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4권 -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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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현대사 산책>시리즈와 다양한 사회비평으로 널리 알려진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 크게 개화기편과 일제강점기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개화기편을 다룬 5권이 먼저 출간되었다.
'개화기편'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는데,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 현재화하면서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 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다른 저작들이 그랬듯 지은이의 탁월한 자료편집 능력과 그에 대한 견해가 돋보이는 역사 시리즈다.
목차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머리말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
근대사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전문화?세분화에서 종합화?총체화로|역사의 현재화를 위하여|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역사 서술 시각의 문제|도식주의를 넘어서| 식민사관과 안티 식민사관을 넘어서|역사의 명암(明暗)을 보자
제1장 천주교 박해
01 동방의 조상 숭배는 우상숭배다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1789년 프랑스혁명|1791년 진산사건|문체반정 논쟁
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기해박해
주문모?강완숙의 활약|신유박해와 오가작통법|동정녀 신드롬과 도모지 사형|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가 식민지화 원인의 시작|부정부패와 1811년 홍경래의 난|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청도 방문|왕만 바뀌면 재개되는 천주교 박해
03 이양선의 출몰과 여항문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1854년 일본의 개항|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시계와 피아노|한양 중인계급의 여항문화|1860년 북경 함락에 대한 낙관주의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01 삼정문란으로 수탈당하는 백성
전정?군정?환정의 문란|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민란상사(民亂常事)의 시대
02 고종 즉위, 대원군 등장
세도정치가 만든 어린 임금들|비변사 개혁과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의 명암|사치 금지령과 호포법
03 동학 창시자 최제우 처형
1860년 4월 5일 동학 창시|동학의 극단적 정신주의|조선 정부의 동학 탄압|유생들의 조직적 동학배척운동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1 병인양요를 불러온 병인박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대원군의 결백 콤플렉스|여성 순교자가 더 많은 이유|조선에서 22년을 지낸 다블뤼의 변화
02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는 무장 해적선|영국인 선교사 토머스|박규수의 활약|김일성 증조가 셔먼호 격침을 지휘했나?
03 병인박해를 악화시킨 병인양요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50여 일|천주교도 8000여 명을 죽인 학살극|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돌아오지 않는 외규장각 도서
04 보부상의 정치조직화
군사력의 무능을 보완한 보부상|보부상의 정보 수집?전파 기능|지방장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만행|배외감정의 격화|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
1871년 이필제의 봉기|아시아에서 성조기를 최초로 게양한 전투|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박규수의 ‘예의지방’ 비판|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어재연의 수자기(帥字旗)를 돌려다오
제4장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0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
최익현의 탄핵소|최익현?이항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호포법과 사색당쟁의 영향|고종의 생각이 결정적 이유|한국의 권력 탐욕 문화|공조판서 평균 재임기간 52일
02 일본이 조작한 운양호 사건
1873년 일본의 정한론 번성 이유|한일 국교 교착의 책임|운양호 사건의 전말|조작을 밝힌 일본측 보고서
03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병자수호조약
페리함대의 일본판(日本版)|조선 사대부의 통상에 대한 경멸|최익현과 김인승|1876년은 근대의 시발점
04 수신사 파견과 개항 이후의 풍경
최초의 수신사 파견은 실패|일본인들의 사기적 통상|옥양목 열풍과 비누
05 1870년대의 생활문화
천연두와 종두법 실시|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신재효의 판소리|조선인은 착한 미개인?|양반의 백성 착취
제5장 개화파의 등장
01 박규수의 개화파 육성
개화사상의 3비조(鼻祖)|김옥균과 중화사상|박영효와 민영익
02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한국인
고고(孤高)의 사상가 최한기|최한기는 한국 과학의 아버지|최한기를 외면하는 식민지성
03 급진개화파?온건개화파?위정척사파
중인계급의 진취성|유홍기는 누구인가?|개화파의 만국공법 공부|개화파 대(對) 위정척사파|위정척사파의 중화주의?사대주의|위정척사파의 시대착오성|문명개화론 대(對) 동도서기론|2000년대의 위정척사파 논쟁
제6장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01 이동인, 고종을 만나다
이동인의 귀국|조선인을 매료시킨 성냥|국왕의 밀사가 된 이동인
0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일본의 국민적 영웅|<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일본의 문명화=서양화=반(反)유교|후쿠자와의 조선관
03 황준헌의 <조선책략> 파동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영남 유생들의 만인소|위정척사파?개화파의 언론전|이재선 반역 사건|2007년의 조선책략 논쟁
0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
위정척사파 몰래 떠난 시찰단|개화파와 후쿠자와의 만남|흥아회의 아시아주의
제7장 서양에 문을 연 조선
01 1882년 조미수호조약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조미수호조약의 평가|<한국, 그 은둔의 나라>|너무 늦은 건 아닌가?|조미수호조약과 한미 FTA
02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
신라의 통일을 가능케 한 축국?|1882년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2004년에 재현된 갑판축구
03 외국군의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
화적으로 전락한 농민|왜놈을 몽땅 죽여버리자|290년 만의 대사건|대원군의 재집권|대원군, 33일 만에 물러나다|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개화윤음|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분리|민비의 51일간 피신|보부상과 혜상공국|자장면과 임오일기|2006년 용산기지 논쟁
04 태극기의 국기 제정
어떻게 태극기가 선정되었나?|김원모?김영환의 발견|국내 국기 게양은 언제부터인가?
