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증언⑬] '6.25 전쟁'도, '한국전쟁'도 틀렸다
분단의 원흉은 누구인가
인터넷에서 '분단의 원흉'을 검색해보면 이승만, 김일성, 미국, 소련, 일본, 중국 등이 떠오른다. '원흉(元兇)'이란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니, 당시 남북한 지도자와 주변 4강대국 모두 악역을 담당하거나 주도했다는 말이다. 대체로 진보 쪽에서는 미국과 이승만이 분단을 이끌었다고 서술하는 한편, 보수 쪽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이 분단에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역사를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시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는 승자나 강자에 의해 써지고 고쳐지며 퍼지게 되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고쳐 쓰기'나 '역사 재해석' 또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벌어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분단의 시기와 관련해서도 혼란이 빚어진다. 1945년 8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53년 7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1945년 8월 확정된 38선을 따라 처음으로 국토가 분단되었는데, 1953년 7월 그어진 휴전선이 현재 남북한의 국경선으로 돼버렸기 때문이다.
분단의 원흉이나 시기에 대해 이견과 혼란이 생기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분단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다르고, 역사에 대한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시각과 가치관에 큰 차이가 있으며,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의도적 역사 왜곡은 천벌을 받을 짓이다. 분단이 6·25 전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분단의 원흉이 김일성이나 소련 또는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루어졌다거나 분단이 1945년 38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또는 2014년이 분단 69주년이라는데 동의하면서, 분단의 원흉을 김일성과 소련 또는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를 부리거나 악의적으로 역사 왜곡을 하는 것이다. 38선은 미국이 1945년 8월 조선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소련에 제안하고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분단과 관련해 언론 오보가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인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三相會議)'에서 미국의 끈질긴 요구에 소련이 마지못해 응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가 끝난 12월 27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는데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정반대로 엄청난 오보를 함으로써, '반탁(反託: 신탁통치 반대), 반소(反蘇: 소련 반대)' 운동이 전개되고, 우리 역사책에도 그렇게 왜곡 서술되어온 것이다.
한반도가 1945년 8월 미국이 제안한 38선에 의해 분단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이 늦어도 1943년부터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영국과 소련에 제안하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즉시 독립을 반대했다는 사실은 우리 현대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은 친미 반공의 사회구조 안에서 무지와 오해 그리고 왜곡과 억지가 어우러져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엄연한 사실을 아래서 밝힌다.
1. 한반도 분단의 유형과 과정
분단은 크게 세 가지 유형 또는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1945년 8월 해방과 거의 동시에 38선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잘렸다. 둘째, 1948년 8월 남쪽에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9월 북쪽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짐으로써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에 의해 체제가 나뉘어졌다. 셋째,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6·25전쟁으로 같은 민족이 원수처럼 갈리게 되었다.
한반도는 이렇게 1단계 국토 분단 또는 지리적 분단이 이루어지고, 2단계 체제 분단 또는 정치적 분단으로 강화되었으며, 3단계로 민족 분단으로 굳어졌다. 여기서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분단을 말하면 당연히 국토 분단을 가리킨다. 국토 분단을 통해 서로 다른 체제가 들어서게 되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 민족까지 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2. 해방되기 전에 이루어진 국토 분단
우리는 흔히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고 말하는데,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해방되기 전에 먼저 분단되었다. 해방은 일본 천황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찾아왔지만, 분단은 일본군이 미군에 은밀하게 항복 의사를 전한 직후인 1945년 8월 10일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미군에 항복의 뜻을 전한 때는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직후였다. 소련이 8월 8일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로 진격해오기 시작한 때와 겹치기도 했다. 미국은 막 실험에 성공한 핵무기를 떨어뜨리면 일본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예상했어도, 그렇게 즉시 항복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의사를 받고 오히려 당황했던 것이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8월 10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지도에서 38선을 찾아냈다. 38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고 남쪽에서는 미군이 항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될수록 조선 북쪽 멀리까지 올라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싶었지만, 바다 건너 오키나와 및 필리핀에 있던 미군들이 군함으로 조선에 이르려면 거의 한 달이 걸려야 했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으로 진격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38선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38선 이남이 이북보다 땅덩어리는 조금 작아도 수도 서울 및 인천과 부산 등 큰 항구를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훨씬 더 남쪽까지 내려올 수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하리라 짐작했는데, 소련은 뜻밖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군이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은 터였지만 38선에서 남하를 중지했다.
