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2

백낙청의 가족사 “평북 정주 수원 백씨 후손…화려한 ‘백병원 가문’의 이단아”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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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험ㅣ백낙청의 가족사] “평북 정주 수원 백씨 후손…화려한 ‘백병원 가문’의 이단아”
입력 2005.10.28
 
한기홍_월간중앙 객원기자

백낙청이 태어난 곳은 대구지만 부친 백붕제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남양동이다. 고향 마을은 달래강이 서해로 빠지는 곳으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다. 정주 남양동은 해변을 접하고 있지만 독장산·제석산 등 아담하고 선이 고운 능선에 둘러싸인 곳이다. 여우가 난다는 이곳 정주의 골짜기에서 위대한 시인 백석이 태어났다. 이 시인의 본관도 수원이었으니 백낙청 일가와도 피를 나눈 인척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주는 대체로 반농반어의 고장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병어·뱅어·조기·숭어·농어·민어·복어 등 서해에서 잡히는 모든 물고기가 포구의 시장에 넘쳐났다. 정주는 또한 ‘흉년을 모르는 고장’으로, 밥맛 좋기로 유명한 정주미의 산지로 잘 알려졌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관이 수려하고 돈후한 인정이 넘치는 곳이어서 가히 ‘문인·재사의 땅’이라고 할 만했다. ‘문인·재사의 땅’ 정주는 근세에 들어 더욱 풍요한 문명의 세례를 받았다. 이웃 청나라의 발전한 문물이 이 땅에 일찍 도래했고, 기독교의 전파로 서양 문물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개화·개명의 속도가 남쪽보다 빨랐던 만큼 선각자도 많이 배출됐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는 애국항일투사를 양산했는데, 백낙청의 종조부(큰할아버지) 백이행은 오산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다. 백씨의 조부 백희행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맏이가 용제, 둘째가 봉제, 셋째가 백병원 창립자 인제, 막내가 백낙청의 부친 붕제였다. 백낙청의 백부 인제는 오산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도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백인제 박사는 이후 도쿄(東京)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경성의전의 외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백병원을 창립했다. 백낙청의 부친 붕제 역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일본 교토(京都)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법·행정 등 일제 강점기 고등고시의 양과에 합격해 당시 신문에 ‘화제의 인물’로 보도되기도 했다. 변호사로 일했던 부친은 군수 발령을 받아 지방을 전전했고 백낙청은 모친 최귀란 여사의 친가인 대구에서 태어났다. 인제·붕제 두 수재 형제는 6·25 때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백인제 박사는 1948년 5·10선거 당시 서울 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동생 붕제는 선거사무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단정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 출마한 형은 정치범으로, 동생은 참고인으로 지목돼 납북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미도파백화점 옆 옛 국립도서관 건물에 억류됐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됐다. 백낙청의 형 백낙환 현 인제학원 이사장은 “사촌형 백낙조(작고·백인제 박사의 아들, 전 인제학원 이사장)와 함께 두 분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고 회고했다.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를 넘을 때 백인제 박사는 51세, 백붕제 변호사는 41세였다. 백낙청의 부친 백붕제는 형 인제와 더불어 백병원 창립의 ‘동업자’나 다름없었다. 형 인제는 변호사였던 동생에게 병원의 행정과 법률관계 자문을 구했고 이사로 참여시키기도 했다. 백병원 창립의 역사는 1932년부터 시작됐다. 경성의전 교수이며 백인제 박사의 은사였던 우에무라 교수는 현재의 서울 백병원 자리에 외과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인이 암으로 사망해 귀국을 결심한 그는 제자 백인제가 병원을 인수하기를 희망했다. 백 박사는 동일은행(지금의 조흥은행)에서 자금을 융자받아 이 병원을 인수했고, 1941년 경성의전 교수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병원 일에 뛰어들었다. 외과의사 백인제의 명성은 대단했고 일본과 만주에서도 환자가 몰려들었다. 1941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백인제는 외과병원의 운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백낙청 일가는 김치열 전 법무장관 집안과 사돈 관계다. 박정희 정권의 법률통으로 중앙정보부 차장, 검찰총장, 내무·법무장관을 역임한 김씨의 장녀 윤희 씨가 백낙청의 동생 백낙서(인제대 석좌교수)와 혼인한 것이다. 백낙청의 ‘가문의 역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일부 시각에는 김치열가와의 사돈 관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숨어 있다. 중앙정보부 차장으로서 최종길 교수의 죽음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고, 내무부 장관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 전 장관이라는 시각이다. 1980년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빼앗겼다 최근 재판을 통해 그 재산의 일부를 되찾은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런 인사와 사돈 관계인 만큼 백낙청의 ‘가문의 한계’는 그의 정치적 처신과도 관련이 있다는 과격한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문의 역사’는 ‘가문의 역사’일 뿐이다. 백낙청은 최종길 교수의 추모제를 비롯한 관련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왔다. 백낙청의 진정한 힘은 이런 데서 나온다. 평생 가문과 출신과 지위가 가져다준 한계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항상 양극단으로부터 협공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사유와 행동의 양식을 보여준 내면의 힘이 그에게는 분명 존재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문의 역사가 개인의 신념에 미치는 영향을 백낙청의 경우처럼 미묘하게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은 문제적 인물이다. “서정주가 정부(政府)였다면 백낙청은 시대(時代)다”라는 시인 고은의 발언은 그래서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한기홍_월간중앙 객원기자 glutton4@naver.com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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