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증언⑫] 반미, 분단 직후부터 일어난 자주운동
반미든 친미든, 국익에 따라 움직여야
남한에서 '반미(反美)'는 '용공이적(容共利敵)'이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미국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공산주의 정권의 주장이나 정책을 받아들이거나 동조하는 일이며, 북한과 미국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다. 반미와 친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냉전 시대 남한 대외정책의 기조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친미 반공'이었다. 냉전 종식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과 친하게 지내며 북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노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남한의 인식이나 행위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친미가 아니라 '숭미(崇美)'와 '종미(從美)'였다.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뛰어넘어 미국을 숭상하며 추종했다는 뜻이다. 국제사회에서 남한이 미국의 한 주처럼 비추어져 '51번째 주 (the 51st state of the USA)'라는 빈정거림을 받게 된 배경이다.
예를 들어, 미군은 1945년 9월 우리 땅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을 '점령군 (occupation forces)'이라고 성격을 분명히 밝히고 정부 문서에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미군이 해방군인지 점령군인지 대답하라는 설문조사까지 하면서, 점령군이라 부르면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1960년대엔 장관 임명조차 주한미국대사에게 미리 보고하며 양해를 구했는데, 미국은 '내정 간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워했지만, 남한 정부는 미국의 '충고와 조언'을 지속적으로 받고 싶다며 매달리다시피 한 적도 있다.
남한의 독재정권들은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을 통해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얻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비판은 남한 정부에 대한 도전이자 북한 정부에 대한 동조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범죄와 만행에 분노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외쳐도 빨갱이로 매도되었다.
반미운동은 1945년 분단 직후부터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흔히 얘기하듯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고, 북한의 사주나 조종에 따라 전개된 것은 더욱 아니다. 반미운동이 결과적으로 용공이적으로 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종북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남한에서 반미운동이 언제부터 왜 어떻게 펼쳐졌는지 알아본다.
1. 반미의 의미
반미에 관해 논의하려면 이에 대한 개념부터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반미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반미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85년 5월, 광주학살과 관련해 미국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서울의 미국문화원 도서관을 3일간 점거했던 70여 명의 대학생들은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그 후 언론계나 학계에서는 그 사건을 1980년대 전반기 "반미운동의 절정"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에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그 운전병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죽은 여중생들을 추모하며 한미행정협정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2003년까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 무렵 촛불시위가 반미냐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촛불시위가 추모행사로 끝나야지 반미데모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반미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여기서 '반미'의 '반'은 반대한다는 뜻이고 '미'는 미국을 가리키는데, 미국의 어떠한 점에 어떻게 반대하는 것이 반미일까.
첫째, '반대'는 태도나 행위의 강도(强度)와 관련 있다. 비판이나 항의에서부터 증오감의 표출이나 테러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태도나 행위가 포함될 수 있는데,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모두 반미로 볼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반미로 간주하지 말아야 할 지 따져봐야 한다. 미국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구별할 경우, 어디까지 '비미(批美)'이고 어디부터 '반미'인지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어렵다. 흔히 미국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은 태도나 행위의 대상이나 목표와 관련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정부, 기관이나 정책, 사회나 사람, 문화나 전통, 가치나 상징, 권력이나 영향력 등이 포함될 수 있는데, 미국의 어떠한 단편적인 것만 반대해도 반미로 볼 것인지 미국의 모든 측면을 반대해야 반미로 규정할 것인지가 문제다. 전자를 따른다면 세계 모든 나라에서 반미를 찾을 수 있고, 후자를 따른다면 지구 어디에서든 반미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 문화의 상징인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먹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성조기를 찢거나 미국문화원에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을 두고 그의 친미적 태도와 반미적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셋째, '반미'라는 말 뒤에 '운동', '주의(主義)', '감정' 등의 말을 붙여쓰기 마련인데, 이는 태도나 행위의 빈도 또는 지속성과 관련 있다. 미국에 대한 일시적 비판이나 반대도 반미로 볼 수 있는지 미국에 대한 지속적 혹은 체계적인 비판이나 반대만 반미로 규정할 것인지가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에서는 '반미 (anti-Americanism)'와 '비미 (criticism of the United States)'를 구별하여 쓰는 경향이 큰데 반하여, 남한에서는 '반미주의'와 '반미감정'이라는 말을 구별하여 쓰는 경향이 크다. 여기서는 편의상 '반미'와 '비미' 및 '반미주의'와 '반미감정'을 구별하지 않고, '반미'를 넓은 의미에서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미국의 어떠한 측면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나 행위를 취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2. 반미의 유형과 종류
