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Nam-sik In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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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촬영된 한강의 짧은 인터뷰였다. 요즘 언급되는 그의 대표 소설들은 거진 읽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에 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말할 때의 음색, 시선과 눈빛을 화면으로 듣고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글과 그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하고, 또 어떤 표정에서는 글과 완전히 다른 생소함이 전해지기도 했다.
대화중 한마디의 여운이 길었다. 질문자가 물었다.
"글을 쓴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작가는 가장 받지 않고 싶은 질문이라며 살짝 웃고, 시간을 오래 썼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한마디씩 내어놓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심하는 거예요...... 계속 결심해야 문장과 문단과 글이 만들어지지요. 단어 하나를 고르는 것도 결심이고.... 문장을 어떻게 맺을지, 주어를 무엇으로 놓을지.... 이런게 하나하나가 다 결심들이죠"
그랬다. 그래서 글을 쓰는게 그렇게 고단했던게다. 종이 한 쪽을 채우기 위해 나도 모르는 무수한 결심들이 이어졌어야 했으니까. 질문과 상상에는 결심이 필요없다. 그저 열린 생각을 이어나가면 된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그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결심을 엮어가며 한문장 한문장 매조지는 거다. 마침표 하나에 담긴 결심이 무겁고 또 무거운거였다. 그리고 또 결심의 고민꺼리를 가득 안은채 다음 문장을 시작한다.
어쩌면,
말 한마디 내어놓는 것도 결심의 연속일거다. 오늘 아침 수업시간에 외교관 후보자들에게 이 인터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약간 꼰대스럽게 내 이야기를 덧대었다.
말할 때... 날리듯 생각없이 내어놓지 말자고.
단어 하나 고르는 것도, 정성을 다해 결심하고 선택하자고,
일물일어설을 믿는양 체에 거르듯 고르고 골라 말을 잇자고,
사람에게 말을 전달할 때, 가장 잘 다듬어지고 규격에 딱 맞는 말을 구사한다면... 그 자체가 품위있는 언어로 상대를 존중하는 외교관의 매력, 아니 인간의 매력 아닐까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내게 다짐시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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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오늘 포스팅. 요즘 일들이 겹쳐져서 약간 수정 후 옮김)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로마의 앞잡이로 식민 속국 유대땅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기의 재산을 불리던 악한 관리였다. 사람들은 혹여 중과세 당할까 그를 겉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뒤에서는 욕하고 저주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자기 백성을 식민주의에 잡아 가두는 역할을 했으며, 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가렴주구로 인한 호의호식이 그를 마냥 행복하게 했을 리 없다. 앞에서는 다들 굽신거리지만 동족에게 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관성은 무서운 것. 그럴수록 더 재물을 탐했고, 재물이 쌓여갈수록 그의 눈은 핏발이 섰다. 이렇게 달려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때론 두려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소문을 들었다. 예수라는 한 청년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에 여리고를 들른다는 소문이었다. 서른세 살 희한한 청년 소문은 이미 유대 땅에 퍼져있었다. 이상한 기적도 행하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그 주변에 몰린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메시야일 수도 있다는 소문마저 들렸다. 만일 그가 메시야라면... 삭개오에겐 공포였다. 로마 제국을 붕괴시키고 선민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켜 왕이 될 인물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로마에 부역하고, 백성들을 수탈했던 자기는 일순위 적폐다. 그럼에도 마냥 두렵고 싫기보다는 보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궁금했다. 돈 모으는 것 말고는 삶의 흥미가 없었던 삭개오에게 어쩌면 그 청년은 피로한 인생을 뒤집는 변곡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수의 동선을 예측하고 미리 달려갔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삭개오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키가 작은 그는 인파로 인해 예수의 행렬을 볼 수 없었다. He wanted to see who Jesus was, but being a short man he could not, because of the crowd”
키가 작은 삭개오였지만 어쩌면 키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법도 하다. 대략 의지만 있으면 군중들을 뚫고 앞으로 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군중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삭개오도 군중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백성들의 혐오를 받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섣불리 그들과 섞이기 두려웠다.
대중에게 유리된, 손가락질당하는 그는 돌무화과나무위로 올랐다.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군중들과 떨어져서라도 예수라는 사람을 직접 보고 싶었다. 물론 언감생심 예수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다는 것 잘 안다. 그냥 어쩌면 메시아일지 모를 청년을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 욕먹으며 살아온 자기의 피폐한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을지 모른다. ‘의인’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 이름과 거꾸로 살아온, 백성 수탈의 대명사로서의 삭개오는 뭐라도 붙잡고 싶은 목마름이 가득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예수가 지나갈 동선을 예측하고 나무위에 올라 먼발치에서 보고자했던 삭개오였다. 높이가 다르니 예수와 눈이 마주칠 가능성도 없었고 그저 내려다보고자 그 자리를 잡았던 터였다. 그런데 예수가 나무 아래 바로 삭개오가 자리잡은 그 지점에 이르자 (Jesus reached the spot) 발걸음을 멈추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he looked up) 외쳤다. “삭개오. 즉시 거기서 내려오시오. 나는 오늘 반드시 당신 집에서 머물러야하오 Zacchaeus, come down immediately.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May I" 도 “I would like to" 도 아닌 "I must" 였다. 군중은 웅성거렸다. 세상에 식민 제국에 부역한 것도 미워죽겠는데 백성들의 재산까지 수탈한 천하의 몹쓸사람 집에 예수가 머무른다고? 미리 통성명을 하거나 자기를 소개하는 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삭개오가 예수의 유숙을 읍소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예수는 마치 그 지점이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였던것처럼 돌무화과나무 아래에 섰다. 그리고 올려다보았다. 삭개오를 불렀고 내려오라 요구했다. 그 집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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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공생애 당시 세리와 창녀와 사마리아인, 그리고 이방인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사람들은 창녀와 사마리아인과 세리를 묶어서 욕했다. 창녀는 도덕적 타락, 사마리아인은 종교적 타락의 상징이었기에 추상적인 분노에 가까웠다면, 세리는 내 돈을 빼앗아가는 물리적 분노의 대상이었다. 창녀나 사마리아인은 대놓고 욕지거리를 할 수 있지만, 세리 앞에서는 슬슬 피했을 것이다. 어쩌면 분노와 증오의 차원이 달랐을것이다.