제8장 근대언론의 탄생
01 미국 공사 입국, 미국 보빙사 파견
조선은 단물 빠진 껌|1883년 동문학교 설립|민영익 등 보빙사 미국 파견|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유길준
02 유길준과 사회진화론
유길준과 모스의 만남|모스는 유길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사회진화론이란 무엇인가?|사회진화론과 자유주의
03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창간
원산학사의 설립|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기자?|<한성순보> 이식설 논쟁|<한성순보>와 사회진화론|<한성순보>의 상업제일주의|우정국 설립
04 <한성순보> 이전의 언론
조선의 왕성한 언론 활동|유생의 상소문화|만인소와 풍문탄핵|공론장 논쟁|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제9장 급진파와 온건파의 충돌
01 조영신조약과 조러수호조약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의 오판|조미조약이 아니라 조영신조약이 규범|청을 견제하기 위한 조러수호통상조약
02 미국 보빙사 단장 민영익의 귀국
민영익과 김옥균의 결별|민영익의 변화 이유|미국의 조선 박대
03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무디 부흥|소래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알렌의 입국
04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고종의 소극적 동의|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고종의 분노|혈기가 지혜를 앞선 청춘정권|청국의 개입, 일본의 변심|급진개화파의 전멸|<갑신일록> 위작설 논쟁
05 갑신정변 평가 논쟁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책임 윤리의 문제|급진개화파의 민심 오판|민중계층의 적극적 참여?|평가의 기준이 문제다
06 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생활
김옥균 이용가치의 소멸|후쿠자와의 탈아론|급진개화파 암살 시도|1886년 김옥균의 상소
한국 근대사 산책 2 -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제1장 갑신정변의 유산
01 알렌의 민영익 치료, <한성순보>의 폐간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한성순보>의 폐간|<한성순보>와 청국의 갈등|광인사의 출판활동|사진의 수용과 부작용
02 한성조약과 톈진조약
한성조약과 온건개화파의 득세|김윤식의 시무론|톈진조약의 두 얼굴
03 쌀의 품귀, 담배의 확산
1884년 방곡령 실시|연초제조소?판매소의 집중 설립|담뱃대 사용 금지령|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
제2장 개신교의 활약, 거문도 사건
01 언더우드?아펜젤러의 입국
1885년 4월 5일 부활절|언더우드와 알렌|정동제일교회의 창립|성경 번역과 찬송가 전파
02 제중원 설립과 선교사들의 갈등
백성을 구제하는 제중원|선교사들의 사치 이유|선교사들의 내부 갈등|음주?흡연을 죄악시한 청교도주의
03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청?러시아?영국의 각축전|후쿠자와의 악담|대원군의 귀국|조선 왕을 감독하는 총독이 된 원세개|웨베르와 손탁의 입국|거문도 사건의 역사적 의의|거문도 사건의 세 가지 일화
04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
유길준의 귀국|유길준과 김옥균의 만남|유길준과 부들러의 중립화안|햇빛을 보지 못한 중립화론
제3장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01 전신 개통, <한성주보> 창간
경인 전신업무 개시|<한성주보>의 창간|한국 최초의 신문광고
02 배재학당?이화학당 개교
육영공원의 설립|배재학당의 설립|이화학당의 설립|기독교가 선도한 출판문화|천주교?개신교의 갈등
03 경복궁 건청궁을 밝힌 전기
건청궁을 밝힌 100촉짜리 전구 두 개|물불?묘화?덜덜불?건달불|<전기 100년사>의 재발견
04 주미한국공관 설립
원세개의 방해공작|알렌의 일기에 나타난 박정양 일행의 모습|박정양?이하영?이완용|데니의 <청한론>
제4장 근대화에 대한 공포와 저항
01 외국인이 조선 아동을 잡아먹는다
종두술을 보급한 지석영의 수난|1888년 영아 소동|제중원이 영아 살해의 총본산?
02 박문국 폐지, <한성주보> 폐간
재정난으로 인한 <한성주보> 폐간|1994년 <한성주보> 제16호 발견|서양 미술의 전파
03 1880년대 후반의 민생고
양반계급의 부정부패|일그러진 입신양명 문화|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약탈|민족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로
04 원세개의 횡포, 알렌의 도전
조선 상인의 철시동맹파업과 시위투쟁|원세개의 라이벌은 알렌|왜 원세개만 가마를 타고 입궐하는가?
제5장 동학농민전쟁
01 동학교도의 보은?원평 집회
농민항쟁의 폭발, 동학의 확산|동학의 교조신원운동|동학의 보은?금구?밀양 집회|보은 집회에 대한 평가|북접?남접의 갈등
02 동학농민군의 정읍 고부 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고부 봉기를 키운 이용태|왜 하필 호남인가?
03 김옥균 암살 사건
김옥균 암살 시도|김옥균, 중국 상하이로 가다|홍종우의 총탄 세 발에 쓰러진 김옥균|김옥균의 무덤은 세 개|김옥균 부인 유씨의 한(恨)
04 김옥균?홍종우 평가 논쟁
일본은 김옥균 암살계획을 몰랐는가?|홍종우, 출세를 위한 변신이었나?|조재곤의 홍종우를 위한 변호|일본의 김옥균 이용|북한의 김옥균 평가|신복룡의 평가|하영선?허동현의 평가
05 동학농민군의 고창 무장 기포
고창 무장 기포|부안 백산 대회|황토현 전투|5?16은 이념 면에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김대중의 참여 때문에 빚어진 사건
06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논쟁
고부 기포설 대 무장 기포설|무장 기포에 대한 정읍의 반발|정읍?고창 관계자들의 논쟁|무장 기포 기념일 행사|백산 봉기 기념일 행사|정읍시의회의 성명서 채택
07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
농민군의 함평 점령, 대원군 감국 통보|청군?일본군의 출병|전봉준?김학진의 상충되는 고민|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농민군의 집강소 통치|손화중의 무리가 최강|남조선 개벽을 꿈꾼 김개남|동학농민군 전주 입성 113주년 기념행사
제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0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일본 낭인들의 입국|천우협과 전봉준의 만남|조선 병사의 피로 물든 경복궁|대원군의 재등장
02 조선의 재앙이 된 청일전쟁
풍도 앞바다에 수장된 청 병사 1000명|러일전쟁을 위한 전초전?|조선 민중의 공포와 고통|일본의 평양 전투 승리|청일전쟁의 기본 구도는 아직 살아 있다
03 자율과 타율 사이에 선 갑오개혁
갑오개혁 자율론과 타율론|사회신분제 폐지|400년 묵은 과부 재가 논쟁|유길준과 김홍집|일제의 꼭두각시를 거부한 대원군|박영효?서광범의 귀국|이노우에 가오루의 등장, 대원군의 퇴진|과거제도 폐지의 충격|이승만의 인생이 뒤바뀌다|너무 늦은 신교육으로의 전환
04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
전라감사 김학진의 제안|전봉준?김학진의 의기투합|삼례 재봉기|왜 7월에 봉기하지 않았나?|일본군의 다롄?뤼순 점령
05 공주 우금치 전투의 비극
남?북접간의 노선 차이|7일간의 우금치 혈투|동학군의 계급적 고립|전봉준의 체포?압송|김개남의 체포?효시|학살당한 농민군은 최소 20만 명|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06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수립
박영효 내무대신, 서광범 법무대신|민비와 박영효의 일시적 화해|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의 한계
제7장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01 홍범 14조 제정 반포
홍범 14조의 내용|매우 불길한 행사?|고종의 눈물겨운 노심초사|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
02 망명 유학 10년 만에 귀국한 윤치호
조선 기독교 대표자의 탄생|윤치호의 유교 비판|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03 일본 <한성신보>의 창간
조선 신문이 없는 7년 8개월간의 공백|<한성신보>의 침투전략|최초의 신소설도 <한성신보>에?
04 전봉준?손화중 처형
민중의 영웅으로 각인된 전봉준|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이준용 모반 사건|3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콜레라
05 동학농민혁명 논쟁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유영익의 주장|박노자?하원호의 논쟁|허동현의 주장|배항섭의 주장|김용옥의 주장|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전봉준은 동학교도였나?
제8장 3국 간섭?을미사변?단발령
01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 간섭
시모노세키조약|일본의 랴오둥반도 반환|정동파의 대두|박영효의 재망명|여우사냥을 위해 입국한 미우라 고로
02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일본 낭인들의 천인공노할 범죄|대원군의 처신|제3차 김홍집내각과 을미의병|유길준의 역할|민비 시신 능욕설|뮤지컬 <명성황후> 논쟁|명성황후 우상화?|시해범 후손들의 사죄 방문|명성황후 사진 논쟁
03 실패로 끝난 춘생문 사건
민비 시해 6일 만에 떨어진 황후 간택령|공포로 잠을 못 이룬 고종|미국공사관으로의 피신 기도|춘생문 사건은 일본의 음모?
