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8

유종호 회고록 2 합장일랑 말아라 - 충주농업학교의 남봉우 선생, 아들 남기영 이야기

합장일랑 말아라 

<합장일랑 말아라>

알고 보면 세상은 좁다. 한 다리 건너 다시 두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가 된다. 이번에 다시 한 번 그것을 통감하였다. 전번에 학생 손에 비명으로 간 한 사례로 충주농업학교의 남봉우 선생 얘기를 적은 바 있다. 그런데 최근 그 유족을 통해 불행의 자초지종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6•25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다양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고 기록으로 남기는 의미도 있어 전해 들은 대로 적어두려 한다. 6.25 당시 남봉우 선생 일가는 농업학교 사택에 살고 있었고 학교 사택은 열한 채가 있었다 한다. 아무래도 전황이 불리해지는 쪽으로 가자 남 선생은 부인과 자녀 3남매를 충북 음성에 있는 처가로 보냈다. 오랫동안 생활지도 주임을 맡았으나 6.25 나던 해에 교무주임이 된 그는 학교일 정리할 것이 있다며 충주에 남아 있었다. 인민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지자 일단 음성으 로 갔으나 전선은 벌써 음성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남 선생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충주로 돌아와서 칠금리에 있는 믿을 수 있는 제자를 찾아 나섰다가 곧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다.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부인 정인순호 여사가 충주로 나왔다. 충주농업학교에서는 한갑수 선생이 인민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던 것 같다. 부인은 우선 한갑수 선생을 찾아가 남편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보 았다. 처음엔 걱정할 것 없다면서 안심을 시켰는데 나중에는 벌써 청주로 넘어가서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해 다시 찾아가 물어보니 "이렇게 자꾸 찾아다니면 오히려 당사자에게 해롭다"며 역정까 지 내었다 한다. 그러니 다시 찾아가 물어볼 처지도 못 되었다. 처음엔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아서 안심을 시킨 것으로 생각되는데 태도가 달라진 것이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직접 알려주지를 못하고 얼버무린 것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부역 교사인 한갑수 선생은 충주에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고 1950년대 말에는 충북 도의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보신 때문에 부역하기는 했으나 지방 재력가이자 유지였던 그가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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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이 되고 나서 충주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경찰서에는 수복 직후 실종신고를 해놓은 처지였다. 두 처남과 열세 살 장남이 경찰서를 찾았다. 거기서 남봉우 선생을 직접 처형했다는 충주농업학교 학생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그는 유병대 내무서장의 지시로 자기가 남 선생에게 총을 쏘았고 시체도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말하였다. 또 그 장소가 호암지 연못 근처 의 구렁이었다고 진술했다. 곧 그곳을 파보았는데 열대여섯 구의 시신이 묻혀 있었고 이미 부패가 심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었다. 부인은 매고 있던 혁대를 근거로 해서 남 선생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신을 수습해서 선산에 안장했다. 현장에는 부인, 두 처남, 어린 아들이 입회하였다. 당시 그 학생을 통해 남 선생이 칠금리에서 붙잡힌 후 하루 정도 유치 장에 있다가 바로 처형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형을 지시했다는 유병대도 충주농업학교의 교사였다. 6.25가 터지기 직전에 부임해 왔는데 처와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전처의 소생이었고 아주 어린 작은아들 은 후처 소생인데 이 후처는 충주여자중학교의 가사교사였다. 어떠한 경위로 그가 학교에서 내무서로 전근해 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것과 함께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는 당연히 수복 직전 월북하였다. (* 가사과는 요즘의 가정과에 해당한다.)

