길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동일시하는 한용운, 신채호, 박은식, 예이츠와 정반대에 놓여진다.8)

그런데 과연 식민성의 극복이 필연적으로 민족성의 회복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복거일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에게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을 소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다기보다 아예 처음부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의 열망을 내장시키고 있다. 물론 이때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식민치하에서든 해방된 독립국가에서든 제고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전제로 규정된다. 히데요가 일본 출장 중에 묵었던 집의 주인은 과격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그 역시 민족주의자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히데요는 비난한다. 히데요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사회체제로서 별로 신중하게 탐구할 만 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히데요 자신이 이미 한도우 경금속의 유능한 직원으로서, 자본의 노예로서 부를 향한 욕망을 뼛속 깊은 곳까지 내면화하고 그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노동에 중독 되다시피 한 삶을 사는 전형적인 기업가적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복거일이 현재 이상적으로 설파하는 인간의 모델이 이미 히데요를 통해 투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다시 민족주의 문제로 돌아와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제국주의에 대한 피식민지의 저항을 떠받치는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을 시야에서 가리기 일쑤이다. 결국 많은 경우 식민지의 해방운동은 스스로의 국가를 지향하면서 그 국가를 절대화하고 신비화한다. 그러나 절대화한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식민주의가 식민지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지점은 바로 이 곳, 즉 탈주와 전복이 완료된 그 순간에 여전한 옛 지배자의 얼굴을 혹은 그를 닮아버린 자기 얼굴을 대면하게 만드는 그 역설의 지점일 것이다.

민족주의ㆍ국가주의로 제국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저항 민족주의 자체에도 이미 권력의 담론이 해방의 담론 밑에 은폐된 형태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는 비단 민족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을 계급적 실체로 파악하여 노동계급을 역사변혁의 주체로 전면화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외쳤던 민중민주주의 역시 그 속에 ‘비(非)-민중’을 전제하고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민족이든 계급이든 국민이든 그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집단주체의 기획을 통해서도 역사 속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민족’이나 ‘계급’, ‘국민’을 신화화하는 모든 권력 운동이 위험한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같이 대중의 혼을 사로잡는 절대 신앙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의 권력 비판 능력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서 권력지향적인 정치 신학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패권을 열망하며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면서 다중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를 획일적인 집단적 주체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러한 기획의 결말은 결국 파시즘일 뿐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기어코 작가는 히데요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는 적군을 등장시키고 만다. 위대한 민족주의의 서사를 복원해나가는 ‘남자들의 역사’(his story)를 위해 '여성'과 '어린이'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것일까?




이 소설이 영원히 내게 불편한 것은 바로 식민성을 내면화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식민성에 의지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의 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한민족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백성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허락해주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적 욕망을 담지한 기업가적 주체가 부정되지 않는 국민이나 민족이라면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탁월한 형식적 미학을 갖춘 작품이고 서사 역시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재밌는 소설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차원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길을 시종일관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1) 복거일,『현실과 지향』, 문학과지성사, 1990





―,『진단과 처방』, 문학과지성사, 1994

―,『소수를 위한 변명』, 문학과지성사, 1997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기업센터(CFE), 1998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2002』, 자유기업센터(CFE), 2002

―,『민중주의를 막아내는 길』, 자유기업센터(CFE), 2002

―,『진화적 풍경』, 자유기업센터(CFE), 2005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삼성경제연구소, 2005

―,『조심스러운 낙관』, 자유기업원, 2005

―,『21세기 한국-자유, 진보 그리고 번영의 길』, 나남, 2005





2) 복거일,『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알음(들린아침), 2003




3) 복거일,「한국의 보수가 부진한 까닭」,『한국의 보수를 論한다-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바오, 2005




4)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문학과지성사, 2003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SERI 연구에세이 003』, 삼성경제연구소, 2003




5)김현숙,「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우와 62년』의 의미」,『현대소설연구』, 한국현대소설학회, 1994, p396




6)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下), 문학과지성사, 1998, p219~234




7)권명아,「국사 시대의 민족 이야기-복거일,『비명을 찾아서』」,『실천문학』, 실천문학사, 2002년 겨울호, p37-38




8)같은 글,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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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 2007-05-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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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는 한 나는 비참한 도망자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라는 가정하에서 히데요라는 조선인(반도인) 지식인이 이제는 말살되어 없어져버린 조선의 역사와 글을 알게 되면서 겪는 고뇌와 분노, 절망을 그린 소설이다.