반미는 세계적으로 어제오늘 나타난 게 아니라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부터 생긴 현상이요, 어느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게만 쌓인 게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쌓여 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증오받는 나라”가 되었으며, 미국을 증오하는 것은 세계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놀이"가 되어버렸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멕시코의 작가 겸 외교관이었던 카를로스 푸엔떼스 (Carlos Fuentes)가 미국을 "안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라도 밖에서는 제국주의 국가이며, 자국에서는 지킬박사 같은데 타국에서는 하이드씨 같다"고 묘사한 데서 드러나듯, 세계적 패권을 추구하고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또는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대외정책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반미는 오랜 역사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대략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쟁점별로 '정치적' 반미와 '문화적' 반미가 있다. 앞의 것은 미국의 특정한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발전된 반면, 뒤의 것은 미국의 전통이나 문화 또는 미국인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경멸이나 거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반미의 강도와 관련하여 '온건한' 또는 '감정적' 반미와 '급격한' 또는 '이념적' 반미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이 미국의 특정한 정책이나 미국인들의 행태에 관한 일시적 비판이라면, 뒤의 것은 미국의 사악한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비난이나 본질적 반발이다.
셋째, 반미를 주도하는 사람들에 따라 먼저 민간 차원의 반미와 정부 차원의 반미로 나눌 수 있으며, 앞의 것은 다시 '엘리트' 반미와 '대중적' 반미로 나눌 수 있다.
넷째, 반미의 특성과 관련하여 '정책적' 반미와 '도구적' 반미 그리고 '이념적' 반미로 나눌 수 있다. '정책적' 반미는 미국 정부의 특정 정책이나 행위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된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반미의 유형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 베트남 전쟁, 이라크 침략 등에 대한 비난이나 분노를 들 수 있다. '도구적' 반미는 어느 정부가 민족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국민의 지지와 단결을 유도하거나, 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불만이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미국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미는 주로 독재주의 또는 권위주의 정권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념적' 반미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에서 표출된 것으로 주로 과거의 동유럽이나 제 3세계에서 발전되어 왔다.
3.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변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마 1980년 이후 남한 사회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온 문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겪고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친미 반공의 틀 속에 갇혀 미국이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라고만 믿어왔다. 교육과 언론을 통해 그렇게 세뇌당하고 강요받아온 것이다. 한미 관계를 흔히 '피로 맺어진 동맹'이란 뜻의 '혈맹' 관계라고 표현하며 미국을 '은인의 나라'로 생각해온 데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첫째, 미국인들은 19세기 말부터 조선 땅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고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항일 민족 투쟁을 지원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패퇴시킴으로써 1945년 8월 조선의 해방을 불러왔다. 셋째, 한국전쟁 중 군대를 파견하여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다. 넷째, 한국전쟁 이후 막대한 양의 군사 및 경제 지원을 하여 남한의 재건을 도와주었으며, 남한 최대의 무역 상대국으로 남한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다섯째, 주한미군을 유지해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면서 남한의 안보를 책임져 왔다.
이에 반해, 미국이 '추한 나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반미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불온한 사상'이나 '용공이적 행위'와 연결되어 처벌을 받기 쉬웠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나라 안팎으로 민주화와 탈냉전을 겪으면서 미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이른바 '반미'가 확산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역사의 재해석 또는 미국에 대한 재인식을 바탕으로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바로 잡고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온 것이다.
첫째,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뺏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확보하기 위해 1905년 일본과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맺어 조선을 일본에 넘겼다. 둘째, 1945년 8월 38선을 확정하고 1948년 남한 단독선거를 주도함으로써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고착시켰다. 셋째, 남한의 독재정권들과 군사쿠데타까지 지원함으로써 남한 민주화를 방해했다. 넷째, 초국적 기업들을 통해 남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한편 시장 개방을 강압적으로 요구해왔다. 다섯째, 미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양키 물질주의' 혹은 폭력과 섹스로 상징되는 '미군 (GI) 문화'를 유입시켜 남한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퇴폐를 이끌며,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협력 및 평화 통일을 가로막아 왔다.
