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김파란 · 윤석열 정부에 대해 지지와 비판은 정파와 입장에 따라 당연히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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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 
윤석열 정부에 대해 지지와 비판은 정파와 입장에 따라 당연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민주공화국 시민이라면 정권(현재)이 과거를 통제하는 일은 단순한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을 '기억'하게 '기념'하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윤석열 정권이 하는 짓거리를 단순히 친일과 반일의 대립 구조로 비판하고 논쟁 구도를 만드는 것은 이 사태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지금 윤석열이 조선의 독립운동사까지 '빨갱이' 딱지를 붙여 과거에 개입하는 것은 친일과 반일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독립운동사 중에서 특정 인물과 사건은 배제하고 특정 인물과 사건은 기념하고 선호하는 것은 시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기억 기념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이를 통해 특정 시간은(권력의 구미에 맞는) 일반적인 연대기의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와 결합하는 시간이 되어 청사에 길이 남는 '역사적 시간'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런 권력의 과거를 통제해 현재를 왜곡하는 수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 기억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우익과 좌익, 남과 북의 대립 구조로는 지나간 역사 모두가 반쪽의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또 그런 이분법으로는 통일이라는 미래의 대변화를 감당하기도 힘들 것이다.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남북은 통일을 위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확대해야 하고 열린 시야에서 100년 전의 3.1 운동, 임시정부 그리고 해방 이후의 건국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제 정말 그럴 때도 되지 않았는가?



정옥경
아...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말..
갑갑하네요
이분법적 갈라치기 정치 세계대회 나가면 일등 할겁니디ㅡ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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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정옥경 예 선생님. 여당이든 야당이든 또 그 지자자들은 이 갈라치기 정치 외에 다른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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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et Song
독립운동가가 북한 출신이라고 배제하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국토 개념과도 상치되는 반국가적 매국적 행위입니다.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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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Violet Song
선생님 맞습니다. 지금의 논리라면
통일 되면 6.25 때 전사한 모든 군인들
모두를 국립묘지에서 다 파내야 하는거죠.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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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신기목
Violet Song 말을해도 헛쏘리 짖어댈겁니다.ㅋㅋㅋㅋ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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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규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요?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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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최선규 점점 더 퇴보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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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락
뒤늦게나마 고국땅에서 편히 쉬실려고하는 홍범도장군의 코털을 건드리는 못된 행실에 피가 역류합니다...
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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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은
공감 또 공감//

===
 
작작 좀 하자
빨갱이로 밀리니까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가 아니라 독립기념관으로 옮기자는 것인데, 좌빨들이 이념 전쟁으로 몬다고 말한다. 그래 좌빨이 니네들 논리의 전부겠지만, 그럼 해군사관학교의 거북선은 민속박물관으로 옮겨야 하나?
한국 사회는 이념이 아니라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독재자의 유훈통치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듯 하다. 지구상에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아직도 이런 취급을 받는 나리가 어디에 있으며,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틀에 맞춰 재단하고 취사선택하는 야만성을 이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자리에 있느냐 말이다.
역사적 인물을 빨갱이다 아니다,로 나눌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또 바로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수많은 사람들 목숨이 좌우됐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골목대장처럼 나서서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정말이지 많이 양보해 윤석열이 마음속으로 어떤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이분법적 사고로 국민들 분열을 조장하는 발언은 정치가나 관료 하물며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작업에는 다양한 정치적 이해가 개입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사회 지도자나 지식인이 달라야 하는 것은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믿음의 형성과정을 명백히 틀렸다고 단정 짓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즉 흑백을 나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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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과거청산