04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의 귀국
11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서광범의 활동|유길준의 지원|일본의 방해 공작|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
05 태양력 도입?변복령?단발령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1990년대까지 지속된 과세 논쟁|변복령에 대한 저항|강압적인 단발령 시행|최익현과 보형(保形)의병|피차 양보할 수 없는 상징 투쟁|이승만과 김구|단발령 특수|조선은 모자의 나라
06 운산금광 채굴권 양여
외국어학교의 설립|알렌이 따낸 운산금광 채굴권|노다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고종의 미국 짝사랑이 잉태한 결과
07 전신과 우편의 발달
1891년 북로전선 개설|민중의 전신 시설 파괴|1895년 우편업무 재개
한국 근대사 산책 3 -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제1장 갈 곳을 모르고 헤매는 조선의 운명
01 고종의 아관파천
아관파천의 배경과 내막|‘김홍집?유길준 등을 잡아 죽이라’|단발령 철회|을미의병의 보수성|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아관파천은 엄상궁의 작품’|아관파천에 대한 평가
02 <서유견문>의 기구한 운명
<서유견문>의 금서화|개화의 등급과 종류|오늘날의 <서유견문> 평가
03 차라리 가난이 다행이었던 민중의 삶
양반계급은 ‘면허 받은 흡혈귀’|김구의 관찰|조선인의 식탐과 폭식|조선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
04 김구의 치하포 사건
김구는 왜 일본인을 살해했는가?|사형 위기에 처한 김구|전화가 김구의 목숨을 살리다
제2장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등장
01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의 창간
<독립신문> 창간 배경|정동파의 역할|정부의 적극적 지원|<독립신문>의 한글혁명|<독립신문>의 역사적 의미|<독립신문>이 내세운 ‘개화’의 의미|<독립신문>의 독자|<독립신문>의 광고|<독립신문>의 사업|‘최초의 민간지’ 논쟁
02 <독립신문>의 편집정책과 방향
사실과 뉴스를 앞세운 신문|<독립신문>의 계몽주의|<독립신문>의 ‘옥시덴탈리즘’|<독립신문>의 기독교 예찬|<독립신문>의 제국주의?의병관
03 독립협회 창립, 애국가의 등장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독립협회 논쟁|‘한국 최초의 근대잡지’ 논쟁|애국가?창가의 등장|운동회 붐
04 배재학당의 성장과 이승만
배재학당의 정부 위탁교육|이승만의 배재학당 입학|이승만의 배재학당 생활|협성회 발족|협성회의 토론회 활동|1897년 숭실학교 개교
제3장 대한제국 시대의 개막
01 고종의 경운궁 환궁
러시아 군사교관단 파견|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1년 만에 끝난 러시아 공사관 생활|정부의 <독립신문> 탄압
02 대한제국과 황제의 탄생
‘국왕 전하’→‘대군주 폐하’→‘황제 폐하’|칭제건원 찬반논쟁|칭제건원 평가|대한제국 밖의 냉소적 시선|대한제국?광무개혁 평가 논쟁|환구단의 흔적을 찾아서
03 개신교 성장의 정치학
개신교의 충군애국|교회의 치외법권적 보호 기능|<죠션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창간|크리스마스 문화의 확산
04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하다
1896년 10월 2일 최초의 전화 개통|전화를 거는 예절|‘대청전화’의 위력
05 개발권 양여, 매관매직
미국의 무관심|일본의 독식화|이권문제에 대한 <독립신문>의 변화|고종의 매관매직과 미신 사랑
제4장 민권의식의 성장
01 배재학당 <협성회회보>의 창간
협성회의 성황|이승만의 주도|최초의 배달제
02 대원군 사망, 명동성당 완공
“주상이 보고 싶다”|명동성당 완공|대원군에 대한 평가|대원군 평가와 민비 평가
03 제1차 만민공동회
1만 명이 모인 ‘만민공동회’|만민공동회의 러시아 규탄|독립협회의 자기역량 과대평가|만민공동회의 배후는 일본?|러시아의 입장|니시-로젠 협정
04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창간 주체 이승만의 긍지|<독립신문>과의 경쟁 선언|<매일신문>의 혈기 왕성
05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
서재필의 출국에 반대한 만민공동회|“흐르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다”|서재필 평가 논쟁|<독립신문>의 소유권 논쟁|서재필의 제국주의?의병관 논쟁|서재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5장 만민공동회의 도전
01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
독립협회의 상원설립운동|황국협회의 하원설립운동|안경수의 정변(政變) 미수사건|독립협회의 이토 히로부미 환영
02 <제국신문> <황성신문> 창간
1898년의 언론사적 중요성|<제국신문>의 창간 배경|<제국신문>과 외국인 용병사건|<황성신문>의 창간 배경|<황성신문>의 필진|<황성신문> 사장 남궁억의 수난
03 고종 독살음모 사건과 커피
고종의 커피 사랑|고종 독살음모 사건|손탁호텔과 커피|‘사교계의 여왕’ 배정자|커피는 서양 문물?분위기의 상징
04 제2차 만민공동회
‘평화적 혁명이 이루어졌다’|관민공동회 개최 결의|장지연과 최익현의 충돌
05 제3차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와 ‘헌의 6조’|백정 박성춘의 연설|무어의 백정 인권 운동|중추원 의관 선거 공고
제6장 만민공동회의 좌절
01 익명서 조작사건
독립협회 간부 20명 체포령|11세 소학생 장용남의 ‘피를 토하는 연설’|보부상의 만민공동회 습격|2배로 늘어난 만민공동회 인원
02 김덕구 장례식 사건
황국협회의 의병 선언|의관 50명의 중추원 성립|의사 김덕구의 탄생
03 박영효의 배후 조정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박영효 일파에 포섭된 이승만|이승만의 과격성|만민공동회 폭력화의 배후
04 만민공동회?독립협회 불법화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신문지 조례’의 제정|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의의|‘만민공동회는 일본이 사주해 일으킨 소요’?
