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시골 아지매의 '공산당 선언'
1848년 맑스주의의 역사, 다시 말해서 사회당과 공산당의 역사,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문건이 등장한다.
바로 <공산당 선언>이다. 이 선언문의 시작과 끝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봤을 정도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선언의 시작은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 칼 맑스 프리드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 출판사 1권 399쪽)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같은 책 433쪽)라는 말로 끝난다.
이 선언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직전에 발표되었다.
'공산당' 선언이지만 아직 공산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서 엥겔스와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다. 이 짧은 선언은 향후 과학적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골격이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것은 이론서가 아니라 선언문이다. 말 그대로 선언적인 형태로 주장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결론만 있지 왜 그런지 설명이 거의 없다. 이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이 아주 중요한 까닭은 맑스 당대나 후대에 있어서나 상당히 큰 영향력을 끼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맑스를 그냥 맑스라는 대문자 이름만 알 뿐 그가 쓴 저작들은 실제로 거의 안 읽힌다. 그런데 아주 예외적으로 당대에 있어서나 후대에 있어서나 많이 읽힌 텍스트가 '공산당 선언' 이다. 그리고 책 자체의 내용도 맑스 사상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책이다.
그만큼 맑스주의를 전파시기는데 있어서 제일 큰 공언을 한 책이 '공산당 선언' 이다. 맑스는 몰라도 '공산당 선언'은 알고 있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 여러 텍스트들이 상당히 상이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은 맑스의 사상이야 공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공감하는 부분의 내용은 대부분 '공산당 선언' 에 입각해 있다. 그런점에서 이 텍스트는 중요하다.
부와 권력의 구조적이고 극심한 불평등이 한 사회 안에, 또 사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자원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나는 어느 편에 속하는가,
그리고 누구의 편이기를 원하는가?
대답은 각자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는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다.
나는 해설서를 여러 권 읽기보다는 어려워도 마르크스의 저작을 천천히 읽었다. 그러나 만약 마르크스의 생각을 알고 싶은데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어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읽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 < 공산당 선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선언문이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느꼈던 당대의 문제의식과 실천적 지향을 포괄적을 보여주면서도 상대적으로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짧게 쓴 책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좋아하고 배척하고를 떠나 나처럼 문학이라는 독방 속에 스스로를 가두려 했던 사람을 부추겨 진짜 세상 속으로 뛰쳐나가게 만드는 나쁜 친구로 마르크스만한 이가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나쁜 친구가 필요한 것은 왜 일까?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비루한 것에 속한 것들의 해방을 위해서다.
이 파괴적 세계 체제에서 가장 고통받는, 그래서 수단과 도구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파괴되는 자연이다. 전쟁, 빈곤, 불안정하고 가혹한 노동, 젠더, 인종차별과 같은 문제들과 생태적 위기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부유한 국가는 기후변화의 고통을 가난한 나라의 약한 사람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수백 년 동안 화석연료의 대량 사용에 책임이 있는 이들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숲이 있는 곳에 거주하고 그 피해는 유색인종, 빈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사회로 떠남겨졌다.
인간의 해방과 땅의 생태계 복원은 이런 사람들의 비명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해방과 땅의 생태계 복원은 이런 사람들의 비명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모든 피해가 떠넘겨져 고통 당하고 있는 비루한 사람들이 인간과 지구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실질적으로 평등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혁명적 반항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것만이 유력한 대안이기에 이 마르크스라는 나쁜 친구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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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대체로 어둡고 음습하고 또 이런 세상을 원망하는 부끄러운 자신을 정직하게 내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문학은 그런 고통조차도 밝은 웃음이어야 하며, '눈물' 조차도 반짝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목울대를 아프게 누르는 검은 눈물이 어떻게 반짝일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누군가 이런 어둡고 축축한 것은 불행을 전염시킨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을 전염시키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가진 깊이 즉 슬픔을 이해하는 통로를 만드는 길이다. 이것은 문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 이런 어둡고 축축한 것은 불행을 전염시킨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을 전염시키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가진 깊이 즉 슬픔을 이해하는 통로를 만드는 길이다. 이것은 문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 중에 빛나는 순간들이 얼마나 될까? 한국 소설과 에세이에서는 '행복' 또는 '빛나는 인생' 즉 힐링을 말한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순간들, 그래서 우리가 견뎌야만 하는 시간들은 저 어둡고 음습한 그 밋밋한 시간 속에 인간의 진가가 담겨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시와 소설을 읽는게 힘들었다. '사기친다는' 생각 때문에. 그 옛날 다락방에서부터 글을 쓰려고 했을 때, 많이 읽었다. 무식해서, 지독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그러나 이제 나는 잘 모르겠다. 문학이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는 그래서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고, 그 희망을 노래 부른다는 것은 '사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꿈꿀 줄 모르는 아이들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냥, 세상이 그러려니 해야 하나. 나는 아니 우리는 참 어려운 시간을 건너왔는데, 아이들은 왜 더 힘들게 살아야 하지. 물신과 자본의 탑 꼭대기에서 우리 아이들이 얻은 것은 공허와 아득한 절망뿐이기 때문이다.