결국은 자신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간 내지인(일본인) 헌병소좌를 죽이고, 그는 조선글로 시를 쓸 생각을 하면서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험난한 길을 떠난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서.......

'길이 보이는 한 나는 비참한 도망자가 아니다. 길이 보이는 한 난 망명객이다. 내가 나일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이다'라고 자기자신에게 이르면서.......

시인인 히데요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처음으로 읽으며 눈물 흘리던 장면은 인상적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요즘의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와 연관하여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고 또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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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01-04-1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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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찾아서.



이 책의 장르는 대체역사물로 조선이 식민 상태가 지속되면서 그 지배를 받고있는 조선인들 까지

자신들이 식민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있다. 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설정일까! 식민상

태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라니...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식민상태에 있다는 것은 모르지만 자

신들이 조금씩 차별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히데요 역시도 그런 것을 느끼고 있

는 참이다.

히데요는 여러 영웅들 처럼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 하는...그런 타입은 아니다. 시집 몇권을 출간한

평범한 샐러리맨일 뿐이다.하지만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한글이라는 자신의 모국어를 알아가면서

점점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서 느낀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조선인들 마져 잊어버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향하는데... 그 후로 어떻게 될지

는 모르겠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대충 이렇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나온 다른 대체역사물과 격조가 다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훌룡항 대체 역사물인 것은 확실하다.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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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4-08-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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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여전히 식민지인 우주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치오 카쿠라는 일본물리학자가 쓴 "평행우주"란 책이 떠올랐다. 거기에 다중우주이론이란 것이 나오는데 임의의 관측이 행해질 때마다 양자적 분기점이 형성되면서 우주는 끊임없이 갈라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사건이 발생하는 우주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모든 우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만큼 현실적이다. 다중우주가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우주에서는 어릴 적 꿈을 이뤄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있을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지도 않은 우주가 존재할 수도 있다. 책의 처음부분에 작가가 과학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개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인 듯 싶다.

이 작품은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사살되지 않고 총상만 입고 회복되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온건주의자였던 이토오 히로부미의 영향으로 일본은 과격한 군국주의로 나아가지 않았고 그로인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을 모면하고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통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만주를 대륙을 침범하기 위한 기지로 아직까지(1980년대)까지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의식조차 없이 말과 글과 조선적인 모든 것을 잃고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내지인과 같은 조상을 두었고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민족이 분명한데도 반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데는 의문을 품기도하지만 그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반도에서 태어난 일본인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반도에 사는 일본인일 뿐이다.

주인공 히데요도 그런 일본인 중의 한명이다. 내지인으로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삶의 곳곳에 차별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왔고 군대에서 퇴역한 후 한도우경금속이란 회사의 과장으로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처지다. 경성에서는 제일 좋다는 아파트도 가지고 있다. 열렬한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아내가 있고 사랑스런 딸이 있고, 20년간의 결실로 만들어진 시집도 갖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지 모르는 시를 통해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합작투자건에 큰 공이 있음에도 조선인이라는 장벽 때문에 부장 승진에서 탈락한 후,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간 큰아버지에게서 히데요는 자신의 성이 기노시다(木下)가 아니라 박(朴)이란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고서점에서 "조선 고시가선"이라는 책을 통해 조선의 시를 조금씩 알게 되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말과 글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호기심은 점차 커져서 경성제국대학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남은 "조불사전"을 복사해서 가져 온다. 혼자 조선어를 공부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조선어를 썼던 사람이 낭독하는 시를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다.

