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2권 - 개화기편,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강준만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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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현대사 산책>시리즈와 다양한 사회비평으로 널리 알려진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 크게 개화기편과 일제강점기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개화기편을 다룬 5권이 먼저 출간되었다.
'개화기편'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는데,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 현재화하면서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 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다른 저작들이 그랬듯 지은이의 탁월한 자료편집 능력과 그에 대한 견해가 돋보이는 역사 시리즈다.
목차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머리말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
근대사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전문화?세분화에서 종합화?총체화로|역사의 현재화를 위하여|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역사 서술 시각의 문제|도식주의를 넘어서| 식민사관과 안티 식민사관을 넘어서|역사의 명암(明暗)을 보자
제1장 천주교 박해
01 동방의 조상 숭배는 우상숭배다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1789년 프랑스혁명|1791년 진산사건|문체반정 논쟁
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기해박해
주문모?강완숙의 활약|신유박해와 오가작통법|동정녀 신드롬과 도모지 사형|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가 식민지화 원인의 시작|부정부패와 1811년 홍경래의 난|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청도 방문|왕만 바뀌면 재개되는 천주교 박해
03 이양선의 출몰과 여항문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1854년 일본의 개항|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시계와 피아노|한양 중인계급의 여항문화|1860년 북경 함락에 대한 낙관주의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01 삼정문란으로 수탈당하는 백성
전정?군정?환정의 문란|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민란상사(民亂常事)의 시대
02 고종 즉위, 대원군 등장
세도정치가 만든 어린 임금들|비변사 개혁과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의 명암|사치 금지령과 호포법
03 동학 창시자 최제우 처형
1860년 4월 5일 동학 창시|동학의 극단적 정신주의|조선 정부의 동학 탄압|유생들의 조직적 동학배척운동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1 병인양요를 불러온 병인박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대원군의 결백 콤플렉스|여성 순교자가 더 많은 이유|조선에서 22년을 지낸 다블뤼의 변화
02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는 무장 해적선|영국인 선교사 토머스|박규수의 활약|김일성 증조가 셔먼호 격침을 지휘했나?
03 병인박해를 악화시킨 병인양요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50여 일|천주교도 8000여 명을 죽인 학살극|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돌아오지 않는 외규장각 도서
04 보부상의 정치조직화
군사력의 무능을 보완한 보부상|보부상의 정보 수집?전파 기능|지방장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만행|배외감정의 격화|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
1871년 이필제의 봉기|아시아에서 성조기를 최초로 게양한 전투|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박규수의 ‘예의지방’ 비판|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어재연의 수자기(帥字旗)를 돌려다오
제4장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0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
최익현의 탄핵소|최익현?이항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호포법과 사색당쟁의 영향|고종의 생각이 결정적 이유|한국의 권력 탐욕 문화|공조판서 평균 재임기간 52일
02 일본이 조작한 운양호 사건
1873년 일본의 정한론 번성 이유|한일 국교 교착의 책임|운양호 사건의 전말|조작을 밝힌 일본측 보고서
03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병자수호조약
페리함대의 일본판(日本版)|조선 사대부의 통상에 대한 경멸|최익현과 김인승|1876년은 근대의 시발점
04 수신사 파견과 개항 이후의 풍경
최초의 수신사 파견은 실패|일본인들의 사기적 통상|옥양목 열풍과 비누
05 1870년대의 생활문화
천연두와 종두법 실시|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신재효의 판소리|조선인은 착한 미개인?|양반의 백성 착취
제5장 개화파의 등장
01 박규수의 개화파 육성
개화사상의 3비조(鼻祖)|김옥균과 중화사상|박영효와 민영익
02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한국인
고고(孤高)의 사상가 최한기|최한기는 한국 과학의 아버지|최한기를 외면하는 식민지성
03 급진개화파?온건개화파?위정척사파
중인계급의 진취성|유홍기는 누구인가?|개화파의 만국공법 공부|개화파 대(對) 위정척사파|위정척사파의 중화주의?사대주의|위정척사파의 시대착오성|문명개화론 대(對) 동도서기론|2000년대의 위정척사파 논쟁
제6장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01 이동인, 고종을 만나다
이동인의 귀국|조선인을 매료시킨 성냥|국왕의 밀사가 된 이동인
0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일본의 국민적 영웅|<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일본의 문명화=서양화=반(反)유교|후쿠자와의 조선관
03 황준헌의 <조선책략> 파동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영남 유생들의 만인소|위정척사파?개화파의 언론전|이재선 반역 사건|2007년의 조선책략 논쟁
0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
위정척사파 몰래 떠난 시찰단|개화파와 후쿠자와의 만남|흥아회의 아시아주의
제7장 서양에 문을 연 조선
01 1882년 조미수호조약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조미수호조약의 평가|<한국, 그 은둔의 나라>|너무 늦은 건 아닌가?|조미수호조약과 한미 FTA
02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
신라의 통일을 가능케 한 축국?|1882년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2004년에 재현된 갑판축구
03 외국군의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
화적으로 전락한 농민|왜놈을 몽땅 죽여버리자|290년 만의 대사건|대원군의 재집권|대원군, 33일 만에 물러나다|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개화윤음|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분리|민비의 51일간 피신|보부상과 혜상공국|자장면과 임오일기|2006년 용산기지 논쟁
04 태극기의 국기 제정
어떻게 태극기가 선정되었나?|김원모?김영환의 발견|국내 국기 게양은 언제부터인가?
제8장 근대언론의 탄생
01 미국 공사 입국, 미국 보빙사 파견
조선은 단물 빠진 껌|1883년 동문학교 설립|민영익 등 보빙사 미국 파견|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유길준
02 유길준과 사회진화론
유길준과 모스의 만남|모스는 유길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사회진화론이란 무엇인가?|사회진화론과 자유주의
03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창간
원산학사의 설립|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기자?|<한성순보> 이식설 논쟁|<한성순보>와 사회진화론|<한성순보>의 상업제일주의|우정국 설립
04 <한성순보> 이전의 언론
조선의 왕성한 언론 활동|유생의 상소문화|만인소와 풍문탄핵|공론장 논쟁|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제9장 급진파와 온건파의 충돌
01 조영신조약과 조러수호조약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의 오판|조미조약이 아니라 조영신조약이 규범|청을 견제하기 위한 조러수호통상조약
02 미국 보빙사 단장 민영익의 귀국
민영익과 김옥균의 결별|민영익의 변화 이유|미국의 조선 박대
03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무디 부흥|소래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알렌의 입국
04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고종의 소극적 동의|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고종의 분노|혈기가 지혜를 앞선 청춘정권|청국의 개입, 일본의 변심|급진개화파의 전멸|<갑신일록> 위작설 논쟁
05 갑신정변 평가 논쟁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책임 윤리의 문제|급진개화파의 민심 오판|민중계층의 적극적 참여?|평가의 기준이 문제다
06 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생활
김옥균 이용가치의 소멸|후쿠자와의 탈아론|급진개화파 암살 시도|1886년 김옥균의 상소
한국 근대사 산책 2 -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제1장 갑신정변의 유산
01 알렌의 민영익 치료, <한성순보>의 폐간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한성순보>의 폐간|<한성순보>와 청국의 갈등|광인사의 출판활동|사진의 수용과 부작용
02 한성조약과 톈진조약
한성조약과 온건개화파의 득세|김윤식의 시무론|톈진조약의 두 얼굴
03 쌀의 품귀, 담배의 확산
1884년 방곡령 실시|연초제조소?판매소의 집중 설립|담뱃대 사용 금지령|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
제2장 개신교의 활약, 거문도 사건
01 언더우드?아펜젤러의 입국
1885년 4월 5일 부활절|언더우드와 알렌|정동제일교회의 창립|성경 번역과 찬송가 전파
02 제중원 설립과 선교사들의 갈등
백성을 구제하는 제중원|선교사들의 사치 이유|선교사들의 내부 갈등|음주?흡연을 죄악시한 청교도주의
03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청?러시아?영국의 각축전|후쿠자와의 악담|대원군의 귀국|조선 왕을 감독하는 총독이 된 원세개|웨베르와 손탁의 입국|거문도 사건의 역사적 의의|거문도 사건의 세 가지 일화
04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
유길준의 귀국|유길준과 김옥균의 만남|유길준과 부들러의 중립화안|햇빛을 보지 못한 중립화론
제3장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01 전신 개통, <한성주보> 창간
경인 전신업무 개시|<한성주보>의 창간|한국 최초의 신문광고
02 배재학당?이화학당 개교
육영공원의 설립|배재학당의 설립|이화학당의 설립|기독교가 선도한 출판문화|천주교?개신교의 갈등
03 경복궁 건청궁을 밝힌 전기
건청궁을 밝힌 100촉짜리 전구 두 개|물불?묘화?덜덜불?건달불|<전기 100년사>의 재발견
04 주미한국공관 설립
원세개의 방해공작|알렌의 일기에 나타난 박정양 일행의 모습|박정양?이하영?이완용|데니의 <청한론>
제4장 근대화에 대한 공포와 저항
01 외국인이 조선 아동을 잡아먹는다
종두술을 보급한 지석영의 수난|1888년 영아 소동|제중원이 영아 살해의 총본산?
