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2

'천진난만' 장기표의 죽음... "남들에게 잘난 체 말하고 내가 안 지키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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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 장기표의 죽음... "남들에게 잘난 체 말하고 내가 안 지키면 됩니까"
기자명 최보식 편집인
입력 2024.09.22

나는 평생 병원에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약을 안 먹고 살았어요

[최보식의언론=최보식 편집인]

조선일보 DB

담낭암 투병 중이던 장기표 선생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4년반 전인가 그는 총선(김해을)에 출마해 떨어진 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치로써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내 꿈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

장기표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두달 전쯤이다. 그가 자신의 SNS에 암 투병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며 신세진 사람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글을 올린 직후였다.

나중에 그의 영전 앞에 절을 하는 것보다 살아있을때 한번 더 만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몇 푼 안 되는 봉투를 마련해 교대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체중이 8kg 빠졌다고 했지만 원래 마른 체형이라 얼른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몸이 음식물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주문해준 아이스크림을 대롱으로 빨아먹으면서 "아, 이건 정말 맛있네"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유쾌했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 얘기를 나눴다. 그 중 이런 대화가 기억난다.

"나는 평생 병원에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약을 안 먹고 살았어요. 남들 다 먹는 비타민제도 먹은 적이 없어요. 한달 전쯤인가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들어왔는데 속이 꽉 막히고 그 뒤로 음식을 먹는 게 어려웠어요. 결국 거의 처음으로 동네병원에 갔는데 좀 이상하다고 해요. 집 가까운 상급병원에서 찍어봤는데 담낭암이라는 겁니다."

- 이런 경우 좋은 대학병원(소위 빅5)에 가서 '세컨드 오피니언'을 들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데서 진료를 받으려면 아마 몇 달이 걸릴 거요. 그리고 부탁을 해야 하는데, 내가 명색이 '특권반대운동'을 했는데 그럴 수 있습니까. 솔직히 병원비도 부담스러워요. 최 선생, 나는 말이요, 살만큼 살았어요. 남들에게 신세를 진 것빼고는 어떤 의미에서 후회없이 살았어요.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전혀 없어요."

-죽음에 대한 태도를 말로써는 할 수 있지만, 막상 본인에게 그 죽음이 닥치면 달라지지 않나요?

"나는 내 책에서도 죽음에 대한 태도를 쓴 적 있어요. 이 세상에 왔으니 돌아가는 거... 남들에게는 그렇게 잘난 체 말해놓고 내가 안 지키면 됩니까. 그건 사기지요."

-이제 바깥 활동은 멈추고 온전히 가족이나 자신을 위해 남은 시간을 쓰십시오.

"그럴 겁니다. 숲 속을 맨발로 걷고 뜸을 뜨는 방식을 택할 겁니다. 병원에서는 한두달 하지만 나는 1년 넘게 살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항암 치료를 받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지난 9월 1일 그에게서 '일산 국립암센터에 입원한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암의 지독한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조선일보 재직 시절인 2019년 6월, 2020년 4월 두차례 장기표를 인터뷰 했을때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에 관한 한 그 앞에서 명함을 내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1971년), 민청학련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사건(1977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1980년), 5·3인천사태(1986년), 중부지역당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1976년 서울 왕십리 중앙시장에 있는 다방에서 차(茶) 두 잔을 놓고 결혼했던 사람이다. 그가 쓴 책에는 '부부가 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오래도록 행복했던 시간으로 간직할 수 있을 만한 오붓한 추억거리를 만들어둬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결혼 41년 만에 처음 부부 동반으로 강원도에 2박 3일 여행 간 얘기를 적었다. 이를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조선읿보 DB

그와의 문답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대접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출소 후 동문 모임에 가니 내게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우리는 대학 캠퍼스와 친구가 있는 좋은 환경이어서 데모할 수 있었지,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하는 사람이 아무리 민주화 의지가 있어도 데모할 수 있었겠나. 당시 나를 취조한 수사관에 대해서도 '인간말종' '독재자 후예'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인생이 뒤바뀌었으면 나도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위해 일했을 것이다."

―민주화 보상금을 다 받았으면 몇 억원은 됐을 텐데 왜 신청을 안 했나?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 등은 다 실체가 있었고 당시 실정법을 위반했다. 정권이 바뀌어 재심 법정에서 해석을 달리해 무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행위는 오직 역사 평가에 맡기고 싶었다."

―재심 법정이 일종의 역사적 평가가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잘난 체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보상금을 받기 위한 재심(再審)이어서 탐탁지 않았다."

―그 시절에 희생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운동도 안 하고 수백억씩 해 처먹는 놈들도 있는데, 큰돈도 아니고 몇억 받는 걸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의무로 여겼고 또 입만 벌리면 나라와 민족 운운했지 않나. 그걸 돈으로 보상받으면 우리의 명예는 뭔가. 더욱이 보상금은 박정희나 전두환이 주는 돈도 아니고 국민이 낸 돈이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받지 말자'고 말한 적 있었나?

"혼자 잘난 척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입밖에 안 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시절 서울대 교수인 H씨가 교육부 장관이 되자 1980년대 해직 교수 60여명을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선정해 각 1억3000만원씩 80여억원을 나눠줬다. 광주와 직접 관련된 사람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1980년 그해가 아니라 1985년, 1986년에 해직된 교수도 있었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미 복직됐고 밀린 봉급을 2억~3억원씩 받았다. 높은 자리에도 많이 갔다. 그렇게 다 받아먹고 또 보상금을 주고받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민주화 운동에 부채 의식이 있어 말을 못 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나쁜 놈들'이라며 분노해 글을 썼다."


―장 선생은 재야(在野)에서는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정치권 진입을 시도한 뒤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0년 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게 시작이었다. 그 동지들은 현실 정치를 깨닫고 대부분 YS 진영으로 들어가 다음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 선생은 따라가지 않았는데.

"과거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을 읽고서 정보화 사회가 새로운 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독자적인 정치 이념을 만들었다. 기존 정당으로는 이를 구현할 수 없었다."

―선거 때마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출마했고 낙선했다. 이 때문에 '창당 전문가'로 조롱받았다. 창당 행적을 보면 같은 이상이나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 정당의 공천 탈락자들과 손잡거나 이념이 다른 신생 정당과 합당하는 식이었다. 그럴 바에는 기존 정당에 들어가는 게 맞지 않았나?

"당을 만들려면 그런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따라온 거지, 당의 코어(핵심)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기존 정당은 우리나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는 해법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병철 시인 촬영

그가 김해을 선거에 출마했을때 둘째 딸이 이런 내용의 지원 유세를 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일생 동안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도망 생활·고문을 당하고도 10억원가량 민주화보상금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 보상금은 일반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민주화운동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정치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신념과 원칙이 낯설지 모릅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무분별한 공공기관이 세금을 축낸다고 공공기관 이사장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딸 2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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