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3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1 세종은 어떤 나라를 꿈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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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어떤 나라를 꿈꿨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1회
법률방송
75,130 views  Oct 2, 2024  #한국인 #역사 #함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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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1번째 시간에는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 사람과 고려 사람을 비교했었던 2회 방송에서 더 깊이 들어가 그렇다면 과연 조선은 고려에서 무엇을 달리 하고 싶었기에 주자학을 들여와 새 나라까지 만들려고 했었던 것인지, 또 그 주자학이 태동하게 만든 중국 송나라의 상황은 어떠했었는지 살펴봅니다.

송나라와 강남농법 그리고 주자학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변화의 순간에서 조선이 배우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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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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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한재봉 있니다 지난 시간에는 기독교 개신교가 조선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그래서 조선을 어떻게 밑으로부터 바꾸면서 이제 조선
사람이 근대인으로서 이렇게 바뀌어가는 초기의 모습을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그래서 고려 사람에서 조선 사람으로 바뀌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게 뭐냐면 주자 성리학이라고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 국가였던 나라를 주자의 나라로
바꾸는 것이 고려해서 주선으로 바뀌는 과정이죠 그러면 그럼 왜 왜 이때에
도대체 조선 사람들이 주자
성리학이라고 됐는가 왜 그게 좋아 보였기에 그게 중국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상을 굳이 들려와서 장가가든 사람을 다 시작
시작하게 하면서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면서 까지 도입하려고 했던 그
주자 성약에 뭐였고 왜였을까 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한국인의 탄생 이제
[음악] 시작하겠습니다네 오늘의 주제는 어
조선은 왜 어 주작을 도입했을 이렇게 한번 잡아봤습니다
어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는 어 저희가 이회창과
3회차에서 어 조선 사람하고 고려 사람 고려 사람하고 조선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이런 거를 어
다뤄보면서 그때에 뭐 이제 고려 시대에는 장가 가든 사람들이 시집을 가게 되고 이제 이런 이런 쭉 그 그
말씀을 드렸었는데 이제 그렇게 된 연유가 뭐냐면 조선이 주자 하기라는
거를 주자 성리학이라고 첨 상을 오면서 그 주자 성리학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어 제도들 새로운 어
관습들 그죠 새로운 예들 이런 거를 이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고려 사람하고 다른 조선 사람이 이제 형성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이 주자라는게 도대체 뭘까 우리가 늘 수없이 많이 듣고 그리고
이것도 기억하실지 몰라도 우리가 그 일본 어 개화파가 만들어질 때에
1876년에 어 김기수가 1차 수신사 일본에 건너가서 거기서 이제 일본
관리를 만나서 쿠키라는 사람을 만나 가지고 얘기를 할 때도 그 일본
사람이 그 김기수 보고 아니 조선에는 주자학 밖에 없습니까 그랬더니 아주
자랑스럽게 우리는 주자 밖에 모르고 주자만 공부하고 만일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우리는 사문 난적이 그래서
뭐 불교우주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란 새 나라를 세워 가면서까지
들여오려고 했던이 사상이 체제이 제도 언제 만들어져서 어떻게 도입이
됐는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자라는 사람이 남송 때에
만들어낸 사상입니다 그러면 그 남성이라는게 송 나라라는게 도대체 무슨
나라였었소 그게 뭐가 좋아서 조선이 그걸 저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예를 들어서 세종이 장가 가은 사람들을 다 시식하게 만들고 이런 거를 했는가 그걸 이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린 대로 주자가 남송 사람입니다 그럼 남성이란
나라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 하면은 이런 겁니다이 남성이라는 나라 뭐 북송 그랬지만
특히 남송에 보면요 중국의 역사상 가장 경제적으로 번창했던 왕조
그전에 있었던 당나라 수나라 당나라다는 뭐 비교할 수 없이 잘 살았고요 그리고 그다음에 오는 그
원나라 특히 나라보다도 훨씬 잘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강이 날
잘 사는 나라였었소 나라의 영화 그리고 그 그
그 송나라가 이룩한 그 경제 발전과 그거는 조선이란 나라가 거기에서
발달한 그거를 받아들이고 주자학을 받아들이려고 한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퍼져나갑니다
그게 뭐냐면 마르코 펠로의 동방 견문록 같은게 바로 송나라가 이룩한
그 경제 발전을 보고 서양에 가서 야 이렇게 발전했다는 걸 알리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일단 그때에 그 송나라의
영화를 이룩한 것이 기본이 되는게 뭐냐면 강남 농법이라고 지금 우리가
강남 하면은 서울에서도 강남이 잘 사는 지역으로 돼 있지만 원래 그
강남이라는 말 그리고 그 어원이 뭐냐면 중국의 강남입니다 양자강
강남입니다 중국에서는 강 짱난 그러면 양자강 유역 그걸 강남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이 강남에서 강남이란 데가 발달을 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이 부기 영화를 놀란 경제 발전상을 조선도 들여오려고
했었던 겁니다 그런데이 강남이 얼마나 잘 사는 지역이라는 거는 사실은 이미
고려 때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고려사 기록을 보면은 이런 기록이 하나 나오는게
있습니다 충렬왕 17년 6월에 그러니까 년입니다
1291년 충렬왕 17년 6월에 원에서 해도 후 황과 장유 천호 은실
당세를 보내어 선박 4척에 강남의 쌀 만석을 싣고 와서 굶주린 사람들을
진유하 하였다 세자가 일찍이 원 황제에게이 아뢰기를 근래의 나라
사람들이 전쟁과 군량 수성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여 기근이 들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러한 하사가 있게 되었다
이게 뭐냐면요 이게 지금 원나라의 황제가 쿠빌라이 쿠빌라이 그 유명한
쿠빌 라이고 근데 고려의 세자가 쿠빌라이 테 부탁을 해서 원내
황제한테 부탁을 해서 우리가 지금 너무나 뭐라고 나옵니까 전쟁과 굴 군량 수송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해서
고려 사람들이 너무나 기근이 들었다 도와달라 그랬던 겁니다 이게 뭐냐면요
그때에 원나라가 쿠빌라이가 일본을 정벌하다 그래서 뭡니까 고려 보고
해군을 을 기르라 그래 갖고 여몽 연합군이 그때 일본을 쳐 들어갔었죠 두 번 다 실패를 합니다 그때 뭐
가미 카제라 것 때문에 실패를 하지만 아무튼 그때에 이제 막 고려가
원나라의 속방 속국으로 이제 전쟁 준비를 하는 와중에 농사를 못 줘서 이제 굶어죽게 됐으니까 도와달라
하니까 그때에 강남살면 그을 쿠빌라이가 이제 보내는 거죠 이게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 최초로 나온 강남에 대한 언급입니다 자 그럼 강 강남이 뭐냐면요 아까도
잠깐 말 말씀드렸지만이 마르코폴로가 마르코 폴로라 그 이탈리아 상인이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까지 오는 거죠 원 나라에까지 와서 그때 이제 그 북크 빌라를 만나고 원나라에서 어 얼마
동안 있습니까 중국 체류가 1275년 17년을 어 중국에서 체류를 하면서
완전히 이제 중국을 알게 배우게 되는 거죠 근데 이때에 17년을 살고서
돌아가서 이탈리아에 돌아가서 쓴 책이 그 유명한 동반 동방 견문 녹입니다
근데 이제 거기에 보면은 그 동방 경록 원서에 보면 지금 여기 보시는이
사진 저 그림이죠 이게 그니까 서양 사람들이 그린 그림이지만 어쨌든 어
그 마르코폴로 일행이 쿠빌라이칸 테 어 그 아련 쿠빌라이를 아하는 이제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정말 세상에 이런 부강한 나라가 없다라는 얘기를
이제 하면서 그 중에서서 참 재밌는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도자기를 도자기를 포슬렌이라 그럽니다
우리나라의 뭐 고려 고려자기 뭐 그릇들 접시들 이런 것들 있지 않습니까 그걸 다 포슬렌이라 그러는데
그 포슬린이 말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은 저도 이거 처음 알았는데요 마코
폴로가 중국에 가서 송나라 때부터 나오는이 반짝반짝하는 자기들을 처음
본 거예요 이런 그릇을 유럽 사람이 그래서 그 사람이 그거를 그때 오면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거를 뭐에다 비교를 했냐면
포셀라인게 있습니다 근데이 조개가 껍질이 반짝반짝하고 그래요 반질반질하고 그래서 마코 폴로가 야
이거 포셀라인 그하고 이렇게 반짝하는게
그래서 그때부터이 자기가 포슬린이 됐다라는 겁니다 그니까 이런게 전부
다이 마리코 폴로가 와서이 원나라의 영화를 부기 영화를 보면서 이제
