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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정연진의 '원코리아운동' 이야기
통일시대를 위한 나침반 찾기④ - 글로벌 민초의 힘, 세상을 바꾸다
기사승인 2013.10.18 09:27:00
- <연재> 정연진의 ‘원코리아운동’ 이야기 (22)
2005년 6월 30일 뉴욕의 유엔본부.
과거사에 대해 반성 없는 일본의 UN 안보리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두 달간 인터넷상에서 치열했던 사이버 전쟁. 서명운동의 결과를 나를 포함한 5개국 대표단이 UN 사무총장 실에 제출하고 있었다.
글로벌 얼라이언스를 대표하는 중국계, 미국, 일본, 네델란드 대표, 그리고 한국계를 대표하는 5인의 대표단을 당시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의 특별고문이 만나주었다. 우리는 일본이 유엔 상임위가 되기 전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선결조건으로, 6개 항목을 제시했다. 피해자들에게 대한 배상, 일왕의 사과, 교과서에 역사적 진실 기록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바른역사 정의연대,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에 맞서다
서명운동은 ‘과거 만행을 속죄하지 않은 전범국가가 과연 세계 지도국이 될 자격이 있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준엄한 국제여론 재판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때 바른 역사 정의연대 이름으로 코피 아난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던 서신의 일부 발췌문이다.
▲ 네델란드, 미국, 일본, 중국 대표단과 함께 한국계를 대표하여 UN 사무총장실에 인터넷서명운동 결과를 전달하고 있다. 왼쪽 흰 상의를 입은 사람이 나. [사진출처 - “日 안보리진출 반대 서명 유엔 전달”, 경향신문 2005.7.1]
“우리 서명 운동은 올해 2월 28일부터 5월 중순까지 인터넷상에서 전 세계 4천 2백만의 서명자를 확보하는 대대적인 성과를 내었습니다. 단일사안으로 단기간 이와 같은 수의 서명자를 확보한 서명운동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것입니다.”
“독일은 과거 나치의 전쟁범죄와 과거 만행에 대해 수 차례 반성, 사죄, 배상이라는 응분의 조치를 취했으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은 한국과는 독도문제, 중국과는 조어도(센까구) 문제등의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고 또한 끊임없는 역사왜곡으로 인해 아시아 여러 나라는 일본과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과거청산 없는 일본의 UN 최고 의결기구 진출은 유엔헌장 정신을 걸고 인간성과 인류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걸고, 켤코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4,200만 인터넷서명자들은 디지털혁명시대의 능동적 참여자로서 안보리 개혁에……. 역사의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만약 아난 총장께서 유엔 재정 충당에 대한 일본의 공여가 지대하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신다면 다시 한번 숙고해 주십시오. 재정적 기여에 의한 안보리 진출이 이루어진다면 유엔 헌정사에 돈으로 세계 정의를 살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계속 진보해왔습니다. 17~18세기만 해도 아프리카 흑인은 쇠사슬에 묶여 노예로 팔려 가는 참혹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난 총장께서 1997년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하실 때 인종적 배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바로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 왔기 때문이며 인류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살아있는 한 전범국가 일본의 상임위 진출은 전 지구촌의 양심과 상식이 허용치 않을 것입니다. 반인륜 범죄의 어두운 역사를 경제적, 정치적 힘으로 은폐, 왜곡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세계의 양심은 원하고 있습니다.”
▲ 인터넷서명운동과 함께 종이 서명운동도 진행되었다. 미주한인들의 인터넷 사용이 저조하여 종이서명을 같이 추진했다. 서명이 빼곡이 들어찬 용지가 계속 팩스와 우편으로 날아왔다. 당시 국내에서 시작한 서명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주력했던 것에 비해, 우리는 징용피해, 731부대, 인도네시아 바탄 죽음의 행진 등 보다 광범위한 공감을 받을 수 있는 문안을 넣었다. [자료사진 - 정연진]
인터넷서명운동은 종이 서명운동과는 차원이 다르게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면서 기하급수적인 파급력을 가져왔다. 종이서명을 받으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고 홍보물, 운동원도 관리해야 한다. 또 해외 각 나라에서 어떻게 다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많은 서명지를 모아 집계하려면 시간과 정력이 필요할 터인데 인터넷 서명은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을 단숨에 절감시키며 점점 눈덩이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서명운동을 시작한지 2주 안에 목표치인 1백만을 가볍게 뛰어넘더니, 한 달 내에 서명자가 2천만, 곧 이어 3천만으로 불어났다. 세계 30여개국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했고 수 많은 언론이 집중해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2005년 5월 19일까지 전세계 4천 1백 77만명이 서명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주목할 점은 인터넷서명운동의 폭발력에 국제여론이 서서히 변화했다는 점이다. 2005년 연초에는 거의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당시 고이즈미 수상과 부시 대통령의 끈끈한 미일공조를 이유로, 일본이 무난히 유엔안보리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유엔에 재정기여가 많은 일본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서명운동의 여파로 중국에서 5.4 운동 이래 최대 인파가 모인 격한 반일시위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아시아권이 연일 인터넷서명운동의 결과로 들썩이자, 일본의 안보리 진출을 적극 추진하던 미 행정부에 입장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 5월과 6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일본의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상에게 일본의 상임위 진출을 요구하는 유엔개혁 결의안 제출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마치무라 외상은 결국 예정했던 유엔 결의안 제출시기를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2005년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은 좌절되고 만다.