어떻든 그들을 미워하고 따돌리는 것은 ‘의로운’일이었다. 사회 지도층일수록 얼만큼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 스스로의 의를 증명하는 척도였다. 대중들의 지지와 환호를 얻으려면 그들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거꾸로였다. 세리의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같이 보냈다. 당시 규례로 보면 마치 건강한 이가 나병환자의 집에 들어가 하루 머무는 것 같이 위험하고 부정한 일이었다.
삭개오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나무에서 황급히 내려왔다. 예수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나무 위를 올랐는데, 이제 그 앞으로 내려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게 된 셈이다. 처음엔 아마도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않았을까? 연후 구주의 말을 듣고 일어서며 말했다.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노라 약속했고, 속여서 빼앗은 부당 과세의 네 갑절을 납세자들에게 돌려주겠노라 서원했다. 예수의 요구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에 걸리던 부분들을 그저 예수와의 몇마디 대화끝에 결단했다. 회심이었다.
삶을 돌이키는 변화의 핵심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삭개오에겐 축재한 물질을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있었다. 특히 세리장 삭개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예수가 그의 집에서 유숙하기 전, 즉 구주의 시선과 말씀으로 사람은 이렇게 바뀐다.
구주는 반식민운동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모아 정의를 위한 집회나 농성에 나서지 않았다.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압제하는 제국 로마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 하수인들의 중과세에 대한 납세거부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병정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어 십자가의 수욕을 감당했으며, 세금도 시저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서 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혐오받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상을 바꾸어나갔다. 건전한 가정 캠페인이나 순결, 윤리 증진 운동같은 것 하지 않았다.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에게 돌을 쥐어들고 분노의 형을 집행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서서 그 여인 편을 들었다. 대신 연민의 눈길로 ‘다시는 죄짓지 말라’ 조용히 당부했다. 일부러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올라가시면서 전 남편 다섯을 둔 기구한 여인에게 예배의 비밀을 알렸다. 성소를 들어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시대에 ‘영과 진리’의 본질을 설파한 것이다. 여리고 피의 길 비유를 들어 강도당한 자의 친구는 ‘옳다고 믿는’ 자칭 주류 의인이 아니라, 배척받는 사마리아인임을 말했다.
지금 우리. 혐오가 만연한 세상이다. 혐오는 '나는 옳고 깨끗한데 쟤는 틀리고 더러워'에 다름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잘살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도 더 너그러워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증오와 규정짓기와 편가르기로 온통 서로를 탐색하는 세상이 되었다. 99% 비슷하더라도 1%만 다르면 그 차이로 인해 기꺼이 손가락질과 비난을 일삼는다. 교회 공동체도 다르지 않다. 무슨 무슨 운동으로 스스로 띠를 두른다. 여전히 이방인과 소수자에게 부지불식간에 배타적이고 때론 노골적으로 적대하기도 한다. 200만이 모여 회개하자고 한다. 함께 죄악을 토설하자고 한다. 회개는 아름답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분명 회개의 기도를 위해 모이는 것 같은데 잘못되었다고 정죄받는 타자들이 어른거린다. 회개의 심정은 세상의 누구, 어떤것들을 바꾸는게 아니다. 오직 나와 구주만 남는 정경에서 비롯된다. 맞다. 공동체의 회개를 특별히 요구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맥락은 같다. 결국 가슴 움켜쥐고 옷을 찢으며 내 잘못, 내 공동체의 잘못을 통회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는 예수가 보인 행적을 기억하며 한땀 한땀 따라가야 한다. 배척하거나 혐오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척과 혐오의 대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 함께 교제하고 대화하고 보듬어 안는다. 그리고 오직 그 삶의 궤적만이 사람을 바꾼다. 삭개오에게 단 한마디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구주는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삭개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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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찬송가 96장. 마침 삭개오가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고자 했다는 (He wanted to see who Jesus was) 본문 구절과 맞물려 한구절 한구절 노래 부르는 내내 묵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온 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되고 우리 영광 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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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근원 '아르케고스' (Archegos) 에 대한 탐색은 늘 갈무리하는 생각의 소재다. 고대 신인동형동성 시대의 아르케가 신, 다시말해 불핀치가 묘사한 '인간과 친근한 희랍의 신'이었다면, 밀레투스 학파는 신을 내려놓고 가견적인 자연을 들이밀었다. 자연이 곧 아르케였다.
그리고 만물의 아르케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무리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명제는 강력하다. 아직도 살아숨쉰다. 사술과도 같은 억지논리로 사람들을 희롱한 궤변론자들이지만, 그 주제만큼은 육중하다. '人本' 주의가 궤변론자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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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의심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의 테제는 로고스 중심성으로 수렴, 거기에 천착한다. 전체 인간에게 균질적으로 나뉘어진 진리와 혜안의 분량을 넘어서는 로고스가 존재하고, 이에 의해 견인되는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 플라톤의 '철인'은 로고스를 구현하는 이땅의 에이전트다.
소피스트에 의해 처음 발을 내디뎠던 '인본'은 플라톤의 로고스에 의해 논리적으로 부정되는 좌표에 위치했다. 플라톤 철학이 교부들에 의해 기독교 신학으로 이어지면서 이후 로마교회의 기독교는 로고스에 모든 것을 건 '神本'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성한다. 人本은 후퇴했다.
이후 이 '인본'과 '신본'의 아르케고스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중해 지역 인간 사상사의 궤적을 그려냈다. 때론 인본의 시대, 때론 신본의 시대, 그리고 그 교점에서 나타난 혼란과 갈등...
아르케고스를 신에게로만 집중해서 인간의 자아를 최대한 무력화시켰던 시대가 중세 암흑시대라면, 반대로 아르케고스를 '인간'으로 보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합리성에 사유의 중점을 두었던 일련의 흐름,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도 이어졌다.
신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못버린 이들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에 의혹의 눈초리를 둔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거부하고, 신의 이끄심을 여전히 숭모하는 '중세적' 논지를 수호하는 십자군임을 자임한다. 그것이 신본주의임을 확신한다.
반면 신의 세계를 거부하고, 인간의 세계에서 이상향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아니 설사 이상향을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말살되는 신의 세계에 몸 둘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계몽'의 이름으로 또는 '허무'의 이름으로 '절대자'를 거부했다.
흐름은 이렇다.
고대 희랍 (신의 세계) - 밀레투스 학파 (자연의 세계) - 소피스트 (인간의 세계) - 플라톤 (이데아의 세계, 곧 신의 세계의 전초) - 교부들의 신학 (신의 세계) -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다시 인간의 세계) / 종교개혁 (본래 신의 세계의 복원) - 최근의 근본주의 (다시 신의 세계)
이렇게 아르케를 중심으로 신-인간의 회귀반복으로 지중해세계의 사상을 풀어나가는 것은 뭐 그닥 어렵지 않은데...