05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과 이승만 체포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이승만은 최초의 권총 탈옥수|박영효의 집념
06 윤치호?이완용의 변절
윤치호의 덕원부윤직 임명 수락|윤치호의 유교 비판과 친일 논리|이완용의 독립협회 활동|이완용에 대한 긍정 평가|문명개화론의 함정
07 최시형 처형, 영학당 사건
1898년 최시형 처형|영학당의 봉기|강일순의 증산교
제7장 전차?철도와 조혼?축첩
01 전차 개통과 ‘전차 소각 사건’
한성전기회사 설립|1899년 5월 17일 전차 개통식|전차에 대한 호기심과 반감|기독교인 도륙비지 사건
02 대한국 국제 반포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대한국 국제 평가 논쟁|정부보다는 개신교가 더 나은 보호막
03 경인철도 개통 자전거 인력거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불을 뿜어내는 수레’|윤치호의 축지법?|인력거의 보급
04 <독립신문> <매일신문> 폐간
<시사총보>의 창간|<매일신문> 폐간, <상무총보> 창간|<독립신문> 폐간과 고종의 언론관|북한의 <독립신문> 평가|<독립신문> <황성신문>의 인종주의?아시아주의
05 조혼?축첩 청산운동
여성단체 찬양회 조직|<독립신문>의 조혼풍습 비판|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조혼|<독립신문>의 축첩제 비판|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축첩제
06 1890년대 말의 식산흥업?양전사업
조선은행?한성은행의 설립|대한천일은행 설립|광무 양전(量田)?지계(地契)사업
제8장 외세 지배의 심화
01 활빈당의 출현
중국 의화단의 난|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활빈당 평가 논쟁|일본 우익단체 흑룡회 창립
02 외국 쌀 먹으면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
1901년 안남미 수입 파동|내장원 쌀장사 논쟁|국가재정?황실재정 논쟁
03 <제국신문>과 이승만의 옥중생활
감옥에서 <제국신문> 논설 집필|이승만의 기독교 선교|이승만의 감옥 내 집필활동
04 이재수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천주교의 오만과 횡포|천주교인들의 폭력 대응|천주교도 700명 사망, 이재수 교수형|박광수의 영화 <이재수의 난>|천주교의 민간풍습에 대한 적대적 태도
05 개신교?천주교의 충돌
개신교 선교사는 ‘백만장자’|천주교인의 개신교인 구타 사건|‘국가보다 기독교를 더 신뢰한다’|정길당 사건
제9장 하와이 이민
01 최초의 노동이민단 출발
솔나무 밑에서 죽어간 사람들|102명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 출발|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2002년에 발견된 ‘이민자 모집 광고지’
02 영업용 전기, 공중용 전화의 등장
1900년 영업용 전기의 판촉|한국 전차?전기사업의 좌절|1902년 최초의 공중통신용 전화업무 개시|공사관 건물의 위엄 효과
03 최초의 화장장 완공
화장은 ‘왜놈들의 장법’|한국의 독특한 장례문화|의학에서의 해부 금지|아펜젤러 사망
한국 근대사 산책 4 -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제1장 러일전쟁 전야
01 용암포 개항사건
4년 동안 20번 바뀐 외부대신|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러일전쟁 개전설과 삼국제휴론|양무호 사기 사건
02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
즉위 40주년, 50회 탄신일 잔치|월미도 매각사건|웨베르의 한국 방문 소감
03 간도 민족주의의 등장
장지연의 <대한강역고> 출간|1712년 백두산정계비 논란|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간도관리사 이범윤의 활약
04 원산 부흥운동과 YMCA의 탄생
회개와 눈물의 원산부흥운동|‘청년’을 발견한 황성기독청년회의 탄생|YMCA의 교육?계몽 활동|단일교회의 좌절|장로?감리교의 선교방법 차이
제2장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01 한반도 쟁탈을 위한 러일전쟁
영일동맹과 노불선언|일본의 38도선 분할론 제시|일본의 전쟁 전략|제물포 해전|충격에 휩싸인 조선 조정|러시아의 ‘영웅 만들기’|‘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쟁탈 전쟁’
02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든 한일의정서
한국의 러일전쟁 병참기지화|도탄에 빠진 민생|아시아주의의 망령
03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과 한일협정서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보안회의 반대투쟁|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와 고문정치|친일단체 일진회의 발족|보부상들의 공진회 활동
04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영국 기자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운 신문|박은식?신채호의 참여|일본인 신문들의 창간|<황성신문> <제국신문>의 경영난
제3장 갑진개화운동과 위생청결법
01 동학교단의 신문화운동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의 활동|진보회의 단발흑의(斷髮黑衣), 바리캉의 등장|갑진개화운동의 평가
02 화장실 파동과 화투 열풍
서울 거리는 대소변 투성이|김옥균의 <치도약론> <독립신문>의 계몽|한국인의 똥으로 돈 버는 일본인|일본에서 수입된 화투|개화기는 화투의 개화기
03 이승만의 출옥과 출국
감옥생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상동교회 엡워스 청년회|민영환?한규설의 밀사로 도미(渡美)
04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한국인의 서양인 구경|강한 호기심은 한국인의 장점|“코레아의 태양은 서울에만 뜬다”
제4장 일본과 미국의 결탁
01 강압과 착취로 이루어진 경부철도 개통
한국인이 겪은 고통과 굴욕|철도가 만든 개화미신|1906년 경의선 개통|7살 소년을 총살시킨 야만성?잔인성|일진회의 참여|철도가 결정한 도시의 흥망성쇠|철도는 진정 ‘진보의 상징’이었나?
02 일제의 여순 점령
일본의 첩보전에 밀린 러시아|여순 전투의 정치학|부정적인 한국 이미지의 유포|일제의 외교권?독도?통신권 강탈
03 노예로 팔려간 멕시코 이민
이민자 1000명 중 400명 사망|1901~1905년 7226명 미국 이민|해외 교포신문 발간
04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일본이 압승을 거둔 쓰시마 해전|미국이 조달해준 일본의 전쟁자금|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국을 먹다|20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논쟁
05 이승만의 루스벨트 면담
윤병구?이승만, 루스벨트를 만나다|루스벨트의 일본 사랑|‘이승만은 애국열성의 청년지사’
06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조약
루스벨트가 주도한 포츠머스조약|일본 국민의 폭동|일제강점이 5년 더 걸린 이유|러일 전쟁 발발 100돌을 맞은 일본|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5장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
01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앨리스 루스벨트의 한국 방문|“정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처하라”|‘을사5적’의 찬성으로 통과된 을사늑약|‘을사5적’인가, ‘을사7적’인가?|민중의 분노|‘침몰하는 배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쥐떼’
02 을사늑약 유?무효 논쟁
헐버트?민영찬의 활동|‘을사늑약은 무효다’|고종의 처신|‘낭만주의적 역사인식의 위험’
03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오늘이야말로 목 놓아 크게 울 날이로다’|‘거의 집집마다 보관하고 외웠다’|‘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곧 잊혀진 ‘시일야방성대곡’
04 민영환의 자결이 촉발시킨 연쇄 자결
민영환의 할복자살|민영환의 유서|서울은 ‘흥분의 도가니’|연쇄 자결
05 알렌은 어찌 되었는가?