산이나 강을 따라 이루어진 자연적 경계선도 아니요, 생활이나 풍습이 달라 문화적으로 차별되는 경계선도 아니라, 단순히 토지 측량을 위해 지도에 그려놓은 38선으로 남북이 나뉘게 된 이유다. 한 마을에서 큰집은 북쪽에 작은집은 남쪽에, 또는 한 집에서도 안채는 북쪽에 뒤채는 남쪽에 속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소련군은 북쪽으로 8월 9일 들어왔지만 미군은 한 달 뒤인 9월 8일에야 남쪽에 도착함으로써, 해방된 뒤에도 38선 이남에서는 일본군과 친일파들이 활개 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이 국토 분단의 공범이지만, 정확하게 얘기하면 미국은 38선을 '먼저 제안한 주범'이고 소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종범'이다.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역사에 대한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조선 점령 및 분단에 빌미를 준 침략자 일본도 분단에 큰 책임이 있고, 힘이 약해 일본에 침략당한 우리 조상들도 분단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말이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3. 침략자 일본이 아니고 피해자 조선이 분단된 이유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왜 침략자 일본이 아니고 피해자 조선이 분단되었는지.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분단되었다. 1945년 이후엔 미국이 전쟁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그 이전엔 독일이 그랬다. 다른 나라들이 견제하기 어려울 만큼 군사력이 강하니까 호전적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분단시킨 것이니, 독일은 전쟁이란 범죄에 분단이란 처벌을 받은 셈이다. 그러면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를 침략하고 미국까지 폭격한 전범 국가 일본이 분단이란 처벌을 받아야 했어야지, 힘이 약해 항상 침략만 받아온 피해자 우리가 오히려 분단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 터질 일인가. 더구나 일본은 땅덩어리가 길쭉해서 자르기도 쉬운데 말이다.
어느 나라든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 즉 적에게서 빼앗는 물품을 챙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을 전리품으로 차지했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와 게바라 등이 혁명에 성공해 지금은 북한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반미적인 국가가 되었고, 푸에르토리코는 머지않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 자치령이 되었으며, 괌은 미국의 주와 마찬가지지만 아직 정식으로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기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침략과 점령을 당했지만 1946년 7월 독립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것은 지난날 미국의 식민통치 영향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당연히 미국이 차지했어야 할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자청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끈질긴 요구를 받고 한반도로 내려오던 참이었으니, 미국이 전리품 조선을 소련과 38선으로 나누어 점령하게 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패전국 일본은 미국이 통째로 차지했다 물러가는 바람에 온전한 모양으로 남았고, 전리품 조선은 소련과 나눠 점령하는 바람에 분단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4. 신탁통치 결정과 체제 분단
다음은 조선의 신탁통치에 관해 미국 국무부가 비밀 해제하고 공개한 외교문서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미국이 일본과 한참 전쟁을 벌이던 1943년 3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한 이든(Anthony Eden) 영국 외상에게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을 국제적 신탁통치 아래 두자고 제안했다. 이든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둘째, 미국·영국·중국의 정상들이 1943년 11월 만난 카이로 회담의 속편이랄 수 있는 미국·영국·소련의 정상들이 1943년 12월 만난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조선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꾸리고 유지할 능력이 아직 없으므로 40년간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간단히 동의했다.
셋째,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1945년 2월 만난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필리핀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준비하는 데 약 50년이 걸린 경험에 비추어 조선 사람들은 적어도 20~30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대응했다.
넷째,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1945년 12월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대표는 조선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5년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소련 대표는 조선 문제에 강대국들이 꼭 개입해야 한다면, 조선 사람들이 먼저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하고 그를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대국이 후원하는 것으로 그치자고 하면서, 연장 없이 한 번만 실시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이게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다.
소련의 제안대로 조선에 대한 5년 후견제 또는 신탁통치안이 채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40년, 20~30년, 5년씩 두 번 실시하자고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을 소련은 5년 한 번만 실시하자고 마지못해 응했다.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는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알려진 데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엄청난 오보와 미군정의 교활하고 악의적인 방치가 어우러진 왜곡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반미 친소(反美 親蘇)' 감정을 갖기 쉽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내세워 조선의 자주독립을 늦추려고 한 반면, 소련은 조선의 자치정부를 앞세워 즉각 독립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러나 방법과 과정이 달랐을 뿐, 어떻게 하면 조선 땅에 자신에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인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것은 미국이나 소련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하에서부터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람들이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원했던 것은 너무도 지당하고 합리적 선택이었다. 자본주의의 폐해인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을 뼈저리게 경험했으니 말이다. 북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남쪽의 미군정 아래서도 압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선호했다는 당시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의 속셈은 이러한 조선에 대해, 될수록 오랫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사회주의 대신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친미 정부가 들어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4대국 가운데 당시 중국은 장개석 정부였으므로 자본주의 체제가 3:1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에 외세가 개입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친소 정부가 들어설 것이 뻔했기 때문에, 소련은 조선의 즉각 독립을 바라며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남쪽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되었다고 오해하는데, 그때 실시된 것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미군정이었다.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한반도에서 신탁통치가 실제로 실시된 적은 없다.
