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7

[김학성]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김학성]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10회포럼)





[ 제10회 한반도평화포럼 자료집]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일시 : 2008년 8월 29일(금) 13:00-18:30
장소 :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원문은 10회 포럼자료집에 있습니다.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김학성 교수(충남대학교 평화안보대학원)







1. 문제제기


우리 정부의 과거 대북 정책에서 북한 인권문제는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냉전시기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인권에 대한 개념 차이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 인권문제가 엄연히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갖추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통해 인권 개선에 진전이 이루어졌으나, 1990년대 초 탈냉전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남북당국간 대화의 확대 및 심화에 주력하는 가운데 북한 인권문제에까지 주목할 여력이 없었다.


과거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를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을 모색하는 단계에서 북한인권문제는 더더욱 외면 받았다. 인권문제를 가지고 북한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의 추진에서 보듯이 과거 남한의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을 외쳤던 민주세력 조차도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햇볕정책이 남북관계의 급격한 개선이라는 성과를 거둔 것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북한정권유지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며 북한주민의 인권개선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했다. 햇볕정책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독일의 ‘신동방정책’ 역시 초창기에 부분적으로 유사한 비판을 받았다. 신동방정책을 즐겨 인용했으며, 특히 정책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독일 사례를 방어논리로 제시하곤 했던 햇볕정책론자들은 사전에 그러한 비판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지는 못했다.


신동방정책은 독일의 분단을 자유지향적 토대위에 평화적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러한 목표가 성취되지 못하는 동안에는 독일인들이 분단의 결과를 인내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분단의 결과를 인내한다는 것은 양 주민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동독주민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동독인권 개선을 의미했다. 신동방정책을 주도했던 브란트 총리는 “동독정권을 인정함으로써 결국은 동독주민에 대한 정권적 인권탄압을 방조할 수밖에 없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명분과 실리의 양면에서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에 주력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1970년 동서독 정상(총리)회담이 처음으로 두 차례 연이어 개최되었을 때, 브란트 총리는 동독인권 개선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처럼 명분에 그치지 않고 내독관계 발전과정에서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면서 동서독 주민의 왕래와 같은 인도적 사안의 개선은 물론이고 동독주민의 인권 개선을 ‘조용히’ 요구했고, 제한적이나마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권이 보수적 기민당(CDU)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과 관계개선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햇볕정책도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통한 통일여건 조성을 목표로 삼았으며, 지난 10년간 남북관계 개선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주민의 굶주림 해소에 일정부분 기여했고, 또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와 제한적이나마 남북주민간 상호방문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신동방정책과 유사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인권에 관해 정부가 어떠한 공개적인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유엔인권위원회의 북한 인권개선 요구와 관련한 표결에 기권하는 등의 행위는 과거 브란트 정부의 독일정책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또한 북한주민의 인권 상황은 두말할 것도 없고,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도 별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이는 국내 보수세력의 반대 논리를 강화시킴으로써 햇볕정책의 추진력을 반감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듯 햇볕정책과 신동방정책을 단순 비교하여 햇볕정책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단순 비교평가는 마치 햇볕정책론자들이 서독 사례의 외형만을 편의적으로 인용하여 정책적 정당성을 찾으려했던 것과 유사한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독일과 한반도는 분단구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국내외적 환경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나 정책적 시사점 모색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독일 사례는 우리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수는 있겠지만, 형식적인 모방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독일사례는 독일분단과 통일의 국내외적 환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제로 비로소 창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북한 인권문제는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 인권개선에 대한 새 정부의 단호한 의지 표명은 이전의 정부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새로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북핵문제의 선해결과 연계된 일종의 대북 무시(benign neglect)정책이 추진되면서 남북 당국간 대화가 중단되고 대북 인도적 지원마저 북한이 거부하는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북한 인권문제는 물론이고 인도적 사안을 실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햇볕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상대의 강점이 자신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 내부의 견해 차이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북한 인권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면, 판단기준에 대한 합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귀결로서 구체적 정책의 내용과 범위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점에서 동독인권 개선의 명분과 실리 양면을 추구했던 독일 사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독일 사례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판단기준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대북 인권정책의 대상, 내용, 범위 등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정책은 사회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독의 정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독 인권문제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실천노력을 포괄적이나마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동독인권문제에 대한 서독사회의 담론과 실천


2.1. 서독사회의 담론구조 변화: 인권과 분단문제의 연계


서독의 인권의식은 태생적으로 반민족주의적 배경을 가졌다. 서독은 패전국으로서 나찌(Nazi)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독사회와 정부는 인권문제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치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맥락에서 인권이 특별하게 부각되었다. 2차세계대전후 제정된 서독 헌법(기본법) 제1조가 ‘인간존엄의 보호’를 규정한 인권조항이라는 사실은 인권에 관한 서독의 그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비해 분단문제는 인권의식과 상이한 출발점을 가졌다. 비록 패전이 원인이기도 했으나, 분단은 냉전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제로 분단초기 서독사회는 동독지역의 인권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한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동독의 인권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순수한 인권의식을 (탈나찌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민족문제와 뒤섞음으로써 오염시킬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서진영 대결구도가 안정적 질서로 자리잡는 가운데 서독사회에서는 정치적 맥락에서 동독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대되었다.


