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6

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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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 화제의인물 / 열린마당

2014. 8. 25. 13:12

https://blog.naver.com/ddmpark4_st/220102861456



문학이 좋아 영문학을 시작했고 글이 쓰고 싶어 평론가의 길을 선택한 문학평론가 유종호. 심도 있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문학으로 이끌어내는가 하면, 정직한 눈으로 작품을 선별해 치밀한 독해와 분석을 통해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그를 만나보자.


문학평론가 유종호 인터뷰 영상




충청북도 진천 읍내로부터 십 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자랐어요. 근처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큰 채소밭이 있긴 했지만 작은 동네였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니었죠. 철도도 지나가지 않는 지역이었어요. 신기하게도 가끔 기적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라고 말씀하셔서 급히 빨랫줄에 널어둔 빨래를 걷었던 기억이 나요. 기적 소리가 들리는데 왜 빨래를 걷냐고요? 정지용의 <무서운 시계>라는 시에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 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라는 시구(詩句)가 있는데, ‘산모루 돌아가는 차’는 기차를 의미하고 ‘목이 쉬여’는 평소에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린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비가 오려나 보다 말씀하신 거였어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그런 식으로 문학 이야기를 해 주셨죠. 아마도 제 안에 있는 문학적 소양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사실 <무서운 시계>는 어려운 시인데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운 시를 읽으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일제 말기에는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학생들이나 혹은 젊은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시대였어요. 아주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쌀밥은커녕 설탕이나 엿 같은 것도 구경할 수가 없었어요. 저희 세대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에 충치를 앓았던 경험이 없을 겁니다. 이가 상할 만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서는 우리말 대신 일본말만 사용할 수 있었어요. 가끔 실수로 우리말을 하게 되면 선생님들께 야단을 맞았는데, 그때 일본인 교사보다는 한국인 교사들이 더 혼을 냈어요. 한국인 교사들이 그런 이유는 더 잘해야 한다는 의식도 강했고 그런 것을 묵인하다 걸리면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그런 거였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는 정말 최악이었어요. ‘지옥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요. 늦봄부터 솔뿌리를 캐러 산행을 했는데, 전쟁 말기에 일제가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송근유(松根油: 침엽수의 뿌리에서 얻는 기름)를 군용 대체 연료로 정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송진과 솔뿌리 채취를 강요했기 때문이었죠.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숙제로 송진 달린 솔가지를 일정량 내도록 했는데, 나중에는 수업까지 전폐하고 아침부터 산에 가서 솔뿌리를 캐게 했어요. 산야가 황폐해서 쉽게 솔뿌리를 구할 수 없어서 점점 깊은 산골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톱과 괭이 혹은 도끼를 준비하고 채취한 솔뿌리를 운반하기 위해 새끼줄로 멜빵을 해서 가마니를 지고 갔죠. 점심때까지 채취하는데 채취량을 검사해서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도시락을 못 먹게 했어요. 점심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군가를 재창하고 하산하는데 그때부터가 진짜 고역이었죠. 열 살에서 열서너 살 아이들에겐 가마니 무게도 수월치 않은 데다가 솔뿌리 때문에 얼마나 따가웠는지 몰라요. 새끼줄이 어깨에 배기는 고통이 만만치 않았는데 이를 악물고 그걸 참으며 십오 리 길을 걸어갔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도 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종호 평론가는 문학이 좋아서 문학을 시작했다. 미군 부대에서 힘겹게 일을 하면서 받은 돈으로 서정주 시인의 시집을 사기도 하고, 시를 습작하기도 했다.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막막함 속에서도 미지의 세계를 갈망했다. 유 평론가는 1995년 환갑이 지나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6·25 사변은 저에게 있어 피난의 기억이에요. 당시 충주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충주 근처 달천으로, 달천에서 다시 원주로 미군을 따라다니며 전전했죠. 국도를 꽉 메운 인파, 고갯길을 넘을 때 내리던 함박눈, 스물 댓 명이 한 방에 움츠리고 자다가 들었던 포성 소리. 저는 그 당시 문학 지망생이었는데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겪은 아픔이 큰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전쟁은 우리 모두의 꿈을 빼앗아 간 슬픈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이 그때는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치거나 죽는다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요. 지금도 그때 겪었던 불안이나 공포에서 완전히 헤어나질 못했어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상처 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피난 시절, 저는 미군 보급부대에서 일거리를 얻었는데 보급품을 화물 열차에서 하역하고 다시 ‘칸보이(convoy, 호송차량)’에 옮겨 싣는 노무자들을 관리하는 일이었어요. 다짜고짜 부대로 찾아가 어설픈 영어로 일거리 좀 달라고 말한 덕분에 얻은 일이었죠. 그때 그렇게 일을 하면서 사람은 먹어야 사는데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치욕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세상에는 사람을 능멸하고, 누르고, 무시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엉터리 영어를 조금 읊조려 통역 자리를 얻어내고 우쭐대는 대학생, 병 주고 약 주듯 웃으면서 뺨치는 반장, 담요 한 장과 알량한 임금을 넘겨주면서 못살게 구는 미군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도 그 과정에서 미군 장교, 한국인 통역, 다양한 부류의 노무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좋은 경험도 많이 했어요.