그러나 실제 기독교의 세계는 이렇다.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이미 하나된 것. 즉 신과 인간이 이항대립적 존재 즉, 복종 피복종의 관계 및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인 것이 사람들 인식의 핵심 축이지만, 그리스도의 화육강세 (incarnation)은 이러한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간 대립의 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단순히 물리적 격벽의 해체가 아니라, 화학적으로 중간지대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즉 신과 인간간의 격실이란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버린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본주의의 토대는 인본주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을 통하여 신의 관심과 애정이 인간에게 고스란히 투사되는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 신의 시선은 광활한 우주공간을 관통하며 불같은 눈으로 사람 하나하나를 응시한다. 이 관심과 애정은 십자가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직접 죽으셨다는... 이 엄청난 충격의 사건은 신본과 인본의 두 아르케를 하나로 합해버렸다. 따라서 신을 위한다고 하면서 인간을 배척하거나, 인간의 희생을 전제로 한 신의 영광 추구란 형용모순이 된다.
역으로 말해도 같은 논리가 성립된다. 인본주의의 토대는 신본주의에 놓여있다. 왜 사람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가? 왜 인간 하나하나의 권리는 천부적인 것인가. 간단하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대속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은 인권의 기초가 된다. 나아가 구주의 죽으심이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성서 기자의 진술은 모든 성서의 활동이 救贖事 (saving activity) 에 수렴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과거의 사상사가 신과 인간간의 줄다리기로 본 것은 세속적 관점이다. 신앙의 눈길로 세상을 보면 신본과 인본, 두 아르케는 이미 하나다. 따라서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신학이란 기독교가 아니다. 신 자체가 추앙을 받으면서도 인간이 비하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세리와 창녀와 죄인 사이에 두시면서 이를 확고히 입증하셨다.
덧. 신본과 인본의 하나됨... 이에 가장 큰 도전은 19세기부터 세상을 강타한 資本주의이다. 새로운 아르케가 등장했는데... 이 아르케고스는 정말 견고하고 편재적이다. 資 (돈) 가 아르케고스가 된 세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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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얹기.
이 땐 이 작품이 8년 후 노벨상 수상작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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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아이들은 아침부터 부지런떨면서 학원에 가고, 아내는 OECD 보고자료 작성에 몰두하고 있고 (재택 근무의 최대 폐해는 주말에도 생각나면 일을 잡게하는 '평일-휴일 불가분성'에 있음), 나만 잉여다. 오랜전 ebook 다운 받아놓고 읽기를 미루어왔던 소설들 중 하나를 열었다.
'채식주의자'
모처럼 잉여의 시간을 즐기기에는 좀 무거웠다.ㅠㅠ
자기씨로 낳은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하던 아버지의 폭력성은 딸 영혜에게는 '동물성'과 등가로 인식된다. 잔혹의 극단으로 개를 잡는 광경은 모든 동물적인 존재, 특히 인간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듯하다. 만물의 영장 운운하며 합리성과 이성, 그리고 사유를 자랑하는 인간의 DNA 속에 숨겨져 내재하는 잔인성과 폭력성은 어느정도 사실 아니던가? 이념과 종교, 사상, 정체성에 따라 수천 수만을 살상하고도 기뻐하는 種이 인간 아니던가?
스스로 고깃덩이인 인간 중 하나인 영혜는 절망한다. 존재에 대한 혐오는 스스로를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누군가 말했듯 '먹는 것이 곧 자신의 본체를 구성하'기에 영혜는 섭생을 바꿈으로 폭력적 인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소설에는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꿈. 또는 어떤 계기로, 어느 순간 일체의 고기를 거부한다. 살륙과 포악의 성정으로부터 탈출하려 몸부림친다. 아버지는 고깃덩이이기를 거부하는 영혜의 입을 벌려 다시 고기를 억지로 먹이다 실패하자 다시 뺨을 갈긴다. 포악의 대물림을 거부하며 영혜는 더욱 완강히 저항한다. 육식뿐 아니라 곡기를 끊기 시작하는 그녀는 채식주의자 '인간'이 아닌, 아예 '식물'로의 변태 (metamorphosis)를 꿈꾼다. 모든 움직이는 것들로부터, 아예 하늘과 땅의 수직적인 세포분열과 생장만이 가능한 식물을 동경하게 된다. 적어도 식물에게선 폭력과 잔혹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선 자리에서 땅으로 뿌리내리고, 위로 오르기만 하는 공존의 상징이 식물 아니던가.
형부와의 비인륜적 (그러면서도 근친상간은 아닌) 성관계는 애초 육적 쾌락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식물에게도 번식 욕구는 살아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몸을 꽃그림으로 덮은 영혜는 풀숲과 꽃술 그려진 J, 그리고 형부의 성기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며 '동물'적 쾌락 아닌, '식물'로서의 감각에 기댄 번식욕구를 경험하려 한다. 그리고 의외라고 할까? 동물로서의 교미가 아닌 식물로서의 수정에도 성적 엑스타시가 존재함을 은연중 드러낸다. 식물세계에서 뜻밖의 쾌락을 확인해서였을까? 영혜는 더욱 식물화의 길을 걷는다.
나무처럼 살려하고, 나무가 되어가고 싶어한다. 영혜는 언니 인혜에게 말한다. 한 자리에 서 있고 움직이지 않는 나무들은 "꼭 형제 같다고". 자신에게는 땅에서 획득하는 '음식'이 필요한게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지는 '물'이 필요하다 외친다. 병원 한구석에서 물구나무 선 그녀는 생명의 원천, 자궁으로의 진입로인 자신의 질구 (膣口)를 하늘로 열어 물을 받아들이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지구 반대편, 비인간적 살상이 지속되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고통을 보면서 사람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인간은 정말 선한구석이 있는가에 관한 회의에 빠지곤 했다. 바쁘게 팩트 정리하고 보고서나 논문을 기계적으로 써내려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 그리고 세기말적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스스로 식물이 되어가고픈 영혜의 욕구는 무척 생소했지만, 동물성에 대한 공포로부터 탈출하고싶어하는 그녀의 몸부림은 또 무척 익숙했다.
오후 잉여 독서는 정유정의 '종의기원' 인데... 이것도 심상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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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페북 포스팅을 아는 후배가 내게 보내주었다.
