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8
[법정증언①]'존경스러운 노교수'와 '쳐죽여야 할 빨갱이'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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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증언①]'존경스러운 노교수'와 '쳐죽여야 할 빨갱이' 사이에서
글쓴이 : 날짜 : 15-04-02 10:32 조회 : 581
연재를 시작하며
2008년 10월부터 2014년 6월까지 10여 차례 법정 증인석에 앉았다. 서울 법원에서 부산 법원까지, 용산 군사법원에서 대전 군사법원까지, 1심 재판정에서 항소심 재판정까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두 번 법정을 드나든 셈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심 갖고 공부하거나 운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걸려든 사람들 재판에 ‘전문가 증언’을 한 것이다.
피고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범민련)>,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범청학련)>, <6.15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한국진보연대> 등 이른바 '강성 단체' 또는 '이적 단체 대표나 회원들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데모 없이는 하루해를 보내기 어려웠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대학에 다니면서도 시위에 앞장서기는커녕 맨 뒷줄에나마 뒤섞여본 적도 없는 나에게 그들의 언행은 불편하거나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이른바 '운동권'에 몸담아본 적이 없는 터라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하고 친분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위험한 증언을 그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남용하며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검찰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다.
지난 6월 23일엔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 혐의 항소심 재판 증인석에 앉았다. 2년 전 2012년 5월 그의 이름이 언론에 거의 매일 오르내리며 '통합진보당 사태'가 전개될 때 나는 "진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너무 역겹다"며 "진보 정당은 거듭나야 한다"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2013년 8월엔 그가 무슨 지하 혁명조직을 만들어 내란을 음모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검찰 발표에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를 점잖게 표현하면 '과대망상증 환자' 거칠게 말하면 '미친놈'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재주로 어떻게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 있으리라고 내란죄로 처벌하겠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으로 전문가 증언에 나선 것이다.
법정 증인석에 앉을 때마다 그렇듯 이번에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정전협정 위반, 주체사상, 연방제통일 방안, 그리고 주한미군의 성격과 반미운동 등 우리 사회의 '성역' 또는 '금기 사항'에 관해 소신껏 얘기했다. 15명 안팎의 판사, 검사, 변호사를 앞에 두고, 50~60명 정도의 기자와 방청객들을 뒤에 둔 채 내 딴엔 열강을 펼쳤다.
서울 고등법원에서 증언을 마치자마자 다음날 강연을 위해 바로 제주로 날아갔다. 그날 자정 무렵 서귀포의 한 펜션에서 경기도의 한 원로신부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오랜만에 시원한 얘기를 들어 밤이 깊었는데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경향신문>의 '속보'를 덧붙여준 것이었다. "원로학자 '이석기 내란음모 시기, 북의 전쟁 위협 없었다"(☞기사보기) 는 제목이 재미있었다. 앞 모습과 달리 백발이 성성한 내 뒤통수만 방청석에서 바라본 기자가 제목을 뽑은 모양이다. 검찰이 이석기 의원의 혁명 조직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맞아 남한 내 주요 국가시설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재봉 원광대 사회과학대학장은 그 무렵 한반도에 전쟁 위협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엔 미국에 사는 처남이 한국 신문을 보았다며 아무 일 없느냐고 걱정스레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인터넷에서 <조선일보>를 찾아보니 "이석기 측 증인 '천안함·연평도 사건, 南이 北 자극해 일어났다' 주장"(☞기사보기)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떠올랐다. "이재봉 원광대 평화연구소장이 '천안함 사건은 남한과 미국이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북한 코앞에서 벌이느라 북한을 자극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지켰다면 이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식의 극우신문치고는 별 왜곡 없는 보도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엔 "與 '이석기 측 이재봉 발언 충격…아직도 北 옹호 활개'"(☞기사보기)라는 기사가 나타났다.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24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 재판 증인인 이재봉 원광대 평화연구소장을 향해 '아직도 북한 옹호 발언이 활개치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이라고 비난했다"는 자극적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소장은 (중략) '한반도를 공산화시키려는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은 철학적 측면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는 등의 언급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는 등의 악의적 왜곡이 덧붙여졌다.