알렌과 루스벨트의 논쟁|“미국은 우리에게 맏형처럼 느껴진다”|알렌의 모순
제6장 1900년대 중반의 생활문화
01 천도교로 개명한 동학
손병희의 귀국|천도교로의 개명의 정치학|이용구 등 일진회 간부 출교 처분|이용구의 시천교 선포
02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야구 경기
축구대회의 확산|‘YMCA 야구단’|최초의 부인용품 상점
03 흰옷금지령과 공창제
천년 묵은 백의 논쟁|검은색은 ‘문명의 색’|일본 매춘문화의 확산|통감부의 적극적인 공창화 정책
04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등장
애국가 작사자 논쟁|1998년 국가상징연구회 세미나|최병헌 유족과 윤치호 유족의 대결|‘한국민족 구성원의 공동 작품
제7장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론
01 일제 통감부 설치
‘상왕(上王)으로 군림한 이토’|고종 밀서 사건|밀서 진위 논쟁
02 애국계몽운동의 시작
이제 남은 희망은 교육|사립학교 설립 열기|학회의 조직과 활동|애국계몽운동 개념 논쟁|선교사와 한국인 신도의 갈등
03 최익현의 의병 봉기
최익현 부대의 실상|최익현의 순국|최익현 평가 논쟁
04 민영환의 ‘혈죽(血竹) 신드롬’
“누가 민영환이 죽었다고 말하는가?”|‘대한제국이 처음으로 낳은 국가 영웅’|민영환 서거 100주년
05 <국민신보> <만세보> 창간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창간|1906년 <만세보> 창간|<만세보>와 일진회의 관계
06 이인직의 <혈의 누>의 정치학
왜 신소설인가?|임헌영의 <혈의 누> <은세계> 비판|이인직의 친일행적|‘애국계몽주의의 통속화’
07 <경성일보> <경향신문> <대한신문> 창간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 창간|천주교의 <경향신문> 창간|<경향신문>을 계승한 <경향잡지>|이완용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창간
제8장 국채보상운동과 고종 퇴위
01 개신교의 평양대부흥운동
“미워하던 일본인까지 사랑하게 되었다”|3배로 증가한 개신교 신자 수|부산?경남지역은 예외|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2007 한국교회대부흥 기념대회’|‘목사안수 100주년 기념 참회기도회’
02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치학
안창호의 한탄|주진오?이만열의 평가|김정기?이혜석의 평가|김진호?백찬홍?최형묵의 평가
03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일제의 화폐정리사업|“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거절해도 밀려드는 의연금|일제의 방해공작
04 세브란스병원?대한의원 설립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알렌 신화’ 논쟁|대한의원의 설립|‘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 122주년 기념사업’ 논쟁|“설립정신의 계승이 중요하다”|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05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
이완용 ‘3품 내각’의 등장|이상설?이준?이위종 파견|일본과 러시아의 방해공작|<만국평화회의보>의 이위종 인터뷰|이위종의 국제기자클럽 연설|이준의 사망|‘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이준 열사 순국 100주기 기념행사|헐버트 박사 58주기 추모식
06 고종 퇴위, 순종 즉위
이토?송병준의 퇴위 협박|내시가 대신한 황위 양위식|박영효 체포?유형|순종 즉위, 단발 논란|고종의 러시아 망명설
제9장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
01 정미7조약?군대 해산
“매국노를 수입하려거든 대한으로 건너오시오”|광무신문지법 공포|한국군의 마지막 전투와 해산|‘총포 화약류 단속법’과 호랑이 출몰|의병 총대장 이인영의 ‘어처구니없는 일’|신용하의 새로운 해석|의병의 통신시설 파괴|일진회와 자위단의 행패
02 일본 망명 12년 만에 귀국한 유길준
유길준 쿠데타 음모의 전말|흥사단?한성부민회 창설|왜 유길준은 이토를 지지했나?|유길준의 재발견|2003년 유길준 관련 행사
03 일제 소비문화의 침투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서울출장소 개설|박람회는 ‘국가적 제전의 가장 중요한 형식’|도쿄권업박람회의 한국인 전시|초상사진 열기
04 자동차의 등장, 열악한 도로 사정
1903년 최초의 자동차 등장|최악의 도로 사정|1908년 최초의 신작로 개통|1905년 교통경찰의 등장|상수도 등장
05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민족주의
광무신문지법의 효과|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대한매일신보>의 의병관과 기독교구국론|장도빈?양기탁의 반일 민족주의 논설|학생들의 ‘단지(斷指) 피바람’
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제1장 다시 타오른 애국계몽운동의 불길
01 교육만이 살 길이다
학회의 국민 계몽활동 | 안창호의 신민회 활동 |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 | 기독교 사립학교 붐 | 관?공립학교는 비난의 대상 |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 | 일본 유학생의 활동 |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
02 스티븐스 저격사건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 의병투쟁에 미친 영향 | 이승만의 학업
03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활약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죠신문> 창간 | 이범진의 후원과 안중근의 기고 |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국내 유입 | <신한민보>의 ‘국민혁명론’
제2장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유산
01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이완용?송병준?이용구의 친일 계보 | 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 | 국채보상운동의 내부 문제 | 베델의 사망 | <대한매일신보>의 몰락 |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신문? | 윤치호의 국채보상운동?베델 비판 | 국채보상금 처리 문제
02 국채보상운동의 유산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운동의 효시’ | 1998년 되살아난 국채보상운동 | 243만 명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 |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
03 최초의 근대 잡지 <소년>의 창간
육당 최남선의 활동 | 최초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 | 톨슨토이 열풍
제3장 한말 의병운동의 종언
01 순종의 경상?평안?황해도 답사
일제의 보호권 과시 이벤트 | 철저히 연출된 시각적 스펙터클 | 일제의 법죄즉결령 | 대한제국 당시 최대의 부패 관리
02.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의 역사적 기원 | 재(在)만주 조선인 20만 명 | 일제강점 후 새로운 갈등 | 신채호?대종교?이범윤의 활동 | 동북공정과 ‘간도 되찾기 캠페인’
03. 호남의병의 와해
1907~1911년 의병 14만 명 | 헌병대?헌병보조원의 악명 |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 의병운동인가, 의병전쟁인가? | 오영섭의 민중주의사관 비판 | 의병정신은 ‘충군애국론에 기반한 의리심’? | 김상기?구완회의 반론
04 <대한민보> <경남일보>의 창간
대한협회의 <대한민보> 창간 |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 | 최초의 지방지 <경남일보> 창간 | 장지연의 활동 | <한성신보> <대동일보> <대한일일신문>
제4장 사회진화론?영웅숭배주의?문약망국론
01 사회진화론의 융성
양계초의 <신민설> 수입 | 양계초의 주장 | 조선 지식인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 | <월남망국사> 논쟁 | 박노자?허동현 논쟁 | 사회진화론 개념의 혼동
02 영웅숭배주의의 유행
신채호의 영웅숭배주의 | 영웅 전기의 유행 |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03 문약망국론과 운동회 붐
문약망국론과 상무정신 | 상무정신과 학교 운동회 | 군사훈련식 운동회와 석전
제5장 애국과 매국의 몸부림
01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 추모 열기 | 안태훈과 안중근 | 안중근과 조마리아 | 안중근 연구의 현황 | 의거 100주년 기념 준비 | 안중근은 ‘충직한 근왕주의자’? | 안중근과 아시아주의
02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매국’ 경쟁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 성명 | 이완용과 송병준의 차이 | 일진회 비난?지지 성명전 | 일진회?서북학회?대한협회 ‘3파 제휴’ 결렬 | 일진회는 오명의 대명사
03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
이완용의 파란만장한 ‘변역’ | 이완용 중상, 이재명 사형 | 김구의 후회 | 박원문의 죽음에 대하여 | 이완용에 대한 민심의 분노
제6장 망국 직전의 생활문화
01 영화의 폭발적 인기
영화는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가? |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 |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영화 | 오락 이외에 무엇으로 삶을 위로하랴
02 연극의 인기와 풍기 논란
광무대?단성사의 개관 | 원각사와 이인직 | 신문의 전통연극 비판 |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 | 유성기의 판매와 보급 | 일제의 통제와 탄압
03 개신교의 백만인 구령운동
1884~1910년 개신교 선교사 499명 | 선교 지역의 교파별 점거 |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 일제의 탄압엔 정교분리주의 | 20만 신자를 100만 신자로 | 백만인 구령운동의 정치학 | 한국은 세계 2위의 선교대국 | 한국인의 ‘중층다원성’ |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
04 철도?시계가 불러온 시간개념의 변화
1898년에서야 만들어진 관료들의 시간표 | 신문들의 시간엄수 계몽 |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시계의 상징적 가치 | 도량형의 표준화
제7장 518년 만에 멸망한 조선
01 일제의 강점
안창호의 〈거국가〉 | 강제병합안 8개항 | 경술 7적과 연쇄 자결 | 왜 8월 29일은 조용했나? | 이광수의 고백 | 모든 국민이 일심동체였을까? | 일제강점 호칭 논쟁 | 일제하 68명의 조선 귀족 탄생 | 일제에 기용된 조선인 관료
02 토사구팽 당한 이용구와 일진회
헌신짝처럼 버려진 이용구와 일진회 | 이용구의 후회 | 이용구와 송병준?이완용의 다른 길 | 흑룡회가 일진회를 속였나?