놀래서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이 강남이라는 데가 뭔가 중국의 강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왜냐면
우리가 중국을 보시면요 중국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문명의 발상지를 우리가
보통 황하 황하 유역이 배웁니다 역사책에서 그럼 황하 유역에서 중국 문명이 발 그 만들어지는데 지금
말씀드린 강남은 양자강 있니다 양자강은 황하 다 저 밑에 훨씬
남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양자강은 중국 역사 상에서는 송나라 때
이전에는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역사는 우리가 보통 중원이 걸 중심으로 해서 근데
중원이란 건 뭡니까 황하의 주변을 중원 있니다 그리고 양자강의 완전히
이북 있니다 거기가 중원 있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중원을 제패하고 하는 전부 다 그 북적이고 그리고 황하
유역에서 모든 문명이 그러니까 서안 시안 그러니까 장안이 우리가 하는 그
장안 같은 것도 저 황하 유역에 있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문명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는 거죠 근데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는 여러
계기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이 안녹산의 난이라는 겁니다 안녹산의 난이 중국 역대 최고의 미인이라 양기
때문에 아는데 그때 뭐 간략하게 말씀드리는 거죠 어 당현종
당 최고의 황제라고 일컬었던 정말 대단한 그 치세를 이루었던 황제였던
그 황제가 이제 양귀비는 그 후궁을 드리는 거죠 근데 이제 양귀비 이제
완전히 홀딱 빠지고 그런 과정에서 이제 양귀비가 모든 권력을 잡게 되고
그리고 이제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이라 사람이 또 권력을 잡습니다 자 그런데
양귀비가 굉장히 아던 장군이 하나 있는데 그게 냐면 산이라는 사람입니다
근데 여러분 안록산은이 그림에서도 보시듯이 원래 루어 루어 이라는데이
누구냐면요이란 사람입니다 그니까 페르시아인이에요 그니까 당나라 때부터 해서 중국은 저적 페르시아이란
지금의이란 지역 사람들까지도 다 같이 그 왔다 갔다 하고 이제 그랬던 나라입니다 근데 양귀비가이 사람을
굉장히 아꼈습니다 그런데 권력투쟁이 일어나서 양귀비가
오라 들면서 안산하 대립을 하게 됩니다 안산을 이제 내 쫓게 되니까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755년 일어나서 763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때 보시면요이
스티븐 어 어 핑하고 저 핑크하고
지금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심리학자 많은 분들이 아실 텐데 그 사람이 쓴
책에 보면은 어 우리 안에 선한 천사 the better Angel of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은이
안녹산의 난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실제로
통계를 보면 이렇습니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인 당나라의 755년
인구가 590만 있었었고 가구수가 890만 가구였다 난이 끝난 다음에 인구가 7
76년의 인구가 1600만 가구수가 290만 가구로 줄어듭니다 그러니까
6년 사이에 인구가 3,600만 명이 감소를 합니다 그러니까 놀 엄청난
파괴가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이 파괴가 일어날 때에 중국의 중심이었던 강북에 있었던
사람들이 전부 다 강남으로 피해가는 겁니다 전쟁을 피해서 전부 다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이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면서 황하 유역이 아니라
양자강 유역이 중국 역사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게 당나라가 망하면서
송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할 바로 그딴 그때가 됩니다 그래서이 지도에
보시면은이 송나라가 어 강 북에서부터 이제 밀려서 밀려서 밀려서 내려와서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이 강 지금으로 치면은 양자 방금 말씀드린
양자강 남북으로 해 갖고 이제 자리를 잡게 되는게 이제 송나라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런데 피해는 왔지만 사실은 장이라는 데가 원래가 비옥하게
이을데 없는 데였습니다 그걸 다 알고 있었어요 중국 사람들도 옛날부터 그래서 그 비옥한 땅이었던 건데 다만
그렇게 개발을 못 했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이제 송나라가 어쩔 수 없이
황하 유역에서 양자강 유역으로 밀려서 내려오면서 그때부터 양자강 유역을 본격적으로 개발을 합니다 그때 이제
나오는 대표적인 유명한 어 관리가 그 대정지 아가 누구냐면 왕한석이라는
정치가입니다 그럼이 왕한성이라 사람이 뭐를 했느냐이 사람은 사실 대단한
행정가 있습니다 그래서이 사람이 천개의 관계 치수 사업을
추진을 했다 그럽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둘레가 42km 되나 되는 큰
저수지도 건설을 하고 1만 헥타르 여러분 상상을 초월하는 농토를
농지를 개관을 합니다 이게 왕한석 있니다 그래서이 사람이 이게 지금
자세히 보시면 이게 상해가 있고 항주가 있고 그런데 이게 지금 소위 말하 양자강 삼각주는 지역입니다이
양자강 삼각주의 지역이 중국의 옥토
미국으로 나파 밸리 같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옥한 땅입니다 이게 이제 그 중국의 농업 생산의
핵심이었던 지역인데이 지역이 사실은 완전히 바닷물에 바닷물에 쩔어 있던
지역인데이 지역을 한석이 들어와서 이런 사람들이 들어와 갖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거를 다 막아버리고 거꾸로 바닷물을 다 빼 버리면서 엄청난 토목
사업을 벌리면서 그거를 전부 다 세계 최고의 비옥한 농토로 바꿔버리는게
왕한석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이 지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항주 어
소주 양주 중국 역사상 가장 비옥하고 잘 사는 도시들이 그 이제 최근에는
상해까지 나오지만 그 도시들이 있는 지역이 바로이 양자강 삼각주 지역이
되는 겁니다이 지역을 지금 송나라가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이
지역에서이 강남에서 뭐가 냐면 강남 농법이라고 양자강 유역이 개발되면서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농법 있데 그게 뭐냐면 모입니다 이앙법이라고 이제 얘기를 하는데 그게 뭐냐면 그
전에는 그냥 모를 갖다 심었던 거죠 근데 그렇게 하지 않고 모판에 그
별을 모정을 해 놓으면은 어떻게 됩니까 요만한 모판에서 어느 정도 자할 때까지 벌레가 있으면 벌레도
잡고 병충해도 잡을 수 있고 굉장히 쉽게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잘한 다음에 그때부터 우리가
하는 모내기를 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강 건강하게 모가 자라납니다이 모내기
이양의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을 하면서 이게 이제 양자강 역의 그 넓은
옥토에서 채택이 되면서 급 하게 농 그 그 농업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이제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송나라 때의 그림이지만 왼쪽 거를 보시면 이제
모내기를 우리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볼 수 있는 그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 보이고요 그다음에 옆에 있는 거는
뭐냐면 이게 수입니다 수라는게 뭐냐면이 사람들이 기술이 발달을 해서
아무데나 논을 만들 수가 있어요 논은 뭐냐면 여러분 물이 많아야 됩니다 그 물을 대는게 핵심입니다 그러니까는
지금 보시면은이 아이들이 수 를 만들어서 이렇게 낮은데 있는 물을 기
길어 올려 갖고 지금 논에다 물을 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이런 모든 기술이 그
당시에 이제 중국 강남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 유명한 중국의 계단식 논입니다 논이라는게
여러분 물을 많이 대야 돼요 물이라는 거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안 가지
않습니까 그건 수차는 것이 있어야 되죠 물을 길어 오르는 기계가 있어야 되는 거죠 근데 그 수라는 거 중국
사람들이 전부 다 개발을 해 갖고 아무리 높이 있는 데라도 물을 끌어 올리는 거죠 그리고 그 물이 끌어
올릴 수 있는 물이 있었던 건 뭡니까 양자강 유역이 그니까 물은 항상 많고
그걸 저수지를 통해서 전부 다 가둬 놓으면서 관계 치수를 하면서 그걸
수차로 필요한 데마다 전부 다 길어 오르는 기술을 만들기 때문에 아무리 산꼭대기에 있는
논도 뭐 밭만 키우는게 아니라 뭡니까 물을 대서 논으로 만들 수가 있는
거죠 이러면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뭡니까 쌀이 주식이 되는게 송나라
답니다 그전까지는 중국 사람들 밀가루 많이 먹습니다 여러분 북쪽으로 가면요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이북으로 가면은 뭐가 많습니까 밀가루 조 이런 걸 먹어야 돼요 왜냐면 물이 없으니까
논농사를 짓기가 너무 힘듭니다 북쪽으로 가은 갈수록 그렇죠 남쪽으로
가야지 장마가 있고 물이 많아지고 그리고 특히 동남아 이런 데가
쌀농사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까 인도 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월남 1년에
3개월 4개월 장마 그든 그니까 물이 항상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로 밀가루
먹고 조 먹고 이랬었던 사람들인데 양자강 유역으로 오면서 쌀농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쌀이 주식으로 되면서 그것도 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먹을게 많아지면