"형. 이 분 아세요? 배울게 많은 분이라 이 분 글 팔로우 하고 있는데 오늘 형 이야기를 올리셔서요. 그런데 아무리봐도 형의 글이 이렇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생각하실까요?"
일면식도 없는 분이다. 후배가 훌륭한 분이라며 러시아 전문가시라 알려주는데 나는 모르는 분이지만 내 글은 꾸준히 읽고 계셨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이스라엘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다가 갑자기 이번달 컬럼에서 현실주의 입장으로 전환한 것을 궁금해하는 글을 올리셨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선일보에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며 희한함과 동시에 아마 반색하는 입장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공무원이다보니 내 태도 변화가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한 것 아닌가하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일단 적어도 작년 10월 7일 이후 내 글은 바뀐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했다. 사실 독자가 필자의 뜻을 다르게 이해했을 때는 글쓴이의 책임이 더 크다. 표현이나 문장에 모호함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렇기에 내 글이 애매했다는 뜻이고, 그걸 챙겨놓아야 다음부터는 나도 선명하게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달 싣는 컬럼과 이 사안과 관련된 페북 포스팅을 쭉 찾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네타냐후 정부에 대한 내 생각과 평가는 바뀐게 없는데...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읽으셨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마 내 배경이나, 종교, 중국, 러시아에 대한 인식 등이 복합된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포스팅을 읽으셨다면 내가 기독교인이고, 소위 8학군 비슷한 곳에서 자랐고, 외교부 공무원이고, 권위주의를 극혐하는 글 때문에 그런 이미지를 갖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간혹 올리는 이스라엘의 장점 (어제 올린 워크숍 사례 같은) 에피소드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나는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보다는 심정적으로 아랍에 더 공감하고 있다.
아무리 '내 생각은 그게 아니라 하여도, 아니야 너는 그래'라고 평가한다면 도리가 없긴 하다.
다만 바뀐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이스라엘은 종교가 나라의 골간임에도 유발 하라리 같은 무신론 성소수자가 아무런 제약없이 말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다. 내가 싫어하는 이스라엘은 배타적이고, 무도하며 무엇보다 피해자 서사로 나라 세워놓고 가해자로 자리바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아랍을 지지하는 좌파라는 비난도 여러차례 받았었다.
덧붙이면 나는 이스라엘 편이고, 아랍 편이며, 이란 편이다. 친미이고 친중이다. 다만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하마스의 아랍을 싫어하며, 혁명수비대의 이란을 싫어한다. 네오콘과 트럼프의 미국을 싫어하고, 시진핑의 중국을 싫어한다. 써놓고 보니 반이스라엘, 반아랍, 반이란, 반미, 반중일 수도 있겠다. 요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너는 친미지? 반미지? 친중이지? 반중이지? 하며 '전형'으로 묶어버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근데... 내가 뭐라고. 미관말직 내 의견이 무슨 우리나라의 정책방향 변화와 연관된다고 보는 건, 오해다. 잘못 짚으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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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min Kim
착각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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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Youngmin Kim 요새 이래저래 좀 피곤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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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min Kim
Nam-sik In 요즘 사람들 오해하고 가정한 뒤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요.떠나세요. 광야로! 의외로 좋습디다. 내 경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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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Youngmin Kim 광야로 가기전에 일단 뉴욕주 나가시마(長島)로 찾아뵙고 비급을 전수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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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Kim
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의 바탕이 악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선호한다'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걸까요?
그 바탕에서 당연히 평화를 깨뜨리는 쪽이 밉고, 또 그 분쟁상황을 가능한 연장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쪽은 더 미운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북한을 욕하는 이유는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일부가 현 정권을 더 비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적나라하게 북한의 위협을 더 증폭시키고 더 깊은 골을 눈앞에서 만드는 일련의 행위 때문, 그 외의 다른 분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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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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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 Joo Park
자신은 복잡하고 남은 간단한거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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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 Joo Park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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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 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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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네요. 저는 교수님이 너무 반네탄야후적이어서 약간 반이스라엘에 가깝다고 느꼈어요.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느끼니, 교수님이 ‘이스라엘 편이고, 아랍 편이며, 이란 편’인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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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컬럼에서는 이스라엘이 브레이크 없이 공세를 확대하며 승리를 확신하고 있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결국 지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꼭 1년이 되었다. 작년 오늘 하마스의 공격을 당해 1200명 넘는 국민이 죽고 250여명이 인질로 잡혀갔을 때, 이스라엘은 뉴스를 보면서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숱한 전쟁을 치러왔지만 건국 이래 평시에 민간인이 반나절만에 이렇게 피살된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스라엘은 1973년 욤키푸르 전쟁당시의 트라우마를 바로 떠올렸다. 아랍 연합군의 기습으로 거의 패전할뻔했던 순간이 뼈아프게 되살아난 것이다. 기습을 허용한 네타냐후 연정의 책임이 컸다. 작년 상반기 내내 사법제도 개편 논란으로 나라가 들끓었던 터다. 건국 이래 권력 견제의 틀로 작동해왔던 사법부의 ‘합리성 원칙’ 등으로 연정에 참여한 극우 각료 보임이 어려워지자, 아예 사법부 작동 시스템을 바꾸려했기 때문이었다.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리쿠드 내에서도 반발이 나왔고, 국방장관도 사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국방과 정보 등 안보 영역에 허점이 발생했고 기습을 허용했다.
네타냐후의 책임을 준엄하게 물어야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하마스 궤멸을 선언한 보복전이 전개되는 동안만큼은 국민들은 네타냐후의 책임 규명을 유보했다. 하마스의 공격은 잔인무도했고 응징하는 것이 맞다. 이스라엘 대응은 정당했다. 그러나 이후... 과도하게 나가며 정당성을 잃기 시작했다.
이후 네타냐후 극우 연정은 모든 역량을 동원, 전쟁을 확전시켜왔다. 가자는 초토화되었고, 미국의 반대에도 라파에 지상군을 진주시켰다. 이란과 본토 대 본토로 미사일을 주고받았다. 전과는 혁혁했다. 테헤란 혁명수비대 보안시설에서 하마스의 지도자를, 레바논 삼엄한 벙커에서 헤즈볼라의 리더들을 차례로 제거해왔다. 압권은 삐삐 폭발을 통해 헤즈볼라 C4I를 거의 완전히 궤멸시킨 것이었다. 이제 레바논 남부에 지상군을 투입했다. 예멘 후티반군의 거점 호데이다 항에 대한 폭격도 시작되었다. 기호지세다. 차제에 이란 프록시들을 완전히 궤멸시켜 판을 바꾸려 한다. 네타냐후는 반전에 성공했다. 국민들은 작년 피습은 책임져야 하지만 총리가 이 정도 했으면 만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주변이 다 독재에 신정주의니 네타냐후 정도 되는 리더가 이스라엘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데까지 왔다.