그러던 중 한도우 경금속과 유사라무와 합작투자건으로 만나는 앤드슨이란 미국인을 통해 얻은 "뉴스월드"란 잡지를 통해 상해에 임시정부가 아직 존재하고 있고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는 글을 읽는다. 그런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히데오에게는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유월, 아내 세쯔꼬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장례에 참석하러 갔던 히데요는 샤꾸오우지(釋王寺)라는 절에서 쇼우고우(小空)스님으로부터 만해 스님의 책을 물려받게 된다. 그후 히데요는 합작투자 일로 일본에 출장을 가게 된다. 조선인이 내지로 들어가는 것은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히데요는 이 출장을 통해 조선에 대한 책을 더 구해보자는 목적이 있었다.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 육군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한다. 드디어 유사라무와 합작투자건에 대한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고 히데요는 조선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동경제국대학과 교오또오제국대학에서 복사해온 "조선통사, 조선어 회화, 삼국사기, 청구영언" 등을 반입하려다 공항에서 붙잡힌다. 경찰의 취조 끝에 책들은 모두 압수당하고 사상재교육을 통해 보호감찰로 풀려나게 된다. 이 사상재교육을 통해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자신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완전한 일본인이 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회사에서 사퇴하란 압력이 있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 히데요는 자신의 집에서 내지인인 아오끼 소좌와 밀회 중인 아내를 발견한다. 아오끼 소좌는 아내의 대학 후배의 남편으로, 세쯔꼬가 히데요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려고 부탁을 했던 인물이다. 아마도 아내는 남편의 석방을 위해 그에게 몸을 맡겨야 했을 것이다. 히데요는 용서하려 한다. 그런 아내가 가엾기까지 하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어쩌면 지금처럼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내의 생일, 히데요는 아내를 위로해주려는 마음에 생일에 몇 사람을 초대해서 파티를 연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대학 후배 부부도 초대한다. 그 자리에 혼자 온 아오끼 소좌의 도를 지나친 행동을 보고 히데요는 자신의 행동이 대범함을 보여주려는 치기어린 짓이었다고 후회한다. 결국에는 술이 취한 아오끼 소좌가 자신의 딸까지 추행하려 한다. 히데요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망쳐놓을지 알면서도 무서운 일을 실행하려 한다. 결국 그는 일본인 아오끼 소좌의 목을 조른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기노시다 히데요가 아니라 조선인 박영세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어쩐지 출발선에서 소설이 끝나버렸다는 미진함은 있지만 이렇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히데요가 살고 있는 조선은 이미 죽어버린 조선이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도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고 그런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그런 배경에서 주인공이 일본과 투쟁을 벌이고 무슨 커다란 변혁을 꾀한다는 설정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이, 아무 의식도 없이 살아가던 개인이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나가는 것으로 만족한 것 같다. 히데요가 지금껏 자신이 갈고 다듬어왔던 언어를 버리는 것이 시를 쓰게 해준 모국어를 배반하는 일이 아닐까 자책하는 모습에서,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일본 북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내 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아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기노시다 히데요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상재교육을 통해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고 있는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지금까지의 일이 그저 지나가는 감기였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엄청난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히데요가 살고 있는 시대의 배경은 군국주의의 일본을 연상시키기보다는 80년대까지 겪었던 우리의 군사독재시대와 쿠데타 등을 떠올리게 한다. 환경오염시설이 조선에 집중되어 있고 일본에 의한 통치가 조선을 잘 살게 했다는 걸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경성올림픽이 곧 개최될 것이라는 가정들이 곧 80년대 우리의 모습과 같다. 너무 현실과 똑같아서 이 소설이 대체역사소설인가 가상소설인가 그런게 맞나 싶을 정도다. 오히려 우리 80년대까지의 역사를 풍자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해설에도 보면 도조 히데끼가 박정희를 연상시킨다든지 하는게 나와 있기도 하고. 실제와 가장이 교묘하게 잘 결합된 소설이다.

아쉬웠던 장면들도 꽤 있었는데, 히데요가 시마즈 도끼에에게 애정을 느끼는 장면들에서는 느닷없다는 느낌이었다. 소년의 치기어린 사랑도 아니고 소설의 흐름상 튄다고 할까. 히데요가 도끼에에게 연연해하는 장면들이 꼭 필요했나 하는 느낌이다. 딱딱한 흐름에 재미를 위해서 넣었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히데오가 이따금 등장하는 여자들에 대해 육체적 충동을 느끼는 장면들도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이었다. 히데요란 인물설정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인물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까. 아무리 고뇌하는 지식인이라 해도 남자임에는 분명하니까. 가끔씩 보이는 너무 잘 쓰려 해서 어설퍼 보이는 문장들도 그렇고, 아마도 초기작이라서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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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 2007-10-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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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몇년 전부터 환타지 소설을 비롯해서 가상 소설이 많이 등장하는 거 같다. '~~~~이라면 '이라는 가정아래...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요즘 쓰여진 작품이라면 뭐 새로울 게 없겠지만 거의 15년 전쯤에 쓰여진 작품으로 지금 읽어도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신선할 정도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면... 바로 이 책의 가정이다. 당연히 언어도 없어지고, 문화재도 없어진다. 일본어가 국어다. 반도인(한국인)들은 내지인(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차별대우를 받는다. 반도인 여자들은 내지인 남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다.