이 공허와 아득한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 시대, 이 땅의 문학은 이런 현실 문제를 몸으로 고뇌하지 않고 자신들 문예를 끊임없이 특별취급해달라는 허위의식에만 빠져있다. 돈이 되지 않는 시인과 시를 쓰레기 취급하는 자본주의 나쁜점을 그들은 극복하려기 보다는 그대로 답습했다. 삶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문학이나 예술가들은 대학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진학하여 석사, 박사까지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 문학이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장소가 교육계다. 그러니 한국의 문인들은 창작자가 아니라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학생이거나 문학 교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나온 문학은 결코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같이하는 문학이 될 수 없다.
지금 문학인들이 외치는 예술의 '낭만'은 과연 뭘까?
정말이지 이 세상에는 문학이나 예술에서 완전히 소외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 목소리를 세상과 소통시킬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는 것. 예술 활동의 모든 시간이 모두 이것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 없이는 감상적 조작에 불과한 유희 즉 지금 고상한 문학가들이나 문예 비평가들이 외치는 기만의 '낭만'이 될 뿐이다.
삶과 정치가 실현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 이것을 망각할 때 문학은 필연적으로 에밀 시오랑이 말한 기만의 상황에 빠진다. '미적 언어의 기만. 평범한 슬픔을 기이하게 표현한다. 사소한 불행을 미화한다. 공허를 치장한다. 한숨 혹은 빈정거림을 꾸며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하는...'
문학가들의 이런 '기만'에 대해 내가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이중적 태도에 있다. 물질적으로는 시민을 자처하면서 정신적으로는 어떤 우월감을 주장하는 데 있다. 여기서 우월감이란 문학창작은 적어도 일반시민의 노동과는 구별되는 근본적인 무엇이라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는데, 사실 이런 우월감에서 나온 예술지상주의의 전제가 없다면, 막대한 공적 자금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층민이 아니라 문학가들에게 투여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이런 낯 뜨거운 이중성을 합리화 시키는 방편으로 '낭만'이라는 기만적인 가면을 쓴다는 것이다. 이런 문학가들의 모순된 자기규정이야말로 가장 비문학적인 얼굴임을 알아야 한다.
고흐가 뭐라고 했는가?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천박한 일이기까지 하다' 라고 까지 말했다.
김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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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난을 말하는 것은....
: 가장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익의 증대는 곧 공익이고 '선'이라는 믿음은 이미 널리 공유되어온 관념이다. 자본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눈에 땅은 사람들의 치열하고 복잡한 일상이 얽힌 삶의 터가 아닌, 법을 최대한 이용한 투기의 대상일 뿐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선량한 사람이란 언제나 법제도 내에 속한 사람이다. 법의 틈새에 끼어서 고통받거나 권리 밖으로 내몰린 사람은 범법자일 따름이다. 이런 법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모두의 이익을 쓸어 담는 것이 자본과 권력이며 그 모든 행위가 적법한 것이 됐다. 다만 그것에 약간의 제동을 걸었던 것이 '도덕'을 바탕으로 한 양심이었다. 해서 부자들은 선량한 얼굴로 이런 말들을 한다.
- 가난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야 - 위만 보지마
- 너 보다 힘든 사람도 많아
- 잘 사는 사람들이 법을 어긴 건 아니야,합법적으로 열심히 살았을 뿐이야.....