4. 남한 반미운동의 역사와 과정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반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남한은 1970년대까지 "반미의 무풍지대"였다거나 세계에서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가 외쳐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혹은 반미감정이 1980년대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반미감정은 1945년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이전에도 "반미의 무풍지대"가 아니었고, 언제든지 반미의 미풍은 있었으며 때로는 강풍이나 돌풍도 불었다. 그러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반미의 폭풍 혹은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한에서의 반미운동은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주로 지식인들에 의하여 소규모로 그리고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1980년대부터는 일반 대중이 참여하여 대규모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의 지나친 간섭과 부당한 압력 그리고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 소유 및 주둔군지위협정 (SOFA)을 비롯한 불평등한 한미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가장 큰 배경은 1980년대에 일어난 민중운동과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시민운동에 따른 시민사회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2002년 12월 14일 서울시청에서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고 미국을 규탄하는 '주권회복의 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성조기를 찢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1) 1940년대 한반도의 분단과 미 군정에 대한 반대
남한에서 최초의 반미데모가 일어난 것은 1945년 9월 8일 미군들이 인천에 착륙한 지 이틀만이었다. 약 500명의 한국인들이 미군들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에 모여들 때 일본 헌병이 총을 쏴 한국인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데 이어, 이틀 후에는 2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의 충돌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듯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35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죽은 반면, 단 1명의 일본인도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일은 없었다. 하지(Hodge) 미군 사령관은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한국인들로부터 극도로 증오받고 있던 일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러한 '결정적 실수'에 대한 항의로 미군들이 한반도에 착륙하자마자 반미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미 점령군에 대한 어떠한 적대 행위도 사형선고를 포함한 중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매카써 (MacArther) 연합군 총사령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항의데모는 계속되었다.
한편, 한국인들이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났지만 즉시 독립이라는 꿈은 실현되지 않은 채 38선을 따라 분단이 굳어지고 있었다. 일본 식민통치 구조의 연장에 불과한 미 군정은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반미감정을 갖도록 이끌었다. '해방군'이 억압자로 바뀌는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일본 식민주의자들과 미군들의 실질적 차이점은 피부색뿐이었던 것이다. 미군 점령에 대한 한국인들의 좌절과 분노는 1945년 9월 중순부터 더욱 심각한 항의 시위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대개 과거에는 친일파였으며 영어를 잘하는 부유한 한국인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비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간이 흐를수록 다수의 한국인들이 반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2) 1948년 단독총선거와 1950년 6·25전쟁의 영향
1947년 9월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에 관한 미소 공동위원회 2차 회의가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전술'을 비난하며 한반도 문제를 일방적으로 '부적절하게' 유엔으로 떠넘겼다. 결국 38선 이남에서만 미군정이 계획한 대로 1948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김구는 한국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외국군들이 즉각적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했고, 김규식은 외국군대가 철수하고 남북 지도자들이 협상을 이루기 전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좌익 세력들은 유엔 한국임시위원회가 미국 제국주의의 첩자라고 비난하며 폭력으로 선거를 거부했다.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 메논 (Menon) 위원장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유엔의 기본 목표인 한반도의 독립과 점령군들의 철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단독선거안의 철회를 주장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고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유엔 한국임시위원회와 남한 단독선거에 대한 반대는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반체제 및 반미투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좌익 세력은 1948년 10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제주, 여수, 순천 등에서 '항쟁' 또는 '반란'을 주도했다.
이런 터에 6·25전쟁은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을 반공과 친미로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북한의 남침은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미군들의 참전과 남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미국의 원조는 미국에 대한 호의적 인상을 심어 주었다. 북한은 악마로 간주되고 미국은 천사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한자 표기를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들처럼 '米國'이라고 하다가, 미 군정 기간에는 '米國'과 '美國'을 함께 썼으며, 전쟁 이후에는 '美國'으로만 쓰게 된 것도 미국에 대한 호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반공 친미적 사회구조가 정착되어 가는 가운데 좌익 세력이 월북하거나 지하로 잠적하여 이념적 반미운동은 전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기지 주변에 사는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범죄가 점증함에 따라 1950년대 말부터 반미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휴전 반대 및 남한 내 미국 경제인들에 대한 조세 문제에 관한 논란 등으로 남한에 '반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1955년 9월 미국 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가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남한 언론에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중략) 우리에게 극도로 불유쾌하며, 우리는 미국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비판이 우리의 관계를 해치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3) 1960년대 4월혁명과 민족주의의 발흥
1960년 3·15 부정 선거는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중앙정보국 남한 책임자까지 동원된 조직적인 미국의 개입은 이승만의 하야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독재정권의 전복이라는 목표에 도취되어 그러한 미국의 내정간섭에 불만이나 분노를 터뜨리기는커녕 열렬하게 환영했다.