02 박문국 폐지, <한성주보> 폐간
재정난으로 인한 <한성주보> 폐간|1994년 <한성주보> 제16호 발견|서양 미술의 전파
03 1880년대 후반의 민생고
양반계급의 부정부패|일그러진 입신양명 문화|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약탈|민족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로
04 원세개의 횡포, 알렌의 도전
조선 상인의 철시동맹파업과 시위투쟁|원세개의 라이벌은 알렌|왜 원세개만 가마를 타고 입궐하는가?
제5장 동학농민전쟁
01 동학교도의 보은?원평 집회
농민항쟁의 폭발, 동학의 확산|동학의 교조신원운동|동학의 보은?금구?밀양 집회|보은 집회에 대한 평가|북접?남접의 갈등
02 동학농민군의 정읍 고부 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고부 봉기를 키운 이용태|왜 하필 호남인가?
03 김옥균 암살 사건
김옥균 암살 시도|김옥균, 중국 상하이로 가다|홍종우의 총탄 세 발에 쓰러진 김옥균|김옥균의 무덤은 세 개|김옥균 부인 유씨의 한(恨)
04 김옥균?홍종우 평가 논쟁
일본은 김옥균 암살계획을 몰랐는가?|홍종우, 출세를 위한 변신이었나?|조재곤의 홍종우를 위한 변호|일본의 김옥균 이용|북한의 김옥균 평가|신복룡의 평가|하영선?허동현의 평가
05 동학농민군의 고창 무장 기포
고창 무장 기포|부안 백산 대회|황토현 전투|5?16은 이념 면에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김대중의 참여 때문에 빚어진 사건
06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논쟁
고부 기포설 대 무장 기포설|무장 기포에 대한 정읍의 반발|정읍?고창 관계자들의 논쟁|무장 기포 기념일 행사|백산 봉기 기념일 행사|정읍시의회의 성명서 채택
07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
농민군의 함평 점령, 대원군 감국 통보|청군?일본군의 출병|전봉준?김학진의 상충되는 고민|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농민군의 집강소 통치|손화중의 무리가 최강|남조선 개벽을 꿈꾼 김개남|동학농민군 전주 입성 113주년 기념행사
제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0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일본 낭인들의 입국|천우협과 전봉준의 만남|조선 병사의 피로 물든 경복궁|대원군의 재등장
02 조선의 재앙이 된 청일전쟁
풍도 앞바다에 수장된 청 병사 1000명|러일전쟁을 위한 전초전?|조선 민중의 공포와 고통|일본의 평양 전투 승리|청일전쟁의 기본 구도는 아직 살아 있다
03 자율과 타율 사이에 선 갑오개혁
갑오개혁 자율론과 타율론|사회신분제 폐지|400년 묵은 과부 재가 논쟁|유길준과 김홍집|일제의 꼭두각시를 거부한 대원군|박영효?서광범의 귀국|이노우에 가오루의 등장, 대원군의 퇴진|과거제도 폐지의 충격|이승만의 인생이 뒤바뀌다|너무 늦은 신교육으로의 전환
04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
전라감사 김학진의 제안|전봉준?김학진의 의기투합|삼례 재봉기|왜 7월에 봉기하지 않았나?|일본군의 다롄?뤼순 점령
05 공주 우금치 전투의 비극
남?북접간의 노선 차이|7일간의 우금치 혈투|동학군의 계급적 고립|전봉준의 체포?압송|김개남의 체포?효시|학살당한 농민군은 최소 20만 명|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06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수립
박영효 내무대신, 서광범 법무대신|민비와 박영효의 일시적 화해|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의 한계
제7장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01 홍범 14조 제정 반포
홍범 14조의 내용|매우 불길한 행사?|고종의 눈물겨운 노심초사|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
02 망명 유학 10년 만에 귀국한 윤치호
조선 기독교 대표자의 탄생|윤치호의 유교 비판|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03 일본 <한성신보>의 창간
조선 신문이 없는 7년 8개월간의 공백|<한성신보>의 침투전략|최초의 신소설도 <한성신보>에?
04 전봉준?손화중 처형
민중의 영웅으로 각인된 전봉준|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이준용 모반 사건|3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콜레라
05 동학농민혁명 논쟁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유영익의 주장|박노자?하원호의 논쟁|허동현의 주장|배항섭의 주장|김용옥의 주장|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전봉준은 동학교도였나?
제8장 3국 간섭?을미사변?단발령
01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 간섭
시모노세키조약|일본의 랴오둥반도 반환|정동파의 대두|박영효의 재망명|여우사냥을 위해 입국한 미우라 고로
02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일본 낭인들의 천인공노할 범죄|대원군의 처신|제3차 김홍집내각과 을미의병|유길준의 역할|민비 시신 능욕설|뮤지컬 <명성황후> 논쟁|명성황후 우상화?|시해범 후손들의 사죄 방문|명성황후 사진 논쟁
03 실패로 끝난 춘생문 사건
민비 시해 6일 만에 떨어진 황후 간택령|공포로 잠을 못 이룬 고종|미국공사관으로의 피신 기도|춘생문 사건은 일본의 음모?