많아지면 더 이상 농사를 안 지어도 되는 사람들이 나와요 무슨 말씀이냐
전에는 농사를 짓는 이유가 먹고 살기 위해서 내가 먹을 거를 내가 농사를 지어서 추수해서 간신이 우리 식구끼리
먹고 그러는 거죠 같은 마을이 나눠먹고 그런데 강남 농법이 들어오면서 쌀이 폭발적으로 늘어 그
생산량이 늘어나니까 일부 사람들은 자기네가 먹고도 훨씬 남으니까
어떡합니까 그거를 시장에 다가 팔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이제 농사를 더 이상 짓지
않고 누구는 도자기를 만들고 누구는 식당을 운영을 하고 누구는 뭐 누에를
치고 비단을 만들고 이러면서 다양한 직종들이 생기고 업종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기 물건을 팔다가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먹으면 되는 거고 그러면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 하니까 이제 여기 보시면은 철을 철
같은 거를 이제 제조하는 제철소에 나오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송나라 때이 조각 능력을 보면요 1070년대
송나라의 연간 철 생산량이 75,000 톤에서 15만 톤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초 유럽이 산업 혁명을 시작할 때에 그때에 유럽의
조각 능력이 14만 5,000 톤에서 18만 톤이 그러니까 중국 송 나라가
생산한 그 철의 양이 제철 양이 유럽과 800년 후에 유럽과 만
먹었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농업이 발달 하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고 해결하고서 다른 거를 할 수 있는 여가가 생겨나는
거죠 이제는 농사에 목을 매는게 아니라 뭐 다양한 업종에 종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업종들 그리의 교환이라는 거는 당연히 화폐가 있어야
되니까 그 화폐를 통해서 이제 그 교역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상업이 발달하는 그런 사회가 이제
송나라의 사회가 됩니다 그러면서 이때에 그렇게 여가가 생기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때 이제 창의력이
생겨나는 거죠 어느 사회에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돼야지 이제 창의력이 나오게 되는데 중국이 최초로
화약을 발명을 해서 화약을 가지고 이제 당시 최첨단 무기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나침반을 때 처음 만들기
시작해서 나침판을 가지고 지금 사진에 보시 세계 최초의 나침판이 송나라 때
나오는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렇게 서로가 교육을 하게 되고
상업이 나니까 이제 돈이 필요한데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연히 동전을
썼었죠 그런데 이때에 동전이 너무 많아지는 거죠 동전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니까 동전을 다 들고 다닐 수가 없는 거죠 1885년에 60억 개의 동전이
송나라에서 유통이 됐답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추억으로 실구 가서 을 사야 되는 상황이 되니까 이때 송나라가
세계 최초로 뭐가 나옵니까 집회가 나옵니다 종이로 돈을 만들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지금 보시는 사진이 이게
그때 당시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돈을 찍어내는 집회를 찍어내는 그 목판
있니다 그래서 이거를 가지고 집회를 만드는 관청들이 설치를 해 갖고 이제
집회를 내기 시작하고 그니까 상업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발달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뭐 성리학의 나라
주자의 나라 이런 이런 뭐 육아의 나라 예법이 이게 아니라 굉장히
활발하고 굉장히 열려 있고 그리고 이윤 추구를 하면서 수많은 상점들이
있고 그러한 도시들이 만들어지는게 어 북송의 수도 개봉 남송의 수도 항주
이런 도시들이 전혀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모습과는 사실은 다른 모습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온갖 물품들이 다 나오기 시작하니까 이걸 어떡합니까 이거를 외국에 갔다가
팔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중국이 세계 최대 무역국이 되는
겁니다 이때 송나라때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좋은 큰 배들을 만들어서
송나라에서 지금 사진에서 보시는 저런 큰 배들을 만들어서 실론 보르네오 자바와 인도
메카 이집트 바그다드 아만 시칠리아 모로코 탄자니아 소말리아 일본 고려를
포함해서 전 세계 50여개국과 무역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때 보시면
우리가 그이 중국의 이제 뭐 대만의 고궁박물관 같은데 가서 보면은 그
송나라의 도시들의 그림들 보시면 이렇게 몇십 미씩 되는 옆으로 쭉
그려진 그림들 있지 않습니까 그 지금 보시는 거는 그 그림의 일부입니다 그
일부에 이렇게 다리가 있는 부분인데 거기 보시면요 완전히 다리 양쪽으로도
전부 다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거고 그리고이 전체 그림을 보시면은
예를 들어서 한쪽에서는 물놀이하는 물리터 놀이터가 있고 여기 보면 약방이 있고 저기 보면 병원이 있고
저기 보면 음식점들이 있고 이러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대 도시와
똑같은 모습을 갖춥니다 완전히 상업화된 활기찬 그런 모습을 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 화려한 어
부유한 문명이 나오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송나라의 자기들이 나오게 되는 거고 그 송 자기를 이제 당연히
고려에서 배우려고 해서 고려 자기도 물론 이제 나오게 되는 거고요 그리고 이제 그 당시에 나오는 저런 유명한
산수화 그림들을 보면은 그 시대가 얼마나 풍족했고 어 그랬다는 거를
이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어 그 한국 사람만들기 책 쓰면서 뭐 여러
가지 책을 참조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경 화록이라는 책입니다이 책이 이제
북송 사람이 쓴 책인데 송에서 살다가 북송의 수도인 개봉에 살다가 북송이
여진족한테 멸망을 하고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남송의 수도 이제
항주로 밀려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밀려 내려와서는 남송에 있으면서 자기가
젊었을 때 개봉에 살 때의 그 개봉의 모습을 쭉 적은게 있습니다 정말로 그
읽어본 만한 재밌는 책인데 왜냐면이 당시에 10세기 11세기 12세기에
중국이 송나라가 얼마나 잘 살았다는 걸 보는데 보여주는데 저는이 특히
음식점 부분을 제가 오늘 하나를 가져왔는데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장문 나와 곧바로 가면 용진교 나왔다 주교에 남쪽으로 가면
길거리에서 수반 삶은 고기 일종인 오욕과 건포 팔았다 옥로 앞에서는
오소리 고기와 들 여우고기 닭고기 포를 팔았다 매 시내와 녹시
가게에서는 거위 오리 닭 토깨 간과 폐 장어와 만두 닭껍질 콩팥과 닭
으깬 것을 팔았는데 이런 음식들의 가격은 각각 15분을 넘지 않았다 조신의 가게에서는 간단한 음식들을
팔았다 주작문 이르면 주석 즉석에서 지어주는 양곱창 절인 생선 생선
머리를 물에 넣어 조를 때까지 삶아 시켜서 굳힌 음식인 찬동 어두
돼지고기를 삶아 그 집을 구처 만든 음식인 강시 얇게 점인 고기 내장을
써 만든 음식인 말장 홍사게 싼 얇게 선 양고기 머리 매운 족발 생각을
넣은 매운맛 무등을 팔았다 글쎄요 서울에도 저렇게 다양한 음식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것이 지금
중국의 송나라의 영화였던 거죠 그러면 이거를 이제 배우고 싶은 거예요 그
당시에 고려말과 조선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국을 동경을 했고 특히 의
강남을 얼마나 했다라는 것이 나타난 기 그 어휘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건 중국의 강남을 간다는니다 거기는 정말로 갈 만하다는
얘기죠 그리고 대표적인게 이제 흥부전에 보면은 그거 나오지 않습니까
제비가 제집에서 떨어지니까 흥부가 그 부러진 를 고쳐 주고서 그때에 뭐라
그럽니까 부디 죽지 말고 살아 멀고먼 말리 강남을 평안히 잘 가거라라고
흥부전에 나옵니다 그러면은 제비가 겨울이 되니까 어딜 갑니까 강남을
가죠 강남가는 제비라고 제비가 겨울에 한강이남 갔다고 구정동 서초동 갔다고
안 얼어 죽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얘기는 뭡니까 중국의 강남을 가는 거죠 그러니까 중국의 강남까지 가서
그 부귀한 나라에 거기에서 시를 물고 오니까 그 박이 자라서
그걸 켜 보니까는 거기에 엄청난 부기 영화가 이제 나오는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면 강남이 그만큼 부기 영화의 상징이었다 고려
사람한테도 중국 사람한테도 그리고 우리가 강남콩 강남미 이런 것이
그때부터 벌써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강남은 일찌감치부터 강남 중국의 강남 그러면 모든 것이
풍요의 상징이었고 어감이 그대로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어 제비가
겨울이면 강남 간다라는 얘기가 바로 그 얘기
드립니다 그러니까는 지금이 모든 거를 마르코폴로 같은 사람들이 가서
보고 오는 거고 물론 마르코폴로는 원나라 때 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송이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오지만 원나라가
어떡합니까 송의 거를 를 고대로 유지를 합니다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원의 보기 영화는 곧 송의 보기 영화를 보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그런 모습들을 고려해도 당연히 보게 되는