03 신문과 민족주의의 탄생
한글 글자 공동체의 형성 | 민족의식의 계보 | 민족과 조국 | 민족과 국민 | 신용하?박지향?이진경의 주장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광고 분석 | 소통의 빈곤
04 고종?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 | 수십여 명의 학자가 참가한 ‘기념비적 논쟁’ | 허동현의 종합 관전편 | ‘편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론의 함정은 없는가? | 내부적 검증?추궁은 충분했는가? |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을 넘어서
맺는말: ‘조선왕조 500년 신화’를 넘어서
‘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운동 | 한국은 일류의 자질과 능력이 있다 | 임진왜란의 진실 |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진실 | 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 병자호란의 치욕 |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 임진왜란?병자호라과 체제 안정성 | 당쟁?사화가 조선왕조 존속에 기여했다? | 유교?양반 망국론 | 혈통주의의 폐쇄성 | 유교적 가족주의가 500년의 비결인가? | 공식적 가족?자궁 가족의 2중 구조 |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역설 | 입신양명 이데올로기 | 기회주의와 줄서기 | ‘당쟁 망국론’에 대한 반박 | 일제 치하?군사독재의 상흔과 싸우기 | 양반 면책으로 빠진 식민사관 비판 | 한국의 무기력과 침묵 |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 한국 정치의 5대 환경 | 당파싸움의 두 얼굴 | 지금도 건재한 양반문화 | 가문 단위의 부정부패 | 2006년 종친회 가입률 22퍼센트 | 한국인의 보호막 투쟁 | ‘보호막 공영화’를 위하여 | ‘면허받은 흡혈귀’를 넘어서 | 성리학의 가족 중심주의를 넘어서
접기
책속에서
당시 개화의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박규수는 김옥균에게 조부 박지원이 중국을 유람할 때 구입해온 지구의를 꺼내 보였다. 박규수는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오늘날 중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리로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로 돌리면 조선이 중국... 더보기
P. 81 그(김옥균)는 우선 조선의 불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차마 들을... 더보기
P. 165 을사늑약의 부당성은 조약 체결 즉시 제기됐다. ‘을사늑약이 완전히 무효’라는 첫 번째 주장은 1906년 프랑스 파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며 국제법학자인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의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이었다. 레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한국 정부 측의 동의 표시의 결함, 다른 ... 더보기
P. 283 1907년 1월 29일, 대구지역의 갑부 서상돈(1851~1913)이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에서 ˝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즉석에서 800원을 내놨다. 이에 인쇄소인 광문사 김광제 사장도 석달치 담백값 60전과 의연금 10원(당시 80kg들이 쌀 한 가마 6원)을 선뜻 내놨으며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회원들도 동참... 더보기
P. 303 이와 관련해 노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워 러일 비밀협상이 진행 중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의 변함없는 우정만 믿고 3인의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결국 밀사들은 황제접견은커녕 외무장관도 만나보지 못했다. ……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더보기
P. 368 이승원은 ˝’피’를 통해야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였다. 피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느냐 마느냐가 중요했고, 그 흘린 피를 머금고 세상은 격변하기 시작한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피바람의 회오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선생들이 학생들 앞에서 솔선하여 단지를 하고, 그...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강준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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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인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더보기
최근작 : <팬덤이 약탈한 정당>,<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권력과 복종> … 총 601종 (모두보기)
강준만(지은이)의 말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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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넘쳐나는 미디어, 꿰뚫어 보는 통찰력>,<팬덤이 약탈한 정당>,<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등 총 427종
대표분야 : 한국사회비평/칼럼 5위 (브랜드 지수 137,070점), 역사 14위 (브랜드 지수 236,63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자위’와 ‘자학’을 넘어선 강준만의 역사 읽기
:: 한국 근대사의 생생한 몽타주!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다. 아울러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 현재화하면서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근대 한국의 풍경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편견 없이 보여줌으로써 ‘교과서’가 지니는 경직성에서 벗어나 한국 근대사를 생동감 넘치게 몽타주할 수 있게 한다.
:: 생각하는 역사(읽을거리1 참조)
한국언론사?한국문학사?한국철학사 등 각 분야의 역사는 그 분야에 관계된 역사에 대해서만, 즉 언론?문학?철학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각 분야와 관계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줄기와, 각 분야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간 나온 책들은 너무 간결하게 압축돼 있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룬 전문서들 뿐이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전문화?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여 어떤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 <한국 근대사 산책>의 특징(읽을거리1 참조)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마인드 세트>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면서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첫 번째 특징 역시 바로 이러한 ‘종합’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의 현재화’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개화기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이전은 너무 멀고 개화기 이후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절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전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는 점이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주로 개화기 사건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논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 쓰는 새로운 기술방식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책과 논문은 물론 신문기사?칼럼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언론?문화?커뮤니케이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E. H.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그 상호작용?대화의 성격과 질이 문제의 핵심이고 ‘대화’보다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때에 인간이 역사에 끌려 다니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과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구조와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
네 번째 특징은 이른바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메타 역사’란 ‘역사에 관한 역사’다. 개화기 시절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수많은 주장과 이견들이 난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명쾌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교과서’는 늘 위험하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종합’에 의미를 둔 이 책은 다양한 주장들을 다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역사는 단순명쾌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하다. 과거의 복잡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복잡성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현재라는 변수가 더해져 현재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복잡성은 한 차원 높은 재미를 재공한다. 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감상하다 보면 “아, 똑같은 사안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해와 체험은 “역사는 외우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역사 서술의 다양한 시각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면서 도식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보수?진보 시각이 충돌을 빚으면 둘 다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했으며 개화기 역사에서 잘 나타나곤 하는 민족사적인 서술 시각도 공정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을 거닐며 독자가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 특정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우리의 저력이 무섭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하는 게 옳은 일이다.
