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람과 조선 사람은 어떻게 달랐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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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 조선 사람 만들기, 친중위정척사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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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한국 사람은 무엇일까?"
그 질문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한국 사람'에 대해 연구해 온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법률방송에서 함재봉 원장과 함께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을 통한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알아봅니다.
이번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두 번째 시간에서는,
현재 '한국 사람'의 원형이 '조선 사람'이라면, 그럼 '조선 사람'의 원형은 '고려 사람'인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와 유교의 나라, 사대부의 나라인 '조선'의 차이점을 결혼 제도를 통해 알아봅니다.
그리고 고려를 비롯해 조선까지 왜 그토록 중국을 따르고 문화, 제도, 풍습 등을 배우려고 했는지,
그 배경에 있었던 '송나라'는 어떤 나라였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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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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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봉의 한국인의 탄생의 봉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서론 같이 다섯 종류의 한국 사람에 대해서 어 논해 봤는데요
오늘은 우리가 보통 한국 사람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이 이제 조선 사람이죠 그 제가 그 조선 사람이
해체되면서 한국 사람이 만들어지게 됐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럼이 시간에는 그럼 그 조선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특히 그전에 있었던 고려 사람과 비교해 갖고 조선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 한국 사람은 조선 사람하고 다르다 이제
조선 사람이 소멸되면서 한국 사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국 사람에는 뭐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이렇게 쭉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자이 부분에 도달하면 이제 많은 분들이 그래요 그러면 그래
그러면 어쨌든 뭐 한국 사람은 조선 사람 다음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인간 형이라 하겠지만 그러면 조선 사람은
원래 그러면 우리의 원형이 아니냐 우리가 소위 코리안이 하는 그 조선
사람의 원형이 어 그 그러니까 코리안이 하는 사람들 한국 사람의
원형이 사실은 조선 사람 아니냐 그렇게 묻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저도 사실 그런 의미에서 아 그럼 뭐 원형이 조선 사람이었고 그다음에 이제 한국 사람으로 어쩔 수 없이 근
대화를 통해서 하기 위해서 우리가 변한 건가 이렇게 저도 질문을 해 봤는데 그래서 제가 이제 들여다보고
싶은게 그럼 조선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선 그 부분을 한번 제가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살펴보면서 제가 발견한 놀라운 것이 뭐냐면 조선 사람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 전에 있었던 고려 사람에 비해서 조선
사람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러니까 지금의 조선 사람하고 한국 사람이
다르듯이 그것만큼이나 고려 사람하고 조선 사람도 달랐다라는 걸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선 고려시대 그죠 고려 시대고 조 시대가 어떻게 달냐 그러면 이렇죠
보통 조선이 1392년에 세워지는데 그러면 조선이 분명히 유교를 도입했다
우리가 이렇게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자 성리학을 도입했다 그러면 그 전에 불 저 그 전에 고려는 무슨
종교를 했었냐 당연히 불교 근데 고려만 불교를 한게 아니죠 사실은 통일
신라도 불교고등학교
뭐 372년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됐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렇다면은 그러면 조선이 세워지는 1392년 거의 천년 동안이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죠 뭐 고구려까지 치면 한반도 바깥도 되겠지만 만주도 되겠지만
아무튼이 코리안들의이 사람들은 지금 천년 동안 불교를 했었습니다 그럼
천년 불교 국가를 교 국가로 봤 건데 그럼 여기서 우리가 뭐가
달라졌을까 굉장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겉으로 봤을 때는 그런 거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 우리가
그냥 시각적으로 이렇게 우리가 불교 국가들 어 스리랑카 아든 뭐 미안마 든가
태국 같은 나라를 가서 보면요 불교 국가에 가장 큰 특징은 뭐냐면 거기 수도 제일 큰 도시에 가면은 거기에서
제일 큰 도시 수도에 제일 크고 웅장 하 화려한 건물은 왕궁이 아니라 불교 사찰입니다
그러니까 미얀마에 가면은 어 양건의 뭐 쉐다곤 어 사원 같은 걸 정말
금으로 덮여 있는 궁궐보다 훨씬 더 사치스럽고
롭습니다 근데 조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는 그게
없었습니다 불교 사찰이 없었죠 그지만 그게 우리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불교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경주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주에 가서 보시면은 경주의 가장 크고 화려했고 한중 한 복판에