이그나시오 딩 - ‘잊혀진 홀로코스트’를 밝히는 탁월한 전략가
인터넷서명운동이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 효과를 내며 그 정도의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IT 전략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글로벌 얼라이언스라는 중국계 인권활동 단체의 전략가 이그나시오 딩(Ignatius Ding)이다.
타이완 출신의 딩은 20대에 미국에 정착한 중국계 미국인이다. 딩은 IBM 과 휴렛 패커드와 같은 IT회사에서 십여년간 전략기획 분야에서 일한 덕분에 인터넷을 사회운동에 활용하는데 뛰어난 전략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메일은 클릭 몇 번 만으로도 수백개 수천개 이메일이 동시에 나갈 수 있는 구조로 짜여져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 인터넷서명운동의 전략가였던 글로벌 얼라이언스의 리더, 사이버 전사로 불렸던 이그나시오 딩(Ignatius Ding). 그와 함께 사회운동을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진출처 - San Francisco Chronicle. 2002]
딩은 천안문사태 때 중국당국이 선량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 아팠고 그 이후 인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시아에서 저질러진 일제의 만행이 나찌에 의한 유대인들의 피해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잊혀진 홀로코스트’가 된 것에 분노를 느끼고 이를 제대로 알리는데 앞장섰다. 당시 세계 52개 지부를 가진 글로벌 얼라이언스의 수많은 캠페인과 활동이 그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다. 딩과 나는 다 년간 함께 활동해 두터운 동지애를 가진 관계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그나시오 딩과 나의 팀워크는 환상의 짝이었다. 딩이 매일 매일 ‘오늘의 서명자 수’를 집계해 발표하면, 나는 그 때마다 더욱 신선하고 흥미있는 이야기들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눈길을 사로잡는 메시지를 써서 이메일로, 웹사이트로 이를 중계하고 한국의 단체들에게 뿌렸다.
각 국가별 숫자 통계치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메일은 ‘007 제임스 본드’,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박력있게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서, 열어보는 사람에게 마치 흥미진진한 할리우드 액션에 동참하는 것과 같은 짜릿한 체험을 선사했다. 매일 매일 경신되는 기록적인 숫자를 보던 사람들은 “살아생전에 ‘숫자’가 이렇게 큰 감동으로 와닿기는 처음이다”라면서 놀랐다.
일본인 인식의 한계 - ‘배후 조정 세력이 누구냐’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 전 지구촌의 인터넷서명운동이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의 보수 언론들은 인터넷 서명운동은 일본의 국제무대 부상을 훼방 놓으려는 중국의 음모이자 농간이고 이그나시오 딩을 마치 괴수의 우두머리와 같이 보도하고 떠벌렸다.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아사히신문>도 이를 이 현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워했다. 하루는 아사히 LA특파원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에서 파견나온 기자라서 그런지 영어가 매우 서툴렀다. 현재의 서명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해서 ‘The Chinese and Koreans, we started together! 한국과 중국계가 연대해 공동으로 전개한 것이다’라고 간단히 설명해 주었더니, ‘Koreans together? 한국인도 함께 말입니까?’라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었다. 중국계는 워낙 반일감정이 강하므로 당연하지만, 한국과 중국계가 연대해 공동으로 전개했다는 사실, 한국계도 깊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이었나 보다.
<아사히신문>에 ‘반일폭동의 진원지는 미국 서해안’이란 기사에서 바른역사 정의연대와 내 이름이 언급되었고 연이어 <마이니찌신문>, <도쿄TV>, <NHK>등 매체들이 로스앤젤레스의 바른역사 정의연대 사무실을 방문하여 인터넷 서명운동의 전개 과정을 상세히 취재해 갔다. 또한 인터넷서명운동의 결과에 대해 일본 언론을 상대로 각기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언론인들은 기자회견 바로 다음 날 딩을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한 전 세계 인터넷 서명운동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정말로 그렇게 많은 숫자가 참여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신들의 배후 조종 세력이 누구인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질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가권력과 미일공조 체제에 항거할 수 있는지, 그러한 풀뿌리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배후 조정 세력 같은 것 없이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부당함을 바로 잡으려는 깨알같은 노력이 세계 여론을 움직였다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 그러한 나라가 어떻게 21세기 지구촌의 리더가 될 수 있겠는가.
2005년 일본의 유엔 상임위 진출을 저지하는 인터넷 서명운동은 일본의 예기를 꺽은 사이버 전쟁이었고, 거기 참여한 우리 모두는 사어버 전사들이었다. 동시에 일본인들의 인식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정신적으로도 일본을 꺽었다. 완전한 글로벌 민초들의 승리였다.