그때 미군 부대에서 받은 돈으로 서정주 시인의 시집을 큰마음 먹고 사기도 하고, 시를 습작하기도 했어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무슨 시를 끄적거릴 생각이 나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막막함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는 글이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전쟁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것도 있어요. 설레는 사춘기를 전쟁통에 보냈으니 ‘별을 그리는 부나비의 꿈’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이나, 평생 회복하지 못할 소년기의 상실 같은 것이죠. 그때에 비하면 요즘 청소년들은 얼마나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겠죠. 요즘은 6·25를 북침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전쟁을 감상적으로 여기는데 전쟁이 무언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그런 인식을 바로잡아 줄 만한 문학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문학이 좋아서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문학을 시작한 것도 문학을 제대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그 당시에는 대개 국문학을 한다고 하면 생계에 도움이 안되니 좋아하지 않았는데, 영문학이라고 하면 나름 괜찮은 학과라고 생각들 했어요. 그러니 제가 영문과를 택한 것은 부모님들께 일종의 속임수를 쓴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죠.

광복 직후 3년간 활발한 비평 활동을 했던 김동석(金東錫, 1913~?)이라는 평론가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을 어려서부터 좋아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영문과 출신이에요. 그분들처럼 글을 잘 쓰려면 영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특히 ‘문학을 하기 위해 영문학을 택했다’는 김동석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렇다고 외국 문학과 한국 문학을 별개로 인식한 것은 아니고, 외국 문학에서 무언가를 얻어서 한국 문학에 기여하자는 생각이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번역된 외국 문학 서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어를 공부해서 직접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영어 공부를 하면 모든 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막연하게 영문과에 들어간 것이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가 6·25전쟁 직후인 1953년이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기본적인 도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거든요. 대학생이 됐지만 강의실에서 영문학을 배우기보다는 당시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던 러시아 소설의 영어 번역본과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토마스 만(Thomas Mann) 등의 작품을 읽으며 혼자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나요.



글을 읽다 보니까 저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대학 시절부터 써왔던 평론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평론가가 되어있었죠. 또 옛날에는 평론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제가 젊을 때만 해도 청탁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나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붙잡고 있던 것은 외국 책이었어요. 영어교사가 본업이었고 비평은 부업이었다고 할 수 있죠. 다만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과 우리나라 말로 글을 쓰는 것이 전혀 다른 행위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저에게는 둘 다 문학이거든요. 영문학을 하고 외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에 대한 더 많은 이해가 생겼고, 그것을 우리나라 말로 적용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였죠. 그러니 커다란 괴리감이나 모순을 느낀 적이 없어요. 경제학을 가르치면서 문학 평론을 한다면 다를 수 있겠지만요.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심사 위원으로 참석한 유종호 평론가. 앞줄 왼쪽 첫 번째에 앉아 있다. 그는 글을 읽다 보니까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 때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평론가가 되었다. 당시에는 평론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원고 청탁도 많았고 많은 글을 썼다.