있었던 건물은 바로 황룡사는 불교 사찰이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불교
국가였고 개성 고려에 수도였던 개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들은 불교 사찰 되었었습니다 자 그런데 그 이제 겉모습의 얘기
그다음에 보면 사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은 엄청난 종교 탄압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조선이 불교에 대한 탄압 한 내용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우선
수치적으로 봐도 이렇습니다 1406년 태종 6년에 그때만 하더라도 조선
전국의 불교 사찰이 3천개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태종은 그 3천개
사찰 중에서 개종 단 242개 사찰만 남기고 전부 다 폐쇄를 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아드님 세종대 은요 또 그로부터 18년 후인 1426년
세종 6년에 11개 종단을 선정과 교정 두 종단으로 통폐합하고 각
종단에 18개씩 총 36개 사찰만 남기고 모두 폐쇄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박물관 같은 데를 가서 보면요 경주 박물관 같은 데를 보시면은 예를 들어서 이 목이 잘린
그 불상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 목 잘린 불상들이 왜 있었냐 면요
우리가 뭐 몽골 침입이나 무슨 임진 회란 때 그렇게 됐다 그러는데 아닙니다 그게 사실은
뭐냐면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면서 불교 탄압을 할 때에
그때에 뭐 말하자면 유교 깡패들이 젊은 깡패들이 불교 사찰에 들어가
갖고 스님들 다 쫓아내고 그렇죠 거기 있는 뭐 경들 다 불태우 르 어고
그러면서 그걸 이제 차지를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차지하는 거 사실 그래서 보면 우리가 불교
사찰과 유교의 그 서원의 가람 배치가
똑같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옛날에는 그 뭐 들어가서 불을 다 사채를 불질러
버리고 새로 건물을 지어서 서원을 만든게 아니라 그 자리에 그냥 차지하는 거죠 그래서 그래갖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가 갖고 다른 거는 불 태우고 뭐 이렇게 쉽게 되는데 이제 처치 곤란이 뭐냐면 불상들
있니다 특히 돌로 만든 화가로 만든이 불상들 있니다 그래서 그 불상들을
처치하는 방법이 뭐냐면 가장 쉬운 방법이 우물에 던지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불상들을 우물에 던져
버리면 그때 가장 약했던 부분이 목인대 그래서 목이 잘려서 그 사진에서 보여 드리는 그러한 그 불교
그 저 그 박물관의 지금 경주 박물 가간 듯해 보면은 목이 잘린 불상들이
그렇게 많은 건 바로 종교 탄압 때문에 그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해서
엄청난 종교 탄압이 일어나면서 불교에서 유교로 바꿉니다 근데 바꾼게 뭐 겉으로 일어나는 이런 종교 종교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많은 것을 바뀝니다
대표적인게 결혼 제도도 철저하게 바뀝니다 우선 제가 보여 드리고
싶은이 부분이 뭐냐면은 세종실록 12년 12월 22일자에 1430년
12월 22일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은 세종대왕이 자기의 신하
김종서고 대화를 하는 겁니다 김종소 유명한 육진을 개척하고 어 나중에
단종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결국은 세조 수양대군 하고 싸우다 죽는 바로 그 김종서 근데 그 김종서가 그렇게
이제 세종의 사랑을 받았었는데 종하고 이런 대화를 하는 장면이 실록에 세종
실록에 나옵니다 임금이 김종서에게 이기를 친의 예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실시하지 않는데 부윤 고약해 등이 고래에 의거하여 이을 실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때 친형의 예를
실시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의 어린 처녀도 모두 결혼을 시킨 것은 친형을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운이 이유란 무엇인가 합니다 그니까 뭐냐면은 자 지금 대화를
하는데 임금이 뭐라 그 거죠 친을 하려 그러는데 리 아버지 때부터
때부터도 하고 그리고 대신들이 부윤이라는 건 서울 시장이죠 서울시장 한성 부윤 하면 서울 시장인데 고약해
사람 이런 사람들이 고래에 의거한다 고래라는게 실록에 나올 때 고래라는 건 뭐냐면은 중국의 법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들여올 유교의 법 종법이 법에
의해서 우리도 친형이란 걸 실시하려 그러는데 나의 어린 처녀도 모두
결혼을 시킨 것은 친형을 행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거래요 그럼 여러분 친형이 뭐
친형이 분명히 결혼하고 관계된 거죠 근데 영이라는게 뭐냐면은 이런 겁니다
유교에 의해서 유교에 따르면 결혼을 할 때에는 여자가 남자집에 시집을
가서 시책으로 가서 거기에 남자집에 조상님들의 사당에 가서 조상님들의
위패 앞에서 거기에서 제가 이덱으로 이제 시집을 왔습니다 인사를 드리는게
그게 친의 예를 지내는 겁니다 근데 지금 그를 하자는 것을
하자 그랬더니 안 하고 다 따로 결혼을 시켜 버렸다 이러는 거예요 지금 그러면서 세종이 하소연을 하면서
야 이거 이거 중국법의 의해서 종법에 의해서 고래에 의해서 이걸 하자
그러는데 왜 하려 그랬더니 안 하더라 왜 이게 안 되느냐 그랬더니 김종서가
이런 기가막힌 대답을 합니다 김종서가 뭐라 하냐면 종수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그 유례가 오입니다
이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나라의 풍습은 지금 조선입니다 조선의 풍습은 결혼을
하면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간답니다 지금 우리는 뭐라 그럽니까
결혼을 하면 보통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시식 가는 걸로 생각하잖아요 근데 지금 뭐라 그래요
여기선 아니다 그게 안 되는 기 일이 이유가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이런 거죠
우리말로 결혼한다는 거를 여자는 시집
간다 남자는 장가 간다 그러죠 근데 여러분 시집 가는게 뭔지 아세요 시집
간다 시댁으로 가는 거예요 시집으로 가는 거예요 여자가 시아버지 시어머니
집으로 가는게 시집 가는 겁니다 그니까 뭐예요 결혼할 때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는 거죠 근데 장가