4월 혁명이 초래한 가장 두드러진 사회현상 중의 하나는 민족 자주운동의 발흥이었으며 그것은 대체로 통일운동의 전개와 함께 표출되었다. 통일론의 전개는 대부분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한 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의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으며 외세의 배격은 주한미군 철수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 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발기된 데 이어, 대학생들의 통일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장면 총리가 정부의 정책과 다른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선도하되 과격한 행동은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혁신 세력과 학생들의 통일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11월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분규와 관련해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 서리의 본국 소환을 외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며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연세대 학생들의 결의에서 볼 수 있듯이, 4월 혁명은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에까지 민족 자주의식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1961년 2월엔 한미경제협정 체결과 관련하여 "양키 고우 홈!" 구호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었다. 혁신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남한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시키며 미국이 남한의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하는 불평등조약이라며, 전국적으로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그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그 무렵 거의 매일 일어나는 미군들의 만행과 범죄 때문에 2월 중순부터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가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민족 자주운동은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다. 4월 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이와 함께 전개되는 통일운동과 반미 자주운동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는 장면에게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은 남한의 정치 안정과 미국의 안보 이익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허약한 장면 정부를 대체할 강력한 군사정권을 필요로 했다. 물론 미국이 장면 정부의 대안으로 계획했던 군사 정부가 박정희가 주도했던 쿠데타는 아니었지만, 미국은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하면서도 쿠데타를 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반공을 강조하면서 통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는데, 한미경제협정에 반대했거나 주한미군 철수 및 북한과의 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을 용공이적 행위자로 체포했다.
1965년 한일 외교정상화를 전후하여 반미감정은 다시 폭발했다. 한일 외교정상화에 대한 항의데모는 깊은 반일감정에서 촉발된 것이었지만, 그렇게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국교 수립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미감정도 함께 분출된 것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대규모 항의데모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주한미군사령부는 데모 진압을 위한 병력 차출을 승인했다. 결국 계엄령하에서 국교정상화가 조인되지만, 그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항의데모는 1965년 2월부터 8월 위수령이 선포될 때까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미감정은 지속적으로 분출되었으며, 시위 구호 가운데 하나는 "양키 입 닥쳐"였다.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반공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미국에 대한 심한 비판은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되었기 때문에 반미감정의 표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중반 주한미군기지 주변에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범죄가 증가하자 인권단체 등에서 한미행정협정을 개정하라는 성명 등을 발표하지만 반미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민사회가 거의 발달되지 않았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4)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의 저항운동
1970년대는 남한 정치사에서 가장 혹독하고 어두운 시대였다. 박정희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긴급조치를 추가하여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펴나갔다. 억압적인 유신체제는 정부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거의 표출될 수 없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나 미국 중앙정보국의 청와대 도청 사건 그리고 남한의 인권 문제 등과 관련하여 남한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고 양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여당 정치인들이나 친정부 지식인들이 미국을 비난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공식적 친미'가 퇴조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지지와 단결을 유도하고 대내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비판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부 관리들이 미국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도구적 반미'가 등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박정희에 의해 임명된 유정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은 미국을 '세계적 제국'이라고 부르며 미국의 대외정책을 '신식민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 정권 아래서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일단의 '혁명주의자'들이 남한을 미국의 '신식민지'로 간주하며 '이념적' 반미 자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발달한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남한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운동권에서조차 반미 자주의식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대학생들은 반정부 반미 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데모가 금지된 상황에서 저항의식을 고무시키는 탈춤이나 마당극 등을 통해 남한의 독재와 외세의 개입을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탈춤에서 유신체제나 미국은 억압자로 풍자되었으며, 미국은 한국인들에 대한 '착취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작가들은 미국의 퇴폐문화가 남한에 유입되는 현상을 비판했는데, 억압적인 유신체제가 학생들의 저항 방법을 바꾸었듯이, 작가들은 이른바 '자체 검열'을 통해 덜 정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5) 1980년대 광주항쟁의 영향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1980년대의 남한 상황은 반미와 관련해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첫째, 광주학살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동조와 지지에 따라 미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미국이 남한의 민주화에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었지만 오히려 군사독재를 지지한 데서 미국에 대해 배반감을 맛보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학의 '좌절-공격 이론'이 제시하듯, 박정희의 죽음이 민주화를 불러오지 못하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미국의 도움을 통한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좌절로 바뀌었으며 이 좌절감은 반미감정의 폭발이라는 공격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둘째, 급속적인 경제 성장에 따라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미국에 대한 종속이나 불평등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자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셋째, 사회 각 분야에서 시작된 민중운동이 반미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민중운동의 세 가지 목표는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외세의 지배로부터 실질적인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반외세 민족 자주운동 또는 반미운동과 함께 전개되었다.