04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의 귀국
11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서광범의 활동|유길준의 지원|일본의 방해 공작|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
05 태양력 도입?변복령?단발령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1990년대까지 지속된 과세 논쟁|변복령에 대한 저항|강압적인 단발령 시행|최익현과 보형(保形)의병|피차 양보할 수 없는 상징 투쟁|이승만과 김구|단발령 특수|조선은 모자의 나라
06 운산금광 채굴권 양여
외국어학교의 설립|알렌이 따낸 운산금광 채굴권|노다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고종의 미국 짝사랑이 잉태한 결과
07 전신과 우편의 발달
1891년 북로전선 개설|민중의 전신 시설 파괴|1895년 우편업무 재개
한국 근대사 산책 3 -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제1장 갈 곳을 모르고 헤매는 조선의 운명
01 고종의 아관파천
아관파천의 배경과 내막|‘김홍집?유길준 등을 잡아 죽이라’|단발령 철회|을미의병의 보수성|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아관파천은 엄상궁의 작품’|아관파천에 대한 평가
02 <서유견문>의 기구한 운명
<서유견문>의 금서화|개화의 등급과 종류|오늘날의 <서유견문> 평가
03 차라리 가난이 다행이었던 민중의 삶
양반계급은 ‘면허 받은 흡혈귀’|김구의 관찰|조선인의 식탐과 폭식|조선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
04 김구의 치하포 사건
김구는 왜 일본인을 살해했는가?|사형 위기에 처한 김구|전화가 김구의 목숨을 살리다
제2장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등장
01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의 창간
<독립신문> 창간 배경|정동파의 역할|정부의 적극적 지원|<독립신문>의 한글혁명|<독립신문>의 역사적 의미|<독립신문>이 내세운 ‘개화’의 의미|<독립신문>의 독자|<독립신문>의 광고|<독립신문>의 사업|‘최초의 민간지’ 논쟁
02 <독립신문>의 편집정책과 방향
사실과 뉴스를 앞세운 신문|<독립신문>의 계몽주의|<독립신문>의 ‘옥시덴탈리즘’|<독립신문>의 기독교 예찬|<독립신문>의 제국주의?의병관
03 독립협회 창립, 애국가의 등장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독립협회 논쟁|‘한국 최초의 근대잡지’ 논쟁|애국가?창가의 등장|운동회 붐
04 배재학당의 성장과 이승만
배재학당의 정부 위탁교육|이승만의 배재학당 입학|이승만의 배재학당 생활|협성회 발족|협성회의 토론회 활동|1897년 숭실학교 개교
제3장 대한제국 시대의 개막
01 고종의 경운궁 환궁
러시아 군사교관단 파견|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1년 만에 끝난 러시아 공사관 생활|정부의 <독립신문> 탄압
02 대한제국과 황제의 탄생
‘국왕 전하’→‘대군주 폐하’→‘황제 폐하’|칭제건원 찬반논쟁|칭제건원 평가|대한제국 밖의 냉소적 시선|대한제국?광무개혁 평가 논쟁|환구단의 흔적을 찾아서
03 개신교 성장의 정치학
개신교의 충군애국|교회의 치외법권적 보호 기능|<죠션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창간|크리스마스 문화의 확산
04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하다
1896년 10월 2일 최초의 전화 개통|전화를 거는 예절|‘대청전화’의 위력
05 개발권 양여, 매관매직
미국의 무관심|일본의 독식화|이권문제에 대한 <독립신문>의 변화|고종의 매관매직과 미신 사랑
제4장 민권의식의 성장
01 배재학당 <협성회회보>의 창간
협성회의 성황|이승만의 주도|최초의 배달제
02 대원군 사망, 명동성당 완공
“주상이 보고 싶다”|명동성당 완공|대원군에 대한 평가|대원군 평가와 민비 평가
03 제1차 만민공동회
1만 명이 모인 ‘만민공동회’|만민공동회의 러시아 규탄|독립협회의 자기역량 과대평가|만민공동회의 배후는 일본?|러시아의 입장|니시-로젠 협정
04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창간 주체 이승만의 긍지|<독립신문>과의 경쟁 선언|<매일신문>의 혈기 왕성
05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
서재필의 출국에 반대한 만민공동회|“흐르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다”|서재필 평가 논쟁|<독립신문>의 소유권 논쟁|서재필의 제국주의?의병관 논쟁|서재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5장 만민공동회의 도전
01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
독립협회의 상원설립운동|황국협회의 하원설립운동|안경수의 정변(政變) 미수사건|독립협회의 이토 히로부미 환영
02 <제국신문> <황성신문> 창간
1898년의 언론사적 중요성|<제국신문>의 창간 배경|<제국신문>과 외국인 용병사건|<황성신문>의 창간 배경|<황성신문>의 필진|<황성신문> 사장 남궁억의 수난
03 고종 독살음모 사건과 커피
고종의 커피 사랑|고종 독살음모 사건|손탁호텔과 커피|‘사교계의 여왕’ 배정자|커피는 서양 문물?분위기의 상징
04 제2차 만민공동회
‘평화적 혁명이 이루어졌다’|관민공동회 개최 결의|장지연과 최익현의 충돌
05 제3차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와 ‘헌의 6조’|백정 박성춘의 연설|무어의 백정 인권 운동|중추원 의관 선거 공고
제6장 만민공동회의 좌절
01 익명서 조작사건
독립협회 간부 20명 체포령|11세 소학생 장용남의 ‘피를 토하는 연설’|보부상의 만민공동회 습격|2배로 늘어난 만민공동회 인원
02 김덕구 장례식 사건
황국협회의 의병 선언|의관 50명의 중추원 성립|의사 김덕구의 탄생
03 박영효의 배후 조정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박영효 일파에 포섭된 이승만|이승만의 과격성|만민공동회 폭력화의 배후
04 만민공동회?독립협회 불법화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신문지 조례’의 제정|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의의|‘만민공동회는 일본이 사주해 일으킨 소요’?
05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과 이승만 체포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이승만은 최초의 권총 탈옥수|박영효의 집념
06 윤치호?이완용의 변절
윤치호의 덕원부윤직 임명 수락|윤치호의 유교 비판과 친일 논리|이완용의 독립협회 활동|이완용에 대한 긍정 평가|문명개화론의 함정
07 최시형 처형, 영학당 사건
1898년 최시형 처형|영학당의 봉기|강일순의 증산교
제7장 전차?철도와 조혼?축첩
01 전차 개통과 ‘전차 소각 사건’
한성전기회사 설립|1899년 5월 17일 전차 개통식|전차에 대한 호기심과 반감|기독교인 도륙비지 사건
02 대한국 국제 반포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대한국 국제 평가 논쟁|정부보다는 개신교가 더 나은 보호막
03 경인철도 개통 자전거 인력거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불을 뿜어내는 수레’|윤치호의 축지법?|인력거의 보급
04 <독립신문> <매일신문> 폐간
<시사총보>의 창간|<매일신문> 폐간, <상무총보> 창간|<독립신문> 폐간과 고종의 언론관|북한의 <독립신문> 평가|<독립신문> <황성신문>의 인종주의?아시아주의
05 조혼?축첩 청산운동
여성단체 찬양회 조직|<독립신문>의 조혼풍습 비판|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조혼|<독립신문>의 축첩제 비판|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축첩제
06 1890년대 말의 식산흥업?양전사업
조선은행?한성은행의 설립|대한천일은행 설립|광무 양전(量田)?지계(地契)사업
제8장 외세 지배의 심화
01 활빈당의 출현
중국 의화단의 난|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활빈당 평가 논쟁|일본 우익단체 흑룡회 창립
02 외국 쌀 먹으면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
1901년 안남미 수입 파동|내장원 쌀장사 논쟁|국가재정?황실재정 논쟁
03 <제국신문>과 이승만의 옥중생활
감옥에서 <제국신문> 논설 집필|이승만의 기독교 선교|이승만의 감옥 내 집필활동
04 이재수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천주교의 오만과 횡포|천주교인들의 폭력 대응|천주교도 700명 사망, 이재수 교수형|박광수의 영화 <이재수의 난>|천주교의 민간풍습에 대한 적대적 태도
05 개신교?천주교의 충돌
개신교 선교사는 ‘백만장자’|천주교인의 개신교인 구타 사건|‘국가보다 기독교를 더 신뢰한다’|정길당 사건
제9장 하와이 이민
01 최초의 노동이민단 출발
솔나무 밑에서 죽어간 사람들|102명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 출발|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2002년에 발견된 ‘이민자 모집 광고지’
02 영업용 전기, 공중용 전화의 등장
1900년 영업용 전기의 판촉|한국 전차?전기사업의 좌절|1902년 최초의 공중통신용 전화업무 개시|공사관 건물의 위엄 효과
03 최초의 화장장 완공
화장은 ‘왜놈들의 장법’|한국의 독특한 장례문화|의학에서의 해부 금지|아펜젤러 사망
한국 근대사 산책 4 -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제1장 러일전쟁 전야
01 용암포 개항사건
4년 동안 20번 바뀐 외부대신|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러일전쟁 개전설과 삼국제휴론|양무호 사기 사건
02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
즉위 40주년, 50회 탄신일 잔치|월미도 매각사건|웨베르의 한국 방문 소감
03 간도 민족주의의 등장
장지연의 <대한강역고> 출간|1712년 백두산정계비 논란|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간도관리사 이범윤의 활약
04 원산 부흥운동과 YMCA의 탄생
회개와 눈물의 원산부흥운동|‘청년’을 발견한 황성기독청년회의 탄생|YMCA의 교육?계몽 활동|단일교회의 좌절|장로?감리교의 선교방법 차이
제2장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01 한반도 쟁탈을 위한 러일전쟁
영일동맹과 노불선언|일본의 38도선 분할론 제시|일본의 전쟁 전략|제물포 해전|충격에 휩싸인 조선 조정|러시아의 ‘영웅 만들기’|‘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쟁탈 전쟁’
02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든 한일의정서
한국의 러일전쟁 병참기지화|도탄에 빠진 민생|아시아주의의 망령
03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과 한일협정서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보안회의 반대투쟁|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와 고문정치|친일단체 일진회의 발족|보부상들의 공진회 활동
04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영국 기자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운 신문|박은식?신채호의 참여|일본인 신문들의 창간|<황성신문> <제국신문>의 경영난
제3장 갑진개화운동과 위생청결법
01 동학교단의 신문화운동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의 활동|진보회의 단발흑의(斷髮黑衣), 바리캉의 등장|갑진개화운동의 평가
02 화장실 파동과 화투 열풍
서울 거리는 대소변 투성이|김옥균의 <치도약론> <독립신문>의 계몽|한국인의 똥으로 돈 버는 일본인|일본에서 수입된 화투|개화기는 화투의 개화기
03 이승만의 출옥과 출국
감옥생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상동교회 엡워스 청년회|민영환?한규설의 밀사로 도미(渡美)
04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한국인의 서양인 구경|강한 호기심은 한국인의 장점|“코레아의 태양은 서울에만 뜬다”
제4장 일본과 미국의 결탁
01 강압과 착취로 이루어진 경부철도 개통
한국인이 겪은 고통과 굴욕|철도가 만든 개화미신|1906년 경의선 개통|7살 소년을 총살시킨 야만성?잔인성|일진회의 참여|철도가 결정한 도시의 흥망성쇠|철도는 진정 ‘진보의 상징’이었나?