가는 거는 뭡니까 남자가 장인 장모 집으로 가는
거가 장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지금 우리 말로는 우리 식으로 하면은
지금의 한국식 조선식으로 하자 하면은 뭡니까 사실 장가 안 가요 시집만
가요 그죠 그리고 여러분 결혼을 했는데 남자는 장가 가고 여자는 시집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이
안 되는 거죠 결혼이 성사가 안 됩니다 그니까 장가를 가든지 시집을
가든지 둘 중에 하나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지금 무슨 얘기입니까 친형을 하라 유교적
그렇죠 가부장제 제대로 된 가부 장제를 하려면은 종법 제도로 하려
그러면 여자가 남자 집으로 가야 되는데을 가야 되는데 고려에는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안 그러고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돌아가서 그 기사를 보면은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곧 거기에 필요한 노비 의복 기명을 여자의 집에서 모두 마련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하여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의 집이 만일 부자라면 곧 친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부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여자 남자의 집에서도 일을 왔습니다 하였다
그러니까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가설하는
거예요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필요한 노비 의욕 기명을 여자의 집에서 마련하게 된다 그게
뭐냐면 고려말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딸을 낳으면 딸을 낳은 집에서 뭐라
그래요 아 언젠가는 우리가 사위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식구가 올테니까 거기에 필요한 노비 의복
기명 즉 경제적인 준비를 하고 있죠 새식구를 맞이할
준비를 남자 집에선 어떻게해요 아들 나면 어떡합니까 나이 되면 나이되면 장가 보내 면
되는 거지 이러는 거죠 그런데 지금 뭐 그래서 여자 집에서는 사위를
맞이할 준비가 다 돼 있었던 거고 남자 집에서는 아들 그냥 장가 보내면 되는 걸로 생각을 했었는데 느닷없이
나라의 법이 바뀌어서 뭐라 그러는 거예요 다 바꿔 가지고 갑자기 여자 보고 남자 집으로가 가게 되니까
김종서가 아니 그 준비가 안 돼 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딸을 그러면 시집 보내려 그러면 그
남자 집에서지 딸도 매겨 살릴 수 있기 위해서 노비 의복 기명을 다 딸하고 같이 따라서 보내게 돼야 되는
거니까 이게 이런 걸 할 수 있는 집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런 거죠 여러분 결혼했을
때 노비 의복 기명을 딸과 딸려 보내는 걸 우리나라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뭐라 그럽니까 그 혼수라고 그게 지참금 있니다 혼수와
지참금은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겁니다 원래는 장가들든 사람들한테 시가라고 하는 과정에서 여자집에서 어쩔 수
없이 재산이 있던 여자집에서 한테 그걸 들려 보내는
거죠 남자의 집이 만일 부자라면 어 괜찮을 텐데 신부를 접대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 그래서 안 될 겁니다 인거죠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 있었던 겁니다 그랬더니 임금이
말하기를이 예법이 과연 갑작스레 실시될 수 없다면 왕실에서 먼저 실시하여 사대 부들로 하여금 본받게
안되면 어떨까 하니 종가 대답하기를 정말 말씀과 같이
않는 사람에게도 죄를 주지 않으면 고래를 행할 뜻을 가진 사람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며 그렇게 해서 오래되면
온 나라에서 저절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에 임금이 그렇다
합니다 세종대왕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왜 이걸 그대로 실시합니다 어떻게
실시하 세종 17년 2월 29일 날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윤으로 가선대부
파원 삼으니 윤평 봉상사 윤의 아들로서 장차 숙신 주가 그에게 시집
때문이었다 옹주는 바로 태종의 공인 소생이다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숙신 옹주는 태종의 궁인
소생이 그 세종은 태종의 정비의 중전의 소생이 그러니까 태종의 후궁의
소생인 거죠 그러니까 세종의 이복 여동생입니다 이복 여동생 숙시 홍주를
시집을 보냅니다 친형을 처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 어떻게 하느냐
가선대부 윤평이 사람을 골라서 윤은 봉상 시사 윤창 의 아들 봉상
지사라는 거는 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낸 사람이죠 그 사람의 아들 윤을
가선대부 파원의 봉하고 그에게 자기의 이복여 동생을 시집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다세 후에 17년 3월 4일 1435년 3월 4일 음력 기사를
보시면은 파원 윤평이 숙신 홍주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형이
이로부터 비롯되어 즉 조선에서 최초로 시간 여자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바꿉니다 이게 유교의
대혁명 있니다 세종대왕의 엄청난 노력 문명을 바꾸는 노력입니다
세종대왕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전혀 태평성대 아니었습니다 수천년 이후 온 전통과
모든 관습을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 세종의 놀라운 개혁 혁명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세종이 바꾸고 바뀌고 애를 쓰는데도 이거 잘 안 바뀝니다 실제로 왕 중에서요 친형에 따라서 최초로
장가를 드는 저 결혼을 하는 사람이 중종이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일반 집에서도 안 바뀝니다 이게 안 바뀌는게 어디서 보이는지 아세요 우리가 신사임당 얘기를 할 때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얘기를 할 때 항상 그 그렇게 배웁니다 어
신사임당이 율곡을 자기의 친정인 강릉의 주권에 들리고 가서 거기서