주인공 히데요는 반도인이며 평범한 회사원이면서 시인이다. 시인에게는 언어가 생명인데...그런 히데요는 어느 날 우연히 조선어와 조선 역사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충격!!! 조심스럽게 조선어와 역사에 대해서 공부해 나가다가 결국 사상범을 붙잡히고, 자신의 가정을 파탄을 낸 일본인 소좌를 죽이고 길을 떠난다. 임시정부가 있었다던 상해를 향해...

처음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나올 거 같아 잔뜩 긴장하면서 읽었는데, 비교적 줄거리는 간단했다. 그래도 작가의 입담이 좋았고, 간간힌 나오는 시를 읽는 재미도 좋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라면 처음에는 속도가 느리고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져서 큰 사건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히데요가 조선어와 역사를 알고 충격 받는 부분도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어색한 느낌을 줬다. 그리고 일본인 소좌를 죽이고 상해로 향해 떠나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소설을 얼른 마무리 지으려는 느낌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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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데 2002-09-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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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비극

회사가 갑자기 정전이 되는 통에 휴게실에 앉아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나온 역사 얘기가 이 소설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영화 '2009년 로스트 메모리즈' 얘기도 나왔지만, 그거야 설정만 아주 살짝 빌려 쓴 정도에 불과하니 별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거일 씨가 이 소설의 얼개를 짜 맞춘 솜씨는 참으로 경탄할 만합니다. 이리저리 배치해 둔 설정들이 이 '대체 역사 소설'에 마치 진짜 역사처럼 보일 정도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는 걸 보면 작가의 역량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대해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에만 너무 집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SF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틀에 불과한 것일 뿐, 거기에 담겨 있는 주제와 사상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진 '가짜'가 아닌데도 그 '틀'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아이디어는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형식보다는 주인공이 '시인'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를 사랑하고 갈고 다듬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선조가 사용하던 잃어버린 진짜 언어를 마주할 때의 충격은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라 할 '언어'가 부정된다는 것은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가 없어지는 것과 같았겠지요. (이런 점에서 영화 로스트 메모리즈와는 차원과 품격이 다르죠.) 소설 후반부에 주인공이 다소 파멸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그가 바로 시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로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겪은 셈이니,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이또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기발한 설정이 아니라, '남의 언어로 시를 짓던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마주하게 된다면'이라는 비극적인 설정에서 착안했을 이 소설에 '어느 시인의 비극'이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상황 설정이야말로 이 시인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사소한 주변 장치에 불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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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zzlist 2002-07-0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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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별난가? ㅡ.ㅡ;;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대체 역사”의 개념은 적어도 우리 문학에서는 신선한 것입니다. 작품의 가치를 결정 짓는 요소에 표현 형식의 신선함이 포함된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대체 역사”라는 신선한 표현 형식을 취했다는 점만으로도 분명 인정 받을 만한 면이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 소설에 대한 호의도 주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 소설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인물들이 전형적이고 단순해서 별로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물들의 대화에 현실감이 없고 겉 멋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또한 줄거리 속에 주인공과 회사 여직원의 관계를 배치한 것 역시 작가의 의도는 이해가 되나 주제의 구현에 기여를 한다기보다는 왠지 엉뚱하게 튄다는 느낌을 받았고 심하게 말하면 신파극 같은 느낌 조차 주기도 했습니다. 간간히 시도 나오는데 –아마 작가가 지었겠지요- 그 시들도 제가 보기에는 별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 소설에 원한이 많은 듯, 이 소설에서의 “고급스러움”, “가벼운 냉소” , ”진지한 풍자” 마저도 저에게는 왠일인지 설익은 치기의 소산인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대체 역사라는 형식은 신선하고 주제 의식도 그릇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앞에서 많은 분들이 해 주신 격찬에 어울릴 만한 기본적인 자질은 갖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이 소설의 그러한 거시적인 면모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시적인 면모들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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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 시인 2002-12-1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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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왜곡, 과연 옳은 것인가?-碑名을 찾아서



요즘 일본 열도와 한반도는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로 시끄럽다. 일본은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는 마지막 행동으로 과거의 삭제를 택한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제기한 책이 있다. 바로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이다. 이책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한 평범한 한도우징(반도인)이 자신의 과거였던 조선에 대해 공부하다가 사상범으로 몰려서 옥살이를 한다. 그러나 자신을 빼준 아내의 친구의 남편인 헌병소좌이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사람이 자신의 딸까지 건드리자 소설속의 '나'는 헌병소좌를 죽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떠난다,