거고 그니까 우리가 19세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뭡니까 야 우리는 이렇게 가난하고 이렇게
찢어지게 못 가난하고 못 사는데 19세기 말에 미국을 가본 사람들
런던을 가본 사람들 파리를 가본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기차가 다니고 그죠 밤에가
켜지고 밤에 아무데서나 집에서 불을 켤 수 있고이 놀라운 문명을 우리는
언제나 구가할 수 있을까 저거 어떻게 빨리 들려올 수 있을까 하면서 일으킨게 뭡니까 우리도 산업화를
해야겠다고 하는 거죠 지금까지도 우리가 그 산업화를 문명을 따라가려고
하는 거고 그러면 그 당시에 중국을 가서 본 고려 사람들이 특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고려는 충왕 충 충왕 충선왕
다 뭡니까 원나라의 부마국 이었죠 고려의 왕은 세자가 되면은 원나라로
데리고가는 거죠 그래서 연경 지금의 북경에 가서 있으면서 그 북경에서 어떻 하는 겁니까 원나라 황실에서
자라면서 몽골 말과 중국말과 중국의 모든 관습과 예습과 이거를 다 배워
가지고 원나라의 공주 쿠빌라이의 딸 손녀 이런 사람들하고
그런 해서 고려에 돌아와서 주기를 하는 거죠 그러면이 사람 생각해 보세요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에서
어려서부터 나서 잘하고 최고의 수준의 삶을 살는 사람들이 고려에면이
시골이 낙후된 이거를 럼 와서 고쳐야 됐다 야 우리 비슷하게 좀 따라가
보자라고 당연히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고려말에 공민왕
같은 사람들이 자꾸 계약을 했다 계약을 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뭐 그 개혁의 내용이 뭐냐라는 거죠
그 개혁의 내용은 뭐냐면 중국의 강남 농법이 가져다주는이 놀라운 문명 그
농법에 농법이 가져다주는 영 잉여와 여가 때문에 일어나는 그 찬란한
문명을 좀 우리도 도입해 보자라고 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강남을 배우고 싶었다는게 여기
나옵니다 고려 왕들 6월 경인일 찬성사 권보 상의
회의 도감사 이진 3 4사 권한 평리 조관 지밀 우기 등이 성균관에 모여
새로 구입한 서적을 열람하는 한편 경학 시험을 보였다 당초 성균
제거사업 바람에 유연 등이 빈털털이로 중국 해안에 표박 있다 마침 태자
부군 남경에 머물고 있던 판전 교사 홍이 유원에게 보초 150점을 주어
경학 관련 서적 800원을 구입해 귀국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는 지금이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요 강남을 배우고 싶어서 정부에서 아예 사람을
보내 가지고 강남에 가서 책을 구해오라 거죠 그래서 그 책을 기껏
사 갖고 오다가 풍랑을 만나 갖고 배가 그 책이 다 없어진 거죠 그랬더니 다시 남경에 머물고 있던
판교 시사 홍이 에게 또 돈을 꾸 줘서 그 돈을 가지고 천권의 책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와서 성균관에 모여서 새로운 구입한 서적을
열람하는 하면서 그걸 가지고 경악 시험을 시작했다 여러분 개화파가
만들어질 때 생각나시죠 이동이라 스님이 그 부산에 동본원사 벼원에서
오쿠무라 엔진으로부터 여러 가지 서양 관련 서들 일본 관련 서들 갖고 와서
그 를 봉사에 가서 김옥균 박영 서재필 이런 사람들이 계속 그 책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이거를 배우게 됐다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지금 똑같은 일이 벌진 거죠 중국의 최첨단 강남의
그 남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사상 철학 그 새로운 사회를 설명하고
그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려는 그러한 모든 사상과 철학과 경제학과 모든
얘기들이 다 그 관련 서적들을 다 갖고 와서 그걸 공부하고 시험까지
치면서이 문명을 도입을 하려고 그런 겁니다 그리고 이제 공민왕때
들어오면은 본격화되는게 있습니다 뭐냐면요 수차 그니까 물을 대는게
논농사를 하기 쌀 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되고 물을 논에 대기해서 수라는게 있어야
됩니다 고려에 그 수차가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국민이 수차를 만들라고 하는
명령을 하는 구절이 고려사에 또 나옵니다 공민왕 11년 밀직 제학
백문보 다음과 같은 차자를 올렸다 강회 강라게 뭡니까 강은 장강 양자강
이고요 회는 뭡니까 회하 양자강고 황하강 사이에 있는 회하
그게 아까 양자강 삼각주를 뚫고 지나가는 그 강입니다 강해라게 지금 말씀드린 강남이 강회 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홍수와의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수차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논 물이 개어
있는 논에 농사를 지을 때 용수로 해서 물을 끌어들일뿐 수차로 물을 대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니까 낮은
데에 바로 옆에 옆에 뭐 물이 있으면 그거를 그냥 이렇게 수로를 뚫어서
그냥 흘러들어오게 하는 건 할지 모르지만 모르지만 낮은데 있는 물을 끌어올리는 수산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밭 아래에 한 길도 못 되는 곳에 도랑이 있어도 그저 내려다 보기만 할뿐
기여울 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이 때문에 대부분의 너는 물이거나 잡초가 가 무성한 황폐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만들어라 수차를 만들어라
그리고 다음 다음 거 보시면은 계수관게 명령을 내려 수차를 제조하고
그 기술을 민간에 보급하도록 한다면 이야말로 가뭄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될
것입니다 또 민들이 직파 이양을 겸해 힘을 기울려다면 가뭄에 대비할 수
있게 되고 종자도 망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기 나오죠 집뿐만 아니라 이양 모이라는 것도 좀 합시다 여러분
저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냐 우리가 근대화를 한다 그러면 농업 국가에서
근대는 산업 국가를 어떻게 갑니까 그러면 도로를 만들어라 제출서 만들자
그죠 자동차 공장을 만들자 정유소를 만듭시다 이런 거를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를 만들어야지 산업화의 기본 기간들이 생기는 거죠
똑 같이 지금 우리가 강남 농법을 들어와야지 중국같이 잘 살게 되는데
그 강남 농법이 필요한게 물이다 물을 그럼 어떻게 되냐 수차가 들어야된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에서 시작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 문명을 들어올려고 시작하는게 공민왕의 그
개혁이었다 거죠 유교 구타가 일어나는 겁니다
공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애를 썼어 그런데 국민이 이제 결국 개혁에
실패를 하죠 물론 근데 실패를 하는 이유를 그럼 어떻게 분석을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실패를 했던 이유가 아
공민 같은 사람이 계속했으면 될거다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혁명을 일으켜서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건 이제 정도전 관건 2세대들이 근데이 사람들의 생각은
뭡니까 아 그냥 기존의 고려식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만 는거 이건 안 된다 왜 고려는 불교 가예 그니까 사상
이념은 불교로 그대로 둔 채 그 강남농법 들려온다 그거는 예를 들어서
이런 거죠 동도서기 같은 거죠 그러니까 견은 계속 유지하는데 산업 사회를 들려오자 안 맞는다는 거죠
산업 사회를 들려오면 위에 그 유교도 사회도 변화시켜서 근데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야지만 그다음에 자유시장 경제 산업 사회가 그게 같이 세트가
돼서 맞아 떨어지듯이 지금 신진사대부 뭐라 그러냐면 강남 농법을 들여와야
되는데 그럼 강남 농법이 제대로 들어와서 제대로 그게 뿌리 내리고
개혁을 성공해서 우리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려 그러면은 그것만 갖고 안 된다 과학
기술만 갖고 되는게 아니라 뭡니까 그거를 뒷받침하는 그 사상 책계 강남
농법과 강남 이것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강남에서 들어오는
학문이죠 그게 바로 주자인 거죠 정신세계 철학 정치 체제인 주자 학도
그것도 같이 도입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그것까지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주자학을 이제
받아들여 갖고 그래 주자학에 따라서 강남 농법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지만
지금 그 강남 농법을 들여오려고 수차례 시도하다가 결국 고려가 실패를
하고 안 되니까 어떡합니까 이성계를 앞세운 정도전 그렇죠이
사람들이 뭡니까 중국의이 문명을 빨리 들어오려 그러면 주자부터 빨리 들어와서 강남농법 다 들여야 된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떡합니까 나라를 엎어서 대타를 일으켜서 새
나라를 개청을 하는 거죠 그래서 주자학의 나라라는 걸 세우는 거죠
그러니까 불교 국가를 무너뜨리고 주자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 리는 국가를
세워서 강남 농법을 들려오면서 대가 이루었던 그 산업 혁명을 이룩하자
하면서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주작의 나라
핵심은 사실은 뭡니까 강남 농법을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강남
농법을이 강남 문명을 가장 확실하게 들어오려고 모든 조선의 제도를 다
뜯어고친 사람이 놀라운을 일으킨 사람이 그게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그래서 세종에 보시면 세종 신라 14 12년 10월 14일 자를 보시면요
호조의 전제하기 본국 인민들이 다만 제언의 묵리 알고 수차로 관계하는