옛날부터 비평은 문학 장르 중에서 독자가 가장 적은 편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비평뿐 아니라 문학 독자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죠. 문학 전반이 독자를 잃고 있으니, 비평은 더욱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고요. 시청각 매체나 전자 위주로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책 문화가 범세계적으로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이기에 단순히 문학만의 문제, 비평만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어요.

다만 비평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데,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이론혁명의 영향이 커요. 그 당시 문학 이론이 융성했는데 그렇게 이론 쪽으로 기울다 보니 독자가 점점 없어진 거예요. 혁명의 영향도 있고요. 또 우리나라의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거기서도 문제를 찾을 수 있죠. 대학에 기생해서 겨우 살아가고 있잖아요. 학부 학생들이나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학생들을 상대로 말이죠.

비평에는 시비를 거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비판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해설로만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설과 덕담이 되어 비평의 고유성을 스스로 파괴한 것도 비평의 위기를 야기한 하나의 원인이라 볼 수 있죠.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거라고 봅니다. 현실적으로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러나 문학만이 지니고 있는 매력과 저력이 있으니까 다른 시청각 매체와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해요. 지금 독자들을 상대해서라도 명맥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소설은 사람들의 이야기나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일종의 서사이고, 시는 개인의 정감이나 내면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같은 문학이라고 해도 영역이 다른 것이죠. 그런데 대개 소설 같은 경우는 독자들이 많아요. 근대문학 하면 곧 소설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죠. 우리의 경우 아직도 시인들이 많고 시집도 많이 나가지만 서양에서는 시를 읽는 사람들이 극소수예요. 그나마 소설 때문에 문학이 명맥을 유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매체와 비교할 때, 소설이 다룰 수 있는 서사는 영화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은데 시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없어요. 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나 기능은 오직 시를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거든요. 그러니 저에게 문학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야기에는 거짓말이 있지만 노래 속에는 거짓말이 없다’는 옛말이 있어요. 시는 노래에 속하죠. 진정한 시에는 거짓이 없어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공허한 정치적 수사와 문학성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시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사회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와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의 수사학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은 시민적 자질에 속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노벨 문학상에 대한 유 평론가의 입장은 아주 단순하다. 세계에서 인정받으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 없이 좋은 작품을 쓰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 번역을 잘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은 어떻게든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저는 한국 문학이 세계에서 인정받으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쪽에서 읽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좋은 작품이라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니까요. 영화와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문학이 부진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일고 있는 쏠림 현상 때문이기도 해요. 쏠림 현상이란 한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말하죠.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문과가 인기가 많았어요. 그리고 문과대학 교수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상당히 높다는 통계도 나왔었죠. 그런데 이게 IMF를 한번 겪으면서 인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지금은 문과대학이 가장 인기가 없어요.

또 하나는 좋은 문학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겠죠. 진지하면서 감동적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대작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릇이 큰 문학이 나와야 많은 이들이 모여들 텐데 문단에서는 요즘 인터넷 소설이 큰 화제잖아요. 많은 작가들이 참여해 장편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많은 독자를 갖게 되고 수입도 괜찮다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미디어는 문학이 아닌 메시지가 아닐까요? 아쉬울 따름이죠.



자신의 작품은 좋은데 번역이 시원치가 않아서 독자가 없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모든 주장이 그렇듯이 이런 주장도 반은 옳고 반은 틀린 겁니다. 작품이 뛰어나게 좋다면 번역이 설사 미흡하다 하더라도 독자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거기에 번역까지 좋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예를 들면 일본의 소설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라는 훌륭한 영어 번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노벨상을 탈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걸 번역의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같은 훌륭한 번역자를 만난 것도 좋은 작가였기에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어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직접 번역자를 찾아가서 “내 작품을 번역해주세요”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니까요. 번역을 하기 이전에 좋은 작품을 먼저 쓰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요.




2001년 은관문화훈장 수상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지관스님, 유종호 평론가, 신경림 시인이 앉아 있다. 유 평론가는 우리의 현실이 모든 것을 경영학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것, 그리고 즉각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만 선택해서 총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유로 인문학을 멀리 하는 세태를 경계했다.