02 일제의 여순 점령
일본의 첩보전에 밀린 러시아|여순 전투의 정치학|부정적인 한국 이미지의 유포|일제의 외교권?독도?통신권 강탈
03 노예로 팔려간 멕시코 이민
이민자 1000명 중 400명 사망|1901~1905년 7226명 미국 이민|해외 교포신문 발간
04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일본이 압승을 거둔 쓰시마 해전|미국이 조달해준 일본의 전쟁자금|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국을 먹다|20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논쟁
05 이승만의 루스벨트 면담
윤병구?이승만, 루스벨트를 만나다|루스벨트의 일본 사랑|‘이승만은 애국열성의 청년지사’
06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조약
루스벨트가 주도한 포츠머스조약|일본 국민의 폭동|일제강점이 5년 더 걸린 이유|러일 전쟁 발발 100돌을 맞은 일본|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5장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
01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앨리스 루스벨트의 한국 방문|“정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처하라”|‘을사5적’의 찬성으로 통과된 을사늑약|‘을사5적’인가, ‘을사7적’인가?|민중의 분노|‘침몰하는 배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쥐떼’
02 을사늑약 유?무효 논쟁
헐버트?민영찬의 활동|‘을사늑약은 무효다’|고종의 처신|‘낭만주의적 역사인식의 위험’
03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오늘이야말로 목 놓아 크게 울 날이로다’|‘거의 집집마다 보관하고 외웠다’|‘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곧 잊혀진 ‘시일야방성대곡’
04 민영환의 자결이 촉발시킨 연쇄 자결
민영환의 할복자살|민영환의 유서|서울은 ‘흥분의 도가니’|연쇄 자결
05 알렌은 어찌 되었는가?
알렌과 루스벨트의 논쟁|“미국은 우리에게 맏형처럼 느껴진다”|알렌의 모순
제6장 1900년대 중반의 생활문화
01 천도교로 개명한 동학
손병희의 귀국|천도교로의 개명의 정치학|이용구 등 일진회 간부 출교 처분|이용구의 시천교 선포
02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야구 경기
축구대회의 확산|‘YMCA 야구단’|최초의 부인용품 상점
03 흰옷금지령과 공창제
천년 묵은 백의 논쟁|검은색은 ‘문명의 색’|일본 매춘문화의 확산|통감부의 적극적인 공창화 정책
04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등장
애국가 작사자 논쟁|1998년 국가상징연구회 세미나|최병헌 유족과 윤치호 유족의 대결|‘한국민족 구성원의 공동 작품
제7장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론
01 일제 통감부 설치
‘상왕(上王)으로 군림한 이토’|고종 밀서 사건|밀서 진위 논쟁
02 애국계몽운동의 시작
이제 남은 희망은 교육|사립학교 설립 열기|학회의 조직과 활동|애국계몽운동 개념 논쟁|선교사와 한국인 신도의 갈등
03 최익현의 의병 봉기
최익현 부대의 실상|최익현의 순국|최익현 평가 논쟁
04 민영환의 ‘혈죽(血竹) 신드롬’
“누가 민영환이 죽었다고 말하는가?”|‘대한제국이 처음으로 낳은 국가 영웅’|민영환 서거 100주년
05 <국민신보> <만세보> 창간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창간|1906년 <만세보> 창간|<만세보>와 일진회의 관계
06 이인직의 <혈의 누>의 정치학
왜 신소설인가?|임헌영의 <혈의 누> <은세계> 비판|이인직의 친일행적|‘애국계몽주의의 통속화’
07 <경성일보> <경향신문> <대한신문> 창간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 창간|천주교의 <경향신문> 창간|<경향신문>을 계승한 <경향잡지>|이완용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창간
제8장 국채보상운동과 고종 퇴위
01 개신교의 평양대부흥운동
“미워하던 일본인까지 사랑하게 되었다”|3배로 증가한 개신교 신자 수|부산?경남지역은 예외|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2007 한국교회대부흥 기념대회’|‘목사안수 100주년 기념 참회기도회’
02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치학
안창호의 한탄|주진오?이만열의 평가|김정기?이혜석의 평가|김진호?백찬홍?최형묵의 평가
03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일제의 화폐정리사업|“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거절해도 밀려드는 의연금|일제의 방해공작
04 세브란스병원?대한의원 설립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알렌 신화’ 논쟁|대한의원의 설립|‘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 122주년 기념사업’ 논쟁|“설립정신의 계승이 중요하다”|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05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
이완용 ‘3품 내각’의 등장|이상설?이준?이위종 파견|일본과 러시아의 방해공작|<만국평화회의보>의 이위종 인터뷰|이위종의 국제기자클럽 연설|이준의 사망|‘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이준 열사 순국 100주기 기념행사|헐버트 박사 58주기 추모식
06 고종 퇴위, 순종 즉위
이토?송병준의 퇴위 협박|내시가 대신한 황위 양위식|박영효 체포?유형|순종 즉위, 단발 논란|고종의 러시아 망명설
제9장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
01 정미7조약?군대 해산
“매국노를 수입하려거든 대한으로 건너오시오”|광무신문지법 공포|한국군의 마지막 전투와 해산|‘총포 화약류 단속법’과 호랑이 출몰|의병 총대장 이인영의 ‘어처구니없는 일’|신용하의 새로운 해석|의병의 통신시설 파괴|일진회와 자위단의 행패
02 일본 망명 12년 만에 귀국한 유길준
유길준 쿠데타 음모의 전말|흥사단?한성부민회 창설|왜 유길준은 이토를 지지했나?|유길준의 재발견|2003년 유길준 관련 행사
03 일제 소비문화의 침투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서울출장소 개설|박람회는 ‘국가적 제전의 가장 중요한 형식’|도쿄권업박람회의 한국인 전시|초상사진 열기
04 자동차의 등장, 열악한 도로 사정
1903년 최초의 자동차 등장|최악의 도로 사정|1908년 최초의 신작로 개통|1905년 교통경찰의 등장|상수도 등장
05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민족주의
광무신문지법의 효과|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대한매일신보>의 의병관과 기독교구국론|장도빈?양기탁의 반일 민족주의 논설|학생들의 ‘단지(斷指) 피바람’
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제1장 다시 타오른 애국계몽운동의 불길
01 교육만이 살 길이다
학회의 국민 계몽활동 | 안창호의 신민회 활동 |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 | 기독교 사립학교 붐 | 관?공립학교는 비난의 대상 |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 | 일본 유학생의 활동 |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
02 스티븐스 저격사건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 의병투쟁에 미친 영향 | 이승만의 학업
03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활약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죠신문> 창간 | 이범진의 후원과 안중근의 기고 |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국내 유입 | <신한민보>의 ‘국민혁명론’
제2장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유산
01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이완용?송병준?이용구의 친일 계보 | 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 | 국채보상운동의 내부 문제 | 베델의 사망 | <대한매일신보>의 몰락 |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신문? | 윤치호의 국채보상운동?베델 비판 | 국채보상금 처리 문제
02 국채보상운동의 유산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운동의 효시’ | 1998년 되살아난 국채보상운동 | 243만 명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 |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
03 최초의 근대 잡지 <소년>의 창간
육당 최남선의 활동 | 최초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 | 톨슨토이 열풍
제3장 한말 의병운동의 종언
01 순종의 경상?평안?황해도 답사
일제의 보호권 과시 이벤트 | 철저히 연출된 시각적 스펙터클 | 일제의 법죄즉결령 | 대한제국 당시 최대의 부패 관리
02.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의 역사적 기원 | 재(在)만주 조선인 20만 명 | 일제강점 후 새로운 갈등 | 신채호?대종교?이범윤의 활동 | 동북공정과 ‘간도 되찾기 캠페인’
03. 호남의병의 와해
1907~1911년 의병 14만 명 | 헌병대?헌병보조원의 악명 |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 의병운동인가, 의병전쟁인가? | 오영섭의 민중주의사관 비판 | 의병정신은 ‘충군애국론에 기반한 의리심’? | 김상기?구완회의 반론
04 <대한민보> <경남일보>의 창간
대한협회의 <대한민보> 창간 |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 | 최초의 지방지 <경남일보> 창간 | 장지연의 활동 | <한성신보> <대동일보> <대한일일신문>
제4장 사회진화론?영웅숭배주의?문약망국론
01 사회진화론의 융성
양계초의 <신민설> 수입 | 양계초의 주장 | 조선 지식인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 | <월남망국사> 논쟁 | 박노자?허동현 논쟁 | 사회진화론 개념의 혼동
02 영웅숭배주의의 유행
신채호의 영웅숭배주의 | 영웅 전기의 유행 |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03 문약망국론과 운동회 붐
문약망국론과 상무정신 | 상무정신과 학교 운동회 | 군사훈련식 운동회와 석전
제5장 애국과 매국의 몸부림
01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 추모 열기 | 안태훈과 안중근 | 안중근과 조마리아 | 안중근 연구의 현황 | 의거 100주년 기념 준비 | 안중근은 ‘충직한 근왕주의자’? | 안중근과 아시아주의
02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매국’ 경쟁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 성명 | 이완용과 송병준의 차이 | 일진회 비난?지지 성명전 | 일진회?서북학회?대한협회 ‘3파 제휴’ 결렬 | 일진회는 오명의 대명사
03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
이완용의 파란만장한 ‘변역’ | 이완용 중상, 이재명 사형 | 김구의 후회 | 박원문의 죽음에 대하여 | 이완용에 대한 민심의 분노
제6장 망국 직전의 생활문화
01 영화의 폭발적 인기
영화는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가? |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 |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영화 | 오락 이외에 무엇으로 삶을 위로하랴
02 연극의 인기와 풍기 논란
광무대?단성사의 개관 | 원각사와 이인직 | 신문의 전통연극 비판 |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 | 유성기의 판매와 보급 | 일제의 통제와 탄압
03 개신교의 백만인 구령운동
1884~1910년 개신교 선교사 499명 | 선교 지역의 교파별 점거 |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 일제의 탄압엔 정교분리주의 | 20만 신자를 100만 신자로 | 백만인 구령운동의 정치학 | 한국은 세계 2위의 선교대국 | 한국인의 ‘중층다원성’ |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
04 철도?시계가 불러온 시간개념의 변화