분단초기 서독 국민들에게 동독은 기본적으로 민족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차원과 소련점령의 종식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큰 주목의 대상이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냉전의 국제정세 속에서 통일보다 소련과 동독의 공산화 시도를 저지하는 것과 서독만이라도 주권을 찾는 것이 더욱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소련과 동독의 통일공세를 묵살하고 미국 주도의 서유럽 진영에 철저하게 통합됨으로써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던 초대총리 아데나워(K. Adenauer)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서방정책’(Westpolitik)에 우선권을 두었다. 서독정부 수립 당시 동독을 포함하여 전쟁이전 독일영토였던 지역(동유럽지역)에서 쫓겨난 실향민이 서독 전인구의 약 1/5 정도를 차지1)했던 상황에서 반공주의의 확산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한 1960년대 중반까지 서독사회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민주공화국’(DDR)이라는 공식명칭보다 ‘소련점령지역’(SBZ)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동독에 대한 서독의 인식태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서독의 인권의식은 탈나찌화를 기반으로 서방정책 추진과정에서 확립되고 성장했다. 서방정책은 애초에 현실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2) 서방정책의 일환으로서 아데나워는 국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애썼다. 자유민주주의는 비단 반공주의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나찌즘을 배태했던 독일의 전통적인 절대관료국가(Obrigkeitsstaat)적 정치문화를 청산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1차 세계대전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실험되기도 했지만, 독일은 전통적 정치문화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나찌정권의 탄생을 경험해야 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직후 대다수 서독의 지식인들도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적 시민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을 (독일인의 손을 벗어나 있는) 통일문제보다 더욱 급한 과제로 여겼다.3) 이에 따라 서독에서는 초기부터 국가주도의 민주주의 정치교육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1950년대 민주적 시민문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서독사회는 동독지역의 인권문제를 당시 반공와 동의어로 간주되던 자유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향을 띠었다. 4대 전승국의 점령시기부터 이어진 동독주민의 탈출, 1953년 6월 동독노동자 봉기, 1950년대 말 베를린 봉쇄 등 일련의 인권억압사태에 대해 서독은 궁극적인 해결책을 소련으로부터 동독을 돌려받는 것에서 찾았다. 실제로 1955년 서독의 나토(NATO) 가입과 재무장 허용을 통해 서독의 주권이 회복되자 아데나워 총리는 이전과 달리 통일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통일문제는 소련과 해결되어야 할 사안으로 간주한 서독정부는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서방의 지원을 받아 소련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압박함으로써 소련의 양보를 얻어내는 소위 ‘강자의 정책’(Politik der Stärke)을 추진했다.4)


그러나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의 구축과 이에 대해 미국 및 서방 동맹국들이 보여준 온건한 대응은 ‘강자의 정책’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 핵전쟁의 위험성을 인식한 서방 동맹국들은 아데나워의 기대와 달리 유럽지역의 현상유지를 바탕으로 하는 긴장완화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분단 및 통일에 대한 서독사회의 인식적 일대전환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독일인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여태껏 정치계와 학계에 국한되었던 ‘독일정책’(분단과 통일에 관한 정책)에 대한 논의가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적 논의의 중심 주제는 1960년 철학자 야스퍼스(K. Jaspers)가 제기한 ‘선자유, 후통일’ 논제로 모아졌다. 야스퍼스는 당시 국내외적 상황에서 통일은 환상이며, 정치가들은 단지 선거를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단 통일요구를 접어두고 먼저 서독에서부터 인권의 현실적 기반인 ‘진정한 자유’를 확립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자결권을 조용하고 단호하게 주장해 나감으로써 동독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토대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주장했다.5) 야스퍼스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더 이상 반공과 동의어에 머물지 않고 서구 시민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포괄하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분단 인식은 당시 서독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 및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분단 상황을 인내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여론이 서독사회에 형성되기 시작했다.6) 이와 더불어 아데나워의 정책노선과 다른 새로운 독일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새로운 독일정책은 동독정권으로 하여금 동독내부의 자유화를 용인하도록 만드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7) 당시 베를린 시장이었던 사민당(SPD)의 브란트(W. Brandt)가 자신의 참모였던 에곤 바(E. Bahr)를 시켜 발표했던 소위 ‘접근을 통한 변화’는 그러한 배경아래 지지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1966년 서독의 양대 정당, 즉 보수의 기민련(CDU)과 진보의 사민당이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실제로 독일정책의 변화가 모색되었고, 1969년 사민당의 집권을 계기로 동서독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브란트 정부는 대결보다 긴장완화, 그리고 통일보다 동독의 자유화에 초점을 맞춘 신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을 추진했으며,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과 1973년 동서독의 UN 동시가입을 통해 동독을 국가로 사실상 인정했다. 이에 대해 보수야당은 새로운 독일정책이 동독의 자유화에 결코 기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조약의 위헌소청을 제기했다. 동독정권의 인정은 곧 동독주민의 자유와 인권 억압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브란트에게도 딜레마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동서독이 대화하지 않는 한, 서독이 실제로 동독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진작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전혀 가질 수 없는 현실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란트는, 동서독 관계 정상화가 체제안정에 대한 동독정권의 자신감 확대는 물론이고 향후 내독관계의 제도적 발전을 통해 동독주민들의 자유와 인권 억압을 점진적으로 완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새로운 독일정책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세력 간 갈등이 동독주민의 자유와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모아지면서 동독 인권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성과가 도출될 수 있었다. 첫째, 브란트 정부는 기본조약 협상과정에서 UN 헌장의 정신에 입각한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결과적으로 기본조약 제2조에 ‘인권의 보호’를 명문화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본조약의 실천을 위한 후속 협상에서 서독정부는 동독주민들의 자유와 인권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둘째, 기본조약의 위헌소청에 대해 연방헌법재판소는 인권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즉 재판소는 연방정부의 기본법에 입각한 정치적 행위에 대해 위헌여부를 판결할 수 없기 때문에 소청을 기각하지만, 기본조약의 해석과 실천은 철저하게 서독 기본법에 적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특히 당시 동서독 국경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독의 행태 ― 예컨대 장벽과 철조망 구축, 지뢰 및 중화기 설치, 탈출자에 대한 총격명령 ― 는 인권을 중시하는 기본법과 합치하지 않음을 지적했다.8) 셋째, 보수세력은 동독이 가입한 국제인권협정들을 근거로 대동독 인권개선 요구를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이상 동독정권은 국제여론에 민감했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인권개선 요구를 모른 척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70년대 발전했던 내독관계의 속도와 비교하면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은 분명히 더디기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 서독사회의 보수와 진보세력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때때로 논쟁이 야기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보수세력은 서독의 기본법을 잣대로 동독의 자유와 인권문제를 바라보았으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동독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사민당도 긴장완화를 위해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서독의 기준으로 동독의 자유와 인권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대신에 인권문제에 대한 상호 대화를 지속함으로써 동독의 자유화와 인권개선의 길을 점진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9) 이처럼 보수와 진보세력 사이에 인권문제에 대한 원론적 시각 차이는 크지 않았으며, 다만 방법론의 측면에서 입장 차이가 두드러졌다.