이 소설속에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한 이후로 분리되지 않고 쭉 이어져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소설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조선침략이나 중국침략에 관한 역사를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태도는 항상 같은것 같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일본에게 협조를 해주길 원한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2위의 경제대국이였다. 그러나 부동산 투자로 인해 돈을 날려버렸다. 그것은 부동산이나 증권시장에 투자 하는 회사에는 많은 돈을 빌려주었는데, 1980년대의 버블경제가 끝나면서 부동산과 주식값이 반이상 폭락하면서 부실채권(돌려받지 못하는 돈)이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했다. 1998년 12월 말 일본의 19개의 주요은행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은 무려 57조엔,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570조원이나 된다, (우리나라 1년 예산 총액=90조원)57조엔의 부실채권가운데에서 가능성이 있는 5조 4천억엔을 뺀 약 49조 6천억엔을 떼이게 되어 경제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엔화가 설자리가 좁아졌다. 그러자 일본은 '아시아권의 나라들에게 엔화를 중심으로 아시아는 뭉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당한 한국과 중국이 동참해줄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즉 국치일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왜곡을 공개적이고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학생들을 세뇌시키는 방법이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얼마전에 개정된 일본의 교과서에도 과거를 더럽혀 놓았다. 예를 들어 조선 침략은 조선진출로, 3.1만세운동을 3.1폭동으로, 조선어 일체 사용금지를 조선어,일본어 공용사용으로, 창씨개명 강조를 창씨개명 권장으로 봐꾸는 등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악한 이미지를 벗자고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발전에 역사왜곡은 열사왜곡을 반대하는 아시아권 국가들에 의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고이즈미 일본 전총리가 아스쿠니 신사를 공개참배하는 문제로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들썩했었다. 우리나라 사람중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일본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나? 있을텐데 왜 저렇게 시끄럽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나면 당신은 속에서 꿈틀할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다른 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죽은자, 혹은 우두머리가 죽으면 영정을 안치하는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물런,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거의 모든이들의 영정이 있는곳이다.

이 일을 한층 더 깊게 살펴보자면 약간 혼란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1980년대에 양심적인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과 사회당은 "우리는 침략전쟁의 과거를 인정하고 무장을 하지말자. 그것은 헌법 제 9조에 어긋나는 일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 제1의 정당인 자민당과 대다수의 일본지식인의 반대로 이 주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일본 집권층의 잇단 망언과 그들의 일그러진 역사의식은 바로 재전쟁의 의미로 해석해 볼수가 있는 만큼 우리는 신중히 생각하고 대응해야한다.

우리는 충분히 아픈역사를 겪었고, 또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만이라도 한반도의 빛나고 희망에 찬 역사를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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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탱이 2007-01-03 공감(1)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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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찾아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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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상황과 지식인의 이념의 상관관계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읽기가 쉬워야 한다. 이 책은 내게는 읽기가 무척 힘들었다. 마치 20~30년 전에 출간된 책들처럼 글자가 어찌나 작은지 도무지 한참을 읽어낼수가 없었다. 보관하고있는 책들중에 다시한번 읽어보고싶은 책들이 있어도 펼쳤다가 작은글자에 질려 도로 책꽂이에 꽂아넣곤 했다. 이제까지 책의 활자체나 편집에 불만을 품은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의 통증을 참아가며 읽은것은 1984년 첫 발행을 시작으로 초판이 29쇄 재판이 8쇄나 발행되었다니 도대체 어떤내용이길래 그렇게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시작부분 때문에 '뭐야 ?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인가?'하는 냉소를 지었는데 , 읽어가며 수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신의 뿌리를 전혀 몰랐던 주인공이 각성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눈을 돌리는 장면은 매우 흥미롭다. '문득 명치께가 결려왔다. 그는 멈춰서서 아픈마음으로 둘러다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비참한 가난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들 , 이 조선인들...... 이 사람들의 이토록 처참한 삶을 두고 시는 무엇을 할수 있는가? 내가 밤을 새워 다듬은 시들이 이들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할수 있는가? '' 생각을 하는것이 아니라 마치 절규하는것 같다. 시대적 상황과 ,지식인과, 민초들과의 함수관계는 많은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고 역사적 현실로서도 풀기어려운 난감한 문제이기도하다.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의 여정은 무리가 없어서 밋밋하다는 것이 오히려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현실은 그렇게 극적인 것이 아니니까.