사람들은 1967년 6일 전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 때 우리가 동예루살렘, 서안지구,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골란고원을 순식간에 다 점령하고 우리 땅으로 만들었잖아’하는 승리의 기억으로 작년 피습의 트라우마를 대체시킨 것이다. 전선에서는 격렬하게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치고 나가면서도 리더는 이 전쟁을 통해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를 면밀히 계산해야 한다. 전쟁이후 이스라엘이 더 안전해지는가를 고민해야한다. 이스라엘은 단기적으로는 작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강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변의 적들을 물리적으로 상당부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도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지는 게임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길을 가고 있다.
첫째, 미래의 적을 양산하고 있다. 너무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 하마스 카셈 여단 대변인은 하마스 무장대원의 85%가 이스라엘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출신이라고 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지만 인티파다가 한번 있을 때마다,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테러와 분노의 고리가 선명해진 것은 이미 경험하고 있다. 하마스의 인간방패 등으로 인해 작전상 부수피해를 피할 수 없다지만, 4만명 넘는 가자 주민의 죽음은 납득하기 어렵다. 레바논에서 3주만에 1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역시 미래 이스라엘 북부접경지대의 위협요인으로 고스란히 남을 것이다.
둘째, 국민들을 잃고 있다. 일단 인질 문제에 속수무책이다. 지금 정도의 공세면 인질을 포기한 것아니냐는 논란까지 감수할 태세다. 또 하나는 인재 유출이다. 본문에 다루었지만 연구개발과 의료 부문에서 일하는 이들의 유출문제가 심각하다.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보다 인재유출로 인해 국가의 동력을 잃어 망할 수도 있다는 노벨상 수상자의 일갈이 눈길을 끈다.
셋째, 친구를 잃고 있다. 유엔은 물론 대부분의 외교무대에서 이미 고립되고 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놓고 유엔과 척지고 있다. 최근 유엔사무총장을 기피인물로 입국 금지조치 시켰다. 정전감시 임무를 맡고 있는 유엔평화유지군 UNIFIL 병력 철군도 요청했다는 사실이 오늘 FT 기사를 통해 나왔다. 레바논 공격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련의 행보가 이란을 싫어하는 걸프국가들 지도자들에겐 내심 이스라엘의 입장에 반색할 법하지만, 그 나라 대중들의 심사를 살펴야 하는 사우디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미국, 특히 민주당 성향 미국인들과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피로감을 갖기 시작한 점이 주목된다. 10년후 이들 세대가 주역이 되면 지금까지의 미-이스라엘 관계와는 사뭇다른 양자관계가 형성될것이다. 이 시선을 이전으로 복구 시키려면 그동안 공을 들여왔던 대미 공공외교의 품을 훨씬 더 많이 들여야 한다.
단기전에서 이기고 장기전에서 지는 게임은 20년전 미국 이라크전에서 경험한 터다.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의 승전기록보다, 이라크전을 곱씹어보아야 한다. 외교의 시간으로 전환, 적을 줄이고 국민을 모으고 친구를 늘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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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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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단기적 성과는 네타냐후의 몫이고, 장기적 손실은 국가와 국민의 몫이니 네타냐후는 전쟁을 계속 끌어갈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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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승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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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ju Yoon
전투는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상황.
많은 사람들은 전투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 히틀러가 왜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고 있는 이 상황을 네타냐후만 모르는 ....
죽음에 대한 죽음의 복수는 또 다른 나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의 죽음을 부른다는 것을....
예수가 말한 원수에 대한 사랑...
오늘에 죽음을 본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이 10년뒤, 20년 뒤 이스라엘에 어떤 자세로 나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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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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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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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 이란이 이스라엘로 미사일을 쏘았다. 200발 정도로 보도되고 있다. 4월 1일 시리아 이란 대사관 영사부 폭격에 대한 보복이었던 4월 14일 미사일 공격에 이어 두번째다. 그 때와 좀 달라보이긴 하는데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이스라엘의 게임은 두가지 층위로 전개되고 있다. 헤즈볼라 및 레바논을 타격, 남부 리타니강 이남 블루존 지역에 아예 헤즈볼라가 다시는 똬리를 틀지 못하게 그 지역 거점들을 갈아엎어버리는 전술적 목표가 한 층위다. 여기를 정리해야 이스라엘 북부에서 헤즈볼라 공격으로 작년 10월8일부터 소개되었던 6만명의 북부 주민들이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피난 비용을 재정으로 부담하고 있다. 6만명의 의식주를 1년동안 나라에서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위기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지상군의 레바논 진입은 아마 그 목표를 들고 간 것 아닐까 싶다. 물론 더 치고 올라가 베이루트와 베카벨리 등으로 산개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고. 
두번째 층위는 전략적 측면이다. 이란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우위에 섰다. 이란발 최대 위협요인 헤즈볼라를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장기판으로 비유하면 이스라엘은 자기 궁 바로 앞까지 치고들어와 기동력있게 교란하며 위협하는 이란의 車를 둘 다 떨궈낸 셈이다. 이제 이란은 멀리서 원거리 包와 象으로만 싸워야 하는 형국이다. 헤즈볼라가 리더십을 다시 세우고, 무너진 C4I를 비롯 전투역량을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 이스라엘은 아예 더 치고 올라가면서 이란을 자극하고 있다. 
이란의 분노는 임계점에 이미 다다랐다. 지난번 대사관 공격, 하니예 폭살, 최고지도자의 32년 지음 나스랄라 폭살 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일련의 공세에 대응하지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왔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몇년전 솔레이마니 폭살때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동지이자 친우인 나스랄라를 잃고 지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거다. 작년말엔 후계자로 염두에 두던 라이시도 죽고, 이스라엘과 맞서던 하니예도 죽었다. 그것도 테헤란에서. 이정도면 내가 죽든말든 결사적으로 보복하겠다고 나설법한데... 문제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원하는 바라는 점이 곤혹스럽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전략목표는 이란이 교전 당사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과 이란의 대결 구도를 만드는 것에 수렴한다. 이렇게 되면 향후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국은 당분간 이란과의 핵합의나 제재 해제 등의 유화 정책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란이 정상국가 코스프레 하고 다니던 2015년 7월 상황을 어떻게해서든 막는게 중요하니까. 이스라엘의 눈에는 이란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떠한 국제사회와 핵합의도 사기로 보인다. 이란 자체의 속내가 이스라엘 소멸에 있음을 알기에 외교적 정상행위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는게 관건이다. 