1946년 3월부터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 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게 되는데, 조선 사람들 가운데 누구와 협의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미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통과된 신탁통치 안에 대해 찬성했든 반대했든 남북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참가시키자고 했고, 소련은 신탁통치에 관해 협의하는 자리에 신탁통치를 반대한 정당과 사회단체를 어떻게 참가시킬 수 있느냐고 맞섰던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에는 온갖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숫자로 따지면 우익 성향의 단체가 좌익 성향의 단체보다 많았다. 그런데 앞에서 밝힌 것처럼 신탁통치는 미국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반면 소련은 소극적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익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좌익들은 찬성했다. 따라서 미소 공동위원회에 모든 단체를 참여시키면 미국에 유리하고, 찬탁한 단체만을 참여시키면 소련에 유리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한 단체들의 참여 문제에 관해 1947년 5월부터 열린 두 번째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두 나라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일방적으로 결렬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겼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었다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된 것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애초에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기하고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미루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조선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소련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조선의 독립을 앞당겨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한 미국이 신탁통치 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에 신탁통치안에 반대했던 단체들까지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수적으로 우세한 우익 성향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서요, 소련이 찬성했던 단체들만 참여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좌익 성향의 단체들을 앞세워 친소 정부가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을 두기는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미국이 비난을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미소 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면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제 상황을 대강이나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에서 세계 제1의 패권 국가로 군림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이에 맞서 패권을 추구하던 독일과 이탈리아 등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강국들이 겨우 30년 사이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퇴조한 반면, 상대적으로 전쟁의 부담이나 피해가 적었던 미국은 세계의 새로운 지도적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힘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러한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나라가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멸망을 주장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 능력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그리스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고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으로 하여금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해 권력을 장악하도록 시도하는 등 공산주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터키에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지자, 두 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영국은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영국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두 나라를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나서서 소련의 침투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응으로 나온 것이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선언 (Truman Doctrine)이다. 소련의 세력 확장에 맞서 자유국가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중동지역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 나라가 공산화되면 중동지역에서 서구 세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중동의 석유자원도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루먼 선언의 후속 조치로 나온 것이 3개월 뒤인 1947년 6월 발표된 마셜 계획 (Marshall Plan)이다.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유럽을 지키기 위한 경제적 처방으로,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유럽 경제를 복구하고 나아가 경제 혼란을 틈타 공산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유럽에 전폭적인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1947년 무렵 미국은 유럽 지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어서 한반도에 신경 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발을 빼자니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 같았다. 당시 미국의 의회나 군부는 한반도가 그리스나 터키보다 전략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무부는 1947년부터 한반도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으면서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는데, 고심 끝에 나온 계책이 바로 미소 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유엔을 통해 한반도를 관리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무렵 작성된 미국의 외교문서도 밝히고 있듯이,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조선에서 소련의 지배를 막는 일이요, 조선의 독립은 2차적 목표"였던 것이다.
유엔에서는 미국의 의도대로 한반도 문제가 처리되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여 이른바 비동맹 세력으로 유엔에 진출할 때까지는 유엔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내놓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에 소련이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 5월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강행되고 이를 통해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이에 맞서 1948년 9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섬으로써 체제 분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위와 같은 단독선거를 통한 분단 고착을 막겠다고 저항했던 운동의 하나가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이요, 이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도행 배에 오르는 것을 거부한 군인들의 저항이 이른바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다.
정리하면 미국은 신탁통치를 줄기차게 제안했다가 미소 공동위원회를 일방적으로 결렬시켰으며,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겨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강행토록 함으로써, 한반도 국토 분단에 이어 체제 분단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토 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제 분단에서도 미국이 주범이고 소련은 종범이었던 것이다.