유익한 방법을 몰라서 한재만 당하면 농사를 실패하곤 하니 실로 딱하고 민망한 일이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수차를 설치하 만한 장소를 조사하여 지금 반포한 수차의 모양에 따라 제조하게 하고 감사가 수시로이를
고찰하여 매양 전체를 당할 때마다 그의 근면과 태만 아울로 기록하여 출석의 증으로 삼도록 하 하라 하였다
그러니까 아까 공민왕 하고 똑같은 걸 하는 거죠 몇십년 후에 새 나라를 세워서 지금 세종은 야 그때 실패했던
개혁 제대로 하자 수차를 하라 그래서 관리들의이 승진 여부 출척 하라는게
뭡니까 승진 고과 그걸 따지는데 있어서 수차를 제대로 만들어서 복회 야나 갖고 하자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 어 그 얼마나 세종이 이걸 위해서 노력하는지 나옵니다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이건 13년 6월 26일자 기사입니다 사정전에 나가서 지신사 안숭선 인견하여
이르기를 지금 국가 일에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는 자가 자가 적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로다 수차에 설치는
원래 한재를 대비 위한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받들어 행하는 관리가 모두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자갈 땅에 설치하여 못 쓰지 못하게 되니 힘이 부당하다 위로는 중국으로부터 아래로는
외국에까지 모두 수차의 이익을 받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여기에 마음을 두고 있지 못하는 것은 급하게 백성들에게 이익을 보게 하려고함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나는 반드시 성공시키고 야 말 것이니 꼭이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각도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얼마나
세종이 기간 산업 중에 기간 산업인 수차 개발에 몰두 했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추기를 발명하고 해시계를
발명합니다 여러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추국이 뭡니까 비가 얼마나 오느냐 재는 겁니다 그럼 갑자기 왜
비가 얼마나 오 양을 왜 재니까 논농사 때문에 그런 거죠 왜
그런지 아세요 조선에는 조선에는 비가 안 옵니다 그 조선은 물부족
국가입니다 논농사를 하기에 너무나도 부적합한 지역이죠 너무 우리가 북적이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나라는 장마가 2주간에 옵니다
동남아시아에 양자강 역이요 물이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필리핀 뭐
인도네시아 이런 데는 농사 안 지어도 그냥 저절로 쌀이 저절로 자라서 썩어 넘어간답니다 물이 많기 때문에 근데
우리는 그 물이 없기 때문에 물을 대야 되는 거죠 수차를 대야 되는 거죠 근데 수차를 만들더라도 물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제가 봤을 땐 그런 겁니다 야 우리도 이렇게 그러고 보니 물이 부족하네 그럼 물이 비가
얼마나 오냐 한번 재 봐라 저는 그래서 세종대왕이 추구기를 만들려 그러고 해시계를 만들려 그랬지 뭐
세종대왕이 어느 날 갑자기 뭐 어느 날은 뭐 수차에 관심 있다가 또 어느
날은 과학의 날를 한다 그래서 뭐를 하고 어느 날은 예법에 날 이런게 아닙니다이 사람은 지금 뭐를 하는
겁니까 세종대왕은 최첨단 산업 문명을 들려오는데 그 산업 문명에 필요한
모든 거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죠 수차를 개발하라 그럼 수차가 길를 수 있는 물이 있어야 되는데 그 물이 왜
얼마나 있는지 재 발라 해서 저는 그래서 추기를 만든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조량 때문에 해시계도 만드는 거고 그런 것이 다 집대 성대에서 나오는게
그 유명한 세종의 농사 직설이 농서 있니다 얼마나 그 당시로 치면
지금으로 치면은 뭐 제철소 맨드는 자동차 공장 만원은 만든 핸드북 같은
거가 되겠죠 이렇게 자고로 이렇게 만들어라 하는 거 죠 농사를 지려면 이렇게 지어라 라면서 나라에서 이거를
만들어 주는 거죠 첨단 농법을 다 집어넣어서 다만 농사 직선에서는 끝까지
직파법을 합니다 왜냐면 이양에 끝까지 세종이 실패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리
물이 부족하고 수차가 없고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양 모내기를 하는 것이
17세기 18세기 가서야 처음으로 가능해집니다 그니까 그만큼 사실 먹고
먹을 것이 굉장히 부족했던 나라입니다 농업 경쟁 력 굉장히 낮았던 나라가
사실 조선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종 같은 사람이 노력을 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 조선의 모습이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그래도 이렇게 농사 직설이 것까지 쓰면서 세종대왕으로 당시 최첨단
문명을 산업 문명을 들여오려고 모든 수단을 다 간고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건 저의 저의 생각입니다 저의 견해입니다 저의 해석입니다 훈민정음을
세정 대왕이 만든 뭐 여러 가지가 이유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 하나는 최소한 하나는 뭐냐면 지금이
새 문명을 들여오는데이 새 문명을 빨리 퍼트려야 되겠다 주자학 그렇고
강남농법 그렇고 이거를 빨리 퍼트려야 되겠는데 그 빨리 퍼트릴 수 있는 방법으로서 한문만 갖고는 한문이 너무
어렵고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숫자가 제한되 있고 그거를 하기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니까 저는이 새 문명을 도입하기 위한 새 랭귀지로도 한 걸 즉 훈민정음을
발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정말 세종은 새 문명을
들여오려고 총력을 기울였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세상을 읽 읽을 줄 알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 길인지를 정확하게 알았던 거고요 그걸 위해서 당시 이미 이 고려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가장
영화로운 문명 중국의 강남 농법을 기반으로 한 송나라의 그 문명을
들여오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이 그게 세종의 개혁이라고
개혁이고 그 세종의 개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강남 농법이
아니라 강남 농법과 짝을 이루는 바로 남성에서 만들어진 는 바로 그
주자학을 같이 들려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자학을 도입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자학이 어떠한 사상 철학적인 측면만을 도입하는게 아니죠
저는 오히려 그 당시 세종대에 조선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예를 들어서 나중에 퇴계 율곡이 갖고 있었던 다산이 갖고 있었던 이해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었죠 간 나온지 얼마 안 되는 거고 연구해 본지도 얼마 안 되는 거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뭡니까
중국의 산업문명 송나라의 그 강남농법 이거를 들어올려고 했던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주자학 성리학의 책들만 반포를 한게 아니라
농사 직설이 것도 만들고 수차를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 경제 민주주의와 산업 문명을 같이 들어오려고 하는 거
그거와 같은 맥으로 농법과 주자 성약을 한 패키지로 생각하고서 받아들이려고
했던게 조선이고 그것을 가장 강하게 밀어붙이고 이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밀어붙였던 것이 세종 대학이고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주자성 예학을
도입했다고 생각합니다네 오늘은 그 주자학이
도대체 왜왜 들어오게 됐을까 언제 들어오게 됐을까 모든
사상은 때가 있고 시간이 있습니다 그냥 항상 있었던게 아니죠 우리가 물론 유교 문명이 굉장히 오래된 걸로
생각하고 항상 있었던 걸로 생각하고 우리는 항상 유교 문명에 젖어서 살았던 민족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은 조선이 주자 성리학을 들어옴으로써 고려 사람하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조선 사람을 만들어 낸 주자 성학을
왜 도대체 조선이 들어오게 됐는가 오늘 살펴봤습니다 자 그러면 다음 시간에 는 그 주자 성리학이 들어와서
강남농법 주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조선이 고려 전혀 다른 사회로 바꿔
가면서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형 고려 때까진
없었던 그렇죠 그러면서 조선시대 특유의 인간형인
선비 대부라는 굉장히 새로운 인간형이 그러면 또 어떻게 형성이 돼서 어떻게
조선에 도입이 돼서 정착하게 되는가 그 부분을 다음 시간에 또 살펴보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한국인의 탄생 함재봉이었습니다 다음 시간 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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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어떤 나라를 꿈꿨을까?>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11회에서 함재봉은 조선이 왜 고려의 불교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주자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도입했는지, 그리고 그 사상적·물질적 뿌리인 송나라(남송)의 강남 농법과 상업 문명을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어떻게 국가 개조 기획으로 완성하려 했는지를 분석한다.