외가에서 율곡이 컸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런데 우선 외가에서 크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조선 시대 내내 끝까지도 거의 다 양반집에서 남면은 외가에서 자하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뭐냐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안 배우는게
뭔지 아세요 강릉의 오주는 신사임당의 친정이 아니에요 즉 아버지 집이 아니에요
거기는 자기 어머니 집이에요 그니까 신사임당에 외
가였습니다 자기 어머니 자기 외할머니 집이에요 그래서 자기 외할아버지
이원도 장가 들어와서 살고 있었고 자기 아버지 신명화 장가 들어와서
살고 있었고 그리고 자기 남편 이원수 의 아버지도 장가를 들어왔었고 다만
뭡니까 친형을 하라고 세종대왕 때부터 그렇게 이걸 바꾸라고 하니까 이때부터
슬슬슬 바뀌는 거죠 그래서 신사임당은
외가에서 그러니까 율곡의 외가 자기의 또 외가에서 아이를 키우는 거 그대로
하고 그 대신 이제는 뭡니까 자기의
시댁을 시댁인 파주를 자꾸 오가야 됐어 옛날 같으면 여자가 자기 집에서
살고 남자가 장가 들어서 사는 거고 여자가 경제권을 갖고 있었고 남자들이 장가 들어서 살았었는데 사실은 이제는
그걸 받기 시작하는 거죠 종법제도 유교에 따라서 그래서 자꾸 시댁을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신명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 외가인 강릉에 가서 3년상을
분명히 치렀습니다 그거는 후대의 100년 후에 조선 여성하고 완전히
다릅니다 따라서 임당은 사실은 조선의 여성이라 이보다 고려의 여성이었던
거죠 그래서 자기 집에서 외가에서 어머니 여자들이 경제권을 잡고 있었
있는 그 사회에서 거기에서 외할 장가 들어온 외할아버지 장가 들어온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많은 거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영특해 있던 거고 그로부터 100년
150년 후에 조선의 여성들은 그때부터는 종법제도 의해서 전혀 아무것도 안 배우고 시집을 가갖고
거기에 묻어야만 되는 그렇게 바뀌는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변화를 겪는
것이 고려 사람에서 조선 사람으로 넘어오는 과정입니다 고려 사람에 대한 몇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릴게요 1924년에 고려의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입니다 서긍이 송나라 사람이 고려의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서 고려도경이란 책을 1924년에 출판을 합니다 그 책에 나온 몇 가지만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냐면요 남녀 간의 혼인에서 고려 사람에 대한 이제 중국 사람이 보고
송나라 사람이 보고 하는 얘기입니다 남녀 간의 혼인에서 가볍게 합치고 쉽게 헤어져 전례를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그러니까 굉장히 쉽게 조선 사람들을 결혼할때 헤어졌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장가
들었다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냥 나옵 또 딴 딴 데로 장가 들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장가 들고 굉장히 쉽게 이혼을 하고 다른 사람과 살고
이런 걸 그래서 중국 사람 입장에서 전례를 본받지 않다 유교의 제례 이런 거를 나중에 이제 조선이 받아들이게
된 종법 제도 같은 걸 안 받아들이니까 이거 무슨 웃기는 일이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면서
부유한 집에서는 아내를 사인이나 맞이하는데 조금만 맞지 않아도 헤어진다 이런 얘기도 써 놓습니다
근데 저는이이 기절을 보면 사실은 아내를 3살이나 맞이한다는게
사실 여자들이 가만히 있고 남자들이 장갈 들었었는데 아마 그걸 헷갈렸던 거 같아요 다도 이제 남자 중심으로
하는 그 종법 유교의 종법제도 중국식으로 봤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열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러분
목욕을 자주 하고요 그리고 남녀가 같이 옷을 벗고 혼욕고 이러는 거를
갖다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는 그런게 어느
나라입니까 일본이 그렇습니다 지금 중국 사람이 와서 본
고려 사람의 모습이 뭐예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본 사람의 그
모습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실
한반도에 살던 사람의 문명 세계관 세계 시집가 저 시집가는데 장가가고
뭐 이런 많은 거를 보면은 번하고 같은 문명권이 일본하고 한반도가 같은
문명권이 건 분명합니다 달라진게 뭐냐 조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이
중국의 종법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갖고 결혼 제도부터 모든 거를 바뀌기 시작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지 사실은 일본 의 문화고 굉장히 조선의 문화가 고려의 문화가
같았습니다 이거를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릴게요 이게 뭐냐면고 원나라 때 그러니까 고려에서
원나라가 이제 동료 어린 여자 아이들을 많이 이제 데리고 갔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어린 여자들을
자꾸 처녀들을 바쳐야 됐었는데 그때 이제이 문제에 대해서 고려 조종해서
이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이곡이라 사람이 어사대 아는 기관을 통해 갖고 이거 좀 중지를 요청해 달라 그러면서
상소문을 씁니다 상소문을 쓰면서 중국 사람들한테 이렇게 얘기를 하라 그러는 겁니다 뭐라면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뒷날 자식들의 봉을 기대하는 것이며이는 비의 차별이나
화이의 구분이 없는 것이니 그 천성이 같기 때문입니다 뭐 천하거나 아니거나
아니면 중국 사람이거나 캐거나 화이나 다 마찬가지다 또한 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아들로 하여금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이는
지인의 대릴 사위와 비슷합니다 그죠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한테 설명을 하려
그러면 중국은 이미 종법 제도가 오랫동안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시집을 가야 되는 거고