::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
개화기 역사는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는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가 본격 출몰한 건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였다. 개화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30~40년간을 개화기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개화기가 시작되었다는 건 그들을 무조건 막아내 싸우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으며 그 만큼 대처 방안을 놓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혼란과 갈등은 크게 보아 ‘개화론’과 ‘수구론’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지식인?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 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는 ‘제3의 길’
‘명암(明暗)이론’은 편견과 도식?집착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명암의 양면을 다 보고 끌어안고 축복이 저주가 되고 저주가 축복이 되는 역사의 문법 위에 바로 서자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안정된 체제 유지가 축복이라면 그로 인해 축적된 내부모순이 저주다. 체제의 안정성은 국가 중심이 아니라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개인의 능력보다 소속 가문이 더 중요했다. “양반사회의 출현으로 한때 국가체제의 건전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보편적 유교문화와 전통문화의 꽃을 함께 피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반대로 양반사회의 존재 그 자체가 국가권력을 쇠퇴시키고 개인의 창의력을 말살하며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역사를 보는 게 바로 제3의 길이다.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의외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관찰법이다. 이 책은 개화기 역사에 대한 ‘자위(自慰)’와 ‘자학(自虐)’을 모두 넘어서고자 한다. 물론 그 누구도 개화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위’나 ‘자학’은 하지 않는다. 어떤 시각이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보는 것마저 넘어서자는 뜻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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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겠다는 일본과 러시아.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을사오적’의 맹렬한 활동으로 치욕의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쎄인트 2026-02-08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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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 앞에 무너지는 조선
shuita 2022-02-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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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 어느 쪽이 이겨도 희망이 없던 대한 제국의 서글픈 운명.
解明 2021-10-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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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필요해서 샀는데 더 흥미로운 역사의 내용을 기대한다.
사물 2014-05-1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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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흑역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어느덧 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야 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4권이고, 여섯 권 남았단다. 4권의 부제는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러일전쟁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일어났고, 우리나라 군대 해산이 1907년이니까 2~3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겠구나 하고 책을 폈는데 러일전쟁 이전인 1902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이 시기에는 너희들도 알고 있는 을사늑약 등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단다.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가슴 아픈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읽다 보면 답답함과 억울함과 분노가 심장을 때리더구나. 그럼, 4권에서 다룬 이야기를 짧게 전달해 볼게.
…
1.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를 만들려고 하는 외국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단다. 나라의 재정은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이었지. 그럼에도 1902년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자 태어난 지 50년은 기념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조정은 아주 성대하게 기념 잔치를 했단다. 이런 형식적인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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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외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오늘내일 하는 지경인데, 엄청난 예산을 들여 잔치를 벌이고 외국 사신을 초청하고, 그 때문에 새로 영빈관을 짓고, 광화문 네거리에 비각을 세웠다. 광화문 비각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다. 신민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원구(圓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제위에 오른 뒤 천하를 소유할 칭호를 대한이라고 하고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이 얼마나 좋은 글귀인가. 대한이 천하를 소유하고 무(武)에 빛났다 하여 연호를 광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글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1897년에 조선왕조가 허울 좋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겉으로는 면모를 일신한 것처럼 보였으나 6년 만에 1902년(광무 6년) 마침내 외채 위기를 맞게 되고 2년 뒤 러일전쟁 발발,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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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인들이 간도로 많이 이전하게 되는데, 황무지 같은 곳을 개간하여 거주하게 되었단다. 국경이 불분명한지라 청과 간도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해서 1902년 이범윤이 간도관찰사로 파견되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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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 사정도 좋지 않게 흘러갔어.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은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인정해 주고, 일본은 중국에서의 영국의 우위를 인정해 주었단다. 영일 동맹의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이 충격을 받고, 대한제국을 어느 나라에도 얽매이지 않게 하려는 중립화 노력을 했대. 하지만 중립국 선언을 하기에는 당시 대한제국은 힘이 너무 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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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일본이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어. 당시 러시아의 국방력이 일본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일본의 무모한 짓을 벌인 것으로 보였지만, 러시아 함대가 이곳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어.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뤼순을 점령하는 등 러시아 자신들이 밀리는 형세로 인해 충격을 받았어.
사실 미국이 뒤에서 몰래 일본을 도와주고 있었단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어. 1905년 1월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피의 일요일이라는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러시아 군의 사기가 떨어졌단다.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 함대가 우리나라 근해까지 왔지만, 군비로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지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일본을 이길 수 없었단다. 이 이야기는 몇 달 전에 <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을 읽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기억 나지?
하지만 일본도 피해가 컸다고 하더구나. 25만여 명이 죽었다고 하니… 이 때 질병으로도 고생을 했는데, 새로 개발한 배탈설사약이 잘 들어서 러시아를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러시아를 정복시킨 약이라는 뜻의 정로환(征露丸)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되는데,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가쓰라와 태프트가 만나 밀약을 맺었는데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기로 한 밀약이란다.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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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2007년 8월 한승동은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들먹이는 가쓰라, 태프트들이 주도권을 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망언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그는 한국 정부를 방치해둘 경우 또 다시 타국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말려들게 할 것이니,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다시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에 강요하는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사실 태프트는 가쓰라가 그런 주장을 읊조리기 전에 먼저 필리핀에서 일본의 유일한 이익은 자신의 견해로는 미국과 같은 강력하고도 우호적인 국가에 의해 필리핀이 통치되는 데 있으며, 이 군도가 자치에 부적합한 원주민의 잘못된 정치 아래 놓이거나 비우호적인 몇몇 열강의 수중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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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러일전쟁의 물자를 대기 위해서 일본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내에서 병참기지를 사용하고 자원을 징발해 갔단다. 1904년 8월에는 한일협정서를 강제로 맺었는데, 대한제국이 외교 업무를 진행할 때 사전에 일본에 이야기하고 협의를 해야 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단다. 을사늑약 이전에 이미 국운은 다 저물었던 것 같구나. 이런 소식들은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피를 들끓게 했단다.
…
1904년 영국인 베텔 사장과 양기탁 총무가 함께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을 창간했어. 영자 신문으로 기획해서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단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국영문 혼용으로 바뀌었어. 박은식, 신채호 등이 이 신문을 통해서 활동을 했어.
…
1904년 고종은 정치범을 석방했는데 이때 이승만도 석방되었대. 이승만은 석방된 뒤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구나. 1902년 하와이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도 하와이 이민은 계속 늘어나서 1902년부터 1905년까지 7226명이 갔대. 그리고 1905년 4월에는 1031명이 멕시코로도 이민을 갔대.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갔는데 가는 동안에 400여 명이 사망하고, 멕시코에 가서는 반노예 생활을 했다는구나. 정말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구나.
3.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조선 침략에 거칠 것이 없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했으니 말이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주도했는데, 고종을 협박하여 도장을 찍으라고 했으나, 고종은 마지막 자존심인지 책임을 떠 넘긴 것인지, 대신들에게 위임을 하겠다고 자리를 떴어. 그리고 을사5적으로 유명한 대신들이 도장을 찍음으로써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단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들이 을사 5적이란다. 잊지 말아야지. 이 중에 이근택의 집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주었단다. 이근택의 하인들의 온 백성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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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60)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 순간 부엌에서 식칼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라고 호통을 치고 나서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계집종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집을 나가버렸다. 조약체결 이듬해 2월 이근택은 취침 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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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열강들은 하나 둘 우리나라와 외교를 단절했단다. 일본을 인정해준다는 거지… 열 받는구나.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단다. 헐버트라는 사람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워싱턴에 가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었고, 민영환이 추가로 미국에 파견하여 우리나라 조정의 입장을 이야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단다. 프랑스의 프랑시스 레이라는 법학자도 한국 정부의 측의 동의 표시에 결함이 있고,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해 확약하였던 보장 의무의 위반이라는 이유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다고 하는구나.