반일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류 보편성을 가진 운동
▲ 2005년 2월 미 국무부 프로그램으로 미국을 방문한 한국 인터넷신문기자들에게 서명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나. 한국의 인터넷기자협회, <통일뉴스>, <프레시안> 기자가 우리 LA 사무실을 찾았다. [사진제공 - 이준희]
▲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을 기자단에게 설명하고 있다. 1848년 세계 최초로 노동자 참정권을 주장한 차티스트 운동이 인민헌장을 새로 쓰는 것이었다면, 우리 인터넷 서명운동은 유엔헌장을 새로 쓰려는 노력이라 설명했다. [사진제공 - 이준희]
거의 한 달 동안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을 거의 잊고 살 만큼 컴퓨터에 ‘전투적으로’ 매달렸다. 낮에는 여기 저기 인터넷서명운동을 온라인상에서 퍼트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밤에는 한국의 언론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와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나의 목표는 단순히 반일이 아니었다. 유엔헌장을 새로 쓸 각오로 덤볐다. 나는 유엔의 상임이사국 제도 자체를 문제삼았다. 실제로 2차대전 직후 유엔 창설 이후 안보리 상임이사국 수는 그 때까지 하나도 늘지 않았다. 몇몇 힘센 나라가 다른 나라의 중대 사안에 생사여탈권을 쥔다는 것이 식민지시대도 아닌 디지털혁명시대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상임이사국은 영어로 permanent seat이다. 미국 등 강대국이 ‘영원히’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 하겠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전범국가가 세계 지도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평범한 시민들의 상식이 힘센 나라가 좌지우지하는 냉혹한 국제정치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지구촌 양심의 연대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다.
서명운동을 위해 당시 내가 모델로 삼은 것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나 유관순이 아니었다. 영국의 이름없는 풀뿌리 민중들이었다. 영국민중사를 전공으로 택하기도 했었지만, 그들이 차티스트 운동, 즉 세계 최초로 일반 노동자들도 투표권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 노동자 참정권 운동을 전개해 역사의 큰 변화를 시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들이 처한 삶은 고달프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귀족과 재산가들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했고 무지렁이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미친 짓’이라 여기던 19세기 사회에서 차티스트들은 인간은 모두 존엄하고 평등하며, 보통시민도 정치에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 이상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쳤다.
그들은 당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이상을 꿈꾸고 후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을 위해 도전한, 위대한 영국 민중이자 위대한 세계인이었다. 비록 그들은 보편참정권이라는 열매를 자신들의 손으로 수확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정신을 명시한 People's Charter (인민헌장)의 차티스트 정신은 아직도 내 가슴에 굳건히 살아있다.
세상을 바꾸는 민초의 힘,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
▲ UN 서명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영화의 밤 행사에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의 People's Charter (인민헌장)을 유엔헌장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유엔 서명운동은 반일운동이 아닌, 보편적인 유엔헌장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운동임을 항상 강조했다. 2005.3.29, 로스앤젤레스. [자료사진 - 정연진]
동강난 한반도의 안타까운 현실은 살벌한 국제정치의 힘겨루기 마당에서 한국이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덩치가 작은 나라도 덩치 큰 나라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러한 세상이 바로 통일코리아가 꿈꾸는 세상 아니겠는가.
나는 아직도 글로벌 민초들의 힘으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 우리에겐 신명나는 일생의 과제인 통일나라를 이루는 꿈이 꿈틀거리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바른역사 정의연대 시절. 우리 웹사이트와 이메일에는 항상 이 문구가 따라 붙었다 “Waging a peaceful war for the justice of humankind.”(인류의 정의를 위해 평화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중….) 통일나라를 실현시키는 꿈 또한 인류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지구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나라가 박수쳐 주겠나.
그리고 그 과정은 치열하겠으나, 파괴적인 것이 아닌, 따듯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감싸안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의 물방물은 보잘 것 없지만, 하나 둘 알알이 바위를 뚫을 기세로 모여, 내가 되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되면, 마침내 거대한 해일이 되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치열한 변화는 소리없이 부드럽게 세상을 감싸는 것이어야 오래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여겼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는 용수철처럼 잔뜩 움츠렸다가, ‘솟아날 기회’를 보고 드디어 하늘로 솟구치는 한국인의 저력. 나는 용수철과 같은 한국인의 저력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한국인의 옹골찬 기개를 믿는다. 그리고 한국인의 기개 넘치는 돌파력으로 우리가 살아생전에 통일코리아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그것은 권력자의 눈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밑에서 위로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과 담대한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본다.
유엔 서명운동에 세계인과 같이한 보편성이 있었듯이, 통일 코리아의 꿈도 세계인과 같이 하겠다. 지구촌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 한국인의 옹골찬 기개로 마침내 우리는 그 꿈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연진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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