그죠 장자 상속이 되는 거고 이렇게 되는 건데 그게 아닌 거를 지금 설명을 하려 그러니까 중국도 진나라
때는 대릴 사회 제도가 있었다는 거죠 진나라 때는 아마 여자 저 남자가 을
갔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설명을 해라 중국 저 원나라 사람들한테 무릇 부모에게 봉양을
바치는 것은 딸이 맡아서 하는 것이므로 딸을 낳으면 은혜와 부지런함으로 키워서 밤낮으로 자라서
능히 봉행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하루 아침에 품 안에서 빼앗아 사천리
밖으로 내 보내 버리기 때문에 발걸음이 한번 문을 나서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부모 봉양을 누가 합니까 딸이 합니다 니다 근데 저는
이거를 보면서요 이걸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든지세요 역시 한국 사람은 고려
사람이구나 그런 면에서 코리안이 그나 왜 그렇습니까 요새
여러분 맞벌이하는 부부가 아이를 누구한테 맡깁니까 무조건 외가에 맡깁니다 친정
엄마한테 맡깁니다 그죠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요
분명히 뭐 뭐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보다는
외삼촌 하고 친합니다 고모다 이모하고 친합니다
그리고 친 할머니보다 외 할머니하고 친합니다 외가가 훨씬
편합니다 아직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렇게도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 우리 한국 사람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제일 좋은 인간관계가 뭐냐
뭔지 아세요 장모하고 사위 관계입니다 반면에 제일 어려운 관계가
뭔지 아세요 시어머니 하고 메누리 관계입니다 저는 이걸 보면
아이 고려 사람 조선 사람 코리안들이 원래가 그렇구나 장가 가서 처가에
얹혀서 살면서 애들을 외가에서 키우는 것이 그게 굉장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거를 이제 바꾸려고 중국식으로 중국 문명이 앞서가는 문명이라고 해서 그
종법 제도를 들여오려고 애를 쓰는 과정이 그게 조선이었다 지금 와갖고
그 유교가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다시 원래 장가들고 외가에 외가와 친하게 지내는
어 그런 모습이 참 돌아간 거 보면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람의 원형은 오히려
조선이 아니라 그 전에 코리안들이 아니한 고려인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조선은 왜 유교를 도입했을요 어
그러니깐 지금까지 쭉 말씀드린 대로 어 장가 들면서 고려 사람들까지
하더라도 장가 들면서 외가에서 자라고 이렇게 이제 쭉 살아왔습니다 근데
세종 때부터 뭐 태종도 그랬지만 본격적으로 다 시집을 보내려 그러면서
중국의 종법제도 들려 그랬습니다 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종법 제도를
들여오는 과정이 그 완전히 조선을 저 고려를 바꿔서 이제 조선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라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근데 그럼 왜 이렇게 종법 제도를 들여오려고 그랬을까 왜 그렇게 중국을
그대로 따라하려 그랬을까이 부분이 이제 설명이 돼야지 왜 세종대왕이 그런 일을 했을까
세종대왕의 업적이 뭘까 우리를 이해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야지 조선 사람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드론 그 유교를 하게 된 이유는 사실 굉장히 간단합니다 경제적인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어 당시 어 조선이 건국할 때만 하더라도 이제이
명나라 있죠 명나라가 13 64년에 건국하고 30년도 안 돼서 이제
조선이 건국을 하지만 그럼 명나라 이전에 원나라 있고 원나라 이전 이전에 송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송나라 때부터 고려하고 굉장히 이제 특히 긴밀하게 그 여러 가지 그
관계를 맺고 그랬었는데 뭐 특히 이제 부마국 우리가 그 맺고 그랬었지만
고려가 맺고 그랬었지만 중요한 것은요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송나라
송나라가 어떤 나라였는가니다 송나라에서 중국에서는대 산업 혁명이
일어납니다 사실 중국의 역사가 송나라 때에 중국이 이루는
경제성장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특히 경제 사학자들이 뭐라 그러냐면 중국이
9세기 10세기 11세기에 이루었던 송나라 때 이루었던 그 경제 발전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 유럽이 이루는 산업 혁명에 버금 가는 것이다 하나도 모자르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경제 발전이 일어나고 산업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일어난다 사실 재밌는 역사적인
의문점은 뭐냐면 왜 서양의 거는 그 이후에도 계속 가서 지금까지도 그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우리도 이제 거기에 따라가고 있지만 왜 중국에서는 그
이후로 그게 멈췄을까 그게 이제 경제 사학자들 굉장히 재밌는 얘기지만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해해야
될 부분은 뭐냐면 송나라가 너무나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기 때문에
고려의 시대부터 시작해서 그거를 배우려고 고려 사람들 그리고 이제 조선 사람들이 무진 내를 씁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성장이 일어납니다 자 그럼 그 성장이 어떻게 일어나냐 이런 겁니다 뭐냐면 송나라 때 처음으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뭐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중국 문명이 중국 문명이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중국 문명은 원래
황하 문명이라고 우리가 배우지 않습니까 황하는 북쪽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중원이 하는 중국의 한
가운데를 흘러가고 있는 거고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어 뭐 낙양 장안
지금 서안이 시안이라 그러죠 시안 장안 같은 데는 서북 쪽입니다 그리고 그쪽은 굉장히
건조한지 죠 그래서 밀조 이런 거가 많이 나 됩니다 근데 거기에서 중국 문명 황화
문명이 만들어지는데 당나라 말기부터 시작해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이제 이러면서