국내에서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황성신문에 실어 부당함을 주장했고, 민영환은 자살로써 부당함을 주장하였단다. 민영환 이후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대. 이 일로 민영환은 전국적인 영웅이 되었는데, 민영환이 나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에 충성한 것 한뿐이라고 축소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는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 민영환을 영웅화한 것이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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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한성부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 총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을 했어.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1906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민 평화 회의에 고종의 밀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노력에 그치고 성과는 얻지 못했단다. 외교권을 빼앗겼으니 나라 전체를 빼앗기는 것도 시간 문제..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육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생각들을 가졌어. 그래서 사립 학교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고,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등 학회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하는구나.
한편 을사늑약 이후 의병의 활동들도 더 활발해졌는데,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유명하단다. 최익현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 단식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
1907년에는 빼앗긴 나라를 돈으로 다시 얻어오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단다. 대구에 살고 계시던 갑부 서상돈이라는 사람이 시작했는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대. 을사늑약 이후 고종이 일본에 협조하지 않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하자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계속해서 넣게 되고, 1907년 9월 결국 고종은 왕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이란다. 일본은 나라 빼앗기 절차를 하나씩 진행을 했는데 그 중에 군대로 해산시켜 버렸단다. 이제는 우리나라는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단다. 군대가 없는 나라를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4.
이 책에서는 서양인들이 바라본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주었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려 줄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중에 호기심이란 것이 있었다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많이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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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5)
런던은 1904년 3월 12일자 일기에서는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을 지적했다.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비능률적인 점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호기심이다. 그들은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말로는 ‘구경’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우리 서양 사람들에겐 일종의 연극관람이며 회의참석이며 강론경청이며 경마구경이며 동물원 나들이며 일종의 산책과도 같은, 그러니까 그 외에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의 아주 큰 이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아주 사소한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구경거리에 해당되므로 몇 시간이 걸려도 ‘기웃거리느라고’ 서 있거나 구부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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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학창시절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 <혈의 누>라고 배웠단다.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인직의 <혈의 누>는 논란이 많은 소설이라고 하더구나. 일본 군인을 미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말이야. 아빠도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 몰랐는데, 알고 나니 참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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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54)
“저는 왜 자꾸 그런 소설이 시험에 나는지 모르겠어요. 참 부끄럽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혈의 누>를 보면 평양성 안에 살던 김옥련이라는 처녀의 어머니 최 씨 부인이 청일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시내를 헤매다가 어떤 남자한테 겁탈당하려는 찰나에 일본 헌병이 이 부인을 구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설을 그냥 읽으면 아, 참 재미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여자가 구해졌구나 하고 박수를 치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다 의도된 내용이에요. 왜 다른 사람도 많은데 하필 일본 헌병이 구해주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무장해제시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 딸 김옥련이 어머니, 아버지, 가족을 다 잃고 헤맬 때 이를 구출해주는 사람도 역시 일본 군의관입니다. 일본 군의관이 데려다 친딸처럼 잘 대해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 군의관이 데려갔으면 첩으로 두었겠지 친딸처럼 대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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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박에스더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이름은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어떤 일을 했는지 말 모르는 분이었어. 본명은 김점동이고, 선교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노동자 박씨와 결혼을 해서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었대. 남편은 막노동을 하면서 외조를 했지만, 그만 일찍 돌아가시고 박에스더는 의사가 되어 국내로 돌아오셨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셨지. 박 에스더는 귀국해서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는데 10달 동안 3000명의 환자를 진료하셨대. 그렇게 과로를 하셔서 그만 병에 생겨서 34살의 젊은 나이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대…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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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의 이야기란다. 아빠가 중간중간 많이 빼먹고 이야기를 해서 역사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이해해 주길 바라고… 5권을 읽게 되면 또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점점 더 가중되는 외세의 지배하에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은 있으나마나 한 자리였다.
책의 끝 문장: 먼 훗날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경쟁체제를 갖게 되는 한국의 대학입시 전쟁은 바로 그런 교육구국론을 외쳐야 했던 세월이 너무도 길었단 탓에 한(恨)으로 유전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김옥균)는 우선 조선의 불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차마 들을 말인가? 우리나라는 관청에서부터 민가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물이 번지고 도랑이 막혀서,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여 코를 막아도 견디기 어려움의 탄식이 있으니, 실로 외국의 조소를 받을 일이다."
- P81
을사늑약의 부당성은 조약 체결 즉시 제기됐다. ‘을사늑약이 완전히 무효’라는 첫 번째 주장은 1906년 프랑스 파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며 국제법학자인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의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이었다. 레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한국 정부 측의 동의 표시의 결함, 다른 하나는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해서 확약하였던 보장 의무의 위반이었다. 레이의 주장은 1927년 미국 국제법학회가 하버드대학교에 국제법 법전화작업을 의뢰하여 1935년에 조약법을 정리, 공포하게 되었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 P165
1907년 1월 29일, 대구지역의 갑부 서상돈(1851~1913)이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에서 "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즉석에서 800원을 내놨다. 이에 인쇄소인 광문사 김광제 사장도 석달치 담백값 60전과 의연금 10원(당시 80kg들이 쌀 한 가마 6원)을 선뜻 내놨으며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회원들도 동참해 이날 하루 만에 2000원이 모였다. 그해 2월 21일, 대구 시내 북후정(현 시민회관)에서 수천 명이 모인 군민대회가 열렸다. - P283
이와 관련해 노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워 러일 비밀협상이 진행 중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의 변함없는 우정만 믿고 3인의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결국 밀사들은 황제접견은커녕 외무장관도 만나보지 못했다. ……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 P303
이승원은 "’피’를 통해야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였다. 피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느냐 마느냐가 중요했고, 그 흘린 피를 머금고 세상은 격변하기 시작한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피바람의 회오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선생들이 학생들 앞에서 솔선하여 단지를 하고, 그 피로 혈서를 썼다. 학생들은 선생의 뒤를 따라 단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헌병들은 학교를 예의 주시하며 감시했고, 단지를 한 학생을 의병 관련과 내란선동죄로 잡아들였다. 그러나 한 번 흩뿌려진 피는 그칠 줄 몰랐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단지동맹을 결성했고, 그들이 흘린 피가 전국을 붉게 물들였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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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3-10-10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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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근대사 많지만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
정말이지 대단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강준만씨는...
1인 언론을 표방하며 인물과 사상이라는 책을 낼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렇게 많은 책을 끊임없이 잃고 출간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용이 허접하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이자 가르키는 사람으로서도 이 책을 꼭 참고로 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과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논리 정연함과 잘 짜여진 전개가 한국 현대사 산책 전집을 산데 이어 이것도 사게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다가 한번 볼 책이 아닌 것 같아서 이번에 큰 돈을 들여 다 사기로 맘 먹었다.
그가 참고한 문헌의 내용도 어마어마해서 세부적으로 공부하고 싶을땐 또 이 책 뒷부분을 뒤적거리게 된다.
이 사람의 장점은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두루 바라보고 있다는 점. 그렇다고 자신의 견해를 잃지는 않는 점인 것 같다. 그야말로 화이부동한 자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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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ishyon 2008-09-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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