(1) 송나라의 강남 농법과 물질적 산업혁명

  • 강남(양자강) 유역의 개발: 안녹산의 난(755년) 등으로 중국의 중심축이 황하 유역에서 양자강(강남) 유역으로 이동했다. 남송 대에 이르러 왕한석 등의 대규모 치수·토목 공사로 양자강 삼각주가 세계 최고의 비옥한 농토로 탈바꿈했다.

  • 모내기(이앙법)와 수차, 그리고 상업 발전: 모모판을 이용한 모내기와 물을 길어 올리는 수차 기술이 도입되면서 쌀 농사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쌀이 주식이 되었다. 농업 여유 생산력은 제철, 도자기(포슬린), 지폐(교자) 발행, 나침반·화약 발명 등 대규모 상업·산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경화록>에 기록된 송·원 대 강남의 부유함은 고려인들에게도 깊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2) 고려의 강남 농법 수용 시도와 한계

  • 고려의 동경과 실패: 고려 충렬왕 대 강남 쌀의 하사 기록이나 공민왕 대 강남의 수적(서적) 구입 및 수차 도입 명령에서 보듯, 고려 말 지배층은 강남의 선진 농법과 물적 풍요를 이식하려 노력했다.

  • 체제적 불일치: 불교적 사회 구조(동도서기적 타협)를 유지한 채 기술만 들여오려 했던 고려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와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는 고려라는 사회 체제 자체를 해체하고, 강남 농법이라는 물질적 토대와 주자학이라는 사상적 체제를 통째로 들여오는 '역성혁명'을 단행했다.

(3) 세종의 국가 개조 기획: 기술·사상·문자의 패키지 수용

  • 수차 보급과 농사직설: 세종은 지방 관리의 인사 고과(출척)에 수차 설치를 반영할 만큼 수차 보급과 수리 시설 확충에 집착했다. 물이 부족한 한반도 지형에 맞게 과학 농업을 추진하며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 과학 기술(측우기·해시계)과 훈민정음: 측우기와 해시계 발명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강남 농법의 핵심인 '일조량과 우량 측정'이라는 농업 국가의 물적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역시 주자학적 질서와 선진 농업 기술(강남 농법)이라는 '새 문명(New Language)'을 온 백성에게 신속하게 보급하고 통치 이념을 가식 없이 전파하기 위한 국가 개조의 핵심 도구였다.

2. 평론: 관념론의 해체와 시스템으로서의 근대성

강좌 11회는 조선 성리학 수용사를 도덕론이나 형이상학에 가두지 않고, 송나라 강남의 '생산력(농업 기술)'과 이에 수반된 '사상적 패키지'라는 물적 사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사상사적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 주자학 수용의 '물질적·경제적 기원'을 선명하게 입증했다. 성리학 수용을 단순히 사대부들의 이념적 유희로 보지 않고, 당대 최고 수준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송나라 강남의 모내기, 수차, 치수 기술을 국가 시스템으로 도입하기 위한 '실용적 선택'이었음을 밝혀낸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한 세트로 수용하듯, 조선 건국 세력에게 강남 농법과 주자학은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문명 패키지'였음을 매끄럽게 설명한다.

둘째, 세종대왕의 업적을 '통합적 국가 개조 기획'으로 재정립했다. 세종 대의 측우기·해시계 발명, <농사직설> 편찬, 수차 보급, 훈민정음 창제를 개별적인 업적이 아니라, 강남 농법이라는 선진 농업 생산력을 한반도 지형에 이식하기 위한 '연계된 기술·사상적 프로젝트'로 읽어냈다. 훈민정음을 새 문명을 보급하기 위한 자국어 매체로 이해한 접근은 세종의 정치가로서의 담대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셋째,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이 지닌 '시스템 교체'의 성격 규명이다. 불교적 사회 구조 위에 기술만 얹히려 했던 고려의 개혁 시도(공민왕)가 실패했던 역사를 지적함으로써, 기술(용)과 이념·제도(체)가 결합되지 않은 개혁은 지속될 수 없음을 밝혀낸다. 신진사대부의 역성혁명이 단순한 권력 쟁탈이 아닌 '문명 체제 전체의 교체'였음을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11회 강연은 조선의 기틀을 다진 성리학 수용과 세종의 개혁이 관념적 명분론이 아닌 백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최고의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던 '실용적 의지'의 산물이었음을 명쾌하게 증명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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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1회

<세종은 어떤 나라를 꿈꿨을까>

요약

• 이번 강의는 조선이 고려와 다른 나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주자학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세종이 어떤 국가를 만들고자 했는지를 설명한다. 함재봉은 세종의 업적을 한글 창제에만 한정하지 않고, 송나라식 문명과 제도를 조선에 이식하려 한 거대한 국가개조 사업으로 해석한다.

• 그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고려가 불교적이고 귀족적인 사회였다면, 조선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인간·가족·사회·국가를 새롭게 조직하려 한 나라였다. 따라서 “조선 사람” 역시 자연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와 생활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 세종이 받아들인 주자학의 주요 모델은 중국 송나라였다. 함재봉은 송나라가 농업·상업·도시·과학·기술·출판에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을 이룩했다고 설명한다. 조선이 송나라의 제도와 사상을 배우려 한 것은 단순한 사대주의라기보다 가장 발달한 문명을 따라잡으려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 송나라의 발전 배경으로는 강남 개발을 강조한다. 원래 중국 문명의 중심은 황하 유역이었지만, 전란과 인구 이동으로 양쯔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 비옥한 토지 덕분에 농업생산력이 크게 늘었고, 경제와 도시가 성장했다.