점점점점 특히 송나라 때에 거한 족하고 여진족한테 강북 지금 그
황하강 유역을 뺏기면서 중국 사람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송나라때 와고는 사실 황하강이 아니라 뭡니까 양자강 유역에
지금 어 개봉 북송에 수도였던 개봉 그다음에 어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
전부 다 양자강 유형입니다 그러니까 양자강 유역까지 중국 문명이 밀려
내려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이 양자강 유역이 뭡니까 중국 사람들은 양자강이라 하지 않고 이걸 장관이라
그러죠 그리고 근데이 장강이 이루말할 수 없게 비옥한 됩니다
물론 범람도 하고 그러지만 양자강 유역에서는 이런 말할 수 없는 곡식
다양한 과일 이런 것들이납니다 이거를이 사람들이 일찍감치 알았기 때문에 사실은 대운하를 뚫는 거죠
대운하는게 뭡니까 뭐 수양제 뚫고 뭐 진시황도 뚫고 했던이 대운하는 거 뭐냐면 양자강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곡식이나 이런 이런 과일이나 이런 거를 윤하를 뚫어서 회화로 그다음에
그 회화에서 다시 황 황하루 해 갖고 그이 시안 이런 도시에 이제 배달을
하는 거죠 자 그렇게 할 그래서이 사람들은 그걸 양자강 유역이 굉장히 비옥하다 건 알았죠 그런데 멀기
때문에 양자강 남쪽 즉 강남으로 안 갔습니다 여러분 강남이란 말이
양자강의 남쪽이라 뜻입니다 장난이라는 것은 양자강의 남쪽 입니다 그래서 그
강남 유역을 개발을 못 하고 있었는데 송나라 때 어쩔 수 없이 강남으로
갑니다 그래서 그때부터이 송나라 사람들이 대단한 이제 왕한석 이런 사람들이 놀라운
사람들이 기가 막힌 토목 기술들을 이용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양자강
삼각주 지금 그러니까 상해 어 항주 소주 양주 이쪽입니다 거기가
전부 다 이제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었던 거를 그거를 바닷물을 다 빼냅니다 그래서 강 물줄기들을 바꿔
가지고 바닷물을 빼내고 민물을 대기 시작하면서 그 거기에 수천만
헥타르에 비옥한 농토를 만듭니다 여러분이 농토를 만들어간 과정은 예를
들어서 지금으로 보시면 캘리포니아의 한 사막 한 가운데에다 컬러라도 강에
물을 대면서 나파 밸리라는 걸 만들어서 가장 세계에서 비옥한 땅 가장 포도가 좋은 포도가 나서 유명한
와이너리가 생기고 하는 그런 땅을 만들듯이 송나라 사람들이 양자강의
양자 하류의 삼각주에 바닷물을 빼고 거기에 민물을
대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토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때에 절강성에 있는
그 농부들이 처음으로 이법이 걸 발명을 합니다 이양 모입니다 그니까
모이라는 걸 통해서 작은 판에다가 그죠 모 심어 가지고 병충해와
잡초들을 다 제거한 다음에 어느 정도 자한 다음에 옮겨 심으니 굉장히 잘
자라는 거죠 그러면서 굉장히 풍성해지는 거죠 그래서 더군다나 물을
굉장히 많이 필요로 하는이 쌀 농사를 물이 많은 양자강 유역에서 드디어 질
그 농사를 질 수 있게 되면서 쌀농사를지면서 논농사를 하면서
이때부터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쌀이 중국 사람의 주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중국 음식 보면면 종류도 많고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쌀이 이제
드디어 주식이 되기 시작하는게 바로 이단 송나라 때뿐입니다 그래서 이때 당시에 그림을 보시면은 지금 여기에
그림 보시면 지금 모내기를 하는 송나라때 그림입니다 모내기를 지금 하고 있는게 왼쪽의 그림이고 오른쪽에
보시면은 수차 수차를 만들어서 이렇게 자전거 타듯이 아이들이 그 수차를
돌리고 있으면은 아래쪽에 있는 물에 있 연못에 있는 물을 길러 갖고 지금
그 쌀농사는 논에다 물을 대는 겁니다 이러한 농사 기법들이 이때에 송나라때
다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시비법 그니까 그 료를 대는 방법 어 그 모내기
하는 방법 그다음에 그 저쪽 그 월남에서 안남 지방에서 참파 별하는
새로운 벽까지 소개가 되면서 소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이러면서 그다음에 그 다음 사진을 보시면은 여기에 수차 이런 거가 되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계단식이 농지를 만들어서 논을 아무리 높은 산 국대에도 물을 길러 올라 갖고
쌀농사를 지으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족한 어 그 경제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게
아니라 농사 짓는 사람도 농사를 짓고 농사짓는 사람은 그 대신 자기네가
먹고 남는 거는 시장에다 팔아서 그 돈으로 뭐 도자기도 사고 무슨 뭐
약도 사고 다른 먹을 것도 사고 옷도 사고 그러면서 뭐가 됩니까 상업이
발달하는 거죠 그니까 누구는 맨날 논농사 반농 짓는게 아니라 누구는 뭐
노예를 쳐서 뭐 비단도 만들고 누구는 도자기도 만들고 누구는 병원도 차리고 하면서 송나라 때에 놀라운 상어
문화가 발달하면서 어 생활 수준이 급격히 높아집니다 송나라 때는 이때에
그래서 또 제철 기술이 발달을 해 갖고 처음으로 석탄을 이용해 갖고
화로를 만들어 갖고 그 그 떼기
시작하면서 고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고 그
고열을 만들어낼 줄 아는 기술이 생기니까 자기 도자기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을
벌어지면서 어 송나라가 놀라운 산업 혁명을 구가하게
됩니다 이때에이 상업화가 이루어지면서 15년이 되면은 60억
개의 동전이 유통이 됩니다 송나라에서 그래서 너무 동전이 많아지니까 세계
최초로 집회를 만듭니다 여기 사진에 나오는 것이 그때 송나라 때 집회를
만들든 정부에서 만들 집회를 만들든 그 판입니다 그러면서 송나라가 나침반을 만들고 화약을 발명하고
목화를 재배해서의 의류 혁명을 일으키고 인구가 처음으로 1억을 돌파하고 항주 인구가 1만을
돌파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것이 지금 옆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요 고려의 왕자들은 우리가 충렬왕 충각 충선왕이
전부 다 뭡니까 몽고의 침입을 받은 이유로 몽고의 부마국이 되면서 고려의
모든 왕자들은 세자로 책봉되는 즉시 연경 지금의 북경이 연경 중국의
수도로 가서 원나라의 수도로 가서 거기에서 원나라 말을 배우고 몽고
말을 배우고 중국 말을 배우고 모든 거를 배우고 원나라의 공주랑 결 결혼을 해서 그렇죠 노국 대장 공주
뭐 이런 사람들하고 결혼을 해서 돌아와서 주기를 하는 거죠 그럼이 사람들은 고려의 왕들은 다 뭡니까
너무나 풍요롭고 놀라운 세계를 보는 거죠 그 세계를 보고 와서 조선
고려를 개혁을 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그런게 그게 공민왕 있니다 그리고 이렇게 놀라운 송나라가 만든