요즘 인문학 붐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사실이에요. 인문학이 워낙 위기에 처하다 보니, 인문학에 관계된 교수나 당사자들이 모여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나 운동을 벌이고 있어서 그런 말들이 도는 것 같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인문학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선 대접 자체를 못 받고 있죠. 문과대학 졸업생들이 취직할 자리가 없어요. 그러니 점점 위축될 수밖에요. 사회가 점점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만 경영학적 사고로 판단하고 있어요.

그러나 인문학을 홀대해도 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인데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할 수가 있겠어요. 인간 본성의 탐구나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젊을 때는 자기 분수를 잘 몰라요. 스스로를 가능성의 덩어리인 것처럼 여기고 남보다 뛰어난 존재라 착각하죠. 게다가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더군다나 60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이란 말이에요. 저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 성숙이라고 봐요.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성숙하지 못하는 거죠.

고대 그리스의 개념 중에 휴브리스(Hubris)란 용어가 있습니다. 보통 오만이라고 번역을 해요. 거만한 것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휴브리스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을 뜻하죠. 엄청 재수가 좋은 것도 휴브리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재수가 좋으면 비참한 결론을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100퍼센트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하는 분들이 가장 성숙이 더딘 분들이 아닌가 싶어요. 세상을 한 방에 변화시켜서 유토피아(Utopia)를 만들겠다는 생각부터가 오만이잖아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했다면 여태까지 왜 못했을까요? 휴브리스(Hubris)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세대 간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발생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예부터 경로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였어요. 노인들을 무조건 존경해야 했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런 노인 공경사상은 대개 집약적인 농업 중심 사회에서 일어났어요. 농사를 짓는 사회에서는 늘 같은 일을 하게 돼요. 봄이 되면 씨 뿌리고 여름에는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제초 작업하고 가을되면 열매를 거두면서 말이죠. 오래 살다 보면 농사에도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고, 가뭄이나 장마가 일어날 때를 예측하는 노인들에게 젊은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현대 사회는 옛날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둔해지고 있어요. 사회는 발전했는데 노인들은 자동차 운전도 서툴고 전자 기계도 잘 다루지 못하니 손자가 할아버지를 가르쳐드려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할아버지를 존중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는 경로사상이라는 게 점점 사라져서 양자가 완전히 대립하는 구도에 놓인 겁니다.

저는 노인들이 과도하게 젊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에요. 젊은 사람은 미성숙한 부분이 많거든요. 제 스스로 20대를 생각해 보더라도 미숙하게 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얼마나 유치했는지 몰라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그건 누구한테 배울 수도 없거든요.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죠. 그래서 연륜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 평론가가 생각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문제는 불필요한 절망을 앞당겨서 한다는 것이다. 지금 취직할 가망성이 없는 것은 너무 좋은 직장만 찾아가려 하지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유 평론가는 자신이 어렵게 살아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1950년대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곳에서 젊음을 보냈죠. 그때 가장 유행했던 말은 “엽전이 별 수 있나?”였어요. 그 말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가서 살고 있던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번진 말이었죠. 일본은 잘 사는데 자기들은 거기서 고생만 많이 하고 멸시 받고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다들 취직이 어려웠고 실업자들이 갈 곳이 없어서 당구장에 몰려가기도 했어요. 기차를 타면 6•25때 다친 상이군경들이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기도 했죠. 돈이 없어서 거절하면 “야,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누구 덕택인 줄 아냐? 내가 팔 한 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하며 그렇게 떼를 쓰는 거예요. 그럼 안 살 수가 없어요. 정말 아주 어려운 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살아 남았잖아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우리나라는 많이 발전했어요. 그러니 젊은이들도 미리부터 겁내서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찾았는데 지금은 어떻겠어요? 반드시 찾으면 길이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좌절만 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면 너무 편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굶어본 적도 없고 밤을 새워 고민도 안 해봤으니 말이죠. 물론 그게 다 젊은이들 탓은 아니에요. 인생의 선배들이 교육을 잘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부모들조차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부모의 책임, 앞선 세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불필요한 절망을 앞당겨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취직할 가망성이 없는 것은 너무 좋은 직장만 찾아가려고 하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으면 되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호강을 하고 살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안 해요. 저도 어렵게 살아 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죠.