보수와 진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으로 동독 인권개선의 가시적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내독관계의 유지·확대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이는 1982년 보수정당이 다시 정권을 잡은 후에도 스스로 비판했던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적 근간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입증된다. 결국 1970년대 동독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세력 사이에 두드러졌던 방법론적 차이조차도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저히 좁혀지게 되었다.


2.2. 서독 인권단체의 활동과 구조적 한계


동독 인권문제로 간주될 수 있는 구체적 사안들과 관련하여 이미 4대 전승국의 점령통치시기부터 서독 민간단체들은 주목하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노력이 있었다. 특히 동독지역주민의 탈출지원, 탈출자의 정착지원, 동독정권의 인권침해 및 정치적 박해에 대한 법률적 구조 모색 등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순수한 의미에서 인권단체라기보다 종교단체, 반공단체, 그리고 법조인의 자발적 모임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주로 1950년대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동독탈출자나 이주자에 대한 정부차원의 제도가 점진적으로 완비되면서 이들의 역할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냉전시기 서독의 인권단체 활동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는 회원 수, 예산 등 규모면에서 미국을 능가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10) 서독의 대표적 인권단체로는 ‘독일인권연맹’(Deutsche Liga für Menschenrechte),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독일지부’, ‘인도주의 연합’(Humanistische Union) 등을 들 수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인도주의 연합‘은 1961년 창립되어 정치이념을 초월한 국제인권운동을 주도해오고 있다. 이와 달리 ’독일인권연맹‘은 패전직후부터 점령지역의 곳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인권단체였다. 사실 이 단체의 기원은 1차세계대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초기부터 연맹은 정치이념을 초월한 순수 인권문제를 다루었고 반나찌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나찌의 집권직후 지도부는 나찌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독일인권연맹의 재건과정은 패전과 점령통치의 혼돈 속에서 혼선을 겪었다. 전쟁 종식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맹의 지도부가 귀국을 거부하는 가운데 지역의 곳곳에서 연맹의 구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연맹 재건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과거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새로운 인물들이 연맹재건에 뛰어들면서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논쟁과 분열은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1)


첫째 논쟁은 연맹의 활동 노선에 관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원래 연맹의 노선은 특정 정파 지지나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세계정부를 지향했으며, 단지 인권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인권에 관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던 데 반해, 재정이 소요되는 인도적 지원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인도적 지원이나 자선사업은 재정지원자에 대해 연맹이 종속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종전직후 기존 연맹과 아무런 인연도 없으면서 가장 활발하게 재건운동을 주도했던 디에쯔(H. Dietz)란 인물은 민족주의 및 반공주의적 지향성과 자선활동을 통해 연맹의 세력을 넓히는 전략을 추진했다. 즉 동유럽으로부터 추방된 독일인의 귀환권 요구, 소련으로부터 독일의 전쟁포로 석방 촉구, 추방 독일인과 전쟁포로를 위한 자선사업을 실시했다. 심지어 재정확충을 위한 사업까지 추진했고, 청소년들의 펜팔을 통한 후원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디에쯔는 1947년경 나찌 동조자였다는 의혹과 연맹활동을 자신의 이익 추구의 방편으로 활용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지도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둘째, 동독지역의 인권문제에 대한 연맹의 입장을 둘러싼 견해 차이였다. 연맹의 재건과정은 지역 곳곳의 지부가 먼저 결성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정의 거부로 지부결성의 어려움을 겪는 우여곡절 끝에 1948년 서베를린 지역에 지부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서독 정부 수립이후 연맹은 서독을 중심으로 보편적 인권선언과 유엔선언을 기반으로 인권활동을 전개했으며, 우선적으로 과거 나찌의 범죄를 객관적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그렇지만 분단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1949년 11월 전국 연맹재건 총회에서 동독지역의 인권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을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상당수의 회원들은 동독지역의 집단수용소, 강제노역 등을 나찌즘과 비교했으며, 동독지역의 정치범을 나찌의 정치적 희생자와 동일시했다. 이에 반해 국제주의자들은 서방진영에도 인권문제가 전혀 없지 않기 때문에 소련진영에 대한 비판이 쉽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물론 진정한 평화 및 인권운동은 서방에서 가능하다는 인식은 공유했다. 이들은 과거청산없이 반공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제는 소수의 독일인만이 그러한 자격을 갖추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동독지역의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 방식 논쟁은 새로운 회원의 확보를 위한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연맹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셋째, 1961년 마침내 연맹을 분열에 이르게 했던 동독 탈출자 지원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다. 연맹은 1949년 동독탈출자 담당부서를 마련했다. 1953년 동독 노동자봉기를 전후하여 엄청난 수의 탈출자가 서베를린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담당부서 책임자였던 괴쯔 부부(Afred & Annelisese Goetze)는 탈출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숙소를 건립하고, 서베를린 시당국, 노조, 상공회의소 등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과거 나찌 친위대와 연관이 있고, 동독 정보국(Stasi)과 프랑스 첩보기관에 연루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공금횡령의 의혹을 받았다. 이들은 연맹본부의 감사를 받았지만, 일부 연맹지도부의 비호아래 면죄부를 받았다. 그럼에도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오히려 연맹지도부의 분열이 발생했다. 더욱이 1959년에는 연맹에 위장 침투하여 고위직에 올랐던 동독 정보국의 요원이 검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연맹은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뮌헨을 기반으로 하는 파벌은 독일연맹의 이름을 고수하며 반공노선과 민족노선을 고집했으나, 베를린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파벌은 국제연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을 초월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나찌의 만행에 대한 반성과 탈나찌 교육에 집중했다. 독일연맹은 1960년대 국제적 긴장완화와 내독관계의 변화 분위기 속에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국제연맹도 그 세력이 확대되지는 않았으나 대중의 도덕적 지지를 받았다. 이후 국제연맹은 정치인, 지식인, 대학사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과거반성과 국제인권에 대한 주안점을 두었다.