나라가 원나라 때까지 그냥 계속 가는 거죠 그래서 원나라 때에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가 가 와 갖고는 동방
보고서 너무 놀래 갖고 동방 경문 로고 쓰면서 우리가 서양을 배워야 된다라고 하는 얘기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거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 이태리 사람만 그런게
아니었죠 이탈리아 사람만 그런게 아니라 뭡니까 고려 사람 조선 사람 사이에
이미 이걸 배워야 된다 어떻게든지 강남을 중국의 강남을 배워야 된다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흔적이 아직도 우리 말에 많이 남아 있어 우리의 옛날 얘기 우리의 언어 속에 참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흥부전 있니다 여러분 흥부 전해요
제비가 떨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니까 흥부가 어 어떡합니까 그 다리를 고쳐
준 다음에 그다음에 뭐라 그래요 날려 보내면서 부디 죽지 말고 살아서
멀고먼 말리 강남을 평안히 잘 가라 가거라 그래서 제비가 어떻게 돼요
겨울이 되면 강남을 갑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강남이
압구정동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남이라는 것은 중국의 양자강 유혹입니다
그만큼 그래서 거기에 제비가가 갖고 박치를 물고 오니까 거기에서 온갖 보물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물론
놀부는 나중에 도쿄 빈도 나오지만 여기에서 온갖 보물이 나오는 겁니다 그만큼
강남은 부의 상징 그죠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것은 서초동 간다라는 얘기가 아니죠 중국의 강남을 간다라는 거죠
강남콩 강남미 뭐 뭐 이런게 전부 다 우리 말 속에 남아 있는 아직도 중국
강남의 풍요에 대한 그 동경입니다 여러분 이거를 조선은 그니까 고려가
이거를 들어오려 그랬었고 결국 공민왕 같은 사람이 굉장히 노력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 실패를
합니다 그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조선을 세우는 사람들이 유교
구테타를 세 일으켜서 그래서 조선을 세워 가지고 이거를 들여오는 겁니다
강남 농법을 들여오는 거죠 그래서 세종대왕이 늘 뭡니까 모판을 짜놓고
경외로 앞에다 모판을 짜놓고 그러면서 맨날 가서 모판이 잘하는 거를 보면서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비가 안 오느냐 비가 오는 걸 재 발라 그러니까 추구기를 만든 거고요
일조량을 제발 해시계가 나오는 거고 그렇게 해서 과학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지 뭐 세종이 딴 거 하다가 이날은 과학의 날이라 그래서 과학하고 그런게 아닙니다 그러면서이 새 문명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과학 기술 뭐 장영실에 온갖
과학 기술 그 그런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는 물론이고
그리고이 시스템을이 새로운 경제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 제도가
뭐냐 가족 제도가 뭐냐 역시 그건 중국 것이다
특히이 강남 농법이 나오는 그 강남 송나라 때의 사상 이념이었다 거기
강남에서 나온 송에서 나온 철학자인 사상가인 주희 주자라는 사람이 만든
주자성리학 그 사람이 만든 주자 가래 이런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 강남 농법과 주자 성리학을 한 패키지로
생각해서 받아들이는 거죠 지금 우리가 자유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한
패키지라고 생각하면서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를 동시에 도입을 합니다
하나 없이 다른게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똑같은 이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강남 농법을 들여오기 위해서 중국의 문명을 배우기 위해서 중국의
주자 성도 들여오는 겁니다 그런 이유를 통해서 그런 이유 때문에
조선이 고려해서 조선으로의 대문 전환이 일어나는 거고 조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사람은 한국 사람의 원형 글쎄요
뭐 어디까지 시점을 잡냐 따라 원형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은 코리안들의 원형으로 봤을
때는 사실 어 굉장히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조선사람을 다시 근대인 근 문명을 받아들이는 한국 사람으로 바꾸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그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고려 사람에서 조선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 시청자 여러분들 어떻게 보셨는지 저는 참 참 재밌는 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 이제 한국으로 넘어와야 되니까
그러면 조선 사람들이 왜 조선을 버리게 됐을까 지금 세종대왕이 이렇게
어렵게 만든 조선이 왜 몰락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가서는 조선 사람들이
조선을 버리기 시작을 했고 그고 조선 한국 사람이 만들어졌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저는 어 19세기 조선 날에 조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우리가
아주 실질적으로 제대로 들여다봐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19세기 조선 사람들의 어 생활상을 어 데려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임무를
통해서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지금까지
함재봉이었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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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람과 조선 사람은 어떻게 달랐을까?>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2회에서 함재봉은 '조선 사람'이 한반도인의 불변하는 원형이 아니라, 고려 시대의 문화와 문명에서 단절되어 유교화 개혁을 통해 인위적으로 새롭게 재구성된 인간형임을 논증한다.