대학생들은 흔히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거나 성조기를 찢는 등 다양한 형태로 반미감정을 표출시킨 반면,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은 민중 문화운동을 발전시키며 작품 활동을 통해 반미감정을 나타내는 경향이 컸다. 대학의 대자보나 현수막에는 미국의 한자 표기를 美國 대신 흔히 '米國'이나 '尾國'으로 했으며, 출판물에 연도를 표시할 때는 서기 (西紀) 보다 단기 (檀紀)를 쓰거나 '분단 조국 00년', '반미 항전 00년', '통일 진군 00년', '해방 투쟁 00년', '나라 찾기 00년' 등을 씀으로써 반미 자주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미국이 통일의 걸림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6) 1990년대 군사정권의 종식과 정치문화의 변화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많은 사람들은 그를 30년 이상 지속되었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남한의 민주화를 이끌 문민 지도자로 환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야단체에서는 그의 집권이 군사정권의 연장일 뿐이라며 선거 결과에 불만을 표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일련의 개혁정책을 수행한 뒤에도 학생들은 그가 선거 과정에서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 역시 보수적 친미정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 반미 자주운동은 민중운동과 함께 발전되었기 때문에 1990년대 민중운동의 쇠퇴는 반미 자주운동의 약화를 초래했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신속한 민주화로의 이행은 최소한 미국이 남한의 군사독재를 지원한다는 대중적 인식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 결과 반미 자주운동의 강도는 약해졌으며, 반미 행위의 빈도는 줄어들었고, 과거에 비해 비폭력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아래서도 반미운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는데, 1990년대에 표출된 반미감정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80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의혹이 미국의 비밀문서들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1990년대까지 해마다 5월이면 광주를 중심으로 거의 전국적으로 열렸던 광주항쟁 기념식이 미국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끝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광주 시내에 있던 미국문화원이 잦은 데모에 못 이겨 1990년 6월 광주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했지만 그곳에서도 유지하기 곤란해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둘째, 198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반미 반전반핵 평화투쟁'은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일부 학생들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199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빚어졌던 이른바 '한총련 사태'에서 보듯이, 해마다 8월이면 '범청학련 통일 대축전' 행사를 개최하여 주한미군 철수 운동을 비롯한 '반미 구국투쟁'을 벌여 왔다.