독일 인권연맹이 분열되던 시점에 탄생한 국제사면위원회와 인도주의 연합은 정치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권단체였다. 인도주의 연합은 냉전적 대결구도를 비난하고 다원주의와 열린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맥락에서 인도주의 연합은 동독의 인권침해에 대해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국제적 차원의 인권문제에 집중했다. 이에 비해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인권침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처음 주목한 것은 동독의 정치범과 이들에 대한 고문이었으며, 1970년대에는 이에 더하여 서독이주 신청자와 공화국탈출자, 그리고 군복무거부자의 구금 및 억압과 같은 인권침해였다.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은 통상 인권상황에 관한 적절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토대로 인권침해 사안을 채택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60년대 동독의 폐쇄성 탓에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의 인권상황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 시기 국제사면위원회가 채택했던 사안은 매우 미미했으며, 총 10여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대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고 동독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내부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자 연 평균 100여건의 사안이 채택되었다. 런던의 국제사무국 통계에 따르면, 1989년 동독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총 2,107건의 사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런던 사무국의 통계가 때때로 불규칙적으로 집계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0에서 3000건 정도가 실제로 채택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12)


이처럼 적지 않은 건수에도 불구하고 동독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먼저 정보 확보 과정에서부터 매우 조심스러웠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거나 사실입증이 어려운 사안일 경우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면, 서독의 잘쯔기터 중앙기록보관소13)의 자료는 거의 참고하지 않았으며, 특히 고문과 관련된 사안의 경우, 과장되거나 허위 보고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동서독 국경에서의 총격 사건에 대해서도 국제사면위원회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철조망에는 이에 대한 경고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궁극적으로 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훼손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동독의 감옥을 방문한다든지 정부대표를 방문하여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항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따라서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지도부에 대해 외부로부터 수많은 편지와 항의서신으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고 인권침해 상태를 문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평균적으로 약 30여개 국가별 지부(section)가 동독의 인권침해를 관리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동독 정부에 배달된 항의편지는 매우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과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동독정권은 국제적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인권침해 공개를 두려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한계 외에 더욱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자국활동’(WOOC; Work on own country) 원칙에 기인한다. 즉 지부는 자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과 서독을 하나의 나라로 간주했기 때문에 서독 지부는 동독의 정치범의 인권개선을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웠다. 서독 지부는 그 원칙을 매우 창의적으로 해석하려 했으나 어떠한 시도도 본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러한 탓에 동독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은 동서독 어디에서도 널리 알려지기 어려웠다. 심지어 동독에서 국제사면위원회는 친동독정권 조직으로 오해받기도 했다.14) 어쨌든 국제사면위원회의 서독 지부는 동독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여러 요구를 받았지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부여한 구조적 제약 탓에 적절한 대응을 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웠다.


이처럼 두 개의 대표적인 인권단체는 동독 인권상황을 결코 도외시 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찌의 과오 청산을 비롯한 국제적 인권개선 노력은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 국제적 신뢰 확보는 물론이고 동독정권을 압박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정치이념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이들 인권단체의 노선은 서독의 인권의식 수준을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그것의 진정성을 인정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3. 동독 인권침해에 관한 서독의 판단기준과 내용


냉전시기 동서 진영의 체제대결 속에서 인권문제는 정치적 공방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양 진영의 인권개념 차이 탓에 1948년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에야 국제인권협약이 채택되고 1976년 비로소 발효될 수 있었다. 그것도 양 진영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여 두 개의 협약 ― 즉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ICESR: A규약)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ICCPR: B규약) ― 이 공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동서진영 간의 이러한 갈등구조는 동서독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동독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는 개인의 자유 내지 인간의 존엄성 자체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사회적 기본권을 더욱 중시했다. 즉 공산당 일당독재, 사회적 소유권, 중앙계획 경제구조 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수용할 때만이 개인의 자유나 인간존엄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시민권 및 정치권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던 동독정권수립 초기를 거쳐 1960년대 체제 공고화 시기 헌법개정(1968년)을 통하여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집회, 결사, 의사표현은 언제든지 규제될 수 있으며, 인권침해로 간주되지 않았다. 동독정권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1970년대 초반 이래로 다양한 법규정과 체제이념의 차이를 내세워 자국 인권실태에 대한 서방의 비난을 수세적으로 방어했다. 즉 국제인권협약에 허용된 유보조건들을 내세우거나, 내정불간섭 원칙을 들어 서독의 인권침해 비난을 회피하고자 했다.15) 또한 동독에서는 사회적 기본권이 실현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부족한 개인적 권리 보장의 문제는 점차적으로 개선될 것이므로 완벽성에 기초한 서방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6) 나아가 서독의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역으로 서독의 실업문제를 겨냥한 ‘노동의 권리’, 또는 부의 불균등 분배에 따른 평등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비판을 희석시키려고 했다.17)


그러나 동독은 정부수립 초기 바이마르 헌법 정신을 지향한다고 표방했으며, 실제로 동독헌법 제19조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과 보장’을 규정했다. 더구나 1973년 서독보다 먼저 국제인권협약에 가입했으며, 1975년 ‘유럽안보 및 협력회의’(CSCE)의 창설을 의미하는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의정서의 ‘바구니 3’에 명기된 인권 및 거주·이전 등의 기본적 자유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서방 및 서독이 강조하는 시민적 기본권을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 아래 서독 정부와 사회는 단순히 개념차이만을 부각시킬 수 있는 논쟁을 최소화하는 한편, 동독정권에 대한 도덕적 압력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잣대보다는 주로 유엔의 국제인권협약이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같은 국제규범을 기준으로 동독의 인권문제를 제기했다.18) 이러한 입장에서 동독의 대표적 인권억압 사례를 기본권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1.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제한


국제인권협약의 시민·정치권 협약(이하 B규약) 제18조에는 국가안보 및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종교와 세계관에 따라 의사표현 및 행동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동독정권은 항상 이를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교회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주권, 헌법 및 질서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동독정권은 종교단체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을 자제했다. 그 대신 개인적인 신앙고백, 또는 교회의 보호아래 반체제활동을 벌이는 인사들을 대상으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 구체적 예로서 개신교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는 데 불이익을 당했으며, 또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교사로 임용되기 어려웠다.