(1) 불교 문명(고려)에서 유교 문명(조선)으로의 종교·사회적 전환
종교 지형의 급변과 탄압: 한반도는 삼국시대 이래 천년 넘게 불교 문명권이었으며, 고려의 개경이나 신라의 경주는 거대한 사찰이 도심의 중심을 이루는 전형적인 불교 국가였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강력한 억불 정책이 시행되어, 태종 대에는 전국 3천여 개 사찰 중 242개만 남겼고, 세종 대에는 이를 선종과 교종의 36개 사찰로 통폐합하여 대대적인 종교 탄압과 사찰 재구성을 단행했다.
결혼 제도 및 가부장제의 재편: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만 해도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가는 <장가가는> 솔서혼(솔서속)이 일반적이었으며, 경제권과 부모 봉양의 책임도 딸과 외가 중심으로 이어졌다. 세종은 중국의 유교적 종법에 따른 <친영례(남자가 여자를 맞아 시댁으로 데려오는 친영 제도)>를 조선 사회에 이식하기 위해 왕실(숙신옹주 혼례)에서부터 이를 직접 모범으로 시범하며 강행했다. 이로 인해 시댁 중심의 가부장제와 지참금 형태의 혼수 문화가 형성되었으나, 신사임당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 중기까지도 외가 중심의 고려적 관습은 오랫동안 잔존했다.
동아시아 해양 문명권의 공유: 고려 시대 사람들의 풍습(자유로운 이혼/재혼, 혼욕 및 자주 목욕하는 습속 등)은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대 한반도 주민은 중국 중원의 유교 질서보다 일본 archipelago 등과 문화적·풍속적 유대감을 공유하는 동일 문명권에 가까웠다.
(2) 유교 도입의 본질: 강남 농법과 주자학의 패키지 도입
송나라의 산업혁명과 강남(양자강) 문명: 송나라 대에 이르러 중국 문명의 중심이 황하 유역에서 비옥한 양자강(강남) 유역으로 이동했다. 대규모 토목공사와 이앙법(모내기), 수차, 시비법, 품종 개량(참파벼) 등이 결합하면서 폭발적인 농업 생산력 증대와 상업, 제철, 지폐 발행 등의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주자학과 강남 농법의 결합: 조선의 성립과 유교화(주자학 도입)는 단순한 관념적 사상 수용이 아니었다. 송·원 대의 압도적인 경제적 풍요와 강남의 선진 농업 기술(강남 농법)을 도입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백성을 부양하기 위한 '실용적 경제 개혁'이 그 본질이었다. 주자학과 주자가례는 이러한 강남의 경제·농업 시스템을 받치는 통치 이념 및 사회 질서 패키지로 함께 수용된 것이다.
2. 평론: 구조주의적 문명사와 전통 재창조의 역설
강좌 2회는 전통에 대한 통념을 뒤흔들며, '조선성(朝鮮性)'의 형성 과정을 경제·기술적 토대와 결합하여 입체적으로 해석한 사상사적 성과를 보여준다.
첫째, '전통'의 인위적 창출(Invented Tradition)에 대한 명쾌한 통찰이다.
흔히 한국인이 '유구한 전통'이라 믿는 시댁 중심의 가부장제,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해체, 제사 문화 등은 반만년의 유산이 아니라 세종 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국가 권력이 기획하고 주도한 '유교적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결과물임을 밝혀낸다. 고려의 풍속을 오랑캐나 야만으로 몰아세우며 유교적 종법 체계를 이식하려 했던 정치가들의 노력을 파헤침으로써, 전통이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적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 산물임을 일깨워준다.
둘째, 관념론에 갇혀 있던 성리학 수용사를 '물질적 토대(농업 기술)'와 결합했다.
조선 성리학을 단순한 명분론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형이상학적 유희로 보지 않고, 송나라 강남의 선진 모내기 기술 및 수리 시설이라는 '물질적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화 과정으로 해석한 점은 매우 뛰어난 물적 사학의 접근이다. 세종 대의 측우기, 해시계, 과학 기술의 발달이 왜 하필 농업 국가의 기틀을 잡는 시기에 집중되었는가를 유교적 경제 기획의 관점에서 매끄럽게 설명한다.
셋째, 현대 한국인의 이중적 정체성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설명력을 제공한다.
조선조 수백 년 동안 유교적 이념을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인의 일상 문화(외가 친화적 정서, 장모-사위 관계의 유대, 친정 어머니에게의 육아 의존 등)에는 여전히 고려 시대의 문화적 유전자가 강력하게 일탈·잔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제도가 규정한 '조선 사람'의 겉껍질 아래에, 보다 오랜 역사적 깊이를 지닌 '고려 사람(해양·동아시아적 습속)'의 정서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2회 강연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이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문명 체제와 인간형의 거대한 개조'였음을 증명한다. 나아가 우리가 '한국인의 본질'이라 규정하는 수많은 관습과 의식구조 역시 시대에 따라 언제든 다시 해체되고 재구성될 수 있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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