5. 6·25전쟁과 민족 분단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약 3년간의 전쟁을 통해 같은 민족이 원수처럼 갈리는 민족 분단이 이루어진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얘기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니 김일성이 민족 분단의 원흉이라는 점도 거듭 밝힌다.
(1) 전쟁의 명칭에 관해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이름 짓는 데 날짜를 포함하기 좋아한다. '3·1절', '4·3제주항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6·25전쟁', '8·15광복절' 등으로 말이다. 나는 이게 좀 불만스럽다. '3·1절', '5·16쿠데타', '8·15광복절' 등과 같이 어떠한 일이 일어나 그 행위가 오래 지속되지 않고 하루에 끝났다면 이런 명칭도 괜찮다. 그러나 '4·3제주항쟁', '4·19혁명', '5·18광주항쟁', '6·25전쟁'처럼 운동이 이틀 이상 지속되었다면 어느 특정한 하루를 잡아 명칭을 정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특히 '6·25전쟁'은 몇 달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지속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니다. 남쪽 안에서 일어난 이념 갈등은 빼더라도,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남북의 군대가 격렬하게 충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미군이 이 땅에 발을 디딘 1945년 9월부터 1950년 6월 이전에 분단에 따른 갈등과 투쟁 때문에 거의 10만 명이나 죽었는데, 전쟁이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부적절하고 '6·25전쟁'이라 이름 붙인 것도 어색하다. 이 명칭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시작했다"는 점을 세뇌시키기 위한 의도가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나 세계사에서나 무슨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공부할 때 연도를 넘어 날짜에다 요일과 시각까지 암기한 적이 또 있는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과 이유보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인식을 강요당한 셈이다.
참고로,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는데, 미국이 점령해서 식민통치하고 있는 조국의 남쪽을 해방시켜 통일한다는 취지와 목표를 드러낸 이름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The Korean War)'이라고 하는데,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전쟁'처럼 전쟁이 일어난 장소를 포함시킨 명칭이다. 중국은 '항미원조 (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름으로써 '미국에 대항해 조선 (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유럽의 한 학자는 '한국전쟁'이라 표기하는 것도 전쟁의 성격을 왜곡시킬 수 있다며, '한국에서의 전쟁 (War in Korea)'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남북한만 전쟁을 벌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쉬운데, 전장은 한반도지만 전쟁 주체는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전쟁'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략해 전쟁을 벌일 때 남한 언론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라크전쟁'이라 썼지만, 미국 언론은 'War in Iraq (이라크에서의 전쟁)'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참고하기 바란다.
(2) 전쟁의 성격에 관해
앞에서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이란 이름을 소개하며 "남조선을 해방시켜 통일한다는 취지와 목표"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듯이, 6·25전쟁은 분명히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2005년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 교수가 한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고 썼다가 검찰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대학에서 직위 해제된 적이 있다. 이에 앞서 2001년엔 김대중 대통령이 6·25전쟁을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라며 앞으로는 결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데 대해 국회에서는 북한의 입장만을 대변했다며 대통령직을 사퇴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6·25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해야지 어떻게 '통일전쟁'이라고 하느냐는 억지였다. 1945년 9월 남쪽에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하는 불순하고도 무식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점령군도 되고 해방군도 되었듯이, 침략전쟁도 되고 통일전쟁도 된다. 둘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며 보완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분명히 '남침'과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적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면 이게 통일을 위한 전쟁이지 분단을 위한 전쟁이었단 말인가.
보수주의자들은 6·25전쟁을 북한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 기습 침략을 감행한 전쟁이라고 한다. 맞다.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6·25전쟁을 북침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지 모르겠는데, 김대중 대통령이나 강정구 교수는 분명히 6·25전쟁을 북침전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전쟁을 1950년부터 시작된 '6·25전쟁'으로 한정하지 않고 분단 이후 시작된 전쟁으로 범위를 넓혀 본다면 미국이 전쟁을 부추긴 점도 있고, 남침이 먼저냐 북침이 먼저냐 따지기가 애매하거나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6·25전쟁'만 떼어놓고 본다면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먼저 침략을 저지른 남침전쟁이다. 그렇다고 적화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침략전쟁은 통일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통일은 여러 가지로 추구할 수 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도 있고, 전쟁에 의한 통일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녹화(綠化) 통일도 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적화(赤化) 통일도 있다.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며 수렴될 수 있는 통일도 있고, 한 체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통일도 있다. 이 가운데는 바람직한 통일도 있고 꼭 피해야 할 통일도 있다.
