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조병래 기자, 임경구 기자, 전홍기혜 기자
2002.03.08 16:23:00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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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세계여성의 날인 8일을 맞아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 및 교육의 선구자로 얘기되는 여성 5명의 친일 행적을 공개한다.
지난달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이 발표한 '친일파 708명' 명단에 포함된 이들 여성계 인사의 친일 행적도 민감한 내용이다.
이들 여성들은 교육과 여성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아 왔으며 이들의 행적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이들이 설립한 학교와 여성지원단체가 활동 중이다.
방응모ㆍ김성수가 친일파에 포함되자 이들이 설립한 조선ㆍ동아일보가 논쟁을 야기했듯이 여성계 일부에서도 이들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운동 및 근대교육에 기여한 공로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 모임이 작성한 여성계 '친일파' 인사의 친일행적을 언론계에 이어 두 번째로 전재한다. 편집자 주
김활란(金活蘭)의 주요 경역 및 친일경력
-1899년 인천생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23년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등과 함께 YMCA를 창립
-1924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에서 교육, 철학 등을 전공하고 졸업
-1924년 9월 보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25년 6월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학감에 취임
-1927년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의 창립 때 기독교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음
-1928년 7월 근우회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의로 활동을 중단
-1930년 도미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1937년 작위를 받은 귀족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의 이념 하에 일본기청에 가맹키로 하였는데, 이때 경성실행위원이다.(매일신보 1938. 6. 9)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1년 9월 16일에 전조선에 6개반을 동원,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라는 연재로 강연반을 편성하였을 때 제5반으로 평양, 진남포, 안주, 신의주, 선천, 정주에서 강연활동
-1941년 10월 22일 현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1년 12월 2일을 기하여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 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하였는데 김활란은 충청북도에 파견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오후 2시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여성의 무장'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2년 2월 15일 부민회관에서 열린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195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 총회의 한국 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
-1963년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수상
-1965~1970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함
-1970년 사망 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됨
김활란의 친일행적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교육,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 김활란은 한국 근대여성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 1호이며 일제 하에서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그리고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직원을 역임하였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 공보처장,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 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 필리핀으로부터 막사이사이 공익부문상, 미국으로부터 종교지도자에게 주는 다락방상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 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말기에는 당시 활동한 어느 여성보다도 자주 친일단체에 이름을 내놓았고, 많은 친일 논설을 발표했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응하는 행동을 취했다.
<민족주의자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참으로 중대한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발각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중한 형벌과 희생을 부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밀독립운동단체에서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와 교회여성단체로부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로 보내는 독립운동자금을 중앙본부에 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엄중한 지령 하에 움직였다.'
이 일로 하여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하고 그는 다시 이화학당 교사직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이화학당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를 이끌고 평양, 신의주 등 북부지방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2년 5월경 김활란은 유각경, 김필례와 함께 YWCA를 창립하고, 7월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유학 중에는 YWCA 관련 국제회의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하자는 현지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 1926년 말부터 민족, 사회 양 여성운동 진영간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 활발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기독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김활란도 이러한 움직임을 멀리 할 수 없었다.
1927년 5월 27일 마침내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가 탄생했다. 근우회 창립 초, 김활란은 기독교계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후 근우회는 1928년 7월의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거 진출했다.