1898년에서야 만들어진 관료들의 시간표 | 신문들의 시간엄수 계몽 |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시계의 상징적 가치 | 도량형의 표준화
제7장 518년 만에 멸망한 조선
01 일제의 강점
안창호의 〈거국가〉 | 강제병합안 8개항 | 경술 7적과 연쇄 자결 | 왜 8월 29일은 조용했나? | 이광수의 고백 | 모든 국민이 일심동체였을까? | 일제강점 호칭 논쟁 | 일제하 68명의 조선 귀족 탄생 | 일제에 기용된 조선인 관료
02 토사구팽 당한 이용구와 일진회
헌신짝처럼 버려진 이용구와 일진회 | 이용구의 후회 | 이용구와 송병준?이완용의 다른 길 | 흑룡회가 일진회를 속였나?
03 신문과 민족주의의 탄생
한글 글자 공동체의 형성 | 민족의식의 계보 | 민족과 조국 | 민족과 국민 | 신용하?박지향?이진경의 주장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광고 분석 | 소통의 빈곤
04 고종?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 | 수십여 명의 학자가 참가한 ‘기념비적 논쟁’ | 허동현의 종합 관전편 | ‘편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론의 함정은 없는가? | 내부적 검증?추궁은 충분했는가? |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을 넘어서
맺는말: ‘조선왕조 500년 신화’를 넘어서
‘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운동 | 한국은 일류의 자질과 능력이 있다 | 임진왜란의 진실 |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진실 | 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 병자호란의 치욕 |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 임진왜란?병자호라과 체제 안정성 | 당쟁?사화가 조선왕조 존속에 기여했다? | 유교?양반 망국론 | 혈통주의의 폐쇄성 | 유교적 가족주의가 500년의 비결인가? | 공식적 가족?자궁 가족의 2중 구조 |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역설 | 입신양명 이데올로기 | 기회주의와 줄서기 | ‘당쟁 망국론’에 대한 반박 | 일제 치하?군사독재의 상흔과 싸우기 | 양반 면책으로 빠진 식민사관 비판 | 한국의 무기력과 침묵 |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 한국 정치의 5대 환경 | 당파싸움의 두 얼굴 | 지금도 건재한 양반문화 | 가문 단위의 부정부패 | 2006년 종친회 가입률 22퍼센트 | 한국인의 보호막 투쟁 | ‘보호막 공영화’를 위하여 | ‘면허받은 흡혈귀’를 넘어서 | 성리학의 가족 중심주의를 넘어서
접기
책속에서
당시 개화의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박규수는 김옥균에게 조부 박지원이 중국을 유람할 때 구입해온 지구의를 꺼내 보였다. 박규수는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오늘날 중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리로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로 돌리면 조선이 중국... 더보기
P. 15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있어서 사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자주 폭력적이었다. 사진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 그런 폭력성에 대한 자각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피사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선 사진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으리라. 조선의 운명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 bookholic
P. 108 사실 조선의 기독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물론 기독교가 조선인들에게 ‘출애굽기’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1900년대 후반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정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더보기
P. 146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치달린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견해가 다른 건 물론 개화파 내부의 견해도 다르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김옥균을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 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평가했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런˝ 인물로... 더보기
P. 296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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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준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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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인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더보기
최근작 : <팬덤이 약탈한 정당>,<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권력과 복종> … 총 601종 (모두보기)
강준만(지은이)의 말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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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넘쳐나는 미디어, 꿰뚫어 보는 통찰력>,<팬덤이 약탈한 정당>,<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등 총 427종
대표분야 : 한국사회비평/칼럼 5위 (브랜드 지수 137,070점), 역사 14위 (브랜드 지수 236,63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자위’와 ‘자학’을 넘어선 강준만의 역사 읽기
:: 한국 근대사의 생생한 몽타주!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다. 아울러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 현재화하면서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근대 한국의 풍경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편견 없이 보여줌으로써 ‘교과서’가 지니는 경직성에서 벗어나 한국 근대사를 생동감 넘치게 몽타주할 수 있게 한다.
:: 생각하는 역사(읽을거리1 참조)
한국언론사?한국문학사?한국철학사 등 각 분야의 역사는 그 분야에 관계된 역사에 대해서만, 즉 언론?문학?철학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각 분야와 관계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줄기와, 각 분야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간 나온 책들은 너무 간결하게 압축돼 있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룬 전문서들 뿐이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전문화?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여 어떤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 <한국 근대사 산책>의 특징(읽을거리1 참조)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마인드 세트>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면서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첫 번째 특징 역시 바로 이러한 ‘종합’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의 현재화’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개화기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이전은 너무 멀고 개화기 이후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절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전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는 점이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주로 개화기 사건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논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 쓰는 새로운 기술방식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책과 논문은 물론 신문기사?칼럼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언론?문화?커뮤니케이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E. H.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그 상호작용?대화의 성격과 질이 문제의 핵심이고 ‘대화’보다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때에 인간이 역사에 끌려 다니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과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구조와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
네 번째 특징은 이른바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메타 역사’란 ‘역사에 관한 역사’다. 개화기 시절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수많은 주장과 이견들이 난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명쾌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교과서’는 늘 위험하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종합’에 의미를 둔 이 책은 다양한 주장들을 다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역사는 단순명쾌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하다. 과거의 복잡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복잡성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현재라는 변수가 더해져 현재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복잡성은 한 차원 높은 재미를 재공한다. 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감상하다 보면 “아, 똑같은 사안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해와 체험은 “역사는 외우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역사 서술의 다양한 시각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면서 도식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보수?진보 시각이 충돌을 빚으면 둘 다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했으며 개화기 역사에서 잘 나타나곤 하는 민족사적인 서술 시각도 공정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을 거닐며 독자가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 특정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우리의 저력이 무섭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하는 게 옳은 일이다.