남봉우 선생은 충북 청주 남일면 소재 의령 남씨 집성촌 출신이다. 청주중학을 나온 후 부친의 명으로 의과계의 상급학교 시험을 치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음악이나 스포츠 쪽으로 재주를 보인 터라 적성에 맞지 않아 본인 자신이 별로 입시 준비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크게 낙망하지도 않았다 한다. 낭인생활과 우여곡절 끝에 역시 부친의 의사에 따라 충주군 앙성의 강천초등학교와 음성 수봉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해방 이후 충주농업 체육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운동에 소질이 있고 특히 축구를 잘 해서 충북 대표팀 선수를 지내기도 했는데 3번을 달고 백을 보았다. 그것 이 계기가 되어 충주농업의 체육 교사가 된 것인데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도 잘 켰고 실을 뽑는 새 제사기를 만들어 특허를 받은 것도 있었다. 사변 전부터 교장으로 있었고 남 선생을 초빙해 온 박성범 한 교장은 남 봉우 선생 유족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교사용 사택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어 전부 여섯 채가 있었던 학생 기숙사 중의 한 칸에 유가족이 머물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그 덕에 오랫동안 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1951년 가을 연례행사인 충주고와 충주농고의 친선 축구경기에서 예년과 달리 충주농고가 패배를 하였다. 충고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하는데 심판이 이를 묵과해서 부당하게 패배한 것이라고 농고 선수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난동을 부렸다. 마땅히 학생들을 진정시켰어야 할 박 교장이 나서서 학생 편을 들며 은근히 선동을 해댔다. 농고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충고 학생 집결장소로 진격해 오는 바람에 충고 학생들은 돌을 피해서 도망을 쳐야 했다. 불시에 당한 것이어서 반격할 틈도 없이 학생과 교사가 거의 1킬로 정도 도망쳐서 삼원초등학교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투석과 추격이 뜸해져서 양쪽 교사들이 나서서 일단 휴전이 된 일이 있었다. 그때의 거동으로 보아 박성범 교장은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이 없는 위인으로 치부하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그의 복장이나 코밑의 수염이 꼭 기생오라비 같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그가 남 선생 유족에게 보여준 배려에 관한 얘기를 듣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한 모서리만 가지고 판단 해서는 못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난시에 희생된 교직원의 유족에게 최소한 주거 장소는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그의 의협심이, 불법적 난동을 통해 패배자에게 울분의 배출구를 열어주자는 파격적 언동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사람의 장단점이란 것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상이한 줄기인 경우가 많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유족이 그 후 가파른 삶을 살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남봉우 선생의 부친 남상범 씨와 그 부인도 1•4후퇴 직후 세상을 떴고 남봉우 선생의 막내 또한 1•4후퇴 피란 중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부인 정인순 여사가 가사 도우미와 바느질 품팔이를 비롯하여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서 어린 남매를 키웠다. 그 과정에 남 선생의 옛 친구나 제자의 도움도 컸다. 1년에 한 번 쌀 한 가마를 꼬박꼬박 도와준 은인도 있었다 한다. 다행히 남매가 모두 명민해서 어려운 가운데도 아들 <기영>은 서울대학 지질학과를 나와 경북대학 교수로 있다가 <호주의 지질 연구소>에 자리를 얻어 1971년 한국을 떠났다. 딸 미영은 숙대 국문과 를 나왔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서 당선되어 동화작가로 활동 하는 한편 한국교육개발연구원에서 장기간 근무해서 국어교육연구실장 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는 한국독서개발연구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 정인순 여사는 2014년 우리 나이 백하나로 세상을 떴고 말년 이태 동안 은 인지장애에 걸려 있었다. 인지장애가 오기 전 부인은 딸에게 말했다. "혁대로 미루어보아 너희 아버지려니 생각하고 시신을 수습해서 선산에 모시긴 했지만 무언가 의지를 하려고 서두르는 마음이 앞서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많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고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 죽은 뒤 합장일랑 말아라. 생판 남일지도 모르거든." 사실상의 유언이 된 셈인데 그 얘기를 듣고 마른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메일로 전해 들은 남기영 씨의 경험담도 그렇다. 충주농업학교는 봉방리라는 논바닥으로 된 동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시내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고 당시엔 인가도 주위엔 없었다. 그런 농업학교 바로 옆의 사택에 서 살았기 때문에 동네엔 친구가 많을 수가 없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분명한 유병대 선생의 아들이 한 살 위였고 함께 삼원초등학교 를 다녀서 친하게 지냈다. 6.25 이후 그의 부친이 월북한 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1961년 봄에 서울 동숭동 교정에서 그를 먼발치로 보았 다. 처음엔 긴가민가하였다. 몇 차례 보고 나서 틀림없이 그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가 구내식당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처음 몹시 당황해하였으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면서 자기가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었다. 갑자기 무서워 지면서 그 후 그를 만나게 될까 겁이 났다. 학교 가기가 도무지 싫어져 겸사겸사 앞당겨 자원입대하였다. "그의 모친은 너희들이 잘되는 것이 복수 하는 것이다. 딴생각은 말아라"라고 늘 말했다 한다. 그는 유병대 선생 아들 이름만은 절대 밝히지 말아달라고 내게 당부하였다. 가해자의 아들도 희생자의 아들도 윗대의 업고를 이어받아 서로 다른 아픔과 은폐된 기억을 안고 산 것이다. 남선생 장남이 굳이 남쪽 바다 끝의 호주 땅으로 이민을 간 것도 소년기의 악몽과 그 여진 에서 벗어나려는 심층적 충동 때 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의 상흔이란 지극한 상투어로 일괄 처리하는 그 시대 불행의 세목은 이렇게 모질고 한 없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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