일할 사람을 찾는 곳은 한정되어 있는데 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결국은 경쟁을 통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거죠.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블라이스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라는 소설을 보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협동적인 사회를 만들어서 일정한 구역을 정해놓고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이상적인 사회가 나와요. 처음에는 문제없이 잘 지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삐걱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살펴보니 평화로웠던 그곳에 이성 문제가 등장해요. 경쟁 없이 협력하면서 살자고 했는데 이성이 등장하니 남성간의 경쟁 관계가 성립된 거죠. 그리고 서로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이 오래가다 보면 누가 더 일을 했네, 안 했네 하며 비교하다가 실패하고 말아요. 그러니 근본적으로 경쟁이 없는 그런 환경을 만들 수는 없는 거죠. 다만 경쟁을 좀 완화시켜서 인간적인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은 필요해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미국 원주민 중에 경쟁을 극도로 죄악시하며 기피하는 인디언 족의 이야기예요. 1970년대에 신문에도 나왔던 유명한 사건인데요. 인디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어느 인디언 학생을 유급시키는 일이 발생했어요.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동급생들이 같이 유급을 하겠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는 그 친구를 혼자 놔두고 자신들만 진급한다는 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죠. 이 마을에는 또 다른 전통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번씩 마을에서 경기를 해서 달리기도 하고 높이뛰기도 하는데 지난해에 우승한 사람은 참여를 못하게 하는 것이었어요. 한번 1등 했으면 됐지 또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죠. 세계에 그런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잖아요.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이 몰락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경쟁을 멀리한 태도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경쟁 구도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완화시켜서 약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그런 사회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제 자신이 고민이 많고 방황하며 갈팡질팡 했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다만 제가 늘 염두에 둔 것은 사람은 건전한 양식과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거였어요. 또 학생이면 본분이 공부하는 것이니,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소박하고 기본적인 것만 이야기했었죠. 과도하게 욕심을 내서 학생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가야겠다는 지도자적 포부 같은 것은 처음부터 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이죠.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모두가 수재이며 뛰어난 존재더군요. 그때 제 오만을 깨달았습니다. 저 스스로 건방지게 굴고 잘난 척 했었는데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잘났고 뛰어나며 개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갑자기 불현듯 깨달은 건 아니에요. 아이들과 마주하며 가르치다 보면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아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학생도 많고요. 그런 걸 몇 번 겪고 나니까 '아, 내가 꿈에서 깨어나야겠다. 모두가 훌륭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문학인이면서 오랜 동안 강단에 선 인문학자인 유 평론가는 현대를 전체적으로 문학의 위기, 교양의 위기, 대학의 위기, 고급문화 전반의 위기 상황이라고 본다. 그는 이것이 과거 인쇄술 중심의 책 문화에서 인터넷 전자 문화로 옮아가는 문명의 전환기에서 발생하는 범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젊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몰라요. 젊음을 누리고 있을 때 시간과 정력을 어느 쪽에 바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일생이 좌우됩니다. 그러니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걸 아낄 줄 알아야 해요.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해야 하고요. 거기에 맞게 방향을 정해서 시간을 잘 아끼라는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저도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천하는 것이 어려워요. 제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권유해 보지만,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자기 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죠.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대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에요.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거죠. 옛날 중국의 시나 문학을 보면 여자를 그리워하는 사랑 노래는 드물지만 친구를 그리는 노래나 시는 무척 많아요. 그만큼 우정을 중요시한 겁니다. 정말 마음에 맞는 친구,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친구, 배울 것이 많이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것이 자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친구를 사귀어 많은 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친구라고 동년배만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어의 Friend는 동년배를 뛰어넘어 제자이자 친구입니다. 선생님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이성친구도 친구이며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친구인 거죠.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어요. 친구를 사귀어 보면 다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음을 알 수 있지요. 장점이 많은 사람들이 많죠. 남에게 절대 험담 안 하는 친구,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는 친구처럼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요. 그런 친구들 곁에 있으면 배우는 게 많거든요. 지금도 저는 다양한 친구를 만나서 스승으로 삼고 싶어요.



특별히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말하라면,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한눈팔지 않고 자기의 길을 꾸준히 걸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이 소개유종호

[출처] 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작성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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