김활란은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직후 임의로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주력할 곳은 근우회가 아니라 학교, 교회, YWCA 등 기독교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학병, 징병을 권유>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 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서 부인궐기촉구강연, 결전부인대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세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 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김활란은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 지도자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종별 건명 또는 연재>
- 1941년 7월 5일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 1941년 9월 19일 '부인 생활정의 강연' : '전조선 6반을 파견'
- 1941년 11월 26일 '국민총력중앙이사회석 담' : 담화
- 1943년 5월 5일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 1943년 6월 27일 '남자에게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1943년 8월 7일 '적 격멸에 일로 매진' : 매일신보 논문
- 1944년 6월 27일 '감격과 중한 책임'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275~283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인명록, 268, 269, 279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47, 48p, 친일파 군상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108~109p)
황신덕(黃信德)의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89년 평양 생
-숭의여학교졸업
-1921년 일본와세다대학 수료
-1926년 귀국 후 시대일보, 중외일보기자
-1927년 근우회 창립회원으로서 활동
-1934~40년 동아일보 신가정부 기자
-1938년 5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을 한때 '비상시국과 부인보국'이란 연재로 강연
-1940년 경성가정여숙을 창립, 해방 후에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
-1941년 9월 15일 내지 1주일 예정으로 여류 지명인 총동원 하는 전위 여성 격려대를 전선 각지로 파견하여 강연회 혹은 좌담회, 일반부인층과 여학교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여성의 갈길'로 강연 또는 좌담을 한때 청주, 충주, 영동지역 연사로 활동
-1941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2월 20일 2시 동양극장에서 시국부인대강연회 연사
-1941년 12월 22일 6시 영등포연예관에서 열린 시국부인 대강연회 연사
-1942년 1월 5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1948년 과도정부 입법위원에 선임 됨
-1952년 여성문제 연구회 창립회장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창설이사장
-1961년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장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음
-1970년 3.1절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 여성협회 회원으로 활동
-1983년 사망
황신덕의 친일행적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
<친일성향이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1970년 어느 해 황신덕 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때 절 정신대로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 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라고 증언하고 있다. (뉴스메이커 19992.6.5)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탁월한 여성교육자이다.
'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황신덕', '여성문제의 해결과 그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서 온 황신덕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동시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대한 민족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등 이것이 황신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강사로 활약>
그에 대한 이러한 공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그의 경력과 족적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친일성향이 강한 교장선생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 둔 이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논설은 겉으로는 절약정신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품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제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착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 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에서 동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 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글에서는 "해군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 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 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다녔다.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직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9월에 결성된 '국민총력 조선연맹' 후생부 위원직을 맡았으며,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 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섰다.
<근우회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여성운동계가 망라하여 근우회를 창립하였을 때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았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였다.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1940년 10월 37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9~294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68~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9, 54p)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484p)
고황경(高凰京)의 주요 경력 및 친일경력
-1909년 서울 생
-1928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영문과 졸업
-1931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법학부 졸업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작됐을 때 중요한 핵심적 역할 담당
-1937년 8월 6일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결성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YWCA)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 이념 하에 일본 YWCA에 가맹키로 했는데 김활란과 함께 경성부 실행위원(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 발표)
-1938년 9월 12일부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 13도 순회 강연시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됐을 때 참사가 됨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 대연설회'를 마친 후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가두판매했는데 그는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서대문에서 채권을 판매
-1941년 10월 17일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용산 인보관에서 열렸을 때 연사로 강연
-1941년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全鮮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제 2반으로 충청도 지방(청주, 대전, 충주, 공주, 강경)으로 속해 강연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을 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 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5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1946~48년 미군정에서 보건후생부 부녀국장
-1949~5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활동
-1960~63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58~86년 대한어머니회 회장
-1961~84년 서울여자대학 학장
-1963~67년 걸스카우트 단장
-1988년 학술원 종신회원
-1989년 서울여대 명예총장
-2000년 사망
고황경의 친일행적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 협조>
-고황경은 일제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했으며 일본에서는 영문과와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 협조하는 행적으로 남기고 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는 사회교화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했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동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 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했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구성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했으며, 그는 전남북을 맡아 강연했다.
1937년 1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됐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을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했다. 여기에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했다.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채회'의 간사를 맡게 됐다. 1937년 8월 16일 조선중양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동시에 애국금채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 송영, 총후가정의 위문 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을 정했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했다.