동독지역은 개신교의 발생지로서 오랜 종교적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동독정권은 교회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제적 여론 때문에 교회를 박해하는 일은 어려웠다. 따라서 동독정권과 교회는 어느 정도 협조와 타협을 통해 상호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제한적이나마 자율성을 확보한 교회는 평화운동과 환경보호운동 단체활동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체제 저항적 인사들 개개인에 대한 동독정권의 인권침해를 모두 보호해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3.2.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


B규약 제19조 2항은 정보의 자유로운 취득과 전파, 그리고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동독헌법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제21조 1항)했다. 그러나 이는 헌법의 기본원칙, 즉 당의 영도적 역할, 개인과 국가이익의 일치, 동독과 소련의 동맹관계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국제인권협약에 규정된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했다.


3.2.1. 형법 및 여타 법적 제재


1980년대 초 국제사면위원회의 동독 인권실태 보고에 따르면,19) 매년 약 200명씩 발생하는 정치범들 중 약 50%가량이 체제비판 발언으로 수감되었다.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동독의 법적 조치들을 살펴보면, 동서독간 평화운동의 연대를 위한 집회개최에 대해서 형법의 ‘국가반역적 정보·자료 유출’ 또는 ‘불법적 외부인사 접촉’ 조항을, 반체제 지식인들의 체제비판에 대해서는 형법의 ‘간첩죄’를,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의 새로운 분파를 형성하거나 다른 이념을 유포한 경우에는 ‘반국가적 선동죄’를 각각 적용했다.


3.2.2. 의사표현 자유의 방해 수단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인한 피해는 특히 작가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다. 동독정권은 체제비판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사전검열을 통해 작품의 출판을 금지했다. 그러나 국제여론의 압력 탓에 반체제 내지 저항 작가들에 대한 철저한 제재는 어려웠다. 특히 동독작가들의 작품이 서독에서 출판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3.3. 법규정 및 법적 보호 미비


B규약 제14조는 재판의 공개, 변호인의 선임, 그리고 변호업무에 대한 피고인의 알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동기에 의한 구금과 형사 처벌이 빈번했던 동독에서는 그와 같은 권리가 준수되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정치범의 경우, 심문과정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의 접견이 금지되거나 방해받았으며, 또 비밀경찰의 심문조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피의자는 서명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기소문이나 법적 근거들이 피고인에게 문서로 전달되지 않은 채, 단지 구두로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되더라도 공개재판은 형식적이거나, 아니면 선발된 당간부 또는 비밀경찰 요원들만이 방청객으로 허용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3.4. 고문, 비인간적 가혹행위 및 형벌의 자행


B규약 제7조는 고문, 비인간적인 가혹행위 및 처벌을 무조건 금지하고 있다. 동독은 유엔인권위원회에 대한 보고서에서 가혹행위나 고문이 동독의 법적, 도덕적 기준에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서 결코 행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동독 행형시설 내의 육체적 고문 및 가혹행위는 일상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았으며, 국제적 기준에서 보더라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가끔 가혹행위에 대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행형시설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에 서방의 기준에서는 수감생활 자체가 인권침해의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는 것이다.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주로 판결이전의 체포 및 구금단계에서 발생했다. 특히 정치범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경우에 따라 가족과 친지들을 구속하겠다는 위협 속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3.5. 동서독간 자유왕래 및 거주이전의 자유 제한


B규약 제12조는 국경을 넘는 거주이전과 자유왕래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다만 국가안보, 공공질서 유지, 국민건강, 공공윤리를 위해서는 이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 유보조건을 달고 있다. 동독은 198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정기보고서에서 거주이전의 자유권을 기본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단지 유보조건들에 상응하여 예외적으로 그 권리를 제한하고 있을 따름이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동독정권이 자행했던 다음과 같은 일들은 B규약 제12조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3.5.1. 국경봉쇄 및 차단


동독정권은 동서독 국경선에 중화기와 지뢰를 설치해 놓고 서독으로 탈출하는 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국경수비대에 내려놓고 있었다.20) 동독에서는 탈출 행위가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1982년에 제정된 국경법을 근거로 총격사용행위는 국가안보 및 질서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행위로 인정되었다. 1980년대 초반 재집권한 서독의 기민련 정부가 동독에 엄청난 차관을 제공하자 동독정권은 이에 대한 대가로 국경선에서 자동화기를 철수했지만, 총격사용은 지속되었다.


3.5.2. 정치적 형사처벌


‘공화국 탈출을 시도한 범죄자’들은 동독형법 213조에 의거하여 5년~8년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이들의 숫자는 매년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대개 정치범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서독 이주를 신청하는 동독주민들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탈출을 도운 자나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 역시 ‘반국가적 인신매매죄,’ 혹은 ‘불고지죄’로 형사적 책임을 짊어졌다.


공식적 이주신청자들에 대한 박해는 대개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다. 이주신청 자체는 물론이고, 신청이 거부되었을 경우의 이의제기가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주를 위해 서방의 인권단체나 언론기관과 접촉하고 자신의 신상명세 등 문서를 전달한 경우, ‘국가반역적 정보 및 자료 유출죄’, ‘불법적인 외부인사 접촉죄’, 또는 심지어 ‘간첩죄’가 적용되었으며, 이주신청 기각으로 공공기관을 비난하거나 다른 공공기관에 이의를 제기한 경우에는 ‘반국가적 선동죄’와 ‘공공기관 비방 중상죄’ 등으로 처벌되었다.


3.5.3. 거주이전을 방해하는 기타 제재


이주신청자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여러 방법으로 제재를 받았다. 즉 이주신청서 접수는 물론이고 아예 신청서 양식 교부도 거부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이주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에도 국가기관의 회유와 협박을 받아야 했다. 협박으로서는 직장에서 해고 또는 자녀들의 상급학교 진학 거부 위협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주신청자들은 일상적 생활의 통제를 받았다. 동베를린 지역의 체류 금지, 주거장소의 신고, 직장변경 및 특정인과의 교류 금지, 동구권을 포함한 모든 외국여행을 제한하는 특별증명서의 소지의무 등이다. 특별증명서 소지자는 1984년도 기준으로 약 6만 명에 달했다.