::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
개화기 역사는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는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가 본격 출몰한 건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였다. 개화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30~40년간을 개화기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개화기가 시작되었다는 건 그들을 무조건 막아내 싸우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으며 그 만큼 대처 방안을 놓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혼란과 갈등은 크게 보아 ‘개화론’과 ‘수구론’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지식인?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 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는 ‘제3의 길’
‘명암(明暗)이론’은 편견과 도식?집착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명암의 양면을 다 보고 끌어안고 축복이 저주가 되고 저주가 축복이 되는 역사의 문법 위에 바로 서자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안정된 체제 유지가 축복이라면 그로 인해 축적된 내부모순이 저주다. 체제의 안정성은 국가 중심이 아니라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개인의 능력보다 소속 가문이 더 중요했다. “양반사회의 출현으로 한때 국가체제의 건전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보편적 유교문화와 전통문화의 꽃을 함께 피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반대로 양반사회의 존재 그 자체가 국가권력을 쇠퇴시키고 개인의 창의력을 말살하며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역사를 보는 게 바로 제3의 길이다.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의외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관찰법이다. 이 책은 개화기 역사에 대한 ‘자위(自慰)’와 ‘자학(自虐)’을 모두 넘어서고자 한다. 물론 그 누구도 개화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위’나 ‘자학’은 하지 않는다. 어떤 시각이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보는 것마저 넘어서자는 뜻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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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활약이 돋보인다. 근대화를 위한 움직임과 저항과 두려움이 맞선다.
쎄인트 2026-02-07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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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과 ‘을미사변‘을 둘러싼 논쟁을 둘러보면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解明 2021-10-0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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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조선의 목을 조르는 일본의 야욕.
shuita 2022-02-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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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추천으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10권 후딱 읽을게요^^
마이콜 2011-11-0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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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향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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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3-08-31 공감(20)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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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훌륭한 시리즈다. 1권은 조금 뻑뻑했는데 2권은 몹시 재밌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근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던 조선이 신선했다. 이 무렵에 세워진 신식 학교의 교복 사건, 체조 사건 등등이 말이다. 물론, 당대인들은 공포와 저항으로 몸살을 앓았지만.
1권과 2권은 제속도로 읽었고, 3권부터 10권까지는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흐름상 2권이 가장 몰입이 좋았던 것 같다. 가끔 그 몰입을 방해하는 오타와 오기 등등이 나를 괴롭혔지만.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오타 문제가 심각하다. 쇄를 거듭하면서 좀 수정되었으면 한다.
(여태 수정이 되지 않은 게 꽤 불만이다.)
105쪽에 사진 밑 설명에 제물포가 1883년에 개항했다고 나온다. 맞다. 그해에 개항했다. 그런데 1권에서는 1880년이라고 서술했다. 둘의 근거를 다르게 잡은 것인지, 오타인지... 해결해야 되겠다.
110쪽 "한성에서 화상의 무역이 쇠퇴하기 되니 분산영업해서는 지키기 어렵다"
189쪽 사진 밑에 '이산만'이라고 나온다. '아산만'으로 고쳐야 한다.
245쪽 농상무과 공무의 양 아문을 >>>농상무와
293쪽 결국 이노우에는 추임자로 미우라를 추천하고 >>>후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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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1-24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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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2)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를 다룬다.
물론 난 전공자가 아니니까.. 어떤 부분은 참 재미있게도 넘어가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잘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면서 느껴졌던 한부분은.. 쇠망의 길을 걷고 있는 한나라가 너무나도 어수선하고 어지럽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조선의 마지막뿐은 아니였을 것이다. 하나의 나라가 게다가 500여년을 이어오던 나라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이 어찌 평탄할수가 있을까만은.. 조선의 마지막에 더욱더 마음이 아파오는것은 같은 민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 의한 수탈과 더불어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이라 그런것은 아닐까 싶다. 역사속에서 한나라가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수뇌부라 하는 자들은 그들의 잇속을 차리겠다고 백성들을 힘든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속상할 따름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저자의 추천평 >
저자가 말하는 망국의 세월의 저주.. 다시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심적 터전의 씨앗은 아마도 훗날 우리가 그 세월을 바라보던 관점이었을테고 망국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과연 그들도 또 다른 축복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갈곳을 몰라 그저 헤매고 다니는 망망대해속 조각배였을까.. 아직도 한국의 근대사 산책에서 가야할 길은 먼데 역사의 내리막길이 그리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조국의 모습을 하나하나 쫓아가려니.. 마음 한구석이 아련히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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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프린세스 2012-03-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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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역사의식...
현대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회저술가인 강준만 교수의 저작이다. 전작인 한국 현대사산책을 너무 재미있게 봐서 이책 또한 망설이지 않고 사보게 되었다.
호랑이아저씨 2009-07-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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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부터 갑오년 사이의 10년 이야기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갑오개혁은 그 일로부터 10년이 지나서 발생되었다. 많은 경우 갑오개혁은 일본강제에 의해 추진된 조선근대화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국사’만으로 국사를 종료한 경우 대강 이 수준으로 머무르기 십상이다.
왜곡되고 편협한 역사지식이 평준화되어 있다는 점은 주의가 필요하다.
하원호는 갑오개혁에 대해 “자타율 한쪽을 택한 다기 보다는 내재적 발전론의 연장으로서 개혁의 성격을 인정하고 일본 강요에 의한 개혁 과정도 수용한 절충적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보았다. "갑오개혁은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폐지된 기간)를 협의적으로 보기도 하고, 198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갑오-을미년간) 조선왕조의 일본 내지 서구 지향형 근대화운동을 총칭하기도 한다(p. 199).
갑신정변의 실패로 국외로 도피했던 개화파가 갑오개혁을 통해 국정전면으로 복귀한다. 그 중 김옥균이라는 비운적 인물의 삶이 애처롭다. 갑신정변 후 일본에서 숨어살던 그가 청나라에게 조선의 중립국 유지를 외교적으로 접근하려는 속임수에 넘어가 중국으로 갔너가 암살당한다. 그에 이러한 삶의 여정을 무척 생소하게 읽었다. 알만한 것인데 모르는 것을 아는 재미가 역사책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서재필 또한 우울한 인물이다.
갑신부터 갑오까지 십년의 세월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당시 개화파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평가는 지나친 점이 있다. 개화 초기 민중의 삶은 경천동지의 연속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중 ‘사진사’가 흥미롭다. 서양 사진 발명이 1830년대 였고 중국과 일본은 1840년대 도입되었다. “한국에는 부산이 1880년 서울이 1882년”(p.13) 사진영업이 개시되었다. 전래된 이래 사진에 대한 유언비어가 상당했는데 특히 “사진이 수명을 단축시키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삶아서 사진약으로 쓴다는 배외세력의 유언비어가 있었다.” 터무니 없는 내용이지만 무지한 상황에서는 무시할 수 만은 없는 일종의 첩보였던 것이다.(p.15)
지나친 흡연도 문제거리가 될만했다. 건강증진의 기호품으로 왜곡되어 있었던 것이다. 4-5세 아이부터 남녀구분 없이 애연을 했다. 동남아 원시부족의 한 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 잎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연상되어 거북함이 느껴졌다. 선교사들이 기독교리에 금연을 우선 얹어 놓은 것이 이해되기도 한다.