보수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우린 자주 들었다. 맞다. 보수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김누리 교수도 여러번 강의에서 강조했지만 김구가 꿈꾼 것이 보수적 유토피아다. 김구가 꿈꾼 보수의 꿈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했던 가치다. 그럼 이런 김구 선생이 중시했던 것이 뭘까?
바로 민족이다. 민족이라는 것은 보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다. 또 여기에 역사적 전통이 보수의 가치고 그 다음이 공동체다.
그러니 지금 윤석열이 외치는 모든 것은 보수와 거리가 멀다. 위에서도 말했던 보수의 가치를 한국에서 보수라고 자칭하는 인간들은 모두 부정한다. 아니 보수의 가치들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민족을 경시하고 무엇보다 역사를 두려워한다. 자신들의 뿌리를 누가 알까봐 너무 두려워해 역사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이들은 공동체 얘기만 나오면 "빨갱이"라고 막 공격한다. 이제 하다 하다 역사적 감정마저 공산세력의 반국가적 선동이라고 말하는 지경이니 공동체라는 것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보수가 어디 있을까?
이러니 한국에서 보수는 수구라는 말과 등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정치가들이 이 당, 저 당, 자신이 내세우는 신념과 관계 없이 집권당이라는 이유로, 또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당이라는 이유로 쉽게 야합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사실 너무 많아서 이젠 그런 야합이 한국 정치의 본질로 느껴진다. 또 언어적으로도 '통합'이라는 말로 순화되었다. 그런 정치가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사실 자신은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데 매우 정직한 고백이다. 한국에서 보수는 수구든 합리주의자든 신념 아닌 신념은 단지 자신의 기득권과 안락함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열단을 지위했던 김원봉 의사가 해방된 나라에 돌아와서 악질 일제 경찰 노덕술에게 잡혀가 나흘 취재를 당하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일제 경찰에게 고초를 당할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나? 너무 끔찍해서 현실감이 없는 일 아닌가?
또 2023년에 편히 잠든 홍범도를 깨워 "빨치산"이니 "공산주의"로 고초를 당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한국 사회는 대체로 세계에서 열한 번째 정도의 경제규모가 큰 나라가 되었다. 또 정치적으로 보면 시민의 힘으로 두 번의 정권을 끌어내렸다.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사회는 아직 대통령이 "빨갱이"를 외치고 있는 이 모순은 뭐냐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했고 정치 민주화도 이루었는데 이 사회는 왜 이 놈의 반공과 "빨갱이" 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이렇게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보면 진짜 수수께끼로 가득찬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윤석열은 보수와 법치를 외쳤다. 하지만 우리가 4.19에서 지금까지 이어온 민주주의는 법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수구)가 외치는 법과 질서는 이런 민주주의를 견제히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권력이 외치는 그 법이 다수의 국민을 견제하고 지나간 역사를 견제하고 같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를 견제하기 것이라면 그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를 물을 수밖에 없었고 그 지난한 세월이 한국 민주화의 과정이었다.
그럼 사회 발전의 균형을 위해 진보와 함께 어떤 반대편의 날개가 필요한가를 우린 이젠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현실뿐만 아니라 현실을 만든 과거마저 거대한 모순으로 빠지게 하는 단계에서 더 나은 현실을 가져오도록 과거를 반성하고 이런 현재에 대해 숙고하며 미래의 부작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과거에 터잡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반성과 성찰이 없다. 이건 그동안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이 두 세력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극복의 첫 단계가 바로 이 두 세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눈이다. 시민들의 비판적 눈을 상실하게 만들어(분단이라는 특수성이 이것을 지금까지 가능하게 했다) 자신의 기득권과 안락함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만이 전부인 보수주의자들의 득세는 사회의 균형이 아닌 정체와 퇴보로 이어진다. 그러니 싫든 좋든 보수는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우리가 꼭 넘어서야 하는 것은 청산의 문제다. 과거청산 특히 식민시대의 일본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문재인 정권이나 윤석열 정권의 친일이나 반일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청산은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희미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새롭게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잊혀지고 따라서 과거청산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내가 세계의 과거사 청산을 공부하고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사실은 우리는 기억이 팽창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페북에서도 볼 수 있지만 역사 연구와 기억의 보존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과거에 대한 사실 자체가 증기하고 있다. 이번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에서 국방부가 발표한 내용에 대한 기자들이 질문하는 과정은 기자회견이 아니라 군에 대한 역사 교육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 곧바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에 대한 청산작업이 영원히 없을 수는 없다. 게다가 박근혜 정권에서 보듯이 당대에 이루어진 청산 작업도 미완의 작업으로 남기 마련이고, 이 또한 훗날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는 시긴이 지나면서 당대에 몰랐던 역사적 맥락이 새로 발견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묻혔던 사건과 사실들이 발견되고 억눌렸던 기억이 되살아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제는 시대의 기억도 '집단기억'에서 '문화기억'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증언자들이 사라지면서 이들의 증언기억과 전수된 기억마저 줄어들고 문화적으로 형성된 기억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무수히 많은 기억 가운데 어떠한 기억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전수되며 정치와 역사교육에 이용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기억전쟁'에 돌입했다. 또 과거청산이 보여주는 또 다른 면모는 국제적 흐름이다. 때때로 과거청산이 국가간 또는 외교적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런 걸림돌도 일방적인 청산이 아닌 상호관계를 통해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독일의 강제노동자 보상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이제 과거청산에 국제적인 공동행동이 가능해졌으며 앞으로는 일국적인 아닌 국제적인 수준에 맞는 노력이 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과 일본의 과거청산도 지금은 서로에게 걸림돌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정책이 아닌 아래로부터 과거와의 직접적인 대화로 이루어지면 성숙한 시민사회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다양한 역사 연구, 억눌린 기억과 증언의 회복을 통한 지속적인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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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선