주인공을 40세로 설정했다는 것도 충분한 공감이 간다. 젊었더라면 치미는 열기를 자제할수도 없었을테고, 그렇게 차근차근 자신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을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얻은 수확- 한용운 님의 '알수 없어요'를 몇번씩이나 읽어보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지를 처음알았다. 어렸을때 몹시 더운날 엄마를 졸라 아이스바를 하나 사왔는데 열어보니 두개가 들어있었을때 느꼈던 행복감! 이 책을 읽으며 눈은 많이 아팠지만 충분히 감수할만 했다. '우연히 찾은 헌 책 한권이 한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바꿔놓다니-'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좋은 책 한 권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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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공주 2003-06-23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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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복거일의『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이런 줄거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중에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다시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김명석이 쓴 논문「SF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소설『비명을 찾아서』의 서사 비교>를 읽고 비로소 두 작품 간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김명석은 두 작품의 등장 인물의 성격과 서사 상의 시간 구조, 작품에 내재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 등을 꼼꼼하게 비교ㆍ분석하고 있다.

김명석도 지적하듯이 나 역시 대체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 영화라는 장르 상의 차이를 감안한다하더라도 영화는 소설에 비해 역사와 자아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상력이 현저하게 천박하고 통속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이 소설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재밌으며 무엇보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주의와 국사, 국가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작품이 드러내는 이 명확한 주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진리성과 자본주의체제의 공적(公的) ‘정의’(?)를 변호하는 데 헌신해온 자유주의 이데올로그 복거일1)의 그 유명한 소설 데뷔작을 드디어 이번 기회에 읽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보이지 않는 손』을 얼마 전에 서점에서 본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예전부터 우리 사회의 일상의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복거일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게 상당히 중요하고 또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알다시피 복거일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보수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고루한 근대적 사고의 산물인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과 시장의 무한경쟁을 보장하는 ‘자유’라는 이념 그 자체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무능한 보수주의 일반마저 강력히 비판해온 요즘 말로 소위 ‘New-Right’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2) 또 친일 행위의 평가와 단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존의 통념을 갖고는 ‘친일파’를 명확히 정의할 수도 없고, 오히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의 삶이 조선왕조 통치 하의 그것보다 훨씬 나았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친일파 옹호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탈-근대적’ 역사 감각을 소유한 자유주의자인 것이다.3) 게다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 설파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이 주도하는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사용하지 못해 입는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영어공용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국제적 감각을 지닌 ‘세계시민’(cosmopolitan)이기까지 하다.4)

이렇듯 복거일은 자신이 신봉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탈근대적 자유주의자 곧 신자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가 최초로 쓴 87년의 장편 소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의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을 다시 본다면 스스로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까싶다.



