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9

[왜냐면] 가면 쓴 대한민국 / 김민철 : 왜냐면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왜냐면] 가면 쓴 대한민국 / 김민철 : 왜냐면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왜냐면] 가면 쓴 대한민국 / 김민철

등록 :2008-10-22 

왜냐면
역사의 과오를 지적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면을 벗고 당당히 보는 게
자학사관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만행에 큰소리치는
일본 우익에게 뭐라 할 것인가



지금 한국사회는 한바탕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고 있다. 국방부·통일부·대한상공회의소·교과서포럼 등 정부 부처와 민간단체들이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하면서 촉발된 논쟁은 최근 대통령, 국회의원, 종교계까지 가세하면서 그 열기가 한층 뜨거워지고 있다.

역사 관련 논쟁의 지형은 근래에 적잖은 변화를 겪고 있다. 한동안 좌파 진보 쪽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이전에 비해) 큰 목소리를 냈는데, 최근에는 ‘좌편향 역사인식 수정’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우파 보수 쪽 목소리가 더 크다. 이에 국내 21개 역사 학술·교육단체는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학문의 영역에 남겨두라고 주장한다. 현행 역사교과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정권 교체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점, 역사학이 전문가들의 능력·식견이 요구되는 학문의 영역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정치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듯이, 역사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역사 논쟁에 참여할 수는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그 주장이 얼마나 정확하고 타당한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느냐다.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는 이들이 자주 근거로 내세우는 점은 이들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정통성이 “그 사회의 정치체제·정치권력·전통 등을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일반적 관념”을 의미하는 한, 정통성은 권력을 매개로 한 강압에 의해 확립되지 않는다. 국방부의 요구대로 전두환 정부를 “일부 친북적 좌파 활동을 차단하는 여러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정부로 서술한다고 해도,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공안기구를 통해 국민을 탄압했던 정권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교과서포럼은 금성판 교과서가 “대한민국 현대사 서술이 시작되는 제4부 ‘현대사회의 발전’ 도입부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소개함으로써 통일이 되기 이전의 대한민국을 역사의 껍데기로 풍자”했다고 비판한다. 시를 쓴 작가의 의도, 이를 교과서에 실은 저자의 진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를 교과서포럼의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던 사람에게, 그와 같은 독창적(?) 해석은 통일 이전 대한민국의 역사가 껍데기일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의 우려를 자신도 모르게 내비치는 ‘제 발 저림’으로 보인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괜히 꼬투리를 잡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부모세대의 잘못이 자식세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난 역사의 과오를 지적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존재해서는 안 될 국가’로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세대의 잘못을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성찰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자식세대에게 요구될 뿐이다. 이를 ‘자학사관’이라 한다면, 역사적 만행에 반성은커녕 큰소리를 치는 일본을 비판하는 우리의 처지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가면을 쓰면 일시적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속일 수는 있다. 당당하게 나설 용기가 없을 때는 가면 뒤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늘 가면을 쓰고 생활할 수는 없으므로 자신을 드러낼 정도의 용기가 생기면 가면을 벗어야 한다. 대한민국도 이제 그 정도의 용기는 가질 때가 되었다. 최근 극심하게 악화된 경제 위기, 정치권의 고질적 무능 등의 부정적 요소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한국은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달성한 ‘자랑스러운’ 나라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이제는 그만 그 가면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가면이 실제 모습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이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우격다짐한다.


사랑한다는 사실은 동일해도 사랑하는 방법과 정도에서는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은 과연 어느 쪽이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할까? 종교적 의미를 떠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널리 인용되는 다음의 구절이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김민철 서울 마포구 대흥동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17536.html#csidxcb8485c29cee0b3a37a4b59d4dbb6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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