이러한 속내는 이란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사우디와 UAE, 이집트 리더십의 생각도 마찬가질거다. 다만 자국민들의 반이스라엘 정서 때문에 겉으로는 팔레스타인 연대를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스라엘 잘한다 잘한다' 생각하지 않을까싶다. 네타냐후는 그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난 유엔 총회연설에서 '축복'의 진영 (이스라엘-사우디-이집트-UAE-인도)과 '저주'의 진영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예멘)으로 나누어 자신이 '축복'진영에서 이란 및 그의 프록시들과 맞서싸우는 모습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란이 이 게임에서 이기는 선택지는 명확하다. 이스라엘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逆으로 가면 된다. 즉, 이스라엘의 도발과 공격을 도덕적인 틀에서 비판하면서 외교무대에서 승부를 걸고 군사적 대응을 자제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지난번 페제시키안 대통령의 유엔연설은 합리적 기조에 부합한다. 이스라엘을 무도한 폭력 국가 이미지로 만들고, 이란은 오히려 인내하며 대화를 추구하는 나라로 대비시키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 이란의 선택지여야 맞는다. 물론 이란의 행적을 보면 결코 평화애호국가는 아니기에 어차피 수사학 싸움이지만, 중동 어느나라든 다 비슷하니까. 
이 행보를 계속하면서 미국과 유럽에 외교적 타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인을 보내는 게 이스라엘을 당황케 하는 포석이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문제는 민간인 피해를 강조하고, 레바논 헤즈볼라 문제는 이스라엘의 자위권 차원이라 해도 주권국가 국경을 월경, 지상군이 주둔하면서 침략행위를 벌이고 있다는 도덕적 비판에 날을 세우는 것이 핵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선전전을 통해 헤즈볼라의 이중성 (무장폭력테러집단  + 레바논의 제도권 정파이자 실질적 통치세력) 중 전자를 뒤로하고, 후자를 강조하면서 헤즈볼라가 제공하는 의료, 복지, 빈민지원, 및 교육 서비스 등의 그림을 계속 내세우는게 더 나은 옵션이다.  이 게임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 편을 들어 싸우는 미국의 해리스 진영은 만일 당선될 경우, 이란의 전략적 인내를 일정부분 평가하면서 부정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을테니 (반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는 비우호적이 될 가능성이 있고)  
너무 이상적인 상상이긴 하다. 내가 말해놓고 봐도 별 가능성이 없다.  일단 이란 내부의 강경파들이 지금 펄펄 뛰면서 대통령실의 무능을 비판하고 있을 법하다. 그러나 거듭 이야기하자면 일단 신중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란이 이기는 포석이다. 어떻든 지금 이란 최고의 전략 자산인 헤즈볼라가 무력화된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딱히 이스라엘에 보복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미사일의 경우 중간 이라크나 요르단에 주둔하는 미군이 1차로 요격하고, 이스라엘 본토내 방공시스템도 지금 최고수준의 대응태세로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전쟁이 확전되면 가장 함박웃음을 띨 사람은 바로 이란의 원수 네타냐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외교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국면을 최대한 늦추는 게 이 게임에서 이길 확률을 높인다. 이란은 하루라도 빨리 외교의 시간을 잡아채 이스라엘의 게임 구도를 반전시키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이란의 내공이 어느 정도일지 앞으로 며칠동안의 대응에 달려있다. 여기서 이란 개혁파의 전략적 인내가 무너져 군사적 대응 수위를 높이고 준전면전 비슷하게 가면, 이란의 다음 수순은 정해져있다.  빠른 속도로 핵능력 고도화에 올인하고 러시아와 전쟁 연대는 물론 반미, 반서구의 이념화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우려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기에 이스라엘을 뜯어말리면서 이란도 우회해서 설득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며 좌절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중에 판을 복기할 때,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식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 모사드의 공작능력에 대한 찬탄과,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외교행보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보수 연정이 지금은 이걸 별것 아닌 걸로 여기고, 곧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제 미국의 젠지들 심리는 다르다. 마치 아랍 젊은 리더십이 팔레스타인을 더 이상 형제로 여기지 않듯, 이대로라면 미국의 젊은이들도 앞으로는 이스라엘을 더이상 우방으로 여기지 않을 시점이 도래할 지 모른다. 그걸 간과하면... 안된다. 네타냐후도 승리를 선언하고 빨리 협상을 통한 외교의 국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 하마스에게 잡혀있는 101명 (생존확인 66명) 인질 구출이 시급하다. 협상을 하면 정치적으로는 위기의 구름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일테지만 그래야 이스라엘이 살고, 그래야 네타냐후도 산다.
=====
세시간전 이란 외무장관 X 게시 업데이트. 
일단 이란이 방향을 잘 잡은 듯.  
Earlier this evening, we exercised self-defense under Article 51 of the UN Charter, targeting solely military & security sites in charge of genocide in #Gaza and #Lebanon.
We did so after exercising tremendous restraint for almost two months, to give space for a ceasefire in Gaza.  
Our action is concluded unless Israeli regime decides to invite further retaliation. In that scenario, our response will be stronger and more powerful.
Israel's enablers now have a heightened responsibility to rein in the warmongers in Tel Aviv instead of getting involved in their folly.
이한석
반이스라엘 여론이 강한 서방 Z세대가 사회 지도층이 되기 전에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으려고 빨리 움직이는 면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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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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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외받고 사양해 온 학회 만찬 강연이 있다. 요즘 바쁘기도 하거니와 밤 늦은 시간 이동하는게 귀찮아 정중히 양해를 구했는데 재고를 요청하며 다시 연락이 왔다. 마침 회사 근처 도보 5분거리 컨퍼런스 빌딩에서 열린단다. 6시반부터이니 퇴근길에 들러 강연하고 가면 되겠다 싶어 수락한게 두어달 전쯤이었고.... 그게 오늘.
저녁 5시반. 주섬주섬 타이 매고 수트 챙겨입고 집 나와 출근 중. ㅠㅠ
다이나믹_불가측_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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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h Rynn

집에 있었으면 뭔가 진도개 3호 정도 발효상황이었을 것을 피했다고 생각해 보삼. 성에 안차면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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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Roh Rynn 갑자기 행복해졌어. 네 말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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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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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의 판도
1. 전략적 인내로 버티며 거중조정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려는 이란과.