방문해주셔서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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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식민지 시대의 공산주의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 불과 7년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식민지 통치하에서 조선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을 제압한 일본은 모든 종류의 무기를 압수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집회를 금지하는 등 극도의 무단정치를 시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은 국내의 조선인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었던 반면, 동부 시베리아와 만주에 산재하는 많은 조선인 이주자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가운데는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동맹군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러시아 혁명의 중추인 볼셰비키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러시아인들에게는 최근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아픔을 격은 조선인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러시아 혁명은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혁명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사상 처음으로 붉은 깃발 아래 움직이는 한국 정치운동의 첫 출현이었다
이렇게 20세기 한국 역사는 러시아, 중국 혁명과 뗄 수 없다.
그 까닭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연히 일본의 현대사와도 뗄 수 없다. 20세기 한국 역사이지만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 - 해방 운동의 확장된 공간의 의미에서 러시아와 중국 혁명과도 한국 역사는 뗄 수 없는 것이다.
이 중층된 역사를 모르면 우리 독립운동사를 이해할 수 없다.
예컨대 21세기 국회에서 '김원봉'을 두고 사상논쟁을 하고, 이젠 하다 하다 홍범도 흉상 육사 철거 논란으로 시끄러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 다 과거를 그때 그때 권력의 입맛에 맞는 교훈만을 역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근대 100년을 돌이켜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강권침탈에 의한 타율적 근대화의 역정을 반제국주의 항쟁 속에서 함께 헤쳐나왔다. 이런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 공간의 맞물림은 한-중 뿐 아니라 한-러까지 이어진다. 이 고리를 모르고는 조선의 다양한 반제 독립 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통일 과정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없다.
특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출범한 이후 우리 독립 혁명가들은 소련과 중국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세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민족해방 투쟁에서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상대가 소련이었다. 그러니 소련의 원조와 간섭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의 연합전선 형성과 분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7년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고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민족해방운동'을 맑스주의 '틀' 내에서 대등한 '혁명'으로 끌어 올린다. 그런 까닭으로 레닌은 1917년 혁명을 하고 1918년 코민테른을 만들면서 곧바로 식민지 해방 혁명가들을 다 불러 모은다. 또 동방노력자대학이라는 학교를 모스크바에 세워 민족해방 혁명가들을 공산주의 사상가로 교육시키고 자금 지원도 하고 활동가로 보내서 당도 만들어 주고 군사 훈련도 시킨다.
사실상 20세기 전반에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민족해방 운동 특히 무장 혁명운동들은 거의 대부분 소련의 지원이 없었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식민지 지역의 모든 공산당들은 자생적으로 생긴 당이 인도외에는 없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을 대변하는 국민당 군대도 소련 공산당이 만들어 줬다.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던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 학교를 코민테른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국민당 군대는 다 소련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 돈으로 활동하고 소련군이 다 교육시켜 준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보면 중국 국민당과 미군은 나중이고 사실 거의 독립 운동의 전부를 소련의 지원에 의지했다.
이처럼 소련은 식민지 해방운동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 까닭은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쉐비키는 러시아 혁명이 세계혁명으로 발전해야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믿었던 서유럽 노동 운동하는 놈들이 혁명 한다고 소련 인민들의 피땀같은 돈만 받아 처먹고 혁명은 안했다. 이렇게 소련이 고립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향이 식민지 민족해방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서유럽 좌파라고 하는 놈들은 그 당시 자기들 세력 기반이 식민지 수탈에서 나오는 초과이윤에 물적 초대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깰려고 하지 않았다. 즉 노동 운동한다는 놈들이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아시아 - 아프리카 식민지 수탈을 인정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서유럽 극좌파하고 하는 사람 중에 아시아 - 아프리카 문제에 코멘트하는 사람은 아주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정말로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유럽인들이다.
이게 서유럽 좌파나 진보의 실체다.
근데 소련은 그 자체로는 상당히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가지게 되는 의미는 바로 저 유럽 중심주의를 깨고 맑스주의를 아시아 - 아프리카 식민지 지역 인민들의 해방 투쟁으로 확정 시킨 것이 소련 공산주의의가 갇는 의의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련(코민테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형성된 어떤 세계 질서 속에 여전히 있다.
흐루쇼프가 데당트를 얘기했을 때 서유럽 좌파들은 상당히 반겼다. 거의 대부분 찬성했지만 베트남 공산당 같은 곳에서는 난리가 났다. 동서 화해해서 전쟁의 위협을 없애자는 좋은 의도인데 왜 반대했겠나? 흐루쇼프가 유럽 제국주의와 화해 조건으로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군사지원을 일체 끊었다. 이게 데탕트의 양면이다.
서유럽쪽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아시아 식민지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 민족의 목숨이 달린 것이었다. 갑자기 지원이 끊어져버리면 유럽 제국주의에 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거 국제정세에서 강대국이 내세우는 명분들이 겉보기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러시아 혁명과 여기서 나온 코민테른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우리 독립운동사의 고난과 분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역사가 훌리오 발데온은 "그것이 성공의 역사이든 실패의 역사이든, 공정한 것이든 부정한 것이든 간에 과거를 아는 것은 컴플렉스나 양심의 가책 없이 현재를 대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 가운데 하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옳은 말이 아닌가?
현재 홍범도 흉상 철거 및 국회에서 벌어졌던 김원봉 사생논쟁은 사실 정말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멀지 않았던 과거의 시간들을 마치 선사시대 유물을 대하듯 말하고 취사선택하는 무지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식민지 시대 독립군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아니라 그들의 관심은 조선의 국권 회복에 있었으며, 대부분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은 미약했다. 다른 동아시아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극히 모호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혼돈과 불확실성이 이데올로기의 무대를 지배했던 당시 새롭게 공산주의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각기 다른 의미와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이해없이 흑과 백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이분법으로 그 시대를 재단하는 것은 너무 야만적인 폭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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