6·25전쟁은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적화통일 시도였다. 수단과 방법이 나빴어도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고,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가 달랐어도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김 대통령이나 강 교수가 이러한 통일 시도의 방법과 목표를 바람직하다고 했다면, 나를 비롯해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수 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6·25전쟁이 통일전쟁 또는 통일 시도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가 도대체 왜 시빗거리가 되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1950년대에는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무력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다가, 남쪽에서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북쪽에서는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앞으로는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에 의한 통일은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지, 통일전쟁이냐 아니냐라는 말도 되지 않는 시비는 없어져야 한다.
(3) 미국과 중국의 참전에 관하여
미국은 남쪽을 살렸고 중국은 북쪽을 구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각각 남쪽과 북쪽에 군대를 보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2~3개월 만에 끝나고 사회주의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5~6개월 만에 끝나고 자본주의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나라의 개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남북이 각각 자신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이요,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빨리 끝났을 전쟁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희생자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강정구 교수가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른 것보다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전쟁이 빨리 끝났을 테고 사람들이 덜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유명한 정치학자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전쟁에 미군포병 연락장교로 참여했다가 1968년 <The Korean Decision> (한글 번역본: <미국의 한국 참전 결정>) 이라는 책을 펴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글렌 페이지 (Glenn Paige)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가 1977년 자신의 책을 스스로 비판하며 하나의 폭력에 대해 또 다른 폭력으로 대응한 것을 반드시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반성했던 것이다. 미국의 개입 때문에 중국까지 참전하여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남북 양쪽에서 수백만 명이 죽게 된 것을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책 <To Nonviolent Political Science: From Seasons of Violence>가 1999년 안청시 서울대 정치학교수와 정윤재 한국정신문화원 정치학교수에 의해 <비폭력과 한국정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지금은 남한이 북한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롭다. 쉽게 말해 체제 경쟁은 끝났다. 그러기에 남한에는 그때 수백만 명이 죽었을지라도 사회주의 체제에 흡수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1940~5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북쪽이 남쪽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더 안정되어 있었고 훨씬 개혁적이었으며,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원했었다. 따라서 지금의 기준이 아닌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면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막고 사회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바랐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4) 전쟁의 피해에 관하여
6·25전쟁의 피해와 관련하여 1998년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정책자문 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교수가 오래전 발표했던 논문에서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녘 인민들이었다"고 쓴 구절에 대해,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층은 무슨 빨갱이 같은 소리냐며 흥분했던 것이다.
6·25전쟁을 통해 남북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에 의한 남쪽 양민의 피해만 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노근리'를 통해 밝혀지고 있듯이, 남쪽 양민들은 미군과 국방군에 의해서도 끔찍한 피해를 당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친북이나 반공이라는 감정을 떨쳐버리고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최 교수의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군 조종사들이 북한을 공격할 때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면, 6·25전쟁 중 북쪽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가 1951년 6·25전쟁을 소재로 그린 스케치가 있다. '조선에서의 학살 (The Massacre in Korea)' 이란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벌거벗은 임산부들과 아이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면 언뜻 인민군들이 남한 양민을 학살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1950년 10월 38선을 넘은 미군들이 황해남도 신천에서 52일 동안 머무르며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미국은 6·25전쟁 중에 북한이 1세기 동안 걸려도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파괴하려 했다고 한다. 북한의 모든 산업시설을 초토화하여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 북한이 피해 복구를 쉽게 하지 못하고 경제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못하다고 선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북한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어느 쪽 군인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문제와 어느 쪽 양민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는 문제는 분명히 별 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5) 전쟁의 경과와 결과
한국전쟁이든 6·25전쟁이든 1953년 끝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실질적으로는' 끝났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종결되지 않았다. 1953년 7월 맺어진 것은 전쟁을 쉬거나 멈춘다는 휴전 또는 정전협정이었지, 전쟁을 끝내거나 평화를 추구하자는 종전 또는 평화협정이 아니었다. 61년이나 지나도록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남한과 중국은 1992년 적대 관계를 풀었지만, 북한과 미국은 아직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는 불안정하다. 따라서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앞으로 6·25전쟁을 생각하거나 기념하면서, 전쟁을 언제 누가 왜 먼저 시작했는지 따지면서 상대방에 대한 원한이나 적대감을 키우기보다는 왜 아직까지 휴전 또는 정전협정을 종전 또는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어떻게 평화와 통일을 진전시켜야 할지 고민해보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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