3.5.4. 가족상봉의 거부 또는 지연


서독으로 탈출한 자, 공식이주자들은 가족상봉을 위한 동독여행이 쉽지 않았다. 1972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쳐 동독당국은 각각 이전의 불법탈출자들의 동독국적을 말소하는 법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이들의 동독 형사법적 책임을 면해 주었지만,21) 기본적으로 이들의 동독입국은 사실상 매우 어려웠다. 또한 동독의 정치범 내지 서독으로 추방된 자들은 자녀들의 양육권을 박탈당했으며, 이들 자녀들은 강제 입양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3.5.5. 서독방문 제한 및 인적 접촉 제한


동독정권은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을 가능한 억제시킨 것은 물론이고 상호 방문시 주민들간 접촉을 제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예컨대 긴급한 가사사유로 서독친척을 방문하려는 주민들을 회유하여 여행을 포기토록 하든지, 또 다수의 동독주민들을 ‘비밀소지자’로 분류하여 여행을 금지시켰다. 심지어 교원들, 공공기관의 세탁 및 식당 종업원들도 비밀소지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동독주민들의 서독 단체방문시에는 비밀경찰 요원이 항상 동행·감시하여 동서독 주민들간의 자유로운 접촉을 방해했다.


3.5.6. 추방 및 재입국 거부


동독의 정치범들은 1960년대 초반부터 동서독간 석방거래(Freikauf)를 통해 서독으로 추방되었으며,22)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동독의 평화운동 등 반체제인사들도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서독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동독기관은 반체제인사들에게 이주신청서를 내도록 강요했으며, 이를 거부할 경우 형사처벌의 위협을 가했다. 이처럼 추방당한 정치범과 반체제인사는 물론이고, 탈출자나 공식적 이주자들도 동독의 재방문은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 이처럼 반체제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추방으로 인해 동독에서는 다른 동유럽국가와 달리 조직적인 반체제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독에서 반체제 조직은 소련의 개혁정책이 시작된 이후인 1987년에 들어와서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4.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 사례


분단의 전 시기에 걸쳐 위에서 정리된 동독의 인권침해 사안들이 서독의 노력으로 온전히 개선될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단초기 서독정부와 사회는 비난공세와 압박을 비롯하여 다각적인 방법으로 동독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전에 그 성과는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긴장완화 덕분으로 동독 인권문제에 대한 서독의 개입 여지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독 개입의 영향력이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게 엇갈리고 있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은 일방적 비난이나 압박보다는 정치적·경제적 수단을 활용하는 ‘조용한 교섭’을 통해 동독의 인권침해를 개선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물론 그 이면에 보수세력의 자유 및 인권개선 촉구와 국제인권회의에서 동독의 인권실태 비판들이 간접적이나마 동독정권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동독정권으로 하여금 종종 인권 개선의 가시적 조치들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그 배경에는 동독정권의 실리 계산이 있었으며,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독정권은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명실상부한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둘째, 서독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은 비단 내독교역 뿐만 아니라 비상업적 차원에서도 서독으로부터 경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23) 서독과의 우편 및 전화통화료, 통과도로 및 철로 사용료, 방문객의 비자 신청비, 서베를린의 폐기물 처리비, 국경지역의 환경보호 관련 비용 등은 고정된 비상업적인 이익의 대표적 예이다. 더욱이 동독은 서독의 요구에 선택적으로 응함으로써 대가성이 강한 서독의 차관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셋째, 서독 및 서방의 국가 인정을 통해 과거보다 훨씬 자신감을 가지고 내독관계에 응할 수 있었던 동독정권은 주민의 서독방문 통제를 완화함으로써 주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부분적으로 해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통풍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전이 지속되는 한, 동독정권의 자유와 인권억압 문제 해결을 위해 서독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내독관계가 본격적인 발전궤도에 올라섰던 1970년대 후반, 동독의 저명한 반체제 인사들은 내독관계 정상화이후에도 동독의 인권상황이 결코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서독사회에 폭로하기도 했다.24)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통일의 과정에서 보듯이 중장기적으로, 또 누구도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동독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했고 변화를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여 서독정부가 실천했던 ‘조용한 교섭’의 방법과 수단, 그리고 그것의 성과들을 주요 개별사안을 중심으로 정리해볼 것이다.


4.1. 동독 정치범의 석방거래


1963년부터 동서독 당국은 동독 정치범의 석방거래를 비밀리에 추진했다.25)점령통치시기부터 서독지역의 민간단체들은 소련의 점령당국에 의해 전범 혹은 반사회주의적 행위로 재판을 받은 동독지역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서독정부는 1955년 전독문제성(내독성의 전신으로서서 1969년 개칭) 산하에 ‘사법보호국’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부서는 동독 변호사와의 연계를 통해 동독 형사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은 물론이고 사면신청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박해를 받는 정치범의 법률적 구조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1962년 동독정권이 물질적 대가를 조건으로 정치범의 석방 용의를 서독 측에 타진해 옴에 따라 본격적인 동독정치범 석방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독 당국에서는 전독문제성의 장관과 몇몇 담당자만이 거래에 참여했으며, 동독 측에서는 검찰청과 비밀경찰의 연계 속에 검찰총장이었던 쉬트라이트(J. Streit)가 책임자였으나 직접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워 모든 협상이 진척되었다. 동‧서베를린에서 변호사자격을 동시에 인정받은 포겔(W. Vogel)26)이 그 대리인으로서 활약했으며, 그의 역할은 1989년 통일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치범 석방 거래는 정부의 공식차원이 아닌 변호사를 통한 거래였기 때문에 양독간의 정치적 관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1963년 말 거래조건에 대한 어려운 협상 끝에 8명의 동독정치범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첫 거래에서는 동독 측의 요구에 따라 34만 DM이 현금으로 지불되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의 정치범 석방에 대한 대가를 비밀리에 조성하여 전달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측은 새로운 지불방법을 모색했고, 대안으로서 서독 개신교의 동독 개신교단에 대한 원조 통로를 이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교회사업으로 위장된 정치범 석방 거래는 1964년과 1965년에는 상당액의 현금과 동시에 일부 열대과실들로 지불되었으나, 이후 주로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과 일부 서독 공산품이 대가로 제공되었다.27) 석방거래가 시작된 이래 통일이 실현되기까지 그러한 방식으로 총 3만 3천여 명의 정치범이 서독으로 넘어왔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정치범 석방거래는 동독의 위신을 고려하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려웠던 것이었던 만큼 비밀리에 추진되었고, 서독언론도 뒤늦게나마 이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나, 비밀유지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인도적 차원에서 통일될 때까지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4.2. 이산가족의 재결합