1939년 9월 10일 '동양지광' 주최의 '내선일체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 '채권가두유격대'에 서대문대로 편성되어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 미군정하에서는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4-288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 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3p, 친일파 군상 : 391, 443, 445p)
박인덕(朴仁德)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96년 평남 용강 생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동시에 이화학당 기하 체육 음악 교사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19년 11월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1922년 배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 잡지 강연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21~26년 배화여고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 음악을 가르침
-1926년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레안대학에 유학해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를 받음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등과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발기하여 활동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해 농촌계몽운동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 설립 일에 검사정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 : 원 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실천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8월 30일 '나서라 증산 건설(절대적인 국가 요청)'이라는 요지로 담화문 발표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연제로 강연
-1941년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강연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러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종로대에 나섰다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로 선출됨
-1941년 12월 18일 동성상고에서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강연
-1941년 12월 20일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논문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강연회 때 사회를 맡아 '우리 1천5백만 여성은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의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등의 내용으로 개회사를 함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15일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동아여명과 반도여성'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80년 사망
박인덕의 친일 행적
<<황국신민이 된 여성계몽가>>
<여성계몽가로서 화려한 활동>
-박인덕은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참여 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1월 또한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부터 1926년 9월까지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학교 외국인 교사의 협조로 1926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 대학에서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도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1931년 귀국 후 그는 교사 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과 더불어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농촌 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감리교 농촌 부녀지도자 수양소의 일을 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그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지원을 받아 덕화여숙을 설립하여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 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떤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하는 각종 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때부터 국내의 민족주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 부설 청화여숙을 본 따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박인덕이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녹기연맹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키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 야마사와 및 나가사키, 구라시게 보도부장 등이 축사를 하였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 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 같은 것이었다.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 김동환, 신태악,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또한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鍾),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가 그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세'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 미 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 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 미가 침범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 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으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단체를 동원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새 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단체나 각종 토론회 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하였다.
<해방 후 반탁 반공 연사로 활약>
-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 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 강연에 열중하여 자서전적인 책 2권과 또 한권의 책을 썼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95~302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3~35,39,47p, 친일파 군상 : 366, 441, 445, 447, 451, 466p)
-친일변절자 33인, 무크 친일문제연구 제2집, 편집위원 : 김삼운 임해봉 김승태 김순석 정운현 (92~100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59~60p)
송금선(宋今璇)의 주요 경력 및 친일사항
-1905년 경기도 출생
-동경여자고보(東京女子高普)
-덕성여자실업학교장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1941년 9월 1일 '전위여성 격려대'라는 제목으로 천안, 대전, 공주 각지로 순회강연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으로 나섰는데 송금선은 정교원(鄭僑源), 이돈화(李敦化), 김사연(金思演) 등과 함께 경성역대로 나섰음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1941년 12월 9일 '최저국민생활은?'이라는 담화를 경성일보에 발표
-1941년 9월 전위여성격려대가 전선(全鮮) 각지로 파견되어 부인층과 여학교 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이 갈 길'을 주제로 강연회, 혹은 좌담회를 했는데, 송금선은 천안, 대전, 공주에 파견됨
-1942년 1월 7일 저명인사들의 방송에서 '생활전에도 이기자'라는 제목으로 방송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송금선의 친일 행적
<채권가두유격대>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회원 70여명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 유격으로 나섰다. 70여명을 시내 11개 장소로 배치시켜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추태를 연출했는데 송금선은 정교원, 이돈화, 박기효(朴基孝), 김사연, 김사연의 부녀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경성 역대로 나서서 가두 판매했다.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행각>
-1939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는 이달과 내달 중에 각 도로 강사를 파견하여 국민정신 선양에 관한 순회강연을 열기로 됐다. 강연할 연제는 시국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 총동원 운동의 본위, 백억저축생활 쇄신에 관한 것들이며 강사들은 남자 18명, 여자 8명으로 조선 각처로 강연을 다니리라고 한다. 여자부는 송금선, 조기홍(趙圻烘), 이숙종, 손정규(孫貞圭), 홍승원, 유각경(兪珏卿), 차사백(車士伯), 임숙재(任淑宰)이다.
<부인궐기촉구 강연>
-1941년 9월 19일 총독부 학무국 연성과내에 있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는 12월 2일을 기해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해 전국 인식과 징병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송금선은 경기도 강사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4, 130p, 친일파 군상 : 391, 437, 450, 454p)
조병래 기자, 임경구 기자, 전홍기혜 기자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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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세계여성의 날인 8일을 맞아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 및 교육의 선구자로 얘기되는 여성 5명의 친일 행적을 공개한다.