이렇게 가난은 개인의 능력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이 사회의 합법과 불법의 기준이 자본과 권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숱한 법. 제도 변화가 있었다. 몫 가진 자들이 손쉽게 바꾼 법에 의해 많은 사람이 쫓겨나고 죽고 저항했다. 개발지역 세입자에 대한 최소한의 피해보상과 주거생존권이 법제화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몫 없는 자들이 지독히도 죽고 사라지고 지워지고 나서야 법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즉 부자들이 죽고 살아지는 시람들의 몫을 다 쓸어 담고 나서 최소한의 법이 마련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산참사였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 삶에 법이 너무 뒤늦게 따라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이 사회의 모든 상층부는 '법'을 '정의"라고 말하면서 법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기계에 깔려 죽고, 고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처참함에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다. 나는 이 불행과 슬픔 앞에서 고통을 느꼈다. 이 고통이 내 가난을 말하게 하고 처참한 현실에 강력한 증오와 혐오를 느끼게 했으며 이런 현실을 가장 뛰어난 언어적 재능을 가진 문학가들이 외면하는 것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그 까닭은 가난은 관념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악한 지옥에 살고 있으면서 문학이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며 내 고통과 증오를 다독이게 만들고 페북에서 사람들에게 고전이나 문학 읽기의 즐거움이나 말하면서 듣기에 좋은 실없는 소리를 하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내게 문학은 희망이자 환각제였기에...해서 내가 읽은 활자들이 화석이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내 가난을 말하게 됐다.
가난의 현실의 문제다. 죽거나, 사라지거나, 지워지고 있는 자들의 몫을 쓸어 담는 자들이 자신들만의 권리 목록을 쓴 것이 ' 법' 이다. 이 잔혹한 착취의 세계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가난이라는 것을 주어진 몫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뺏앗긴 권리의 목록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가난의 문제만큼 객관적인 것은 없다. 즉 가난은 가장 정치적인 문제다.
이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 '좌파'다.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고 부당하게 대접받고 현상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으로 권리를 가지는 것 같지만 실은 구조적으로 착취 받는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불러야 한다. 좌우는 없어지고 위 아래는 확실한 신분사회가 오는 것이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에서 조차 살 수 없어 철탑으로 굴뚝으로 공장 옥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뜬구름 잡는 먼 정의를 부르짓는 사람들을 '좌파'로 부르면서 권력과 자원을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는 이 사회가 문제라는 말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에 대한 증오가 생긴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신성한 것은 예술이나 그것이 만들어 낸 문화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슬픔과 함께 공감의 증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무엇 때문에 배부른 자들은 이 사회의 모든 좋은 것을 차지하고 '좋은 삶'을 말하는 것이 미덕이면서 배고픈 자들은 이렇게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사회가 된 것일까? 왜 당신들은 이런 부당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를 묻는 것이 내가 페북에서 글을 쓰는 전부다. 지지난해 '자유주의'에 대한 세미나에서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 선생님이 말하는 맑스나 레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우리'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론은 결코 신성한 것이 없는 가설에 불과한 것이며 그 이론이 내가 경험한 가난의 고통과 증오를 함께 하고 있기에 맑스나 레닌이 내게는 '우리'가 될 수 있었다고...
BaekMin Kim
법!!! 몇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고 만들었는가?? 예를 들어 몇 천억 사기친 놈과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도둑질한 사람이 비슷한 형기를 사는 것은 몇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동의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작은 소비를 모아서 부자 되라고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동의 했기에 친 기득권자 친 부자들을 위한 법이 자본주의 자유라는 위명 하에 만들어 졌는가??!!!
법!!?? 그따위 뭔데 신의 음성처럼 받들고 사는가!!??… See more
1y
공산주의
아무리 우리가 이젠 반공이데올로기를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빨간불을 보면 빨갱이, 즉 어떤 사안에서도 "공산주의"라는 말말 나오면 모든 문제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 그 정도로 남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게는 뼛속까지 반공이데올로기의 주사가 들어가 있다.
북한(공산주의) = 종북 = 빨갱이 이건 거의 무의식적인 자기방어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에 합리성이나 이성이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된 것이다.
남한이라는 사회에서 그 어떤 이성도 '종북'이라는 말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평상시에는 이성을 가지고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던 사람들도 '북한'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정당한 비판이 아닌 '종북 정권'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정직한 소명과 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정권과 민주당은 얼씨구나 '박해받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이렇게 이 '종북'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어떤 사건도 합리적인 비판과 반론의 여지는 없어진다.