독일에서 이산가족의 문제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의 구축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인하여 가족을 남겨둔 채 서베를린 혹은 서독으로 일자리를 찾아왔던 많은 동독주민들이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이산가족의 재결합 차원에서 동독주민의 서독이주28)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동독에 가족을 남겨둔 채 서독으로 넘어온 자들은 먼저 적십자사를 통하여 남은 가족의 서독이주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동독당국은 노동능력 또는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의 동독귀환을 촉구하며, 잔류가족의 이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독 당국이 취한 대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서베를린 시 당국이 동독정부와 협상을 추진하여 제한된 기간동안이나마 베를린 지역에 국한된 이산가족의 방문을 가능케 하는 ‘통과사증협정’(Passierscheinabkommen)을 체결했다. 1963년 12월 제1차 '통과사증협정'이후 1966년 3월까지 총 네 차례 체결된 통과사증협정으로 서베를린 주민은 정해진 기간 내 하루동안 공휴일을 이용한 동베를린 방문이 가능했고, 긴급한 가사문제의 경우에는 그 기간 중 언제라도 동베를린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민련 정부의 정파 이익을 뛰어넘은 정치적 결단이다. 통과사증협정은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지만, 당시 기민련이 이끌던 서독정부는 인도적 사안의 필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동독에 대한 경제적 원조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서베를린 시 당국의 결정을 지원했다.29) 둘째, 서독정부가 나서서 정치범 석방 거래선을 활용하여 남겨진 가족, 특히 자녀들의 서독이주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1964년 어떠한 물질적 대가없이 2천여 명의 아이들이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30) 이러한 동독정권의 호의는 당시 서독의 동독에 대한 경제적 혜택 보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당시 동·서독간에는 장기융자와 관련한 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1965년 4월 서독은 처음으로 동독회사에 장기융자를 제공했다.


1965년부터는 정치범 석방거래로 인해 동독에 남겨진 가족의 서독이주도 협상의 대상이 되었다. 헤어진 부부는 물론이고, 약혼관계에 있는 자, 그리고 부모 중 한 명에게 남겨진 아이들의 추가이주에 대한 협상이 진전되면서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약 2,700여명이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동독정권은 부부가 각각 동서독에 떨어져 살게 됨으로써 부모 중 어느 한편과 함께 동독에 남게 된 약 800~1,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생계비의 지원을 서독 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동서독간에 일반적 외환거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다가, 1969년 초 특별협상을 통해 약 5백만 DM에 이르는 생계비가 동독 측에 지불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250명의 아이들이 추가로 이주할 수 있었다.31) 이러한 방식으로 통일에 이르기까지 약 25만 명의 이산가족이 재결합 할 수 있었다.


4.3. 동독주민의 거주이전 및 여행의 자유 확대


4.3.1. 탈출 동독주민에 대한 지원


1949년 동서독 정부의 수립이후에도 양 지역주민간에 상호방문은 가능했다. 점령시기 각 지역의 점령군 행정당국이 발부했던 ‘점령지역간 여행증명서’ 제도가 정부수립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서독정부는 민족 동질성 유지를 위해 양 지역주민들의 상호방문을 적극 권장하고 활성화시키려 노력한 데 반해, 동독당국은 상호 통행을 다양한 형태로 통제했다. 통제의 주원인은 주민의 탈출에 있었다. 1950년대 동독주민의 탈출은 노동력 감소를 우려할 정도의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동독주민의 여행 통제는 1953년 6월 동독 노동자 봉기를 계기로 약간 완화되었다. 이에 따라 1954년에서 1957년까지 매년 약 250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개 노동력이 없는 연금수혜자들이었으며, 모든 동독주민에게 여행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동독주민의 탈출은 멈출지 않았고, 동독정권은 다시금 여행통제를 강화했다. 베를린 장벽 구축도 주민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동독주민의 탈출에 대한 서독의 입장은 크게 두 측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첫째, 서독당국은 동독주민의 탈출을 돕는 서독주민의 행위를 위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32) 특히 베를린 장벽 설치이후에는 인도적 차원에서 서베를린 주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베를린 주민의 탈출을 무상으로 지원해왔다. 1970년대 초 통과교통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동‧서독 통행로를 이용한 탈출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동독주민이 탈출지원 대가로 서독주민 혹은 단체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계약행위가 빈번히 발생했다. 동독당국은 이를 인신매매라고 비난하며, 협정을 악용하는 서독주민 혹은 단체의 활동중지를 서독정부에 요청했다. 서독정부는 기본법에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 보장의 관점에서 탈출지원을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또한 연방대법원도 통과교통협정은 개인의 권리‧의무가 아닌 양독간 국가관계를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탈주지원이 법적 금지사항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둘째, 서독정부는 국적법을 근거로 동독으로부터 탈출‧이주한 주민이 서독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동독주민이 지속적으로 탈출과 이주를 결심하는 데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동독주민의 탈출 및 이주 사유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일상생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 등 다양했지만, 만약 서독사회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탈출 및 이주에 대한 열망이 그리 높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 제정된 서독의 ‘긴급수용법’은 그와 관련한 대표적인 법적 제도이다. 이 법은 애초 단순히 탈출자를 지원한다는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양 독일간의 정치적 문제와 전후 서독 국내의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감안하여 동독지역으로부터의 지나친 탈출자의 유입을 적절하게 규제하는 데 있었다. 물론 법규정의 적용 대상이 아닌 탈출자들이 동독으로 추방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정부의 보호대신 사회구호단체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베를린 장벽설치와 더불어 분단의 극복 가능성이 요원해지면서 서독정부는 1961년 긴급수용법을 개정하여 탈출자들의 불법체류를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시행령의 개정을 통하여 수용절차도 선별적 허가의 방식에서 단순한 신고 및 기록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탈출‧이주자들은 서독 기본법이 정한 모든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33)