• 강남 농업의 핵심은 참파벼였다. 베트남 지역에서 들어온 조생종 벼는 성장기간이 짧고 가뭄에도 비교적 강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수확할 수 있게 했다. 식량생산의 증가는 인구성장, 도시화, 상업발전으로 이어졌다.

• 농업생산이 늘어나자 모든 사람이 농사만 지을 필요가 없어졌다. 일부는 상인, 기술자, 장인, 학자, 관리가 되었고, 시장과 화폐경제가 발전했다. 함재봉은 농업혁명이 분업과 도시문명, 산업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 송나라에서는 제철·석탄·도자기·인쇄·조선·항해 기술도 발달했다. 철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고, 운하와 해상교역이 확대되었으며, 지폐까지 사용되었다. 함재봉은 이를 근대 산업혁명에 가까운 변화로 묘사한다.

• 그러나 송나라는 군사적으로 북방 민족에게 약했고 결국 멸망했다. 문명과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국가의 생존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송의 문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북방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함께 안고 있었다.

• 세종은 이러한 송 문명을 조선에 옮기려 했다. 농업기술, 천문, 역법, 의학, 음악, 군사, 지리, 인쇄, 법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조사하고 정비했다. 함재봉은 세종을 단순한 성군이 아니라 지식과 제도를 동원해 사회 전체를 바꾸려 한 국가설계자로 본다.

• 농업에서는 《농사직설》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중국 농서를 그대로 베끼지 않고 조선 각 지역의 경험 많은 농민들에게 실제 농법을 묻고, 이를 조선 기후와 토질에 맞게 정리했다. 이는 국가가 실용지식을 수집하여 생산성을 높이려 한 사업이었다.

• 측우기와 수표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농업에 필요한 강수량과 수위를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표준화된 도구가 필요했다.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은 단순한 발명품 전시가 아니라 조세·농업·재해관리와 연결된 행정기술이었다.

• 천문과 역법 정비도 국가주권과 관련되었다. 농사 시기를 정하고 국가의 의례를 운영하려면 정확한 달력과 천문관측이 필요했다. 조선은 중국의 역법을 배우면서도 조선의 위치와 환경에 맞는 계산체계를 마련하려 했다.

• 강의의 중심에는 훈민정음이 있다. 세종은 한문을 모르는 백성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문제로 인식했다. 한자는 배우기 어렵고 조선어의 소리를 정확히 적기에도 부적합했으므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고 본다.

• 함재봉은 한글 창제를 독립운동이나 중국문명 거부로 해석하지 않는다. 세종은 주자학과 중국문명을 충실히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조선 백성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새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한글은 중국문명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문명을 조선화하고 대중화하는 도구였다.

• 이 점에서 세종은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했다. 국가의 철학적 기반은 주자학으로 삼았지만, 중국 제도를 기계적으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농법과 언어, 천문, 기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바꾸었다.

• 강의의 결론은 세종이 꿈꾼 나라가 주자학적 도덕국가이면서 동시에 지식과 기술로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실용국가였다는 것이다. 그는 백성을 새로운 문명질서 안으로 편입하고, 농업생산과 행정능력을 높이며, 문자생활을 확대하려 했다.

평론

이 강의의 강점은 세종을 단순한 한글 창제자가 아니라 농업·과학·행정·언어를 종합적으로 개혁한 국가설계자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특히 한글을 반중국적 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주자학 문명을 조선 사회에 보급하기 위한 도구로 해석한 점은 흥미롭다.

다만 송나라를 당시 세계 최고 문명으로, 세종의 개혁을 그 문명의 성공적 이식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조선 고유의 전통과 고려에서 이어진 제도적 연속성이 약화된다. 또한 세종의 정책이 백성의 삶을 향상시킨 측면과 함께 강한 국가통제, 신분제, 군역과 조세 부담을 유지한 측면도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함재봉이 말하는 “조선 사람 만들기”의 긍정적 정점을 보여주는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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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1  세종은 어떤 나라를 꿈꿨을까?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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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농법의 도입과 주자학의 도입의 관계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실 송나라에서도 강남농법과 주자학이 왜 관계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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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함재봉 원장이 11회 강좌에서 제시한 <강남농법>과 <주자학>의 결합 구조는 일반적인 사상사나 역사 수업에서 다루는 방식과 달라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함 원장의 주장은 기술(농법)과 사상(주자학)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세트로 움직이는 하나의 '문명 패키지(System Package)'로 파악할 때 명쾌하게 이해된다. 송나라에서 두 요소가 연결된 이유와, 조선의 세종이 이를 한꺼번에 들여오려 했던 맥락을 나눠 정리해 본다.

1. 송나라에서 강남농법과 주자학은 왜 연결되는가?

(1) 경제적 토대: 강남농법이 만든 새로운 사회 구조

송나라 이전(수·당 대)까지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건조한 북방)이었으나, 안녹산의 난과 북방 민족의 압박으로 인구가 양자강 남쪽(강남 유역)으로 이동했다. 강남은 습지였지만, 수차를 이용한 치수 기술과 이앙법(모내기), 품종 개량(참파벼) 등이 결합한 <강남농법>이 완성되면서 쌀 생산량이 폭발했다.

이 폭발적인 농업 생산력은 다음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불러왔다.

  • 지주-소작 관계의 변화: 옛 관료 귀족이 토지를 독점하던 방식에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층(제지지주)과 자영농이 대거 출현했다.

  • 독서·지식인 계층의 형성: 식량 생산이 풍족해지자(경제적 잉여), 자식에게 농사 대신 글을 가르쳐 과거 시험을 보게 할 수 있는 수십만 명의 사회적 계층(사대부)이 형성되었다.

(2) 사상적 필요성: 새로운 사회를 설명할 이념(주자학)의 등장

기존의 수·당 시대 유교나 귀족 중심의 법제는 이렇게 강남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새로 등장한 수십만 명의 '사대부(지주-지식인 계층)'를 통제하거나 정당화해 주지 못했다.

  • 강남농법으로 부를 쌓은 사대부 계층은 귀족이 아니면서도 향촌(마을)의 질서를 주도해야 했다.

  • 이 새로운 지식인 계층에게 필요했던 것은 "우리가 왜 마을의 리더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줄 도덕과 철학이었다.

  • 주희(주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이 새로운 사회 구조에 맞추어, 황제나 귀족이 아닌 사대부가 향촌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문 운영법(<주자가례>), 농업 지도법(<권농문>), 그리고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다루는 철학(<성리학>)을 완성했다.

즉, 송나라에서 강남농법은 사대부라는 새로운 사회적 계급을 낳은 '물질적 생산력'이었고, 주자학은 그 계급이 향촌 사회를 지배하고 이끌어갈 수 있도록 만든 '사상적 체계'였다. 기술과 사상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다.

2. 세종은 왜 강남농법과 주자학을 동시에 들여왔는가?

함재봉 원장의 핵심 요지는, 오늘날 우리가 <자유시장경제>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사상 체계를 한 세트로 도입하듯, 조선 초기 위정자들에게도 강남농법과 주자학은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문명 시스템'이었다는 점이다.

(1) 고려의 실패: 기술만 들여오려 했던 한계

고려 말 공민왕 등은 송·원의 엄청난 부를 동경하여 수차를 도입하고 강남의 농업 기술을 이식하려 했다. 그러나 사회의 기본 틀(불교적 유산과 귀족적 과전제)을 그대로 둔 채 기술만 들여오려 했기 때문에 생산력 혁신에 실패했다.

(2) 조선과 세종의 기획: 하드웨어(농법)와 소프트웨어(주자학)의 한꺼번에 수용

정도전과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거쳐 세종에 이르러 단행된 국가 개조 기획은, 사상과 기술을 동시에 교체하는 '전면적 시스템 개혁'이었다.

  • 하드웨어(강남농법의 이식): 세종은 물이 부족한 한반도 지형에 모내기와 수차를 이식하기 위해 측우기와 해시계를 만들고, 농민들에게 맞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세종이 측우기를 만들고 관료들의 인사 고과에 '수차 설치 실적'을 반영한 것은 관념적 흥미가 아니라, 강남농법이라는 물적 기반을 한반도에 꼭 이식하겠다는 집념이었다.