이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 또는 종북은 합리적인 비판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것들이 이 사회 민중들을 얼마나 개떡으로 여기면 오늘날까지도 "공산주의", '종북'으로 이 지랄을 할 수 있는지 웃음만 나지만, 더 웃긴건 윤석열이가 인권 진보를 위장한 공산주의자라고 했다고 자신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열불을 내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아 ! 우리가 살고 있는 연대가 2023년이다. 그럼 자유주의를 외치든 공산주의자를 외치든 개인의 신념을 존중받는 사회여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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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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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사회를 망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정치를 말하는 당신들 입이 부끄럽지 않은가?
서른 살 청년이 이력서 150장을 남기고 고독사하고 그 유품을 정리하던 부모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면 죽지 않았을거라...자신들의 가난을 탓한다.
이런 한국 사회에 보수-진보가 어디 있고, 좌파 - 우파가 어디 있나?
다시 말하지만 현재 한국 정치에 좌파적인 관점의 정치를 하는 사람과 정치는 없다. 아니 한국 사회는 정치에서 좌파적인 관점의 정치가 뭔지를 말하는 사람조차도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을 비판하는 비판하는 이들 입에서 늘 나오는 말이 '좌파 정권'이라는 말이다.
좌파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조건은 계급투쟁이다.
그럼 과연 민주당이 계급투쟁을 정치의 조건으로 간주하고 있는가. 내가 매번 페북에 쓰고 있지만 지금 민주당 세력의 주축인 자유주의화한 민주화 세력은 수구 정당인 '국민의 힘'보다 '계급'이라는 말을 더 꺼리고 혐오한다. 이런 좌파 정권은 세상에 없다
민주당이나 국힘이나 이들 모두는 한통속으로 '돈'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대가리를 숙인 것들이다. 이런 사회에서 좌파가 사회를 망친다,라는 말은 소가 웃을 일이다.
국민의 힘과 조중동이 말하는 소위 좌파 권력이라고 말하는 노무현, 문재인 정권이 좌파 정권이라면 그들이 좌파 정치의 조건인 계급투쟁을 했는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즉 불평등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핵심적 경제정책, 노동정책에서 재벌 및 '수꼴보수'와 일대결전을 벌였나 말이다. 되려 우파가 좌파정권이라고 말하는 김대중 - 노무현 정부 시절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가 일상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좌파/우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몫을 가진 자'와 '몫이 없는 자'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할 때 이 구조에서 결코 빠져 나갈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파든 우파든 권력은 돈에서 나오는데 무슨 헛소리들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모르겠으면 지금 여의도에 어떤 자들이 앉아 있는지를 좀 봐라. 그들이 공개한 재산을 보면 그들이 누굴 대변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규칙을 정하는 법을 만든다. 그래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 좌파가 어디 있고 우파가 어디 있냐 말이다.
진짜 지겹게 반복하는 말이지만 어떤 노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는 그 일 자체에 내재돼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의 수요 공급 원리나 희소성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투쟁에 의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낸 결과임을 정말이지 이제는 자각해야 한다. "공공에 복무하는 노동으로 버스 운전자와 대학교수 월급이 별 차이가 없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도 있고, 생명을 살리는 농민과 의사의 노동가치가 대등한 쿠바 같은 나라도 있다" 이것을 지금 한국 사회처럼 경제의 '섭리'로 말하면서(한국 모든 정치인들은 그렇게 말한다) 노동가치에 대한 평가를 온전히 시장에 넘기는 나라는 한국 말고 또 어디에도 없다.
그 결과를 죽음의 수치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매일 노동자 8명 일 년에 3,000명 가까운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는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몫 없는) 비정규직, 하정, 특수고용 노동자들이다. 언제까지 당장 오늘 내가 살아 남았다고 노동하다 차별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나.
아니 그러면 우린 인간이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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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사회경제정책만 보면... 박정희가 가장 좌파 대통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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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nam Shin
ㅋㅋㅋㅋ 그럴수도 잘못된 좌파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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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북조선이야말로 노동자가 의사와 임금이 평등합니다.의사안해,김련희선생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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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Lee Jung Suk
잘보았습니다.