제중원 부설 국립의학교에 입학생이 없었다는 일화도 관심이 간다. 결국 관아에서 차출한 기녀들이 입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남녀구별이 삼엄한 문화에서 남자병실 출입이 자유로운 계층은 기녀들”(p. 112)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의 의대 뿐만 아니라 보건계열의 입시과열 현상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거시험 철폐되고 대신 이용되었던 시험과목은 국문, 한문, 사자(글씨 베계 쓰기), 산술, 국내정략, 외국사정, 발책(논문) 등이었다. 특별한 기술 소유자를 추천하여 시험하는 제도도 시행되었다. 고급관리 채용은 현임 고급관리의 협의 공천으로 후보자 세명을 국왕에게 주문(奏聞)하여 그 가운데 국왕이 택일하는 칙임관과 대신이 선발하여 도찰원의 평의를 거쳐 국와의 재가를 받는 주임관제도를 두었다. 종래의 품계는 18등급이었으나 3품이하부터 정·종의 구별을 없애고 1-2품을 칙임관, 3-6품을 주임관, 7-9품은 관리관이라 했다(p. 211). 근대적 공무원 채용시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콜레라와 관련된 짧막한 소개에서 방역을 위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두었던 무당의 조치가 다소 당황스럽다. 콜레라의 숙주가 쥐이므로 그림이 예방약 정도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콜레라 사망자는 약 3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일본에서도 콜레라가 개항이 불러온 사회문제로 부상되고 있었다. 「일본적사회질서의 기원」(나루사와 아키라 저, 박경수 역, 도서출판 소화, 2004)에서 소개하고 있는 당시 일본의 질병예방 대책은 ‘위생환경’ 개선있었다. 개화가 실제 민중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제3권으로 이어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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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2011-01-2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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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권을 읽고

토지는 어느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계속 꾸준히 독자를 유입하는 것은 그만큼 이야기 자체의 흥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주로 나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과거 이 땅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선조들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토지 1권을 오디오북을 통해서 완청(!)했다. 처음에는 집중도 어렵고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듣다보니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빠져드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치수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처음에는 좀 으스스하고 기괴하다 생각했다. 나중에는 날카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에 있는 화를 분출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어린아이의 못된 심보 같은 것도 보인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사건 및 인물들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따라서 소설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하고 거기에 사견을 붙이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하려 한다. 앞으로 읽어나갈 이야기도 그렇게 진행할 것이다.
1권의 시대적 배경은 1896년에서 1897년까지다.
동학농민들이 주장했던 폐정 개혁안으로 노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책에는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면서 들불처럼 민중이 일어났고 1895년 을미사변까지 발생하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두 사건은 국내 정치 뿐 아니라 주변국의 정세까지 바꾸어놓는 결과를 낳는다.
동학은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불만에 찬 백성들을 결집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동학은 자신들을 포라고 했는데 법포와 서포가 있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들었는데 시형의 호가 법헌이었기 때문이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들었는데 수원 사람이었다. 서장옥과 최시형은 모두 최제우의 학문을 따랐고 최제우가 사망하자 각각 도당을 세워 이어가면서 이름하기를 포덕(布德)이라 했다.
동학교도들은 산 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냈으며, 그 안에 모여 깃발을 내걸고 대오를 정비했다. 큰 기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 씌어 있었으며 그 아래 중앙에 황색기를 꽂고 사방에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 색깔의 기(色旗)를 내걸었다. 포접과 지역을 나타내는 작은 기도 무수히 많았다. 이들은 양곡을 조달하기 위해 더러 부자를 잡아다 결박하기도 했고 돈을 거두어 쌀을 무더기로 사오기도 했으며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내기도 했다. 이때에 모인 각지의 대접주는 손병희, 임규호, 손천민, 김덕명, 손화중, 김기범(김개남), 김낙삼, 김방서 등이었다. 이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중심의 접주들이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167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 이후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의 실정으로 동학 교도들이 봉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소요로 판단하여 홍계훈을 초토사로 파견하였으나 동학도들은 계속 유입되면서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에서 물러난 후 전라도에서 반봉건 투쟁을 이어간다.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케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26~27
이 때 조정 대신 민영준은 동학의 위세가 커지자 위기를 느끼고 청에 구원 요청을 하게 된다. 청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이전에 청과 일본 간에 맺은 조약에 따라 일본도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5월 8일 관군이 동학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되찾은 후 궁궐 안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관제를 고쳐 2부 8아문으로 바꾸고 개혁 방침을 발표한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일본군은 청군을 성환에서 공격하여 청군이 평양으로 달아난다. 양국간의 충돌은 7월 1일 청나라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는 조서를 내리고 일본도 전쟁 선포 선언을 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진다.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고종과 민비를 연금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신정권을 수립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기존 청과의 조공 관계를 끊고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청군을 몰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대조선국과 대일본국 정부는 조선개국 5백3년(1894) 6월 23일, 대일본 메이지 27년(1894) 7월 25일, 조선국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철수 사안을 조선국 서울 주재 일본국 특명전권공사에게 맡기고 그가 대신 힘을 다한다는 사항에 대해 진심으로 조약을 맺었다. 이후 두 나라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이미 서로 도와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하기로 입장을 세웠다. 관련된 사실들의 원인을 분명히 드러내고 아울러 두 나라가 함께 하는 일이 분명히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뜻에 따라 아래의 두 나라 대신은 각각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조관을 의논하여 결정한다. ... - 대한계년사 2권 P65
정부의 행태에 분개한 전봉준은 삼례에서 남접과 북접의 연합전선 형성을 모색한다. 마침내 10월 중순 농민군과 관군은 공주에서 맞붙었고 이곳에서는 농민군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11월 8일 우금재(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패하면서 그들의 저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체포된 뒤 처형된다.
관군은 일본군 사이사이에서 총을 쏘아 댔다. 농민군은 끝내 우금재 너머 언덕으로 물러나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를 피했다. 이때 관군 수십 명이 산을 내려가 작은 언덕배기를 장애물로 삼고 총을 쏘았다. 패색이 짙어진 농민군은 보루를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과 경리청군 50여 명은 달아나는 농민군을 남쪽으로 십여 리를 추격했다. 이 우금재의 싸움에서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히 메웠다"고 할 만큼 농민군은 크게 패배했다. 11일, 능치를 지키던 관군은 빼앗은 농민군의 옷과 수건을 착용해 농민군 모습으로 위장했다. 관군은 산을 기어올라 농민군에 근접했다. 농민군은 위장한 관군을 동료로 오인하였는데 위장 관군이 근접해서 불의에 총을 쏘아 댔다. 기습을 받은 농민군은 놀라 흩어졌다. 관군은 대포를 노획했고 많은 연환을 빼앗았다. 이 능치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은 12일부터 점차 흩어져 갔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276~277
10월 24일 일본은 청의 여순을 함락시키면서 청일전쟁의 기세는 일본으로 기울어지고 1895년 청일전쟁 종전의 결과로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전쟁의 과정과 결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제1관 조선은 완전 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제2관 청나라는 봉천성 남쪽 지방 일대와 대만 전체 및 그에 부속한 섬 그리고 팽호열도를 일본에게 떼어 준다.
제4관 청나라는 일본에게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 은 2억만 냥을 지불한다.
제6관 일본은 청나라 호북성 형주부 사시, 사천성 중경부, 강소성 소주부, 절강성 항주부에서 통상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87~88
토지에서 윤보와 용이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대국이 왜눔한테 항복을 했이니, 그게 망조라 말이다. 왜눔들이 개미떼맨쿠로 기어올 긴데, 벌써 항구에는 왜놈들 장사치들이 설친다 카는데, 허수애비 같은 임금 있으나 마나, 총포 든 놈이 제일 아니가." - P123
민씨 일가는 친러배일정책을 추구하면서 친일파를 내각에서 배제했다. 10월 7일 밤 경복궁에서는 민영준의 궁내부대신 내정을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고 같은 시각 서울 남산 진고개에서는 일본인 검객과 낭인들과 일본어 신문 기자들이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조선 왕후 시해 명령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일본 낭인들은 훈련대 연대장 일행을 살해하고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으로 쳐들어갔고 고종의 침전에 난입하여 고종은 수모를 당했으며 왕세자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자에게 상투를 잡혀서 칼등에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낭인들 중 한 무리가 왕비 침전으로 가서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사살하고 끝내 왕비를 시해한다.