셋째, 미국이 1980년대 중반부터 남한의 농산물시장 개방을 지속적이고 강압적으로 요구해온 데 대하여, 농민들을 중심으로 '쌀시장 지키기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이 남한 사회에서 얼마나 커다란 지지를 받았는지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991년 농협이 쌀 수입 반대 서명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약 40일 동안에 남한 인구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1300만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음으로써, 최단 기간에 최다의 서명을 받은 세계 기록을 세워 1991년 <기네스북>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 주한미군들의 한국인에 대한 만행과 범죄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범죄는 1945년 미군들이 주둔하면서부터 일어났지만, 1992년 '윤금이 사건'에서처럼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반미운동이 확산된 적은 없었다. 동두천의 한 윤락여성이 벌거벗겨져 성기와 항문에 우산과 콜라병이 꽂혀 있고 온몸에 가루 세제가 뿌려진 채 시체로 발견된 이 사건은 해가 바뀌도록 각계각층의 각종 항의집회를 초래했으며 미국대통령에게 항의 엽서 보내기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과거에는, 특히 1960년대 중반에, 이러한 비슷한 사건이 미군기지 주변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다시피 했어도 기껏해야 동료 여성들이 부대 정문 앞에 가서 데모 한 번 벌이고 위로금을 조금 받아 장례를 지내주면 그만이었다. 그때에는 소위 기지촌 여성들이 같은 한국인들에게도 경멸의 대상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세대가 지난 1990년대에는 사회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그들이 외세의 지배에 의한 피해자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미군들은 헤어져야 할 남이지만 그들은 우리가 껴안아야 할 핏줄이라는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도 일어났는데, 1990년대 여대생들이 방학 중에 동두천과 의정부를 중심으로 벌였던 '기지촌 봉사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7) 2000년대 시민운동의 발달과 대중적 반미운동
1990년대부터 각종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반미운동 역시 더 대규모로 조직적이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제성장 및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격상에 따라 미국의 간섭이나 미국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민족 자주운동의 성격을 띠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 냉전 종식에 따른 한반도 통일 운동과 결합되어 남북 사이의 민족 공조를 바탕으로 하는 외세 배격 운동으로 전개되어온 것이다.
몇 가지 사례만 든다. 2002년 2월 미국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남한의 빙상 선수가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나자 인터넷에 반미 사이트가 100여 개나 생기면서 맥도널드를 비롯한 미국계 음식점의 매출이 크게 줄어드는 등 "반미 감정이 해방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는 말이 나왔다. 2002년 1월 부시 미국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통해 북한이 '악의 축'을 이루는 한 국가라며, 미국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공언하자, 남한의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이를 비판하는 선언문이나 성명서를 내고 미국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에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그 운전병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죽은 여중생들을 추모하며 한미행정협정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고 미국의 요구로 한국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자 전쟁 및 파병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협상 반대를 위한 촛불시위가 3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고등학생들과 가정주부들까지 대거 참여하고 가족 단위의 참가도 많은 가운데, 연예인들이 주도하는 '문화제' 성격의 시위도 벌어졌다. 1990년대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전개되던 반미운동이 2000년대 들어서는 각계각층으로 대중화한 것이다.
5. 반미운동의 전망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온 세계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남한은 국력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평등한 관계를 맺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나 압력이 존재하는 한 한국인들의 반미 자주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첫째, 주한미군으로부터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고 남한이 독자적으로 또는 주도적으로 국가안보 전략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는 한미동맹의 심각한 불평등성이 자주의식을 고취시키지 않을까. 또한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는 주한미군들의 범죄가 그치기 어려울 것이고 이는 주둔군지위협정의 불평등성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반미감정을 자극하지 않을까.
둘째, 한반도에서 분단이 지속되는 한 미국은 '분단의 원흉'이나 '통일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지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분단에 따른 반미감정과 통일을 위한 자주의식이 결합되어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반미 자주운동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셋째, 미국의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대외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반전의식에 따른 반미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세기 내내 이 지구상에서 미국처럼 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는 없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지금까지 거의 80번이나 다른 나라들을 폭격하거나 군사적으로 침략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해마다 한 두 차례 폭격이나 침략을 한 셈인데,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앞두고 남한의 평화운동 단체들이 한국군의 이라크파병 반대와는 별도로 세계 각지의 평화운동 세력과 더불어 조직적으로 반전반미 시위를 벌였던 것처럼, 미국의 그칠 줄 모르는 폭격이나 침략 행위는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높일 것이다.
아무튼 남한 반미운동의 가장 큰 배경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있고 핵심 목표는 미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민족통일에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완전한 철수가 당분간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먼저 주둔군지위협정의 개정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환수 등의 조치라도 서두르는 게 바람직하다.
국익을 위해서는 친미도 필요하고 반미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미국을 바로 알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지미(知美)를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친미도 하고 반미도 하면서 궁극적으로 용미(用美)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정부는 시민사회의 반미 자주운동을 종북으로 매도하거나 이적용공으로 처벌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이용해 더욱 건전하고 바람직한 한미 관계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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