공유할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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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집
처먹고 살만한 인간 들은 모르는 얘기지요~~
가난 하면서도 가난 하다고 말을 못하게 하는 분위기 조성을 해서 가난이 마치 죄 처럼 느끼게 하는 말종 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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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youl Youn
늘 쌤의글은 제 속을 꺼내 놓는것같은 시원함이 느껴집니다..공유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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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용
·
조만간 다 무너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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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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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
역사적으로 민주당 계열의 정당도 그들 스스로 좌파정당 내지는 좌파정권이라고 얘기한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만약 스스로 그렇게 규정했다면 당연히 그것 또한 거짓말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사회에 좌파 정당, 정치세력은 더 이상 없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 도태되고 있는 중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정치판에서 얘기하는 진보-보수의 구분은 그저 보수정당 내에서 누가 좀 더 사회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냐 정도의 차이일 뿐인거죠. 그런데 교묘하게도 빨갱이로 대표되는 레드컴플렉스라는 한참 철지난 프레임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의 표현을 섞어가며 정치 모리배들과 가짜 언론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오남용하고 있는거죠~~
조금이라고 상식이 있고 정치이념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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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열망을 가진 공산주의를 현실 사회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공상이라고 많은 사람이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오류가 있다.
인간은 이런 해방의 열망을 결코 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다. 또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 결과만을 공산주의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다.
공산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향한 인간 투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영화로 더 알려진 소설인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주인공 이름에서부터 혁명에 맞선다. '지바고'의 뜻은 살아 있다는 형용사다.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주인공 이름이 "삶', '생' 인 것이다. '지바고'를 고유한 개인 명사로 다루는 것이 상징적이다.
삶은 무엇과 맞설까!
정치와 혁명에 맞선다!
이 소설은 혁명의 시대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대문자 역사(혁명)에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던가를 다루는 작품이다. 이러니 서방에서는 이 소설을 러시아 혁명을 왜곡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하기 좋았다. 왜나면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아주 묵직한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근데 반공소설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니 소설로는 한계가 있었다. 너무 분량이 길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1964년에 <닥터 지바고>가 데이비드 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다. 자금 출처 조사하면 99.99프로 CIA에서 지원했다는 말이 있다.
<닥터 지바고>가 다루는 시대적 배경은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 전야부터이다.
연도별로는 1903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다.
딱 반세기를 다룬다.
러시아에서는 1905년, 1917년이 중요한 시기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던 까닭이다.
이 닥터지바고는 혁명의 시기를 살아가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서평가 이현우의 쓴 책에 1964년 스폐인의 마드리드 교외에서 데이비드 린 감독이 <닥터 지바고>를 촬영할 때 참 아이러니 한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 사건을 잠시 옮기고자 한다.
1964년 스폐인에서 찍은 <닥터 지바고> 영화의 배경은 1905년에 일어난 1차 러시아혁명이었다. 1905년 혁명은 러시아 민중의 평화 시위를 러시아 황제 짜르가 유혈 진압하면서 터졌다. 이때 시위대가 가두 행진을 하며 부른 노래가 <인터내셔널가>였다. <인터내셔널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전 세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의 국가로 사용됐다.
데이비드 린이 이 장면을 스페인에서 찍으면서 엑스트라로 출연한 스페인의 국가주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네셔널가>를 불러야 했다.
깨어라, 노동자여 군대여!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 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영화의 제작진들은 스페인 엑스트라들 모두가 이 노래를 알고 게다가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부르는 데 놀랐다. 그 당시 프랑코 정권의 경찰들이 진짜 정치 시위를 하는 걸로 오해하고 개입할 정도였다. 그리고 때마침 촬영은 저녁 무렵에 이루어졌는데, 인근에 사는 주민들도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걸 듣고는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쟁취한 것으로 오해했다. 그들은 포도주병을 따고 길거리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곧 '정상적인' 현실로 복귀해야 했지만 그들은 잠시나마 환영같은, 하지만 반드시 환영만은 아닌 자유를 맛보았다.
이 자유야말로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것이고 어떤 억압에도 저항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저항하는 것일까?
아니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속에는 어떤 해방적 잠재력이 있는 것일까? 물론 인간 해방이다.
어떤 가난, 폭력, 압력에서도 나를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 해방을 꿈꾼다. '인간 해방' 이 무모한 그래서 유토피아적이라고 비웃음을 당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는 현실에 순응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그 시대 가장 억압 받는 자들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너희들의 안주보다도 우리들의 저항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중요한 것은 성취보다는 그것을 향한 인류 공동의 노력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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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hoon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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