2. 이라크, 아프간에서의 뼈아픈 경험 결과, 중동 전장 개입대신 역외 균형자 레버리지를 유지하려는 미국을.
3. 싸움 붙여 미-이란간의 실질적 분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네타냐후의 계속되는 provocation으로 보고 있음.
한마디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전선을 넓혀, 이를 디딤돌로 '이스라엘-이란' 전쟁으로 다시 확장시키고, 종국에는 '미-이란 전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네타냐후의 게임으로 읽는다. 그렇게만 되면 네타냐후의 모든 이전 과오는 증발될 수 있다. 다만 네타냐후의 이 게임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이란이 전략적 인내 포지션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데... 하산 나스랄라까지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지 주목된다. 하니예의 죽음에도 별다른 보복이 없었는데 이번 나스랄라 죽음에도 별 움직임이 없다면 이란은 소위 프록시들의 대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세게 치고 나가 테헤란에서 또 한번 일을 벌일 수 있어야 명색이 저항의 축 중심국으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란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이스라엘의 정보력과 공작능력 및 화력에 대한 우려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개입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이란판 전략적 인내다.
미국, 특히 백악관 입장에서는 네타냐후가 원망스러워 죽을지경일 듯. 지난 3년반 중동정책에 성과가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젠 성과는 커녕 전쟁을 막지도 못하고, 심지어 미국의 최근거리 우방인 이스라엘이 말을 들어먹지도 않는 모습을 만방에 알리고 있는 판이다. 어떻게든 가자 휴전 협상을 중재하고, 선거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란과 그 프록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상상의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심화되다보니 저으기 당황하는 것 같다. 나스랄라 공격 때는 미국에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 판을 이란과 미국이 못읽을 리는 만무하고, 따라서 네타냐후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잘 아면서도... 상황변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긴장국면으로 떠내려 갈 수도 있어서 문제다. 그 첫 상황전개의 착점은 이란의 대규모 보복 참여 여부다. 현 상황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C4I가 파괴된 상황이기에 프록시를 동원하는 기존의 대응은 별 임팩트가 없다. 그렇기에 이란이 직접 군사행동을 하면, 그래서 이스라엘 안보에 변수가 생기면 미국도 그에 맞춰 대응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란이 계속 전략적으로 인내하며 국익을 빌드업해나갈지, 아니면 보수진영의 일갈에 못이겨 결국 무력 대응을 시작할 지에 달려있다. 그 점에서 오늘 최고지도자의 발언은 묘했다. 싸움의 주체는 헤즈볼라고, (이란포함) 모든 무슬림들은 시온주의와 싸우는 의무가 있기에 헤즈볼라를 지원하겠노라 밝혔는데 어떻게 보면 이란이 최전선에 나서기를 저어하면서 즉각적 확전을 애매하게 피해가는 뉘앙스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란이 반응하고 공세수위를 높이면, 아무리 미국이 개입을 마뜩찮아 한다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게 네타냐후가 학수고대하는 그림이다. 이란이 알고도 그 길로 갈 것인지, 안가고 또 버틸 때 이스라엘은 테헤란의 심장부를 노려 심지어 최고지도자나 측근까지 타겟으로 삼을지가 앞으로 지켜봐야 할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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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전쟁?의 뒷배 양키를 솎아내지 않는한 지구에 전쟁이 끊이 질 않을겝니다. (하기사, 다음을 이어 올 것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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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하산 나스랄라의 행적을 짚고 있다. 글로 정리하다보니 머리가 아플 정도다. 이스마엘 하니예에 이어 푸아드 슈크르, 이브라힘 아킬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를 사살했다. 적장을 하나씩 없애고 있다. 야히야 신와르만 잡으면 네타냐후는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지도자의 의무다. 하나하나 따지면 논쟁점이 많지만 어떻든 전쟁 중 적장을 치는 것을 탓하긴 어렵다. 국외자 입장에서 차갑게 보려 한다.
그러나 이들 적장이 아닌 너무 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에 이스라엘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자주민 사망자 4만천명도 너무 많거니와, 레바논 호출기 폭발로 무장대원 아닌 이들도 너무 많이 죽고 다쳤다. 자국 인질들 귀환 문제도 논란이많다. 인질의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소위 한니발 지침을 의심케하는 행보를 보이며 생환보다는 시신으로 돌아온 인질들이 더 많다.
네타냐후는 일단 기사회생했다. 바닥에 떨어졌던 그와 그의 극우 내각 지지율도 상승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로서는 가장 큰 책임질 일 - 기습 허용-을 저지르고 정치적 생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강공으로 버텼다. 점점 보수화되는 이스라엘 국민 여론을 잡아채고 있다.
"그래. 네타냐후가 좀 잘못했고, 주변인물들이 다 또라이 같긴하지만... 아무리봐도 그 이만큼 경험있는 지도자가 또 있을까? 이 난리판에 저렇게 열일하는 네타냐후 밖에 없는 거 아냐?"라는 마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마음은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네타냐후와 그의 내각, 그리고 리쿠드가 자기 진영의 승리 트로피를 들고 환호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국가 이스라엘에게는 해를 끼치고 있다. 보수화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귀환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극우 보수파들의 나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들을 이스라엘 현지 친구들이 툭툭 던지듯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안보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향후 인구문제도 흔들린다고 한다.
건국 이래 그간 온갖 비판과 욕먹을만한 일을 하고도, 그래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했던 최소한의 virtue들이 하나씩 날아가고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갖고 있던 도덕적 지위도 약해지고 있다. 과연 resilience 가 작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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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철

이판에...소위 '적폐'를 끝장 내주길 바라는 미국의 마음을, 이스라가 행동으로 대신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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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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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나라에서 지진이 났을때 옆 나라 겸임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우리 외교관들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구호활동과, 우리 파견 소방방재청 인력들을 지원한 적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도 당시 모 언론사의 오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관들이 일은 안하고 편한 콘테이너 막사에서 에어컨 틀고 지낸다는 보도였다. 영상에는 콘테이너 밖에서 땀에 쩔어 노숙하듯 지쳐 쉬고 있는 우리 소방대원들 모습이 찍혔다. 그 날 난리가 났다.