4.3.2. 동독주민의 서독여행 확대


기본조약 체결이전 서독의 거주이전 및 여행자유화 요구에 대한 동독정권의 소극적이나마 긍정적인 대응 ― 연금수혜자의 친지방문 허용 및 공식적 이주허가, 통과사증협정 등 ― 이 주로 서독의 동독 불인정 정책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기본조약 체결이후의 대응은 보다 복잡한 원인을 갖는다. 동독정권은 가능한 동서독 주민들의 접촉을 억제하는 소위 ‘차단정책’에 역점을 두었지만, 국제적 비난을 모면하는 동시에 서독으로부터 포괄적인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과거보다 진전된 조치를 취했다.


1970년대 동서독간에 체결된 통행조약과 기본조약은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에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미쳤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독방문은 대부분 연금수혜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방문기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이들은 1년에 총 30일 한도 내에서 한번 혹은 여러 번 서독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새로운 변화는 1972년부터 동독당국은 일반주민들에게도 긴급한 가사문제로 인한 서독방문을 허용했다는 것이다.34)


1980년대 초 국제적 신냉전으로 인해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은 감소하였다. 그러나 1983년에 들어오면서 신냉전 분위기가 호전되고, 또 서독정부의 대동독 차관이 약속되자 동독정권은 인적 교류에 대한 직‧간접적 규제를 완화했다. 1984년부터 일반 동독주민의 서독 친지방문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방문허용 일수도 연간 총 30일에서 60일로 연장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대개 긴급한 가사사안이 주류를 이루기는 했지만, 1986년부터 연금수혜자가 아닌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이 이전에 비해 급격히 증가(약 5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7년 이후 그 수는 더욱 증가하여 매년 12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를 포함하여 1987년 서독을 방문한 동독주민의 총 수는 총 380여만 명에 달했다.35) 여기에는 비단 긴급한 가사사안 이외에도 청소년 교류의 확대, 도시간 자매결연, 문화협정체결 등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완화에도 불구하고 연금수혜자를 제외한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은 1년에 1회로 제한되었다.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에 대한 동독당국의 규제완화는 내독관계의 진전이라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동독주민의 서독이주 열망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서독이주를 희망하는 주민수가 증가하면서 1984년에는 약 3만5천명의 서독이주가 허가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신청자에 비하면 미미했으며, 허가를 받지 못한 자들 중 몇몇은 동독주재 미국대사관과 서독 상주대표부에 난입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주허가가 대부분 연금수혜자들에게 발급되었던 전례와 달리 1984년 이주자들의 3/4은 18세에서 39세에 달하는 노동인구였으며, 그 중에서도 1/3은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36) 이주신청자가 쇄도하자 다시금 1950년대의 인구 및 노동력 감소라는 망령에 사로잡히게 된 동독정권은 1987년까지 이주허가를 재차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동독주민의 서독방문 허가를 확대함으로써 이주를 억제하려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동독정권이 개혁을 완고히 거부하는 한, 그러한 조치만으로 동독주민의 불만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특히 소련 개혁정치의 여파가 1987년경부터 반체제세력의 조직화로 나타나는 가운데 동독정권의 반체제조직 탄압과 이주허가 통제는 1989년 여름 동독주민의 제3국을 경유한 대규모 서독탈출과 나아가 대규모 평화시위를 유발했고, 종국에는 동독체제의 붕괴와 독일통일로 이어졌다.


4.4. 동독정권의 인권침해에 대한 감시


동서독 정부의 분리수립 직후부터 서독에서는 동독정권의 인권침해 및 정치적 박해를 서방에 고발하고, 동시에 인권침해에 대한 법률적 구조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민간단체가 결성되었다. ‘자유 법조인들의 조사위원회’(UFJ)라고 명명된 이 단체는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37) 이들의 활동은 동독정권으로부터는 간첩행위로 비난을 받았으며, 또 동독을 실체로 인정하려는 좌파 정치인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순수 민간차원에서 운영된 이 단체의 활동은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 직후 당국 차원의 기구 설립으로 더욱 보강될 수 있었다.


1961년 10월 개최된 서독 및 서베를린의 법률장관 회의에서 함부르크 시의 기민련 지역당수였던 불루멘펠트(E. Blumenfeld)가 제안하고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가 동의함으로써 ‘동독정권의 인권침해에 관한 중앙 기록보관소(Zentrale Erfassungsstelle)’의 설치가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기록보관소는 동년 11월 동독과 가장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니더작센 주의 주법무성의 관할 아래 잘쯔기터(Salzgitter)시에 설치되었다. 설치 초기 주요 업무는 국경선에서 발생하는 폭력행위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업무의 영역을 넓혔다. 1960년 말부터는 ① 거주이전의 자유 또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정권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명시적 내지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의 살인 및 상해, ② 인간의 기본권과 합치하지 않는 형벌로서 정치적 이유에서 행해지는 폭력적 판결, ③ 수사 및 기소과정, 또는 수감 중에 자행된 인권침해 등의 부당행위로서 동독의 정치폭력적 체제특성을 여실히 드러낸 모든 사안, ④ 형법 제220조(살인), 제234조(납치), 제241조(정치적 혐의)에 적용되는 형사사건 등을 조사·기록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38)


기록보관소의 조사는 크게 6가지의 수단을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① 연방국경수비대의 현황보고서, ② 동독 언론매체의 분석, ③ 피해자나 증인들의 개인적 증언 심사, ④ 주 및 연방정부 당국의 조회 요구와 정보의 분석·심사, ⑤
링크 #1 http://www.koreapeace.or.kr/modules/forum/forum_download.html?ff_no=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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