다른 독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도 이 작품이 성취한 새로운 기법으로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를 소재로 한 점에 큰 흥미를 느꼈다.『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소설 속에 다시 다까노 다쯔기의『도오꼬우 쇼우와 61년』이라는 소설을 끼어 넣어 두어 실재하는 역사를 뒤집으면 소설의 세계가 성립되게 만들고, 그 소설의 세계를 뒤집으면서 ‘소설 속 소설’의 세계가 형성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소설의 세계를 빠져나온 소설 속 소설의 세계는 독자인 내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의 역사와 축을 같이 하는 세계임을 말한다.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백 년의 고독』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해독하던 멜퀴아데스의 양피지 원고가 결국 독자가 읽어 온 마르케스의 소설『백년의 고독』이었던 것처럼 환상의 역사와 실제의 역사, 소설과 현실, 소설과 소설 내의 세계 간에 존재하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에 대한, 또는 문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역사의 사실성은 문학의 허구성에 의해 문학의 허구성은 역사의 사실성에 의해 서로 허물어지고 해체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가, 문학 속으로 이입되는 역사와 함께 문학 속의 인물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과거/미래의 시간의 질서도 해체되고 독자들은 역사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설에서 기발한 점은 총 109개의 절마다 다 배치되어 있는 에피그람이다. 처음에는 이 에피그람이 각 절 본문의 내용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했으나 독서가 진행될수록 이것들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소설 내 역사적 사건을 의미해서 쓰인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 존재하는 저서들부터 작가가 창조한 저서들, 가상의 잡지, 실제 역사연표들까지 매우 다양한 장르의 에피그람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느 것 하나도 의미없이 사용된 것이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가령 작품 내부에서 조선인들에게 금서로 되어있는 것으로서 동서양 관계에서의 일본의 위치, 일본의 정치, 일본의 미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노 히사이찌라는 사상가의 '독사수필'이라고 하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작가 복거일이 소설 내에서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 지어낸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서 지식과 사회에 대한 평가의 시선과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5)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가 복거일이 이러한 대체역사의 기법을 통해 과연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실마리가 소설의 제목인 ‘비명(碑銘)’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가 찾는 ‘비명’(碑銘)이란 대체 무엇인가? 작품에서 이 ‘비명(碑銘)’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조선인이면서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가야마 미쓰로, 즉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 ‘여기 잠들다’이다. 이광수 및 이광수적인 선택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감옥에 갇혀 갱생교육을 받을 때 만난 조선 문단의 중견급 평론가이자 조선 평론가협회의 간사인 하꾸야마와를 통해 히데요에게 전달된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길은 ‘조선적인 것’ 즉 한용운이나 박은식의 길과 대비되어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6) 그에게 이광수적인 것은 “조선 민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독립을 선언하노라”고 주장하는 다이쇼(大正) 6년의 민족주의자 춘원 이광수에서 “하루라도 속히 황민화될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쇼와 4년의 배교자 가야마 미쓰로로 상반된 방식으로 호출된다. 가야마 미쓰로, 혹은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를 믿지 못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자신의 기원인 ‘민족’을 부정해 버린 역사의 ‘전범’으로 호출된다.7) 물론 히데요는 그러한 이광수의 길을 바로 잡기 위해 그의 비명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문제는 그가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한 이광수를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려든다는 것이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에 대한 불신, 절망, 비겁함 그리고 반(反)민족적 주체화를 의미하지만 박영세로의 거듭남은 민족적 각성을 통한 진정한 자기의 발견에 이르는 길로서 역사에 대한 믿음, 용기, 피의 정화의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그의 스승의 스승이기도 한 만해 선사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한용운은 민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님의 시학’에 담아낸 혁명적인 민족시인으로서, 민족을 배신한 ‘배교자’로 의미화되는 이광수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이광수의 절망과 대비되는 한용운의 ‘용기’는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행동주의적 결단에 이르는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이광수적인 길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동일시하는 한용운, 신채호, 박은식, 예이츠와 정반대에 놓여진다.8)

그런데 과연 식민성의 극복이 필연적으로 민족성의 회복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복거일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에게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을 소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다기보다 아예 처음부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의 열망을 내장시키고 있다. 물론 이때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식민치하에서든 해방된 독립국가에서든 제고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전제로 규정된다. 히데요가 일본 출장 중에 묵었던 집의 주인은 과격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그 역시 민족주의자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히데요는 비난한다. 히데요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사회체제로서 별로 신중하게 탐구할 만 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히데요 자신이 이미 한도우 경금속의 유능한 직원으로서, 자본의 노예로서 부를 향한 욕망을 뼛속 깊은 곳까지 내면화하고 그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노동에 중독 되다시피 한 삶을 사는 전형적인 기업가적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복거일이 현재 이상적으로 설파하는 인간의 모델이 이미 히데요를 통해 투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다시 민족주의 문제로 돌아와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제국주의에 대한 피식민지의 저항을 떠받치는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을 시야에서 가리기 일쑤이다. 결국 많은 경우 식민지의 해방운동은 스스로의 국가를 지향하면서 그 국가를 절대화하고 신비화한다. 그러나 절대화한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식민주의가 식민지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지점은 바로 이 곳, 즉 탈주와 전복이 완료된 그 순간에 여전한 옛 지배자의 얼굴을 혹은 그를 닮아버린 자기 얼굴을 대면하게 만드는 그 역설의 지점일 것이다.