"조선국의 형세는 점점 불운해져가고 있다. 궁중이 날로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는 망령되이 국정에 간여하고, 우리 정부가 계도하여 개량한 헌정 체제를 문란시키고 있다. ... 이는 곧 우리나라가 여러 해 동안 노력과 재정을 들여가며 이 나라를 위해 경영해온 호의를 저버린 것이며, 내정의 개량을 방해하며 독립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 때마침 대원군은 궁중을 혁신하고 도와서 바르게 이끄는 책임을 스스로가 맡겠다고 하면서, 미우라 고로오에게 자신의 뜻을 암암리에 전달하고 도움을 구했다. - 대한계년사 2권 P102
일본 장교는 군사의 대오를 정렬하여 합문을 빙 에워싸 지키도록 명령하여. 흉악한 일본 자객들이 왕후를 수색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자객 20~30명이 그 우두머리의 인도로 칼을 빼어 들고 전당으로 불쑥 들어가 왕후를 찾았다. 밀실에까지 이르러 궁녀들을 만나자 함부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구타하며 왕후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다. 자객들은 여러 방을 샅샅이 조사하여 마침내 조금 더 깊은 방안에서 왕후를 찾아내고는, 칼날로 찍어내려 그 자리에서 시해했다. - 대한계년사 2권 P119
왕비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이탁(순종의 본명)을 통해 피살된 자 중의 한 사람이 민비임을 확인하고는 민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다.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시신 '처리'였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증거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 한국근대사산책 2권 P296
11월 26일 왕비가 복위되고 대원군은 은퇴하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유림들은 자결을 하거나 단식을 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친일내각 타도를 외치며 일어섰고 정부는 12월 1일에야 왕비 시해 사실과 국상을 공포한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단발령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청일간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외국의 입김이 강해진 조선을 바라보는 양반들의 시선은 점차 다양해졌다. 중인 계급인 역관의 중요성이 커지듯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반들은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허허 이 사람아, 할 수만 있으면 못할 건 또 뭐 있누. 그래 서울서는 변의장이나 단발이 어느 정도요?"
"양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은 아직 지극히 희소하오만 단발은 그보다는 많이 했지요."
"인심이 흉흉했었소. 게다가 민비를 살해한 뒤끝이어서."
"요즘도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이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글쎄올시다. 서울 근교뿐이겠소. 도처에서 낭당을 이끌고 소란들 피우는 모양인데, 단발령 하나 가지고 나라 안이 벌컥 뒤집힌대서야 남들 보기에도 딱하고 어릿광대스럽지요."
...
"어차피 풍습이라는 것은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르게 마련인데 조만간에." - P200~201
"갑오년 공사노비 제도 혁파한 것부터가. 썩어빠지고 얼이 빠진 놈들! 천비한테 아양 떠는 사당 같은 놈들!"
"세상이 변했다 말씀이오. 아니지요. 양반 놈들 창자가 썩은 것뿐이오."
치수는 날카롭게 웃었다.
"옳은 말씀이오. 편견임에 틀림이 없소. 허나 재물과 목숨 지키려고 상것들에게 허리 굽히는 짓은 아니하겠소. 두고 보시오. 이젠 상놈들은 양반 상투 움켜쥐고 올라앉아서 끝장까지 망하는 꼴 보려 할 게요."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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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8-07 공감 (24)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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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 중에서...

(15)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있어서 사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자주 폭력적이었다. 사진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 그런 폭력성에 대한 자각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피사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선 사진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으리라. 조선의 운명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26)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에 놀라곤 했다. 독일인 애쏜 써드는 1902년에 발표한 글에서 “대한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 년 일생 동안 피우는 담배연기만으로도 우리나라 베를린의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 남자들은 모두가 괄괄하고 건강하게만 보인다”고 썼다.
(53)
김옥균은 유길준에게 귀국을 만류했지만 유길준은 다음과 같은 답으로 거절하고 12월 2일 일본을 떠났다.
“형님께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생각은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귀국을 해야 하겠어요. 물론 들어가서 장차 어떤 일을 당할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가 없겠지요. 또 나는 살기 위해서 형님들과 관련이 없다고 변명하러 들어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변명이 될 일도 아니고 형님이나 나나 내일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형님의 처지와는 좀 달라요. 형님들은 어떻게 됐든 한번 일을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까닭 없이 일본에 앉아서 나라의 불행한 현실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들어가서 한번 부닥쳐볼 작정입니다. 요행히 살아남아 발붙일 곳이 마련된다면 나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국내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장차 형님에게도 재기하시는 데 절대 필요한 발판이 되지 않겠습니다.”
(108)
사실 조선의 기독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물론 기독교가 조선인들에게 ‘출애굽기’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1900년대 후반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정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나 방파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길 없는 ‘민족공동체’에서 보호와 위로가 주어지는 ‘교회공동체’로 발길을 돌렸다고나 할까?
(146-147)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치달린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견해가 다른 건 물론 개화파 내부의 견해도 다르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김옥균을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 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평가했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런” 인물로 폄하했다.
(199-200)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10년 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 밀려났던 대원군이 조선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치 개혁의 얼굴 마담”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894년 7월 28일(음력 6월 26일) 정오 74세의 노인인 대원군은 비상시국의 첫 번째 회의를 주재하면서 “나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완고의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원군은 이 회의에 군국기무처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개혁지지를 선언하고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로 임명했다.
(231)
김용옥은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뒤부터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집어먹기 시작했다”며 “우금치 전투 이후 일본의 조선 침탈은 가속됐고 일본은 식민통치 기간에 좌우 이념 대결, 6.25 동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모든 죄악을 다 뿌려놓은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296)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시신 ‘처리’였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가 증거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349)
“쿵, 무거운 곡괭이가 검은 흑벽을 크게 찍어내자 돌연 반짝반짝 노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노 터치! 노 터치!” 즉각 미국인 채굴 감독의 고함이 광구 속을 쩡쩡 울렸다. 조선인 광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금맥이 나왔구나. 땅속에서 금맥이 드러날 때마다 미국인들이 지르는 소리는 똑같았다. 노 터치(No touch, 손대지 마라)! 혹여 금을 훔칠까봐 소리치는 것인데 조선인 광부들의 귀에는 ‘노다지’로 들렸다. 그들은 ‘노다지’는 ‘금’을 가리키는 양인들 말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신들도 금맥을 발견하면 즉각 소리쳐서 금이 나왔음을 알렸다. “노다지! 노다지!”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조선인 광부들에게 황금은 곧 노 터치였다. ‘노다지’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광물이 쏟아져나오는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뜻의 광산 용어로 쓰이다 이내 ‘큰 횡재’를 뜻하는 말로 조선인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갔고 이제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이 한국어사전에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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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3-07-12 공감 (2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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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망해가는 조선을 읽고 앉아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힌다.
근대사와 해방 후 전쟁 전까지를 한번 훑으려 한다.
선택한 책은 강준만의 근대사 및 현대사 시리즈와 김기협의 해방일기.
인물들이나 사건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들을 보려면 앞으로도 계속 관심갖고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일단 통독하듯이 볼 셈이다.
한국근대사 산책은 일제강점기 시대까지를 다루며 총 10권인데, 일제강점기까지 산책을 하고 싶지는 않고 경술국치까지만 읽겠다. 읽다가 일제강점기도 보고 싶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를 다룬 한국 근대사 산책 1권을 뗐다.
강준만 교수는 책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내부갈등을 다루는데 무능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는 최근까지도 강 교수가 주목하는 질문인 것 같은데 오죽하면 안철수를 지지하는 이유로 '증오의 시대를 종언'낼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걸겠는가.
암만 생각해도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한 무능한 거 아닌가 싶다.
주변 나라들이 그저 문제없이 잘 지내주기만 바란다.
강준만 교수는 시리즈를 내면서 자위와 자학을 넘어선 근대사 읽기를 권했다. 또한 모든 것은 명암이 있기 마련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것을 권했다. 당분간 자학 모드에 빠져 지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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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2-07-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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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한국 문학을 접하니...낯설고 쉬이 읽히...
1900년대 한국 문학을 접하니...낯설고 쉬이 읽히지 아니한 게 사실이라. 한국 근대사와 문화와 픙물이 궁금해진 터...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과 함께 몇 권 더 구매해서 볼 계획이다.
재미감동다있어야 2015-02-1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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