지난달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이 발표한 '친일파 708명' 명단에 포함된 이들 여성계 인사의 친일 행적도 민감한 내용이다.
이들 여성들은 교육과 여성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아 왔으며 이들의 행적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이들이 설립한 학교와 여성지원단체가 활동 중이다.
방응모ㆍ김성수가 친일파에 포함되자 이들이 설립한 조선ㆍ동아일보가 논쟁을 야기했듯이 여성계 일부에서도 이들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운동 및 근대교육에 기여한 공로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 모임이 작성한 여성계 '친일파' 인사의 친일행적을 언론계에 이어 두 번째로 전재한다. 편집자 주
김활란(金活蘭)의 주요 경역 및 친일경력
-1899년 인천생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23년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등과 함께 YMCA를 창립
-1924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에서 교육, 철학 등을 전공하고 졸업
-1924년 9월 보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25년 6월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학감에 취임
-1927년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의 창립 때 기독교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음
-1928년 7월 근우회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의로 활동을 중단
-1930년 도미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1937년 작위를 받은 귀족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의 이념 하에 일본기청에 가맹키로 하였는데, 이때 경성실행위원이다.(매일신보 1938. 6. 9)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1년 9월 16일에 전조선에 6개반을 동원,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라는 연재로 강연반을 편성하였을 때 제5반으로 평양, 진남포, 안주, 신의주, 선천, 정주에서 강연활동
-1941년 10월 22일 현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1년 12월 2일을 기하여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 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하였는데 김활란은 충청북도에 파견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오후 2시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여성의 무장'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2년 2월 15일 부민회관에서 열린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195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 총회의 한국 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
-1963년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수상
-1965~1970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함
-1970년 사망 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됨
김활란의 친일행적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교육,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 김활란은 한국 근대여성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 1호이며 일제 하에서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그리고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직원을 역임하였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 공보처장,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 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 필리핀으로부터 막사이사이 공익부문상, 미국으로부터 종교지도자에게 주는 다락방상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 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말기에는 당시 활동한 어느 여성보다도 자주 친일단체에 이름을 내놓았고, 많은 친일 논설을 발표했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응하는 행동을 취했다.
<민족주의자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참으로 중대한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발각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중한 형벌과 희생을 부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밀독립운동단체에서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와 교회여성단체로부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로 보내는 독립운동자금을 중앙본부에 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엄중한 지령 하에 움직였다.'
이 일로 하여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하고 그는 다시 이화학당 교사직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이화학당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를 이끌고 평양, 신의주 등 북부지방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2년 5월경 김활란은 유각경, 김필례와 함께 YWCA를 창립하고, 7월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유학 중에는 YWCA 관련 국제회의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하자는 현지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 1926년 말부터 민족, 사회 양 여성운동 진영간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 활발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기독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김활란도 이러한 움직임을 멀리 할 수 없었다.
1927년 5월 27일 마침내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가 탄생했다. 근우회 창립 초, 김활란은 기독교계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후 근우회는 1928년 7월의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거 진출했다.