외교부 당직실 전화기는 불이나듯 울렸다고 했다. 그 따위로 외교관 생활하지 말라는 욕이자 항의였을 것이다. 다행히 바로 다음날 오보로 밝혀졌다. 당시 현장에서 지원 업무를 진두지휘하던 외교관의 소회를 기억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오해받는 억울함보다 반성이 담긴 소회였다. '사실이 아닌 이런 보도로 인해 속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신 국민들께서 '아냐 우리 외교관들이 그럴리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바로 우리를 비난 하실 때에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그동안 믿을만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기에 국민들께서 우리를 신뢰하시지 못하는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는 논지였다. 최선을 다해 재해현장에서 일했던 이가 억울함보다는 성찰을 담은 소회를 나눌 때 그 글을 읽으면서 숙연해졌던 기억이 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개신교에 대한 실망이 넘치는 시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론 분노를 대화 중 들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깊은 송구함과 자괴감이 들곤 한다. 보통은 나는 주류와 다르다고 항변하며 한국 개신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알리바이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죄송하다. '내 삶이 그리스도인을 대표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분에게, 내가 달리 보였으면 개신교에 대한 미움은 덜했을 터였다. 오히려 그와 가깝고 친한 내가 말씀안에서 제대로 그림같이 살았다면 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살지 못한 죄송함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주께 죄송했고 내가 속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마음 상하는 이들께 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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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춘

반성을
겸손하고 성실히 사는 사람만해서 문제이지요...




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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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고 믿음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정체성이 바뀌었다. 정주민에서 유목민으로. 처음엔 이 땅이 전부인줄 알았다. 부르신 곳에 터 잡아 더 깊이 뿌리내리고 그 기초를 딛고 높이 쌓아나가야 구주가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자침을 맞추는 나침반 하나 들고 이 땅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유목민이었다. 때론 부평초처럼 떠돌기도 하고,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잃곤 하지만 이내 다시 하늘의 극점으로 자침을 맞추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었다. 부르심은 곧 보내심이었다. 동시적이었고, 같은 의미였다.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은 두 개 이상의 우물을 오가며 산다. 그 우물, 오아시스가 고갈되면 다른 우물을 판다. 그리스도인이 유목민이라면 강변과 해안 또는 무한천변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광야에서 하늘에 이끌려살며 샘을 파는 사람들이다.
때론 한 샘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유목민이라고 염세적이거나 세상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하루를 버텨내고, 매일 하늘을 우러른다. 그리고 샘에서 얻는 한 줌의 물로 감사한다. 그러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언젠가 주 예수의 날에 이르러 영원히 정주할 그 소망이 유목민, 그리스도인의 동력이다.
교회 앞 모 아파트 단지의 詩碑 하나가 화제다. 픽 웃음이 나왔고, 그런가보다 했다. 단지 주민들이 원해서 세운 거고, 그대로 살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물론 1도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않지만 그 곳과 상관없는 내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아파트 아닌 다른 것에 비슷한 뿌리를 내리고, 움켜쥐고 인생을 걸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많은 내 안의 다른 시비들이 존재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제국 심장부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을 요셉도 그 곳에 뿌리내리고 매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입관만 했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후손들이 돌아가는 날, 그 후손들이 자기의 뼈를 매고 열조의 땅으로 가주길 원했다. 그는 유목민이었다. 형들이 던져 넣은 구덩이부터, 보디발의 집을 거쳐, 옥중에서도 하늘에 시선을 두었더랬다. 제국의 총리가 되어서도, 죽어서도 그 곳에 뿌리내리지 않았다. 나침반을 들고 산 사람이었다.
닭장같은 거주공간을 상찬하며 천년만년 거주할 궁전이라 비유하는 낯뜨거운 비석대신, 거친돌 하나 세워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증언하는 도움의 돌, 에벤에셀의 고백이면 족하다.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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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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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마지막장 50장에는 두 개의 장례식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야곱,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요셉의 장례다.
전반부에 나오는 야곱의 장례는 그야말로 성대했다. 이집트 제국의 총리대신인 아들 요셉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범죄 혐의로 옥살이까지 한 이민자 출신의 총리였지만 그는 이집트 국민을 7년 대기근으로부터 구한 사람이다. 70일동안 이집트 국민은 요셉 총리의 아버지를 위해 곡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를 위해 파라오에게 부탁한다. 아버지를 고향 가나안 땅에 장사지내려 하니 보내달라고. 파라오는 자신의 신하들과 궁의 원로들 그리고 병거와 기병까지 보내 추도하게 한다.
아마 가나안 백성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제국 이집트의 심장부에서 이 많은 고관대작들이 몰려와 일주일동안 애통하는 모습은 생소했을 것이다.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아버지 야곱은 조상 아브라함이 히타이트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밭 굴에 '묻혔다'. "They carried him to the land of Canaan and buried him in the cave in the field of Machpelah, which Abraham had bought as a burial place from Ephron the Hittite"
반면 정작 후반부에 나오는 요셉의 장례는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요셉이 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아버지 야곱은 조상의 묘실에 '묻혔지만' 아들 요셉은 '입관된' 기사로 끝난다. 이 장면과 함께 창세기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출애굽기가 시작된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죽기 직전 요셉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한다. 지금은 너희들이 여기서 나름 평안하게 살고 있지만 이 땅은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다. 언젠가 너희들도 내 아버지 야곱, 내 할아버지 이삭, 내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가나안으로 갈 것이다. 그 때 내 뼈도 추려 함께 그 곳에 데려가다오... 라고.
대제국 이집트의 명망가 요셉은 아마 제국의 장례법도에 따라 안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기자는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요셉의 유언을 디아스포라에 전한다.
이 땅이 지중해 연안의 최대 강국이고 문명의 거점이지만... 그리고 요셉은 이곳에서 파라오 버금의 권세를 누렸고 온 이집트 백성의 존중을 받았지만 정작 그 요셉은 늘 아버지 묻힌 곳을 기억하고 그리워했노라 암시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말한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지금은 찬란한 문명의 제국에서 안온하고 걱정없이 살지만... 우리의 돌아갈 곳은 유장한 나일강변이나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변이 아니라 늘 샘을 찾아 살아야하는 광야 근처 헤브론이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이 말을 남긴다. 보이는 애굽이 전부가 아니다. 언젠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늘 그 곳을 기억하라. 여기서 성과 탑을 쌓으려 하지 말아라.
그 기억을 계대하기 위해 그의 시신은 아버지와 함께 막벨라굴로 가지 않았고, 죽음 이후에도 유골로 이집트 땅에 백성들과 함께 남아, 언젠가 출애굽의 때가 이를 때 백성들에게 본향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소년 시절 형들의 모략에 의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본향이 그리웠을 그는 뼈를 남기면서까지 자손들에게 신의 섭리를 기억시켰다.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not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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