민족주의ㆍ국가주의로 제국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저항 민족주의 자체에도 이미 권력의 담론이 해방의 담론 밑에 은폐된 형태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는 비단 민족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을 계급적 실체로 파악하여 노동계급을 역사변혁의 주체로 전면화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외쳤던 민중민주주의 역시 그 속에 ‘비(非)-민중’을 전제하고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민족이든 계급이든 국민이든 그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집단주체의 기획을 통해서도 역사 속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민족’이나 ‘계급’, ‘국민’을 신화화하는 모든 권력 운동이 위험한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같이 대중의 혼을 사로잡는 절대 신앙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의 권력 비판 능력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서 권력지향적인 정치 신학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패권을 열망하며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면서 다중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를 획일적인 집단적 주체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러한 기획의 결말은 결국 파시즘일 뿐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기어코 작가는 히데요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는 적군을 등장시키고 만다. 위대한 민족주의의 서사를 복원해나가는 ‘남자들의 역사’(his story)를 위해 '여성'과 '어린이'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것일까?

이 소설이 영원히 내게 불편한 것은 바로 식민성을 내면화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식민성에 의지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의 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한민족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백성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허락해주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적 욕망을 담지한 기업가적 주체가 부정되지 않는 국민이나 민족이라면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탁월한 형식적 미학을 갖춘 작품이고 서사 역시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재밌는 소설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차원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길을 시종일관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1) 복거일,『현실과 지향』, 문학과지성사, 1990





―,『진단과 처방』, 문학과지성사, 1994

―,『소수를 위한 변명』, 문학과지성사, 1997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기업센터(CFE), 1998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2002』, 자유기업센터(CFE), 2002

―,『민중주의를 막아내는 길』, 자유기업센터(CFE), 2002

―,『진화적 풍경』, 자유기업센터(CFE), 2005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삼성경제연구소, 2005

―,『조심스러운 낙관』, 자유기업원, 2005

―,『21세기 한국-자유, 진보 그리고 번영의 길』, 나남, 2005

2) 복거일,『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알음(들린아침), 2003



3) 복거일,「한국의 보수가 부진한 까닭」,『한국의 보수를 論한다-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바오, 2005





4)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문학과지성사, 2003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SERI 연구에세이 003』, 삼성경제연구소, 2003



5)김현숙,「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우와 62년』의 의미」,『현대소설연구』, 한국현대소설학회, 1994, p396





6)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下), 문학과지성사, 1998, p219~234





7)권명아,「국사 시대의 민족 이야기-복거일,『비명을 찾아서』」,『실천문학』, 실천문학사, 2002년 겨울호, p37-38





8)같은 글,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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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 2007-05-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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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찾아서를 읽고

내용은,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가상의 역사 속에서 우리말과 역사가 말살된 상황 속에서, 한 기업체의 과장이며 시인인 '반도인' 주인공이 자신의 민족과 뿌리를 어렵게 찾아내고 그 때문에 가해진, 그리고 가해질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 망명을 떠난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실험적인 방식의 문학작품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일제 군벌이 통치하는 식민지적 정치 상황이라는 가정의 역사가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 즉 식민지적 상황과 권위주의적 정권하의 독재적 상황을 연동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학이라는 것을 사회의 형성, 변화, 발전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감성적, 방관적 영역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 사회를 들여다보는 투시경의 역할을 가진 기재로 만들었다는 점은 매우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쓰여졌던 당시의 상황에서 눈을 돌려, 저자 복거일이 바로 어제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 다시 소설을 읽는다면 처음엔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지식인'의 비열과 나약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복거일의 주장은 '경제논리'와 '합리주의'라는 바탕위에 서 있다. 그는 이미 국제어로 자리잡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경제적 손실이 클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몰락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에 '경제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훨씬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미 영어는 세계어다. 그렇다면 당연히 영어를 취하고, 모국어를 버리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 약자는 강자와의 경쟁에서 미리 포기하고, 흡수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질 것이 뻔한 싸움에 무엇하러 나서는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미국에 순순히 복종하고 미국의 식민지로 사는 것, 그래서 미국의 52번째 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 노예적 삶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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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영 준 2003-11-0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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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잊지 않는 다는 것은?

2013 결국 뿌리라는 것은 중요한 것,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살아야한다. 현재 국가라는 것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는 문제지만 민족이라는 것은 다르다. 지금 우리나라가 일본이라면...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민족이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타민족 타국가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조금은 개탄스러우며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지키미 2015-09-2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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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있는 자리

이 책은 '대체 역사'라는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른 역사적 가정 아래에서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우리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을 얻지 못하고 계속 식민지로 살면서 결국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그 내용인데 사실 좀 우울한 내용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가정 하에 이루어진 대체 역사는 놀랍게도 우리의 지금의 모습과 흡사한 부분이 있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사가 많이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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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동우 2002-12-2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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