김활란은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직후 임의로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주력할 곳은 근우회가 아니라 학교, 교회, YWCA 등 기독교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학병, 징병을 권유>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 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서 부인궐기촉구강연, 결전부인대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세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 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김활란은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 지도자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종별 건명 또는 연재>
- 1941년 7월 5일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 1941년 9월 19일 '부인 생활정의 강연' : '전조선 6반을 파견'
- 1941년 11월 26일 '국민총력중앙이사회석 담' : 담화
- 1943년 5월 5일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 1943년 6월 27일 '남자에게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1943년 8월 7일 '적 격멸에 일로 매진' : 매일신보 논문
- 1944년 6월 27일 '감격과 중한 책임'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275~283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인명록, 268, 269, 279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47, 48p, 친일파 군상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108~109p)
황신덕(黃信德)의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89년 평양 생
-숭의여학교졸업
-1921년 일본와세다대학 수료
-1926년 귀국 후 시대일보, 중외일보기자
-1927년 근우회 창립회원으로서 활동
-1934~40년 동아일보 신가정부 기자
-1938년 5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을 한때 '비상시국과 부인보국'이란 연재로 강연
-1940년 경성가정여숙을 창립, 해방 후에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
-1941년 9월 15일 내지 1주일 예정으로 여류 지명인 총동원 하는 전위 여성 격려대를 전선 각지로 파견하여 강연회 혹은 좌담회, 일반부인층과 여학교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여성의 갈길'로 강연 또는 좌담을 한때 청주, 충주, 영동지역 연사로 활동
-1941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2월 20일 2시 동양극장에서 시국부인대강연회 연사
-1941년 12월 22일 6시 영등포연예관에서 열린 시국부인 대강연회 연사
-1942년 1월 5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1948년 과도정부 입법위원에 선임 됨
-1952년 여성문제 연구회 창립회장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창설이사장
-1961년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장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음
-1970년 3.1절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 여성협회 회원으로 활동
-1983년 사망
황신덕의 친일행적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
<친일성향이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1970년 어느 해 황신덕 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때 절 정신대로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 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라고 증언하고 있다. (뉴스메이커 19992.6.5)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탁월한 여성교육자이다.
'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황신덕', '여성문제의 해결과 그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서 온 황신덕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동시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대한 민족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등 이것이 황신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강사로 활약>
그에 대한 이러한 공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그의 경력과 족적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친일성향이 강한 교장선생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 둔 이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논설은 겉으로는 절약정신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품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제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착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 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에서 동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 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글에서는 "해군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 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 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다녔다.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직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9월에 결성된 '국민총력 조선연맹' 후생부 위원직을 맡았으며,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 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섰다.
<근우회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여성운동계가 망라하여 근우회를 창립하였을 때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았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였다.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1940년 10월 37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9~294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68~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9, 54p)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484p)
고황경(高凰京)의 주요 경력 및 친일경력
-1909년 서울 생
-1928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영문과 졸업
-1931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법학부 졸업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작됐을 때 중요한 핵심적 역할 담당
-1937년 8월 6일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결성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YWCA)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 이념 하에 일본 YWCA에 가맹키로 했는데 김활란과 함께 경성부 실행위원(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 발표)
-1938년 9월 12일부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 13도 순회 강연시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됐을 때 참사가 됨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 대연설회'를 마친 후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가두판매했는데 그는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서대문에서 채권을 판매
-1941년 10월 17일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용산 인보관에서 열렸을 때 연사로 강연
-1941년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全鮮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제 2반으로 충청도 지방(청주, 대전, 충주, 공주, 강경)으로 속해 강연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을 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 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5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1946~48년 미군정에서 보건후생부 부녀국장
-1949~5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활동
-1960~63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58~86년 대한어머니회 회장
-1961~84년 서울여자대학 학장
-1963~67년 걸스카우트 단장
-1988년 학술원 종신회원
-1989년 서울여대 명예총장
-2000년 사망
고황경의 친일행적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 협조>
-고황경은 일제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했으며 일본에서는 영문과와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 협조하는 행적으로 남기고 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는 사회교화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했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동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 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했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구성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했으며, 그는 전남북을 맡아 강연했다.
1937년 1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됐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을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했다. 여기에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했다.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채회'의 간사를 맡게 됐다. 1937년 8월 16일 조선중양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동시에 애국금채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 송영, 총후가정의 위문 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을 정했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했다.