새누리당 원내 대책회의에서 내 증언에 시비를 걸었다니 날 비난하기보다는 여당 사무총장이라는 막강한 위세를 악용해 재판부에 영향을 미치려는 불순하고 음흉한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극우신문의 같잖은 기자와 수구정당의 치졸한 정치인이 짜고 치는 종북 타령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불쾌감과 분노를 떨치기가 쉽진 않다.
제주에서 돌아와 차분하게 인터넷을 뒤져보니 난 '존경스러운 노교수'와 '쳐죽여야 할 빨갱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홍성규 통합진보당 대변인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비난하는 동영상도 떠올랐다. (☞영상보기)"윤상현 사무총장이 내란음모 조작사건 항소심 전문가 증인 이재봉 원광대 평화연구소장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음해했다"는 내용이었다. 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어도 현실 정치엔 일부러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데, 요즘 언론에서뿐만 아니라 국회에서까지 내 이름이 들먹거려진 것이다.
이에 기자를 상대로 정정 보도를 요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요 수구 정치인에게 맞장 토론을 제안하는 것은 내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하며, 차라리 지금까지의 법정 증언을 널리 그리고 제대로 알리는 게 나을 듯하다.
첫째, 북한은 '반국가 단체'가 아니다. 북한도 남한 못지않은 국가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자주성이 없다는 뜻의 '괴뢰'는 더욱 아니다. 빌어먹고 굶어 죽으면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거지 국가'나 '깡패 국가'로 비난할 수는 있어도, 군사적으로 미국에 종속적인 남한이 군사적 자주성만큼은 어느 나라보다 강한 북한을 '괴뢰 국가'로 욕할 수는 없다.
둘째,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분단의 원흉'도 아니다. 해방 이후엔 6.25전쟁을 일으키고 50년 독재정치를 이끌며 권력세습까지 이룬 원수였을지라도, 해방 이전엔 어린 시절부터 누구보다 용감하게 목숨 걸고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위인이었다.
셋째, 주체사상은 대남 적화전략이 아니다. 1970년대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면서 수령 독재를 미화하고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악용된 점이 있지만, 물질보다 사람을 중시하며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자는 철학은 본받을 만하다.
넷째,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는 남한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며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이 크다. 남한은 미국의 핵우산을 받고 있지만,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핵우산을 받은 적이 없다. 또한 남한 땅에서는 미국 핵무기가 1991년 철수되었지만, 한반도 주변 해역에는 핵무기를 실은 미국 잠수함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다섯째,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은 남북한이 서로 자기네 영해라고 주장하는 위험하고 민감한 북방한계선 (NLL) 주변 해역에서 남한의 군사훈련 등 북한에 대한 자극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다. NLL은 본디 남한의 해상 도발 및 북한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군이 1953년 8월 그은 선이지, 북한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만든 경계선이 아니다. 미국조차 인정하듯, 국제법적 근거도 없고 영해선도 아니라는 뜻이다.
여섯째, 북한의 연방제통일 방안이 1980년대까지는 남한을 적화하기 위한 공세적 통일 전략이었을지라도, 1990년대부터는 남한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한 수세적 통일 방안으로 바뀌었다. 무슨 정책이든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높아야 하는데, 남한의 국가 연합제나 북한의 연방제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통일 방안은 찾기 어렵다.
일곱째, 북한만 정전협정을 위반하며 도발하는 게 아니다. 미국은 1958년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위해 북한보다 먼저 그리고 심각하게 정전협정을 위반하기 시작했다. 남한은 해마다 몇 차례씩 미군을 불러들여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지만, 북한은 단 한 번도 중국군이나 러시아군을 끌어들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는다.
여덟째, 주한미군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라는 북한은 줄기차게 평화협정을 주장하는데,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는 미국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역설적 현상은 바로 주한미군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미군이 남한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 법적 명분이 약해지거나 없어지고, 주한미군이 떠나게 되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유지해야 하고, 주한미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적으로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아홉째, 남한의 반미운동은 북한의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다. 1980년대 광주항쟁 이후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니다. 1945년 8월 미국의 38선 제안에 따른 한반도 분단 및 점령과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주춤하다 1960년 4월 혁명과 1964-65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과정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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