  • 소프트웨어(주자학적 사회 질서): 강남농법이라는 농업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불교적 관습을 깨고 향촌에서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할 사대부(선비) 계층과 그들의 예법(<주자가례>)이 필수적이었다.

  • 매개체(훈민정음):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역시 이 선진 농업 기술과 주자학적 삼강오륜 질서를 일반 백성들에게 신속하게 보급하고 가르치기 위해 발명한 '새 문명의 언어 도구'였다.

요약

함재봉 원장의 시각에서 <강남농법>은 송나라와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최첨단 생산 기술(하드웨어)'이고, <주자학>은 그 기술을 운용하고 농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사대부 계층의 '통치 이념(소프트웨어)'이다.

세종대왕은 단순한 학문 수용자가 아니라, 낡은 고려의 불교적 체제를 완전히 깨뜨리고 [강남농법 + 주자학 + 훈민정음]이라는 최첨단 문명 패키지를 한반도에 이식하여 백성을 부양하는 부강한 유교 농업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담대한 국가 기획자였다는 것이 강좌의 핵심 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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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대목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제가 앞서 11회를 요약하면서도 <강남농법 → 경제발전 → 주자학 → 세종>을 너무 매끄럽게 연결했습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강남농법이 주자학을 낳았다>거나 <주자학이 강남농법을 만들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둘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함재봉은 오히려 <송대 강남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서로 맞물렸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바로 이 둘의 제도적 상보성을 주장하는 사회과학 연구도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해석이지 확립된 단순 인과관계는 아닙니다.

1. 우선 송나라에서 두 가지를 분리해서 보면 쉽습니다

첫째는 <농업혁명>입니다.

송대, 특히 중국 남부에서는 벼농사가 크게 발전합니다. 참파(占城)에서 들어온 조생종 벼는 빨리 익고 가뭄에 비교적 강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모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여기에 관개, 철제 농기구, 모내기, 비료, 품종선택 등이 결합합니다. 그 결과 강남의 농업생산성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러면 연쇄적으로

<농업생산 증가 → 인구 증가 → 시장 확대 → 도시 성장 → 상업·수공업 발달 → 교육받은 지식인층 확대>

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함재봉이 11회에서 길게 설명한 <송나라의 경제적·사회적 혁명>입니다.

둘째는 <주자학의 등장>입니다.

주희(朱熹, 1130~1200)는 남송 시대 사람입니다. 그는 공자·맹자의 유학을 다시 체계화하면서 불교와 도교가 제기했던 인간의 마음, 우주, 본성 등의 문제에 유교적으로 답하려 했습니다. 주자학은 송대의 여러 사상·사회·문화적 변화 속에서 발전한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현상은 이렇게 놓는 편이 정확합니다.

<강남농업 발전>과 <주자학 발전>

둘 다 송대, 특히 남송을 중심으로 발전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님

2. 그런데 함재봉은 왜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가?

여기에 함재봉 강의의 중요한 논리가 있습니다.

농업혁명이 단순히 “쌀이 많이 생산되었다”는 데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산력이 올라가고 인구가 늘고 시장이 확대되면서 사회가 훨씬 복잡해집니다. 지방에는 토지를 가진 가문과 지식인들이 성장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가족과 마을을 어떻게 질서 있게 운영하며, 국가와 지방사회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주자학은 바로 이런 사회에서

<가족 → 친족 → 마을 → 지방사회 → 국가>

를 하나의 도덕질서로 연결하는 강력한 이념과 제도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주자학은 효, 가족윤리, 조상제사, 교육, 향촌질서, 사대부의 도덕적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함재봉에게 중요한 것은 <벼농사가 주자학을 만들었다>가 아니라,

<송대의 경제·사회혁명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회운영 원리로 주자학이 발전했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벼농사 자체와도 어느 정도 관계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집약적인 논농사는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관개시설을 만들고 관리해야 하고, 모내기와 수확처럼 짧은 기간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며, 물 사용을 이웃과 조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논농사 → 공동노동·수리시설 → 마을 협력 → 강한 공동체 규범>

이라는 관계가 생길 수 있습니다.

최근 사회과학 연구 가운데에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송대의 집약적 벼농사와 주자학적 향촌질서가 <institutionally complementary>, 즉 서로 제도적으로 잘 맞았다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주자학의 가족·마을 윤리가 집약적 논농사에 필요한 협력과 상호감시를 뒷받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흥미로운 사회학적 가설이지,

<벼농사 때문에 주자학이 생겼다>

는 역사적 정설은 아닙니다.

이 구별이 중요합니다.

4. 그러면 조선으로 오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서 함재봉이 세종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보입니다.

그가 보는 조선 건국자와 세종의 문제의식은 대략 이렇습니다.

<송나라는 당시 매우 성공적인 문명 모델이었다.>

그 성공한 문명에는 여러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농업기술

  • 과학기술
  • 인쇄와 교육
  • 과거제와 관료제
  • 주자학
  • 가족제도와 예법
  • 지방사회 조직

함재봉의 논리는 조선이 이것들을 <하나의 선진 문명 패키지>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종은 한쪽에서는

《농사직설》,
측우,
천문·역법,
농업기술

등을 발전시키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자학,
유교적 가족질서,
예법,
교육,
관료제

를 강화합니다.

즉,

<강남농법 + 주자학>

이라는 이상한 조합을 세종이 특별히 선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송대 중국에서 발전한 선진 문명의 서로 다른 구성요소>였다는 것이 함재봉의 이야기입니다.

5. 오히려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명확합니다

함재봉의 논리를 제가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송대 중국>

농업혁명 → 생산력·인구 증가
      ↓
상업·도시·교육·인쇄 발달
      ↓
복잡해진 지방사회와 새로운 사대부층
      ↓
주자학적 가족·향촌·교육·관료질서의 발전

그리고 수백 년 뒤 조선은 이 송대 문명을 이상적인 모델로 받아들입니다.

<송 문명>

조선

농업기술 → 《농사직설》 등
과학기술 → 천문·역법·측우
문자·교육 → 훈민정음·교육정책
관료제 → 과거제
사회윤리 → 주자학
가족질서 → 《주자가례》·제사·부계질서

이렇게 보면 강남농법과 주자학 사이에 억지로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6. 그런데 여기서 함재봉의 설명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질문하신 부분에서 느끼신 불편함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함재봉은 <송나라 문명>을 하나의 통합된 성공 모델처럼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에게는

<강남농법 발전 → 경제발전 → 주자학 등장 → 송나라 번영>

이라는 하나의 인과사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자학의 형성에는 불교·도교와의 사상적 경쟁, 기존 유학의 재해석, 송대 정치논쟁, 사대부층의 성장 등 여러 원인이 있었습니다. 철학사 연구에서도 주자학은 여러 사회·문화적 흐름의 상호작용에서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시간차도 있습니다.

참파벼는 <11세기 초 북송>부터 적극적으로 보급되었지만, 주희는 <12세기 남송>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희가 강남농법을 보고 거기에 맞는 철학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7. 그래서 11회 강의를 이렇게 고쳐 이해하면 됩니다

함재봉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아마 이것에 더 가깝습니다.

<송대 중국에서는 농업혁명, 상업화, 도시화, 인쇄문화, 과거제 확대와 사대부층의 성장, 그리고 주자학의 발전이 함께 일어났다. 조선 건국자들은 이 발전된 송 문명을 이상적인 문명 모델로 삼았고, 세종은 중국의 농업·과학기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도입하는 동시에 주자학적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이렇게 읽으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반대로

<강남농법이 발전했기 때문에 주자학이 생겼고, 세종이 강남농법과 주자학을 세트로 수입했다>

라고 읽으면 역사적으로 지나친 설명입니다.

결국 질문하신 데 대한 가장 짧은 답은 <둘은 원래 직접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함재봉은 <송대의 경제적 혁명과 사상·사회제도의 혁명을 하나의 ‘송 문명’이라는 큰 틀에서 묶어 조선의 국가건설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해놓고 11회를 다시 보면 훨씬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사실 <함재봉의 역사해석 방법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앞서 개신교 강의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여러 현상을 하나의 <문명 패키지>로 묶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설명을 매우 명료하게 만드는 동시에, 실제 역사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였던 요소들의 인과관계를 지나치게 강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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