1939년 9월 10일 '동양지광' 주최의 '내선일체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 '채권가두유격대'에 서대문대로 편성되어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 미군정하에서는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4-288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 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3p, 친일파 군상 : 391, 443, 445p)
박인덕(朴仁德)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96년 평남 용강 생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동시에 이화학당 기하 체육 음악 교사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19년 11월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1922년 배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 잡지 강연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21~26년 배화여고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 음악을 가르침
-1926년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레안대학에 유학해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를 받음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등과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발기하여 활동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해 농촌계몽운동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 설립 일에 검사정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 : 원 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실천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8월 30일 '나서라 증산 건설(절대적인 국가 요청)'이라는 요지로 담화문 발표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연제로 강연
-1941년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강연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러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종로대에 나섰다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로 선출됨
-1941년 12월 18일 동성상고에서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강연
-1941년 12월 20일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논문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강연회 때 사회를 맡아 '우리 1천5백만 여성은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의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등의 내용으로 개회사를 함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15일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동아여명과 반도여성'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80년 사망
박인덕의 친일 행적
<<황국신민이 된 여성계몽가>>
<여성계몽가로서 화려한 활동>
-박인덕은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참여 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1월 또한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부터 1926년 9월까지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학교 외국인 교사의 협조로 1926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 대학에서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도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1931년 귀국 후 그는 교사 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과 더불어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농촌 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감리교 농촌 부녀지도자 수양소의 일을 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그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지원을 받아 덕화여숙을 설립하여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 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떤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하는 각종 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때부터 국내의 민족주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 부설 청화여숙을 본 따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박인덕이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녹기연맹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키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 야마사와 및 나가사키, 구라시게 보도부장 등이 축사를 하였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 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 같은 것이었다.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 김동환, 신태악,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또한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鍾),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가 그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세'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 미 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 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 미가 침범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 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으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단체를 동원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새 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단체나 각종 토론회 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하였다.
<해방 후 반탁 반공 연사로 활약>
-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 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 강연에 열중하여 자서전적인 책 2권과 또 한권의 책을 썼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95~302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3~35,39,47p, 친일파 군상 : 366, 441, 445, 447, 451, 466p)
-친일변절자 33인, 무크 친일문제연구 제2집, 편집위원 : 김삼운 임해봉 김승태 김순석 정운현 (92~100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59~60p)
송금선(宋今璇)의 주요 경력 및 친일사항
-1905년 경기도 출생
-동경여자고보(東京女子高普)
-덕성여자실업학교장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1941년 9월 1일 '전위여성 격려대'라는 제목으로 천안, 대전, 공주 각지로 순회강연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으로 나섰는데 송금선은 정교원(鄭僑源), 이돈화(李敦化), 김사연(金思演) 등과 함께 경성역대로 나섰음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1941년 12월 9일 '최저국민생활은?'이라는 담화를 경성일보에 발표
-1941년 9월 전위여성격려대가 전선(全鮮) 각지로 파견되어 부인층과 여학교 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이 갈 길'을 주제로 강연회, 혹은 좌담회를 했는데, 송금선은 천안, 대전, 공주에 파견됨
-1942년 1월 7일 저명인사들의 방송에서 '생활전에도 이기자'라는 제목으로 방송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송금선의 친일 행적
<채권가두유격대>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회원 70여명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 유격으로 나섰다. 70여명을 시내 11개 장소로 배치시켜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추태를 연출했는데 송금선은 정교원, 이돈화, 박기효(朴基孝), 김사연, 김사연의 부녀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경성 역대로 나서서 가두 판매했다.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행각>
-1939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는 이달과 내달 중에 각 도로 강사를 파견하여 국민정신 선양에 관한 순회강연을 열기로 됐다. 강연할 연제는 시국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 총동원 운동의 본위, 백억저축생활 쇄신에 관한 것들이며 강사들은 남자 18명, 여자 8명으로 조선 각처로 강연을 다니리라고 한다. 여자부는 송금선, 조기홍(趙圻烘), 이숙종, 손정규(孫貞圭), 홍승원, 유각경(兪珏卿), 차사백(車士伯), 임숙재(任淑宰)이다.
<부인궐기촉구 강연>
-1941년 9월 19일 총독부 학무국 연성과내에 있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는 12월 2일을 기해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해 전국 인식과 징병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송금선은 경기도 강사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4, 130p, 친일파 군상 : 391, 437, 450, 454p)
조병래 기자, 임경구 기자, 전홍기혜 기자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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